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교실(구약) : 자료 - 26
주님, 저희를 당신께 되돌리소서!
* 유다의 제 2차 바빌론 유배
치드키야 왕이 예레미야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집트와 동맹을 맺고 다시 바빌론에 반기를 들자, 바빌론은 기원전 588년 1월 예루살렘을 포위하였고, 18개월만인 기원전 587년 7월, 마침내 예루살렘을 함락시켰다. 바빌론은 예루살렘 왕궁과 민가를 불태우고 예루살렘 성벽을 허물었다. 그리고 치드키야 왕과 예루살렘 도성에 남아 있던 백성들을 포로로 끌고 갔다. 이것이 제 2차 바빌론 유배이다.
* 바빌론의 유다 통치
예루살렘을 점령한 바빌론은 유다를 바빌론 제국의 한 지방으로 편입시키고 예루살렘에서 약간 북쪽에 있는 미츠바를 새 수도로 정해 주었다. 그리고 유다의 귀족 가문 출신이요 치드키야 왕궁의 의전(儀典)관리였던 그달야를 이곳의 지방장관으로 임명했다.
* 유다 멸망 이후 예레미야의 행적
예레미야는 바빌론으로 가서 편히 살라는 제의를 거절하고 황폐해진 고국 땅에 남아 있는 백성과 함께 한다. 그러나 이스마엘과 그의 부하들이 그달야와 바빌론 경비병들을 살해하고 암몬으로 도망치자, 바빌론의 보복을 두려워 하나 요하난과 미츠바의 주민들은 이집트로 이주하면서 예레미야를 인질로 끌고 갔다. 예레미야는 이집트에서도 여전히 우상숭배의 악행을 저지르는 유다인들에게 하느님께서 징벌하시리라는 마지막 예언을 남기고 흔적이 끊기고 만다.
* 이민족들에 대한 신탁
예레미야서 46-51장은 이집트, 바빌론, 필리스티아, 모압, 암몬, 에돔 등 여러 민족과 국가에 대한 예언을 모은 것이다. 하느님은 모든 민족과 국가의 하느님이시며, 인간 역사 전체의 주인이시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인류 구원 계획, 즉 공정이 바로 서고 정의가 지배하는 세상, 모든 사람이 서로 형제애를 나누는 새로운 세상을 실현하기 위한 계획을 이끄신다. 이 인류 구원계획의 관점에서, 하느님께서는 여러 나라들을 당신의 도구로 삼으신다. 그러나 그 나라들도 하느님의 계획을 거역하고 자만심을 고집하면 하느님의 징벌을 받고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질 것이다.
* 예레미야가 끼친 영향
예레미야의 사명은 생전에 세상의 빛을 보지 못한 채 실패로 끝났다. 그러나 유다인들은 하느님의 징벌이 닥치고 바빌론 유배라는 쓰라린 체험을 하면서 비로소 예레미야의 예언이 적중했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그들을 버리지 않으시고 언젠가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게 하시리라는 예레미야의 메시지를 상기하며 희망을 가질 수 있었다.
* 애가(哀歌)
애가는 유다 왕국의 멸망을 애도하는 비탄의 노래이다. 히브리어 성경의 이름은 ‘에카’(“아, 어떻게”), 그리스어 성경의 이름은 ‘트레노이’(悲歌, 슬픈 노래), 라틴어 성경의 이름은 ‘예레미야에 따른 비가(悲歌)들’이며, 중국어 성경의 이름은 ‘야리미 애가’(耶利米 哀歌, ‘예레미아의 슬픈 노래’)인데, 우리말 성경의 이름은 여기에서 유래한다. 유다 전승에서는 예레미야를 애가의 저자로 여기고 있지만, 시의 형식과 내용으로 볼 때 예레미야의 영향을 받은 개인이나 집단이 썼으리라고 본다. 애가는 5장(다섯 편의 시)으로 되어 있다.
* 애가의 내용
예루살렘이 불타고 성전이 파괴되어 극심한 충격을 받은 유다인들에게 재난의 의미를 되새기게 함으로써 하느님의 참 뜻이 무엇인지 일깨우고자 한다. 또한 이 불행은 하느님께 선택된 백성인 이스라엘의 불성실과 죄악에 대한 야훼의 진노임을 깨닫게 한다. 이로써 자신들의 과오를 뉘우치고 하느님께 되돌아가 하느님의 지속적인 권능과 정의, 자비로우심에 희망을 걸고 살아가도록 이끌고 있다.
