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콧 한 지음 <새 마음을 주리라> 중에서 -바오로딸 출판사
6장 죄는 왜 달콤한가?
필자는 대학 강단에서 이따금 학생들에게 성 아우구스티노의 <고백록>을 과제로 낸다. 이 책은 보편적인 매력을 가지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가장 세속적인 사람도 비종교인도 성 아우구스티노의 천재적인 글 솜씨에 빠져들 것이다. 적어도 아우구스티노가 젊은 시절의 방황을 회상하는 부분은 흥미롭다. 때로는 아우구스티노가 범한 성과 관련된 진홍색 조ㅚ 때문에 이 책을 읽는 독자도 있다. <고백록>에서 볼 수 있는 아우구스티노의 섬세한 자기 분석은 고해성사를 준비하는 사람들에게 크나큰 도움이 된다.
그런데 <고백록>에는 신심 깊은 독자들마저 고개를 갸우뚱하게 하는 부분이 있다. 사실 한 부분이라고 하기에는 분량이 좀 많다. 아우구스티노는 열여섯 살 때 밤 늦게 친구들과 어울려 다녔던 일을 설명하는 데 무려 일곱 장을 할애하고 있다. 그렇게도 놀라운 정신시계를 소유한 사람을 그토록 집착하게 만든 탈선행위는 무엇이었을까?
아우구스티노와 친구들은 이웃 과수원에서 배를 몇 개 훔쳤다. 독자들은 여기서 어리둥절할 것이다. 아우구스티노는 오랫동안 육욕의 죄를 저지른 경험이 있다. 그에게는 여러 명의 정부가 있었고 사생아를 임신시키기도 했다. 그가 범한 영적인 죄 또한 그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았다. 그는 색다는 영성을 찾아 배교와 이단의 영역을 넘나들었다. 그리스도교의 가르침과 생활방식을 벗어나 이교의 현자에게 자신의 영혼을 맡기기도 했다. 그의 일탈 행위는 정도가 심각했다. 그런데도 그는 어떤 죄보다도 열여섯 살 때 저질렀던 좀도둑질에 대해 가장 심도 있고 세밀하게 자기 분석을 하고 있다.
아우구스티노는 좀도둑질한 이유를 알아내기 위해 거듭 자문한다. 배가 고팠기 때문이 아니었다. 집에 있는 배보다도 품질이 떨어졌다. 그냥 입이 심심해서도 아니었다. 아우구스티노와 친구들은 훔친 과일을 먹지도 않았다. 오히려 돼지들에게 주었다.
그렇다면 왜 배를 훔친 것일까? 아우구스티노는 끊임없이 자신에게 반문하면서 가능한 동기를 하나하나 가차 없이 부정해 나간다. 마침내 그는 악행 자체를 즐긴 것이 아닐까 반문한다. 하지만 그것도 이치에 닿지 않으니 제외시킨다. 누구도 악 자체를 위해 악행을 저지르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어떤 행위가 악하다는 이유만으로그 행위를 선택하는 사람은 없다. 사람들이 죄를 짓는 것은 그것이 악하지 않고 선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좋은 게 좋은 거다?
이 부분에서 일부 그리스도인들은 분개와 놀람을 경험한다. 사람이 죄를 지을 때 악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니. 도대체 어떻게 그런 주장을 펼 수 있단 말인가? 아우구스티노는 인간은 오직 좋은 것만 선택할 수 있다고 되받아친다. 사람은 맛난 것, 편한 것, 자유롭게 해주는 것, 생활 속의 불편을 제거해 주는 것을 바란다. 더욱이 인간이 바라는 모든 것은 선하다. 하느님이 그렇게 창조하셨기 때문이다.
“하느님께서 보시니 손수 만드신 모든 것이 참 좋았다.”(창세 1,31) 세상 만물은 어떤 식으로든 하느님의 영광에 참여한다. 각각의 예술 작품은 예술가의 독특한 흔적을 담고 있다. 그러므로 모든 피조물은 창조주의 현현(顯現)이다. 그리고 만물 안에 배어있는 창조주의 영광 때문에 그것들이 인간에게 그리도 매력적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그렇다면 좋은 것을 향한 인간의 욕구를 죄로 변형시키는 것은 무엇인가? 여기에 대해 아우구스티노는 멋진 말을 했다. “사물에 대한 무절제한 호감 때문에 가장 훌륭하고 가장 좋은 것을 버릴 때 인간은 죄를 저지른다.” 가장 좋은 것이란 하느님, 하느님의 진리, 하느님의 계율이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가장 훌륭한 것들에 비해 격이 낮은 사물들에도 그 나름의 즐거움이 있다. 그러나 어떤 것도 만물을 창조하신 하느님만큼 큰 즐거움을 주지는 못한다. 의로운 사람은 그분 안에서 즐거움을 발견하며, 고결한 영혼은 그분 안에서 기쁨을 누린다.”
