밭에 묻힌 보물/책에서 옮긴 글

내가 만난 하나님 - 김승옥

김레지나 2008. 8. 28. 21:16

김승옥

내가 만난 하나님


 무신론자였던 내가 하나님을 믿게 된 것은 오직 하나님의 직접적인 은혜 때문이다. 인간이 하나님을 찾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다가오시며 구원해 주신다는 사실을 증언하지 않을 수 없어서 이 글을 쓴다.

너무나 뜻밖으로 크나큰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초기의 몇 가지 이야기를 이 글에 쓰고자 한다.

1981년 4월 26일 새벽, 하나님께서 내 영안을 여시고 그분의 하얀 손으로 내 명치를 어루만져 주시며, “누구냐?”고 묻는 내 질문에 분명히 한국말로 “하느님이다.”고 대답하시는 체험을 했다.

그 해 12월 어느 날 이른 아침, 아침기도 준비를 하고 있는데 내 영혼이 육체를 떠나 새카만 상태 즉 하늘(영혼세계)속을 매우 빠르게 날아가는 경험을 하였다.

 1982년 11월 하순 어느 날 오후, 하나님의 음성으로 “그리스도의 명령이다. 인도에 가서 전도하라!” 고 나에게 말씀하셨다.

 1983년 10월 어느 날 오전. 쉐라톤 워커힐호텔 일실에서 부활하여 살아 계신 예수님의 전신이 내 옆에 발현하셨다.

 기런 여러 가지 체험을 하게 되기까지 그리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알게 된 이후 깨닫고 변화된 내 사고방식에 대하여 얘기하는 것이 내 간증이 되겠다.

 


  내 체험이 다소 특이하기 때문에 듣는 분들 중에서 특히 믿음 없는 분들은 ‘소설가니까 아마 소설을 쓰고 있나 봐!“ 그런 말을 할 정도여서 간증하기가 항상 어렵게 느껴진다. 정신이상자 취급을 받으면서 간증한다는 건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사도행전에서 바울이 다메섹 가던 길에 나타나신 예수님을 만난 체험을 얘기하니까 베스도 총독이,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한다!“ 하던 그런 성경 말씀이 없었더라면 아마 나는 하나님 만난 체험을 나 혼자 간직하고 말았을 것이다. ’바울이 미친 놈 취급을 받으면서 간증하고 다녔다면 나도 미친놈 소리 좀 듣지 뭘.‘ 이렇게 용기를 짜내어 여기저기에서 간증을 하곤 했다. 그러나 어느 기독교 방송국에서 간증하고 나올 때 담당목사가 슬그머니 ”하나님은 인간이 볼 수 없다고 되어 있는데...“하며 몹시 의심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일 때는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하는 말씀 때문인지 하나님을 볼 수 없는 존재라고 설교하는 목사님을 이따금 보곤 한다. 하나님을 오직 마음으로만 믿는다는 뜻으로 ‘믿음’의 뜻을 한정시키는 것 같다. 나는 방송국 사회자에게 슬그머니 ”목사님께 마태복음 5장 8절을 보시라고 말씀해 주시겠어요?“ 말하고 나자마자 금방 후회가 되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하는 예수님의 유명한 산상수훈 중 한 말씀인데 마치 내가 마음이 청결한 자여서 하나님께서 당신 모습을 나에게 보여주신 것처럼 자랑하는 꼴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인간이 하나님을 볼 수도 있다는 성경 말씀이 있지 않은가!” 하고 성경의 가르침을 환기시켜 드리겠다는 뜻인데, 이거 참 주제넘게 건방진 소리를 하고 말았다고 몹시 후회되는 것이었다. 오히려 큰 죄인이기에 하나님께서 직접 나서신 것인데 말이다. 바울도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아 죽이려 가던 크나큰 죄인이기에 그 미친놈 같은 열성적인 마음을 옳은 방향으로 돌려 사용하기 위해서 예수님이 직접 나타나신 것이라고 봐야 하듯이 나 역시 스스로는 구원받기 어려운 크나큰 죄인이기에 하나님께서 직접 나타나신 것일 텐데 말이다.


