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지혜의 샘/김양진 선생님의 성경교실

13. 약속의 땅 가나안을 향하여

김레지나 2008. 8. 28. 18:54

성경교실(구약) : 자료 13


약속의 땅 가나안을 향하여


* 민수기(民數己)

 히브리 이름 - 처음에는 와예다벨(‘야훼께서 말씀하셨다’)이었다가 후대로 와서 브미드발(Bemidebar '광야에서‘), 그리스어 이름 - 아리스모이(arithmoi '숫자들’). 중죽어 이름 - ‘民數己’ 오경의 넷째 권으로, 이스라엘 백성이 시나이 광야에서 출발하여 약속의 땅 입구인 모압 벌판에 이르기까지 겪었던 갖가지 광야 체험을 기록한 책.


* 민수기의 구조

- 시나이 광야에서의 체류(1,1 - 10,10) : 시나이를 떠나 약속의 땅으로 행군하기 위해 필요한 준비.

- 시나이에서 카데스까지(10,11 - 20,13) : 광야에서 40년을 방황하는 이야기로, 민수기의 주 내용.

- 카데스에서 모압 벌판까지( 20, 14 - 36,13) : 모압 벌판에 이르러 약속의 땅 정복을 앞두고 갖가지 법규를 만들어 정착할 준비.


* 이스라엘의 사회적, 종교적 조직화

 이스라엘 백성은 각 지파의 인구를 조사하고 행군 대열을 정비함으로써 사회적 조직화를 이루고, 사제직무와 경신례 규정을 만들어 종교적으로도 조직화를 이루었다.


* 광야 유랑의 목표

 하느님께서 그들의 조상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땅, 가나안을 차지하는 것.


* 광야에서 백성이 일으킨 반란

 하느님의 능력은 보지 않고 가나안인들의 강함에 겁을 내어 이집트로 되돌아가려고 한 것은 이스라엘의 왕이시며 자기들을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고 계시는 하느님께 대한 반란 행위인 것이다.


* 하느님의 용서와 벌

 모세의 간청에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용서해 주시지만, 스무 살 이상의 사람들 가운데 여호수아와 칼렙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게 벌을 내리신다. 약속의 땅은 하느님의 권능을 믿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몫이다.


* 모세의 구리뱀과 그리스도의 십자가

 광야에서 하느님의 진로를 산 이스라엘 백성들이 높이 달린 모세의 구리뱀을 통해 죽음으로부터 구원된 것처럼, 온 인류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을 통해 죄의 죽음에서 영원한 생명에로 나아가게 된 것이다.


* 요르단 동쪽 지역 점령

 광야생활이 40년 가까기 흘러, 예리고 가까이 요르단 강가 모압 평야에 머무른 이스라엘 백성은 본격적인 가나안 진입을 앞두고 두 번째 인구 조사와 가나안에서 지켜야 할 각정 제사 규정 등 여러 가지 준비를 갖춘다.


* 여호수아를 후계자로 임명

 여호수아가 모세의 후계자로 임명되지만, 백성의 지도자는 하느님의 뜻에 복종해야 한다. 하느님의 뜻은 우림을 써서 가부간에 내리는 결정으로써 표현된다.


* 우림과 둠밈

 우림(Urim '빛‘)과 둠밈(Thummim '완전함’)은 하나 또는 둘을 같이 사용하는데, 고대 이스라엘에서 하느님의 뜻을 묻기 위해 쓴 제비의 도구.


* 각 지파들과의 땅 분배

 하느님이 주신 땅은 모든 우상숭배로부터 정화되어야 한다. 각 지파에게 가나안 땅이 배분되고 상속법이 결정됨으로써 광야생활은 마무리되고, 새로운 땅에서 이루어질 새 생활을 준비하게 된다.


* 민수기의 가르침

 우리에게 언제 어떠한 상황에 처하더라도 믿는 이들은 하느님께 순종하며 그분의 뜻을 따라야 함을 일깨워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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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음 주 주제 : 가나안 정복과 부족 동맹

* 읽어야 할 성경 : 여호수아기

* 성경 구절 쓰기 : 여호 1,1-2; 여호 3,14-17 ; 여호 11,23 ; 여호 21,43 ;

                   여호 24,25-26

(강의 정리)


약속의 땅, 가나안 땅을 향하여


고대 히브리인들은 성서 첫 구절을 따서 그 성서의 이름을 지었습니다. 그래서 민수기를 ‘와예다벨’(‘야훼께서 말씀하셨다’ 라는 뜻)이라고 불렀습니다. 후대에’ 브미드발‘(광야에서)로 바뀌었고, 그리이스인들이 히브리 성서를 번역하면서 ’아리스모이‘(숫자들)이라고 이름 붙였습니다. 중국 사람들은 그리이스인들이 붙인 성서이름을 따서 ’민수기(民數記)‘라 불렀고, 우리나라에서도 중국어 이름을 그대로 써서 ’민수기‘라고 부릅니다.


