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교실(구약) : 자료 - 24
주님은 저의 피난처이십니다.
* 예레미야서
예레미야는 기원전 627년 요시야 왕 때부터 587년 예루살렘 함락 직후까지 40년 동안 남 유다 왕국에서 활약한 예언자로서, 그의 이름은 “야훼께서 던지다(급히 보내다)”라는 뜻이다. 예레미야서는 그 내용에 따라 다섯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1. 예루살렘의 멸망을 경고(1-25장)
2. 심판과 새로운 계약(26-35장)
3. 예레미야의 수난(36-45장)
4. 여러 민족들에 대한 신탁(46-51장)
5. 역사적 부록(52장)
* 예언자 예레미야
예레미야는 기원전 650년 경 예루살렘에서 6km 떨어진 아나톳 출신으로 지방 성전에서 사제직을 맡고 있던 가문에서 태어났다. 기원전 627년 20대 초반의 젊은 나이에 예언자 소명을 받은 예레미야는 예루살렘의 멸망과 성전 파괴라는 유다 역사에서 가장 비극적인 시대에 활동한 예언자였다.
* ‘편도나무’와 ‘끓는 냄비’
‘편도(감복숭아)나무’는 히브리어로 “깨어있다.”, “지켜보다”라는 낱말과 발음이 비슷하다. 하느님께서는 바로 당신의 예언자를 통해서 하신 말씀, 그리고 하실 말씀이 곧바로 실현되도록 지켜보신다는 뜻이다. ‘북쪽에서 쏟아질 솥물’은 북쪽의 적들이 하느님의 심판 도구로 사용되어 유다 땅을 휩쓸게 될 것이라는 뜻이다.
* 마음의 할례
회개란, 몸의 할례처럼 외적인 의식 따위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온전한 마음으로 하느님께 지은 죄를 고백하고 하느님의 뜻에 충실한 삶을 살아가는 것을 말한다. 이것이 곧 마음의 할례이다.
* 예레미야의 고백록
예레미야는 민족을 사랑하면서도 그들에게 불행을 예고해야 하는 예언자였다. 그는 자기의 사람됨과 예언직의 수행 사이에서 일어나는 고독과 고난과 비탄 그리고 하느님에 대한 탄식과 원망을 솔직하게 토로한다. 예레미야서 11-20장까지를 ‘예레미야의 고백록’이로고도 한다. 여기에는 예레미야의 5가지 고백(탄식)이 나온다.
* ‘질그릇’
창세기는 하느님께서 옹기장이처럼 진흙을 빚어 인간을 창조하셨다고 말했다. 옹기장이는 마음에 들지 않는 작품은 가차 없이 깨버린다. 하느님을 거역한 유다 백성이 하느님의 마음에 들 리가 없다. 이제 그들에 대한 심판은 임박했고 되돌릴 수 없다는 것을 상징한다.
* 미래의 임금, 메시아
예레미야의 예언은 무서운 심판의 경고 뿐 만 아니라 희망과 위로의 메시지도 포함하고 있다. 예레미야는 이스라엘을 향한 하느님의 심판이 영원한 죽음의 형벌이 아니라 새로운 백성을 일으키기 위한 과정임을 상기시키고 메시아 예언과 함께 희망찬 미래의 모습을 제시한다.
* 수난의 예언자, 예레미야
예레미야는 하느님의 말씀을 입으로 전했을 뿐만 아니라 그의 생애 자체가 하느님의 메시지였다. 예루살렘 도성과 성전이 영원하리라는 망상에 빠져있는 사제들과 거짓 예언자들에 맞서 홀로 싸우면서 조국의 배반자, 거짓 예언자로 몰려 투옥을 당하고, 여러 차례 죽을 위험을 겪는 등 극심한 고통을 받았다. 그래서 그를 ‘눈물의 예언자’, ‘수난의 예언자’라고 부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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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음 주 주제 : 그 때에 나는 새 계약을 맺겠다.
* 읽어야 할 성경 : 예레미야서 26장 - 45장
* 성경구절 쓰기 : 예레 26,8-9 ; 26,13-14 ; 27,6-7 ; 28,11-13 ; 30,8-9
31,31-34 ; 32, 39-40 ; 37, 15-16 ; 38,4 ; 39.6-7
(이하 김양진 선생님의 강의 정리입니다.)
..... 요즘은 돈이면 다 되는 세상입니다. 어느 조사에 의하면 자신의 수입에 만족하는 사람이 10 명중 한 명이라고 합니다. 오늘날 우리들의 우상은 돈입니다. 오늘날의 우상을 그 시대에 형상화시킨 것이 바알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면서 뭐가 진실한 것인지, 인간답게 살 진정한 가치를 포기하면 인간이길 포기하는 것입니다.
올 해 강의(2007년)가 오늘까지 3주 남았습니다. 창세기부터 이스라엘 백성들이 선택이 되고, 나라가 갈라지고, 바빌론 유배까지 가게 됩니다. 앞으로 3시간 동안 이스라엘의 멸망 이야기까지 배웁니다.
