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교실(구약) : 자료 - 21
정의를 강물처럼 흐르게 하여라!
* 아모스서
아모스는 기원전 760~750년경에 북 이스라엘 왕국 활동한 예언자인데, ‘아모스’란 이름은 “주님을 짊어진 사람”이라는 뜻이다. 구약성경 가운데 문서로 쓰인 최초의 예언서인 아모스서는 내용에 따라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1. 이웃나라들에 내린 심판 선고 (1,1 - 2,3)
2. 이스라엘에 대한 고발과 선언 (2,4 - 6,14)
3. 다섯 가지 환시와 복구의 약속 (7,1 - 9, 15)
* 이웃나라들에 내린 선고
이스라엘의 이웃나라들이 지은 죄는 대부분 전쟁 때 다른 나라에 대해 저지른 자학 행위였다. 하느님은 모든 민족의 하느님이시며 역사의 주인이시다. 하느님께서 다른 민족을 단죄하시는 것은 모든 인간에게 보장된 보편적 권리를 지키기 위해서이다.
* 이스라엘에 내린 선고
이스라엘이 저지른 죄는 평화와 번영을 누릴 때 자기네 형제에게 저지른 잔학한 행위였다. 권력층과 부유층들은 힘없고 가난한 형제들을 돌보아 주기는커녕 오히려 그들을 노예로 삼고 억압과 착취를 일삼았다. 아모스는 그러한 이스라엘에게 하느님의 준엄한 심판을 선고한다.
* ‘알다’
하느님과의 계약과 관련하여 ‘선택하다’, ‘인정하다’, ‘섬기다’는 의미로 Tm인다.
“하느님은 이스라엘을 알고(선택하고), 이스라엘은 하느님을 안다.(인정한다. 섬긴다) ”
* 아모스의 사회적 비판
아모스의 비판 척도는 공정(公正)과 정의(正義)였다. 하느님과 맺은 계약을 증거하는 참된 예배와 전례는 공정과 정의를 증진시키는 데 있다. 아모스는 올바른 예배와 더불어 공정과 정의가 강물처럼 끊임없이 흘러야 한다고 강조한다.
* 주님의 날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께서 자기들에게 영광과 영예의 화관을 씌워줄 ‘주님의 날’(야훼의 날)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 주님의 날은 ‘빛의 날’, 즉 ‘승리와 축복의 때’ 라고 여겼다.
* 아모스가 본 다섯 가지 환시
첫 번째 환시인 ‘메뚜기 떼 ' (흉작)와 두 번째 환시인 ’불‘(가뭄)은 재난을 의미한다. 이 재난들은 돌이킬 수 있는 것으로, 예언자의 중재기도로써 거두어진다. 그러나 세 번째 환시인 ’여름 과일 한 바구니‘(무르익은 마지막 때)와 다섯 번째 환시인 ’성전의 진동‘(파괴 직전의 성전)은 하느님의 징벌이 돌이킬 수 없는 것임을 뜻한다.
* 이스라엘의 ‘선민사상’(選民思想)
이스라엘은 하느님께로부터 특별히 선택받았다는 사실에 대단한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이것이 이스라엘이 가졌던 ‘선민사상’(選民思想)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선민사상 때문에 이스라엘은 오히려 특권의식과 자만심에 빠져 자기네들의 의무는 제쳐두고 하느님의 축복만을 바랐다.
* 아모스 예언자의 정신
아모스를 흔히 ‘정의의 예언자’, ‘분노의 예언자’, ‘멸망의 예언자’ 라고 부른다. 아모스는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에 대한 권력층과 부유층의 압제와 착취에 맞서 과감하게 투쟁했다. 한 나라의 존폐는 그 사회가 공정과 정의를 어떻게 실천하느냐에 달려있는 것이다. 아모스가 고발했던 불의는 오늘날까지도 계속 이어지고 있다. 따라서 아모스의 고발은 우리 자신, 나아가 인류 전체에 대한 고발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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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음 주 주제 : 내가 너를 어찌 버리겠느냐?
* 읽어야 할 성경 : 호세아서
* 성경구절 쓰기 :호세 1,2 ; 2,4 ; 2,10-11 ; 2,15-17 ; 3,1 ; 4,1-2 ; 6,4 -6 ;
9,15 ; 11, 8-9 ; 14,5
(이하 김양진 선생님 강의 정리입니다.)
(제가 병원진료 때문에 21회 강의를 듣지 못했습니다.
저 대신 남편이 강의 들었고, 정리까지 해주었습니다.
파워포인트 자료에 뜨는 제목들을 받아쓰지 않아서 강의내용만 쭉 글로 옮겼답니다. ^^ 제가 하던 정리와 스따~~일이 좀 다릅니다.
제가 읽어도 분명히 이해가 안 되는 부분들이 쬐끔 있네용.. 성경을 아직 못 읽어서 그런 것 같습니당..
강의 들으신 분들께서 혹시 잘못된 부분이나 보충할 부분이 있다면 수정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
요즘 TV를 보면 “쇼를 하라. 쇼를”하는 광고가 있습니다.
