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지혜의 샘/김양진 선생님의 성경교실

16. 최후의 판관 사무엘과 최초의 왕 사울

김레지나 2008. 8. 28. 18:58

성경교실(구약) : 자료 - 16


최후의 판관 사무엘과 최초의 왕 사울


* 사무엘기

사무엘기는 대략 기원전 1040년부터 기원전 970년까지의 이스라엘 역사를 기록하고 있는데, 이 시기에 이스라엘은 왕정체제를 도입하고 통일왕국을 이룬다. 이 책의 히브리어 성경 명칭은 이스라엘의 마지막 판관이면서 왕정 도입에 중심 역할을 한 사무엘의 이름을 따서 붙인 것이다.

사무엘기는 등장하는 주요 인물들을 중심으로 여섯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 1부 : 엘리와 사무엘 (상권 1-7장)

- 2부 : 사무엘과 사울 (상권 8-15장)

- 3부 : 사울과 다윗 (상권 16 - 31장)

- 4부 : 유다의 왕, 다윗 (하권 1 - 4장)

- 5부 : 통일왕국을 이룬 다윗 (하권 5 - 20 장)

- 부록 : 다윗의 승전가 (하권 21 - 24장)


* 사무엘

태중에서 이미 나지르인으로 봉헌된 사무엘은 이스라엘의 마지막 판관이자 사제이며 예언자였으며, 사울과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 왕위에 오르게 함으로써 판관시대와 왕정시대를 잇는 다리 역할을 했다.


* 성경의 출생설화

 구약성경에 나오는 족장사 (아브라함) ․ 민족사(모세) ․ 왕정사(사무엘)의 서두에는 언제나 특별한 인물의 출생설화가 등장한다. 이들은 모두 하느님의 특별한 은총으로 출생하여 하느님의 소명을 받고 그 임무에 충실히 살아야 할 존재라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다. 이 구약성경의 전통은 신약성경(세례자 요한 ․ 예수 그리스도) 에서도 마찬가지로 이어진다.


* 기름부음 받은 이

 종교적 목적으로 사람에게 기름을 바르거나 붓는 것은 그 사람이 하느님의 축복을 받아 성별(聖別)된 사람이라는 뜻이다.


* 필리스티아인들

 기원전 12세기경에 가나안 해안지방으로 이주해 온 해양민족으로, 다섯 개의 도시(가자, 아스돗, 아스클론, 갓, 에크론)로 이루어진 연맹국가를 세웠다. 내륙지방으로 진출하려는 필리스티아인들과 약속의 땅을 정복하려는 이스라엘은 오랫동안 생존을 건 싸움을 벌였다. 오늘날 가나안 땅을 ‘팔레스티나’(Palestina) 라고 부르는 이유는 로마인들이 유다 독립전쟁(A.D 132-135)에서 승리한 후 유다인들과 적대관계에 있었던 필리스티아인들의 이름을 가나안 땅에 붙여 주었기 �문이다.


* 군주제도

 부족동맹체제로는 주변 국가들의 위협에 대처할 수 없게 된 이스라엘이 강력한 중앙집권적 왕정체제를 원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일 수 있다. 그러나 군주제도의 가장 큰 병폐는 왕이 곧 신(神)인 것처럼 백성들 위에 군림한다는 것이다. 군주제도가 하느님의 뜻에 합당한 제도는 아니지만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현실적인 필요에 의해 만들어지는 불합리한 제도를 통해서도 구원의 역사를 지속해 가신다.


* 사울

 벤야민 지파 출신으로 최초의 왕 사울은 기원전 1020년경에 즉위하여 기원전 1000년경에 죽었다. 왕정시대의 막을 연 그의 출발은 화려했지만 인간적 약점을 극복하지 못하고 하느님의 뜻을 거스름으로써 비참한 말년을 보내고 끝내는 비극적 죽음을 맞이했다.


* 다윗

 유다 지파 출신으로 베들레헴에 사는 이사이의 막내아들로 양을 치던 소년에 불과했던 다윗은 통일왕국의 위업을 이루고 위대한 왕으로 추앙받게 된다. 그는 유다 왕으로 7년, 이후 통일왕국의 왕으로 33년 등 40년 동안 이스라엘을 다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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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음 주 주제 : 통일왕국을 이룬 다윗

* 읽어야 할 성경 : 사무엘기 하권

* 성경 구절 쓰기 : 2사무 2,4 ; 5,3 ; 5,7 ; 6,15 ; 7,16 ; 11,15 ;

                   12,9-10 ; 15,30 ; 19,1 ; 20,1-2


(김양진 선생님의 강의 정리 시작합니다. ♡ 김양진 선생님! 고맙습니다. ♡ )


사무엘서를 읽으면 이야기들이 엉켜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여러 문헌들이 뒤섞여 있어서 이야기가 중복되기도 하고, 이야기 내용이 조금씩 다르기도 합니다.

