밭에 묻힌 보물/책에서 옮긴 글

하느님의 사람「피에트렐치나의 비오 신부」

김레지나 2008. 8. 28. 22:20

새 이름과 많은 눈물



프란체스코와 다른 12명의 수련자들은

1903년 1월 22일, 성당에 모인 전체 공동체 앞에서

세속 옷을 벗고 '수도복'을 입었다.


성 프란치스코 시대에

걸인들이 입고 다니던 초라하기 그지 없는 옷,

하나의 포대에 구멍 두개를 뚫어 팔을 내놓던 바로 그 옷이었다.


오랜 관습을 따라서 이름도 바꾸었다.

장상은 프란체스코에게 비오라는 이름을 주었고,

여기에 출신 지방의 명칭을 덧붙여서

피에트렐치나의 비오라고 불렀다.


다음날 프란체스코는 '비오 수사'가 되었다.

비오 수사는 단식하고 순명하며 기도하고 눈물을 흘렸다.

그의 수련 동기들은

이런 유별난 모습을 되풀이해서 겪었다.


왜 울었을까?


그에게 하느님은

태양이나 달처럼 확실한 분이셨다.


우리의 아버지 하느님께서는

사랑 때문에 이 세상과 생명을 모두 다 우리에게 주셨다.

우리의 모습이 추악하게 변해 가자

당신의 아드님을 우리에게 보내시어

우리를 위해 사람이 되게 하시고 우리의 스승이 되게 하셨다.


그분은 우리가

서로를 형제자매처럼 도우며 함께 살아가는 것이

삶이라고 가르치셨다.


그분은 우리에게

하느님의 용서와 악에 승리할 힘을 안겨주시고자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돌아가셨다.


그런데 그후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계속해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악의 원흉이 지배하는 광활한 평원에서

검은 옷을 입은 사람들이 하느님을 경시하며

약한 형제들을 억누르고

예수님의 죽음을 헛된 것으로 만들고 있었다.


이 같은 반역과 배반 앞에서 어찌 울지 않겠는가?


가을에 새수련자 몇명이 들어왔다.

그들중 한사람인 안젤리코는

당시의 일을 다음과 같이 기억했다.


1903년 10월,

모르코네 수련원에서

카푸친회 수도복을 입은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어요.


피에트렐치나의 비오 수사님이라는,

저보다 몇개월 일찍 들어온 수련자 한분이

저를 지도 하셨지요.


저는 그분으로부터

수도생활에 관한 첫 교육을 받았습니다.


1903년은 저에게 달콤했던 옛기억이라 할수있지요.

꿈같은 그 3개월의 하루하루를

저는 마치 오늘 일어난 일들처럼 생생하게 기억합니다.


어지신 비오 수사님은

제방에 오셔서

규칙과 회헌을 가르쳐주시며

좋은 말씀을 설득력 있게 들려주시곤 하셨어요.


저는 비오 수사님이 매일 방문하러 오시는 그 시간을

무척 기다렸습니다.


지금도 제마음속엔

비오 수사님의 그 부드럽고 친절한 모습이 깊게 새겨져 있습니다.


1904년 1월 22일,

열일곱살에 수련기를 끝낸 비오 수사는

마침내 가난과 정결과 순명의 서약으로

하느님께 자신을 공식 봉헌하였다.


모르코네 성당에서 거행된

그 엄숙한 예식에는 어머니 페파와 큰형 미캘래가 참석했다.


이제 이 젊은 카푸친회 수사에게는

사제가 되기 위한 6년간의 공부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 사이에 비오 수사는 다섯 군데의 수도원을 거쳐 갔다.


6년 동안 마귀는 잠들지 않았다.

마귀는 이 보잘것 없는 수사에게

하느님의 권능이 깃들어 있음을 알고

그에게서 수많은 영혼들을 떼어 놓으려 했다.

그래서 하느님이 허락하시는 한도까지 그를 괴롭혔다.

베네데토 신부에게 쓴 편지와

너무 놀라 아연실색하곤 했던 동료 수사들의 증언은

한결같이 그를 자주 괴롭히던 마귀와의 몸싸움,

끔찍한 환영들,

한밤중의 고함소리와 빈 옆방에서 들리는 귀청을 찢을 듯한 소음,

그리고

창문 밖에서 갑자기 그를 향해 달려드는

엄청나게 크고 검은개 등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덕분에 비오 수사는

계속해서 병과 고열에 시달렸고,

그동안 그가 섭취했던 음식과 물의 양은 너무나 적어서

대체 그가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었는지

도저히 설명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하느님의 사람「피에트렐치나의 비오 신부」

Padre Pio 테레시오 보스코 지음/이건옮김/가톨릭출판사펴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