예레미야가 활동하던 시대는 이스라엘의 마지막 40년 동안의 이야기입니다. 대단히 중요합니다. 우리 삶이 어디로 갈 것인가를 함께 반추해가면서 세 시간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이 풍비박산 나는 과정을 공부하게 될 것입니다. 내년 1학기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유배지에서 다시 하느님의 목소리를 듣게 되는 부분부터 예수님 오시기 전까지의 과정을 공부하겠습니다. 내년 2학기부터는 신약을 공부하겠습니다.
<예레미야서>
예레미야는 기원전 627년 요시야 왕 때부터 587년 예루살렘 함락 직후까지 40년 동안 남 유다 왕국에서 활약한 예언자로서, 그의 이름은 “야훼께서 던지다(급히 보내다)”라는 뜻입니다. 예레미야서는 그 내용에 따라 다섯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1. 예루살렘의 멸망을 경고 (1-25장)
2. 심판과 새로운 계약 (26-35장)
3. 예레미야의 수난 (36-45장)
4. 여러 민족들에 대한 신탁 (46-51장)
5. 역사적 부록 (52장)
<예언자 예레미야>
“벤야민 땅 아나톳에 살던 사제들 가운데 하나인 힐키야의 아들 예레미야의 말”(예레 1,1)
아나톳은 예루살렘에서 8km쯤 떨어진 곳입니다. 예레미야는 사제집안 출신인데, 예루살렘 성전 사제출신이 아니고 지방에 있는 성전사제의 아들입니다.
기원전 627년 : 20대의 젊은 나이에 소명 받음
예레미야는 너무 젊은 나이에 예언자 생활을 한 것으로 보아 사제생활은 하지 않은 듯합니다.
“유다임금 아몬의 아들 요시야 시대, 그의 통치 십삼년에 주님의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내렸다.”(예레 1,2)
<유다의 암흑시대>
예레미야 예언자를 이야기하기 전에 이사야 예언자 시대부터의 역사를 알 필요가 있습니다.
이사야 예언자가 활동하던 당시의 왕이 므나쎄입니다.
므나쎄는 유다 역사에서 가장 악한 왕입니다.
므나쎄왕 : 아시리아의 속국. 바알산당, 아시리아 신의 제단, 성신숭배(星辰崇拜)
인신제사, 점성술, 종교탄압, 억압정치
므나쎄는 충실한 아시리아의 속국노릇을 합니다. 속국이 되면 당연히 그 나라의 종교까지 들여와야 합니다. 므나쎄는 아시리아 신의 제단을 만들고 메소포타미아에서 유행하던 성신숭배를 하고, 인신제사를 합니다. 므나쎄의 아들을 번제물로 바치기도 합니다. 또 점성술을 공식적으로 허용합니다. 므나쎄는 아시리아에게 정치적으로는 보호받고 자기 왕위를 지킬 수 있었지만. 유다왕국은 종교적 순수성을 잃어버리고 맙니다. 왕이 앞장서서 백성들을 우상숭배로 이끌었습니다. 그것도 모자라서 므나쎄는 율법서를 태우고 예언자를 박해합니다. 전승에 의하면 이사야도 므나쎄에게 사형을 당했을 것이라고 합니다. 므나쎄는 국내에서도 폭압정치를 했습니다. 무고한 사람들을 많이 죽였습니다. 극악무도한 왕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시대를 유다의 암흑시대라고 표현합니다. 거의 50년을 므나쎄의 통치 하에서 지냈습니다.
B.C 642년 므나쎄 죽음, 아몬 즉위
그러나 아몬은 2년 만에 암살당합니다.
요시야가 기원전 640년 8세의 나이로 즉위
아몬의 아들 요시야가 8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합니다.
요시야가 어른이 되어 가면서 근동지방의 정치지형이 바뀌기 시작합니다. 지금까지는 그 지방에서 가장 센 나라가 아시리아였습니다. 그러던 아시리아가 점점 쇠퇴해가기 시작합니다. 아시리아에 의해 구석으로 밀렸던 바빌론이 점점 세력을 키워가던 시절입니다. 아시리아의 속국들에서는 아시리아가 다시 약해지니 독립하려는 민족주의가 생깁니다. 그런 시대 분위기에서 요시아가 개혁을 하고자 합니다.
기원전 631년 : 신명기(申命記) 발견
지방성전 폐지, 예루살렘 성전으로 모든 경신례 집중
요시야 왕이 개혁하기 위해 성전을 수리하고 아시리아 제단을 치우다가 율법서를 발견합니다. (므나쎄 시대에 유다의 율법서는 다 불태워졌었습니다.) 그 때 발견한 율법서가 지금 신명기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요시아 왕은 신명기를 발견하고, 성전을 정화시키고, 지방의 성전을 폐지합니다.
지방의 성전들은 종교혼합주의에 물들어 있어서, 시골에 있는 성전에 가면 하느님한테 가는지 바알한테 가는지 모를 지경이었습니다.