(사울이 다윗과 만난 부분이 나온 후에 또 다시 처음 만난 것처럼 쓰여져 있습니다. )


<사무엘기>

BC 1040년 - BC 970년 왕정시대

히브리어 성경 : 사무엘

그리스어 성경 : 열왕기 1,2 권


 사무엘기는 이스라엘이 판관시대를 끝내고 왕정시대로 들어가서 통일 왕국를 이루기까지의 이야기입니다.

히브리어 성경에서는 판관체제에서 왕정체제로 가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사무엘의 이름을 따서 ‘사무엘서’라고 불렀는데, 원래는 한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리스어로 번역하면서 너무 길어서 상하권 둘로 나누었습니다.

사무엘이 앞부분에서만 주인공이고 뒷부분은 주인공이 아닙니다.

그래서 그리스어 성경이나 라틴어 성경에서는 사무엘서 뒷부분을 ‘열왕기’로 따로 나누었습니다.

사울왕 다윗왕, 왕들의 이야기가 나오니 ‘열왕기’라고 이름 짓고, 사무엘서를 네 권으로 나누었습니다.

그리스어, 라틴어 성경에서는 사무엘기 상하권을 열왕기 1,2권이라고 부르고,

‘열왕기 상하권’을 ‘열왕기3,4권’이라고 부릅니다.


사무엘기는 등장하는 주요 인물들을 중심으로 여섯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 1부 : 엘리와 사무엘 (상권 1-7장)

- 2부 : 사무엘과 사울 (상권 8-15장)

- 3부 : 사울과 다윗 (상권 16 - 31장)

- 4부 : 유다의 왕, 다윗 (하권 1 - 4장)

- 5부 : 통일왕국을 이룬 다윗 (하권 5 - 20 장)

- 부록 : 다윗의 승전가 (하권 21 - 24장)



<사무엘의 탄생>

이스라엘은 열두지파가 부족동맹 맺어서 판관들의 인도로 살아왔습니다.

구심점이 되는 ‘실로’라는 곳에 만남의 장막, 즉 성소를 만들었습니다.

성소에 계약의 궤를 모시고, 이스라엘 사람들은 1년에 한번 또는 두 번씩 전 부족이 모여서 하느님께 제사를 지냈습니다.

이 곳에 어떤 여인이 옵니다. 아이를 갖지 못하는 ‘한나’라는 여인이었습니다.

한나는 제사를 마치고 간절히 기도합니다.

“당신 여종을 잊지 않으시고 당신 여종에게 아들 하나만 허락해 주신다면, 그 아이를 한평생 주님께 바치고 그 아이의 머리에 면도칼을 대지 않겠습니다.” (1 사무 1,11)

머리에 면도칼을 대지 않겠다는 말은 삼손 이야기에서도 나왔습니다. 그 말은 하느님께 봉헌된 나지르인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사무엘은 태어나서부터 하느님께 봉헌된 삶을 살기로 약속한 사람입니다.

사무엘 : 하느님께 봉헌된 나지르인


구약성경의 족장사 민족사 왕정사를 시작할 때마다 특별한 사람의 출생설화가 나옵니다.

족장사 - 아브라함의 이야기로부터 부족이야기가 시작됩니다.

민족사 - 모세의 탄생으로 이스라엘 민족이 생겨납니다.

왕정사 - 사무엘의 탄생으로 왕정사가 시작됩니다.

이스라엘 역사의 중요한 전환점이 되는 시기마다 특별한 인물이 출생설화와 함께 등장합니다.

역사의 새로운 출발은 그냥 시작된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이 특별한 사람을 은총으로 이 세상에 나게 해서 그 사람을 통해서 구원역사를 이끌어가도록 하십니다.

하느님의 은총과 소명 : 하느님의 구원사업을 이끌어가도록 하는 것


그런 이야기의 전통은 신약에서도 이어집니다. 신약성경에 보면 중요한 시기에 두 인물의 출생이야기가 나옵니다.

신약성경의 출생설화 : 세례자 요한, 예수 그리스도

특정한 인물이 특정한 시기에 나오면 그 인물이 얼마나 중요한 인물인지를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한나가 아이를 갖고 사무엘을 낳았습니다. 한나는 사무엘이 젖을 뗄 때까지 집에서 데리고 있다가 실로 성소로 데려가서 사제에게 말합니다.

“주님께서는 제가 드린 청을 들어주셨습니다. 그래서 저도 아이를 주님께 바치기로 하였습니다. 이 아이는 평생을 주님께 바친 아이입니다.“(1사무 1,27-28)

태중에서부터 하느님께 봉헌된 아이는 일생의 삶을 하느님을 위해서 하느님이 하시는 일에 맞추어서 살도록 되어 있습니다.

사무엘과 세례자 요한의 역할이 매우 비슷함을 알 수 있습니다.

판관시대에서 왕정시대로 넘어가는 다리 - 사무엘

구약시대에서 신약시대로 넘어가는 다리 - 세례자 요한


“아이는 엘리사제 앞에서 주님을 섬겼다.”(1사무 2,11)

나지르인인 사무엘은 어려서부터 사제직책을 갖게 됩니다.



<엘리와 그의 아들들>

세습적 제관체제

판관들이 이스라엘 사람들을 다스리다가 제관들이 이스라엘을 다스립니다.

