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교실(구약) : 자료-23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 이사야서
이사야서는 시대에 따라 세 부분으로 구분할 수 있다.
- 제 1 이사야서(1 - 39장) : 남유다 왕국에서 (기원전 740 - 700년경)
- 제 2 이사야서(40 - 55장) : 유배지 바빌론에서 (기원전 550 - 540년경)
- 제 3 이사야서(56 - 66장) : 귀환한 예루살렘에서 (기원전 530-510년경)
* 예언자 이사야(제 1 이사야서)
이사야는 남 유다 왕국의 요탐, 아하즈, 히즈키야의 시대에 이르기까지 40여년 동안 에언활동을 한 예언자로서, 그의 이름은 “야훼께서 구원하신다.”라는 뜻이다. 제 1 이사야서는 내용에 따라 네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 1부 : 아모스의 초기 예언집(1장-12장)
- 2부 : 이방 백성들에게 내린 심판 신탁(13장-23장)
- 3부 : 아모스의 후기 예언집(24장 - 35장)
- 4부 : 역사 부록편(36장 - 39장)
* ‘사랍’
‘사랍’(세라핌)은 반은 인간, 반은 동물의 모습을 취하고 있으며, 신이 사는 성전의 수행원으로 여겼다. 사랍의 날개는 하느님의 현존을 상징한다. 얼굴을 가린 한 쌍은 왕의 영광을 나타내고, 발을 가린 한 쌍은 왕의 순결함을 나타내며, 날아다니는 한 쌍은 수행해야 할 임무를 나타낸다.
* ‘입술이 더러운 사람’
‘불결한 사람, 곧 죄인’을 가리키며, 거룩하신 하느님의 면전에서는 살아남을 수 없기 때문에 죄를 씻고 정화되어야 한다. 예언자는 절대자이신 하느님의 초월성과 거룩하심을 체험하고 자신을 정화함으로써 세상의 악과 불의에 맞설 수 있고 권위를 인정받을 수 있는 것이다.
* 하느님의 심판
선택된 계약의 백성은 하느님의 계획을 받아들이지 않고 스스로 파멸의 길을 걸었다. 그러나 하느님의 심판은 백성을 회개시키기 위한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파괴의 혹독한 고통을 통해 찌꺼기와 불순물을 제거하여 주신다. 그래서 계약의 백성은 다시 거룩한 하느님을 모시기에 합당한 하느님의 백성으로 정화될 것이다.
*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
이사야는 하느님을 배신한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느님의 심판이 내려질 것이지만, 이스라엘의 참된 왕이신 하느님의 주권을 믿고 때가 되면 반드시 구원해주실 것임을 신뢰하는 ‘소수의 남은 자들’을 주춧돌로 하여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을 다시 일으키실 것이라고 말한다.
* 임마누엘
‘임마누엘’은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 라는 뜻이다. 다윗 왕가에서 장차 태어날 아기는 하느님께 충실하고 자기 역할을 제대로 수행할 것이므로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 가운데 머물러 계신다는 표징이 될 것이다. 마태오 복음서는 이사야의 임마누엘 예언이 예수님의 탄생으로 성취되었다고 말한다.
* 메시아와 평화의 왕국
이사야는 하느님의 뜻이 궁극적으로 실현되는 세상은 메시아가 오심으로써 이루어진다고 보았다. 메시아가 오시면 세상은 공정과 정의를 되찾고 만물이 평화롭게 공존하게 되리라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이사야 예언서의 말씀이 당신 안에서 이루어졌다고 말씀하신다.
(* 제 2 이사야서와 제 3 이사야서는 해당되는 시대에 맞춰서 다룰 것이다.)
-------------------------------------------------------------
* 다음 주 주제 : 주님은 저의 피난처이십니다.
* 읽어야 할 성경 : 예레미아서 1장 - 25장
* 성경 구절 쓰기 : 예레 1,7-8 ; 2,5 ; 4,4 ; 4,23 - 26 ; 7,3-4 ; 11,19 ; 15,10 ; 17,17 ; 18,20 ; 20,14-15 ; 22,3 ; 23,5-6 ; 24,2
(이하 2007년 11월 21일, 김양진 선생님 강의정리입니다. 제가 너무 늦게 정리해서 올리지요? 나머지 세 강의는 방학 중에 정리해서 올리겠습니다.)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이제 대예언서를 공부합니다.
대예언서, 소예언서의 구분은 중요한 정도에 따른 것이 아니라, 분량이 많고 적음에 따라 나눈 것입니다. 대예언서는 소예언서에 비해 메시지도 많습니다.
예언서의 시간적 순서가 뒤죽박죽이기 때문에, 예언서를 일목요연하게 공부하거나 정리해내기가 쉽지 않습니다. 각 시대에 따라 비슷비슷한 이야기를 하고 있어서 더욱 그렇습니다. 또 예언서의 방대한 내용을 일일이 해석해서 예언서가 담고 있는 정신을 알아내기가 힘듭니다. 이사야서의 방대한 내용을 한 시간 동안 다 배울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각 예언서가 한 목소리로 이야기하고 있는 내용들은 앞으로 생략하고 배울 것입니다. 아모스나 호세아에서 배웠던 내용은 생략하고, 이사야나 예레미야서의 특징이 무엇인지, 그 예언자만의 목소리가 무엇인지를 배우면, 그 예언자가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은 이사야서가 신약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쳤는가를 중점적으로 배우게 될 것입니다.
