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지혜의 샘/김양진 선생님의 성경교실

28. 하느님이 여기 안 계시다.-에제키엘서

김레지나 2008. 8. 28. 19:13

성경교실(구약) : 자료 - 28


하느님이 여기 안 계시다!


* 에제키엘서

 에제키엘 예언자가 바빌론 유배지에서 행한 예언활동을 기록한 에제키엘서는 예루살렘 멸망을 기점으로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제 1부 : 예루살렘 멸망 이전에 한 예언

     - 에제키엘의 환시와 소명(1-3장)

     - 예루살렘 멸망에 관한 예언(4-24장)

     - 이웃 나라들에 대한 예언(25-32장)

제 2부 : 예루살렘 멸망 이후에 한 예언

     - 약속의 예언(33-39장)

     - 새로운 예루살렘(40-48장)


* 에제키엘 예언자

 에제키엘은 기원전 598년 제 1차 유배 때 바빌론으로 끌려 온 젊은 사제로, 기원전 593년부터 571년까지 예언활동을 했다. ‘에제키엘’이란 이름은 ‘하느님께서 강하게 하신다.“라는 뜻이다.


* 에제키엘서의 상징들

- 커룹 : 반은 사람이고 반은 짐승인 생물, 사람․ 사자 ․ 황소 ․ 독수리 등 네 가지 얼굴 형상은 피조물 전체를 가리킨다.

- 수레바퀴 : 하느님의 영에 의해 서로 완전한 조화를 이루며, 하느님의 뜻대로 어디로든지 쉽사리 움직일 수 있는 능력을 가리킨다.

- 하늘 위의 궁창 : 구약시대의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늘 위의 궁창을 하느님의 거소로 여겼다.

- 사람의 아들 : 먼지처럼 쉽게 사라지는 나약하고 유한한 인간 존재를 가리킨다.

- 두루마리를 먹다 : 예언자의 말 뿐만 아니라 행동 자체도 하느님의 메시지를 전하는 도구 역할을 하게 될 것임을 드러낸다.

- 꿀처럼 입에 달았다 : 받아들이기 두렵고 힘든 소명이지만 온전히 순명할 때 오히려 내적 평화의 힘을 얻게 되며, 하느님의 메시지가 무서운 심판 뿐만 아니라 희망찬 구원을 동시에 담고 있음을 암시한다.

- 옆구리를 바닥에 대고 눕다 : 북 이스라엘 왕국과 남 유다 왕국이 멸망한 이후 백성이 겪는 고통을 예언자도 몸으로 겪어야 한다는 것을 상징한다.

- 머리카락과 수염을 깎이다. : 이스라엘이 겪을 수치와 모멸을 상징한다.

- 유배 짐을 싸다 : 예루살렘이 멸망할 때 화급한 상황에서 창피함으로 얼굴을 들지 못하고 바빌론으로 유배를 떠나야 하는 것을 상징한다.

- 부정한 아내의 역사 : 하느님의 은혜를 망각하고 배반을 일삼은 이스라엘의 역사를 상징한다.


* 예루살렘 멸망의 원인

 하느님께서 예루살렘에게 모든 민족들을 향해 퍼져나갈 새로운 '법‘을 주셨지만, 그들은 하느님의 법을 여기고 그 규정을 따르지 않음으로써 선의 본보기가 되지 않고 악의 유혹자가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 유배자들에게 약속한 ‘새 마음’

 유배자들은 귀양살이에서 자신들의 처지를 깊이 반성하는 회개와 정화의 과정에 들어갈 수 있게 되었기 때문에 그들이 우상숭배를 버리고 오직 하느님만을 섬기기로 결심한다면 하느님께서는 새로운 출애굽을 이루어 주시고 그들과 새로운 계약을 맺어 주실 것이다.


* 하느님의 정의와 개인의 책임

 인간은, 유전과 환경 또는 역사적 산물의 꼭ㅜ각시가 아니라, 자기 처신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 또한 비록 조상이나 다른 사람의ㅣ 잘못 때문이라고 하더라도 비극적 상황을 바꾸어 놓도록 노력할 책임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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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음 주 주제 : 하느님이 여기 계시다.!

* 읽어야 할 성경 : 에제 33장 - 48장

* 성경 구절 쓰기 : 에제 34,8 ; 34,11-13 ; 34,20-22 ; 34,23-24 ; 36,26-28 ;

                  37,26-28 ; 43,4-5 ; 47,1-2 ; 47,21-23 ; 48,35


(햇살 신부님 말씀입니다.)

“이 세상을 움직이는 것은 철학이지 실용이 아닙니다...... 철학은 신학의 시녀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신학의 뿌리가 되는 성서학을 공부하고 있습니다. 실용주의적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들은 당장 눈에 보이는 것만 추구합니다. 우리는 실용주의를 선택한 사람이 아닙니다. 철학적인 것을 선택한 사람들입니다.......)


(이하 김양진 선생님의  2008년 3월 26일 성경강의입니다.) 


“하느님이 여기 안 계시다”


오늘 강의제목이 “하느님이 안 계시다.”입니다.

하느님이 안 계시면 우리 신앙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여기 한반도 대운하의 멋진 모습이 담긴 사진이 있습니다. 유람선과 요트가 떠다닙니다. 대운하 추진세력들은 대운하가 이렇게 멋지게 된다고 합니다. 여기 하느님이 계실 것 같습니까? 앞으로 우리나라 국민소득 4만 불 시대가 되면 각 가정이 전부 요트 하나씩 가지게 된답니다. 현 정부가 추진하려는 대운하 계획에 대해서 서울대 교수들을 비롯한 2500명이 반대성명을 냈습니다.