판관들은 세습제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사무엘기에서 보면 엘리사제의 두 아들들도 사제라고 나옵니다. 제관체제에서 왕정체제로 넘어가는 과도기라서 세습적인 제관체제가 유지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엘리사제의 두 아들들이 훌륭했으면 세습적인 제관체제가 잘 유지될 수 있었을 텐데.... 엘리사제의 두 아들들은 엉망으로 살았습니다.

“엘리의 아들들은 불량한 자들로서 주님을 알아 모시지 않았고, 백성과 관련된 사제들의 규정도 무시하였다.”(1사무 2,11-12)

하느님의 뜻도 어기고 백성의 뜻도 무시한 엘리사제의 아들들로는 더 이상 제관체제가 유지될 수 없었습니다.



<주님께서 사무엘을 부르시다>

사무엘이 실로 성소의 지성소 앞에서 잠을 자고 있는데 하느님께서 사무엘을 세 번 부르십니다.

“나는 엘리 집안에게, 그 집안의 죄악은 제물이나 예물로는 영원히 속죄 받지 못하리라고 맹세하였다.”(1사무 3,14)

엘리는 늙었고 두 아들이 망나니이니 제관들로는 이스라엘 구원의 역사를 이끌어갈 수가 없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사무엘에게 소명을 내려주심으로써 제관체제가 끝납니다.

새로운 체제로 넘어가는 과정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세습적 제관체제의 종말>

“사무엘이 자라는 동안 주님께서 그와 함께 계시어, 그가 한 말은 한마디도 땅에 떨어지지 않게 하셨다. 단에서 브에르 세바에 이르기까지 온 이스라엘은 사무엘이 주님의 믿음직한 예언자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1사무 3,19-20)

사무엘의 말과 행동은 버릴 게 하나도 없었습니다. 모두 하느님의 뜻이었습니다.

‘단에서 브에르 세바까지’라는 말은 백두산에서 한라산까지 라는 말과 같습니다.

단은 가나안 땅의 가장 북쪽에 있는 지명이고, 브에르세바는 가장 남쪽에 있는 땅 이름입니다. ‘단에서 브에르 세바’라는 말은 가나안 땅 전체라는 말입니다.

사무엘은 이스라엘 온 백성에게 사제와 예언자로서 인정받았고, 사제로서 예언자로서 권위 있게 말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온 백성이 사무엘의 말을 따르게 되었습니다.



<필리스티아인들과 계약의 궤>

(‘필리스티아’와 ‘블레셋’은 같은 말입니다.)

필리스티아인들과 이스라엘 사이에서 싸움이 일어납니다.

필리스티아인들은 원래 가나안 땅에 살던 사람들이 아닙니다. BC 2000년경에 배를 타고 온 해양민족입니다. 가나안 지역에 기원전 12세기에서 13세기 정도에 정착한 이후에 다섯 도시(가자, 아스돗, 아스클론, 갓, 에크론)로 이루어진 도시연맹을 세우면서 하나의 국가를 형성하였습니다.

필리스티아인들이 섬기는 신은 ‘다곤’입니다. 다른 민족들은 농사신 바알을 섬겼는데, 필리스티아인들은 다곤을 섬깁니다. 필리스티아인들은 해양민족이고 지중해를 끼고 육지에 사니까 삶의 절반은 바다에서 절반은 육지에서 삽니다. 민족들 각자의 형편에 맞게 신을 만들어낸 것입니다.


팔레스티나 Palestina, 필리스티아인 Philistines

BC 130여년 경 유대인이 로마에 항거해서 독립전쟁을 일으켰습니다. 로마인들은 유대인들이 살던 땅에 이름을 붙일 때, 그들에게 항거하는 이스라엘인들의 이름을 붙이기 싫었습니다. 그래서 옛날에 이스라엘의 숙적이었던 필리스티아인의 이름을 따서 “팔레스티나”라고 불렀고, 지금도 그 지역을 ‘팔레스티나’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지금 팔레스티나 지역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그 당시의 사람들이 아닙니다. 지금 팔레스티나 지역에 사는 사람들은 나중에 회교지역에서 들어 온 사람들입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해안지역에서만 살다가 중앙대륙으로 진출하려 합니다. 중앙대륙은 이스라엘 사람들의 약속의 땅인 가나안 땅입니다. 필리스티아인들은 이스라엘 사람들을 몰아내고 가나안 땅을 정복하려고 전쟁을 자주 일으킵니다. 필리스티나와 이스라엘은 숙적처럼 싸웠습니다.

“필리스티아인들은 전열을 갖추고 이스라엘에게 맞섰다. 싸움이 커지면서 이스라엘은 필리스티아인들에게 패배하였다.”(1사무 4,2)


이스라엘에 필리스티아에게 괴롭힘을 많이 당합니다. 해안가에서 살던 조그마한 다섯 도시국가가 어떻게 가나안 땅의 사람들을 괴롭히고 지배하기도 했을까요? 필리스티아인들은 바다를 건너온 해양민족이라서 교역을 많이 하고 문화를 빨리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필리스티아 - 철기문화

이스라엘 - 청동기 문화

청동기 시대 무기와 철기시대 무기 차이는 재래식 무기와 핵무기 정도의 차이였을 것입니다. 구리는 철을 당해낼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필리스티아인들은 이스라엘을 끊임없이 괴롭힐 수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이 생존위험에 처하니 긴급대책이 필요했습니다.