이사야가 살고 있는 시대와 이 시대가 거의 비슷합니다. (아무도 믿지 못하고 추구하는 것이 돈과 권력뿐인 세상 안에서 우리는 예언자를 통해서 하느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이사야 예언자의 시대와 우리 시대를 생각해보고, 이사야가 하느님 말씀을 어떻게 전해주었는지를 알아보고, 지금 이 시대에 우리는 하느님 말씀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살아야할 것인가를 생각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사야서>
이사야서는 시대에 따라 세 부분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 제 1 이사야서(1 - 39장) : 남유다 왕국에서 (기원전 740 - 700년경)
- 제 2 이사야서(40 - 55장) : 유배지 바빌론에서 (기원전 550 - 540년경)
- 제 3 이사야서(56 - 66장) : 귀환한 예루살렘에서 (기원전 530-510년경)
이사야 예언자와 그의 제자들의 예언집
이사야 예언자가 기원전 740년부터 510년까지, 그렇게 오래 살았을 리가 없습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제 1 이사야서 시기에 예언활동을 했습니다. 이사야가 죽은 후에도 제자들이 이사야 예언자와 같은 주제를 가지고 예언활동을 했기 때문에 후대에 이사야서로 함께 묶은 것입니다.
오늘 공부할 부분은 제 1이사야서입니다.
<예언자 이사야 (제 1 이사야서) >
이사야 : “야훼께서 구원하신다.” 는 뜻
기원전 740 - 700 년경, 남유다 왕국에서 활동한 예언자
이사야는 남 유다 왕국에서 활동한 예언자입니다.
아모스와 호세아는 북이스라엘에서 활동한 예언자입니다.
이사야는 요탐, 아하즈, 히즈키야의 시대에 이르기까지 40여년 동안 에언활동을 한 예언자로서, 그의 이름은 “야훼께서 구원하신다.”라는 뜻입니다.
제 1 이사야서는 내용에 따라 네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 1부 : 아모스의 초기 예언집(1장-12장)
- 2부 : 이방 백성들에게 내린 심판 신탁(13장-23장)
- 3부 : 아모스의 후기 예언집(24장 - 35장)
- 4부 : 역사 부록편(36장 - 39장)
남왕국 우찌야, 기원전 783 - 742 년
북왕국 예로보암 2세 : 기원전 786 - 746
아모스나 호세아 예언자가 활동하던 시대는 북 이스라엘의 마지막 전성기였습니다.
이사야는 남왕국 우찌야 때에 활동한 예언자입니다.
그 때 북이스라엘은 예로보암 2세 치하였습니다.
번영과 안정 구가, 화려한 축제와 성대한 예배
이사야가 활동한 시기는 남왕국이 북 왕국처럼 반짝 마지막 전성기 누리던 때입니다. 강국 아시라아는 국내문제로 인해 팔레스티나 침공을 보류하고 있던 시기입니다. 그래서 북, 남 이스라엘왕국이 각자 세력을 확대할 수 있었습니다.
예로보암은 시리아쪽, 페니키아쪽 00쪽?(못 받아썼습니당.) 까지 영토를 넓히고 통상로를 확대해서 돈을 많이 벌었습니다.
우찌야왕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역대기에서 역사적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우찌야는 엘랏을 재건하여 유다에 복귀시켰다. 열 여섯 살에 임금이 되어, 예루살렘에서 쉰 두 해 동안 다스렸다.”(2역대 26,2-3)
“우찌야는 출동하여 필리스티아인들과 싸워서, 깃의 성벽과 야브네의 성벽과 아스돗의 성벽을 무너뜨렸다. 그리고 나서 아스돗을 비롯하여 필리스티아인들의 지역에 성읍들을 세웠다.”(2역대 26,6)
예로보암 2세는 시리아와 페니키아 사이의 교역로를 장악했고, 사해 아래까지 넓게 옛날 영토를 차지했고, 아라비아와 통상하여 변영을 누렸습니다.
남유다왕국의 우찌야 왕은 홍해 근처의 아카바 만에 있는 항구도시를 재건하고 필리스티아쪽 평원까지 정복합니다.
이사야예언자가 활동하던 시기는 남북이스라엘 다 국토도 넓고 경제사정도 좋을 때입니다. 번영과 안정 구가하던 때입니다. 성전에서는 화려한 축제가 벌어지고, 성대한 예배를 드리던 때입니다.
<이사야를 부르심>
이사야의 소명 이야기가 6장부터 나옵니다.
이 소명 이야기는 이사야 예언서의 전체 줄거리를 요약해서 알려줍니다. 그래서 대단히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우찌야 임금이 죽던 해에, 나는 높이 솟아 오른 어좌에 앉아 계시는 주님을 뵈었는데, 그분의 옷자락이 성전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이사 6,1)
우찌야 왕 : 유다왕국의 힘과 안정의 상징
기원전 743년, 우찌야 왕의 죽음 - 백성의 충격과 불안
진정한 왕이신 하느님께 의지해야
이스라엘 사람들은 예루살렘 성전에 하느님이 계신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사야는 천상의 하느님 집에 가 있는 환시를 보았습니다.
우찌야 왕이 말년에 나병에 걸립니다. 우찌야가 나병에 걸리자 아들 요탐이 10여년간 섭정을 합니다. 아들 요탐이 별로 훌륭하지 못했습니다. 나병에 걸려서 뒷전에 밀려나있지만 여전히 우찌야 왕은 힘과 안정의 상징이었습니다. 그런 우찌야 왕이 죽으니 백성들은 (아들은 미덥지 못하고 강대국이 호시탐탐 노리고 있어서 ) 걱정이 태산 같았습니다. 그런 시기에 이사야는 하느님 성전에 있는 환시를 보고 있는 것입니다.