하기야 입장을 바꿔놓고 보면 하나님을 만났다는 얘기가 이상할 수 밖에 없다. 내가 무신론자이던 시절에 하나님 도움으로 병이 나았다는 얘기를 들으면, ‘종교 팔아서 돈 버는 사기꾼의 앞잡이’라고 상대를 내심 경멸하며 ‘종교란 윤리적인 생활을 하자는 사회적 운동이죠’ 점잖게 떠밀어 버리던 생각이 떠오르지 않을 수 없다. ‘하나님, 인간의 일은 인간끼리 할 테니 하나님은 가만히 좀 계십시오.’하던 프랑스 어느 시인의 시 한 줄을 좋아했던 아에게 “나 하나님 만났어”하고 말한다면 나 역시도 ‘미친 놈, 술 좋아하더니 결국 돌았군.’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내 간증을 듣는 사람들의 온갖 착잡한 표정에 대하여 나는 그저 ‘저 사람 표정이야 당연하지 뭘! 그저 제발 날 미친 놈 취급만 하지 말아다오.’그런 생각으로 버틸 뿐이다.

 그러나 각기 나름대로 하나님을 체험한 믿음 깊은 분들은 간증하는 내 모습을 보면서 ‘또 하나 신입생이 늘었군!’ 하고 반가운 마음이 일어나는 모양이었다. 유유상종이야말로 하늘 세계의 영원한 법칙이다. 술 좋아하는 사람끼리 서로 반가워 끌어안고 술집으로 가듯이 믿음을 가진 이들끼리는 서로서로의 간증이 하나님께 향하나 믿음을 더욱 확고하게 해주는 효과가 있는 듯하다.

 결국 끼리끼리 모여서 살게 하는 것이 내세 하늘나라에 가서 이뤄야 할 우리의 운명이기에, 예수님께서 첫째 명령으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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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회에 열심히 다니면서도 고교 2학년이 될 때까지 나는 성경을 한 번도 완독하지 못했다. 신약 성경의 공관복음만 자주 읽었고 목사님 설교 때 지적해 준 말씀이나 읽었을 뿐이다. 명색이 크리스찬이 성경을 한 번도 완독하지 못했다는 게 내심 항상 부끄러웠다. 내년 고 3이 되면 대입 고시 준비 때문에 시간이 없어 그 두꺼운 성경을 읽을 여유가 없을 터이다. 그래서 2학년 겨울 방학이 시작되자마자 다른 일 다 제쳐두고 성경을 완독했다. 약 2주일 간 읽으니 창세기 1장 1절부터 요한계시록 마지막 아멘까지 빠짐없이 다 읽을 수 있다.

  그런데, 성경을 다 읽고 나니까 오히려 전에 없던 큰 의심에 빠져들었다.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이 자기가 만난 하나님이 들려주신 말씀을 기록하여 우리에게 전해 준 것이 성경이다. 그런데 나로서는 전 우주의 영원하신 하나님이 인간의 음성으로, 특히 이스라엘의 특정인에게 이스라엘 말씨로 얘기하셨다는 사실을 도저히 긍정하기 어려웠다. 아하, 성경은 알고 보니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책이었구나. 이스라엘의 건국 신화에 권위를 붙이기 위해서 하나님을 끌여다 붙였구나. 그렇다면 우리에게도 단군신화라는 훌륭한 건국 신화에 하나님 권위를 갖다 붙이는 건 항다반사 아닌가. 결국 성경을 믿고 교회에 다닌다는 건 이스라엘 민족의 독선적인 우월감에 우리가 철모르고 박수치고 있는 꼴밖에 아니지 않은가. 그런 의심이 깊어지는 것이었다.

  특히 하나님께서 개인에게 인간의 언어로 말을 거신다는 사실을 나는 도저히 인정할 수 없었다. 고 2쯤 되고 잡다한 독서로 과학적인 체 하던 나로서는 하나님이란 우주를 창조한 특수한 에너지로서 우리가 편의상 의인화하여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게 아닐까. 그런 식으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성경이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책이라고 규정하고 나니까 나와 기독교는 아무 관계가 없어지고, 서울에 와서 대학에 다닐 때는 딱 한 번 새문안교회에 가서 예배 한 번 보고는 아주 남이 되어 버렸다.~~