(이하 김양진 선생님 성경강의 정리입니다. 음성파일을 잃어버려서 노트에 받아 쓴 내용만 정리합니다. 배운지 몇 달 지나서 기억도 잘 안 납니다. 정리가 매끄럽지 못하고, 중요한 설명들을 빠뜨렸을 수도 있습니다. 김양진 선생님께 죄송하네용. 성경지식도 없고 글솜씨도 없는 제가 부족한 강의정리를 올려도, 너그럽게 이해해주시는 김양진 선생님께 감사드립니다. )
주님, 저희를 당신께 되돌리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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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 예언자>
예레이먀 예언자를 통해 유다왕국의 마지막을 볼 수 있습니다. 예레미야는 인간적으로 불쌍한 예언자입니다. 예레미야는 유다왕국이 곧 멸망하게 될 어두운 순간에 하필 예언자가 되어서 “왕국이 망할 것이다. 파괴될 것이다”라는 소리만 합니다. 백성들이 예레미야를 부정적인 사람이라고 봅니다. 이스라엘 민족주의자들은 바빌론과 손잡으면 이길 수 있다고 하는데, 예레미야는 바빌론에 항복하라고 하니, 백성들에게 따돌림 받습니다. 지도층도 예레미야를 백안시합니다. 그러나 예레미야는 자기의 말을 한 것이 아닙니다. 예레미야는 하느님의 말씀을 전해야 하므로 핍박을 당해도 전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기원전 597년 바빌론의 예루살렘 점령
여호야킨, 그의 어머니, 지도급 인물들, 백성 등 수천 명이 포로로 끌려가 제 1차 바빌론 유배
치드키야 왕 즉위 바빌론 군대 철수
바빌론은 이스라엘을 완전히 멸망시키지 않고 치드키야를 왕위에 앉혀놓고 철수합니다. 유다왕국에 남아있는 사람들을 다스릴 사람들이 나옵니다.
유다의 신흥귀족들, 맹목적인 민족주의, 바빌론과의 단교압력
치드키야왕 : 이집트와 동맹, 바빌론에 반기
바빌론은 1차 침공 때는 유다를 완전히 멸망시키지 않고 봐줬는데 치드키야 왕이 반기를 드니 괘씸해서 다시 침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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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이 점령당한 뒤의 일>
“유다 임금 치드키야 제 구년 열째 달에, 바빌론 임금 네부카드네자르가 모든 군대를 이끌고 와서 예루살렘을 포위하였다. ”(예레 39,2)
기원전 588년 7월 예루살렘 함락
도성을 버리고 도망치던 치드키야 체포
바빌론은 유다의 왕들, 대신들, 있는 사람들, 배운 사람들, 사제들을 다 끌고 갑니다. 불쌍한 게 남아있는 서민들입니다.
바빌론 군대가 추격하니 치드키야가 도망갑니다. 바빌론 군대는 예리고 들판에서 치드키야왕을 붙잡습니다.
“바빌론 임금은 리블라에서 치드키야가 지켜보는 가운데 그의 아들들을 살해하였다. 바빌론 임금은 유다의 귀족들도 모두 살해하였다.”(예레 39,,6)
바빌론으로 봐서는 유다를 그냥 둘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치드키야의 후사를 막아버립니다.
유다 마지막 왕 치드키야의 비참한 말로
하느님의 말씀 대신 지배층의 말을 들은 결과
“그런 다음 그는 치드키야의 두 눈을 뽑고 청동 사슬로 묶어, 그를 바빌론으로 끌고 갔다”(예레 39,7)
치드키야는 신흥귀족들의 말을 듣고 판단을 잘못한 것입니다.
제 2차 바빌론 유배
예루살렘의 철저한 파괴, 성전, 왕궁, 민가, 성벽 파괴
유다 백성, 예루살렘 도성에 남아있던 주민들은 포로,
일부 가난한 백성들은 농토 주어 거주 허락
유다왕국에 남아있는 사람이 더 많았을 테지만 쓸모 있는 사람은 다 바빌론으로 끌려갔습니다. 유다왕국은 완전히 멸망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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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달야’와 더불어>
예레미야의 석방
예레미야에 대한 바빌론의 호의
바빌론은 에레미야를 자기들 편으로 여겼습니다. 예레미야 예언자을 바빌론에 호의적인 사람으로 인정하고, 네부카드네자르 왕은 경비대장을 시켜 예레미야에게 선택권을 주도록 합니다. 경비대장이 예레미야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그대가 만일 나와 더불어 바빌론으로 가는 것이 좋으면 같이 갑시다. 내가 그대를 잘 돌보아 주겠소. 그러나 나와 더불어 바빌론으로 가는 것이 싫으면 그만두시오. 그대 앞에 있는 이 땅 어디든지, 적당하고 좋은 곳으로 떠나가시오. ”(예레 40,4)
바빌론 왕은 예레미야에게 호의를 베풉니다. 예레미야는 바빌론이 좋아서 바빌론의 덕을 보려고 바빌론에 항복하라고 편든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죄가 너무 커서 회개하고 항복하라고 한 것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바빌론을 이스라엘을 심판하는 회초리, 도구로 사용하셨을 뿐입니다.