저는 중국을 10여차례 이상 다녀왔습니다. 여기 이 사진은 상해, 소주 ~ 연결하는 운하모습입니다. 물길은 있는데 높낮이가 없을 때 운하를 파는 겁니다. 상해 공중에서 내려다보면 민둥산 하나 없습니다. 기존의 물길 그대로 조금 더 넓히면 운하가 됩니다. 지금은 상해 운하로 바위나 석탄, 시멘트 정도만 실어 나르고 있을 뿐 거의 사용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상해와 달리 국토의 70%가 산입니다. 물길의 높낮이차가 심하면 간문을 만들어 물 높이를 맞추어야합니다.  스무 개 가까이 만들어야한다고 합니다. 간문을 만드는 것도 한계가 있습니다. 이것은 박달재-조령 사진입니다. 이 곳이 제일 높습니다. 해발 1600쯤,,여기는  너무 높아 산을 파낼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배를 300M 들어 올려서 터널을 통과하게 한다고 합니다. 왕복 두 개의 터널을 뚫으려면 산 대부분을 파야합니다. 도로를 위한 터널이라면 바닥에 시멘트라도 있어서 견고하기라도 하겠지만, 운하를 위한 터널은 20m가량 파서 물을 넣어야하니 견고하지도 않습니다. 게다가 그 터널을 통과하는데 3시간이 걸립니다. 혹자는 그 걸 보려고 중국 관광객 천만 명이 올 거라고 주장합니다. 어이가 없습니다. 지진이라도 나면 정말로 큰일입니다. 이 지역은 광산들이 많아 굴을 많이 파놓았습니다. 지진이 아니어도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데가 많습니다.

파나마운하, 수에즈 운하는 바다로 돌아가려면 너무 머니까, 운하 파는 게 훨씬 경제적이니까 만들어졌습니다. 우리나라 같은 반도의 중심을 뚫는다는 발상 자체가 이해가 안됩니다.

 경부 고속도로로 서울서 부산까지 다섯 시간이면 갑니다. 바다뱃길은 열일곱시간(?제대로 못 들었습니다.)이면 간답니다.  화물을 나를 때, 지금도 그 시간이 너무 많이 걸린다고 뱃길을 이용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경부운하로는 서울서 부산까지 2박 3일이 걸린답니다. 더구나 서울서 부산 간의 물동량은 거의 없습니다.  부산에서 대구나 구마로 가는 물동량이 대부분입니다.

여기 사진은 여기는 미국 세인트 루이스에 있는 미시시피강의 운하입니다.

운하전체에 시멘트로 옹벽이 쳐져있습니다. 배가 지나갈 때 파도가 치니, 옹벽으로 다 막아야합니다. 강을 옹벽으로 다 싸서 막아놓으면 강 지류의 물은 갈 곳이 없습니다.

 또 배가 지나가려면 다리가 없어야 좋은데, 서울서 부산사이의 다리가 140 - 150 개 정도 된답니다. 그  다리로 배들이 지나가게 하려면  70개 이상은 다시 짓거나 들어올리거나 더 파거나 해야한답니다. 그 다리만 만드는 데도 몇 조원이 들어야 합니다.

 또 운하 공사 중에 KTX, 철도 도로를 막아야합니다. 우리나라 교통대란이 일어납니다.

 운하를 만들면 그 주변 생태계가 파괴됩니다. 흐르지 않은 물은 썩습니다. 상해운하 인근에서는 채소도 못 먹는다고 합니다. 강에 콘크리트 치면 고기가 살 수 없습니다.

운하로 우리나라사람의 1%, 건설업자, 땅투기꾼만 살고, 나머지 99%는 다 죽게 됩니다. 자손만대로 환경재앙이 생깁니다. “하느님께서는 여기 안 계십니다.” 우리는 깊이 생각해야합니다.  ‘하느님이 여기 계시다, 안 계시다’를 어떤 관점에서 봐야하겠습니까? 우리가 하느님의 뜻에 맞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성경을 공부하면서 늘 지금의 생활과 비교해가면서, 하느님이 우리에게 어떻게 역사하고 우리는 어떻게 해야하는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에제키엘서>


에제키엘 예언자가 바빌론 유배지에서 행한 예언활동을 기록한 책

 작년에 이사야, 호세아, 예레미야 같은 대 예언자들에 대해 공부했습니다. 그들은 북 이스라엘 왕국이나 남 유다 왕국에서 활동했던 예언자들입니다.

 에제키엘은 이스라엘이 멸망하기 바로 전과 멸망 후에 유배지에서 활동했던 예언자입니다. 에제키엘은 같은 사건을 두고서도 다른 예언자들과 보는 각도가 조금 다를 수 밖에 없습니다.


에제키엘 : “하느님께서 강하게 하신다.”

 에제키엘의 이름은 “하느님이 강하게 하신다”라는 뜻입니다. 에제키엘은 이스라엘이 망하기 직전부터 예언을 합니다. 망해가는 나라에서 예언하려면 예언자가 강해야 됩니다.


 에제키엘 예언서는 1부와 2부로 뚜렷하게 구분됩니다. 오늘은 1부를 공부합니다. 예언자의 톤이 2부에서는 1부와 완전히 달라집니다.

제 1부 : 예루살렘 멸망 이전에 한 예언

     - 에제키엘의 환시와 소명(1-3장)

     - 예루살렘 멸망에 관한 예언(4-24장)

     - 이웃 나라들에 대한 예언(25-32장)

제 2부 : 예루살렘 멸망 이후에 한 예언

     - 약속의 예언(33-39장)

     - 새로운 예루살렘(40-48장)




<에제키엘 예언자>


기원전 598년 제 1차 바빌론 유배

에제키엘 예언자의 활동기간: 기원전 593 - 571년

“여호야킨 임금의 유배 제 오년에, 주님의 말씀이 칼데아인들의 땅 크바르 강 가에 있는, 부즈의 아들 에제키엘 사제에게 내리고, 주님의 손이 그곳에서 그에게 내리셨다. ”(에제 1,2-3)

 에제키엘이 부르심을 받은 때가  유배당한지 5년째입니다. 에제키엘 예언자는 제 1차 바빌론 유배 때 끌려온 젊은 사제였습니다.

사제는 예루살렘 성전에서 일을 하는 사람입니다. 에제키엘은 예루살렘 성전에 있지 못하고 바빌론으로 끌려가서 살고 있으니, 사제이면서 사제 역할을 못했습니다. 에제키엘이 예언자 소명을 받습니다.

 제 1차 바빌론 유배 때 이스라엘 사람들이 포로로 끌려간 길이 700마일, 1100km가 넘는다고 합니다. 당시에는 가는데 세 달은 걸렸을 것입니다. (지도를 보시면) 바빌론 수도 옆에 니푸르라는 도시가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니푸르 도시 곁에 있는 텔아비브 라는 마을에 수용됩니다. ‘텔아비브’라는 말은 ‘홍수가 오다’라는 뜻입니다. 그 곳은 홍수가 잦은 지역입니다. 바빌론이 유다인들에게 수로정비 등을 시켰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유배생활 초기에 많은 고생을 했을 것입니다.




