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지혜의 샘/김양진 선생님의 성경교실

14. 가나안 정복과 부족 동맹

김레지나 2008. 8. 28. 18:55

성경교실(구약) : 자료 - 14


가나안 정복과 부족 동맹


* 역사서(歷史書)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을 차지할 때(BC 13세기)부터 왕정시대와 바빌론 유배 시대, 예루살렘 귀환, 그 이후 외세의 지배에 대항하여 종교와 나라의 독립을 위해 투쟁하는 시대(BC 2세기)까지의 이스라엘 역사를 서술하고 있다. 역사서는 네 부분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1. 여호수아기, 판관기, 사무엘기 상․하권, 열왕기 상․하권

2. 역대기 상․하권, 에즈라기, 느헤미아기

3. 룻기, 토빗기, 에스테르기

4. 마카베오기 상․하권


* 여호수아기

 히브리어 성경이나 그리스어 성경 모두 이 책의 중심인물인 여호수아의 이름을 명칭으로 삼았다. 여호수아기는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 가나안 땅의 정복 (1 - 12장)

- 가나안 땅의 분배 ( 13 - 21장)

- 스켐 집회와 부족 동맹 (22 - 24장)(


* 여호수아기가 말하는 가나안 정복의 의미

 이스라엘은 다윗 왕에 이르러서야 가나안 정복 과정을 끝낼 수 있었다. 그런데도 여호수아 당대에 정복한 것처럼 이야기하는 것은 가나안 정복이, 일련의 군사적 사건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이루신 섭리적 사건이라는 신앙의 표현이다.


* 계약의 궤와 요르단 강에서의 기적

 계약의 궤는,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유랑하는 동안 그들을 인도한 구름기둥과 불기둥과 같이, 하느님의 현존을 나타낸다.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 때 하느님의 가호로 마른 땅을 밟으며 갈대바다를 건넘으로써 노예살이에서 자유로운 삶에로 건너갔듯이, 약속의 땅 정복에서도 하느님의 보살핌으로 마른 땅을 밟으며 요르단 강을 건넘으로써 유랑생활을 끝내고 정착생활이라는 새로운 삶으로 건너가게 된다.


* 예리코 점령 과정

 예리코 점령은 이스라엘을 사랑하시고 계약에 충실하신 하느님의 권능으로 이루어진 일이기 때문에 그 과정을 백성 전체가 하느님을 찬미하는 일종의 전례행위로 표현하고 있다.


* 완전 봉헌물

 완전 봉헌물은 적과 전리품 일체를 전멸시키는 것을 말한다. 거룩한 것에 속된 것을 섞을 수도 없고, 만일 이 두 가지가 섞인다면 타락할 위험이 있다고 여긴 때문이다. 또한 탐욕에 의한 약탈 행위로 내부의 다툼과 분열로 이어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것이다.


* 큰 우박, 해와 달의 멈춤

 출애굽 때의 열 가지 재앙처럼 , 하느님께서는 우박이라는 자연 현상과 지구의 자전이 멈추는 초자연적 현상까지 자유롭게 이용하신다.


* 하느님 약속의 실현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조상들에게 하신 약속은 자손의 번성과 가나안 땅을 주시겠다는 것이었다. 이스라엘은 이집트에서 큰 민족을 이루어 첫 번째 약속은 이미 이루어졌었다. 그리고 가나안 땅을 주시겠다는 두 번째 약속이 이제 결실을 맺게 된 것이다. 이로써 하느님의 약속이 온전히 이루어진다.


* 부족동맹

 부족동맹으로 이스라엘은 명실상부한 하나의 민족으로 성립되었고, 약속의 땅 가나안에 정착할 제반 조건을 마련하게 되었다.


* 여호수아기의 가르침

 약속의 땅은 하느님께서 약속할 당시에 이미 주어진 땅인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약속의 땅은 하느님 백성이 최선을 다해 정복해야 할 땅이며 늘 새롭게 건설해야 할 땅이기도 하다.


* 다음 주 주제 : 위기의 이스라엘과 판관들의 활약

* 읽어야 할 성경 : 판관기

* 성경 구절 쓰기 : 판관 2, 1-3 ; 2,11-19 ; 8,23

이하 김양진 선생님의 강의 정리입니다.


<역사서>

BC 13세기- BC 2세기 이스라엘 역사를 기록한 것입니다.

‘하느님과 함께 하는 신앙의 역사’를 이야기합니다.