P37

  참으로 놀라운 일이었다. 그렇다면 그 손이 하나님의 손이었단 말인가? 그러니까 앞에 떴던 눈이 영적 존재이신 하나님을 보기 위한 내 영안 靈眼이었단 말이구나. 물질인 육체의 눈으로만 볼 수 있는 것이로구나. 영안은 내 맘대로 뜨는 게 아니고 하나님이 뜰 수 있게 해주셔야만 뜰 수 있는 것이구나. 인간은 육체와 영혼 두 개가 겹쳐 존재하는구나. 하느님은 내 바로 안쪽에 존재하시는구나. 육체로는 지구 위의 삶을 살고 영혼으로는 하나님과 함께 사는 그것이 인간의 삶이구나. 그 둘이 조화되지 못할 때 병이 들고 죽게 되는구나. 영원하신 우주의 하나님이 어찌 나 같은 놈을 아시고 이 아파트 골방까지 나를 찾아주셨나! 너무나 놀랍고 놀랍다. 여의도 광장에서 ‘예수님을 내 구주로 영접한다.’고 외쳤기 때문인가? 작년 광주사태 때 ‘하나님, 이럴 수가 있습니까/’고 부르짖었기 때문인가? 아내와 선배 부부가 하도 기도해댔기 때문인가? 어린 시절 교회 다닐 때부터 항상 보살펴 주시고 계셨던 것일까? 아, 하나님이 한국말을 쓰시다니! 그제야 고교생 때 성경을 완독하고 나서 이스라엘 말을 쓰시는 하나님에 대한 의심으로 성경책은 이스라엘인들의 독선적인 역사책에 불과하다고 단정하고 내가 무신론자가 돼버린 기억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하나님의 인격성, 인간의 언어로 개인에게 말을 거시는 하나님, 성경을 기록하게 하신 하나님을 의심했던 나의 과오를 정통으로 뒤집어 놓으시는 것이었다. 성경이 진실이었구나. 우주가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인간이 어떻게 시작되어 이제까지 살아왔는지 항상 간절히 알고 싶었는데, 성경의 가르침은 믿을 수 없는 미개족의 전설처럼 여기고 지내왔는데 그게 아니었구나! 수천 년 전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시던 하나님, 모세에게 말씀하시던 하나님, 다윗에게 말씀하시던 하나님이 나에게 말씀을 거시다니! 살 희망을 잃어버리고 가정 문제, 직업 문제, 국가 문제 등에 대한 염려와 근심으로 어찌할 바 모르는 나에게 살아갈 용기를 주시기 위해서 당신모습을 보여주셨구나!

   인간의 잘잘못을 모두 보고 계시는 하나님이 정말 계셨구나. 깊은 사랑을 가지고 계시는 하나님이 우주의 시작이고 마지막이라면 우리가 사랑하는 데 무엇을 주저할 것인가? 몸을 태울 만큼 사랑하고 사는 것을 왜 주저할 것인가? 사랑으로 심판하는 분이 계시다면 이젠 정말 두려울 게 없다. 혼란이 빠질 이유가 전혀 없다. 내 눈에서는 갑자기 눈물이 펑펑 쏟아지기 시작했다. 이 고마움을 어떻게 표현하란 말인가. 창 밖에 날이 환히 새고 있었다.