<에케키엘이 환시를 보다>


이사야 : 천상 성전, 어전회의, 사랍

에제키엘 : 성전지성소, 어좌(御座),커룹(계약의 궤)

하느님의 소명을 받을 때 에제키엘이 환시를 봅니다.

이사야가 본 환시는 천상성전에서 하느님이 어전회의를 하시고, 그 시중을 사랍(신약의 세라핌)이 들고 있는 모습이었습니다.

에제키엘은 하느님이 성전지성소의 어좌에 앉아계시고 커룹들이 보필하는 모습을 환시로 보았습니다. (그 모습을 형상화시킨 것이 계약의 궤입니다. 계약의 궤 안에 하느님의 말씀이 들어있었습니다. 하느님을 보필하고 있는 커룹이 반은 짐승 반은 인간의 형상을 갖고 있습니다.)


불의 형상으로 등장하는 하느님의 수레

“그때 내가 바라보니, 북쪽에서 폭풍이 불어오면서, 광채로 둘러싸인 큰 구름과 번쩍거리는 불이 밀려드는데, 그 광채 한가운데에는 불 속에서 빛나는 금붙이 같은 것이 보였다”(에제 1,4)

하느님이 불의 형상으로 수레를 타고 오시는 것으로 환시가 시작됩니다. 예로부터 불은 하느님의 현존하심을 형상화한 것입니다. 모세가 시나이에서 십계명을 받을 때에도 하느님이 불의 형상으로 오셨습니다. (에제키엘 예언서의 특징이 상징 언어, 상징 행동이 많다는 것입니다. 상징이 많은 에제키엘 예언서는 후대의 묵시문학에 지대한 영향을 끼칩니다.)


수레를 끄는 커룹

네 가지 생물형상 : 피조물 전체를 상징

“그들의 얼굴 형상은 사람의 얼굴인데, 넷이 저마다 오른쪽은 사자의 얼굴이고 왼쪽은 황소의 얼굴이었으며 독수리의 얼굴도 있었다.”(에제 1,10)

커룹은 반인반수입니다. 얼굴이 사람 형상, 사자, 독수리, 황소, 네 가지 생물의 형상이라고 합니다. ‘숫자 4’ 는 전체를 상징합니다. (동서남북, 춘하추동, 등 모든 것을 표현할 때 4를 이용해 곧잘 표현합니다.) 네 가지 생물형상은 피조물 전체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신약복음서 네 저자를 각각 사자, 황소, 독수리?~~ 에 비유하기도 합니다.)


수레의 바퀴 : 완전한 조화, 자유로움

수레를 끄는 바퀴에 대해 이렇게 설명합니다.

“그 모습과 생김새는 바퀴 안에 또 바퀴가 들어 있는 것 같았다.  그것들이 나아갈 때에는, 몸을 돌리지 않고 사방 어디로든 갔다.“(에제 1,16-17))

 수레를 끄는 바퀴는 하느님의 영에 의해 움직이므로 네 바퀴가 일사분란하게 조화를 이루고 움직입니다. 하느님의 영의 인도를 받기에 어디든지 쉽게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움직이실 때는 모든 것이 조화롭고 하느님의 의지대로 움직이십니다.


하느님 : 바빌론 유배지에 발현

- 하늘 궁창 위 : 하느님의 거처

“ 그들의 머리 위 궁창 위에는 청옥처럼 보이는 어좌 형상이 있고, 그 어좌 형상 위에는 사람처럼 보이는 형상이 앉아 있었다 “(에제 1, 25-26)

창세기에도 궁창이 나옵니다. 고대인들은 하늘 위의 궁창은 하느님의 거처라고 생각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느님을 예루살렘 성전에 계시는 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느님을 만나려면 예루살렘 성전으로 가야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에제키엘은 바빌론 유배지에 있습니다. 이방인의 땅, 불결한 땅에서 포로 신세인 아제키엘이 하느님을 볼 수 있게 됩니다. 하느님은 예루살렘에만 매여 계신 분이 아니십니다. 예루살렘에만 하느님이 계시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은 이 세상 어디에나 계십니다.  이 세상 모든 것은 하느님의 것이라는 것을 표현합니다.


땅에 엎드림 :하느님께 경의를 표하는 자세

“ 그것은 주님 영광의 형상처럼 보였다. 그것을 보고 나는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렸다 “(에제 1, 28)

인간이 가장 경의를 표하는 자세는 엎드리는 것입니다.




<에제키엘이 소명을 받다>


사람의 아들 : 나약하고 유한한 인간

반역의 민족 : 순탄치 않을 예언자의 길

“사람의 아들아, 내가 이스라엘 자손들, 나를 반역해 온 저 반역의 민족에게 너를 보낸다. 그들은 저희 조상들처럼 오늘날까지 나를 거역해 왔다”(에제 2,3)

하느님께서 에제키엘을 ‘사람의 아들’이라고 부르십니다. 신약에서 말하는 ‘사람의 아들‘ 개념과는 다릅니다. 여기서는 “너 인간아”라는 뜻입니다. 인간은 진흙의 먼지로 만든 나약하고 하찮고 유한한 존재에 불과하다는 것을 뜻합니다.

 에제키엘이 초인적인 능력을 가진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랑 똑같은 하찮고 나약한 존재입니다. 그렇지만 하느님이 소명을 주시면 예언자 역할을 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예언자로 스스로 뛰어나다고 생각하는 사람을 선택하지 않으십니다. 하느님이 소명을 주시면 우리도 예언자 역할을 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자손들을 반역의 민족이라고 부르십니다. 이스라엘은 이제 더 이상 ‘선택된 민족’이라는 영광스런 이름을 가질 수 없게 되었습니다. 


두루마리 : 하느님의 심판과 무서운 재앙

하느님께서 에제키엘을 배반의 민족에게 보내십니다. 당연히 예언자가 핍박 받거나 박해받을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에제키엘에게 두루마리 하나를 내보이십니다.

“그분께서 그것을 내 앞에 펴 보이시는데, 앞뒤로 글이 적혀 있었다. 거기에는 비탄과 탄식과 한숨이 적혀 있었다. “(에제 2, 10)

보통 비탄, 탄식, 한숨이 뱉어지는 장소는 장례식장입니다. 두루마리 안에 이스라엘의 멸망, 재앙이 적혀있다는 뜻입니다.