조국에 대한 예레미야의 진심
“예레미야는 미츠파에 있는 아히캄의 아들 그달야에게 가서, 그와 더불어 그 땅에 남아 있는 백성 가운데에서 살았다“(예레 40,5)
유다백성이 생각하기에는 예레미야는 민족 반역자였습니다.
예레미야는 황폐한 조국 땅에 백성과 함께 남기를 원합니다.
이스라엘은 전쟁이 많은 나라입니다. 지금도 외국에 사는 이스라엘 청년들은 조국에 전쟁이 나면 본국으로 갑니다. 예레미야 정신을 본받은 것입니다. (요즘에는 좀 달라졌다고 합니다. 전쟁 위험이 있으면 외국에 나가는 이스라엘 청년들도 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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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달야가 살해되다>
바빌론의 유다 통치, 유다를 바빌론의 한 지방으로 편입.
수도 - 미츠바, 지방장관 - 그달야
바빌론은 ‘그달야’를 지방장관으로 임명합니다. 그달야는 귀족출신으로서....??...
이스마엘 일파, 그달야 통치를 반대, 조국 배신자로 규정
유다 사람들이 ‘그달야’ 밑으로 들어와 살기 시작합니다.
반면 민족주의자들인 이스마엘 일파는 그달야를 바빌론에 붙어서 장관노릇하며 먹고 사는 사람으로 보고 반대합니다. 그래서 그달야를 제거하기로 합니다.
“그들이 미츠파에서 식사를 함께 할 때, 느탄야의 아들 이스마엘과 그와 함께 온 부하 열 명이 일어나, 사판의 손자이며 아히캄의 아들인 그달야를 칼로 내리쳤다. 그렇게 하여 이스마엘은 바빌론 임금이 그 땅을 맡겨 돌보게 한 그달야를 죽였다”(예레 41,1-2)
(군중들은 예수님을 죽이고 바랍바를 살리라고 외쳤습니다. 바랍바는 도적이었습니다. 바랍바는 로마군을 몇 명 죽였기에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를 대단한 사람으로 여겼습니다. 진정한 지도자가 누군지 모를 때라 그랬습니다. 당시 예루살렘 사람으로서는 그렇게 생각하는 게 당연합니다.)
이스마엘 일파, 바빌론 경비병과 무고한 주님들까지 살해,
바빌론 수비대 요새 파괴
이스마엘 일파는 그달야만 죽인 게 아닙니다. 바빌론 경비병과 무고한 주민들까지 살해했습니다. 아무리 이스마엘일파가 민족주의자라 하더라도 테러에 해당하는 일입니다.
요하난과 그의 군대가 이스마엘을 공격하기 위해 출동하자 암몬으로 도망감
제 3차 바빌론 유배
“네부카드네자르 제이십삼 년에는 느부자르아단 친위대장이 유다인 칠백사십오 명을 포로로 잡아갔다. 이렇게 해서 모두 사천육백 명이 포로로 잡혀갔다.”(예레 52,30)
바빌론이 이미 지방도시로 전락한 유다를 또 쳐들어온 이유는 이스마엘에게 보복하기 위해서입니다. 바빌론이 임명한 관리를 죽이고 바빌론 수비대 요새를 파괴한 데 대한 보복입니다. 제 3차 바빌론 유배라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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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트로 도망가다>
요하난과 그의 군대, 이집트로 망명 원해
능력 없는 이집트, 우상숭배의 위험
유다사람들은 이스라엘 땅에 그대로 남아서 살기가 불안해서 이집트로 망명하기를 원합니다. 이스라엘인들은 이집트로 가서 살자고 모의하면서 하느님 뜻이 어떤지 여쭤봅니다.