우리는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를 알기 위해 구약을 공부 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하느님의 선택된 민족입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의 역사는 하느님과 함께하는, 하느님께서 이끄시는 구원의 역사, 신앙의 역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역사서는 다음 네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1. 여호수아기, 판관기, 사무엘기 상․하권, 열왕기 상․하권 :

   가나안 정복에서부터 판관시대, 왕권시대, 분열된 왕조시대, 바빌론 유배까지의     역사를 기록한 것

2. 역대기 상․하권, 에즈라기, 느헤미아기 :

   바빌론 유배에서 - 예루살렘 귀환까지의 역사

3. 룻기, 토빗기, 에스테르기 :

   역사서라고 말할 수 없고 이야기인데,

   개인의 삶을 통해 이스라엘인이 어떻게 살아야하는가를 가르쳐주는 이야기,

4. 마카베오기 상․하권 :

   기원전 3세기 중엽에서 2세기 초까지 이스라엘 사람들이 외세에 항거하는

   이야기



<여호수아기>

여호수아기는 ‘가나안 땅의 정복과 지파별 분배’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가나안 땅의 정복과 분배를 주도한 사람이 여호수아입니다. 보통 히브리어 성서에서는 성서이름을 첫 단어를 이름을 붙였는데, 히브리어 성경이나 그리스어 성경 모두 첫 단어를 따서 성서이름을 붙이지 않고 이 책의 중심인물인 여호수아의 이름을 명칭으로 삼았습니다.

여호수아란 말은 “야훼께서 구원하신다.” 는 뜻입니다. ‘예수아’, ‘요수아’, ‘호세아’, 라고도 부릅니다.

예수님에 관한 옛날 영화에서 예수님을 히브리어로 “여수아”라고 부르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이름도 ‘여호수아’에서 온 것입니다.

여호수아기는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1장 - 12장 : 가나안 땅의 정복

13장 - 21장 : 가나안 땅의 분배

22장 - 24장 : 스켐집회와 부족동맹


<모세의 죽음>

여호수아기에 들어가기 전에 가나안 땅을 정복하기 이전까지의 이야기를 읽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집트를 탈출해서 가나안 땅에 이를 때까지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했습니다. 모세는 광야생활 40년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했습니다. 모세는 참 많은 고생을 했습니다. 요르단 강만 건너면 가나안 땅에 이를 수 있는데, 모세는 가나안 땅을 앞두고 ‘느보산’에서 죽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모세를 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모세처럼 위대한 사람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신명기에 이렇게 기록합니다.

“이스라엘에는 모세와 같은 예언자가 다시는 일어나지 않았다. 그는 주님께서 얼굴을 마주 보고 사귀시던 사람이다.” (신명 34,10)

모세는 정말 위대한 지도자였습니다. 군사 지도자였고, 정치, 경제, 법률제정까지 모든 것을 다 해결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을 시작한 사람은 아브라함이고, 민족이 성립되도록 해 준 사람은 모세입니다.  한 민족이 성립되도록 이끌어주었던   모세가 죽은 후에 새 영도자가 필요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 새 영도자가 여호수아입니다.


<여호수아에게 통수권을 맡기시다.>

여호수아기는 여호수아가 하느님께 소명을 받는 이야기부터 시작합니다.

“나의 종 모세가 죽었다. 그러니 이제 너와 이 모든 백성은 일어나 저 요르단을 건너서, 내가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주는 땅으로 가거라.”(여호 1,2)

모세에 버금갈만한 역할을 맡은 이가 여호수아입니다.

여호수아는 군사적, 정치적, 법률적으로 백성들을 이끌어 나가야 합니다. 여호수아는 우선 가나안을 정복하는 일을 인솔하고 성공시켜야하는 임무를 맡은 사람입니다.

성공의 비결 : 율법의 준수

하느님께서 여호수아에게 성공의 길을 가르쳐주십니다.

“오직 너는 더욱 더 힘과 용기를 내어, 나의 종 모세가 너에게 명령한 모든 율법을 명심하여 실천하고, 오른쪽으로도 왼쪽으로도 벗어나서는 안된다. 그러면 네가 어디를 가든지 성공할 것이다.” (여호 1,7)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을 정복할 수 있는 비결은 율법을 지키는 것입니다. 율법은 하느님께서 제정한 법이니, 하느님의 뜻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는 길만이 약속의 땅을 차지할 수 있는 비결입니다.

힘과 용기의 원천은 하느님의 현존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사람들과의 싸움에서 이기리라는 보장은 없었습니다. 요르단강을 건너는 것 자체가 무섭고 두려운 일이었습니다. 그 땅에는 다른 민족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자기들보다 더 잘났으면 잘났지 못난 사람들은 아니었습니다. 자칫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이 죽을 수도 있는 일이었습니다.

“힘과 용기를 내어라. 무서워하지도 말고 놀라지도 마라. 네가 어디를 가든지 주 너의 하느님이 너와 함께 있어주겠다.”