두루마리를 먹다. : 말과 행동 자체로 메시지 전달

세상에서 뭔가를 해야 된다면 끝까지 소신을 가지고 해야 합니다. 하지만 무서운 하느님의 예고를 동족에게 전해야하는 에제키엘은 도망가고 싶었을 겁니다.

하느님께서는 두루마리를 보여주실 뿐만 아니라, 한 술 더 떠서 에제키엘에게 두루마리를 먹으라고 하십니다.

 “사람의 아들아, 내가 너에게 주는 이 두루마리로 배를 불리고 속을 채워라.” (에제 3,3)

하느님의 말씀을 말을 전하는 것도 힘든데, 하느님께서는 그 말씀을 먹으라고 하십니다. 음식을 먹으면 살이 되고 피가 됩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먹으면 하느님의 말씀이 살이 되고 피가 되는 것입니다.  말로만 예언하는 게 아니라  행동까지도 하느님 말씀을 표현하는 메시지 도구가 되어야한다는 것입니다.  에제키엘은 행동으로 예언을 많이 합니다.


순명 : 내적 평화와 힘

메시지 : 심판과 구원

놀랍게도 두루마기를 먹은 후에 에제키엘이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하여 내가 그것을 먹으니 꿀처럼 입에 달았다.“(에제 3,3)

두루마리 안의 내용을 전하기 싫었지만, 받아들이니 오히려 평화가 오고 힘이 생긴다는 뜻입니다. 또 그 메시지가 독약 같은 내용이지만 그걸 잘 먹으면  나중에 꿀처럼 변한다는 뜻입니다. 메시지에는 심판과 구원이 함께 담겨있다는 뜻입니다. 이 구절에 에제키엘서 1부와 2부의 내용이 상징적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예언자 : 파수꾼

예언자의 침묵 : 불의와 결탁, 결과에 책임

“사람의 아들아, 내가 너를 이스라엘 집안의 파수꾼으로 세웠다. 그러므로 너는 내 입에서 나가는 말을 들을 때마다, 나를 대신하여 그들에게 경고해야 한다.”(에제 3, 17)

하느님이 예언자를 파수꾼으로 세우십니다.

파수꾼은 적이 쳐들어왔을 때 가장 먼저 보고 성 안 사람들에게 위험을 알려주는 책임자입니다. 적이 쳐들어와도 파수꾼이 가만히 있으면 성 안 백성들이 죽고 망합니다. 파수꾼도 같이 당합니다. 예언자는 파수꾼처럼 하느님의 위기경보발령을 곧바로 백성들에게 전해주어야 합니다. 하느님의 정의를 선포해야합니다.

 올바른 일을 말해야 할 때 말하지 않는 것이 곧 불의입니다. 파수꾼이 입을 닫아버린다면 적과 내통하고 불의와 결탁한 것입니다. 예언자는 충실한 파수꾼이 되어야합니다. 만약 그렇지 않으면 그 책임은 예언자가 져야합니다. (백두대간이 상하고 환경재앙이 닥칠 것을 말하지 않으면 불의와 결탁하는 것이 됩니다. 하느님의 뜻을 저버리는 것입니다. 나서지 않으면 안되니까 교수들이 성명서를 발표한 것입니다.  우리가 말해야할 것을 말하지 않으면 우리가 그 결과에 대한 책임을 져야합니다. 우리가 이야기를 했는데도 사람들이 듣지 않으면 그 결과에 대한 책임은 듣지 않은 사람들이 지게 됩니다.

("그러나 네가 악인에게 경고하였는데도, 그가 자기의 악과 자기의 악한 길에서 돌아서지 않으면, 그는 자기 죄 때문에 죽고, 너는 목숨을 보존할 것이다.  리고 의인이 정의를 버리고 불의를 저지르면, 내가 그 앞에 걸림돌을 놓아 그가 죽게 하겠다. 네가 그에게 경고하지 않으면, 그가 한 의로운 행실들은 기억되지도 않은 채 자기 죄악 때문에 죽겠지만, 그가 죽은 책임은 너에게 묻겠다. 그러나 의인이 죄를 짓지 않도록 네가 경고해 주어서 그 의인이 죄를 짓지 않게 되면, 그가 경고를 받았기 때문에 반드시 살게 되고, 너도 목숨을 보존할 것이다.”  (에제 3,21))




<예루살렘이 적에게 포위된다.>


예루살렘 도성 그림 

    - 예루살렘 심판의 확고한 의지 표현

(예루살렘 :치드키야 왕, 유배지 : 여호야킴 왕)

하느님이 예루살렘의 벽돌에 그림을 그리게 합니다.

“너 사람의 아들아, 벽돌을 가져다가 앞에 놓고 그 위에 도성 하나를, 곧 예루살렘을 새겨라. 그런 다음 그 도성에 포위망을 쳐라.“(에제 4,1-2)

에제키엘은 1차 바빌론 유배 때 끌려왔습니다. 예루살렘은 1차 바빌론 유배 때까지 아직 멸망하지 않았었습니다.  바빌로니아는 1차 침공 때 여호야킴 왕을 바빌론으로 끌고 가고, 예루살렘에는 치드키야 왕을 세워놓았습니다. 유배지에 있는 사람들은 전통적인 왕으로 여호야킴을 인정합니다. 유배지 사람들은 여호야킴과 함께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갈 수 있으리라 기대합니다.