요시야 왕은 전 국민에게 계약 갱신식을 시키고, 야훼 하느님께 충성을 다하자고 종교개혁을 해나갑니다. 그런데 아쉽게도 요시야 왕은 40도 못 되어
기원전 609년 이집트와의 므기또 전투?에서 전사합니다.
<유다왕국 멸망의 길>
여호아킴 왕 : 이집트의 꼭두각시, 종교 개혁 물거품
요시야 왕 다음의 왕이 괜찮았으면 좋은데, 그렇지 못했습니다. 다음 왕, 여호아킴은 형편없는 망나니였습니다. 요시야 왕이 이집트에 져서 왕이 죽으니까, 유다는 이집트의 속국이 되었습니다. 이집트에서 유다 왕을 지명했습니다. 그래서 여호야킴이 왕위에 올랐습니다. 당연히 민족주의가 말살되고, 이방종교가 다시 들어와 유다왕국은 우상숭배를 하게 됩니다.
요시야 왕의 종교개혁이 물거품이 되고 맙니다.
(김대중, 노무현이 개혁을 주장하고 개혁을 하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국민들은 ‘개혁? 옳긴 옳지만 너무 빡빡하다.’ 라고 생각합니다. ‘개혁 피로증’에 걸립니다. ‘ 맑은 물에서 고기가 놀 수 있나? 적당히 융통성이 있어야지, 적당히 넘어가야지 원리원칙대로 살 수만 있느냐? ’하고 피곤해 합니다. ) 요시야 때 유다 백성 심정이 그랬습니다. 야훼 하느님 믿고 경건하게 살려하니 재미없고, 십계명을 다 지키려니 팍팍했습니다. 개혁 피로증에 걸렸던 것입니다. 요시야 왕이 죽고 나니 “아이고 살았다. 농사 잘 짓게 바알에게 빌고, 좀 아쉬운 것 있으면 하느님께도 빌고..그럼 좀 낫겠다.” 라고 생각했습니다.
기원전 612년 아시리아 수도 함락됨
기원전 587년 유다 왕국 멸망
아시리아의 수도 느네베가 612년에 바빌론에게 함락됩니다.
유다는 아시리아에 붙었다가, 이집트에 붙었다가, 바빌론에 붙어야했습니다. 유다왕국은 강대국들의 세력다툼 속에 여기 저기 빌붙었다가, 좀 약한 나라에는 대항하다가 결국 멸망하고 맙니다. 587년에 유다왕국이 멸망합니다.
이런 긴박한 시대에 하느님이 급히 보낸 예언자가 예레미야 예언자입니다. (그러니 예레미야 예언자가 어떤 이야기를 할지는 이미 짐작이 되시지요? )
<예레미야 예언자의 소명>
소명 이야기가 중요합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말씀하셨다. ”‘저는 아이입니다.’하지 마라.“(예레 1,7)
예레미야 예언자는 20대 초반에 소명을 받았습니다. 처음에는 ‘
저는 아직 어린 나이입니다.“하고 대답했겠지요? 모세는 ”제가 말주변이 없어서요.“라고 했었습니다. 그런 말들이 예언자들의 소명양식입니다.
예언자 소명 : 하느님께서 주도
하느님께서 예레미야에게 “저는 아이입니다.”라고 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예언자는 네가 하고 싶다고 되는 것이 아니고, 네가 하고 싶을 때 하는 것도 아니다.”는 것입니다. 오로지 예언자의 주도권은 하느님께 있다는 것입니다.
예언은 자기가 하고 싶을 때, 자격증 따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소명을 받으면 능력은 하느님께서 주시니 누구나 예언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이 원하시는 곳, 하느님이 명령하시는 말
“너는 내가 보내면 누구에게나 가야 하고 내가 명령하는 것이면 무엇이나 말해야 한다.“(예레 1,7)
예언자는 자기가 하고 싶은 말, 남에게 인심 얻을 말, 뒷주머니가 생기는 말만 할 수 없습니다. 하느님이 명령하신 것만 말해야 하고, 사람들이 자기를 싫어한다고 해서 예언하러 가지 않을 수도 없습니다. 사람들이 나를 잡아가두고 죽일 수도 있지만 하느님께서 가라고 하시면 가야하는 게 예언자입니다. 핑계 댈 수가 없습니다.
두려워해야 할 분은 오직 하느님 한 분 뿐
“그들 앞에서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너를 구해 주리라. 주님의 말씀이다.”(예레 1,8)
예레미야 예언자는 하느님 말씀을 왕이나, 사제, 지도자들 백성들에게 말하는데, 칭찬하는 말이 하나도 없습니다. 당연히 두려움이 쌓입니다. 누구나 편히 살고 싶고, 인기도 얻고 싶고, 뻐기고 싶어하는데, 예언자는 그럴 수 없습니다. 그러니 예언자는 어디 가든지 두려움을 느낄 수 밖에 없습니다.