“실로에서 주님의 계약궤를 모셔 옵시다. 주님께서 우리 가운데에 오시어 원수들 손에서 우리를 구원하시도록 합시다.”(1사무 4,3)

계약의 궤는 하느님의 현존과 권능을 표현합니다.

고대인들은 전쟁은 신들끼리의 싸움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기는 쪽 신의 힘이 더 센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이스라엘인들의 무기는 열세였지만 오직 믿는 것은 그들의 하느님이었습니다.

 하지만 계약의 궤를 가지고 가서 싸웠는데도 이스라엘은 처참하게 패배하고 맙니다. 계약의 궤까지 뺏겨버립니다.

이스라엘의 패배 - 계약의 궤 빼앗김

이스라엘의 패배는 엄청난 일이었습니다.

지금까지 하느님께서 전쟁에 진 적이 없었는데 왜 그랬을까요? 이스라엘이 전쟁을 하면서 계약의 궤를 갖다 썼습니다. 하지만 하느님은 무슨 일이든 해주시는 도깨비 방망이가 아닙니다.

이 부분에서는 계약의 궤가 어떤 권능을 갖고 있는가를 이야기하고 있는 게 아닙니다. 인간이 하느님을 어떻게 대하고 있는가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도구인가?”

하느님은 창고에 쳐 박아 두었다가 찾아 쓰는 도구가 아닙니다.

‘계약의 궤’ 이야기는 ‘인간이 하느님을 어떻게 대하는가’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평소에는 하느님을 찾지 않고 잘 살다가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만 하느님께 매달리고 기도합니다. 무당을 찾아가서 돈 붓고 굿하는 것처럼 하느님을 도구로 써먹으려고 합니다.

저는 20여년 전에 처음으로 중국에 갔습니다. 버스에 모택동 사진을 코팅해서 붙여놓은 것을 많이 보았습니다. 중국인들이 모택동을 많이 존경해서 그러는 줄 알았었는데, 그 이유만이 아니었습니다. 운수업자들에게 돌아다니는 소문이 있었던 것입니다. 산에서 큰 자동차 사고가 났는데 모택동 사진을 붙인 차만 무사했다는 것입니다. 그 이후로는 모택동 사진이  중국인들에게 일종의 부적이 된 것입니다.

요즘에도 염주나 묵주를 차에 걸어놓는 것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조심해서 운전하겠다는 마음을 갖기 위해서, 쉽게 꺼내서 기도하려고 묵주를 걸어놓은 게 아니라, 부적처럼 걸어놓은 경우가 많습니다.

하느님을, 신앙을 우리 도구로 써먹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느님을 도구로 써먹으려고 했기 때문에 필리스티아인들에게 패배했습니다. 하느님의 뜻이 거기에 담겨있지 않았습니다.


필리스티아의 재앙 - 계약의 궤 반환

계약의 궤를 가져가니, 다곤 신전이 다 깨져버렸고, 궤를 옮겨가도 종기가 생기고 재앙이 닥칩니다.

필리스티아인들은 하는 수 없이 애물단지가 된 계약의 궤를 다시 이스라엘에게 내줍니다.

이스라엘인들은 처참하게 전쟁에 지고, 계약의 궤를 빼앗겼다가 돌려 받습니다. 그 과정에서 이스라엘인들은 희망이 없었습니다. 곧 약속의 땅 전체를 빼앗길 위험에 처했습니다. 매달릴 곳은 하느님밖에 없었습니다.


<사무엘이 판관으로 다스리다.>

사무엘이 온 백성을 미츠파로 소집하고 말합니다.

“우리가 왜 이렇게 되었겠느냐? 지금이라도 생활태도를 바꿔라. 우상을 없애고 오직 하느님께만 충성하기로 맹세하여라, 그럼 내가  필리스티아의 손아귀에서 건져주시라고 하느님께 간절히 기도하겠다. ”

“바로 그 날 그들은 단식하며,”저희가 주님께 죄를 지었습니다.“하고 고백하였다. 사무엘은 미츠파에서 이스라엘 자손들을 위하여 판관으로 일하였다.‘(1사무 7,6)

전쟁패배는 하느님의 징벌입니다. 그러니 이스라엘이 회개하고, 하느님의 구원이 다시 있습니다.

하느님의 징벌 - 회개 -구원이 되풀이됩니다.


전쟁 패배는 하느님의 패배 일까요? 아닙니다.

이스라엘은 아직 하느님께 대한 온전한 신앙심을 갖지 못하고 양다리 걸치는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전쟁패배를 한 후에야 비로소 참회의 계기를 갖습니다.

전쟁 패배는 이스라엘백성들이 하느님께로 돌아가 충성을 다하기로 마음을 다지는 계기가 됩니다. 패배의 과정을 거침으로서 이스라엘은 다시 하느님의 백성으로 돌아옵니다.