유배지의 유다인들 : 여호야킴과 함께 예루살렘 귀환 기대

                    거짓 예언자들과 민족주의자들의 부추김

                    이집트의 개입 소문

(1950년대 중국의 침공, 티베트의 저항, 

달라이 라마 : 인도 ‘맥로드 간지’에 망명정부를 설치)

중국이 티벳을 정복한 이후 티벳의 독립투쟁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중국은 티벳인들을 약화시키기 위해 한족을 티벳에 이주시킵니다. 한족의 수가 50% 이상입니다. 티벳의 행정, 사업 등을 한족들이 독점하고 있습니다. 티벳인들이 저항하는 데 구심점 역할을 하는 사람이 ‘달라이 라마’입니다. 달라이 라마가 있기 때문에 티벳 사람들은 독립의 꿈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여호야킴이 있기 때문에 유다인들은 귀향의 꿈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이 독립해야 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이 바빌론에 유배당한 것이 무엇 때문인지 잊어버리면 안됩니다. 이스라엘이 바빌론에 유배당한 것은 하느님께 죄를 지어서였습니다. 다시 이스라엘이 예전상태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죄를 씻어야합니다. 회개와 반성, 정화도 없이 옛날 상태로만 돌아가고 싶어하는 것은 말이 되지 않습니다. 그들이 잘못한 것을 기워 갚고 다시는 그러지 않으리라는 결심이 있을 때 하느님께서 제자리로, 옛 상태로 돌려주는 것이지, 회개와 정화도 없이 옛 상태로 돌려주는 것은 자비도 용서도 아닙니다. 그런데도 이스라엘인들은 우리가 잘못한 게 뭐냐? 하는 생각을 버리지 못했습니다. 이스라엘인들은 반성도 하지 않고, 하루 빨리 여호야킴과 같이 예루살렘으로 가고 싶어했습니다. 거짓 예언자들, 편협한 민족주의자들을 내세워 원상회복만 하고 싶어했습니다. 또 이집트가 자기들을 도와서 바빌론에 대항해줄 것을 기대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인들이 그런 헛된 미망에 있는 동안 아무것도 이루지 못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에제키엘에게 도성이 완전히 포위되는 그림을 그리라고 하십니다. 하느님의 심판의지가 확고하므로 이스라엘사람들이 마음을 돌려먹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을 에제키엘에게 이야기해주십니다.


옆구리를 대고 눕다.

왼쪽 옆구리 - 190일

                기원전 722년 북왕국 멸망

오른쪽 옆구리 - 40일,

                기원전 587년 남왕국 멸망

그리고 하느님이 에제키엘에게 옆구리를 대고 누워있으라고 합니다.

“나는 너에게 이스라엘 족속의 죄를 백 구십 일 동안 지운다. 그 하루는 그들이 벌받을 한 해와 맞먹는 것이다. 그 날 수를 채운 다음 이번에는 오른쪽 옆구리를 땅에 대고 누워 유다 족속의 죄를 받아라. 하루를 한 해씩으로 쳐서 사십 일 동안 받아라. ”(에제 4,5-6 공동번역)

 “너는 또 왼쪽 옆구리를 바닥에 대고 누워서, 그 위에 이스라엘 집안의 죄를 놓아라. 그렇게 누워 있는 날수만큼 네가 그들의 죄를 짊어지는 것이다. 나는 그들 죄의 햇수만큼 날수를 정하였으니, 곧 삼백구십 일이다. 너는 그렇게 이스라엘 집안의 죄를 짊어져야 한다. 그 날수를 채운 다음에는 오른쪽 옆구리를 바닥에 대고 누워서, 유다 집안의 죄를 짊어져라. 하루를 한 해씩으로 쳐서 사십 일 동안이다.” (에제 4,5-6)

옆구리를 대고 누워있는 것은 아주 힘든 일입니다.

기원전 722년에 북이스라엘 왕국이 멸망했습니다. 북이스라엘인들이 앗시리아로 끌려갔습니다. 기원전 587년에 남왕국이 멸망하고 유배 간 사람들이 바빌론에서 온갖 고초를 당합니다. 이렇게 고초를 당한 백성들처럼 예언자 자신도 고통을 겪어보라는 것입니다. 예언자가 겪는 고통을 통해서 백성들이 깨달을 수 있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공동번역에서는 190일이라고 했는데 새번역에서는 390일이라고 했습니다.

차이가 있는 이유는 제가 잘 모르겠습니다. 이스라엘이 남북왕국으로 갈라진 922년부터 북이스라엘이 정통 다윗 가문에서 떨어져 나와  우상숭배에 들어갑니다. 그때부터라면 390일이 맞는 것 같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에제키엘에게 백성들의 고초를 직접 체험해 보라고 하신 것입니다. 삼성의 비리를 고발한 김용철 변호사도 편하게 잠 한 숨 못 잡니다.  예언자가 호의호식할 수 없는 겁니다. 예언자는 예언에 따르는 고통을 감당하면서 하느님의 뜻을 전해야합니다.


정해진 분량의 음식 : 빵 : 20 세켈 (230g)

                     물 : 1/6 힌 (1.1 리터)

“ 네가 먹는 음식은 저울로 달아 하루에 스무 세켈씩, 시간을 정해 놓고 먹어라. 

 물도 양을 재어 하루에 육분의 일 힌씩 마시는데, 그것도 시간을 정해 놓고 마셔라. “ (에제 4, 4-8)

하느님께서는 에제키엘에게 정해진 양의 음식만을 저울로 달아서 먹으라고 하십니다. 그 적은 음식으로 버티면서 옆구리를 대고 누워있으라고 하십니다. (한 세켈은 7.5g입니다..... )

이스라엘 백성들이 겪을 굶주림과 목마름을 전하라는 이야기입니다.


빵을 굽는 연료 : 인분(人糞)-쇠똥

부정한 음식

“너는 그 빵을 보리 빵처럼 구워 먹는데,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인분으로 불을 피워 구워라. 그런 다음 주님께서 또 말씀하셨다. “내가 이스라엘 자손들을 민족들 사이로 내쫓으면, 그들은 그곳에서 이처럼 부정한 빵을 먹을 것이다.”(에제 4, 4-8)

빵 구울 때 인분을 쓰라고 하셨지만 에제키엘에 거부합니다. 하느님이 양보하셔서 쇠똥을 쓰라고 하십니다.

 이스라엘은 법으로 부정한 음식을 못 먹게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부정한 음식을 먹지 말라는 규정을 어기게 될 것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포로로 끌려가서 더러운 음식 깨끗한 음식 가릴 처지가 못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부정한 음식을 먹으면 부정한 사람이 되는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부정한 존재가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죄인과 이야기하니 예수님이 죄인이라도 되는 것처럼 여겼습니다. )




<머리카락과 수염을 깎는 에제키엘 >


칼 : 전쟁과 폭력

털깍임 : 모멸과 수치

“너 사람의 아들아, 날카로운 칼을 한 자루 가져다가, 그것을 이발사의 면도날처럼 사용하여 네 머리카락과 수염을 깎고, 저울을 가져다가 그것을 나누어라”(에제 5,1)

하느님께서 에제키엘에게 또 한 가지 괴상한 일을 시키십니다.