요즘 정치판의 쇼를 보면 씁쓸한 느낌이 듭니다.
이런 시절에 우리 신자들은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할까, 어떻게 해야 옳은가.
예언서들을 공부하는 시간이 이 시대를 진단해 보는 좋은 기회가 될 것 같습니다.
예언서에 대해서는 누차 설명했기 때문에 따로 설명하지 않겠습니다.
히브리성경에서는 여호수아기, 판관기, 사무엘기, 열왕기를 전기예언서라 하고 ,
후기 예언서는; 이사야서, 예레미야서, 에제키엘서 그리고 열두 소예언서를 네 개의 두루마리로 만들었습니다.
책은 크게 네 권이지만, 후기예언서가 열 다섯 권이고 전기예언서가 네권, 해서 모두 열아홉권입니다.
그런데 그리스어 성경과 현재 우리가 쓰는 성경은 조금 다릅니다.
히브리어 성경에서 전기예언서는 대개 예언자들의 말이나 행동을 기록했기 때문에, 사건중심으로 살필 수 있습니다.
후기예언서는 말씀위주로 쓰여졌습니다.
그리스어 성경이나 라틴어 성경은 전기예언서를 역사서로 올려놓고, 대예언서와 소예언서로 나눕니다. 대 예언서로 이사야서, 예레미아서, 에제키엘서와 (히브리어 성서에서 예언서로 취급받지 않은) 다니엘서를 넣었습니다. 소예언서는 열두 소예언서와 애가와 바룩서를 넣었습니다. 모두 18권이 됩니다.
대예언서와 소예언서를 구분하는 기준은 예언자의 위대함이 아닙니다.
분량이 많은 예언서를 대예언서, 분량이 적은 예언서를 소예언서 라고 하였습니다. 대예언서가 더 중요하고 소예언서가 덜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아모스서는 글로 쓰여진 최초의 예언서입니다.
(우리는 성서의 순서대로 공부하는 것이 아니라 시대의 흐름에 따라 구세사의 맥락에서 공부합니다.)
아모스라는 이름은 “주님을 짊어진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이름에서도 이 예언자가 어떤 일을 하고 있는가, 얼마나 무거운 짐을 지고 살았을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아모스서는 크게 세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째, 이웃나라들에 내린 심판 선고(1,1-2,3)
둘째, 이스라엘에 대한 고발과 선언(2,4-6,14)
셋째, 다섯 가지 환시와 복구의 약속(7,1-9,15)입니다.
예언서는 이야기가 아니라서 기승전결이 따로 없습니다. 그래서 얘기가 중복되기도 하고 순서가 뒤죽박죽이어서 읽기도 강의하기도 어렵습니다. 모든 구절을 해석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습니다. 전체적으로 예언자가 말하고자 하는 핵심을 뽑아서, 중요한 내용만을 뽑아서 이해하기 쉽게 강의하렵니다.
예언서는 그 시대상황을 알아야 이해하기가 쉽습니다. 또한 예언서는 설명조가 아닌 선언이므로, 시대상황을 모르면 무슨 말인지 못 알아먹기 쉽습니다.
또 예언서는 우리에게 위로를 주기보다 바늘로 찌르듯이 교훈을 주기 때문에 어려워 할 수도 있습니다. 만화책이나 소설책처럼 내 입맛에 안 맞는다고 던져버릴 책이 아닙니다. 입에 쓴 약이 몸에 좋습니다.
예언자들이 지금 우리에게 이렇게 외치고 있구나, 하는 것을 전제하지 않는다면 예언서를 읽을 필요가 없습니다. 예언서를 통해 현재를 바라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것입니다.
예언자들이 자신에 대해 얘기하기를 꺼려해서 정확한 인물배경을 알기가 어려우나 대충은 알 수 있습니다.
“트코아의 목양업자 가운데 한사람인 아모스가 전한 말씀”(아모1,1)
트코아는 예루살렘에서 남쪽으로 18킬로미터 떨어진 곳입니다.
아모스는 남유다왕국 사람이었으며 활동지역은 북이스라엘 왕국의 사마리아입니다.
아모스는 북이스라엘에서 지내던 목양업자였습니다. 10장에서 보면 “나는 돌무화과를 기르는 농부다” 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그러니까 양도 치고 농사도 짓던 사람이었던 모양입니다. 직업적으로 왕실에서 월급 받고 예언하는 사람이 아니라,,( 요즘 식으로 말하면 평신도 예언자입니다. ) 하느님께로부터 예언자 직분을 받아서 예언을 한 것입니다.
아모스가 활동한 시기는 남유다왕국에는 우찌야왕이 살았던 시기였고, 북왕국에는 예로보암 2세 때입니다. 두 사람은 다 남북 왕국을 상당히 잘 발전시킨 왕들입니다.
아모스는 북왕국 예로보암 2세 때 통치 하반기인 기원전 760-750년 사이에 활동을 했습니다.
예로보암 2세 때 북이스라엘 왕국은 마지막 전성기로 반짝 융성하게 됩니다.