  그날 밤, 마치 배탈 난 손자의 배를 쓸어주고 있는 할아버지처럼 내 명치를 천천히 쓸어 주시고 계시는 하나님의 손을 나는 도둑인 줄 알고 내 오른손으로 덮치며 “누구야?” 낮게 외치며 상반신을 일으켰을 때 내 오른쪽 머리 위 방안 허공에서 들려오던 아주 굵은 남성 음성은 “하느님이다.”는 한국어였다. 그 후로도 몇 년 동안 몇 차례 들었지만 하나님의 음성은 결코 얼버무리거나 애매모호한 발음이 결코 아니다. 간결 명료하고 뚜렷한 발음이다. 그 분명한 발음으로 ‘하느님’이라고 당신을 표현하셨다. 지금 나는 한국 개신교 교도끼리의 약속대로 ‘하나님’이라고 쓰고 있지만 이제부터는 ‘하느님’이라고 표기하는 게 옳다고 주장하고 싶다. 그럴 경우 물론 어머어머한 낭비가 따를 것이다. 출판된 그 많은 성경들을 다 버리고 새 책을 사야만 하니까 말이다. 하나님의 유일하심을 강조하기 위해서 ‘하나님’이라고 개신교는 표현하고 있다. 이 사용 기간은 불과 몇십 년밖에 되지 않는다. 그런데 왜 하나님은 ‘하느님’이라고 표현하실까? 정확한 뜻이야 알겠는가만 내 추리로는 ‘하느님’이라는 표현이 가장 오랜 세월 동안 우리 민족이 써온 일종의 표준어이기 때문이 아닐까“ 하나님은 보편성을 존중하시는 게 아닐까? 내 입장에서는, 내가 듣지 않았다면 모를까 일단 들었기 때문에 ”이제부터는 우리 ‘하느님’이라고 씁시다!“ 고 외치고 싶다. 물론 현실을 바꾸려면 엄청난 반대가 있을 것이다. 성경책 값 문제는 둘째 문제이고 첫째로는 ”김아무개라는 사람의 얘기를 믿을 수 있겠는가, 아니 하나님의 손을 보고 음성을 들었다는 그의 얘기 자체를 믿을 수 있는가. 설경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하나님은 사람마다 그 사람이 이해할 정도로 적절히 여러 가지로 당신을 표현하는 분이 아니겠는가. 나한테 오셔서는 ‘하나님’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지 않은가.“ 이런 식으로 반대하면 나는 그야말로 ‘왕따’가 돼 버린다. 그래서 이렇게 개신교 신도들의 거부감을 불러일으키지 않으려고 ‘하나님’이라고 글을 쓰고 있다. ‘ 그 사람이 알 수 있게 해주는 게 이른바 덕이니까... 그런 자위를 하면서도 한편으로 ’하나님보다도 사람을 더 두려워하는 연약함이 아닌가.‘ 그렇게 스스로를 비판해 보기도 한다. ’하느님‘이라고 쓰는 가톨릭으로 교적을 옮기면 되지 않겠는다. 이런 권고 아닌 권고를 하는 분은 없기를 바란다. 개신교에서 하느님이라고 쓰도록 , 그래서 한국어로는 오직 ’하느님‘이라는 호칭 하나가 하나님을 부르는 말이 되도록 통일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내가 할 일은 뚜렷해진다. ”개신교에서도 하느님이라고 씁시다. 무엇보다도 하느님께서 당신을 그렇게 호칭하셨습니다. 천년 전 우리 민족이 쓰던 하느님이나, 가톨릭이 쓰는 하느님이나, 우리가 쓰는 하느님이 다 같은 한 분이신 하느님이기 때문이기에 한국어 호칭은 하나로 통일되는 게 좋습니다. 남북도 통일해야 하는데 한 분이신 하나님에 관한 호칭이 한 나라에서 여러 개 있어서 되겠습니까? 호칭이 여럿인 것을 우선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것 같습니다.“ 개신교 협회 같은 데서 ’하느님‘으로 결정할 때까지는 나는 이렇게 부르짖으면서, 그러나 지금은 관습대로 ’하나님‘이라고 쓰는 것이 현실적 지혜인 것 같다고 생각하고 있다. 이 글을 읽는 분들이 하나님 호칭 바꾸기의 세력으로 결집되고 커져서 앞으로 언젠가 ’하느님‘이라는 표준어로 하나님의 호칭이 바뀌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기도원에는 여기 저기 기도굴이라는 것을 만들어 놓았다. 한두 사람이 들어가서 큰 소리로 외치며 기도해도 남에게 시끄럽지 않을 공간을 땅 속에 만들어 놓은 것이다. 나도 그 기도굴에 들어가서 하나님께 기도하기 위해서 눈을 감았다. 1960년 서울에 와서 대학 다니기 시작할 무렵부터 나는 무신론자가 되어 기도하기를 그만두었다. 20년만에 처음으로 기도를 해보는 것이다. 무슨 기도를 해야 할지 몰랐다. 다만 하나님이 우리 안쪽에 아주 가까이서 다 듣고 계신다는 사실만은 분명히 알고 있을 뿐, 나는 더듬거리며 회개기도를 하기 시작했다. 십계명에 비춰보면서 죄라고 생각되는 모든 기억들을 하나하나 입 밖에 내어 말하면서, “하나님, 제가 잘못했습니다.”, “제가 이런 죄를 지었습니다.”고 고백했다. 생각나면 한 마디 하고 또 생각나면 한 마디 하는 식으로 두 시간 정도 기도를 하고 있는데 문득 어떤 기운이 온몸을 감싸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말할 수 없이 황홀한 기쁨이 온 몸을 가득 채우는 것이었다. 마치 기쁨이라는 기체가 온몸을 가득 채우고 있는 듯했다. 그 기쁨을 그 어떠한 생리적 기쁨보다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더욱 황홀한 기쁨이었다. 그리고 세상의 모든 인간이 그토록 사랑스러울 수가 없었다. 이 기쁨, 이 인간에 대한 사랑의 느낌. 이 황홀감. 이것이 바로 성령이구나. 세상과 인간은 생명으로 가득 차게 느껴지고 참으로 힘차게 살아가고 싶은 의욕감으로 충만해지는 것이었다. 그 이후 뜻밖의 현상이 생겼다. 가령 방문객을 만나면 그 사람 마음이 다 읽혀지는 것이었다. 무슨 목적으로 나를 찾아 왔고 무슨 이야기를 할 것인지 그냥 미리 알게 되는 것이었다. 마치 내가 점쟁이가 된 것 같았다. 사람의 마음 속을 알 수 있는 이 능력, 이것이 바로 성령의 능력이고, 이것이 바로 최초의 인간이 죄를 짓고 에덴에서 쫓겨나기 이전의 상태 즉 하나님과 대화할 수 있었던 무죄상태의 영혼이구나. 이것이 바로 예수 믿으면 우리가 받게 되는 ‘죄 사람 받은 영혼’ 상태로구나. 오직 예수를 믿음으로써만 얻을 수 있는 죄사함. 마치 때가 낀 거울을 닦듯이 죄로 덮인 우리 영혼을 닦아 영혼 세계를 투명하게 볼 수 있게 해 주는 ‘죄사함’ 모든 인간을 에덴의 행복으로 회복시키기 위한 예수님의 가르침이 얼마나 중요한 가르침인지 알 수 있었다. 예수를 구주로 영접하고 자기 죄를 하나님 앞에 인정하며 사죄하는 일이 바로 성령 받는 비결이었다.