이사야는 환시이야기를 통해 “이스라엘의 왕은 하느님이시니, 오직 하느님께 의지하라”고 위로하고 있습니다. “우찌야가 아무리 잘했더라도, 그의 죽음으로 우리 백성들이 당장 잘못되는 것이 아니다. 오로지 하느님만을 믿어라.”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사야가 천상 성전에서 본 것을 이야기합니다.
“그분의 옷자락이 성전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그분 위로는 사랍 들이 있는데, 저마다 날개를 여섯씩 가지고서, 둘로는 얼굴을 가리고 둘로는 발을 가리고 둘로는 날아다녔다.” (이사 6,2)
사랍 : 세라핌, 날개= 하느님의 현존
이스라엘 사람들은 ‘사랍’(세라핌)을 반은 인간, 반은 동물의 모습을 취하고 있으며, 신이 사는 성전의 경비병, 파수꾼, 수행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사랍의 날개는 하느님의 현존을 상징합니다.
얼굴을 가린 한 쌍은 왕의 영광을 나타내고, 발을 가린 한 쌍은 왕의 순결함을 나타내며, 날아다니는 한 쌍은 수행해야 할 임무를 나타냅니다.
얼굴을 가린 날개 : 하느님의 숭고하심
한 쌍은 얼굴을 가린 날개인데, 우리는 하찮은 피조물에 불과하고, 하느님은 창조주이심을 뜻합니다.. 구약시대에는 하느님을 면전에서 쳐다보면 죽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거룩하신 하느님을 직접 뵙지 않으려고 얼굴을 가리고 있습니다.
발을 가린 날개 : 하느님의 순결하심
발은 땅 밟고 다닙니다. 죄 많은 인간에 대비해서 하느님의 순결하심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날아다니는 날개 : 수행해야할 임무
하느님의 예언자, 하느님의 사람들이 수행해야할 임무를 나타냅니다.
“그리고 그들은 서로 주고 받으며 외쳤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만군의 주님! 온 땅에 그분의 영광이 가득하다.“ (이사 6,3)
하느님의 숭고하심을 표현하는 말입니다.
미사 성찬전례 감사기도 때 우리는 이사야가 천상 성전에서 바쳤던 기도를 바칩니다.
성찬 전례 감사기도 : 거룩하시도다! 거룩하시도다! 온 누리의 주 하느님, 하늘과 땅에 가득 찬 그 영광
“큰일 났구나. 나는 이제 망했다. 나는 입술이 더러운 사람이다. 입술이 더러운 백성 가운데 살면서 임금이신 만군의 주님을 내 눈으로 뵙다니!”(이사 6,5)
입술이 더러운 사람, 불결한 사람, = 죄인
불결한 사람은 하느님께 나아가지 못한다.
사람은 입으로 죄를 제일 많이 짓습니다. 입이 더러운 사람을 죄인, 불결한 사람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우리도 죄인이고 이스라엘 전체도 죄인입니다. 불결한 죄인으로 하느님 면전에 나선다면 바로 그 자리에서 죽게 될 것입니다.
“그러자 사랍들 가운데 하나가 제단에서 타는 숯을 부집게를 집어 손에 들고 나에게 날아와, 그것을 내 입에 대고 말하였다.”자, 이것이 너의 입술에 닿았으니 너의 죄는 없어지고 너의 죄악은 사라졌다.“ (이사 6,7)
타는 숯 : 죄인의 정화
예언자 : 하느님의 거룩하심을 체험하고, 자기 자신을 먼저 정화해야.
세라핌이 제단에 있는 큰 숯을 집어 이사야의 입술에 대줍니다.
숯을 대주는 이유는 정화시키기 위해서입니다.
이사야 이전의 예언자들에게는 하느님의 영이 내렸다는 말만 있었지, 정화시키는 이야기는 없었습니다. 이제 예언자에 조건이 하나 더 붙습니다. 예언자는 하느님의 초월성을 체험하고 자기 자신부터 정화되어야합니다. 그래야 하느님 말씀을 전할 때 사람들에게 권위를 가질 수 있습니다. 자신은 잘 하지도 못하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회개하라고 하면 “너나 잘하세요.” 소리를 듣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 하느님의 일을 하는 사람은 먼저 자신을 정화해야합니다. 이 소명 이야기는 우리가 해야 될 일을 말하고 있습니다.
“너는 저 백성의 마음을 무디게 하고 그 귀를 어둡게 하며 그 눈을 들어붙게 하여라.”(이사 6,10)
강한 빛 - 눈 감긴다.
큰 소리 - 귀 먹는다.
마음이 굳어져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백성
하느님이 당신 말씀 전하라고 이사야를 보내면서 백성들의 귀를 어둡게 하고, 마음을 무디게 하라시니 황당하게 들립니다. 못 볼 것을 보게 하고 말도 하게 하고, 마음도 열게 하라고 보내야하는데 하느님께서 오히려 말을 듣지 못하게 하라니 이해하기 힘듭니다. 무슨 뜻일까요? 빛이 너무 강하면 눈이 시려서 못 봅니다. 소리가 너무 크면 귀 먹습니다. (무슨 뜻인지 금방 이해하시겠지요? )
이미 불의와 부정, 우상숭배에 젖어있어서 그들 삶 안에 딱 고정되어 있는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말씀을 말해봤자 올바른 깨우침을 주기 힘듭니다. 그렇다고 해서 예언자가 사람들 비위 맞추어가면서 적당히 말할 수 없습니다. 예언자가 타협하면 이미 예언자가 아닙니다. 타협할 수 없습니다. 사람들이 싫어하고 배척하고 감옥에 가둘지라도 예언자는 올바른 말을 해야한다는 뜻입니다.