예로보암의 치세를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가 하맛 어귀에서 아라바 바다에 이르기까지 이스라엘 영토를 되찾았다."(2열왕 14,25)
예로보암 2세는 그 당시 교역로였던 시리아와 페니키아 사이의 하맛어귀와 아라바(사해) 바다를 되찾았습니다. 계속 나라가 쪼그라들다가 예로보암 2세 때 전과를 올리니까 북이스라엘 왕국은 기분이 아주 좋아서 그런 식으로 나가면 다윗시대의 영토를 회복할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을 얻게 되었습니다.
또, 하맛어귀를 장악했으므로 페니키아와 교역을 활발하게 할 수 있었습니다. 또 시리아로 통하는, 아라비아로 가는 대상로를 장악했습니다. 사마리아는 통상의 중요한 거점 역할을 하게 되었고, 돈이 몰려서 부의 중심지가 됩니다.
정치적 경제적으로 잘나가고 있을 때입니다.
그런데 잘 나갈 때 아모스가 고춧가루를 뿌립니다.
”처녀 이스라엘이 쓰러져 다시는 일어나지 못하는구나. 제 땅에 내어 던져졌어도 일으켜 줄 사람이 없구나.“(아모5,2)
왜 잘 나가는 이스라엘이 망할 수 밖에 없다고 할까요? 의아하지요? 다윗의 영화를 다시 누릴 것 같은 희망을 가지고 있을 때 아모스는 망할 거라고 말합니다.
불과 30여년 후인 기원전 722년에 북왕국은 앗시리아에 의해 멸망하고 맙니다.
왜 이스라엘이 망할 수 밖에 없는가를 아모스의 입을 통해서 살펴봅시다.
아모스는 이스라엘 심판 전에 먼저 이스라엘 주변국가들에 하느님의 심판의 말을 전합니다.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는 표현은 원래는 “나 야훼가 선고한다”는 말입니다.
아모스는 각 나라들이 저지를 중요한 죄를 열거하고 그로 인한 하느님의 징벌을 얘기합니다.
이웃나라들이 무슨 죄를 지었고 왜 그렇게 되는가 알아보기로 합시다.
다마스쿠스(시리아)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그들이 타작기로 길앗 사람들을 짓뭉갰기 때문이다.”(아모1,3)
(지도 보시면).. 길앗을 침략해서 그 곳 사람들을 타작기로 죽여버렸습니다. 정말 잔인한 일입니다. 무고한 백성들까지 잔혹하게 살해했습니다.
필리스티아(가자)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그들이 사로잡은 이들을 모조리 끌고 가서 에돔에게 넘겨 버렸기 때문이다.”(아모 1,6)
필리스티아 사람들은 자주 유다와 이스라엘을 침공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포로로 잡으면 에돔에 노예로 팔아먹었습니다. 그 것은 하느님의 뜻에 맞지 않은 큰 죄입니다.
띠로(페니키아)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그들이 형제계약은 기억하지도 않고 사로잡은 이들을 모조리 에돔에게 넘겨 버렸기 때문이다.”(아모 1,9)
솔로몬 때 띠로 왕과 계약 맺어서 성전을 짓는 레바논의 삼나무를 가져왔습니다. 아합은 띠로의 공주, 이제벨과 결혼까지 했습니다. 그렇게 동맹 맺었는데도 괴롭히고, 잡은 사람들을 에돔에 넘겼습니다.
에돔에 대해
“그가 칼을 들고 제 형제를 뒤쫓으며 동정심마저 버린 채 끊임없이 화를 내고 줄곧 분노를 품었기 때문이다.”(아모 1,11)
에돔은 모압이나 암몬처럼 다윗시대의 속국이었습니다. 그런데 걸핏하면 이스라엘 침공을 하고 다른 나라들이 이스라엘 사람들을 포로로 삼으면 그들을 노예로 삼았습니다. 그러니 죄를 지은 것입니다.
암몬에 대해
“그들이 저희 영토를 넓히려고 길앗 여자들의 임신한 배를 갈랐기 때문이다.”(아모 1,13)
시리아가 길앗을 욕심내서 자주 침공했습니다. 임신한 여자를 죽일 정도로 잔인한 범죄를 저질렀습니다.
모압에 대해
“그가 에돔 임금의 뼈를 불살라 횟가루로 만들어 버렸기 때문이다.”(아모 2,1) -
지금도 유대인들은 화장을 하지 않으며 시신을 땅에 묻지 못하게 하는 것은 죽은 사람에 대한 저주, 가장 부도덕한 행위, 아주 큰 모독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도 땅에 못 묻게 하고 시신에 대한 저주를 한 죄를 지은 것입니다.