그렇지만 하느님은 네가 두려워할 것은 하느님밖에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왕이든 국회이든 두려워할 게 아니라 네가 두려워 할 것은 오직 하느님 뿐이다”는 것입니다. 예언자가 인간 앞에서 두려움을 느끼면 이미 예언자 자격이 없습니다. 그 대신에 하느님은 “내가 늘 너와 함께 하겠다.”고 하십니다. 하느님이 곁에 계신다고 해서 예언자의 고통을 하느님께서 없애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고통을 감수하도록 극복하도록 함께 계셔 주시는 것입니다.
“내가 옳은 일을 하는 게 왜 내가 박해를 당해야 하나?,” 예레미야가 평생을 두고 외친 말입니다. 우리도 오직 하느님을 두려워해야합니다. 우리는 옳은 말을 할 때, 그 말이 진실일 때, 용기를 가져야 합니다.
하느님의 능력 부여, 하느님의 전권대사
“그러고 나서 주님께서는 당신 손을 내미시어 내 입에 대시며, 나에게 말씀하셨다.”(예레 1,9)
이사야는 소명을 받을 때 입에 불붙은 숯을 댔습니다. 정화하라는 뜻입니다.
예레미야 예언자에게는 하느님께서 손을 입에 대십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심어준다는 뜻입니다. 의미가 다릅니다.
예레미야는 이제 하느님의 전권대사가 된 것입니다. 예레미야가 행하는 것, 말하는 것은 하느님께서 행하는 것,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말씀 : 창조의 역사 이끄는 권능
“이제 내가 너의 입에 내 말을 담아준다. 보라, 내가 오늘 민족들과 왕국들을 너에게 맡기니, 뽑고 허물고 없애고 부수며 세우고 심으려는 것이다.”(예레 1,9)
“너에게 내 말을 담아준다.”- 이제 예레미야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전부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창조의 권능을 가집니다. 하느님께서 “생겨라~” 하시면 생깁니다. 또 인류역사를 이끌어 가시는 권능을 가진 말씀입니다.
예레미야 예언자의 예언은 단순히 이스라엘, 유다인, 이방민족이 어찌될 것이라는 예언에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이 예레미야를 통해서 창조의 권능을 발휘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예레미야 예언자를 통해서 나무를 심었다가 뽑아버릴 수 있고 집을 지었다가 허물어버릴 수 있는 능력을 행사하실 수 있습니다.
하느님이 유다백성과 다른 민족에게 징벌을 내리든 축복을 내리든, 그 모든 것은 하느님이 뜻하고자 하는 대로, 당신 계획에 따라 이루어지는 것이라는 사실을 예례미야 예언자의 소명이야기를 통해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당에 나와서 성경을 읽다보면 “어? 이거 명심보감에 나온 말이랑 비슷하다....”라고 생각할 때가 있지만, 성경의 말씀은 그런 게 아닙니다. 그 의미가 다릅니다. 성경의 말씀은 창조의 권능, 인류의 역사를 이끌어 가시는 권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두 가지 환시
하느님은 당신이 유다에게 어떻게 할 것인가를 두 가지 환시를 통해서 보여주십니다.
“예레미야야, 무엇이 보이느냐? 내가 대답하였다. ”편도나무 가지가 보입니다.“
“끓는 냄비가 보이는데, 그것은 북쪽에서부터 쏟아질 듯 기울어져 있습니다.”(예레 1,11-13)
편도(감복숭아) “깨어있다”, “지켜보다”라는 낱말과 히브리어 발음이 비슷합니다.
편도(감복숭아) 는“깨어있다”, “지켜보다”라는 낱말과 히브리어 발음이 비슷합니다.
발음이 비슷한 단어를 갖다 쓴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예언자를 보내면서 당신이 하신 말씀이 실행이 될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당신 말씀이 실행되는지를 다 지켜보신다는 뜻입니다. 하느님이 말만 뱉어 놓고 관심 끄는 게 아니라. 한번 하신 말씀은 “깨어서 지켜보면서” 반드시 이루신다는 것입니다.
북쪽에서 쏟아질 솥물 : “북쪽의 적들을 하느님의 도구로 사용”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을 징벌하실 때 당신 백성의 적들을 채찍으로 사용하셔서 징벌하실 것입니다.
북쪽지방이라면 아시리아나 바빌론을 이야기합니다. 그 나라들이 하느님 역사 안에서는 하느님 징벌의 도구로 사용됩니다.
<생수의 원천을 저버리다>
허수아비 우상 섬김 - 쭉정이가 된 유다
왜 징벌을 받고 심판을 받아야 하느냐에 대해 예레미야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너의 조상들이 나에게서 무슨 허물을 찾아냈기에 나에게서 멀어져 헛것을 따라다니다가 그들 자신도 헛것이 되었더란 말이냐?”(예레 2,5)
자식들이 속을 썩이면 “엄마가 너한테 도대체 뭘 잘못했느냐?”고 되묻습니다.