나라가 망하면 모멸과 수치를 느낍니다. 남자들의 수염은 힘, 위엄을 상징합니다. 칼은 전쟁, 전쟁이 가져오는 폭력을 상징합니다. 털을 깎이는 것은 패자의 수치 모멸감을 이야기합니다.


죽음 당하는 사람들

전사하는 사람들

포로로 잡혀간 사람들

하느님께서 또 이렇게 이야기하십니다.

“그리고 포위 기간이 끝날 때, 삼분의 일은 성안에서 불로 태워 버리고, 삼분의 일은 가져다가 성을 돌며 칼로 내려치고, 또 삼분의 일은 바람에 날려 버려라.‘(에제 5,2)

하느님께서 에제키엘에게 머리카락과 수염을 저울로 달아서 3분의 일은  성 안에서 태우고,.... 하라고 하십니다. 예루살렘이 포위되면 적군에 의해 삼분의 일이 죽게 되고, 삼분의 일은 싸우다 전사하고, 삼분의 일은 포로로 붙잡힐 것이라는 말입니다.

가망이 없는 이스라엘

그래도 좀 남은 사람들이 있겠지 기대할 수 있지만 하느님께서는 가혹한 말씀을 하십니다.

“그러나 그것들 가운데에서 조금은 남겨 두었다가, 네 옷자락에 묶어 두어라. 다시 그 가운데에서 얼마를 꺼내어 불 속에 던져 살라라. 거기에서 불이 나와 온 이스라엘 집안으로 번질 것이다.” (에제 5,3-4)

조금 남은 것마저도 태워버리라고 하십니다. ‘남아있는 사람들의 희망도 다 꺼내어 던져라. 이스라엘이 외세나 바라고, 거짓 예언자들이나 민족주의자들의 말에 휩쓸려다니는 한 살아날 가망이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철저히 하느님께로 돌아가지 않으면 안 됩니다. 


예루살렘 심판의 이유

하느님의 법을 받은 예루살렘 : 선의 본보기가 아니라 악의 유혹자로 전락

하느님께서 예루살렘을 그렇게까지 징벌하시려는 이유를 말씀하십니다.

“나는 그 도성이 뭇 나라에 둘러싸여 민족들 한가운데에 자리 잡게 하였다. ”(에제 5,5)

하느님은 예루살렘을 세상의 중심으로 만들어 주셨습니다. 하느님의 법을 예루살렘에게 주어 세상의 중심으로 만들어주신 이유는 예루살렘이 그 법을 세상에 펼치게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 수많은 백성들이 모여 오면서 말하리라. “자, 주님의 산으로 올라가자. 야곱의 하느님 집으로! 그러면 그분께서 당신의 길을 우리에게 가르치시어 우리가 그분의 길을 걷게 되리라.” 이는 시온에서 가르침이 나오고 예루살렘에서 주님의 말씀이 나오기 때문이다.  “(이사 2,3)

세상 모든 백성들이 하느님의 법을 배우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찾아옵니다. 하느님의 법은 생명을 주고 평화 행복을 주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법을 먼저 예루살렘에게 주셨습니다. 예루살렘이 그 법을 잘 지켜야하는데 그러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루살렘은 나의 법규들을 다른 민족들보다 더 악하게 거슬렀다. 나의 규정들을 둘레에 있는 나라들보다 더 거슬렀다. ”(에제 5,6)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법을 잘 지켜서 모범을 보이라고 많은 민족들 중에 먼저 이스라엘 백성들을 선택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이 잘나서가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일을 알리고 하느님의 전능하심을 세상 사람들에게 전하도록  이스라엘을 선택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이 하느님의 법을 잘 지켜서 나라가 잘 되면 다른 민족들은 “역시 하느님을 믿는 민족이니까 잘 되는 구나” 하고 생각할 것입니다. 다른 민족들도 하느님의 법을 지켜야겠다는 생각을 갖도록 선의 모범이 되라고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법을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악의 표양을 보여주었습니다. 하느님 법을 어기고 악의 표양을 보여주는 예루살렘을 하느님이 그냥 보기만 하신다면 하느님의 정의가 없는 셈입니다. 예루살렘은 벌을 받을 수 밖에 없습니다.




<예루살렘의 우상숭배와 받을 벌>


환시로 본 예루살렘 성전 : 성전이 우상섬기는 장소로

하느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금 어떤 꼴을 하고 있는지 보라고 에제키엘에게 예루살렘 성전을 보여주십니다.

“그래서 내가 들어가서 바라보니, 기어 다니는 온갖 생물과 혐오스러운 짐승과 이스라엘 집안이 섬기는 온갖 우상들의 그림이 사방의 벽에 돌아가며 새겨져 있었다. ”(에제 8,10)

성전이 우상을 섬기는 장소로 변해버렸습니다. 백성들이 성전에 하느님이 계실 필요가 없도록 만들어버렸습니다.( 우리가 부모님을 모셔야 하는 상황인데, 우리가 잘못해서 부모님이 나가시지 않으면 안 될 불효를 저지른 격입니다.)


이스라엘의 배신, 하느님의 심판자초

“이스라엘과 유다집안의 죄가 너무 크다. .....그래서 나는 동정하지도 불쌍히 여기지도 않고 그들이 걸어온 길을 그들 머리 위로 되갚는 것이다.”(에제 9,10)

이스라엘 백성들이 배신해서, 하느님이 당신 백성을 돌 볼 수 없는 지경이 된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느님과의 계약을 파기하고 먼저 돌아선 것입니다. 계약이 깨지면 먼저 깬 사람의 책임입니다. 이스라엘이 하느님의 심판을 스스로 자초한 것입니다.




<유배자들에게 새 마음을 약속하시다.>


바빌론 귀양살이, 회개와 정화의 과정

새로운 출애굽, 새로운 계약

“나는 그들에게 다른 마음을 넣어주고, 그들 안에 새 영을 넣어주겠다. 그들의 몸에서 돌로 된 마음을 치워버리고 살로 된 마음을 주어, 그들이 나의 규정을 따르고 나의 법규들을 준수하여 그대로 지키게 하겠다. 그리하여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되고 나는 그들의 하느님이 될 것이다.“(에제 11,19-20)

예루살렘이 완전히 멸망하기 전에 예루살렘이 남아있던 사람들은 ‘끌려간 사람들은 죄가 많아서 끌려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예루살렘에 남아있는 사람들은 자기들이 잘하고 있어서 하느님이 봐주신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앞으로 돌봐 줄 사람들은 유배지에 가 있는 사람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바빌론에 끌려간 사람들은 반성의 기회라도 잡을 수 있었습니다. 반성할 기회를 예루살렘에 남은 자들이 아니라 유배 가있는 사람들이 가집니다.