“너희가 두려워하는 칼이 이집트 땅에서 너희를 뒤쫓고, 너희가 무서워하는 굶주림이 이집트에서 너희를 붙좇아, 그곳에서 너희가 죽게 될 것이다. ”(예레 42,16)
예레미야는 다시 반복해서 이집트와 손잡거나 이집트로 가는 것을 반대합니다.
이집트는 날로 세력이 커가는 바빌론을 대적할 힘이 없는 나라입니다. 그런 이집트와 손잡아 보았자 얻을 게 없습니다.
바빌론에는 유배를 간 유다의 왕족, 사제, 귀족들, 학자들이 있으니 그 사람들의 힘을 모아서 정치적 종교적 유대를 이룰 수 있는 바탕이라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집트에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집트로 가면 우상을 믿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아무도 없는 이집트로 가봤자 정치, 종교, 군사적 종교적으로 이득 될 게 없습니다.
바빌론의 호의를 얻고 있는 예레미야를 인질로 데려가
예레미야가 아무리 이집트로 가지 말라고 해도 이스라엘 사람들은 듣지 않습니다. (아이들을 키울 때도 그렇습니다. 아이들이 한 번 마음먹으면 부모가 말려도 잘 듣지 않습니다.)
“오히려 카레아의 아들 요하난과 군대의 모든 지휘관들은 쫓겨난 온갖 나라에서 유다 땅에 정착하려고 돌아온 유다의 모든 남은 자들과, 남자와 여자와 아이들과 공주들, 그리고 느부자르아단 친위대장이 사판의 손자이며 아히캄의 아들인 그달야에게 맡겨 놓은 모든 사람과, 예레미야 예언자와 네리야의 아들 바룩까지 데리고 이집트 땅으로 들어갔다. 그들은 정말 주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던 것이다.”(예레 43,5-7)
이스라엘 백성들은 예레미야의 말을 듣지 않고, 기어이 이집트로 갑니다. 이집트로 가면서 자기들끼리만 가면 불안하니, 바빌론의 호의를 얻고 있는 예레미야를 인질로 데려갑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바룩이 바빌론의 사주를 받아 자기들을 바빌론 포로로 끌고 가려고 이집트로 못 가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예레미야와 바룩을 인질로 데려갑니다.
회개하지 않는 이집트의 유다인들
“어찌하여 너희는 너희가 정착하러 들어간 이집트 땅에서 다른 신들에게 향을 피우면서, 너희 손으로 만든 것들로 나를 분노하게 하느냐? 결국 너희는 스스로를 멸망시키고, 세상 모든 민족들에게 저주와 수치의 대상이 될 셈이냐?”(예레 44,8)
여전한 우상숭배, 예언자의 말 거부
유다인들은 이집트에 가서 예레미야의 말을 거부하고 우상숭배를 합니다.
“이집트 땅 파트로스에 사는 모든 백성이 예레미야에게 대답하였다. 당신이 주님의 이름으로 우리에게 무슨 말을 하든 우리는 당신의 말을 듣지 않겠소. 우리는 우리가 결정한 것을 모두 실천하겠소. 우리는 우리와 우리 조상들과 임금들과 대신들이, 유다 성읍들과 예루살렘 거리들에서 했던 대로, 하늘 여왕에게 향을 피우고 그 여신에게 술을 부어 바치겠소. 이제껏 우리는 양식도 넉넉하고 잘 지냈으며 재앙도 겪지 않았소. 그런데 우리가 하늘 여왕에게 향을 피우는 일과 술을 부어 바치는 일을 그치자, 모든 것이 부족해지고 칼과 굶주림으로 망하게 된 것이오.” (예레 44,17-17)
이스라엘인들은 자기들이 우상숭배 할 때는 잘 살았는데 공연히 예레미야가 하느님만 섬기라고 하니까 나라가 망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예언자들이 떠들어대면서부터 나라가 기울어서 결국은 망한 것이라고 합니다. 하느님을 너무 지나치게 믿어서 나라가 망했다고 합니다.
멸망은 하느님 신앙 탓, 역사의 교훈마저 왜곡
예언자들이 떠들어서 나라가 망했다고 말합니다. 예언자들이 회개하라고 하면 하느님께 되돌아가야하는데, 오히려 우상숭배할 때는 잘 먹고 잘 살았는데 하느님 믿으라고 하면서부터 잘못되기 시작했다고 말합니다. 갈 데까지 간 것입니다.