가나안을 정복하는 일이 힘들고 두렵고 어려운 일이지만 힘과 용기의 원천하느님의 현존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사회생활을 하기는 참 어렵습니다. 신앙의 양심을 사회생활에 적용하며 살기는 어렵습니다. 내 신앙을 굳건하게 지키면서도 신앙생활을 해나갈 수 있는 힘을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십니다. 하느님을 모시고, 어떤 일을 하든지 하느님께서 나와 함께 해주심을 안다면, 우리는 신앙인으로서의 양심을 지키면서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들 힘과 용기의 원천이 하느님께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면 이 세상에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가나안 정복의 과정>

역사적 과정 : 2세기가 지난 다윗왕 시대에 완료

여호수아기 : 여호수아 당대에 세 차례 전투로 완료

이스라엘 민족은 요르단강 건너서부터 약 200년 가까이 흐른 후인 다윗왕 시대에 이르러서야 가나안 땅을 실질적으로 완전히 정복했습니다. 그런데 여호수아기에서는 딱 세 번 공격하고 점령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역사적으로는 사실이 아닙니다. 가나안 땅을 차지하게 된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힘이 있어서도 아니고, 여호수아의 영도력이 뛰어나서도 아닙니다. 가나안 정복은 군사적인 사건이 아니라 하느님의 섭리적 사건이라는 뜻으로 그렇게 기록했습니다. (판관기에 가면 바로 말이 달라집니다.)

사실이 아닌 것을 기록한 것을 보고 우리는 신학적인 의미를 생각해야합니다. 사실이 아니지만 여호수아 당대에 세 차례 전투로 완료되었다고 쓴 이유는 가나안 정복은 (하느님의) 섭리적 사건 이라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였습니다.

다윗 왕에 이르러서야 끝낸 가나안 정복을 여호수아 당대에 정복한 것처럼 이야기하는 것은 가나안 정복이, 일련의 군사적 사건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이루신 섭리적 사건이라는 신앙의 표현입니다.


<예리코에 정탐꾼을 보내다>

(지도를 보시면~~~)

“가서 저 땅과 예리코를 살펴보아라.” (여호 2,1)

예리코는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려면 반드시 거쳐야하는 관문이었습니다.

낯선 땅을 차지하기 위해서는 적을 알고 나를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정탐꾼을 보냅니다.

“그들은 길을 떠나 라합이라고 하는 창녀의 집에 들어가 거기에서 묵었다.” (여호 2,1)

정탐꾼들이 창녀의 집으로 가서 묵었습니다. 낯선 지역으로 간 정탐꾼은 여인숙이나 여관에서 묵을 수 밖에 없습니다. 여인숙이나 여관의 주인이 창녀였을 수도 있습니다. 성경에서는 거짓말을 하지 않고 사실대로 ‘창녀’라고 썼습니다. 개신교 성경에서는 ‘여인숙’에 들어갔다고 번역되어 있기도 하지만 그렇게  미화할 필요는 없습니다. 정탐꾼들이 몰래 들어갔지만 소문이 퍼졌습니다. 예리코 왕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호시탐탐 노리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예리코 왕의 명령 : 라합의 거부

예리코 왕은 라합에게 사람을 보내 정탐꾼들을 내보내라고 합니다. 내보내면 체포할 계획이었습니다. 라합이 왕의 명령을 거부하고 왕을 속입니다. 라합은 그 사람들은 벌써 떠났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정탐꾼들을 숨겨줍니다. 라합은 숨겨준 이유를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주님께서 이 땅을 당신들에게 주셨다는 것을 압니다.” (여호 2,9)

동네 우물가나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곳, 여행객들이 많이 모이는 곳에서는 정보가 빠릅니다. 라합이 여인숙 주인이었든, 몸 파는 사람이었든, 라합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탈출해서 광야에서 거기까지 온 이야기를 다 들었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길을 이끄시는 분은 그 사람들이 믿는 신, 야훼 하느님이시라는 것을 라합은 믿었습니다. 라합은 이스라엘을 이끄신 하느님의 행적을 알고 있었습니다. 하느님께서  강력한 파라오도 굴복시키고, 가나안 땅까지 이끌어주셨으니 당연히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을 차지하게 해주실 것이라고 믿었던 것입니다.

이방인 여인의 신앙고백

라합이 고백합니다.

“주 당신들만의 하느님만이 위로는 하늘에서, 아래로는 땅에서 하느님이십니다.”(여호 2,11)

라합은 가나안 땅에 사는 사람이었으니 이방인입니다. 게다가 여자였고, 직업도 떳떳치 못했습니다. 이 이방인 여인이 하느님께 대한 신앙을 고백한 것입니다. 라합은 성경에 나온 이방인들 중에서 야훼신앙을 고백한 첫 번째 사람입니다.

라합은 밤중에 이스라엘인 정탐꾼들을 탈출시킵니다. 하느님이 가나안 땅을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주기로 한 것을 라합은 알고 있었습니다. 곧 이스라엘 사람들이 쳐들어 올 테고, 그렇게 되면 가족들의 안전을 보장할 수 없으리라고 생각하고  이렇게 부탁합니다.