이스라엘의 참회 계기 - 패배의 설욕

이스라엘은 필리스티아와 다시 전쟁해서 이깁니다. 

사무엘은 사제, 예언자에서 판관역할까지 맡습니다.

사무엘은 마지막 판관의 역할까지 해냅니다.


<백성이 임금을 요구하다>

“이제 다른 모든 민족들처럼 우리를 통치할 임금을 우리에게 세워 주십시오.”(1사무 8,5)

사무엘의 자식들도 형편없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사무엘이 죽으면 안 될 것 같았습니다. 이웃의 강한 나라들은 다 왕정체제였습니다.

“이제 다른 모든 민족들처럼 우리를 통치할 임금을 우리에게 세워 주십시오.”(1사무 8,5)

주변국가들의 위협 : 강력한 왕정체제로 대응

이스라엘 사람들은 부족동맹 체제로는 필리스티아나 다른 주변 민족들에게 이길 방법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왕정체제는 이스라엘 백성으로서는 당연한 시대적 요구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무엘의 반응은 대단히 부정적입니다.

“여러분의 양 떼에서도 십일조를 거두러 갈 것이며, 여러분마저 그의 종이 될 것이오.”(1사무 8,17)

백성들은 왕정을 도입하자고 하지만 사무엘은 왕정이 좋은 제도가 아니라고 합니다. 왕정파와 부족동맹파가 대립하게 됩니다.

어느 시대 어느나라든지 한 시대에서 다른 시대로 넘어가려면 이념대립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보수주의 : 진보주의, 공산주의 : 자본주의)


군주제도는 왕의 자질로 국운이 결정됩니다.

군주제에서는 왕 하나에 따라 나라의 운명이 걸려있습니다. 처음 왕은 똑똑할 수도 있겠지만 세습제로 다음 왕은 멍청할 수도 있습니다. 어찌보면 대단히 불합리한 제도입니다.

백성 위에 군림하는 왕 : 가혹한 세금과 강제노역

백성들 위해 군림하면서 가혹한 세금과 강제노력을 시키는 왕도 많았습니다.

사무엘은 왕정제도가 결코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제도가 아니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백성들은 당장의 국가 안보를 위해서 독재자, 왕이 필요하다고 주장합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잘 살려면 독재도 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정말 어리석은 생각입니다. )


백성들이 왕을 세워 달라고 조르니 하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주님께서는 사무엘에게 ”그들의 말을 들어 그들에게 임금을 세워 주어라.“하고 이르셨다.” (1사무 8,22)

왕정제도가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자식들이 무언가 해보겠다고 부모에게 조를 때, 자식이 그 일을 안해 주면 죽겠다고 하는데, 자식 이기는 부모는 없습니다. 부모는“나중에 알게 되겠지,그래, 그렇게 해봐라”하고 허락해줍니다. 하느님의 마음도 부모의 마음과 같습니다.

왕정제도가 정말 합리적 체제가 아닐망정 하느님께서는 그것을 통해서도 구원사업을 이끌어 가십니다.


<사울을 임금으로 세우다.>

사무엘이 사울에게 기름을 부어서 영도자로 뽑습니다.

“주님께서 당신에게 기름을 부으시어, 그분의 소유인 이스라엘의 영도자로 세우셨소.”(1사무 10,1)

기름부음 받은 이 : 하느님의 축복을 받아 성별(聖別)된 사람

메시아 = 기름부음 받은 이

여러 가지 용도로 기름을 바르지만 종교적인 목적으로 기름을 바르는 것은 ‘성별된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하느님의 일을 하는 사람이다’는 뜻입니다.

사울즉위 : 기원전 1020년 경

사울의 즉위로 이스라엘의 왕정이 시작됩니다.


사무엘은 자기 역할이 끝나니 백성들에게 고별사를 합니다.

사무엘의 고별사

“여러분은 오로지 주님만을 경외하고 마음을 다하여 그분만을 충실하게 섬기시오. 그리고 여러분에게 해주신 위대한 일을 똑똑히 보시오. 그러나 만일 여러분이 여전히 악행을 일삼는다면, 여러분도 여러분의 임금도 모두 쫓겨날 것이오.”(1사무 12,24-25)

이스라엘의 왕은 하느님이십니다. 사울은 임금이 되었어도 여전히 이스라엘의 주인은 하느님이십니다. 사울은 하느님의 심부름꾼, 대리자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받들어서 나라를 잘 이끌어나갈 사람입니다.

이스라엘의 왕 - 하느님

사울 - 하느님의 대리자

그러므로 왕은 “내가 최고다, 누가 나를 함부로 해?”라고 말할 자격이 없습니다.

하느님의 뜻에 어긋나면 왕은 그 자리를 지킬 수가 없게 됩니다.


<사울이 필리스티아인들과 싸우다.>

필리스티아와 전쟁을 할 때 사울이 실수를 합니다.

“사울은 ”번제물과 친교 제물을 나에게 가져와라.“하여 번제물을 바쳤다.”(1사무 13,9)

번제물을 가져오라는 했다는 것은 하느님께 제사를 지내겠다는 이야기입니다.