아우구스티노는 과수원의 배를 훔친 이유에 대해 친구들과의 우정, 그들과 함께 나누게 될 웃음 때문이었다고 했다. 우정. 동지애, 웃음은 모두 좋은 것이고, 하느님의 축복이며, 갈망한 만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것에 대한 욕구를 하느님의 마음을 기쁘게 해드리고 그분께 순종하고자 하는 욕구보다 우선적으로 추구함으로써 잘못을 저지르게 된 것이다.
우리가 죄를 짓는 이유도 악한 것을 원하기 때문이 아니라 덜 좋은 것을 원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든 즐거움을 창조하신 분이며 즐거움의 정점이신 하느님과 그분의 진리를 추구하는 대신 하찮은 일과 덧없는 감각적 즐거움에 몸과 마음과 영혼을 내맡긴다. 하느님이 베풀어 주신 선물에 집착함으로써 정작 그것을 주신 하느님께 등을 돌린다.
탐욕
그렇다면 문제는 우리가 피조물에게 매력을 느낀다는 점이 아니라 피조물을 하느님보다 더 매력적으로 여긴다는 점이다. 아우구스티노의 표현을 빌리면 문제는 우리의 ‘사물과 즐거움과 현세의 영예에 대한 무절제한 호감’이다. 이것이 아담과 하와의 문제였다. 에덴동산의 금단의 열매는 아우구스티노의 이웃 과수원에 달린 과일처럼 악하지 않았다. 과연 선악을 알게 하는 지혜의 나무는 보기만 해도 좋았다. 하와가 그 나무를 쳐다보니 “먹음직하고 소담스러워 보였다. 그뿐만 아니라 그것은 슬기롭게 해줄 것처럼 탐스러웠다.” (창세 3,6) 지혜의 나무가 그런 좋은 것들을 가지고 있는 것은 하느님께서 그렇게 만드셨기 때문이다. 그 과실은 보기에도 먹음직스럽고, 먹은 사람에게 지혜를 가져다주니 유익하기도 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인류의 첫 부부에게 더 좋은 것, 곧 초자연적 선을 위해 그 좋은 것들을 모두 희생하라고 이르셨다.
그런데 뱀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자존심 때문에, 상실의 고통에 대한 두려움(히브 2,14-15 참조) 때문에 그 부부는 하느님의 명을 실행에 옮기는 데 실패했다. 선악과는 악한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불순종은 분명 악한 것이었다. 지혜를 갈망하는 것이 나쁜 일이 아니듯 잘 익은 사과를 먹고 싶어 하는 것 또한 나쁜 일이 아니다. 그러나 하느님한테서 멀어지는 방향으로 이러한 것들을 추구하는 것은 나쁜 일이다.
아담과 하와는 우선적인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의 순서를 뒤바꾸어 버림으로써 눈앞에 당면한 욕구, 곧 안전과 자기 보존과 지식과 감각적 즐거움을 채우는 반면에 더 고상하고 숭고한 것들, 곧 믿음. 희망. 사랑과 같은 가치는 유예했다. 그들이 직접 악을 선택한 것은 아니었다. 단지 덜 고상한 것들을 선택했을 뿐이다. 그들은 당장에 실질적인 것들을 선택했다. 자기 보존 욕구와 배고픔은 뿌리 깊은 본능으로 강렬한 육체적 반응을 보인다. 믿음. 희망. 사랑을 갈구하는 육체적 욕구는 존재하지 않는다. 하느님을 우선적으로 선택하는 내분비선이나 장기나 호르몬은 없다. 아담과 하와에게 요구되었던 것은 하느님의 뜻에 자신의 뜻을 의지적으로 일치시키는 것으로 덜 고상하게 보이는 모든 욕구를 희생시키는 일이었다.