“ 내 아버지와 어머니와 형제 자매, 그리고 그들에게 딸린 모든 이를 살려주시고 우리의 목숨을 죽음에서 구해주십시오.”(여호 2,13)

‘생사는 하느님한테 달려 있습니다.’ 라는 신앙을 라합이 고백한 것입니다.

히브리 산파들, 라합 - 하느님께 대한 믿음

라합의 이야기를 읽으면 탈출기에서의 히브리 산파들이 생각납니다. 파라오가 사내아이를 죽이라고 했지만 산파들이 그 명령을 듣지 않았습니다.

히브리 산파들과 라합은 거짓말을 했지만, 하느님께 대한 믿음을 바탕으로 한 일입니다. 의로운 일을 위해, 생명을 구하기 위해 거짓말을 한 것입니다.

라합을 다윗왕의 족보에서 삭제해버려도 좋겠지만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즈를 낳고 보아즈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았다. 오벳은 이사이를 낳고 이사이는 다윗 임금을 낳았다.”(마태 1,5)

마태오 복음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를 언급한 부분입니다. 가장 위대한 성왕, 다윗왕과 메시아가 태어난 가문의 조상들 중에 창녀 라합이 있습니다.

우리가 무슨 일을 하건 어떤 직업을 갖건 상관 없습니다. 우리의 믿음이 중요할 뿐입니다. 라합은 이방인이었고 천한 생활을 했지만 의로운 사람으로 인정받았습니다. 그래서 다윗왕의 조상인 살몬에게 시집가서 다윗왕의 가문을 이어가게 됩니다. 하느님의 섭리입니다.

요즘 신정아씨의 학력위조 사건으로 날마다 뉴스에서 시끄럽습니다. 이 세상은 실력보다 간판을 바랍니다. 만약 성경의 저자들이 믿음보다 간판을 중요시했더라면 라합을 그럴듯하게 예리코의 공주쯤으로 기록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미화하지 않았습니다.

직업의 귀천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우리 삶이 진실하고 우리 믿음이 진실하면 되는 것입니다.

내가 무엇을 하는가, 어떤 직업을 갖고 있는가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직업에 대한 편견은 없는지 반성해봐야 합니다. 사회는 헛것들을 가치있게 여깁니다.  여호수아기의 라합을 통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고 어떤 것이 진실된 것이고 어떻게 올바른 믿음을 가져야 하는지 배울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요르단 강을 건너다.>

“계약 궤를 메고 백성 앞에 서서 나아가라.”(여호 3,6)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를 유랑할 때 구름기둥 불기둥은 하느님의 현존을 나타냈습니다. 구름기둥 불기둥은 하느님께서 앞장서서 이끄신다는 것을 나타냈습니다.

계약의 궤는 하느님의 말씀이 들어있는 궤입니다.

계약의 궤는,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유랑하는 동안 그들을 인도한 구름기둥과 불기둥과 같이, 하느님의 현존을 나타냅니다. 계약의 궤가 백성 앞에 서서 나아갔다는 말은 가나안 땅을 정복하는 것은 하느님께서 이끄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시나이 광야 : 구름기둥, 불기둥

가나안 땅 : 계약의 궤

요르단 강은 갈대바다보다 크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작은 강도 아닙니다. 가나안땅 사람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강을 건너는 사이에 가만히 있지는 않을 겁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 기적을 베푸십니다.

“수확기 내내 강 언덕까지 물이 차 있었는데, 궤를 멘 사제들이 요르단 강 물가에 발을 담그자, 위에서 내려오던 물이 멈추어 섰다.”(여호 3,15 -16)

요르단 강을 가 봤는데, 얕볼 강은 아닙니다. 우기에는 강물이 많이 불어납니다. 추수때 물을 닫으면 수위가 올라갑니다. 요르단 강에 물이 차 있었는데, 물이 멈추어섰습니다.

갈대바다가 갈라진 것이 자연현상이라고 하더라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건너려는 그 순간에 하느님께서 그 자연현상을 이용하셨다는 것, 그것이 기적입니다.

요르단 강을 건널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르단 강을 고생을 안 하고 하느님 덕에 건넜다는 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잘나서 건널 수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고생을 안 시키시고 마른 땅을 밟으며 건너도록 해주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 때 하느님의 가호로 마른 땅을 밟으며 갈대바다를 건넘으로써 노예살이에서 자유로운 삶에로 건너갔듯이, 약속의 땅을 정복할 때도 하느님의 보살핌으로 마른 땅을 밟으며 요르단 강을 건넘으로써 유랑생활을 끝내고 정착생활이라는 새로운 삶으로 건너가게 됩니다.

갈대바다를 건넘으로서 노예생활에서 자유를 얻었고, 죽음에서 을 얻었습니다.

요르단강을 건넘으로서 유랑생활을 하던 촌뜨기들이 정착생활을 하게 됩니다.

그 과정의 난관을 하느님께서 없애주십니다.