(우리는 세례성사를 받고 신앙생활 하면 하느님이 잘되게 해주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요즘에는 부모가 돈이 많아야 자식이 자주 찾아온다고 합니다. 기가 막한 세상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런데 정작 하느님을 믿고 생활하니, 남을 속이지도 못하고 뒷거래도 못합니다. 그럴 때는 “하느님, 이 때만 조금 눈감아주면 안될까요? 성당활동 열심히 하고 헌금도 많이 할께요.” 하고 청할 마음이 생깁니다. 그러면 우리 신앙도 양다리 걸치는 셈입니다. 신앙생활하면서 불편할 때가 있습니다. 하느님을 모를 때는 양심에 거리낄 것 없이 살았는데 괜히 하느님을 알아서 양심만 괴롭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이스라엘백성들 모습이나 지금 우리의 모습이나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집트 땅에 사는 모든 유다인이여, 주님의 말씀을 들으시오. ‘내가 나의 위대한 이름을 걸고 맹세한다. ─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 온 이집트 땅에서 어떤 유다 사람이라도, ′주 하느님께서 살아 계시는 한!′이라고 하면서 입으로 내 이름을 더 이상 부르지 못하게 하겠다.”(예레 44,26)
그래도 명색이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의 백성인데, 툭하면 하느님 핑계를 대면서 행동은 개뿔같이 합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마태 7,21)
예레미야 예언자 말이나 예수님 말씀이나 같습니다.
예루살렘 귀환에 참여하지 못한 이집트의 유다인들
“ 이제 나는 그들에게 복이 아니라 재앙을 내리려고 지켜본다. 이집트 땅에 있는 모든 유다 사람들은, 칼과 굶주림으로 그들 가운데 마지막 사람까지 전멸할 것이다. 칼을 피하여 이집트 땅에서 유다 땅으로 돌아갈 사람들은, 그 수가 얼마 되지 않을 것이다. 그리하여 이집트 땅에 정착하러 들어온 유다의 남은 자들은 모두, 나와 그들 가운데 누구 말이 들어맞는지 알게 될 것이다.”(예리 44,27-28)
이집트로 간 이스라엘 사람들은 예루살렘 귀환에 한명도 참여하지 못했습니다.
하느님을 원망하면서 살았던 이집트의 유다인들은 하느님의 구원의 역사에서 사라져버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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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족에 대한 신탁>
예레미야 46장 - 51장
주변국가에 대한 죄과와 하느님의 징벌......................
하느님 : 모든 민족의 하느님, 인간역사 전체의 주인
세상 모든 민족 : 하느님의 심판 도구, 하느님을 거역하고 자만할 때 징벌 받아
왜 예레미야가 다른 민족들에 관한 예언까지 했을까요?
하느님의 계획은 장차 온 세상, 모든 민족을 구원계획으로 삼으시려는 것입니다.
모든 나라 모든 사람들이 형제애를 나누고 서로 착취하지 않는 나라를 만드시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당신 백성일망정 그들이 잘못되면 하느님께서는 징벌하십니다. 다른 나라들도 하느님의 뜻에 어긋나고 자만하게 되면 징벌하십니다. 하느님의 심판도구인 민족도 하느님 뜻에 어긋나면 징벌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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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다의 미래인 바빌론 유배자들>
바빌론 유배자들의 예루살렘 귀환 예고
“그러므로 만군의 주 이스라엘의 하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이제 내가 아시리아 임금에게 벌을 내렸듯이, 바빌론 임금과 그 나라에도 벌을 내리겠다. 내가 이스라엘을 그 목장으로 되돌아가게 하리니 그가 카르멜과 바산에서 풀을 뜯고 에프라임 산악 지방과 길앗에서 배불리 먹으리라. 그날과 그때에 이스라엘의 죄악을 찾으려 해도 전혀 찾지 못하고 유다의 죄를 찾으려 해도 발견하지 못하리라. 주님의 말씀이다. 내가 살아남게 한 자들을 용서할 것이기 때문이다.” (예레 50, 18-20)
이사야서에서 하느님께서는 ‘남은 소수의 사람들’로 다시 새싹을 돋우리라 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을 회복시켜주리라고 하십니다. 이스라엘의 희망이 오직 바빌론으로 유배간 사람들에게 달려있습니다. 바빌론으로 유배간 사람들이 정신 차리고 하느님께 돌아가면 하느님께서 다시 이스라엘을 회복시켜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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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가 끼친 영향>
예레미야 : 비극적 생애, 수난의 예언자
이스라엘 전승에 의하면 예레미야는 동족들에게 맞아죽었다고 합니다.
예레미야는 눈물의 예언자, 수난의 예언자입니다.