(예언자는 언제나 고난을 받게 됩니다. (다음시간에 배울 예레미야는 수난의 예언자입니다.) 예언자의 삶은 고달픕니다.)
“주님이 사람들을 멀리 쫓아내 이 땅에는 황량함이 그득하리라. 아직 그곳에 십분의 일이 남아 있다 하여도 그들마저 다시 뜯어 먹히리라.”(이사 6,12)
백성의 배신 , 하느님의 심판
예언자를 외면하고 회개를 거부하는 백성들에게 하느님의 징벌
우리가 우상숭배, 죄악에 빠져서 도무지 회개할 줄 모른다면 하느님께서 당연히 심판하십니다. 예언자가 전하는 하느님 말씀을 외면하고 회개하기를 거부하는 백성들에게는 하느님의 징벌이 내립니다.
“향엽나무와 참나무가 질릴 때 거기에 남는 그루터기와 같으리라. 그 그루터기는 거룩한 씨앗이다.”(이사 6, 13)
그루터기 : 소수의 남은 자들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에게 새로운 생명 싹터
그렇지만 이사야 예언자는 희망을 버리지 않습니다.
산불나서 다 타도 얼마 후면 나뭇가지에서 새싹이 나옵니다. 이 세상에서 불의에 젖어서 살다가 망하더라도 하느님만을 믿고 의지하는 소수의 사람들 만은 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만을 따르는 그 소수의 사람들에게 새로운 생명을 주시고, 그 소수의 사람들로 새로운 백성을 일으키신다는 말씀입니다.
(이사야 예언자의 소명이야기를 통해서 이사야서 전체의 이야기, 이스라엘 전체의 이야기를 다 공부한 거나 다름없습니다.)
<아하즈에게 내린 경고>
아람, 이스라엘 반(反)아시리아 동맹군이 유다 왕국 침공
아하즈는 요탐의 아들입니다. 아람은 시리아입니다. 아람과 북이스라엘이 아시리아에 대항에서 동맹을 맺습니다. 원래는 아람과 이스라엘이 서로 적대국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아람과 이스라엘은 공동의 적, 아시리아에 방어하기위해서 동맹을 맺었습니다. 아람과 이스라엘은 유다왕국에게 같이 아시리아에 대항하자고 말합니다.
유다왕 아하즈는 아람과 북이스라엘 동맹군보다 아시리아를 더 무서워해서 동맹제안을 거부합니다.
그러니 아람(시리아)와 북이스라엘 왕국이 유다왕국을 침공합니다. 유다왕 아하즈야는 어떻게 할까 고민에 빠집니다. 열왕기에 보면 아하즈는 공포에 질려서 이런 짓을 합니다.
“그는 자기 조상 다윗과는 달리 주 그의 하느님의 눈에 드는 옳은 일을 하지 않고, 이스라엘 임금들의 길을 따라 걸었다. 그는 주님께서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서 쫓아내신 민족들의 역겨운 짓을 따라, 자기 아들마저 불 속으로 지나가게 하였다.” (2 열왕 16,3)
인신제사 (人身祭祀)
엘리사 때 모압 왕이 맏아들을 번제물로 바쳐
아하즈가 자기 아들을 불 속으로 지나가게 하였다는 말은 인신제사를 바쳤다는 말입니다. 번제물은 제사지낼 때 불에 태워바치던 양이나 염소를 말합니다. 아하즈는 자기 아들을 번제물로 바쳤습니다.
이스라엘 역사에서 하느님이 번제물 바치라는 경우는 딱 한 번밖에 없었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아들 이사악을 바치라고 하신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하느님은 아브라함의 신앙을 시험하려 했을 뿐이지 인신제사 받고 싶은 생각은 없으셨습니다. 이스라엘에서는 인신제사는 절대로 허용되지 않았습니다.
엘리사 때 모압이 이스라엘을 침공했다가 오히려 전쟁에서 져서 위기에 처하자 자기 아들을 번제물로 바치고 신에게 구원을 요청해서 위기를 모면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아하즈야도 이방인들 왕, 모압왕이 했던 못된 짓을 따라한 것입니다.
그러니 하느님께서 아하즈에게 이렇게 말하라고 하십니다.
“그러자 주님께서 이사야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네 아들 스아르 야숩과 함께 ‘마전장이 밭’에 이르는 길가 윗저수지의 수로 끝으로 나가서 아하즈를 만나, 그에게 말하여라.“(이사 7,3)
스아르 아숩 : “남은 자가 돌아올 것이다.”
(호세아 예언자의 아이들 이름과 마찬가지로 상징적인 의미를 갖습니다.)
스아르 아숩은 ‘남은자가 돌아올 것이다’라는 뜻입니다.
스아르 아숩이라는 아들의 이름을 통해서 하느님의 계획이 상징적으로 드러납니다.
“‘진정하고 안심하여라. 두려워하지 마라.’ 르친과 아람, 그리고 르말야의 아들이 격분을 터뜨린다고 하여도 이 둘은 타고 남아 연기만 나는 장작 끄트머리에 지나지 않으니 네 마음이 약해지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이사 7,4)
아시리아에 비해서 매우 허약한 동맹군
유다왕국이 시리아와 이스라엘 동맹군에게 패배하고 마느냐, 아니면 아시리아에게 구원을 요청할 것이냐, 하는 갈림길에서 고민하고 있을 때에, 이사야는 고민하지 말라고 합니다. 시리아와 북 이스라엘이 동맹을 맺었다지만 힘이 없으니 두려워하지 말라고 합니다.