<민수기의 내용>

민수기의 내용은 이스라엘 백성의 40년간의 광야유랑생활 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나이에서 하느님과 계약을 맺고, 시나이를 떠나 가나안 땅 입구에 도달하기까지의 40년 동안의 생활을 적었습니다.


<민수기의 구조>

민수기를 여러 가지로 나누어볼 수 있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냈던 장소에 따라 분류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 (1,1 - 10,10) - 시나이 광야에서의 체류 :

   시나이를 떠나 약속의 땅으로 행군하기 위해 필요한 준비.

- (10,11 - 20,13) - 시나이에서 카데스까지 :

  광야에서 40년을 방황하는 이야기로, 민수기의 주 내용.

- (20, 14 - 36,13) - 카데스에서 모압 벌판까지 :

 모압 벌판에 이르러 약속의 땅 정복을 앞두고 갖가지 법규를 만들어 정착할 준비.


<이스라엘 백성의 조직화>

이스라엘 백성들의 사회적 조직화 - 야곱이 이집트로 들아갈 때, 히브리인들 뿐만 아니라 가뭄에 허덕이던 다른 민족들도 함께 들어갔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집트를 탈출할 때, 노예로 살던 다른 민족들과 함께 나왔습니다. 그래서 그 모든 백성들을 조직화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인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씨족과 집안에 따라 이스라엘 자손들의 온 공동체의 수를 세어라. 모든 장정을 하나하나 호명하며 세어라.”(민수 1,2)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12지파로 분류하고, 사람 수를 세게 하십니다. 특히 장정들을 세라고 하신 것은 적들과 싸우기 위해 군대조직화하라는 것입니다. 모세는 열두 지파를 조직화한 다음 사열까지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종교적 조직화 -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느님과 계약을 맺은 백성이므로, 종교적 조직도 필요했습니다. 하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레위 지파를 가까이 오게 하여, 그들을 아론 사제 앞에 세워서 그를 시중들게 하여라.”(민수 3,6) 레위지파는 군대에 동원되지 않았고, 사제직만 수행하면 되었습니다. 민수기 10장 10절까지 사제직 직무에 대한 이야기, 경신례에 대한 이야기가 자세히 나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렇게 조직화를 하고 시나이를 떠날 준비를 마칩니다. 최초의 파스카 축제를 지낸 다음 계약의 궤를 앞세우고 가나안 땅을 향해 출발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땅?>

가나안 땅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언제든 들어가서 살도록 예약된 땅이 아니었습니다. 가나안에는 이미 가나안인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집트에서 나와서 유랑하는 떠돌이 신세에 불과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오직 한 가지, 하느님께서 그들의 조상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것만을 믿고 가나안 땅으로 떠난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이집트 강에서 큰 강 곧 유프라테스 강까지 이르는 이 땅을 너의 후손에게 준다.”(창세 15,18)


<광야의 길잡이>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느님의 그 약속 하나를 믿고 가나안 땅을 향해 가고 있지만 그들에게 어떤 위험한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출발하기 전에 장인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이제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겠다고 말씀하신 곳으로 떠납니다. 우리와 함께 가시지요.”(민수 10,29)

가나안까지 가려면 숱한 광야를 거쳐 가야 합니다. 모세는 미디안에서 결혼했습니다. 미디안 지방에서 오래 살아온 장인이 그 지방 길을 훤히 알고 있으니, 길잡이로 같이 가 주십사 청합니다. 모세의 장인 이름은 ‘르우엘’이라고도 하고, ‘이트로’ 라고도 하고 ‘호밥’??(제 노트 글씨를 제가 못 알아보겠습니다.)이라고도 합니다. 4개의 문헌에 나온 장인의 이름들이 다 맞을 수도 있고, 다 틀릴 수도 있습니다. 오랜 기간을 거쳐 전승되면서 모세 장인의 이름 정도는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단지 모세의 장인이 미디안 땅에서 살았다는 것은 확실합니다.