그 해 12월 어느 날 아침, 잠자리에서 일어나 막 아침기도를 시작하려는데 내 의식(영혼, 마음, 정신)이 머리통 전체를 통해서 몸 밖으로 빠르게 빠져나가는 것이었다. 마치 치약 튜브에서 치약이 빠져 나가듯이. 몸 밖을 벗어나자 새카만 어둠인데 그 어둠 속을 무슨 로켓처럼 빠른 속도로 날아가는 것이었다. 몸을 벗어버린 영혼은 오리혀 더 초롱초롱하게 맑고 또렷했다.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노릇인가. 몸을 빠져나오다니? 목적지도 모른 채 어둠 속을 날아가고 있으려니 그토록 외로울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제야 ‘아이구, 이게 하늘세계로 가는 길이구나!’ 그런 깨달음이 드는 것이었다. 세상에서 죽고 싶으면 이곳으로 오면 되지만 이곳에서는 죽지도 못하고 영원히 이 어둠 속을 날아다니고 있어야만 하는가 하는 불안감이 밀려 들었다. 아니 세상에서 지은 죄 때문에 지옥 불길 속으로 가는 건 아닐까 그런 걱정이 들면서 무서운 공포심이 밀려들기도 했다. 그런 공포심과 외로움을 느끼고 있으려니까 다음 순간 내 의식은 다시 내 몸 속으로 돌아왔다. 거의 단절이라 할 만큼 빠른 속도로 돌아온 것이다. 이 체험으로 나는 인간의 영혼과 육체가 나누어지는 현상이 바로 죽음이라는 것을 실감했다. 그리고 아버지의 죽음, 여동생의 죽음에서 절실히 느끼기 시작했던 죽음에 대한 실체적 해답을 얻은 것이었다.



그리스도의 명령이다. 인도에 가서 전도하라.

