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지혜의 샘/김양진 선생님의 성경교실

22. 내가 너를 어찌 버리겠느냐?

김레지나 2008. 8. 28. 19:05

성경교실(구약) : 자료-22



내가 너를 어찌 버리겠느냐?


* 호세아서

 호세아서는 예로보암 2세 재위 말기(기원전 750년)부터 북 이스라엘 왕국이 멸망(기원전 722년)하기 전까지 활약한 예언자이다. 호세아라는 이름은 “야훼가 구원하셨다.”라는 뜻이다. 호세아 예언자의 결혼생활과 그가 전한 신탁들을 기록한 호세아서는 내용에 따라 네 부분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1. 부정한 아내 이스라엘(1,1-3,5)

2. 우상을 섬기다가 망하리라(4,1-9,9)

3. 내가 어찌 너를 버리겠느냐(9,10-14,1)

4. 이스라엘은 다시 꽃피리라(14,2-10)



* 예언자 호세아

 호세아 예언자는 하느님께서 이스라엘과 맺으신 시나이 계약을 신랑 하느님과 신부 이스라엘과의 혼인에 비유한 최초의 예언자이다. 하느님께서는 시나이 광야에서 이스라엘과 계약(혼인)을 했다. 따라서 이스라엘의 우상숭배는 하느님과의 계약(혼인)을 파기하는 행위로서 하느님의 징벌을 피할 수 없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끝까지 이스라엘과 화해하고자 하신다. 이것이 바로 이스라엘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이다.



* 호세아의 세 아이들 이름

 하느님을 배신하고 우상숭배에 빠진 이스라엘에 대한 심판을 상징한다.

- 장남 ‘이즈르엘’ : 북 왕국의 멸망을 암시하는 상징적인 이름이다.

- 장녀 ‘로 루하마’ : 하느님께서 당신을 배신한 이스라엘을 더 이상 불쌍히 여기지 않을 것임을 상징하는 이름이다.

- 차남 ‘로 암미’ : 하느님과 이스라엘 사이에 맺은 계약(혼인)이 파기되었음을 상징하는 이름이다.


* 호세아가 고발한 이스라엘의 죄

 - 이스라엘 백성 : 하느님께서 시나이 계약 때 당신의 법으로 주신 십계명조차 지키지 않았고, 우상 숭배의 노예가 되어 자신을 반성하거나 개선시켜보려는 의지가 전혀 없었다.

- 사제들의 죄 : 백성에게 하느님에 대한 지식을 올바르게 가르치지 않았고, 백성의 무지를 이용하여 오히려 이득을 취하기 바빴다.

- 왕실과 지배층의 죄 : 불과 20여년 사이에 다섯 명의 왕 가운데 무려 네 명을 폭력적 수단으로 바꾸었고, 하느님의 권능 대신 강대국의 힘을 절대시하여 자기네 운명과 안전을 맡겼다.


* ‘하느님을 아는 예지’

 하느님의 사랑에 대한 전인적인 응답을 말한다. 하느님의 사랑에 대한 전인적인 응답이란 힘없고 가난한 사람들이 도움을 갈구하는 세상에서 입에 발린 구호만 외쳐대는 것이 아니라 사랑과 자비를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것이다.

 

* 하느님의 심판과 징벌

 호세아 예언자는 하느님의 심판이 이스라엘의 구원을 위한 것이라고 선언한다.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을 징벌하시는 목적은 파괴가 아니라 치유다. 따라서 하느님의 징벌은 이스라엘을 죄의 굴레에서 해방시켜 새로운 생명, 새로운 계약을 추구하게 하는 사랑의 표현인 것이다.


* 사랑의 예언자 호세아

 ‘사랑의 예언자’라고 불리는 호세아의 메시지는 ‘은총의 낙관주의’라고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의 유일한 희망은, 호세아의 결혼생활이 보여주듯이, 당신 백성 이스라엘에게 보여주시는 하느님의 끊임없는 사랑이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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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음 주 주제 :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 읽어야 할 성경 : 이사야서 1장 - 39장

* 성경구절 쓰기 : 이사 6,1-3 ; 6,12-13 ; 7,14 ; 9,1 ; 9,5 -6 ; 10,20-21 ;

                  11,1-2 ; 12,2 ; 25,8 ; 28,16 ; 34,5-6

<이하 김양진 선생님의 강의 정리입니다.>



호세아 예언자는 오늘날 교회에까지 큰 영향을 미치는 예언자입니다.


<호세아서>


북이스라엘 왕국에서 예로보암 2세 재위 말기에 활동한 예언자

호세아 : “야훼가 구원하셨다.”