하느님께선 이스라엘 백성을 종살이에서 구해주시고 당신 백성을 삼고, 집도 절도 없는 백성을 가나안 땅을 차지하게 하고 먹고 살게 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만족하지 못하고 더 잘 살고 싶어했습니다. 하느님만 갖고는 양이 안차서 우상을 끌어들입니다. 인간은 욕심이 한정이 없습니다. 우리들이 성당에 나오지만 돈 싫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정당하게 돈을 벌어서 정상적으로 쓰고, 여유 있으면 남 돕는 것은 좋습니다. 그런데 돈 없으면 안 되고, 돈만이 우리를 행복하게 해준다고 생각한다면 바로 그것이 우상입니다.
(재벌이 대통령이 되면 우리나라가 부강해질까요? 힘듭니다.「사기」를 공부해보면, 중국역사에서 경제인이 집권하면 반드시 망했습니다. 왜냐? 그 사람들이 돈이 많다고 해서 욕심이 없어지지는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렇잖습니까? 9개 가진 놈이 한 개 가진 놈의 쪽박을 깨서라도 10개를 채우려고 합니다. 권력을 가져도 돈 욕심이 없어지지 않습니다. 역사가 증명해줍니다. 이스라엘도 마찬가지입니다. 왜 그걸 다 알면서 오늘날도 제대로 판단하지 못하는지.....)
결국 이스라엘은 허수아비를 쫓다가 쭉정이가 된 것입니다.
“정녕 내 백성이 두 가지 악행을 저질렀다. 그들은 생수의 원천인 나를 저버렸고 제 자신을 위해 저수동굴을, 물이 고이지 못하는 갈라진 저수 동굴을 팠다.”(예레 2,13)
이스라엘이 원래 물이 적은 곳입니다. 물은 생존과 번영을 나타냅니다. 하느님은 생수의 원천입니다. 물을 저장하기 위해서 그 당시에는 동굴을 팠습니다. 그런데 그 동굴에 금이 가면 그 동굴이 다 새어버립니다. 헛짓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생수인 하느님을 버리고 ‘하느님 없어도 우리가 저장하면 돼’ 하면서 금이 간 동굴을 판 것입니다. 우상을 믿고 파서 그렇게 되었습니다.
그런 어리석음이 죄입니다.
( 내가 힘들고 노력해서 잘 먹고 잘 사야지, 누가 나를 잘 먹고 잘 살게 해줄 수 없습니다. 어느 한 사람이 나서서 대한민국 경제가 나아지고 잘 먹고 잘살게 해주던 시대는 이미 옛날입니다. 지금은 다 시스템화 되어 있습니다. 누구 한 사람이 나를 잘 먹고 잘 살게 해줄 수 없습니다. 누구라도 경제를 살리고 싶지 않은 사람 없습니다. 사람들은 지금 대통령이 여기 몇 억 대부해줘라, 이건 이렇게 해라. 간섭하면 싫어하면서 또 한편으로는 대통령이 다 해주기를 원한다는 이율배반적인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지혜를 찾지 않으면 정말 살기 힘든 시대가 올 것입니다. 우리는 역사, 성경에서 지혜를 터득해야 합니다.... 생수의 원천이신 하느님을 버리고, 우리는 우상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그것이 예레미야 예언자가 오늘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입니다.) -(,, 2MB....ㅠㅠ)
<회개의 표시인 마음의 할례>
회개: 온전한 마음으로 계약에 충실한 삶
“유다 사람들과 예루살렘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묵혀 둔 너희 땅을 갈아엎어라. 가시덤불에는 씨를 뿌리지 마라. 유다 사람들과 예루살렘 주민들아 할례를 하여 자신을 주님께 바쳐라. 너희 마음의 포피를 벗겨 내어라. 그러지 않으면 너희의 악한 행실 때문에 나의 분노가 불꽃처럼 터져 나와 아무도 끌 수 없게 타오르리라.“(예레 4,4)
이스라엘인들은 율법에 의해 아기 때 할례를 해야 합니다. 할례를 하면 이스라엘 백성으로 입적되는 것입니다. “ 하느님 백성이 되었다.”는 표지이고, 요즘 세례받은 것과 같은 의미였습니다. 할례는 구원의 표시라고 여겨졌습니다.
예레미야는 “포피 조금 잘라낸 것이 회개가 아니다. 진정한 회개는 온전한 마음으로 하느님께 지은 죄를 회개하고, 하느님의 뜻, 법, 계약에 충실한 삶을 사는 것이고, 그것이 곧 마음의 할례이다.”라고 이야기합니다.
우리도 세례 받았다고 구원의 길에 이미 들어간 게 아닙니다. 매 순간 회개하고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대로 살려 해야합니다.