“너희가 믿지 않으면 정녕 서 있지 못하리라.”(이사 7,8-9)
하느님만이 유일한 보호자이며 동맹군
하느님이 보호해주실 것을 믿어라.
북 이스라엘은 결국 아시리아에 멸망했습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외세, 다른 군사력에 의지해서 안전을 도모한다는 것은 잘못된 생각이라고 말합니다. 외세에 의존하지 말고 유일한 보호자이신 하느님께 의지하라고 합니다.
<임마누엘의 표징>
이사야가 아하즈에게 예언하니, 아하즈는 이사야의 말을 안심하고 믿고 따를 수 있도록 표징을 보여 달라고 합니다. 이사야가 이렇게 말합니다.
“다윗 왕실은 잘 들으십시오! .... 젊은 여인이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할 것입니다.‘(이사 7,13-14)
임마누엘이라는 이름이 여기서 등장합니다.
임마누엘 :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 “는 뜻
“지금 외세의 두려움을 느끼고 곧 멸망하고, 파괴 지배당할지 모르지만 그것이 하느님의 뜻이 아니다. 하느님은 임마누엘을 보내실 것이다. 지금까지의 유다, 이스라엘 왕들이 하느님 뜻을 제대로 다 펼치지 못하고 살았지만, 하느님의 뜻을 펼치고, 하느님의 정의를 실현할, 공정을 세울 왕을 보내주실 것이다. 그러면 백성들이 그 왕을 보고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다윗 왕가에서 장차 태어날 아기는 하느님께 충실하고 자기 역할을 제대로 수행할 것이므로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 가운데 머물러 계신다는 표징이 될 것입니다.
마태오 복음서는 이사야의 임마누엘 예언이 예수님의 탄생으로 성취되었다고 말합니다.
“주님께서 예언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이 모든 일이 일어났다. 곧 ”보아라, 동정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하리라.“(마태 4,14 - 16)
예수님은 임마누엘 하느님이십니다. 이
<이사야 아들의 이름>
“그의 이름을 마헤르 살랄 하스 바즈 라고 하여라. 이 아이가 ‘아빠’.‘엄마’라고 부를 줄 알기 전에 다마스쿠스의 재물과 사마리아의 전리품이 아시리아의 임금 앞으로 운반될 것이기 때문이다.”(이사 8,3-4)
이스라엘은 늘 강대국의 침공을 받아왔고, 위협을 받아왔습니다.
아직 아하즈는 하느님만을 믿고 따를 형편이 안되었습니다. 그만큼 깊은 신앙도 없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이사야에게 아들을 주셨는데, 그 아들의 이름을 ‘마헤르 살랄 하스 바즈’라고 부르라고 하십니다.
마헤르 살랄 하스 바즈 의 뜻은 ”약탈물을 재빨리, 노략물을 잽싸게“입니다.
적군을 죽이고 약탈하면 전쟁에서 이익입니다. 머지않아 외적들이 들어와 약탈질을 할 것임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시리아(기원전 732년) 시리아를 정복
이스라엘의 즈불룬 땅과 납탈리 땅을 점령
과연 아시리아는 시리아를 먼저 정복합니다.
아시리아는 북 이스라엘 왕국까지 내려와서 갈릴래아 북쪽 지역, 즈불룬 납탈리 땅을 점령합니다.
북이스라엘 왕국과 시리아는 아시리아에게 망하고 맙니다.
유다왕국 아하즈 : 아시리아에 보호 요청, 조공 바치고 속국이 되다.
아시리아가 시리아를 멸망시키고 북이스라엘 왕국을 초토화시키니까 아하즈는 겁이 잔뜩 났습니다. 살아남으려고 아시리아에 조공을 바치고 속국이 됩니다.
“아하즈는 주님의 집과 왕궁의 창고에 있는 은과 금을 거두어, 아시리아 임금에게 선물로 보냈다.”(2열왕 16,8)
유다 왕국은 아시리아에 20년 동안 조공 바치고 속국노릇을 합니다.
예루살렘 성전에 아시리아 신전의 제단을 세우다.
하느님 신앙의 순수성을 상실
아하즈는 아시리아가 시리아를 점령하니까 공물도 바치고, 축하도 할 겸 다마스커스를 방문합니다. 아하즈야는 아시리아의 신에게 의지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하즈는 아시리아의 신전제단을 예루살렘 성전에 세우고 이런 짓을 합니다.
“그러고는 자기 번제물과 곡식 제물을 바치고 제주를 따라 부었다. 또 자기 친교 제물의 피를 제단에 뿌렸다.”( 2열왕 16,13 )
하느님은 뒷전으로 밀려나있습니다. 하느님 신앙의 순수성을 잃어버립니다.
(이스라엘 남북이 갈라지자 북이스라엘이 예로보암 1세가 단과 베텔에 금송아지를 두고 우상숭배, 혼합종교 만들어버렸습니다. 지금은 아하즈가 그런 짓을 합니다.)
아하즈와 이전에는 그래도 성전만큼은 더럽혀지지 않았는데, 아하즈는 성전까지 더럽힙니다. 완전한 혼합종교 형태가 되어버렸습니다.
하느님을 외면하고 우상숭배와 불의로 가득 찬 사회
하느님의 심판을 자초한 이스라엘 왕국
하느님께서 화가 나십니다.