전 시간에 배웠던 아모스 예언자는 호세아보다 10년쯤 전에 활동한 예언자였습니다. 아모스 예언자가 활동하던 때는 북 이스라엘이 마지막 전성기를 보낼 때였습니다. 아모스 예언자 이후 10년 지났으니 이스라엘의 전성기가 거의 끝날 시기였고, 혼란스럽고 우상숭배가 극심한 시기였습니다. 아시리아가 공격해 올 기미가 보이고 있었습니다.

호세아는 예로보암 2세 재위 말기(기원전 750년)부터 북 이스라엘 왕국이 멸망(기원전 722년)하기 전까지 활약한 예언자입니다.

호세아 예언자는 아모스와 비슷한 시기이지만 10년 차이가 나니 이스라엘의 상황이 많이 달라져있었습니다. 10 년 사이에 시대변화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 알 필요가 있습니다.

(10년 전 IMF 때와 지금은 많이 다릅니다. 지금 아무리 살기 힘들다고 해도 그 때보다 훨씬 나아졌습니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했습니다. )


호세아의 이름은 “야훼가 구원하셨다.”는 뜻입니다.

(대개 예언자들의 이름은 하느님을 표현하거나, 하느님께 의지하거나 하느님으로부터 도우심을 받는다는 뜻을 가졌습니다.)

이다. 


호세아 예언자의 결혼생활과 그가 전한 신탁들을 기록한 호세아서는 내용에 따라 네 부분으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1. 부정한 아내 이스라엘(1,1-3,5)

2. 우상을 섬기다가 망하리라(4,1-9,9)

3. 내가 어찌 너를 버리겠느냐(9,10-14,1)

4. 이스라엘은 다시 꽃피리라(14,2-10)



<호세아가 혼인하다>


호세아 -고메르

하느님 - 이스라엘

호세아서는 재미있는 이야기부터 시작합니다.

하느님께서 호세아한테 결혼하라고 합니다.

“너는 가서 창녀와 창녀의 자식들을 맞아들여라. 이 나라가 주님에게 등을 돌리고 마구 창녀 짓을 하기 때문이다.” (호세 1,2)

“호세아는 가서 디블라임의 딸 고메르를 아내로 맞아들였다.”(호세 1,3)

하느님께서 호세아에게 ‘고메르’라는 여인을 데려와서 혼인하라고 합니다. 고메르는 직업이 창녀입니다.

(여러분 자식들한테 창녀한테 시집가라고 하면 어떨까요? 끔찍합니다. 하느님께서 상상할 수 없는 명령을 내리신 것입니다.)

호세아와 고메르의 관계는 하느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를 표현합니다.


시나이 계약 : 신랑 하느님과 신부 이스라엘의 혼인으로 비유

하느님께서 시나이에서 이스라엘 백성과 계약을 맺은 것을 호세아는 신랑 하느님과 신부 이스라엘의 혼인으로 비유합니다. 호세아는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를 신랑 신부로 비유한 최초의 예언자입니다. (그 이후 많은 예언자들과 신약에서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를 혼인관계로 많이 이야기합니다.)


신전창녀 ‘고메르’ - 우상숭배에 빠진 이스라엘

 이스라엘이 잘나서, 똑똑해서, 예뻐서 하느님이 선택하신 게 아닙니다. 하느님은 온 인류를 당신 백성으로 삼기 위해서 한 백성을 뽑으신 것입니다. 그 당시 가장 비참하게 살던 백성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구출하신 것은 힘없고 짓밟힌 백성을 구원해내신 것이었습니다. 하느님이 이스라엘을 이집트에서 구원해낸 것은 이스라엘과 혼인한 거나 같다고 호세아는 풀이했습니다.

 혼인하면 서로 위하고 아플 때나 병들 때나 돌봐주기로 서약을 합니다. 그런데 한쪽이 신의를 깨뜨리면 결혼이 파기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정착하면서부터 우상, 즉 가나안의 신들을 섬기기 시작했습니다. 가나안 신을 섬기는 것은 신랑을 두고 바람을 피우는 것과 같습니다. 가나안에서는 바알신이 풍요의 신이었고, 남녀의 성적 결합을 함으로써 신들의 결합을 자극하여 풍요로운 소출이 난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신전창녀를 두었고, 풍기가 문란했습니다.

신전창녀짓을 한 고메르는 우상숭배에 빠진 이스라엘을 가리킵니다.


세 아이들의 이름 : 이스라엘의 심판을 상징

 이렇게 하느님 사랑을 배신한 이스라엘, 호세아를 배신한 고메르는 자신의 자리를 못 지킵니다. 먼저 배신했으니 버림받는 게 마땅합니다.

호세아 아이들의 이름에는 하느님을 배신한 이스라엘을 심판하신다는 하느님의 의지가 담겨있습니다.