제사는 사제가 지냅니다. 사제 사무엘이 돌아오겠다는 때에 돌아오지 않으니까 사울이 사무엘의 권한을 뺏어서 제사를 지냅니다.


사울의 죄 : 사제의 고유 권한 침범

           하느님의 뜻보다 자신의 뜻

왕이 사제의 고유권한까지 뺏어서 제사를 지냅니다.

더구나 전쟁을 시작하면서 하느님께 드리는 제사는 사제가 하느님의 뜻을 묻는 행위이기에 큰 의미가 있습니다.

그런데 사울은 제사를 하느님의 뜻을 묻기 보다는 자기 뜻을 실현하는데 이용한 것입니다. 사울은 하느님의 눈 밖에 나기 시작합니다.


<주님께서 사울을 버리시다.>

그렇지만 사울은 군사적으로 능력 있는 군인이었습니다. 몇 몇 싸움에서 승리했습니다.

싸움에서 이길 때마다 왕권이 단단해집니다. 왕권이 단단해질수록 교만해집니다. 교만한 사람들은 남을 무시하게 됩니다.

사울도 교만해져서 하느님을 무시합니다.

사울의 교만 : 완전 봉헌물 규정 무시

사울이 완전봉헌물의 규정을 무시한 것은 곧 하느님을 무시한 것입니다.

아말렉족과의 전쟁에서 이긴 후에 임금‘아각’도 살려 놓고 짐승도 좋은 것을 죽이지 않고 놔둡니다. 하느님의 명령을 무시하고 거역한 것입니다.

그러니 사무엘이 따지자 사울이 핑계를 댑니다.

“그것은 길갈에서 주 어르신 하느님께 제물로 바치려는 것이었습니다.”(1사무 15,21)

사무엘이 이렇게 질책합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번제물이나 희생 제물을 바치는 것을 주님께서 더 좋아하실 것 같습니까? 진정 말씀을 듣는 것이 제사 드리는 것보다 낫고 말씀을 명심하는 것이 숫양의 굳기름보다 낫습니다.”(1사무 15,22)

진정한 믿음 : 형식적인 예배행위가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것

형식적인 예배행위보다 하느님의 말씀에 온전히 따르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매일미사 주일미사 빠지지 않는 것이 물론 중요합니다. 그렇지만 내 삶 안에서 하느님의 뜻을 온전히 실천했을 때에 미사 빠지지 않는 것이 ‘참된 신앙의 표현’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밖에서는 손가락질 받을 만하게 살면서도 주일미사 한 번도 안 빠진다고 해서 하느님의 뜻을 잘 따르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미사에 열심히 다녔다고 해서 하느님께 “나한테 빚지셨지요?”하고 이런 저런 요구를 하면 안됩니다.


사울의 행위 : 정치적 야심과 탐욕

사울이 완전봉헌물 규정을 무시하고 좋은 것을 모아놓고, 정치적으로 왕권을 굳건히 하고 자기 욕심도 채우려고 했습니다. 사울은 하느님의 명령을 무시하였습니다.

“주님께서는 오늘 이스라엘 왕국을 임금님에게서 찢어 내시어, 임금님보다 훌륭한 이웃에게 주셨습니다.(1사무 15,28)


<사무엘의 아각 처형>

사무엘이 하느님의 뜻을 어기면 백성들도 임금도 쫓겨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당연히 사울은 하느님께 버림받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울 스스로 자초한 일입니다.

사무엘은 하느님의 명령을 올바로 이행하기 위해서 아각을 처형합니다.

어찌 보면 적장 죽이지 않은 사울이 인도적인 일을 한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당시의 전쟁은 ‘성전’이었습니다.  신들끼리의 싸움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완전봉헌물 규정이 있는 이유는 우상숭배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사무엘은 하느님의 명령, 하느님의 뜻에 충실하려고 아각을 처형합니다.


<다윗에게 기름을 붓다.>

사무엘은 기름 부어서 세운 이스라엘의 왕이 하느님의 눈 밖에 나니 슬퍼합니다. 하느님께서 “왜 슬퍼하느냐? 새로 뽑으면 될 것 아니냐?”라고 하십니다.

사무엘은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줍니다.

“그러자 주님의 영이 다윗에게 들이닥쳐 그날부터 줄곧 그에게 머물렀다.“(1사무 16,13)

다윗 : 유다지파 베들레험 출신

       미천한 목동에서 통일왕국의 왕으로

(요셉과 마리아가 호구조사 때  베들레헴에 갑니다. 요셉은 다윗의 후손이므로 베들레헴으로 갑니다. 베들레헴에서 예수님이 태어나십니다.)



<다윗이 사울을 섬기다.>

다윗은 목동출신의 비천한 사람이었음에도 통일왕국의 위대한 왕으로 추앙받게 됩니다.

버림받은 사울 : 광기와 우울증

사무엘은 사울을 다시는 안 봅니다. 사무엘은 하느님의 예언자, 판관, 사제였습니다. 그러니 사무엘이 사울을 안 본다는 말은 하느님께서 사울을 안 보신다는 이야기입니다.