유다에 대해
“그들이 주님의 법을 배척하고 그 규정들을 지키지 않았으며 저희 조상들이 따라다니던 거짓 신들에게 홀려 길을 잃어 버렸기 때문이다.”(아모 2,4)
이스라엘로서는 유다는 이웃나라입니다. 아모스 예언자의 고향이 유다입니다. 자기 출신 나라에 대해서도 하느님의 심판을 이야기합니다. (북이스라엘 왕국이나 같은 내용이므로 크게 설명할 것은 아닙니다.) 지금까지 이웃나라들에 대한 하느님의 심판을 보면 대개 전쟁 때에 저지른 죄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이스라엘만의 하느님이 아니십니다. 모든 민족의 하느님이시며 역사의 주인이십니다. 이스라엘만 특별히 예뻐하시고 다른 민족들은 이용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은 장차 모든 민족을 당신 백성으로 만드실 것이고, 지금 이스라엘의 역할은 하느님의 사랑을 증거하는 일입니다. 하느님께서 다른 민족을 단죄하시는 것은 (쓸 데 없는 간섭이 아니라) 모든 인간에게 보장된 보편적 권리를 지켜주시겠다는 이야기입니다. 사람을 노예로 팔아먹고, 땅을 뺏는다고 잔혹한 살인하는 짓들을 하면 안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 짓을 하면 하느님으로부터 징벌을 받는다.) 만민평등과 보편??을 선언하는 아모스 예언자의 정신을 읽을 수가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독점했다고 생각한 하느님 백성을 고소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모든 민족의 하느님이심을 아모스 예언자가 일찍이 얘기한 것입니다.
이천년이 지난 지금도 다른 민족을 상대로 죄를 저지르는 일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를 핍박한 일본은 아직도 과거의 잘못을 반성하지 않고,,, 미국, 유럽에서는 일본의 전쟁시 범죄, 위안부 문제에 대해 청문회가 벌어지고 있습니다. 그뿐 아니라 미국은 테러범들만을 잡는 게 아니라, 이라크, 아프카니스탄을 침략하고 테러와의 전쟁이란 명분아래 잡힌 포로들을 학대합니다. (사진에서처럼 포로들을 발가벗겨 쌓아놓고 미군들이 즐거워합니다.) 포로는 정당한 대접을 해야 할 의무가 있는데도...(중략)..쿠바의 관타나모 포로 수용소는 인간이하의 생활을 하고, 재판도 없고 오로지 고문밖에 없답니다. 미국은 세계의 민주주의와 인권을 수호한다고 하면서 그와 같은 일을 저지르고 있습니다. 아모스 예언자가 지금 살아있다면 뭐라고 말하겠습니까? )
이제 아모스 예언자는 본격적으로 이스라엘에 대해 선고합니다.
“그들이 빚돈을 빌미로 무죄한 이를 팔아넘기고 신 한 켤레를 빌미로 빈곤한 이를 팔아 넘겼기 때문이다. 그들은 힘없는 이들의 머리를 흙먼지 속에다 짓밟고 가난한 이들의 살길을 막는다.”(아모 2,6-7)
이스라엘은 다른 나라와 달라야 하지만 마찬가지로 죄를 저지르고 더구나 전쟁시가 아닌데도 이런 죄를 저지릅니다. 이스라엘이 부유해지니까 돈 있고 권세 있는 자들이 같은 형제들을 돈 몇 푼에 노예로 팔아넘깁니다. 자기 형제들에게 잔혹한 짓을 한 이스라엘이 벌을 받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느님께서 자신들을 선택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처벌하지 않으실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런데 천만에, 아모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이 땅의 모든 씨족가운데에서 너희만 알았다. 그러나 그 모든 죄를 지은 너희를 나는 벌하리라.”(아모 3,2)
재밌는 말입니다. “너희만 알았다” 라고 하십니다. 하느님이 이스라엘을 알았다는 말이 아니고,,‘알았다’는 말은 계약과 관련하여 ‘선택하다’‘인정하다’‘섬기다’는 의미로 쓰입니다. 하느님이 이스라엘을 선택해서 계약을 맺어주셨고 이스라엘은 하느님이 계약을 맺어주셨음을 인정하고 하느님의 권위를 인정하고 하느님을 섬긴다는 뜻입니다. (앞으로 “알았다”는 말은 그런 의미로 받아들여야합니다.)
이스라엘은 하느님과 계약을 맺은 백성으로서 종살이에서 해방시켜주시고, 가나안 땅을 차지하게 해주셨습니다. 하느님은 이스라엘만 예뻐하시는 게 아니라, 종살이하는 모든 백성구출하시는 분입니다. 땅 없이 떠돌아다니는 백성을 돌보아주시는 분이십니다. 하느님은 약한 자 편에서 그들도 인간적으로 살 수 있도록 돌봐주시는 분입니다.
이스라엘은 계약을 통해 그러한 사실을 잘 알고 인정하고, 하느님의 뜻을 따르기로 하였으면서도 죄를 지었기 때문에 더욱 엄중한 벌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례성사를 받고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으며 하느님의 뜻을 배우고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 세상 사람들이 짓는 죄와 우리가 짓는 죄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우리의 죄가 더 무겁고 우리가 받을 벌도 더 엄중합니다. 쉬운 게 아닙니다. )
아모스는 보편적인 이야기를 한 후에 부분 부분에 대해 고발을 합니다.