장남 -  ‘이즈르엘’, “북왕국 제 2의 수도”

 이즈르엘은 아합이 이제벨과 결혼해서 궁전을 세운 곳이고, 그들이 나봇의 포도밭은 뺏은 곳입니다. 사마리아는 이스라엘의 정식 수도였고, 이즈르엘은 제 2의 수도 역할을 했던 곳입니다.  아합이 혁명을 일으켜  요탐을 죽인 곳입니다.

그런 곳이었으니 이즈르엘은 멸망을 당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장남의 이름은 이스라엘은 멸망한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장녀 - ‘로 루하마’ , “가엾이 여김을 받지 못하는 여자

 이스라엘이 하느님한테 동정심도 받을 수 없는 입장이 되어버렸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차남 - ‘로암미’, “ 나의 백성이 아니다.”

 차남의 이름은 내 자식, 내 백성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배신한 이스라엘을 고발하여라.>


이스라엘의 우상숭배 : 하느님과의 계약 (혼인) 파기

하느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는 이혼관계에 들어갔습니다. 남남이 되어버렸습니다.

이스라엘이 창녀짓을 해서 하느님으로부터 이혼을 당한 것입니다. 하느님이 그렇게 하시고 싶으셨던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이 배신했기 때문입니다.

 호세아가 자기 아내에게 말하듯이 이스라엘을 이렇게 고발합니다.

“너희 어미는 내 아내가 아니고, 나는 그 남편이 아니다.”(호세 2,4)

하느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를 파기된 것으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화려한 치장 : 매춘부

화대 (花代) : 안전과 번영

애인들 : 가나안의 우상들

혼인계약이 파기된 이유를 이렇게 말합니다.

“그 여자는 바알들에게 분향하고 귀걸이와 목걸이로 단장한 채 애인들을 쫓아갔다. 그러면서 나를 잊어버렸다.‘(호세 2,15)

여자가 화려한 치장을 하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하느님께 받은 은혜는 잊어버리고, 농사 잘 지으려 바알에게 잘 보이려 하는 것과 같습니다.

‘애인’은 가나안의 우상들입니다. 여자가 웃음을 팔 때는 바라는 게 있습니다. 그걸 화대라고 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느님이 싸움을 잘하게 해 주실지는 몰라도 농사를 잘 짓게 해주신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바알이 자신들에게 안전과 번영을 주기를 바랐습니다.




<가나안 정착과 농경생활 시작>


하느님 = 금송아지 = 바알신

하느님 신앙과 바알신앙의 혼합

하느님의 은혜는 망각

풍요로운 소출은 바알의 은혜

하느님이 보시기에 한심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기껏 길러놓았더니 엉뚱한 곳에 예배를 한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먹고 살만해진 것은 하느님의 덕입니다. 종살이할 때 구해주셨고, 홍해바다에 빠질 뻔하니 건져내주셨고, 가나안 땅을 주셨습니다.

출애굽과 가나안 정복은 하느님의 은혜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정착하고 나서 하느님 은혜를 잊어버렸습니다. 예로보암은 금송아지를 두고 신앙을 뒤섞어 놓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느님을 완전히 잊지는 않았지만. 당장 잘 먹고 잘 살기 위해서 바알에게 예배했습니다. 풍요로운 소출이 나면 바알의 덕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스라엘의 배신에 대한 하느님의 징벌

이스라엘의 멸망 - 스스로 멸망의 길로 간 것

그 결과 이스라엘 사람들의 심정은 이렇게 되었습니다.

“그 여자는 내가 햇포도주와 햇기름을 주고 바알을 위하여 그들이 쓴 금과 은을 불려주었음을 알지 못한다.”(창세 2,10)

그래서 하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나는 때가 되면 내 곡식을 되찾고 절기가 되면 내 햇포도주를 되찾으리라. 그리고 알몸을 가리라고 준 내 양털과 아마 옷을 벗겨 내리라.” (호세 2,11)

하느님의 지금까지 다 베풀어주셨는데 하느님의 은혜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계속 은혜를 베풀 수는 없는 일입니다. 바알한테 풍요로운 은총을 받았다고 믿고 있다가 나라가 망하면 다 뺏기는 것입니다. 하느님이 뺏는 게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 스스로 멸망의 길을 가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지옥을 만드신 게 아니라 사람들이 제 발로 걸어가는 것입니다.)





<광야에서의 새로운 출발>


광야 : 계약의 장소, 계약 갱신의 장소

사람들은 배신하면 이혼하고 벌을 줍니다. 벌주는 것까지는 인간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사랑은 이스라엘의 배신보다 큽니다.