유다인들 :
바빌론 유배 체험으로 예레미야의 예언을 깨닫고
예루살렘 귀환에 대한 희망을 가질 수 있었다.
유다인들이 일찍 예레미야의 말을 들었으면 좋았을 것을, 유배생활의 쓰라림을 체험한 다음에야 예레미야의 예언을 깨닫습니다.
예레미야 예언자가 하느님이 우리를 저버리지 않고 예루살렘으로 귀환시켜 주실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 바빌론의 유다인들은 예레미야 예언자의 희망의 메시지를 의지하고 살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바빌론에서 성경도 편찬하였고, 예루살렘 귀환을 손꼽아 기다리면서 전통을 지켜냈습니다. 예레미야 예언자의 예언을 희망으로 삼았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예리미야는 죽은 다음에야 이스라엘백성들에게 훌륭한 사람으로 추앙을 받습니다.
마카베오서에서 예레미야를 이렇게 극찬합니다.(마카베오 하권 2장, 15장 참조)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代哭)
우리나라가 일제에 합병될 때, 장지연이 통곡의 글을 신문에 실었습니다. 개, 돼지만도 못한 대신들이 자기네 이익을 채우려고 나라를 팔았으니, 슬프다, 슬프다. 이천만 우리 동포, 사천만 역사가 다 죽게 생겼구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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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가>
애가 : 유다의 멸망을 애도하는 비탄의 노래
예레미야 예언자의 영향을 받은 개인이나 집단의 서술
히브리어 성경 : ‘에카’(아, 어떻게)
그리스어 성경: 트레노이‘ (비가 悲歌)
라틴어 성경 : ‘예레미야에 따른 비가’
중국어 성경 : ‘야리미 애가’ (耶利米 哀歌)
예레미야 예언자는 통상 애가의 저자로 알려져 있습니다. 후대에 예레미야 예언자의 작품이라고 추정한 것입니다. 애가는 예레미야 예언자가 집필했거나 예레미야 예언자의 영향을 받은 개인이나 집단이 서술했을 것입니다.
애가에는 예레미야의 정신이 다 녹아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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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애가 : 예루살렘의 참상>
“아, 사람들로 붐비던 도성이 외로이 앉아 있다. 뭇 나라 가운데에서 뛰어나던 도성이 과부처럼 되고 말았구나. 모든 지방의 여왕이 부역하는 신세가 되어 버렸구나.”(애가 1,1)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느님의 백성이라는 이름만 거창할 뿐 비참한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런 신세를 한탄하는 시가입니다.
“그의 적들은 우두머리가 되고 그의 원수들은 편안히 지내니 그의 많은 죄악 때문에 주님께서 그에게 고통을 내리신 것이다“(애가 1,5)
(잘 나가던 사람들이 나락으로 떨어지면 조롱을 받습니다.)
“주님께서는 나에게 속한 용사들을 모두 물리쳐 버리시고 내 젊은이들을 때려 부수시려 나를 거슬러 집회를 소집하셨다오. 주님께서는 포도 확을 밟듯 처녀 딸 유다를 짓밟으셨다오.”(애가 1,15)
불행 중 다행으로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기들 죄 때문이라는 것을 인정합니다. 포도확을 밟듯이 하느님이 자기들을 짓밟아버리셨다고 말합니다. 이스라엘이 망한 것은 강대국들이 힘이 세서가 아니라 하느님의 전능으로 망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자신들의 잘못된 신세를 한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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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애가 : 원수 같으신 하느님>
“나의 딸 백성이 파멸하고 도시의 광장에서 아이들과 젖먹이들이 죽어 가는 것을 보고 있자니 내 눈은 눈물로 멀어져 가고 내 속은 들끓으며 내 애간장은 땅바닥에 쏟아지는구나”(애가 2,11)
원수한테 보복할 때는 철저하게 보복합니다. ‘하느님이 원수같다’는 말은 하느님이 원수 대하듯 철저하게 징벌하셨다는 말입니다.