“온 이스라엘이 마른 땅을 밟고 건너서, 마침내 온 겨레가 다 건너간 것이다.”(여호 3,17)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느님께 고마울 수밖에 없었겠지요?)


<예리코를 점령하다>

일곱 사제, 일곱 뿔 나팔, 계약의 궤, 이레동안

예리코 성을 점령하기 위한 행동으로는 황당한 것들입니다. 한 성읍을 점령한 이야기를 하려면 선발대가 나가고, 2선에서 활을 쏘고, 포위하고, 그런 것들을 보통 묘사합니다. 그런데 예리코 성을 점령할 때는 희한하게 사제 일곱명을 앞장 세우고, 뿔 나팔을 주고, 계약의 궤을  메고 갔다는 이야기 뿐입니다. 7이라는 숫자는 충분한 기간을 뜻합니다. 엿새동안은 성을 한번만 돌고, 일곱째 날에는 성을 7번 돌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함성을 지르니 성이 무너졌습니다.

“그때에 성벽이 무너져 내렸다. 백성은 저마다 성읍을 향하여 곧장 앞으로 올라가서 그 성읍을 함락하였다.”(여호 6,20)

과장이 심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야기하고 싶어했던 것은 이것입니다. “우리가 예리코 성을 점령할 수 있었던 것은 군사작전이 뛰어나서도 아니고  우리 힘이 좋아서가 아니다. 오직 하느님이 예리고 성을 점령해주셨고, 우리는 거저 얻은 것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 전쟁을 기록할 때 어떻게 했다고 일일이 쓸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그래서 예리코 성읍을 점령한 것을 하느님께 대한 감사의 전례의식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예리코 점령은 이스라엘을 사랑하시고 계약에 충실하신 하느님의 권능으로 이루어진 일이기 때문에 그 과정을 백성 전체가 하느님을 찬미하는 일종의 전례행위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아칸의 죄와 그 결과>

“성읍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은 주님을 위한 완전 봉헌물이다.” (요호 6,17)

완전봉헌물이라는 것은 포로와 전리품을 모두 말살시킨다는 말입니다. 징키스칸, 시저 알렉산더왕도 전쟁에서 이기면 진 쪽 사람들을 포로로 잡아서 죽이거나 노예로 삼았습니다. 전리품은 나누어주거나 본국의 국고에 넣었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전쟁에서 얻은 사람들, 물건들 이 모든 것들은 주님을 위한 완전봉헌물이라고 말합니다.

완전 봉헌물 : 적과 전리품의 완전한 말살

일종의 초토화 작전입니다. 성전을 지을 때 쓸 금 정도를 남기고 다 없애버렸습니다.

원래 모든 전리품은 첫째로 왕의 몫입니다. 이스라엘의 왕은 여호수아가 아니라 하느님이십니다. 전리품을 나누고 포로를 노예로 쓰면 되었을 텐데, 왜 다 말살 시켰는지 오늘날의 관점으로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잔인하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 당시에는 이스라엘 사람들만이 유일하게 유일신을 모시는 단 하나의 민족이었습니다. 가나안 사람들을 다신교를 믿고 있었습니다. 그 사람들과 섞이면,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이 섞이면 속되어진다고 생각해서 다 말살시켰습니다.

또, 전리품을 전부 나누어 가질 때 자연히 욕심이 생깁니다. 많이 차지한 사람과 적게 차지한 사람들끼리 다툼이 생깁니다. 특히 이스라엘은 단일 지파가 아니라 열두지파였습니다. 전리품을 나누다가 탈이 생기기 쉽습니다. 민족을 분열시키고 멸망시킬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자칫하다가는 이스라엘 진영까지 완전 봉헌물 신세가 될 수 있었습니다.

타락과 탐욕은 나눔과 분열의 요소

“ 너희는 완전 봉헌물을 차지해서 이스라엘 진영까지 완전 봉헌물로 만들어 불행에 빠뜨리는 일이 없게 하여라.”(여호 6,18)

완전 봉헌물은 적과 전리품 일체를 전멸시키는 것을 말합니다. 거룩한 것에 속된 것을 섞을 수도 없고, 만일 이 두 가지가 섞인다면 타락할 위험이 있다고 여긴 때문입니다. 또한 탐욕에 의한 약탈 행위로 내부의 다툼과 분열로 이어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것입니다.


<아칸의 죄와 그 결과>

그런데 꼭 모난 놈들이 있게 마련입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이 완전 봉헌물과 관련하여 죄를 지었다. 유다 지파 제라의 증손이고 잡디의 손자이여 카르미의 아들인 아칸이 완전 봉헌물을 차지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주님께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진노를 터뜨리셨다.”(여호 7,1)

견물생심이라고 아칸은 전리품을 보니 욕심이 생겼습니다. 없애야 하는데 감춥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어겼으니 이스라엘인들도 완전 봉헌물 신세가 될 위험에 처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범인을 잡아내서 아칸을 처형하였습니다.