우선 우상숭배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이스라엘의 죄를 벌하는 날 베텔의 제단들도 벌하리니 제단의 풀들이 꺾여 땅에 떨어지리라.”(아모 3,14)
이스라엘인들은 가나안땅을 딛자 마자 우상숭배를 했습니다.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남북이 갈라진 후에 예로보암 1세 때부터입니다. 단과 브에르사바에 금송아지를 두면서부터입니다. 바알신앙과 하느님 신앙이 혼합됨으로써 종교의 순수성을 잃어버렸습니다. 더구나 베텔성소는 왕실직속 성소입니다. 그 곳에서 임금들이 외국여자들을 데려다가 이교도신앙에 빠져들었습니다., 예배는 형식적이고 신전창녀를 도입하여 방탕한 축제로 변질되었습니다. 하느님께 대한 순수한 예배행위가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상류층의 사치에 대해 이렇게 고발합니다.
“나는 여름 별장에다 겨울 별장까지 쳐부수리라. 상아로 꾸민 집들이 사라지 고 큰 집들이 없어지리라.”(아모 3,15)
사마리아가 부의 중심지가 되었습니다. 그만큼 빈부격차가 심해졌습니다. 상권을 장악하고 권력을 등에 업은 재벌들이 온갖 사치를 부립니다. (요즘 발굴된 유물에 상아로 장식된 호화가구 등이 있습니다.) 부자들은 별장을 가지고 살면서도 가난해서 천막에서 사는 불쌍한 이들은 전혀 상관하지 않았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어떻습니까? 삼사십억짜리 집을 짓고 사는 이가 있는가 하면 무허가 판자집에 살면서 철거민으로 쫓겨나야 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정상적으로 돈 벌어서 쓰고 서로 나누면 누가 뭐라 할 수 없습니다. 부정한 방법으로 돈을 버는 사람이 있습니다. - 예를 들면 수십억 벌면서 세금은 거의 안낸다던지- 우리가 지금 겉으로는 풍요롭게 사는 것 같지만 빈익빈 부익부가 심화되고 있습니다. 월급장이들이 꼬박꼬박 저축해서 집 사려고 하면 집값이 폭등합니다. 그런데 부모로부터 유산 받은 사람들은 집값 오르면 오히려 더 좋아합니다. 이런 상황이 해소되지 않으면 언젠가는 계층 간의 불만이 사회통합의 불안 요소가 됩니다.
아모스는 또 상류층 부인들의 행태를 고발합니다.
“사마리아 산에 사는 바산의 암소들아 이 말을 들어라. 힘없는 이들을 짓밟으며 ‘우리가 마실 술을 가져와요.‘하고 저희 남편들에게 말하는 여자들아! 사람들이 너희를 갈고리로 끌어가고 너희 가운데 마지막 한사람마저 낚시로 채 가리라.”(아모 4,1-2)
(사령관 부인은 사령관이고, 대대장 부인은 대대장입니다.)
불로소득 계층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 여자만을 얘기하는 것은 아닙니다.)
여기서 재밌게도 ‘바산의 암소들아’라는 표현을 씁니다. ‘바산’은 갈릴리 호수 북쪽 골란고원에서 헤르몬산까지 가는 길에 있습니다. 해발 팔구백미터 정도 되는 넓고 광대한 고원지대입니다. 아주 비옥해서 온갖 식물들이 자라나고 목장지대로 유명한 곳입니다. (우리나라의 대관령과 같은 곳입니다.) 이런 좋은 목장에서 가만히 있으면서 좋은 사료 먹고 피둥피둥 살찐 암소에 비유한 것입니다. 호화롭게 지내고 향락과 방탕한 생활을 하면서 없는 사람들을 깔보는 것을 고발하고 있습니다.
(서울 가면 팔십 평 백 평에 사는 사람들은 어린 자식들에게 서민아파트나 임대아파트 사는 아이들과는 격이 다르니까 친구도 사귀지 말라고 합니다. 과시하려고 몸에 명품을 두르기도 합니다. 정상적으로 돈 벌고 정상적으로 소비하면 아무도 탓할 사람 없습니다. 어떤 사람이 열심히 일해서 일 년 연봉이 일 이억 되는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그런데 부정한 방법으로 돈 벌어서 그 불로소득을 쓰는 사람들은 대개 그 돈을 사치와 향락에 씁니다. 그것이 계층 간 위화감을 조성하고 사회불안의 요소가 됩니다. 그것을 바로잡는 열할을 종교가 해야합니다.)
아모스가 사제들의 죄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너희는 베텔로 오너라. 그리고 죄를 지어라. 길갈로 오너라. 그리고 더욱 더 죄를 지어라. 아침에 너희의 희생 제물을 바치고 셋째 날에 너희의 십일조를 바쳐라. 누룩 든 빵을 감사 예물로 살라 바치고 큰 소리로 자원예물을 공포하여라. 이스라엘 자손들아 이런 것들이 너희가 좋아하는 것이 아니냐?”(아모 4,4-5)
읽어보면 무슨 뜻인지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성소로 오라면서 죄를 지어라니...