하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이제 나는 그 여자를 달래어 광야로 데리고 가서 다정히 말하리라.”(호세 2,,16)

하느님이 로맨티스트 같습니다. (부부간에 사이가 안 좋아지면 신혼여행지로 다시 가보고 그 시절로 다시 돌아가자고 합니다. 하느님께서 지금 그러고 계신 것입니다. )

하느님은 광야에서 “너 왜 그러냐?” 윽박지르지 않으시고, 다정히 속삭여주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으로 가기 전에 머물던 광야가 하느님과 이스라엘의 신혼여행지였습니다. 광야는 오직 하느님만을 의지해야 할 장소였습니다. 광야는 다시 한번 옛 기억을 되살려 계약을 갱신할 수 있는 장소입니다.

(여러분들, 피정을 자주 가시지요? 피정을 가는 첫째 목적은 세례 받을 때 마음으로 돌아가자, 초심으로 돌아가자는 것입니다. 세례 받을 때는 참 열정적이고, 하느님 없으면 못 살 것 같았는데, 살다보니 마음이 무디어져갑니다. 피정방법은 여러 가지이지만 목적은 ‘세례받을 때로 돌아가자’, ‘광야체험을 하자’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포도밭 : 하느님의 백성으로 받아주시겠다.

아코르 골짜기 : 유다 광야의 고원지대

하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거기에서 나는 그 여자에게 포도밭을 돌려주고 ‘아코르 골짜기’를 희망의 문으로 만들어 주리라.”(호세 2,17)

하느님께서 포도밭을 돌려주겠다고 하십니다.

하느님이 포도밭을 뺏었던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포도밭은 이스라엘 백성을 가르킵니다. (포도는 중요한 식물이었습니다. 포도주는 음식 먹을 때 빠지지 않았고, 제사 지낼 때도 쓰였습니다.)

하느님과 이스라엘(호세아와 고메르)이 이혼했었는데 다시 당신 백성으로 받아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아코르 골짜기를 희망의 문으로 만들어주시겠다고 말합니다.

아코르는 유다 지방의 고원지대에 있습니다.

((사진을 보시면) 이 곳은 쿰란이라고 불리는 곳입니다. 사해 옆에 있는데, 새로운 메시아가 이곳으로 와서 새로운 계약이 이루어지리라고 생각했던 곳입니다. 그 곳 동굴에서 구약 사본이 발견되었습니다. 성지순례를 가면 볼 수 있습니다. 이사야예언서 전체 두루마기가 거의 완전한 형태로 발견된 곳입니다.)

그런 골짜기에 서 있으면 보이는 게 황량함, 단순함 뿐입니다. 먹을 것 , 잠잘 것, 입을 것이 없습니다. 오직 하느님 덕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좀 먹고 살게 되어 집짓고, 성전 짓고, 무역하고, 그럴 수 있는 것이 하느님 덕인지도 모르고, 자기가 똑똑하고 잘나서 그렇다고 생각했습니다.  잘 되면 바알의 덕을 좀 봤다고 생각했습니다.

호세아는 그런 상태에서 다시 초심으로 돌아가자는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이 안 계셨으면 여기까지 못 왔다, 정화와 쇄신의 기회를 가져야한다”고 말합니다.


정화와 쇄신, 용서와 축복의 새 출발하는 기회

생명과 은혜를 베푸시는 하느님을 체험

포도밭을 돌려주고 아코르 골짜기를 희망의 문으로 만들어주시겠다는 말씀은 하느님께서 용서하시고 다시 축복해서 이스라엘이 새 출발하게 도와주시겠다고 약속하시는 말씀입니다.

하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거기에서 나는 그 여자는 젊을 때처럼, 이집트 땅에서 올라올 때처럼 응답하리라.”( 호세 2,17)

(부부가 신혼여행지를 다시 가보고 초심으로 돌아가자, 잘 해보자, 약속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을 그렇게 인도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다시 초심으로 돌아가서, 생명과 살 터전과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주시는 하느님을 다시 한 번 체험함으로써, 순수한 신앙으로 되돌아오기를 바라시는 것입니다.




<호세아가 아내를 찾아오다>


호세아 : 인간의 기준을 뛰어넘는 사랑

하느님은 호세아에게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너는 다시 가서, 다른 남자를 사랑하여 간음을 저지르는 여자를 사랑해주어라. 주님이 이스라엘 자손들을 사랑하는 것처럼 해주어라.”(호세 3,1)

하느님께서 호세아한테 하기 힘든 일만 시킵니다.  고메르가 이혼해서 집을 나갔는데, 그 고메르를 다시 데려오라고 하십니다.

이스라엘의 법에 의하면 부정을 저지를 여자가 이혼하면 다시 돌아올 수 없게 되어 있었습니다. 하느님께서 호세아에게 그 법도 뛰어넘으라 하십니다.