“소도 제 임자를 알고 나귀도 제 주인이 놓아 준 구유를 알건만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구나. 아아, 탈선한 민족 죄로 가득 찬 백성, 사악한 종자, 타락한 자식들! 그들은 주님을 버리고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을 업신여겨 등을 돌리고 말았다.”(이사 1,3-4)
하느님을 배신하고 하느님의 곁을 떠나 좋은 일이 일어날 수가 없습니다. 하느님이 가르치신 것은 올바른 삶, 서로를 위하는 삶, 당신 백성으로서 하느님 뜻을 잘 받드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적어도 십계명만 지켜도 평화롭게 살 텐데, 우상숭배하고 불의로 가득 찬 사회를 만들었습니다. 하느님이 당신 백성이 미워서 징벌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스스로 멸망의 길을 걸어간 것입니다. 결국 이스라엘은 아시리아의 본격적인 침공을 받게 됩니다.
< 아시리아의 침공>
“그러나 보라, 주님께서는 세차고 큰 강물이, 아시리아의 임금과 그의 모든 영광이 그들 위로 치솟아 오르게 하시리라. 그것은 강바닥마다 차올라 둑 마다 넘쳐흐르리라. 그리하여 강물은 유다로 밀려들어 와목까지 차게 되리라. 그 날개를 활짝 펴서 너의 땅을 온통 뒤덮으리라.‘(이사 8,7-8)
큰 강물 - 홍수로 쓸어내는 것을 말합니다.
아시리아가 있는 곳은 유프라테스, 티그리스 강이 있는 메소포타미아 유역입니다. 물이 많은 지역입니다.
홍수는 아시리아에 의해 유린당할 것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유다왕국이 하느님의 뜻을 어기고 멸망의 길을 갑니다.
유다왕국이 우상숭배에 빠짐으로써, 조공 바치던 아시리아에 멸망합니다.
(을사보호 조약 , 한일 합방 조약을 기억해보십시오. 강대국에 의존하면 강대국에 먹히게 되어 있습니다. 요즘은 나라를 점령하지는 않지만 경제력으로 속국을 만듭니다. )
<장차 태어날 임금>
이사야는 하느님이 우리를 버리지 않을 것이라는 희망의 끈을 놓지 않습니다.
“어둠 속을 걷던 백성이 큰 빛을 봅니다. 암흑의 땅에 사는 이들에게 빛이 비칩니다.” (이사 9,1)
“우리에게 한 아기가 태어났고 우리에게 한 아들이 주어졌습니다. 왕권이 그의 어깨에 놓이고 그의 이름은 놀라운 경륜가, 용맹한 하느님, 영원한 아버지 평화의 군왕이라 불리리이다.”(이사 9,6)
임마누엘 = 메시아 (기름부음 받은 자)
임마누엘은 메시아를 가리킵니다.
“메시아는 평화의 왕으로 이 세상에 오실 것이다. 평화의 왕이 오시면 하느님의 보살핌을 받는 것처럼 살 수 있다. 메시아는 올바르게 다스리실 것이다”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갈릴래아에서 전도활동 시작하실 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사야 예언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그리된 것이다.... 어둠 속에 앉아 있는 백성이 큰 빛을 보았다.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고장에 앉아있는 이들에게 빛이 떠올랐다.” (마태 4,14-16)
하느님의 징벌로 인해 외세에 짓밟힌 이스라엘에 빛이 하나 떠올랐습니다.
그 빛은 예수님, 임마누엘 메시아이십니다. 예수님 사실 때에도 이스라엘은 로마 지배하에 있었습니다. 갈릴래아는 아시리아에 짓밟혔던 납탈리 땅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사야 예언자의 말씀이 나로 인해 이루어졌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아시리아 임금에 대한 벌>
이사야 예언자는 하느님의 말씀을 아시리아에 전합니다.
“불행하여라, 내 진노의 막대인 아시리아! 그의 손에 들린 몽둥이는 나의 분노이다.”(이사 10,5)
아시리아 : “하느님 징벌의 도구일 뿐”
하느님이 이스라엘을 심판하신 것은 미워서가 아니라 이스라엘을 다시 살리시기 위해서입니다.
징벌의 채찍으로 아시리아를 도구 삼았을 뿐입니다. 아시리아가 똑똑하고 잘나서가 아닙니다. 그런데 아시리아는 자기들이 잘나고 똑똑한 줄 알고 전 세계를 지배하려는 야망에 불타고 있었습니다. 박달나무 몽둥이가 잘났다고 주인에게 대들면 불 속에 쳐 넣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사야는 아시리아에게 “너희는 하느님 징벌의 도구일 뿐이다. 잘난 척 하지 마라. 너희들이라고 해서 하느님 심판을 피할 수는 없다.”라고 예언한 것입니다.
하느님은 이스라엘백성들만의 하느님이 아니라, 만민의 하느님, 역사의 주인이십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시온 산과 예루살렘에서 하실 일을 다 마치신 다음, 아시리아 임금의 오만한 마음에서 나온 소행과 그 눈에 서린 방자한 교만을 벌하실 것이다.”(이사 10,5)
하느님의 뜻에 어긋난 아시리아가 아무리 군사력을 자랑해도 결국 멸망하고 말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히즈키야의 종교개혁>
신앙의 정화 : 바알 산당 철거, 예루살렘 성전 개혁
아하즈의 아들, 히즈키야가 즉위합니다.
히즈키야는 아하즈와는 달리 신앙심이 돈독했습니다. 히즈키야는 바알 산당들을 철거하고, 아버지가 예루살렘 성전에 세워놓은 아시리아 성전을 개혁하면서 이스라엘 백성을 다시 순수신앙으로 이끌었습니다.