“너의 예언자들이 네게 환시를 전하였지만 그것은 거짓과 사기였을 뿐. 저들이 네 운명을 돌리려고 너의 죄악을 드러내지는 않으면서 네게 예언한 신탁은 거짓과 오도였을 뿐.”(애가 2,14)
이렇게 애간장이 끊어지는 비참한 꼴을 당하니 원망할 사람이 많이 생길 것입니다. 백성들은 거짓 예언자들을 비난합니다. 예레미야가 멸망할 것이라고 예언했는데 거짓 예언자들은 걱정 말라고, 유배자들도 2년 만에 다 돌아올 것이라고 예언했었습니다. 거짓 예언자들이 이스라엘이 회개할 수 있는 기회를 안 주고 거짓 안전을 예언하면서 안심시켰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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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 애가 : 고통과 희망>
첫째와 둘째 애가는 공동체가 당하는 어려움을 이야기하고 있는데, 세 번째 애가에서부터는 개인적으로 당하는 슬픔을 고통 어려움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공동체 안에서 개인이 당하는 괴로움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나는 그분 격노의 막대로 고통을 겪은 사나이. 그분께서는 빛 없는 어둠 속으로 나를 몰아쳐 걷게 하시고 당신 손을 날마다 나에게 돌려 내리치시네“(애가 3,1)
“나는 온 백성의 웃음거리가 되고 날마다 그들에게 조롱의 노랫거리가 되었네.“(애가 3,14)
백성의 웃음거리였고 조롱당했던 사람은 예레미야 예언자였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예레미야 예언자 말을 듣지 않고 예레미야를 조롱했던 백성들이 그 꼴을 당하고 있습니다. 예레미야의 말을 들을 걸, 하고 후회하면서, 자신들이 손가락질 당하는 심정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자애는 다함이 없고 그분의 자비는 끝이 없어. 아침마다 새롭다네. 당신의 신의는 크기도 합니다. “주님은 나의 몫, 그래서 나 그분께 희망을 두네.” 하고 내 영혼이 말하네“(애가 3,22-24)
그래도 백성들은 하느님께 대한 믿음의 끈을 놓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자비, 신의에 희망을 둘 수 밖에 없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우리의 길을 성찰하고 반성하여 주님께 돌아가세. 손과 함께 우리의 마음도 하늘에 계신 하느님께 들어 올리세”(애가 3,40-41)
철저한 반성을 하면 다시 하느님께 의지할 수 있으리라는 마음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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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째 애가 : 징벌의 한 가운데서>
“젖먹이는 목말라 혀가 입천장에 달라붙고 어린것들은 빵을 달라고 애원하건만 그들에게 한 조각 주는 이가 없구나.”(애가 4,4)
하느님께 의지한다고 하지만 백성들의 상태가 너무 비참합니다. 어떻게 할 도리가 없는 상황에서 그렇게 된 이유를 되돌아보게 되는 법입니다.
“세상 임금들도 땅의 주민들도 모두 믿지 않았다네, 적과 원수가 예루살렘 성문 안으로 들어오리라고는. 예루살렘 예언자들의 죄와 사제들의 죄악 때문이라네. 의인들의 피를 그 안에 흘린 저들 때문이라네.“(애가 4,12-13)
누구 하나 예루살렘이 망하리라는 예레미야의 말을 믿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예루살렘 도성은 전부 하느님의 것이니, 하느님께 의지하면 절대로 망하지 않는다고 생각했었습니다. 예레미야는 예루살렘이 도피처가 아니라고 했는데, 아무도 그 말을 안 들었습니다. 오히려 예레미야가 하느님을 모독한다면서 손가락질 했었습니다. 왕들은 가난한 사람들을 착취하고 의로운 사람을 못살게 구는 악한 행동을 했습니다.
“헛되이 도움을 바라느라 우리 눈은 멀어 버렸다네. 구해 주지도 못하는 민족을 고대하며 우리는 망루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네. ”(애가 4, 17)
“하느님의 징벌이 가까웠는데, 그 때 우리는 이집트구원병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구나‘하고 한탄합니다. 백성들은 자신들이 어리석게 살아서 처참하게 하느님의 징벌을 받고 있다고 합니다.
“딸 시온아, 네 죄벌은 끝났다. 그분께서 너를 다시는 유배 보내지 않으시리라. 딸 에돔아, 그분께서 너의 죄를 벌하시리라. 너의 죄악을 드러내시리라”(애가 4,22)
그래도 남은 하나, 예레미야 예언자가 마지막으로 준 메시지 안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희망을 갖게 됩니다. 회개하고, 유배가 끝나면 다시 되돌아가고, 하느님께 버림받지 않을 것이라고 합니다. 네 번째 애가에서 희망의 끈을 이야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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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 째 애가 : 애원의 기도>
“주님, 기억하소서, 저희가 어찌 되었는지를. 바라다보소서, 저희의 치욕을. 저희 상속의 땅은 외국인들에게 넘어가고 저희의 가옥들은 이방인들에게 넘어갔으며 저희는 아비 없는 고아들이 되고 저희의 어미는 과부가 되었습니다.”(애가 5,1-3)
하느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집트 종살이에서 구해 가나안 땅을 차지하게 해주셨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우상들을 섬겼습니다. 나라가 망하고 나서야 과부신세가 되었다고 한탄합니다. 이스라엘인들이 아버지를 버렸기에 나라가 망했는데, 이스라엘인들은 하느님께서 자기들을 버렸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일을 할 때 누구에게나 핑계는 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복을 받을 때는 하느님 은혜라고 생각해야하는데, 잊어버리고 살았습니다. 하늘여왕한테 빌 때는 잘 먹고 잘 살았다고 합니다. )
백성들의 상태가 얼마나 비참한가를 이야기합니다.