....아내가 기쁘게 협력하지 않으면 인도 전도도 쉽지 않을 것 같다. 그런데 아내는 내가 배 부른 장로님이나 되기를 바라고 있는 것이다. 아내가 나를 이해할 수 있게 해달라고 나는 기도원에 가서 일주일씩 금식기도도 했다. ‘원수가 집안식구니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불교의 출가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공적인 일을 하기 위해서는 사적인 정서를 떠나야 하는 것이다.

 

아침식사를 함께 했던 배 감독은 시내로 외출하고 나는 내 침대에 발을 뻗고 베개에 등을 대고 비스듬히 누워 성경을 읽고 있었다. 참 재미나게 성경을 읽고 있는데 문득 내 바로 옆, 침대와 침대 사이의 공간에 하얀 옷자락이 보이는 것이었다. 흰 옷을 입은 사람이 내 옆에 바싹 서 있는 것이다. 고개를 쳐들어 올려다보니 대리석으로 빚은 듯 하얀 머리털, 하얀 얼굴, 하얀 수염을 기르신 분이 나를 지긋이 내려다보고 서 계시는 것이었다. 예수님이구나! 시선이 마주치자 나는 참으로 난감한 마음이 들었다. 책망하시는 것 같기도 하고 격려하시는 것 같기도 하고, 마치 할아버지가 말썽꾸러기 사랑스러운 손자를 내려다보시듯이 그런 지긋한 눈빛으로 조용히 내려다보고 서 계시는 것이었다. 오전 햇볕이 환히 들어오고 있는 호텔 방안에서 영안이 아니라 내 육안으로 예수님을 보고 있는 것이다. 그 위엄 있는 예수님의 표정 때문에 마치 무거운 바위가 나를 내리누르고 있는 듯한 조심스러운 느낌이 밀려들었다. 베드로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을 때 ‘저는 죄인입니다.’고 고백했던 마음이 실감되었다. 그 사랑과 위엄, 그 순결함 앞에서 나는 숨어야 할 죄인일 뿐이었다. 나는 더 이상 그 얼굴을 보고 있기 황송해서 상반신을 세우고 반듯이 바로 앉아 마치 선생님께 꾸중 듣는 아이처럼 고개를 숙이고 무슨 말씀이 계시겠지 기다리고 있�다. 그러나 아무 말씀도 없이 조용했다. 잠시 후에 슬그머니 돌아보니 사라지고 안 계셨다.

 아아, 부활하신 모습! 빛깔만 대리석처럼 하얀색일 뿐, 보통 사람과 똑같은 모습, 1미터 80센티 정도의 키에 병풍 속의 신선같은 형태의 얼굴, 아주 부드러워 보이는 하얀 주름진 내리닫이 옷, 보고 싶고 보고 싶었던 부활하신 예수님의 모습이었다.

 왜 나에게 당신 모습을 보여주셨을까? 아마도 인도 전도의 사명에 확신과 자신감을 나에게 주시기 위해서가 아니었을까?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함께 한다. 용기를 내라. 그런 뜻이었던 것 같다. 실제로 그 날 이후 인도 전도에 대한 불안감을 없어졌다. 거꾸로 한국에 남아 있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불순종의 죄책감이 더 깊어질 뿐이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몸, 옆에 서 계시니 빛깔만 하얀색일 뿐 보통 사람과 똑같은 모습이요, 옷이었다. 만지면 말랑말랑하게 느껴질 사람의 모습이었다. 하늘 세계에서 물질 세계로 당신 몸을 자유롭게 나타내시는 분, 부르면 응답하시는 분, 나는 국민학생 시절부터 기독교에서 가장 의심스럽고 궁금했던 것이 처녀 마리아의 임신과 예수님의 부활이었다. 1981년도 4월에 하나님의 손이 내 명치를 쓰다듬어주신 이휴 하나님이라면 처녀가 임신할 수 있게 하시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라고 믿게 되었다. 그러나 부활에 대하여는 부활이 정확히 무엇을 가리키는지 궁금해 했다. 내가 본 하나남의 손은 첫째, 영안으로 본 것이요, 둘째, 그야말로 손만 본 것이다. 이 경험으로써 부활이란 영안으로 볼 수 있는 하얀 영적인 몸이라고 나는 상상하고 있었다. 그런데 신약성경에서 보면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갈릴리 호숫가까지 찾아오시고 음식도 드셨다고 씌여 있는 것이다. 40일 동안 함께 계시다가 승천하셨다고 하시는데 도대체 어떤 상태의 몸일까? 그런데 이제 보니 육안으로도 볼 수 있는 모습이었다. 그 분이 서 계시니까 그 몸에 가리워져 그 뒤에 있는 물건은 보이지 않는 아주 인간과 같은 체질의 몸이었다. 다만 그 하얀 빛깔로 보아 지상의 물질이 아닌 영적인 물질이라는 것으로 짐작될 뿐.