하느님께서는 유배 간 사람들이 반성 회개 정화한다면 다시 새로운 출애굽을 시켜주고 그들과 새로운 계약을 맺어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우리가 어려운 처지에 있을 때, ‘하느님이 나를 버린 것 아니다. 내 삶의 자세를  바꾸면 하느님이 나에게 더 큰 축복을 주실 것이다’라는 생각을 가지면 다시 힘을 얻을 수 있습니다. )

유배지에서 좌절해버리지 않고 하느님의 뜻을 찾고 그 뜻에 따라 살아가기로 결심하면 하느님께서 다시 당신 영을 심어주시겠다고 하십니다.




<주님의 영광이 예루살렘을 떠나다.>


하느님께 버림받은 예루살렘의 운명

“ 커룹들이 날개를 펴는데, 그 곁의 바퀴들도 함께 움직였다. 그들 위에서 이스라엘 하느님의 영광이 자리잡고 있었다. 그 주님의 영광이 도성 한가운데서 떠올라 도성 동쪽에 있는 산 위에 멈추었다.“(에제 11,22-23)

백성이 배반하였는데 하느님이 예루살렘 도성에 계실 수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예루살렘을 떠나십니다. 하느님이 돌보지 않는 예루살렘은 풍전등화입니다. (부모가 돌보지 않으면 아이들은 언제 생명이 끊어질지 모르는 운명에 처하게 됩니다.)

하느님이 에제키엘에게 모든 환시를 보여주신 후에 바빌론에 가서 전부 이야기하라고 하십니다.




<예루살렘 멸망의 상징>


유배봇짐 : 예루살렘 함락과 치욕적인 유배를 상징

하느님이 에제키엘에게 봇짐을 싸라고 하십니다.

“너 사람의 아들아, 유배 짐을 꾸려 대낮에 그들이 보는 앞에서 유배를 가거라. ”(에제 12,3)

피난가려면 급히 짐을 싸야합니다. 예루살렘의 함락과 치욕적인 유배를 상징합니다.


떨면서 빵을 먹고~ : 유배자들이 겪게 될 공포와 전율 상징

“사람의 아들아, 너는 떨면서 빵을 먹고 불안과 걱정에 싸여 물을 마셔라.(에제 12,18)




<예루살렘의 역사 :부정한 아내의 역사>


혼합민족 혼합종교, 혼합문화의 땅

“너의 혈통과 태생으로 말하자면, 너는 가나안 땅 출신이다. 너의 아버지는 아모리 남자고 너의 어머니는 히타이트 여자다.”(에제 16,3)

예루살렘에는 북부지파와 남부지파가 있었습니다. 사울 왕 때 합쳤지만 그 때는 예루살렘을 점령하지는 못했습니다. 예루살렘은 아모리족의 땅이었습니다. 예루살렘은 혼합민족, 혼합종교, 혼합문화의 땅입니다. 예루살렘은 하느님께 배반할 소지를 갖고 있는 땅입니다.


버려진 딸아이 신세

“네가 태어난 일을 말하자면, 네가 나던 날, 아무도 네 탯줄을 잘라주지 않았고, 물로 네 몸을 깨끗이 씻어 주지 않았으며, 아무도 네 몸을 소금으로 문질러 주지 않고 포대기로 싸 주지 않았다. ...너를 싫어하여 들판에 던져버렸다.“(에제 16,4-5)

 본래 북부지파의 근거지는 ??? 남부지파의 근거지는 헤브론였습니다. 다윗이 예루살렘을 정복한 후에 예루살렘을 수도로 삼았습니다. 북부지파나 남부지파는 예루살렘을 별로 탐탁지 않게 생각했습니다. (충청도로 행정수도 옮긴다고 하니까 사람들이 싫어했듯이) 게다가 필리스티아인은 틈만 나면 공격해왔습니다. 예루살렘이 버려진 딸아이 신세였다는 말입니다. (지금도 인도나 중국 같은 데서는 딸을 낳으면 죽여버립니다.)


생명을 건져주시고 보살펴주시는 하느님

      필리스티아와의 전쟁에서 승리

      실로에서 계약의 궤를 옮겨오다

      하느님의 아내 , 하느님의 도성

그런 예루살렘을 하느님이 돌봐 주셨습니다.

“ 그때에 내가 네 곁을 지나가다가, 피투성이로 버둥거리는 너를 보았다. 그래서 내가 피투성이로 누워 있는 너에게 ‘살아남아라!’하고 말하였다.‘(에제 16,6)

생명을 건져주시고 보살펴주시는 하느님 덕분에 예루살렘이 살아남게 되었습니다. 다윗이 승리하여 실로에 있던 말씀의 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겨와서, 예루살렘이 하느님의 도성이 되고, 버려졌던 땅이 왕비가 된 것입니다.

“네 아름다움 때문에 너의 명성이 민족들에게 퍼져 나갔다. 내가 너에게 베푼 영화로 네 아름다움이 완전하였던 것이다. “(에제 16. 15)


통일왕국의 수도, 솔로몬 시대의 영화

은혜를 망각한 이스라엘의 교만

우상 숭배, 외세 의존

예루살렘이 세계의 중심이 되어 솔로몬의 영화까지 누렸습니다. 그러니 예루살렘은 신랑인 하느님한테만 충실하면 됩니다.

“그런데 너는 네 명성에 힘입어 불륜을 저질렀다.”(에제 16,15)

먹고 살만하면 자기가 잘나서라고 생각합니다. 더 잘살기 위해서 하느님만으로는 부족해져서 우상을 섬깁니다. 돈신 권력신이 필요합니다.

이스라엘인들은 하느님보다는 이집트에 의존하면 안전을 보장받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사마리아, 소돔보다 더 큰 죄와 엄한 벌

“나는 간음하고 살인한 여자들을 재판하듯 너를 재판하고, 분노와 질투로 너에게 살인죄의 벌을 내리겠다.”(에제 16,38)

예루살렘이 받은 은혜가 큰 만큼 받을 벌도 큽니다. 사마리아 소돔보다 더 큰 죄를 지었으니 벌도 더 큽니다.