버림 받은 사울은 미칩니다. 왕이 하느님께 버림받고 백성들에게 왕따 당하니 미칠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의 영이 사울을 떠나고, 주님께서 보내신 악령이 그를 괴롭혔다.”(1사무 16,23)

사울 - 악령(惡靈), 사무엘 - 성령

사울이 다윗을 불러다 궁중악사를 시킵니다.

“하느님께서 보내신 영이 사울에게 내릴 때마다, 다윗은 비파를 손에 들고 탔다. 그러면 악령이 물러가고, 사울은 회복되어 편안해졌다.”(1사무 16,23)

사울은 악령에 사로잡히고, 다윗은 성령이 충만합니다. 두 사람의 앞길이 뻔합니다.


<다윗이 골리앗을 쳐 이기다.>

힘센 장수 골리앗 : 소년 목동 다윗

다윗과 골리앗은 상대가 안됩니다. 그런데 전쟁터에서 어린 목동 다윗이 이렇게 말합니다.

“전쟁은 주님께 달린 것이다. 그분께서 너희를 우리 손에 넘겨주실 것이다.”(1사무 17, 49)

필리스티아 사람들에게는 강력한 철기무기가 있습니다.

이스라엘에게는 하느님밖에 없습니다.

“다윗은 주머니에 손을 넣어 돌 하나를 꺼낸 다음, 무릿매질을 하여 필리스티아 사람의 이마를 맞혔다. 돌이 이마에 박히자 그는 땅바닥에 얼굴을 박고 쓰러졌다.”(1사무 17,49)

무릿매는 새총과 비슷한 것입니다. 두꺼운 노끈에 돌멩이를 달아서 던지는 기구입니다.

다윗이 돌멩이 하나로 골리앗을 물리쳤습니다. 무슨 뜻이겠습니까? 돌멩이 던지는 힘은 하느님의 힘이라는 겁니다. 이스라엘은 대승을 거둡니다.

(다윗이 궁정악사가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러니 사울과 다윗은 이미 아는 사이인데, 골리앗과의 싸움이 끝난 후에 사울은 다윗을 처음 본 것처럼 “저 젊은이는 누구의 아들이오?”하고 물어봅니다. 두 가지 전승이 함께 내려오다가 성서로 엮여서 그렇습니다. (창세기에서 두 가지 전승이 함께 적힌 것처럼)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하다.>

다윗이 군사지휘자가 되어서 싸움 때마다 승리를 거둡니다.

백성들에게 인기가 높아졌습니다.

“여인들은 흥겹게 노래를 주고받았다. ”사울은 수천을 치시고 다윗은 수만을 치셨다네!“(1사무 18,7)

사울의 시기  : 백성의 인기가 높은 다윗에 대한 질투

사울이 다윗을 시기하고, 해코지하려고 합니다. 남 잘되는 꼴을 못 보는 겁니다.

“사울은 ‘다윗을 벽에 박아버리겠다‘고 생각하면서 창을 던졌다. 그러나 다윗을 사울 앞에서 두 번이나 몸을 피하였다. 사울은 주님께서 다윗과 함께 계시며 자기에게서 돌아서셨기 때문에 다윗을 두려워하였다.”(1사무 18,11-12)

‘시기’는 무서운 것입니다.

다윗이 백성들에게 인기가 있어서 뿐만 아니라, 하느님께서 다윗과 함께 계시니  왕권이 위험합니다. 사울에게는 다윗이 필리스티아인의 침략보다 더 무서웠습니다.

(요즘 선거과정을 보면 똑같습니다.  온갖 말로 서로를 헐뜯습니다.)

사울은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다윗을 해치려고 합니다.

그 때마다 다윗의 아내 미칼 (사울의 딸), 친구 요나탄 (사울의 아들)이 도와줍니다.

다윗은 미칼과 요나탄의 도움으로 간신히 살아납니다.


<다윗과 요나탄의 우정>

다윗은 사울의 큰아들 요나탄과 깊은 우정을 가집니다.

‘요나탄은 다윗을 자기 목숨처럼 사랑하였으므로, 그에 대한 사랑으로 다윗에게 다시 맹세하게 하였다.“(1사무 20,17)

두 사람의 우정 : 형제애의 표본

사울과 다윗은 왕권을 놓고 다투는 사이입니다. 요나탄은 사울의 아들이니까 왕권을 두고 다윗과 원수가 되어야 맞겠지만, 깊은 우정으로 함께 옳은 일을 하고 나라를 위해 일하자고 맹세합니다. 두 사람의 우정은 대단한 것입니다.


<사울이 놉의 사제들을 학살하다.>

사울이 놉의 사제들에게 약간의 도움을 받습니다.

“사제는 거룩한 빵을 다윗에게 주었다.”(1사무 21,7)

“장군께서 엘라 골짜기에서 쳐 죽인 필리스티아 사람 골리앗의 칼이 있습니다.”(1사무 21, 10)

다윗이 앞길을 헤쳐 나가는데 두 가지가 필요합니다.