하느님 : 이스라엘에 대한 끝없는 사랑

이스라엘의 우상숭배를 창녀짓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상을 숭배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회개하기만 하면, 초심으로 돌아가면, 다시 받아주시고 사랑을 베풀어주시겠다는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이스라엘에 대한 하느님의 끝없는 사랑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사랑은 이스라엘과 하느님, 그리스도 교회와 그리스도를 연결시켜 묵상할 장면으로 계속 등장하게 됩니다.




<주님께서 이스라엘을 단죄하시다.>


호세아는 구체적으로 이스라엘이 무슨 창녀짓을 했는지 이야기합니다.

호세아서 1장부터 3장까지는 전체적인 이야기이고, 4장부터는 구체적으로 이스라엘이 무슨 짓을 했는지 이야기합니다.


‘십계명’ 조차 지키지 않는 백성

“정녕 이 땅에는 진실도 없고 신의도 없으며 하느님을 아는 예지도 없다. 저주와 속임수와 살인 도둑질과 간음이 난무하고 유혈참극이 그치지 않는다.”(호세 4,1-2)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느님이 주신 십계명을 다 어기고 있습니다. 하느님과 이스라엘 백성들의 혼인 서약서가 십계명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상숭배에 빠져 십계명도 지키지 않는 백성이 되어 버렸습니다.


반성과 개선에 대한 의지가 전혀 없는 백성

“그들은 그 행실 때문에 저희 하느님에게 돌아가지 못한다. 그들 안에 창녀기가 있어 주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호세 5,4)

하느님과 계약된 백성인데 , 십계명도 지키지 않는 백성이 되었으니, 하느님께 돌아갈 생각이 없는 것입니다. 우상숭배에 빠져 반성과 개선의 여지가 전혀 없는 모습입니다.





<사제들의 죄>


‘재물(財物)이라는 우상을 숭배하는 창녀짓’

이스라엘 백성들이 회개할 여지도 없게 된 데는 사제들과 왕실, 지배계층의  죄가 큽니다. 호세아는 사제들의 죄를 이렇게 고발합니다.

“그들은 내 백성의 속죄 제물을 먹고 살며 내 백성이 죄짓기만 간절히 바란다. 백성도 사제도 똑같이 되리라. 나는 그들이 걸어온 길에 따라 벌하고 그들의 행실에 따라 갚으리라.”(호세 4,8-9)

사제들의 임무 : 하느님에 대한 지식을 백성에게 가르치는 일

 사제들의 임무 중 제일 큰 것은 예배드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하느님이 어떤 분이시고, 하느님이 무슨 은혜를 베풀어주셨고, 하느님이 무엇을 원하시는지 가르쳐야합니다. 그 당시 그런 역할을 사제들이 했어야합니다. 그러나 사제들이 스승 노릇을 하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의 속죄제물을 희생제물이라고 합니다. 사람들이 죄를 지으면 자기가 받아야할 벌 대신 희생양을 바치면서 용서를 청합니다. 사제들은 ‘백성들이 죄를 많이 지으면 희생제물이 많이 올라오겠지’ 하고 기대하고, 백성들을 올바른 하느님 신앙으로 이끌지 않았습니다. 사세들이 젯밥에 눈이 어두웠습니다.

사제들이 ‘재물’이라는 우상숭배에 빠져서 사제노릇을 한 것입니다.

호세아는 이미 그 당에 ‘재물’이 우상이라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재물이 우상이라고 우리가 새롭게 해석한 말이 아니고, 이미 호세아가 재물도 곧 우상이라고 말했습니다.

사제들이 재물이라는 우상에 빠져있으니, 백성들은 하느님이 어떤 존재인지, 우리에게 무얼 원하시는지 몰라서 법을 어길 수밖에 없었습니다.




<왕실과 지배층의 죄>


‘권력’(權力)이라는 우상을 숭배하는 창녀짓

“그들은 모두 화덕처럼 뜨거워져서 저희 통치자들을 집어삼킨다. 이렇게 임금마다 죽어가건만 아무도 나에게 부르짖지 않는다.”( 호세 7, 7)

예로보암 2세가 기원전 746년에 죽0습니다. 그 아들 즈카르야는 왕위에 오른지 6개월만에 살룸에게 암살당합니다. 살룸도 6개월만에 므나헴에게 숙청당합니다. 므나헴은 제 명대로 살았고, 그 다음 왕 프카흐야는 부하 페카에게 2년만에 죽임을 당합니다. 페카는 이스라엘의 마지막 왕 호세아아게 피살됩니다.