하느님의 심판 : 정화의 단계, 새로운 시작

예루살렘이 멸망합니다.

“나는 네가 한 대로 너에게 해주겠다. 너는 맹세를 무시하여 계약을 깨뜨렸다.“(에제, 16,59 )

“그러나 나는 네가 어린 시절에 너와 맺은 내 계약을 기억하고, 너와 영원한 계약을 세우겠다.”(에제 16,60)

하느님은 끝장을 내기 위해서 심판하시지 않습니다. 심판을 통해서 새로운 삶으로 출발하도록 해주시려는 것입니다.


(20장, 23장에서는 배반의 이스라엘의 역사 재정리되어 있습니다. 한 번 읽어보시면 됩니다.)




<하느님의 정의와 개인의 책임>


죄의 상속과 연대책임

       - 냉소적 허무주의, 자포자기적 운명론

당시 이스라엘 사람에게는 ‘죄의 상속과 연대책임’이라는 생각이 강했습니다. 장애를 갖고 태어나는 것은 조상들의 죄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아버지가 신 포도를 먹었는데, 지식의 이가 시리다.“라는 속담이 있었습니다.

유배당할 때 왜 자기들이 벌을 받을까 생각했습니다. 벌을 받는 것이 자기들이 지고 가야할 운명이라는 생각이 팽배했습니다. 자신들의 멍에가 운명이기에 바꿀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운명론을 갖고 있으면 자신의 행동을 개선할 의지가 없습니다.


자기처신에 대한 책임

        - 상황전환을 위한 노력

에제키엘은 단호히 이렇게 말합니다.

“ 죄지은 자만 죽는다. 아들은 아버지의 죗값을 짊어지지 않고, 아버지는 아들의 죗값을 짊어지지 않는다. 의인의 의로움은 그 자신에게만 돌아가고, 악인의 죄악도 그 자신에게만 돌아간다.”(에제 18, 20)

에제키엘은 인간은 운명의 노예가 아니라고 말합니다. 어떤 상황에 있더라도 자신의 도리와 책임을 다 하면 응분의 댓가를 받습니다. 내 탓이 아니라, 이웃, 조상, 민족의 잘못에 의해 어려운 상황에 처했더라도 그런 상황을 개선해나가려는 노력과 책임을 다해야합니다. 어려운 상황이라고 포기할 것이 아니라 그 상황을 개선하기 위해 연대하고 노력해야합니다.

에제키엘이 절망 가운데에 있는 사람들에게 희망을 불어넣어 준 것입니다.


심판의 잣대 : 오늘

“ 그러나 악인도 자기가 저지른 모든 죄를 버리고 돌아서서, 나의 모든 규정을 준수하고 공정과 정의를 실천하면, 죽지 않고 반드시 살 것이다.”(에제 18,21)

“그러나 의인이 자기 정의를 버리고 돌아서서 불의를 저지르고, 악인이 저지르는 온갖 역겨운 짓을 따라 하면, 살 수 있겠느냐?”(에제 18,24)

어제 의인이었다고 오늘 의인이라고 자신할 수 없습니다. 어제 악인이었다고 구원받을 수 없는 것도 아닙니다. 어제 의인이 오늘 악인이 될 수 있고, 어제의 악인이 오늘 의인이 될 수 있습니다. 어제 착한 일 했다고 오늘까지 하느님 앞에서까지 큰 소리 칠 거 없습니다. 어제 잘못했다고 오늘 하느님 앞에서 좌절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느님의 심판 기준은 바로 오늘 이 순간입니다.


하느님의 자비 : 회개하는 죄인의 구원

의인도 악행을 저지르면 벌을 받고, 악인도 회개하면 구원받습니다.

“이스라엘 집안아, 너희가 어찌하여 죽으려 하느냐? 나는 누구의 죽음도 기뻐하지 않는다. 주 하느님의 말이다. 그러니 너희는 회개하고 살아라.”(에제 18,32)

하느님의 자비는 회개하는 죄인을 구원해주시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다 죄인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자비에 매달릴 수 있기 때문에 희망을 버리지 않을 수 있습니다.




<아내의 죽음을 상징으로 삼다.>


갑작스러운 죽음, 급박하게 닥칠 멸망

하느님께서는 에제키엘의 아내를 갑자기 죽게 하십니다.

“"사람의 아들아, 나는 네 눈의 즐거움을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너에게서 앗아가겠다. 너는 슬퍼하지도 울지도 눈물을 흘리지도 마라.”(에제 24,16)

에제키엘이 아내를 얼마나 좋아했는지, ‘눈의 즐거움’이라는 표현으로 알 수 있습니다.  에제키엘이 사랑하는 아내를 잃듯이, 예루살렘이 아무도 생각하지 못하는 순간에 멸망할 것임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울지도 장례 치르지도 말라고 하십니다. 예루살렘이 멸망할 때 이스라엘 사람들은 울 수 있는 입장도 못 될 거라는 것입니다. 너무 처절해서 넋이 나갈 것이라는 말입니다.


벙어리가 된 에제키엘

“ 에제키엘이 이렇게 너희에게 예표가 되고, 그가 한 것처럼 너희도 하게 될 것이다. 이 일이 일어나면, 그제야 너희는 내가 주 하느님임을 알게 될 것이다.”(에제 24,24)

에제키엘이 말과 행동으로 백성들에게 이야기해도 백성들이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더 이상 할 말이 없습니다. 에제키엘은 벙어리가 됩니다. 이렇게 예언서 1부가 끝납니다.

다음시간에는 2부를 공부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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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햇살 신부님 말씀입니다.)


부활성야미사 때 9번의 독서를 합니다. 첫 번째 독서는 창세기, 두 번째는 창세기, 세 번째는 탈출기, 네 번째는 이사야서, 여섯 번째는 바룩서, 일곱 번째는 에제키엘 예언서였습니다. 여덟 번째는 사도바오로가 로마인들에게에 보낸 편지....입니다.

에제키엘서를 좀 더 일찍 공부했더라면 부활 성야미사에 구세사의 가장 마지막 부분을 일곱 번째 독서로 읽는 의미를 더 잘 알 수 있었을 것입니다. 성경을 알면  전례가 더 풍요롭게 와 닿습니다. .. (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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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살 신부니임~~,김양진 선생니임~~

♡♡♡고맙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