“저희 마음에서 기쁨이 사라지고 춤은 통곡으로 바뀌었으며 저희의 머리에서는 면류관이 떨어졌습니다. 오, 애통합니다, 저희가 죄를 지었으니! ”(애가 5,15-16)
이제는 사는 게 사는 것 같지 않습니다. 기쁠 일이 없습니다. 슬픈 노래, 한탄밖에 나오지 않습니다. 뭔가를 바랄 희망이 없습니다. 이제서야 백성들이 지은 죄 때문임을 인정합니다.
우리 죄를 용서해주실 분에게 의지하고 매달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 당신께서는 영원히 좌정하여 계시고 당신의 어좌는 세세 대대로 이어집니다. 어찌하여 저희를 끝내 잊으려 하십니까? 어찌하여 저희를 영영 버리려 하십니까? “(애가 5,19-20)
예전에는 바알이나 ~~? 사람들이 백성들을 풍족하게 해 줄 것으로 생각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느님은 우리들 조상들에게 잘해주신 것이지, 우리에게 해 주신 것은 없다. 우리가 잘 먹고 잘 산 것은 우상들이 해 준 것이다”라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런데 우상들이 자기들을 비참한 처지에서 구해주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그제서야 하느님의 권능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하느님, 당신밖에 믿을 곳이 없는데, 정말 저희를 버리시겠느냐”고 마지막 애원을 하고 있습니다.
“주님, 저희를 당신께 되돌리소서, 저희가 돌아가오리다. 저희의 날들을 예전처럼 새롭게 하여 주소서. “(애가 5,21)
스물 여섯 번째 강의 제목을 이 구절에서 따왔습니다. 회개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고통을 통해서 회개할 마음을 가졌습니다.
이사야서에서 이스라엘의 회개는 아침이슬 같고 사라지는 안개 같다고 했습니다.
진실되고 지속되는 회개는 인간능력으로는 안됩니다. 하느님이 그 마음을 불어 넣어 주셔야 가능합니다. 그래서 “저희를 당신께 되돌려주소서.”라고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제 하느님께로 되돌아갈 마음이 있는데, 자기들 능력으로는 안 되니, 하느님께 간절한 기도를 합니다. “주님, 저희를 당신께 되돌리소서.”
애가는 슬픔에서 시작해서 하느님에 대한 굳은 믿음으로 끝이 납니다.
(이스라엘 인들은 지금도 매년 성전 파괴를 기념하는 날을 지내면서 애가를 읊습니다. 지금도 이스라엘인들은 ~??~ 금요일에, 성전 부서진 벽, 통곡의 벽에서 ‘애가’를 읊으면서 눈물을 흘립니다.
가톨릭 교회도 사순절 전례에 ‘애가’를 사용합니다. )
선택된 하느님의 백성이 하느님과의 계약을 어기고, 나라가 멸망하게 되는 시점까지 지켜봤습니다..... 결국 회한만 남습니다. ......우리 신앙도 그렇게 될 수 있습니다.
이제 겨울방학입니다. 성경을 덮어놓지 마시고, 꾸준히 읽으시기를 바랍니다.
내년, 2008년 3월에 다시 만날 때까지 성서 열심히 읽을 것을 다짐하면서 디모테오 후서를 함께 읽어봅시다.
“성경은 그리스도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통하여 구원을 얻는 지혜를 그대에게 줄 수 있습니다. 성경은 전부 하느님의 영감으로 쓰인 것으로, 가르치고 꾸짖고 바로잡고 의롭게 살도록 교육하는 데에 유익합니다. 그리하여 하느님의 사람이 온갖 선행을 할 능력을 갖춘 유능한 사람이 되게 해 줍니다.“(2 티모 3,1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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