그 당시 사제들이 일반백성들에게 무엇을 했는지 비판하는 내용입니다.
베텔이나 길갈, 브에르 세바의 성소는 이미 순수성을 잃어버린 곳이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성소에 와서 예배하고 제물을 바침으로서 거짓위안을 얻는 것이 참된 신앙일 수 없음을 얘기하고 있습니다. 사제들은 예물과 헌금을 강요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죄를 지었으니 하느님한테 빌 수 밖에 없었겠지만, 축제 때 열심히 예배하고 제물 바치면서 자기 위안을 얻고 오는 것은 참된 신앙이 아닙니다. 아모스는 하느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형식에 빠져버린 현실을 신랄하게 꾸짖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일부 대형화된 개신교 교회는 어마어마한 규모에다 한번 예배에 몇 만명씩 참가합니다. 이렇게 대형화되고 거대한 교회들이 돈을 거둬들이고 신자들에게 주는 건 거짓평안 거짓위안입니다. 돈을 많이 낸 만큼 현세에서 열배 백배로 되돌려 받는다고 하면서 현세기복적 신앙을 부추기고 있습니다. 만약 아모스 예언자가 우리나라에 와서 본다면 아주 바쁠 것입니다.)
아모스는 법정에 대한 심판을 이야기합니다.
“그들은 성문에서 올바로 시비를 가리는 이를 미워하고 바른말 하는 이를 역겨워한다. 너희가 힘없는 이를 짓밟고 도조를 거두어 가니 너희가 다듬은 돌로 집을 지어도 그 안에서 살지 못하고 거기에서 난 포도주를 마시지 못하리라.”(아모 5,10-11)
사회가 황폐하고 썩었으며 있는 사람들이 횡포를 부렸고 사제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민중이 마지막 기댈 데는 법일 것입니다. 그런데 법집행도 엉망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원로들은 백성들이 모인 성문 앞에서 법을 집행했습니다. 이스라엘 원로들은 권력에 아부하여 힘 있는 자들의 손을 들어주고 비호해주며 불법을 합법화해주면서, 힘없고 가난한 이들에겐 가혹하게 하는 등 법을 제멋대로 해석했습니다.
(오늘날 우리나라는 어떻습니까? 재벌이 지은 죄와 일반 사람들이 지은 죄는 다르게 처벌합니다. 재벌은 몇 백억을 횡령해도 집행유예, 사회봉사 몇 시간 선고 받습니다. 유전무죄 무전유죄를 실감하며 살고 있습니다. 엊그제 김용철 변호사 보도 보셨죠? 검찰이 삼성의 돈 받은 검사들의 명단 안 주면 수사 못한다 합니다. 언제 검찰이 명단 받아서 수사했습니까? 어떤 범죄의 심증만 있어도 검찰은 수사해왔습니다. (생략...) 우리는 양심이 무디어져있습니다. 그 사람들을 보면서 우리는 ‘어? 그래! 그 사람 또 나오는 가보다. 정치하는 사람 돈 좀 먹어도 되지 뭐!’라고 합니다. 적어도 성경을 공부하는 우리만이라도 예언서를 공부하면서 무뎌진 양심을 씻어내야 합니다. 이것이 올바른 신앙인의 자세입니다. )
썩어빠진 나라를 고치는 방법은 딱 한 가지입니다.
정의와 공정이 강물처럼 흐르게....
“너희의 시끄러운 노래를 내 앞에서 집어치워라. 너희의 수금소리도 나는 듣지 못하겠다. 다만 공정을 물처럼 흐르게 하고 정의를 강물처럼 흐르게 하여라.”(아모 5,23-24)
“거짓예배, 하느님을 도구화하는 예배를 드린다면 너희에게 희망이 없으며, 살 길은 오로지 공정하고 정의로운 삶밖에 없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외적 행사로 하느님을 찾다가 돌아서면 부정, 불의 야합을 저지른다면 하느님께 대한 진정한 예배가 될 수가 없습니다.
공정과 정의를 증진시키는 것이 하느님께 참된 예배를 바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정의를 강물처럼 흐르게 하라고 합니다.
물은 무엇입니까? 물은 생명을 뜻합니다.
정의와 공정이 강물처럼 흐르게 함으로써 생명을 풍성하게 해주도록 할 때 하느님의 뜻을 지키는 것입니다. 이런 일이 하느님을 참되게 예배하는 길이라고 아모스가 아모스는 얘기합니다.
흥청거리는 지도자들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불행하여라, 시온에서 걱정 없이 사는 자들, 사마리아 산에서 마음 놓고 사는 자들, 으뜸가는 나라의 귀족들! -중략- 요셉집안이 망하는 것은 아랑곳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제 그들이 맨 먼저 사로잡혀 끌려가리니 비스듬히 누운 자들의 흥청거림도 끝장나고 말리라.”(아모 6,1-7)
나라가 잘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국제정세를 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앗시리아가 강대한 국력으로 곧 팔레스티나 일대를 침공할 계획을 세우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눈앞에는 잘 먹고 잘 사는 것만 보입니다. 지도자들은 ‘걱정 없다, 그들이 침략해 와도 하느님께서 알아서 잘 해주시겠지 ’하는 안이한 생각들을 갖고 있습니다.