즈카르야 : 살룸에게 암살

살룸 : 므나헴에게 숙청

므나헴 : 제 명대로

프카흐야 : 페카에게 희생

페카 :  호세아(이스라엘 마지막 왕)에게 피살

20년 동안 왕 다섯 명 중 네 명이 폭력으로 교체되었습니다. 왕실과 지배층이 엉망진창이 되었습니다. 음모, 살인이 난무했습니다. (오늘날 정치판도 그와 비슷합니다. 어제까지 동지하다가 오늘 죽일 놈 살릴 놈 합니다....)


‘외세’(外勢)라는 우상을 숭배하는 창녀짓

왕실의 죄는 그것뿐 만이 아닙니다.

“에프라임은 비둘기처럼 어리석고 지각이 없다. 그들은 이집트에 부르짖고 아시리아로 간다. 그러나 나는 그들이 갈 때 그 위로 그물을 던져 하늘의 새를 잡듯이 잡아채리라.”(호세 7,11-12)

“에프라임”은 이스라엘 왕국을 일컫는 말입니다.  그 시대에 이스라엘은 북쪽으로는 아시리아, 남쪽으로는 이집트, 강대국 사이에 끼어서 이쪽에 붙었다, 저 쪽에 붙었다 갈팡질팡했습니다.

이집트 : 과거에 종살이를 했던 나라.

아시리아 : 막강한 군사력을 가진 나라

이스라엘은 하느님께 매달리지 않고, 과거 종살이 했던 이집트에 지켜달라고 청하고, 아시리아에서 조공을 바치고 그 신들에게 안전을 빌었습니다. 하느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지켜주시는 게 아니라, 이집트 군대나 아시리아의 군대나 신이 지켜준다고 믿은 것입니다. 이미 하느님은 뒷전이 된 것입니다.

(오늘날 독재국가에서는 외세를 등에 업고 자기 정권만 유지하면 된다는 대통령들이 있습니다. 최근에 파키스탄의 대통령이 쫓겨날 것 같으니까 비상사태를 선포했습니다. 미국에서 뒤를 봐주니 가능합니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혁명 일으키면 맨 먼저 미국으로 달려가서 인준을 받아야 했습니다. 대통령 되려는 사람도 미국에 가서 사진을 찍어오려고 했습니다. 우리는 먹고살만하다고 하지만 정치적으로는 한참 후진국입니다.  누가 몇 천 만원, 몇 억을 먹어도 ‘그런 사람, 사업하는 사람들은 그럴 수 있지’라고 생각합니다.)


예언자들의 말로는 거의 다 비참합니다. 그러나 예언자들이 말하지 않으면 자갈들도 소리지를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은 반드시 펼쳐지게 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불성실한 회개>


피상적이고 일시적인 회개

호세아가 멸망을 예언하니 이스라엘이 하느님께 돌아가자고 이렇게 말합니다.

“자, 주님께 돌아가자. 그분께서 우리를 잡아 찢으셨지만 아픈 데를  고쳐 주시고 우리를 치셨지만 싸매 주시리라. ”(호세 6,1)

(말은 그럴듯 합니다. 우리도 기도할 때는 기막히게 잘합니다. 통성기도하는 모교회 교인들을 보면 참 대단합니다.)

그러나 피상적이고 일시적인 회개는 하느님께서 용납하시는 진정한 회개가 아닙니다.

이스라엘의 역사 : 배신 - 징벌 - 회개 - 용서- 되풀이되는 배신


하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의 신의는 아침 구름 같고 이내 사라지고 마는 이슬 같다.”(호세 6,4)

이스라엘 백성들은 계약서 도장도 마르기 전에 금송아지 만들었던 백성입니다.

여호수아서, 열왕기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과정을 반복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니 하느님이 보시기에 이스라엘 백성들의 회개는 흘러가는 구름, 아침 이슬, 사라져가는 안개와 같은 것입니다.


형식적인 예배가 아니라 계약에 대한 성실성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진실된 회개와 항구적인 실천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정녕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신의다. ‘(호세 6,6)

(제사지낼 때 제사 예식을 두고 싸우는 집안이 있습니다. 그게 뭐가 중요한지 모르겠습니다. 어른들이 모이면 조상이 베푼 은혜를 생각하는 게 아니라 법도가 그게 아니라고 서로 싸웁니다. )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예배도 그런 형식적인 예배가 아닙니다. 신의를 바라십니다. 하느님께서는 하느님과 맺은 계약을 꾸준히 성실하게 지키는 것이 하느님께 대한 예배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을 도구로 삼아 이득을 구하는 사람들

현세기복, 죄책감 해소, 자기 위안

어제 나주 성모님에 관한 피디수첩 보셨습니까? 극히 일부지만 그렇게 우매할 수가 없습니다. 제가 교구청에 있을 때 십여 년 전에 나주에서 만든 비디오테이프를 녹취한 적이 있습니다. 말 받아 적는 게 힘든 게 아니라 역겨움을 참기가 힘들었습니다. 뻔한 사기인데 왜 사람들이 빠져드는지 모르겠습니다.