선택에는 결과가 따르는 법이다. 그들의 요구는 또 다른 새로운 요구를 만들어 냈으니 알몸을 가려야 했고, 숨어야 했고, 자신들의 행위를 정당화시켜야 했다. 아담과 하와는 덜 고상한 욕구를 우선순위에 두었고, 이제 그 욕구가 두 사람을 지배하기 시작한 것이다. 전에는 알몸이면서도 두렵지 않았으나 이제는 알몸 때문에 두 사람에게 혼란스런 감정이 일어났다. 그래서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앞을 가려야 했다. 전에는 힘들이지 않고 밭을 갈고 동산을 관리할 수 있었으나, 이제는 땀 흘려 힘겹게 일을 해야만 했다.
인류의 첫 조상인 아담과 하와는 하느님께서 의도하신 인간 내면의 질서를 뒤바꾸어 놓았다. 이제는 더 이상 인간의 영혼이 몸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몸이, 다시 말해 즐거움과 두려움, 갈망과 욕구가 영혼을 지배하게 되었다.
사도 바오로는 이를 영에 대한 육의 반란이라고 했다.(갈라 5,16-17 ; 에페 2,3 ; 교리서 2515항 참조) 신학자들은 이를 탐욕이라 이름 하였으니, 이는 ‘원죄의 잠정적인 결과로 말미암아 혼란스러워진 인간의 욕구 또는 욕망을 일컫는다. 탐욕은 정의상 무분별하고 변덕스러우며 비합리적이다. 인간의 무질서한 욕망은 이성의 질서를 거슬러 반항한다.
탐욕 자체는 죄가 아니다. 그러나 그것은 원죄의 결과이며 본죄의 원인이다. 그것은 죄를 행한 내재적이며 생득적인 성향이다. 그러나 탐욕은 개인적 행위가 아니며 그것 자체가 우리를 죄인으로 만들지는 않는다. 그러나 우리를 유혹에 취약하게 만드는 것은 분명하며 쉽게 죄를 짓게 한다.
탐욕의 결과
“한 사람의 불순종으로 많은 이가 죄인이 되었듯이, 한 사람의 순종으로 많은 이가 의로운 사람이 될 것입니다.”(로마 5,19) 아담은 자신과 후손들의 영원한 생명을 없애버렸지만 그리스도께서는 영원한 생명을 회복하여 우리에게 주시기 위해 이 세상에 오셨다. 그리스도인들은 대부분 유아세례를 통해 영원한 생명을 받는다.
세례성사는 원죄의 흔적을 씻어내지만 탐욕은 우리 안에 여전히 남아 있다. 욕구와 욕망은 좋은 것이지만 질서를 잃으면 문제가 된다.
탐욕은 끝이 없어 우리를 끊임없이 끌어내린다. 우리가 피조물에게 끌리는 것은 하느님께서 당신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 창조하셨기 때문이다. 이것은 우리가 더더욱 감사하고 찬미하며 사랑하도록 하시기 위함이다. 그런데 우리는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피조물을 이용한다. 그것이 아내든 친구든, 초콜릿이든 술이든, 책이든 자동차든 말이다. 그러나 욕구를 충족시킬수록 점점 더 그 욕구에 지배당하게 되며, 갈수록 그것을 필요로 하게 된다. 이런 피조물을 필요로 할수록 하느님은 필요 없다고 느끼기 마련이다. 하느님께서 모든 것을 베풀어 주셨는데도 말이다.
탐욕은 우리를 유혹에 약하게, 유혹 당하게 쉽게 만든다. 세상은 탐욕을 통해 우리를 유혹한다. 그러나 옳지 못한 생각을 한다고 죄를 짓는 것은 아니다. 그 옳지 못한 생각이 즐겁다고 생각될 때 비로소 마음으로 죄를 짓게 된다. 마음으로 짓는 죄도 죄다. 서둘러 뉘우치지 않으면 머지않아 죄를 짓게 된다.
탐욕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것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교회의 가르침은 세 가지를 꼽는다.
지성이 흐려진다: 이성이 본응과 감정, 직감의 지시를 받는다. 우리는 오직 하느님의 은총, 계시된 진리, 우리의 노력으로 육의 선동을 넘어서서 생각할 수 있다.