겉으로는 태평성대 같지만 아모스 예언자가 볼 때 이스라엘은 풍전등화의 상태에 있습니다. 결국 못난 왕과 지배계급 때문에 많은 백성이 죽거나 포로로 끌려가게 됩니다. 앗시리아로 그 당시 끌려간 이스라엘 사람들이 (엄청납니다. 발굴된 기록에 의하면) 이만칠천팔백명이나 됩니다. 물론 백성들도 잘못이 있지만 그 백성들을 올바른 길로 이끌 의무가 왕과 사제와 지도자들에게 있습니다.
(우리나라가 10년 전에 IMF 맞기 전 재벌들이 글로벌 경영이니 뭐니 하면서 얼마나 잘 나간다고 했습니까? 다 외국 빚 얻어서 했습니다. 김우중씨가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다고 했습니다. 그 돈 다 어디서 났고 어디로 갔습니까? 겉으로는 다 잘나간다고 했지만 IMF터지니까 어떻게 됐습니까? 국민들 모두 금붙이 내놨습니다. 저도 애들 백일, 돌 반지 다 꺼내다 바쳤습니다. 안 바칠 수가 없었잖습니까? 그 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실업자가 되었습니까? 지도자를 잘 못 만나면 그렇게 됩니다. )
그런데도 이스라엘 사람들은 엘리야 예언자가 빠스까 만찬 때 와서 주님의 날을 선포해 주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모스 예언자는 찬물을 끼얹는 소리를 합니다.
“불행하여라, 주님의 날을 갈망하는 자들! 주님의 날이 너희에게 무슨 득이 되느냐? 그날은 어둠일 뿐 결코 빛이 아니다. 사자를 피해 도망치다가 곰을 만나고 집안으로 피해 들어가 손으로 벽을 짚었다가 뱀에게 물리는 것과 같으리라.”(아모 5,18-19)
하느님을 믿는 사람들은 하느님께서 모든 것을 해주시길 바라고, 죽어서 천국 가는 것도 좋지만 지금 살아서 영광스럽게 되길 바랍니다. 그런 영광만 바랄 뿐 하는 행실은 엉터리라면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실 것은 징벌밖에 없는 것입니다.
“너희들이 주님의 날에 빛이 날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지만, 그 날은 어둠의 날이다. ‘우리들은 하느님이 지켜주시겠지’, 하는 망상에서 벗어나라. 다른나라들의 죄들보다 더 무겁다. 다른 나라를 망하게 하는 것 이상의 징벌을 내리실 것이다. 왜냐하면 선택된 민족으로서 하느님의 뜻을 어긴 죄가 그만큼 크기 때문이다. ”라는 것을 아모스 예언자가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모스는 다섯 가지 환시를 얘기하면서 이스라엘의 패망이 얼마나 급박하고 돌이킬 수 없는 것인가를 경고합니다.
첫째 환시는 메뚜기가 모든 곡식을 갉아 먹는 것이고,
두번째 환시는 모든 물이 말라 버릴 정도로 불이 나는 것이었습니다.
메뚜기는 흉작을 얘기하고 불은 가뭄을 얘기합니다. 그러나 이정도의 재난은 참아낼 수 있고 회복할 수 있고, 예언자의 중재기도로 거두어 집니다.
하지만 나머지 세 가지 환시, 다림줄(집 지을 때 똑바로 되었는지 경사를 측정하는 기구), 여름 과일 한 바구니(무르익은 마지막 때), 성전의 진동(파괴직전의 성전)은 하느님의 징벌이기 때문에 돌이킬 수 없습니다. 이러한 징벌에서 아무도 예외일 수 없다고 아모스는 이야기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느님의 이스라엘의 하느님이고 이스라엘은 하느님의 백성이다’라고 생각하고 자기들은 선택된 민족이라는 자부심이 대단했습니다. 이것을 일컬어 선민의식, 선민사상이라 합니다. 그래서 하느님이 뒷배경이라고 기고만장했습니다.
(요즘 공무원들이 윗사람에게 뇌물 바치는 이유는 자신들의 뒤를 봐달라는 것일 것입니다. 나는 누구의 라인이다,....줄 잘 서야 잘 된다고 합니다. 특권의식을 갖고 자만하게 됩니다.)