성읍 ‘아이’ 와의 전쟁에서 패배,  아칸 처형 후 성읍 ‘아이’를 정복

이스라엘 백성들이 한번 하느님의 뜻을 거슬렀기 때문에 ‘아이’라는 성읍과 싸움에서 패배했습니다. ‘아이’는 예리코보다 훨씬 작은 성이었습니다. 전쟁에서 패배한 원인을 알아보니, 결국 아칸이 완전봉헌물 일부를 훔쳤다는 것이 드러납니다. 이스라엘백성은 아칸을 처형하고, 아칸의 재물을 다 말살 시킨 뒤에 다시 ‘아이’를 점령합니다.


<여호수아가 기브온을 구하다>

(지도를 보시면....)

기브온과 평화조약 체결, 아모리족의 기브온 공격

이스라엘 백성들이 승승장구하니까, 예루살렘 근처 부족들이 불안해서 이스라엘에 대항하기 위해 연합군을 만들었습니다. 가나안 땅에는 각각 다른 부족들이 다른 성읍들을 만들고 살고 있었습니다. 예리코 성과 가장 가까이에 있는 ‘기브온’이 제일 먼저 예리코와 아이 신세가 될 것 같았습니다. 기브온 사람들이 꾀를 냅니다.

“그런데 기브온 주민들은 여호수아가 예리코와 아이에 한 일을 듣고서, 그들 나름대로 속임수를 쓰기로 하였다.”(여호 9,3-4)

속임수라는 것은 “적대할 생각이 없다, 평화롭게 삽시다”하고 제안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과 기브온이 평화조약을 맺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싸우지도 않고 기브온을 차지하였습니다. 그러니 주변에 있는 부족들이 모여서 기브온을 공격합니다. 기브온에서 여호수아에게 구원을 요청합니다. 여호수아가 기브온을 구하기 위해 두 가지 기적을 일으킵니다.

우박 : 자연현상

“주님께서는 아제카에 이르기까지 하늘에서 큰 우박을 쏟아 부어 그들을 죽게 하셨다.”(여호 10,11)

“백성이 원수들에게 복수할 때까지 해가 그대로 서 있고 달이 멈추어 있었다.”(여호 10,13)

지구의 자전이 멈춘 것입니다.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초자연적인 현상입니다. 이런 예를 탈출기 출애굽 때 봤습니다.

출애굽 때의 열 가지 재앙과 같은 경우입니다. 열 번째 재앙은 이집트의 모든 맏물들을 죽이는 일입니다. 그런 것은 자연적으로는 불가능한 초자연적현상입니다.

출애굽 때의 열 가지 재앙처럼 , 하느님께서는 우박이라는 자연 현상과 지구의 자전이 멈추는 초자연적 현상까지 자유롭게 이용하십니다.


<여호수아가 가나안 정복을 끝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든 부족 모든 성읍들을 다 없앨 수는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여호수아기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렇게 여호수아는 주님께서 모세에게 이르신 그대로 모든 땅을 정복하였다.”(여호 11,23)

가나안 땅 정복은 하느님의 선물

가나안 땅 일부, 중요한 곳을 점령했다고 써도 될 텐데, 모든 땅을 다 정복했다고 썼습니다. 가나안 땅은 하느님께서 주시기로 약속한 땅이며, 하느님의 것이므로 하느님의 장자인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어진 하느님의 은총의 선물이라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서입니다.

가나안 땅을 열두지파에게 나누어줍니다.

<하느님의 약속이 실현되다.>

“주님께서는 이렇게 이스라엘 백성의 조상들에게 주시겠다고 맹세하신 모든 땅을 그들에게 주셨다.”(여호 21, 43)

하느님이 조상들에게 주신 약속 중에 중요한 것이 두가지였습니다.

하느님의 약속 : 자손의 번성, 가나안 땅 차지

“이리하여 주님께서 이스라엘 집안에 하신 그 모든 좋은 말씀이, 하나도 빠지지 않고 다 이루어졌다.”(여호 21,45)

자손번성이 이루어지리라는 약속은 이미 이집트에서 살 때 큰 민족을 이루었기에 이미 이루어졌던 것입니다. 하느님은 당신 약속에 충실하신 분이십니다. 그리고 가나안 땅을 주시겠다는 두 번째 약속이 이제 결실을 맺게 된 것입니다. 이로써 하느님의 약속이 온전히 이루어집니다.

안정된 생활 터전 : 사회적 종교적 생활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가나안 땅에 정착하고 안정된 삶의 터전을 갖고 사회적 종교적 생활을 할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하게 됩니다.