 요컨대 부활하신 예수님은 우리에게 음성을 들려주시기도 하고 모습을 보여주시기도 하는 영원히 살아 계신 우리의 구원자이신 것이다. 마치 자녀를 항상 염려하시는 집에 계신 아버지처럼 항상 당신을 주님으로 모신 인간들을 보살피시고 계시는 분이시다. 이 사실을 또 한번 야무지게 체험한 것은 그 다음 해, 1984년 6월이었다.


나는 건강시대라는 월간 잡지 주간 일을 하고 있었다. 그 무렵 여성 문제로 인하여 유혹을 느끼고 있었다. 쉽게 말하면, 눈 한번 딱 감으면 바람을 필 수 있는 그런 유혹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오후, 방안에 누워 있는데 아주 가느다랗지만 아주 또렷한 발음으로, 마치 먼 곳에서 내려 보내는 말씀이 또렷이 들려오는 것이었다.

“광야에 나가서 40일 동안 금식하며 철저히 회개하라. 여호와의 명령이다.”

아아, 내 마음을 항상 보고 계셨구나! 두려움과 기쁨이 함께 밀려왔다. 음성이 들이지 않고 모습이 보이지 않더라도 하나님은 항상 우리를 보고 듣고 계시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제자 도마에게 “보지 않고 믿는 자가 복이 있다.”고 하신 말씀의 뜻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나처럼 보고 믿은 자는 하나님이 안 보이면 의심이 들며 다시 죄에 빠지기 쉬운 것이다. 하나님을 보지 않고도 살아 계신 하나님을 믿게 된 사람들의 믿음이 더욱 올바르게 굳을 수 있다는 뜻이다.

 나는 한 달치 잡지 편집을 미리 해 놓고 휴직을 하고 금식을 시작했다. 서울 서초동 신동아 아파트에 살고 있었다............................


“예수님, 예수님 예수님!” 세 번 외치고 기도했다. 지난번 20일과 이번 20일 합해서 40일 금식으로 인정해 주십시오. 그런 기도였다. 산에서 나오는데 갑자기 황홀한 기쁨이 나를 감쌌다. 1981년도 4월, 하나님 손을 만난 직후, 파주 오산리 기도원에서 회개 기도할 성령을 받으며 황홀해지던 그 황홀감이었다. 미음을 먹기 시작하며 일주일 쯤 되던 어느 말 새벽, 깊이 잠들어 있었는데 손이 내 오른팔 어깨 쪽을 꼬옥 붙잡고 흔들며 나를 깨우는 것이었다. 눈을 뜨고 보았지만 아무 형태도 보이지 않는데 손은 나를 붙잡고 일으켜 앉히는 것이었다. 그리고 마치 아버지의 사랑 같은 느낌이 나에게 밀려들며 음성이 아닌 말씀이 한 마디 한 마디 또박, 또박, 또박 내 머리 속으로 들려오는 것이었다. 그 말씀을 내가 입으로 받아서 발음할 수 있는 그런 오묘한 말씀이었다. 이런 음성을 성경에서는 ‘성령의 감동을 받아서’라고 표현하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그 말씀은 다음과 같았다.

“시험이 다가 오니 깨어 일어나 기도하라.”

‘시험 당할 즈음 시험을 피하게 하시는 하나님’이란 성경의 한 구절이 떠올랐다. 그렇구나. 주님은 당신에게 의지하는 자를 죄로부터 구원하시기 위해 철저히 보살피시는구나. 나에게는 진실로 나를 보호해 주시며 영생으로 이끌어 주시는 아버지가 계신 것이다.


 간증을 여기서 일단 맺는다. 날마다 삶이 간증거리인데 한이 없이 쓸 수 있을 것이다. 믿는 이마다 간증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서로의 간증이 더욱 믿음을 돋구워 주기를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