의지가 약해진다.: 의지는 오직 선한 것, 좋은 것만을 바란다. 의지는 지성이 제공하는 정보를 토대로 작용하는데 지금은 지성이 흐려져 있다. 그래서 의지는 그릇된 방향으로 작용한다. 우리의 궁극 목표인 하느님을 향하지 않고, 눈앞의 피조물로 향한다. 의지가 여전히 좋은 것들을 선택하기는 하지만 덜 좋은 것, 눈에 보이는 좋은 것들을 선택한다. 악이라는 것을 알면서 선택하는 사람은 없다. 심지어 자살이나 살인을 저지르는 사람도 마찬가지다. 히틀러도 인종 청소(유태인, 집시, 천주교 성직자들을 제거하는 일)을 자행하면서도 좋은 일을 한다고 생각했다. 탐욕이 지배하게 되면 인간 본성은 그 정도로 비뚤어질 수 있다.
욕망이 혼란스러워진다 : 음식과 수면, 성적 친밀감에 대한 욕구는 그 자체로 좋은 것이다. 창조된 목적대로 하느님을 향한다면 말이다. 그러나 탐욕으로 인해 그것들이 혼란스러워졌고, 결국 몸은 식탐과 나태와 음욕과 그 밖의 죄를 짓도록 우리를 끌어내린다.
이제 탐욕의 해가 어떤 것인지 이해했을 것이다. 지성은 흐려졌고, 의지는 올바른 정보를 받지 못하니 그릇된 방향으로 작용한다. 영이 더 이상 육을 지배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벌
이쯤 되면 사도 바오로의 절규를 분명히 이해할 수 있으리라. “나는 과연 비참한 인간입니다. 누가 이 죽음에 빠진 몸에서 나를 구해 줄 수 있습니까?”(로마 7,24) 우리도 사도 바오로처럼 우리를 구해 주실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확신해야 한다. 그리고 일상 안에서 회개하라는 그리스도의 부르심을 알아차려야 한다. 그런 분별의 순간이 구원의 순간이기 때문이다.
죄는 무분별한 욕구에서 시작된다. 먼저 자신이 가져서는 안될 무언가를 동경하고 갈망하는 데서 유혹을 느낀다. 이때 가장 먼저 취해야 할 조치(1단계 의무)는 유혹에 저항하는 것이다. 욕구를 거절하고, 자신을 동요시키는 상황에서 떠나는 것이다.
그렇게 하지 못하고 죄를 지었을 때는 더 어려운 의무(2단계 의무)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으니, 그만큼 위험에 자신을 노출시켰기 때문이다. 이제는 자신이 저지른 특정한 죄를 뉘우치고 고백하고 속죄해야 한다.
그런데 만약 뉘우치고 통회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되는가? 오히려 그 금단의 즐거움을 맛보기 위해 또다시 죄를 짓는다면 어떻게 되는가? 일단 2단계 의무를 이행하는 데 실패하면 하느님의 벌을 받게 된다. 그러나 하느님의 벌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는 다르다. 하느님은 마른 하늘에서 날벼락을 내려 죄인을 벌하시지는 않는다.
가장 혹독한 벌은 그 죄에 매력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금단의 즐거움이나 쾌락을 선택할 때 그 죄에 대한 벌은 바로 죄인이 경험하는 쾌락이다. 한번 즐거움을 경험하게 되면 죄인은 더욱 더 갈망하기 때문이다. 만약 하느님이 쾌락 속에 버려두신다면 우리는 더 이상 저항하지 못하게 된다. 머지않아 우리는 그 덫에 걸려들어 얽매이거나 중독된다.