<스켐 집회와 부족 동맹>

유목생활을 하다가 정착생활을 하려면 농사를 지어야합니다. 유목생활을 할 때는 양 끌고 다니면서 풀 먹이고 살았는데, 정착생활을 하려면 농사를 지어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농사경험이 없었습니다. 이스라엘백성들은 그들의 하느님이 유목생활이나 싸움에는 유능하시다는 것을 믿었지만 농사짓는 것을 잘 돌볼 수 있는 분인지 확신할 수 없었습니다. 가나안 족이 믿는 신이 농경생활을 하는데 훨씬 유용하겠다고 생각하기가 쉬웠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시급한 문제가 종교심 고취, 신앙을 굳건히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여호수아가 열두지파를 모이게 합니다.

“여호수아는 이스라엘의 모든 지파를 스켐으로 모이게 하였다.” (여호 24,1)

열두지파가 지금까지는 전쟁하느라 정신 없었는데 정식으로 모입니다. 여호수아가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니 이제 너희는 주님을 경외하며 그분을 온전하고 진실하게 섬겨라. 그리고 너희 조상이 강 건너편과 이집트에서 섬기던 신들을 버리고 주님을 섬겨라. 만일 주님을 섬기는 것이 너희 눈에 거슬리면, 너희 조상들이 강 건너편에서 섬기던 신들이든, 아니면ㅁ 너희가 살고 있는 이 땅 아모리족의 신들이든, 누구를 섬길 것인지 오늘 선택하여라. 나와 내 집안은 주님을 섬기겠다.”(여호 24,14-15)

여호수아가 열두지파에게 양자택일하라고 합니다. 야훼 하느님만을 섬길 것이냐? 아니면 새로운 생활을 하기 위해 가나안의 신을 섬길 것이냐? 선택해라고 합니다. 그 선택은 이스라엘 민족의 정체성에 관한 것입니다. 여호수아는 하느님께서 출애굽부터 해주신 일을 이야기해줍니다.

그러니 부족들이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주님을 섬기겠습니다. 그분만이 우리의 하느님이십니다.” (여호 24,18)

부족들은 “여호수아 당신이 말한 대로 여기까지 오는 동안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해주신 것을 인정합니다. 그러니 우리는 하느님만을 섬기겠습니다” 라고 말합니다.

섬기다 : 인격적인 관계에서 하느님을 모든 것의 주님으로 모시는 것

‘섬기다’라는 뜻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듯이 종이 주인을 섬기는 것만이 아닙니다. 여기서 ‘섬기다’란 뜻은 인격적인 이야기입니다. 우리의 인격을 다해서 하느님을 모든 것의 주인으로 모시는 것입니다. 십계명의 첫째 계명도 마찬가지의 의미를 갖습니다.

유일신 야훼 하느님께 대한 이스라엘의 신앙고백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처음으로 입을 모아 신앙고백을 한 것입니다. 스켐집회와 부족동맹은 아주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하느님 한분만을 주님으로 모시고 섬기겠다고 고백한 집회이고 동맹입니다.

“너희는 주님을 섬길 수 없을 것이다. 그분께서는 거룩하신 하느님이시며 질투하시는 하느님으로서, 너희의 잘못과 죄악을 용서하지 않으신다.”(여호 24,19)

무서운 말입니다. 부족들이 하느님만 섬기겠습니다. 라고 고백을 했는데도 여호수아는 “너희는 할 수 없다. 하느님은 질투하시는 분이시다”라고 말합니다.

질투하다 :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 “마음에 깊이 새겨두고 있다.”

질투라고 하면 연인사이에서 생기는 감정을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질투하시는 분”이시라는 말에서의 ‘질투’는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우리들이 흔히 생각하는 질투가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깊이 사랑하십니다. 하느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당신의 말만 들으면 올바로 살 수 있고 구원을 받을 수 있음을 아십니다. 당신 말씀을 안 들으면 구원과 행복이 없음을 알고 계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느님 이외의 다른 우상을 섬기면 멸망의 길을 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는 꼴을 하느님이 못 보시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질투는 바로 그런 의미입니다.

‘질투하는 하느님’이라는 뜻은 : 이스라엘 백성들을 너무 너무 사랑해서, 당신 이외의 것을 섬겨서 멸망의 길로 가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시는 하느님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야단치고 혼내고 징벌하십니다. 우리는 아이들을 키우면서 딴 길로 가면 채찍질을 하기도 하고  올바른 길로 이끌어주려고 노력합니다. 그것이 진정한 부모의 자식사랑입니다. 그런 뜻이 ‘질투하시는 하느님’의 바른 뜻입니다.

“”너희가 주님을 선택하고 그분을 섬기겠다고 한 그 말에 대한 증인은 바로 너희 자신이다.”하고 말하자, 그들이 “우리가 증인입니다.”하고 대답하였다.“ (여호 24,22)

여호수아가 하느님을 믿으라고 강요하지는 않았습니다. 여호수아는 부족장들에게 “분명히 너희들은 그렇게 말을 해도 하느님을 두고 다른 데로 쫓아갈 것이다. 너희들이 정말 하느님만을 섬길 수 있겠느냐”고 묻고 다짐을 받습니다.