북왕국, 남왕국을 통들어 욕먹지 않은 두 세 사람의 왕들 중 한 사람이 히즈키야입니다. 열왕기에서는 히즈키야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그는 주 이스라엘의 하느님을 신뢰하였다.”(2열왕 18,5)
이것은 최고의 칭찬입니다. 히즈키야의 개혁으로 이스라엘은 본래의 신앙심을 가지고 본래의 삶을 살려는 자세로 돌아오게 됩니다.
히즈키야의 민족주의 : 아시리아 침공 직면
히즈키야가 바알산당을 철거했습니다. 아시리아 신을 위한 제단을 철거해야겠다는 말은 아시리아와 적대관계가 되겠다는 말과 같습니다.
(일제 때 우리나라는 신사참배를 강요당했습니다. 만약 신사를 철거한다고 하면 일본에 대한 적대행위로 간주될 것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에서 아시리아 제단을 철거한다면 아시리아에 대적한다는 말입니다. 더구나 히즈키야 때는 정교분리가 안되어 있던 때였습니다. 그러니 이스라엘은 아시리아로부터 공격 당할 수 밖에 없는 처지에 빠지게 됩니다.
<이스라엘의 남은 자>
기원전 722년 북이스라엘의 멸망
하느님의 주권을 믿고 구원을 신뢰해야
아시리아 : 기원전 701년 유다 침공
예루살렘 점령 실패, 바빌론에 의해 멸망
“그 날에 이러한 일이 일어날 것이다.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과 야곱 집안의 생존자들이 더 이상 자기들을 친 자에게 의지하지 않고,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 주님께만 충실히 의지할 것이다.”(이사 10,20)
이사야는 아시리아를 두려워하지 말라고 합니다.
북이스라엘 왕국은 기원전 722년에 아시리아에 의해 멸망했습니다. 북이스라엘은 이집트에 지원을 요청하다가 멸망했습니다. 안전을 위해서 강대국에 손 벌리고 강대국의 군사력에 의지해 봤자 살아남지 못합니다.
이사야는 “오직 하느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핍박을 받더라도 하느님께서 장차 우리를 구해주시리라는 확고한 믿음을 가진다면 너희는 살아남을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시리아는 기원전 701년에 유다를 침공해서 예루살렘 주변을 점령했지만 예루살렘은 점령하지 못하고 퇴각해버립니다. 얼마 후에 아시리아는 바빌론에 의해 멸망당하고 맙니다.
이사야가 얘기하고자 하는 것은 “이 세상 왕들로는 우리가 영원한 평화를 얻을 수 없다. 아시리아에게 파괴당할지라도 그것이 끝이 아니다.”는 것입니다.
<메시아의 평화의 왕국>
이사야는 메시아 왕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이사이의 그루터기에서 햇순이 돋아나고 그 뿌리에서 새싹이 움트리라.”(이사 11,1)
이사이는 옛날 성경에는 ‘이새’라고 번역되어 있었습니다.
‘이새’, ‘이사이’는 다윗의 아버지입니다.
이사야는 ‘다윗왕가의 후손에서 메시아가 나온다’고 예언합니다.
“그 위에 주님의 영이 머무르리니 지혜와 슬기의 영, 경륜과 용맹의 영, 지식의 영과 주님을 경외함이다. 그는 주님을 경외함으로 흐뭇해하리라. 그는 자기 눈에 보이는 대로 판결하지 않고 자기 귀에 들리는 대로 심판하지 않으리라. 힘없는 이들을 정의로 재판하고 이 땅의 가련한 이들을 정당하게 심판하리라. 그는 자기 입에서 나오는 막대로 무뢰배를 내리치고 자기 입술에서 나오는 바람으로 악인을 죽이리라. 정의가 그의 허리를 두르는 띠가 되고 신의가 그의 몸을 두르는 띠가 되리라. 늑대가 새끼 양과 함께 살고 표범이 새끼 염소와 함께 지내리라. 송아지가 새끼 사자와 더불어 살쪄 가고 어린아이가 그들을 몰고 다니리라.”(이사 11,1-6)
메시아의 다스림 : 정의가 바로 서고, 평화롭게 공존하는 세상
이사야는 하느님의 뜻이 궁극적으로 실현되는 세상은 메시아가 오심으로써 이루어진다고 보았습니다. 메시아가 오시면 세상은 공정과 정의를 되찾고 만물이 평화롭게 공존하게 되리라는 것입니다.
하느님에 대한 참된 믿음 : 두려움 없이 굳건하게 설 수 있는 용기의 원천
하느님께 대한 확고한 믿음이 있으면 힘들고 어려운 환경에 처해도 용기를 갖고 기도할 수 있습니다. 어떤 처지에서도 기도해야합니다. 우리는 하느님께 대한 참된 믿음으로 어려운 처지를 극복해낼 수 있습니다.
“보라, 하느님은 나의 구원, 신뢰하기에 나는 두려워하지 않는다. 주님은 나의 힘, 나의 굳셈. 나에게 구원이 되어 주셨다.‘”(이사 12,2)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사야 예언자의 말씀대로 하느님께서 구원해주실 것이라는 믿음을 간직하고 용기를 얻고 희망의 끈을 놓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세상을 심판하신다.>
하느님의 심판 : 회개시키기 위한 것
“보라, 주님께서 땅을 파괴하고 황폐시키시며 그 표면을 뒤엎고 주민들을 흩으신다.”(이사 24,1)
하느님은 당신을 믿지 않는 백성은 심판하셨습니다. 하느님의 징벌은 멸망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라 회개시키기 위한 것입니다.