죄에 걸려들면 우리의 가치 체계는 완전히 뒤집힌다. 악을 가장 바람직한 ‘선’이요, 가장 간절한 바람으로 여긴다. 선을 악으로 오인하게 되는데, 이는 자신의 부정한 욕망을 충족시키지 못하도록 선이 방해하고 위협한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이 단계가 되면 회개는 불가능하게 된다. 회개란 정의상 악에서 ‘돌아섬’이요. 선을 ‘향암’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쯤 되면 죄인은 이미 철저하게 선과 악의 개념을 재정의하고 난 뒤다. 이사야 예언자가 이런 죄인들을 향해 증언한다. “불행하여라, 좋은 것을 나쁘다 하고 나쁜 것을 좋다 하는 자들!”(이사 5,20)
고삐 풀린 탐욕은 회개하지 않은 죄에 대한 하느님의 벌이며, 그 범죄에 딱 어울리는 벌이다. 어떤 사람이 좋지 않은 것을 계속 고집하면 하느님께서는 그의 자제력을 제거하신다. 로마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에서 사도 바오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하느님께서는 그들이 마음의 욕망으로 더럽혀지도록 내버려 두시어, 그들이 스스로 자기들의 몸을 수치스럽게 만들도록 하셨습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진리를 거짓으로 바꾸어 버리고, 창조주 대신에 피조물을 받들어 섬겼습니다.... 이런 까닭에 하느님께서는 그들을 수치스러운 정욕에 넘기셨습니다. ... 그들이 분별없는 정신에 빠져 부당한 짓들을 하게 내버려 두셨습니다.."(로마 1,24-26. 28) 벌을 주시면서도 하느님은 인간의 자유를 존중하신다. 하느님은 그들을 욕정과 정념과 그들 스스로 선택한 악행에 ‘넘겨주신다.’ 그런데 그들에게 생명을 주신 하느님께서 그들을 ‘넘겨주시면’ 그들은 죽은 것이나 다름없지 않은가?
다시 한 번 말하거니와 죄를 지으면서 느끼는 즐거움은 죄인에 대한 첫 번째 벌이다. 사람들은 대부분 뜻밖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우리는 하느님의 벌을 죄인에게 가하시는 하느님의 복수로 오해한다. 하지만 잠정적으로 하느님이 내리시는 가장 무서운 벌은 죄인이 스스로 선택한 죄에 애착을 갖는 것이다.
예를 들어 알코올 중독자들이 처음부터 알코올 중독자는 아니었다. 한번 취하게 마시고, 다음에 또 한번 취하고, 그 후로도 술을 마실 때마다 취하도록 마신다. 그러므로 술을 좋아하는 사람이 술 욕심을 자제하지 않으면 결국 알코올 중독자가 된다. 무절제한 음주라는 죄에 대한 벌은 ‘술에 취함’이다. 이쯤 되면 유혹을 뿌리쳐야 하는 1단계 의무를 실행하는 데 실패했음을 깨달아야 한다. 그런 다음 통회하고 죄를 고백하고 속죄해야 한다. 만약 회개하지 않고 다시 한 번 취하도록 마신다면 그때는 부정한 선(善)이 자신을 깊은 나락으로 끌어내리며, 하느님한테서 더욱 멀리 떨어져 나가는 걸 깨닫게 될 것이다.
인간의 지성이 흐려지고 의지가 나약해지면 결과는 뻔하다. 회개할 힘조차 고갈될 정도로 자신을 몰아간다. 하느님의 노여움과는 상관없는 일이지만 운전 중 사고를 내거나 가족들에게 외면당하고 버림받거나 집에서 쫓겨나거나 직장에서 해고당하는 불상사를 겪게 된다. 이런 불상사를 겪으면 하느님께서 마침내 벌하시기 시작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은 하느님이 내리시는 벌이 아니라 그분의 자비다. 더 이상 되돌릴 수 없는 운명에서 죄인을 구하시려는 하느님의 자비다.
우리가 하느님의 노여움이나 벌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사실 탐욕과 죄로 어두워진 영혼을 밝혀주려고 하느님께서 보내시는 눈부신 빛이다.
하느님의 노여움
하느님께서 내리시는 벌의 성격을 올바로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구약성경은 하느님의 ‘진노’ 또는 ‘노여움’이라는 말을 168번이나 사용하고 있다. 그런데도 하느님은 화를 내시지 않는다. 그분은 결코 ‘앙심’을 품거나 ‘징벌’하시지 않는다. 영원하시며 변함이 없는 분이기 때문이다. 하느님은 인간이 감정을 통해 경험하는 마음의 동요나 변화를 겪는 분이 아니다.
성경이 말하는 하느님의 ‘노여움’이라는 말은 비유적 표현이다. 예를 들어 시편 저자가 사용하는 하느님의 ‘오른손이, 그분의 거룩한 팔이’(시편 98,1)라는 표현에 대해 생각해 보자. 이 말은 하느님이 팔다리가 있다는 뜻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하느님은 감정과 기분을 느끼시는 분이 아니라는 것이다. 성 토마스 데 아퀴노는 이렇게 말한다. “성경이 하느님의 팔이라는 말을 쓸 때 하느님께 그러한 신체기관이 있다는 의미가 아니다. 다만 그 팔이라는 기관이 상징하는 바, 곧 하느님의 능력을 의미한다.”