신앙고백은 강요에 의한 것이 아닙니다.

신앙은 자유의지로 행하는 자발적 선택행위입니다. 하느님을 믿으면 천당에 가고, 안 믿으면 지옥에 가니까 너희들은 믿어야한다는 식으로 선교하면 곤란합니다. 올바른 선교가 아닙니다. 요즘은 선교라는 표현대신 복음화라는 표현을 씁니다. 내가 먼저 복음화 되고 내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다른 사람과 세상이 복음화 되도록 하는 것입니다. 예수 믿으면 천당, 안 믿으면 지옥, 그런 식의 선교는 복음화에 도움이 안됩니다.

부족동맹 :명실상부한 하나의 민족으로 성립

“그날 여호수아는 스켐에서 백성과 계약을 맺고 그들을 위한 규정과 법규를 세웠다.” (여호 24,25)

열두지파가 부족동맹을 맺습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이스라엘은 하나의 민족으로 형성됩니다. 한 개인의 위대한 영도로 민족을 이룬 것이 아니라 유일신 야훼에 대한 공동의 신앙고백이 한 민족을 이루게 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열두 지파가 한 민족을 이루고 그것이 신약까지 이어집니다. (예수님의 제자도 열두제자였습니다.)


<약속의 땅과 하느님 나라>

우리가 바쁘게 여호수아기를 훑었습니다. 여호수아기가 우리에게 주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의 땅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하느님은 계약에 충실하신 분이십니다. 하느님께서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으니, 그 약속을 하신 순간부터 가나안 땅은 미래에 주어질 땅이 아니라 이미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어진 땅이었습니다. 하느님이 약속에 충실한 분이심을 믿는다면 하느님 나라는 이미 내것이 될 수 있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우리 것입니다.  이미 주신 하느님 나라에 가기 위해서 우리는 그에 합당한 노력을 해야 합니다.

하느님 나라는 우리가 죽어서 가는 나라가 아닙니다. 예수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심으로써 이미 하느님 나라는 이 땅에 와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하느님 나라를 살아야합니다. 우리는 이미 세례 받았으니 이미 주신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 그에 합당한 노력을 하고 하느님의 뜻을 받들고 살아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부터 하느님의 나라를 살아야 합니다. 그 나라를 새롭게 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으로 이 세상을 복음화 시키는 일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당신 나라로 부르시고, 약속해주셨습니다.  이미 와 있는 하느님의 나라를 살도록 노력해서 그 삶이 연장되어서 하느님과 함께 살 수 있는 그날을 위해서 끊임없이 하느님의 뜻에 맞는 삶으로 쇄신된 삶을 살아야합니다. 그것이 여호수아기가 주는 가르침입니다.

약속의 땅은 하느님께서 약속할 당시에 이미 주어진 땅인 것입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약속의 땅은 하느님 백성이 최선을 다해 정복해야 할 땅이며 늘 새롭게 건설해야 할 땅이기도 합니다.


==== 김양진 선생님 고맙습니다. ^^ 인도 사진 근사했어요. .....오랜만에 뵈니 정말 반가웠습니다. 성경강의도 언제나처럼 훌륭해서, 행복했습니다. 특히, ‘질투하시는 하느님’의 의미를 제대로 알게 되어서 기뻤어요. 고맙습니다. 건강하세용. ===========


다음은 햇살 신부님 말씀입니다.


텔레비전 채널 중에 히스토리 채널이 있죠? History 의  H 자가 다이빙대 위에서 낑낑거리다가 물에 풍덩 빠집니다. (ㅎㅎㅎ 성경공부 갔노라!, 햇살 신부님의 춤추는 모습을 보았노라!. 무지 귀여우셔서 웃었노라!.- 햇살 신부님..그 채널에서 H 자가 도대체 어떻게 낑낑 춤을 추길래,,그러코롬 귀엽게 흉내를 내신다요? 우헤헤헤.. 엉덩이춤 추시는 모습이 무지 재미있었어용. 그 모습을 찍었어야 하는디..) 역사는 휘청거리면서 발전하다가 물에 빠지기도 한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역사 이야기는 굉장히 지루할 수도 있고, 진지해서 매일의 삶에 엑기스가 될 수도 있습니다. 오늘부터 역사서를 공부했습니다. 역사에는 왕조사가 있고, 민중사가 있습니다......... 라합의 이야기를 들으면 가슴을 때리는 부분이 있습니다. 성경의 역사 속에서는 우리들 가슴을 찡하게 만드는 것이 있습니다. 역사서는 지루하고 어렵다는 선입견을 던져두고, 진지한 마음으로 임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당. 다음 주에 다른 분들과 함께 오시는 분들에게는 $$$$$$$$ 를 드리겠습니다.. (믿을까요? 말까요??ㅎㅎㅎ 믿는다고 해도 제시하신 액수가 쪼까 실망시러버서리.. 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