하느님을, 신앙을 도구로 삼으면 안됩니다. 신앙생활을 하면 복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교회에 돈을 좀 내고 빌면 죄를 용서받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고 위안을 삼습니다. 우리 신앙에서 이런 부분이 있으면 잘라내야 합니다.

하느님이 현세 복 받고, 돈 주고, 손 비비면 죄를 용서받은 것처럼 위안을 받습니다. 우리 신앙에서 이런 면을 잘라내야 합니다.

 

‘칼 막스’ 가 “종교는 아편이다.”라고 했습니다.

칼 막스는 공산당 선언을 쓴 사람입니다. 종교가 아편이라는 말은 물론 터무니없는 말입니다. 하지만 막스가 그런 말을 할 수 있도록 만든 종교인이 있었을 것입니다. 나주 사건이 바로 종교가 아편임을 실증하고 있습니다. 옥석을 구분할 줄 알아야 합니다. 신앙심을 이용해서 치부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해악을 끼치는 사람들이 종교를 아편으로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사제답지 않은 사제 한 두 명 때문에 나주에서 미사가 이루어졌습니다. 신자들은 미사가 이루어지면 공적으로 인정받은 곳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큰 죄를 짓고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제대로 아는 예지가 있어야합니다.


하느님을 아는 예지 : 하느님의 사랑에 대한 전인적인 응답

하느님은 그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번제물이 아니라 하느님을 아는 예지다”(호세 4,9)

하느님을 아는 지혜는 하느님의 사랑을 깨닫고 거기에 응답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안다는 것, 하느님께 예배한다는 것은 하느님이 우리에게 해주신 일, 종살이 해방, 먹여주고 입혀주신 은혜를 다시 되돌려드리는 일입니다. 우리가 손 비비고 미사예물 바치면 하느님께 되돌려드리는 일일까요? 하느님께서 진정으로 바라시는 것은 그런 제물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베푸신 은혜를 자기보다 힘이 없는 사람에게 되돌려주는 것이 바로 ‘하느님을 아는 예지’입니다.

사랑과 자비를 실천하는 것이 하느님을 아는 예지입니다.

형식적인 규칙을 지키고 “하느님 없으면 못 살아요”라고 구호로만 하느님을 찾는 것은 다 공허한 것입니다.


바리사이 사람들의 위선

예수님도 형식적인 규칙을 지키고, 구호로만 하느님을 찾는 바리사이들을 질책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세리들과 죄인들과 식사하셨습니다. 바리사이파들에게는 큰 일 날 일이었습니다. 바리사이인들은 자기네들은 깨끗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하고, 세리나 죄인을 만지거나 같이 식사하면 부정 탄다고 생각했습니다. 바리사이인들은 “사람들로부터 예언자로 불리는 예수가 죄인들과 한 식탁에서 밥을 먹다니,,” 하고 예수님을 비난했습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가서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제물이 아니라 자비다.’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배워라.”(마태 9,13)

호세아서를 예수님이 그대로 인용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구약을 공부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에게 경고하다.>


호세아가 경고합니다.

“그들의 악한 행실 때문에 나는 그들을 내 집에서 쫓아내리라. 나는 더 이상 그들을 사랑하지 않으리라.”(호세 9,15)

“주님의 땅에서 그들은 살 수 없으리라. 에프라임은 이집트로 돌아가고 이사리아에서 부정한 음식을 먹으리라. 그들은 주님께 포도주를 부어 드릴 수 없고 그들의 희생 제물도 그분께 달갑지 않으리라.”(호세 9,3-4)

이렇게 하느님을 철저히 외면하고 하느님을 배신한 이스라엘은 원래 상태로 돌아갈 수 밖에 없습니다. 원래 상태로 돌아간다면 이집트에서 종살이하던 시절로 돌아간다는 말입니다. 이집트에서 종살이하던 때로 돌아갈 것이라는 말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렇게 비참한 상태로 떨어질 거라는 말입니다. 종살이하게 될 장소는 이집트 대신 아시리아입니다.

결국 북이스라엘은 기원전 722년 아시리아에 의해 멸망합니다.

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하느님께서 초심으로 돌아가자고 달래셨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말을 듣지 않았기에 다 빼앗기게 되었습니다.




<하느님의 극진한 사랑>


그래도 호세아는 절대로 하느님의 사랑의 끈을 놓지 못합니다. 이 점이 아모스와 호세아 예언자의 다른 점입니다.

아모스는 이스라엘의 잘못에 대해 준엄하게 꾸짖습니다. (물론 시기적으로 다급했지만...) 아모스가 큰 형처럼 윽박지르듯이 표현을 했다면, 호세아는 큰 누나같이 보드랍게 표현합니다. 그러나 하고자 하는 말은 같습니다.