<광야에서 백성이 불평하다>

“누가 우리에게 고기를 먹여줄까? 우리가 이집트 땅에서 공짜로 먹던 생선이며, 오이와 수박과 부추와 파와 마늘이 생각나는구나. 이제 우리 기운은 떨어지는데, 보이는 것은 이 만나뿐, 아무것도 없구나.”(민수4-5)

“그들 가운데에 섞여 있던 어중이 떠중이들이...”(민수 11,4) 즉, 이스라엘 민족들과 함께 이집트를 탈출한 ‘하삐루‘들이 먼저 불평하기 시작하자, 이스라엘 백성들이 덩달아 불평합니다. 하느님은 의식주에 관한 불평은 들어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백성들이 배고프다고 하면 만나를 주셨고, 목마르다고 하면 샘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평이 억지스럽습니다.

“이제 우리 기운은 떨어지는데, 보이는 것은 이 만나뿐, 아무 것도 없구나” 라고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처음 만나를 받을 때는 고마운 마음으로 은혜롭게 받았는데, 만나만 먹으니까 진력이 난 겁니다. 사막에서 화려한 밥상을 찾습니다. 서둘러 가나안 땅으로 가서 땅을 일구고 잘 차려먹을 생각을 하면 될텐데, 우선 참지 못하고 신세한탄을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은 바로 우리들의 모습과 같습니다. 인간의 탐욕은 끝이 없고, 그것을 채워주지 않는 하느님을 불신합니다. (요즘 우리는 웬만하면 해외여행을 한 번쯤 다녀올만큼 잘 살게 되었는데도, 여전히 불만투성이의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보리밥만 먹어도 행복할 때가 있었는데, 풍족한 생활을 하면서도 불만을 가집니다. 광야에서의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이나, 우리들의 모습이나 다를 바 없습니다.)

하느님과 백성들을 중재하는 모세도 짜증이 납니다.

“어찌하여 당신의 이 종을 괴롭히십니까? 제가 그들을 낳기라도 하였습니까? 그런데 어째서 당신께서는 그들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땅으로, 유모가 젖먹이를 안고 가듯, 그들을 제 품에 안고 가라 하십니까? 백성은 울면서 ‘먹을 고기를 우리에게 주시오’하지만, 이 온 백성에게 줄 고기를 제가 어디서 구할 수 있겠습니까? 저 혼자서는 이 온 백성을 안고 갈 수 없습니다. 저에게는 너무나 무겁습니다. 저에게 이렇게 하셔야겠다면, 제발 저를 죽여주십시오. 제가 당신의 눈에 든다면, 제가 이 불행을 보지 않게 해 주십시오.”(민수 11,11-15) 지도자의 좌절감과 중재자의 고뇌가 드러나는 대목입니다. 모세는 백성들을 최선을 다해 이끌고 가는데도 백성들은 조금만 부족한 것이 있어도 불평을 해댑니다. (말썽꾸러기 아들을 키우는 엄마가 아버지와 아들 틈에서 고심하는 것과 비슷한 상황일 겁니다.)


<정찰대를 가나안으로 보내다>

하느님께서 한 달 내내 이스라엘 백성에게 고기를 먹여주십니다. ‘콧 구멍에서 그것이 나와 구역질이 날 때까지’

그런 후에 가나안 현지사정을 알아보러 정찰대가 파견됩니다. 정찰대는 40일간 가나안 지역을 정찰하고 돌아옵니다. 40이라는 숫자는 충분한 기간을 의미합니다.

정찰대가 돌아와서 보고합니다.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곳이었습니다. 이것이 그곳 과일입니다.”(민수, 13,27)

정찰대가 가지고 온 과일은 아마 포도였을 거라 추측합니다. 이스라엘백성들은 포도를 하느님의 선물로 여깁니다. 고대인들은 젖과 꿀신의 음식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스라엘백성들이 황량한 광야에서만 몇 십년을 유랑하다가 요르단강 주변의 풍요로운 고장을 보니, 그들 눈에는 신이 사는 곳, 낙원처럼 보였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땅에 사는 백성은 힘세고, 성읍들은 거창한 성채로 되어 있습니다.”(민수 13,27) 히브리인들은 광야에서 지내느라 비쩍 말라 있는데 비해, 풍요로운 지역에 살고 있는 가나안인들은 영양상태가 좋아서 체격도 좋았을 겁니다. 정찰대는 강한 적, 견고한 요새에 대해 보고합니다.