이스라엘은 특권의식을 갖고 자만심을 가졌습니다. 하지만 그럴 이유가 없습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아, 너희는 나에게 에티오피아 사람들과 똑같지 않느냐? 주님의 말씀이다. 내가 이스라엘을 이집트 땅에서 데리고 올라왔듯이 필리스티아 인들도 캅토르에서, 아람도 키르에서 데리고 올라오지 않았느냐?”(아모 9,7)
하느님은 이스라엘만의 하느님이 아닙니다. 만민의 하느님입니다. 더구나 이스라엘은 하느님께서 먼저 당신 백성으로 선택했지만 결국은 만민을 다스리시는 분이십니다. 이스라엘은 먼저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과 보살핌을 세상 사람들에게 증거 해야 할 책임과 의무가 있는 것입니다. 쓸데 없이 자만심이나 특권의식을 가질 이유가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기들은 절대 망하지 않는다는 망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아모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 백성 가운데에서 ‘재앙이 우리에게 가까이 오지도 덮치지도 않을 것이다.’하는 죄인들은 모두 칼에 맞아 죽으리라.”(아모 9,10)
( 개신교 부흥회에 가면 열띤 설교하고 나서 ‘오늘 예수 영접하신 분 손 들어 보십시요’하고 말하고.. 손 들면 ‘여러분 모두 오늘 구원 받으셨습니다.’라고 말합니다. 구원이 참 쉽기도 합니다..ㅉㅉ....)
(여러분 밀양이라는 영화 보셨습니까? 여주인공의 아이가 죽었습니다. 그 괴로움을 이겨내기 위해 열심히 교회를 다닙니다. 그리고 살인자를 면회 갑니다. 그런데 그 살인자가 뻔뻔하게 말합니다. ‘하느님이 날 용서하셨어요, 나 지금 편안합니다.’ 하느님은 우리 맘대로 우리의 구원과 용서를 위해 쓰는 도깨비방망이가 아닙니다. 진심으로 구원받고 용서받기 위해서는 내 잘못으로 인해 피해 입은 사람들에게 사죄하고 다시는 죄짓지 않도록 마음먹고 그 다음 죄 값을 치르려는 노력을 다해야 합니다.
우리가 세례 받았지만 구원을 당연히 얻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구원의 길로 들어선 것 뿐입니다. 구원은 하느님이 주십니다. 우리는 그 구원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끊임없이 노력해야 합니다. 부흥회 한번 가서 ‘나 구원받았다?’ 아니죠. 우리는 결정 해야 합니다.)
아모스서는 어둡고 음울하며 분노와 독설이 가득합니다. 아모스가 왜 이렇게 밖에 할 수 없는가? (지금 쓰나미가 몰려오고 있습니다. 해변에서 한가롭게 썬탠하는 사람들은 쓰나미가 오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예견하는 사람이라면 지금 당장 해변가에서 피해야 합니다.) 아모스 눈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회개가 시급한 것입니다. 내일이면 늦습니다. 결정은 바로 오늘 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독하고 강하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촉구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아모스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살 길을 찾으라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는 나를 찾아라. 그러면 살리라. 너희는 베텔을 찾지 말고 길갈로 가지마라.브에르 세바로 건너가지도 마라.”(아모 5,5)
아모스는 베텔이나 길갈의 성전으로 가지 말라합니다. 그곳은 이미 하느님을 만날 곳이 못됩니다.
정의와 공정이 실천되는 곳에서 하느님을 만나야 합니다. 선한 일을 행하고 악한 일을 피하는 곳에서 하느님을 만나야 합니다. 성당에 나오는 것 중요합니다. 하느님을 만날 수 있으니까. 실제로 중요한 것은 세상에서 선한 일을 행하고 악한 일을 피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공정을 행하고 정의를 실천하면 하느님을 만나고 하느님의 뜻을 받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모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는 악이 아니라 선을 찾아라. 그래야 살리라. 그래야 너희 말대로 주 만군의 하느님이 너희와 함께 있으리라. 너희는 악을 미워하고 선을 사랑하며 성문에서 공정을 세워라. 어쩌면 주 만군의 하느님이 요셉의 남은 자들에게 자비를 베풀지도 모른다.”(아모 5,14-15)
예언서를 읽을 때 이러한 배경을 알고 나면 한마디 한마디가 우리 귀에 들어옵니다.
아모스가 이렇게 목소리를 높여 하고 싶었던 말은 (심판을 선포하고 끝내기 위함이 아니라,) ‘하느님의 심판은 사랑의 채찍’이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하느님께 되돌아오게 하기 위해서 하는 말입니다. 하느님께 되돌아오는 것을 회개라 합니다.
아모스를 흔히 ‘정의의 예언자’‘분노의 예언자’‘멸망의 예언자’라고 부릅니다.
그는 그 시대 가장 버림받고 핍박받는 사람들, 힘없고 가나한 사람들 편에 서서 돈 있고 힘 있는 자들의 횡포에 맞서 끊임없이 투쟁했습니다. 아모스는 핍박과 조롱에도 불구하고 꿋꿋하게 싸웠습니다.
( 정의구현 사제단이이야말로 이 시대 진정한 예언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만약 정의구현 사제단이 사회의 불의를 보고 아무 말 하지 않는다면 아모스가 이천 오백 년 전에 했던 식으로 질타당할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
한 나라의 존폐는 그 사회가 공정과 정의를 어떻게 실천하느냐에 달려있는 것입니다. 아모스가 고발했던 불의는 오늘날까지도 계속 이어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아모스 예언자의 고발은 이천오백년전의 일회적 고발이 아니고, 우리 자신, 나아가 인류 전체에 대한 고발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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