“그분께서는 죽음을 영원히 없애 버리시리라. 주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의 얼굴에서 눈물을 닦아 내시고 당신 백성의 수치를 온 세상에서 치워주시리라.”(이사 25,8)
탕자의 비유에서 아버지는 돌아온 작은아들에게 잔치를 벌여주십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믿고 따르는 백성들, 그 남은 자들에게 축복을 내려주실 것입니다.
모퉁잇돌 : ‘소수의 남은 자들’
이사야가 예언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왕과 대다수의 백성들이 필요하지는 않습니다. 모퉁잇돌이 필요합니다.
“보라, 내가 시온에 돌을 놓는다. 품질이 입증된 돌 튼튼한 기초로 쓰일 값진 모퉁잇돌이다.”(이사 28,16)
모든 왕들, 모든 사람들이 다 필요한 게 아닙니다. 당신만을 믿고 의지하며 구원의 희망을 품고 있는 소수의 남은 자들이 필요합니다.
‘소수의 남은자들’을 다스리는 분이 메시아이십니다.
<정의의 나라>
정의롭고 공정한 다스림
이사야는 정의의 나라에 대해 이렇게 예언합니다.
“보라, 임금이 정의로 통치하고 제후들이 공정으로 다스리리라.”(이사 32,1)
아무도 소외되지 않고 풍요를 누리는 세상
“그 때에 눈먼 이들은 눈이 열리고 귀먹은 이들은 귀가 열리리라. 그 때에 다리 저는 이는 사슴처럼 뛰고 말 못하는 이의 혀는 환성을 터뜨리리라. 광야에서는 물이 터져 나오고 사막에서는 냇물이 흐르리라.‘(이사 35,5-6)
물은 생명의 원천입니다. 왕들은 자기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억압하고 착취했지만 메시아가 오시면 정의롭고 공정한 세상이 열릴 것이라고 말합니다. 아무도 소외되지 않고 풍요를 누리는 세상이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메시아로 오신 예수>
감옥에 있는 세례자 요한이 제자를 예수에게 보내서 “오시기로 된 분(메시아)이 당신이십니까? 아니면 또 다른 분을 기다려야합니까?”라고 묻게 합니다.
예수님께서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에게 이렇게 답하십니다.
“요한에게 가서 너희가 보고 들은 것을 전하여라. 눈먼 이들이 보고 다리 저는 이들이 제대로 걸으며, 나병 환자들이 깨끗해지고 귀먹은 이들이 들으며, 죽은 이들이 되살아나고, 가난한 이들이 복음을 듣는다. 나에게 의심을 품지 않는 이는 행복하다.” (루카 7,22-23)
예수님께서 “내가 메시아다”라고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통해 이루어진 일을 보고 예수님이 메시아이심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구약의 약속이 신약에서 성취된 것입니다.
그리스도인 : 이 시대의 ‘남은 자’로 살아야 하는 존재
예수님은 이스라엘의 진정한 남은 자들로 당신의 교회를 세우십니다. 교회는 거대한 하느님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하느님의 백성들이 살고 있는 세상은 이사야가 살던 세상과 같습니다. 이사야 시대의 사람들 생활과 우리들의 생활이 똑같습니다. 더할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교회의 일원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남은 자’ 역할을 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남은 자가 되어야 합니다. 이사야 예언자가 우리에게 묻는 것은 바로 그것입니다. 이스라엘 왕과 백성들처럼 하느님 말씀에 귀를 막고 마음이 굳어진 채 성전에 나가 제물을 바치면서, 자기 이익이나 비는 사람들과 무엇이 다른가? 이사야 예언자는 지금 우리에게 묻고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회개하고 내 삶을 개조하려고 생각하지 않는다면 이사야서를 공부할 이유가 없습니다
(돈으로 청와대고 검찰이고 법원이고 국세청이고 좌지우지하는 세상에서.... 성탄 때 누가 나한테 오백만원 준다면 거절하겠어요? 받겠어요? .....)
정의구현 사제단이 나와서 삼성 비자금 발표를 하는 기사가 뜨니, “신부님들이 미사나 하면 되지, 신앙이 마음 편히 해주는 게 신앙 아니야? ”라는 악의적인 댓글들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이사야 예언자는 ‘그래도 우리는 꿋꿋하게 눈 멀게 하고 귀 먹게 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왜곡 없이 올바로 전달하고 불의를 깨우쳐야 한다고 말합니다. 오늘날 정의구현 사제단 같은 활동이 없다면 우리는 이사야 예언자에게 나아갈 염치가 없을 겁니다.
우리는 알게 모르게 가랑비에 옷 젖듯이 부정 부패에 젖어있습니다. 우리는 돈 따먹는 사람은 그러기도 하는 거야, 정치하는 사람들은 뒷주머니 챙기는 거야.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세상 안에서 우리는 ‘남은 자’로서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우리가 왜 교회에 머물러 신앙생활을 해야하는가’를 이사야 예언서를 공부하면서 생각해 봐야합니다.
<김양진 선생님 언제나처럼 훌륭한 강의해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기쁜 성탄절 보내시기 바랍니다.>
'성경, 지혜의 샘 > 김양진 선생님의 성경교실' 카테고리의 다른 글
25. 그 때에 나는 새 계약을 맺겠다. (0) | 2008.08.28 |
---|---|
24. 주님은 저의 피난처이십니다. - 예레미야서 (0) | 2008.08.28 |
22. 내가 너를 어찌 버리겠느냐? (0) | 2008.08.28 |
21. 정의를 강물처럼 흐르게 하여라! (0) | 2008.08.28 |
20. 왕국의 멸망과 바빌론 유배 (0) | 2008.08.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