<삶이냐, 죽음이냐?>
배신의 땅 유다 : 창조 이전의 혼돈상태 초래
“내가 보니 땅은 혼돈과 불모요 하늘에는 빛이 사라졌다. ”(4,23)
예레미야 예언자가 보니까 자기 백성들이 하는 꼴이 엉망입니다. 노아의 홍수 생각납니다. 노아 때는 하느님이 세상의 악이 너무 많아서 지긋지긋해서 물로 싹쓸이하셨습니다. 오로지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의 관심은 잘 먹고 잘 사는 것, 안전하게 사는 것밖에 없었습니다. 하느님의 것은 전혀 생각하지도 못했습니다. 예레미야는 “배신의 땅 유다는 안전한 땅이 아니고 창조 이전의 혼돈상태로 갈 만큼 징벌을 당할 것이다.” 라고 혹독하게 예언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에 대한 주님의 경고>
십계명을 정면으로 위반하는 유다백성
“예루살렘 거리마다 쏘다니며 살펴보고 알아보아라. 한 사람이라도 만날 수 있는지 광장마다 찾아보아라. ”(예레 5,1)
구약 소돔과 고모라가 생각납니다. 의인 하나도 찾을 수 없는 곳, 십계명을 정면으로 위배하는 곳,...
“예루살렘이야말로 벌을 받아야 할 도성으로 그 안에 온통 억압이 자리 잡고 있다. 샘에서 물이 솟구치듯 거기에서 악이 솟구친다. 폭력과 억압이 그 안에서 들려오고 질병과 상처가 언제나 내 앞에 보인다.”
(예레 6,6-7) 십계명의 중요한 두가지, 하느님 사랑과 이웃사랑입니다. 이 두가지를 행하지 않으면, 임금이 백성에게 사랑이 없으면,... 착취와 억압 뿐입니다. 힘있는 사람이 힘없는 사람에게 사랑을 갖지 않으면 폭력, 악이 도사릴 수 밖에 없습니다. 예루살렘에게 하느님이 징벌을 내리시는 것이 아니라 예루살렘 스스로 벌을 자초한 것입니다.
<예레미야의 성전 설교>
예루살렘 도성과 성전 : “절대로 망하지 않는다.”
“이는 주님의 성전이다“ : 세 번 반복으로 하느님께 대한 신뢰 표시
예레미야 : 거짓예배는 자기기만
“너희 길과 행실을 고쳐라. 그러면 내가 너희를 이곳에 살게 하겠다. ‘이는 주님의 성전’, ‘주님의 성전’, ‘주님의 성전’ 이라 하는 거짓된 말을 듣지 마라.”
이스라엘인들은 예루살렘 도성은 하느님의 도성이고, 예루살렘 성전은 하느님의 집이니 그 곳 만큼은 안전한 곳이라고 믿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성전에 가서 세 번씩 “이는 주님의 성전”이라고 외쳤습니다.
그렇게 세 번 외치는 것은 원래 이스라엘 법이 아니고, 이방인들이 그들 신전에 가서 맹세하던 방법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성전에 하느님의 이름이 있다고 했지만, 이방인들은 신들이 그 신전에 산다고 믿었으니까, 이방인들에게는 그 신상 자체가 신이니까, 세 번씩 “여기는 누구신의 신전이다”하고 외치면, 거기에 그 신이 있는 것이고, 자신들이 필요할 때 그 신들의 권능을 꺼내다 쓸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일종의 기우제처럼.... (기우제는 하느님께 비 내리라고 하는 것입니다. 내가 하느님께 정성을 바치는 것과는 의미가 다른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도 이방인들의 그런 신앙에 젖었습니다. 내가 무슨 짓을 하고 다니든 성전에 가서 “이는 주님의 성전이다.”라고 세 번 외치면 하느님이 나를 인정해 주실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예레미야 예언자는 그런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그런 거짓된 예배는 자기기만이고, 그저 자기 혼자 위로하려고 하는 말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너희에게는 내 이름으로 불리는 이 집 안에 들어와 내 앞에 서서, ‘우리는 구원받았다’.고 말할 수 있느냐? 이런 역겨운 짓들이나 하는 주제에! 너희에게는 내 이름으로 불리는 이 집이 강도들의 소굴로 보이느냐? 나도 이제 그것을 지켜보고 있다.”(예레 7,11)
왜 성전이 강도의 소굴이 되었나? 십계명도 안 지키면서 성전에 가서 예물을 바치고 속죄 제물을 바쳤다고 해서 “나 이제 깨끗해졌다. 나 안전하다.”라고 한다면, 성전이 도둑놈들의 피난처가 되는 것입니다. 강도의 소굴이 되는 것입니다. 진정한 의미의 성전을 모독하는 것이고 하느님을 모독하는 것입니다.
성전을 정화하시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가셔서 성전을 정화하셨습니다.
“나의 집은 기도의 집이라 불릴 것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너희는 이곳을 ’강도의 소굴‘로 만드는구나.’(마태 21,13)
예수님 시대에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정신을 못 차렸습니다. 성전세 내고 희생제물 바치게 하려고 이스라엘 돈으로 환전하는 환전소를 만들고, 양과 비둘기 장사들이 득실댔습니다. 돈이나 희생제물을 통해 자기위안을 얻고, 거짓평화를 얻기 위해였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런 성전을 정화하신 것입니다.