하느님의 보호 (거룩한 빵)

자기 자신의 힘 (칼)

무슨 일을 하기 위해서는 ‘하느님의 보살핌’과 ‘자기자신의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사울이 이 사실을 알고 사제들을 죽입니다.

“돌아서서 주님의 이 사제들을 죽여라. 그들은 다윗과 손을 잡고, 그가 달아난 것을 알면서도 나에게 알려 주지 않았다.‘(1사무 22, 17)

권력의 악용 : 무고한 학살과 독재

사울은 반역, 음모죄를 지은 사제들뿐만 아니라 온 동네 사람들을 다 죽입니다.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 놉의 사제들에게 반역죄, 공모죄를 뒤집어 씌웁니다.

권력유지를 위해서 죽인 것입니다.

(전두환, 노태우 등은 광주폭도들이 간첩들과 합세해서 우리나라를 전복시키려했다고 선전하며 무고한 사람들을 죽였습니다. 역사는 되풀이됩니다.)



<다윗이 사울을 살려주다.>

다윗은 도망가기에 급급합니다. 동굴에서 사울이 누워있는 것을 발견합니다.

다윗의 부하들이 사울을 죽이자고 하자 다윗이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께서는 내가 주님의 기름부음 받은 이인 나의 주군에게 손을 대는 그런 짓은 용납하지 않으신다. 어쨌든 그분은 주님의 기름부음 받은 이가 아니시냐?”(1사무 24,21)

다윗은 참 대단합니다.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고 했으니 사울을 죽인대도 그렇게 나쁜 일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다윗은 “사울은 이미 성별된 사람이다. 성별된 사람을 내가 복수할 수 없다.”라고 말합니다.

‘개인적인 복수’보다 ‘하느님의 성별’의 가치가 더 큰 것입니다.

다윗은 사울을 죽이고 임금이 될 수도 있었지만 그것이 하느님의 뜻은 아닙니다. 정상적으로 왕이 되기 위해서는 하느님의 섭리와 백성들의 호응이 있어야 합니다. 사울을 죽이는 것은 복수심의 만족일 뿐이고, 이스라엘을 이끌 왕이 될 수 있는 자격을 얻는 것은 아닙니다.


사울은 다윗이 자신을 살려주었다는 것을 알고 이렇게 말합니다.

“이제야 나는 너야말로 반드시 임금이 될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스라엘 왕국은 너의 손에서 일어설 것이다.‘(1사무 24, 21)

다윗의 정통성

사울은 다윗의 정통성을 인정합니다.



<다윗이 필리스티아로 망명하다.>

사울의 추적을 피해 달아난 다윗의 행로

~~~~(생략합니다.) 다윗은 필리스티아로 망명합니다.(생략합니다.)

전리품의 공정한 분배, 동조세력 확보계기

다윗은 망명생활 중에 정치기반을 닦습니다.

‘갓’이 골리앗과의 싸움에서 유명해진 다윗이 망명해 오니, 이스라엘을 칠 기회라고 판단합니다.


<사울이 점쟁이를 찾아가다.>

하느님께서 사울에게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으시니 점쟁이를 찾아갑니다. 사울은 점치는 것을 금지했었습니다. 사울은 사무엘의 혼백을 불러달라고 부탁합니다.

“주님께서는 너와 더불어 이스라엘도 필리스티아인들의 손에 넘기시어, 내일이면 너와 네 아들들이 나와 함께 있게 될 것이다.”(1사무 28,19)

혼백이 하는 말이니, 사울에게 죽을 거라고 하는 말입니다.

절망적 예언

길보아 전투에서 이스라엘의 패배


<사울이 죽다.>

사울이 무기병에게 자신을 죽여달라고 부탁하지만 무기병은 거절합니다.

“사울은 자기 칼을 세우고 그 위에 엎어졌다. .. 그리하여 사울과 그의 세 아들과 무기병을 비롯하여 사울의 모든 부하가 그날 다 함께 죽고 말았다.”(1사무 31,4-6)

왕의 죽음, 백성의 패배, 필리스티아인의 융성


사울이 왕이 될 때는 화려한 출발을 했습니다.

“사무엘이 온 백성에게 ”주님께서 뽑으신 이를 보았소? 온 백성 가운데 이만한 인물이 없소“하고 말하자, 온 백성이 환호하며 ”임금님 만세“하고 외쳤다.(1사무 10, 24)

 이렇게 화려하게 출발했던 사울이 비참하게 죽습니다.

사람들은 권력을 거머쥔 뒤에는 하느님의 은혜를 잊어버립니다. 자신이 모든 것을힘들게 해냈다고 생각합니다. 큰 일을 해낸 사람이나 권력자들은 자기가 하느님이 되기 쉽습니다. 자기 스스로가 우상이 되게 됩니다.

권력자 사울의 비참한 죽음은 오늘날의 신앙인에게도 좋은 타산지석이 됩니다.

이것이 사무엘 상권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 중 하나입니다.

<비참한 말로와 비극적 죽음>

하느님의 은혜를 망각하는 인간들의 전형

절대적 존재가 되려는 권력자들의 함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