이 비유에 담겨 있는 뜻은 무엇인가? 노여움은 ‘관계적 언어’다. 사람이 분노할 때는 반드시 그 대상이 있다. 분노라는 말마디가 성삼위의 관계 안에 존재하는 어떤 실재를 지칭할 리도 없고 분노의 대상이 성자나 성령일 리도 만무하다. 변함이 없으신 하느님께는 분노라는 감정이 없다. 그렇다면 그것은 필시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잠정적 관계를 가리키는 것이리라.
성 토마스 데 아퀴노의 설명을 들어보자. “분노한 사람은 곧잘 상대를 응징한다. 이때 응징은 분노의 표현이다. 그러나 하느님께는 분노가 있다고 말할 수 없다. 그 안에는 우선적으로 격정이 있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진노, 노여움, 벌과 같은 용어는 정의를 세우고 질서를 회복하시는 하느님의 役事역사를 우리 삶과 歷史역사 안에서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이는 ‘냉혹한 판사’의 격분한 감정이 아니다. 오히려 하느님의 자비와 인자하심의 도구다. 하느님이 내리시는 벌은 자식을 사랑하는 아버지의 질책, 또는 우리를 바른길로 인도하는 목자의 지팡이와 같다. 그것은 우리를 바로잡아 주고 회복시키고 구속하고 치유한다. 사도 바오로는 이렇게 증언한다. “그분의 호의가 그대를 회개로 이끌려 한다는 것을 모릅니까?”(로마 2,4)
하느님의 심판은 진리대로 내린다.
하느님의 노여움은 ‘죄의 결과로서 사람들에게 닥칠 수 있는 엄청난 재난과 불행’이라고 정의한 바 있다. 사도 바오로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그러한 짓을 저지르는 자들에게 내리는 하느님의 심판이 진리에 따른 것임을 알고 있습니다.”(로마 2,2)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예기치 못한 방법으로 벌하신다. 그분이 내리시는 벌은 앙심에서 비롯된 것이거나 자의적 성격의 것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의 자유로운 선택에서 비롯된 피할 수 없는 결과다. 과연 그분이 내리시는 벌은, 지옥이라는 영원히 지속되는 벌마저도 인간의 자유를 보장하며 당신의 사랑을 보증한다. 사랑은 강제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한테는 하느님의 사랑을 선택하거나 거부할 자유가 있어야 한다. 우리에게 죄와 지옥을 선택할 권리가 없었다면 진심으로 하느님을 선택하고 사랑할 자유도 없었을 것이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아니요’라고 답할 수 없도록 강요하셨다면 우리의 ‘네’는 이미 자동응답기의 답처럼 무의미하리라.
죄를 짓고 하느님이 아닌 다른 것을 선택하면, 거기에 따른 결과도 직시해야 한다.
불행하게도 우리는 탐욕으로 나약해진 지성과 의지로 결정해야 하므로 항상 갈등이 따른다. 탐욕은 오직 한 방향으로, 곧 하느님한테서 멀어지는 쪽으로 끌고 같다. 그 힘은 우리를 압도할 만큼 엄청나다.
자제와 극기로 탐욕을 극복해 나가야겠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우리에겐 오직 하느님만이 주실 수 있는 도움이 필요하다. 곧 고해성사를 통해 베풀어 주시는 은총이다. 고해성사의 은총은 하느님의 창조 능력과 협력하여 죄로 비뚤어지고 흐트러진 영혼을 새롭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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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해성사는 하느님의 자애로운 사랑을 맛보게 하며 끊임없이 우리 삶을 새롭게 이끌어 줍니다. 고해성사는 걱정이 많고 불확실한 시대에 영적 성장을 이루는 열쇠입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너그럽게 용서하시고 우리의 아픔을 치유하시며 순간순간을 새롭게 해주시려고 늘 기다리고 계십니다. 하느님의 은총은 어디에나 넘쳐흐릅니다. 모든 것, 특히 고해성사를 통해 용서해 주시겠다는 약속은 하느님께서 거저 주시는 은총의 선물입니다. 고해성사의 치유력을 체험하고 충만한 신앙생활을 하도록 초대하는 이 책 구석구석에 담긴 메시지를 널리 나누고 싶습니다. - 스콧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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