예루살렘 성전파괴 예고
“내 이름으로 불리고 너희가 그토록 의지하는 이 집에, 내가 너희와 너희 조상들에게 준 이곳에 내가 실로에서 한 일과 같은 일을 하겠다.(예레 7,14)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느님의 성전이 가장 안전한 곳이라고 믿었는데, 하느님께서는 이 성전이 실로처럼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실로에는 성소가 있었습니다. 실로에서 12지파가 모여서 성소를 세웠습니다. 실로는 필리스티아에게 망했고 이스라엘인들은 계약의 궤까지 빼앗겼습니다. 예레미야는 예루살렘 성전도 실로처럼 파괴될 것이라고 예언합니다.
예루살렘 도성 멸망예고
“내가 모든 형제를, 곧 에프라임 후손을 모두 쫓아낸 것처럼 너희를 내 앞에서 쫓아내겠다.”(예레7,15)
에프라임은 북이스라엘 왕국을 말합니다. 북이스라엘 왕국이 우상숭배하면서도 하느님의 백성이라고 자만하다가 결국 아시리아에 의해 망하고 말았습니다. 예레미야는 “유다도 마찬가지다. 너희도 망할 것이다. 북쪽의 끓는 솥물, 바빌론에게 망할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예루살렘 도성과 성전이 절대 망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을 예언자가 깨부숩니다. 그런 허황된 믿음에 젖어 있는 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회개를 기대할 수 없습니다. 기원전 587년 유다 왕국은 바빌론에게 멸망당합니다.
<예레미야서 11장 - 20장 “다섯가지 고백”(탄식)>
예언자의 고독, 고난, 비탄, 하느님께 대한 탄식,원망
예레미야는 다른 예언자들과는 달리, 그의 말 뿐 아니라 삶 자체가 예언이었습니다. 예레미야 예언자의 삶 자체가 우리에게 메시지를 줍니다.
특히 11장에서 20장까지를 예레미야의 고백록이라고 이름붙입니다. 여기에 다섯가지 고백, 탄식이 나옵니다. 예언자가 느끼는 고독, 고난, 비탄, 비참함 온갖 것들,, 그리고 하느님께 대한 탄식과 원망이 담겨있습니다. 대화체로 되어 있는데, 간략하게 살펴보겠습니다.
<예레미야의 첫 번 째 고백>
가족과 친구들의 살해 음모
“당신께서 저에게 그들의 악행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런데도 저는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순한 양 같았습니다.”(예레 11,18)
예레미야가 백성들 왕들 사제들 성전 도성 다 망한다고 하니 박해를 받습니다. 예레미야는 박해자들을 피해서 고향 ‘아나톳’으로 갑니다. 아무리 죄를 지은 사람도 집에 가면 안전하게 보호해주는 법인데, 예레미야의 가족들과 마을 사람들 사제들은 예레미야를 죽이려고 합니다. 거기서도 편히 잘 수가 없었습니다. 요시야 시대에 지방 성전을 다 없애고, 지방 성전에서 밥 벌어 먹던 성전 사제들을 해고시켰습니다. 예레미야가 요시야 왕의 개혁을 찬성했다고 해서 고향사람들이 예레미야를 죽이려고 합니다. 예레미야는 온 백성을 회개로 이끌려고 했을 뿐인데, 자신이 마치 도살장에 끌려가는 양처럼 비참하게 느낍니다. 예레미야는 그런 당혹스러움을 하느님께 한탄합니다.
<예레미야의 두 번째 고백>
“아, 불행한 이 몸! 어머니, 어쩌자고 날 낳으셨나요? 온 세상을 상대로 시비와 말다툼을 벌이고 있는 이 사람을, 빚을 놓은 적도 없고 빚을 얻은 적도 없는데 모두 나를 저주합니다.‘(예레 15,10)
예레미야는 좋은 일을 한다고 했지만, 아무도 동정하거나 위로하지 않고 전부 질시하고 박해만 합니다. 사람이 마지막으로 위로받고 싶은 품이 엄마 품입니다. 엄마 계시면 펑펑 울고 위로 받을 텐데.. 예레미야에게는 그 엄마가 없습니다. 그럼 그 엄마에 대한 기대감이 원망으로 변하게 됩니다. 가수 이용복의 노래가사 중에, “그리운 어머니, 왜 날 낳으셨나요?”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같은 심정일 겁니다. 예언자의 삶이 얼마나 고통스럽고 소외당하고 비난 받는 고달픈 삶인가를 탄식하고 푸념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레미야의 세 번째 고백>
하느님께 대한 신뢰 : 참된 안전을 보장
“당신께서는 저를 두렵게 하지 마소서. 재앙의 날에 당신은 저의 피난처이십니다.”(예레 17,17)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생명입니다. 사람에게 가장 절실한 것은 안전입니다.