죄의 굴레에서 해방시켜 새로운 생명 추구케 하는 사랑의 표현

호세아는 “너희가 죄를 지어 멸망하지만, 너희들을 끝장내기 위해서가 아니고, 너희들의 구원을 위한 심판이다”라고 말합니다.

“에프라임아, 내가 어찌 너를 내버리겠느냐? 이스라엘아, 내가 어찌 너를 저버리겠느냐? 내가 어찌 너를 아드마처럼 내버리겠느냐? 내가 어찌 너를 츠보임처럼 만들겠느냐? 내 마음이 미어지고 연민이 북받쳐 오른다.”(호세 11,8)

하느님께서 인간을 대하시는 모습입니다.

하느님은 죄를 지은 인간을 끝끝내 버리지 못하십니다. 자식들이 잘못해서 내쫓아도, 부모들은 마지막 끈 하나는 잡고 있습니다. 자식이 다시 마음을 고쳐 돌아오기만을 바랍니다. 하느님의 마음은 그런 부모의 마음과 같습니다.

하느님께서 징벌하신 것은  파괴, 말살시키려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백성들을 고치기 위해서입니다. 이스라엘백성들이 십계명도 무시하고 반성할 기미도 없으니  그 상태로 놔두면 다시 회개할 가능성이 없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치유하시기 위해 충격요법을 쓰시는 것입니다. 철저히 망해봐야 다시 철저한 회개를 통해 새로운 생명으로 거듭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징벌은 새로운 생명으로 거듭나라는 사랑의 채찍입니다.


징벌 - 회개 - 새 출발

호세아 - 고메르, 하느님 - 이스라엘

하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이다. 나는 네 가운데에 있는 ‘거룩한 이’ 분노를 터뜨리며 너에게 다가가지 않으리라.” (호세 11,9)

하느님께서 호세아에게 말하는 사랑은 인간의 기준을 뛰어넘습니다. 젊은이들의 얄팍한 사랑과 다릅니다. 조금만 자기 뜻에 안 맞아도 돌아서는 감상적 사랑이 아닙니다. 부부간에 자식 교육문제 등으로 툭하면 티격태격하는 사랑도 아닙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깊고 항구한 사랑입니다.

하느님은 분노하시지만 분로로 끝나는 게 아니라 분노를 통해 치유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느님께서 호세아에게 다시 고메르를 데리고 오라고 하듯이, 하느님은 이스라엘을 다시 데려오려고 하시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사랑과 은혜

호세아 : 사랑의 예언자

        은총의 낙관주의

그래서 호세아는 하느님 말씀을 이렇게 전합니다.

“그들에게 품었던 나의 분노가 풀렸으니 이제 내가 반역만 꾀하는 그들의 마음을 고쳐 주고 기꺼이 그들을 사랑해 주리라.”(호세 14,5)

하느님께 항구하게 머무는 것은 사람의 힘으로는 한계가 있으니, 하느님께서 당신의 사랑과 은총으로 끊임없이 회유함으로써 인간들이 진심으로 당신께 승복하도록 해주시겠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느님의 사랑과 은총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시 하느님께 되돌아오도록 해주시겠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호세아를 ‘사랑의 예언자’라고 부릅니다.

아모스는 주님의 날이 빛의 날이 아니라 어둠의 날이라고 했습니다.

호세아는 ( 개기일식 때 해가 안 보여도 해가 사라진 것이 아니듯이) “개기일식과 같은 암흑의 날이지만 우리가 돌아서기만 하면 하느님의 빛이 다시 비칠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호세아 예언자의 메시지는 ‘은총의 낙관주의’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정배(正配)인 교회>


호세아가 이스라엘과 하느님의 계약을 혼인관계로 봤듯이 사도 바오로도 에페소서에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러므로 남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아내와 결합하여, 둘이 한 몸이 됩니다. 이는 큰 신비입니다. 그러나 나는 그리스도와 교회를 두고 이 말을 합니다. .”(에페 5,31 -32)

 교회는 그리스도의 정배라고 말합니다. 그런 비유는 호세아부터 내려오는 전승입니다.

교회는 곧 우리와 나입니다. 우리는 고메르를 닮으면 안되겠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늘 고메르 짓을 하고 있다는 것을 스스로 인정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회개할 거리도 없고 그렁저렁 신앙생활하다가 자기 위안 조금 받고 살다가 죽을 것입니다.  우리 스스로 늘 고메르와 같은 처지에 빠질 수 있고, 빠지고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진심어린 회개를 하고 쇄신의 삶을 살아야하겠습니다.

호세아는 그런 중요한 메시지를 남긴 예언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