( 내가 안전을 보장받기 위해서 힘을 기르고 능력을 기르고 안전을 보장받기 위해서 돈도 많이 벌어야 되고, 부족하면 부모들이나 다른 사람의 힘을 빌려서라도 안전하고자 합니다. 자기들의 노후를 생각해야 하고, 자식들의 노후까지 걱정해주어야 합니다. 처음에는 5억만 있으면 대충 살겠지 했는데, 자식들 몫까지 걱정이 되면, 5억은 더 있어야지, 그러다가 서울에서는 집 한 채에 10억을 넘는다는데... ....)
그렇지만 이 모든 시련 고난을 받으면서도 오직 믿을 곳은 하느님 뿐입니다.
<예레미야의 네 번째 고백>
반대받는 표적, 죽음의 함정
“선을 악으로 갚아도 됩니까? 그런데 그들은 제 목숨을 노리며 구덩이를 파 놓았습니다. ”(예레 18,20)
예레미야는 그 모든 어려움을 겪고 백성을 위해서 살았습니다. 선한 일을 했는데, 백성들은 자기를 악으로 대합니다. 틈만 있으면 잡아가고 때리고 죽이려고 합니다. 그래서 늘 피해 다녀야 합니다. 그래서 예레미야를 수난 받는 예언자라고 합니다.
예레미야 예언자에게서 예수님의 삶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예레미야의 다섯 번째 고백>
끝을 모르는 암흑의 기간
“저주를 받아라, 내가 태어난 날! 복을 받지 마라, 어머니가 나를 낳은 날!”(예레 20,14)
어둠이 있다고 해서 가야할 길을 안 갈 수 없습니다. 끝까지 가야합니다. 가끔 우리는 “나보고 어찌하라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모르겠다고 해서 주저앉을 수 없습니다. 그 끝에는 하느님께서 계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저의 하느님, 저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습니까?”(마태 27,46)
예수님이 시편을 인용해서 기도하신 것입니다.
인간이 극한의 고통 속에서 터져 나오는 기도는 “하느님 저를 왜 버리셨습니까?”입니다. 우리는 살면서 하느님께 처절한 외침을 퍼부을 수 있어야 하느님께 다시 의지하고, 그 안에서 위로와 평안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는 것이 신앙의 길이지, 늘 탄탄대로만 기다리는 것이 신앙의 길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여정의 끝은 오직 하느님의 손에 달려
거대권력과 부딪치는 것이 계란으로 바위치기일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하느님의 뜻이라면 계란으로 바위를 쳐도 바위가 깨질 수 있습니다. 빙산의 일각일 뿐인데,, 라고 생각하지 말고,............ 불의를 헤쳐 나가야합니다.
<질그릇을 깨며 예언하다.>
창조주이신 하느님의 심판 임박
“옹기장이가 다시는 주워 맞출 수 없게 질그릇을 깨버리듯이, 내가 이 백성과 이 도성을 그렇게 부수겠다.”(예레 19,11)
지금까지 예레미야가 한 예언을 보면 하느님의 징벌이 임박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옹기장이가 항아리를 만들듯이 인간을 만드셨습니다. 도공들이 작품을 만들다 마음에 안 들면 과감하게 깨버립니다. 하느님이 창조하시고 뽑으신 백성들이 당신 마음에 안 들면 깨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창조주 하느님이 다시 그릇을 구울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미래의 임금, 메시아>
“보라! 그 날이 온다! 주님의 말씀이다. 내가 다윗을 위하여 의로운 싹을 돋아나게 하리라. 그 싹은 임금이 되어 다스리고 슬기롭게 일을 처리하며 세상에 공정과 정의를 이루리라.”(예레 23,5)
하느님이 심판의 무서운 벌을 내리지만 파멸로 끝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새로운 생명으로 다시 태어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느님께서 마음에 들지 않은 작품을 깨버리는 것은 지금까지 유다를 다스리고 헛된 것을 이끌었던 왕들을 다 버리고, 하느님의 뜻을 진정으로 올바르게 받들어 다스릴 수 있는 왕, 메시아를 통해 새로운 공동체를 만드시려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예언자는 새로운 계약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이 다음 시간에 배울 것입니다. 어쨌든 예레미야는 지금까지의 과정만 보더라도 예수님의 수난을 연상할 만큼 고통의 예언자, 수난의 예언자였습니다.
<수난의 예언자 예레미야>
백성들, 특히 지도자들은 예레미야를 더 싫어했습니다. 예레미야는 죽을 고비를 많이 넘겼지만 하느님께서 가라고 하시는 곳에 가서, 하라고 하시는 말씀을 죽음을 무릅쓰고 했던 예언자입니다. 이 시대에 우리는 비록 예레미야처럼 나서지는 못할망정 적어도 거짓과 비리에는 동참하지 않아야합니다. 우리의 삶이 좀 더 나은 삶이 될 수 있도록 예언자들이 주시는 말씀을 새겨들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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