(지금 북한사람들은 점점 더 왜소해지고, 남한 사람들은 서양사람들의 체구를 닮아갑니다. 영양상태의 차이가 큽니다. 그 차이처럼, 가나안 사람들은 기골이 장대하고 튼튼했고, 벽돌로 돌집을 짓고 살았고, 문지기도 있었겠지요. 반면에 이스라엘백성들은 천막을 치고 유랑하였습니다.)


<백성들 사이의 분열과 대립>

가나안인들에 대한 보고를 듣고 겁이 난 이스라엘 백성들은 갈등이 생기고, 분열하게 됩니다.

한 쪽은 이렇게 말합니다. “어서 올라가 그 땅을 차지합시다. 우리는 반드시 해낼 수 있습니다.”(민수 13,30),

그러나 다른 쪽 사람들은 “우리는 그 백성에게로 쳐 올라가지 못합니다. 그들은 우리보다 강합니다.”(민수12,31)라고 말합니다.

전자는 낙관주의이고, 후자는 비관주의입니다.

(조선시대에 조선통신사로 황윤길과 김성일이 일본으로 파견되었습니다. 황윤길은 일본이 우리나라를 침략할 것 같으니 대비하자고 하였고, 김성일은 그럴 염려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렇게 국론이 양분되니, 침략에 대응할 준비를 못하고, 임진왜란을 겪었습니다.)


<백성이 반란을 일으키다>

이스라엘백성들이 앞으로 나아가자니 가나안인들이 지키고 있고, 뒤로 물러서면 파라오에게 잡혀 노예생활을 하게 생겼으니 그야말로 진퇴양난입니다.

그래서 백성들은 통곡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께서는 어쩌자고 우리를 이 땅으로 데려 오셔서, 우리는 칼에 맞아 쓰러지고, 우리 아내와 어린 것들은 노획물이 되게 하시는가? ”(민수14,3)

이렇게 신세한탄하는 것으로 그쳐야 했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늘 그랬듯이 또 한 소리를 덧붙입니다. “차라리 이집트로 돌아가는 것이 더 낫지 않겠냐?”(민수14,3) 이스라엘인들이 위험에 처했다고 해서 다시 이집트로 돌아가서 노예생활을 하자고 합니다. 그렇다면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백성들을 데리고 지금까지 헛수고를 했다는 말이 됩니다. 이스라엘백성들은 하느님의 능력을 믿지 않고, 가나안인들의 강함만을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서로 ”우두머리를 하나 세워 이집트로 돌아가자.“라고 말하였다.”(민수14,4) 모세가 시나이산에서 십계명판을 받는동안 백성들은 금송아지를 만들어서 인도자로 삼았습니다. 이번에도 금송아지를 만들자는 이야기와 같습니다. 이스라엘백성들은 이스라엘의 왕이신 하느님께 대한 반란을 일으킨 것입니다. 이스라엘백성들은 하느님의 선택된 백성이고 계약을 맺은 백성입니다. 이스라엘의 실제 왕은 하느님이십니다. 그러니 다른 우두머리를 세우자는 말은 하느님께 대한 반란을 뜻합니다.

그래도 양심적이었던 여호수아와 칼렘이 나서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가로지르며 정찰한 저 땅은 정말 무척이나 좋은 땅입니다. 우리가 주님 마음에 들기만 하면, 그분께서는 우리를 저 땅으로 데려가셔서 그곳을 우리에게 주실 것입니다. 그곳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입니다. 다만 여러분은 주님을 거역하지만 마십시오, 그리고 여러분은 저 땅의 백성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그들은 이제 우리의 밥입니다. 그들을 덮어 주던 그늘은 이미 걷혀 버렸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그들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민수 14,7-9)

여호수아와 칼렘의 태도야말로 믿는사람들의 올바른 자세입니다. 우리들이 이 세상에 살면서 역경이 많아도 주저앉거나 도망가지 말고, 하느님이 함께하심을 믿고 앞으로 나아가야합니다.

백성들은 여호수아와 칼렘을 돌로 쳐 죽이려고 합니다.


<하느님의 진노와 모세의 기도>

백성들이 지나치게 불평하자 하느님께서 화가 나셨습니다.

“이  백성은 언제까지 나를 업신여길 것인가? 내가 그들 가운데에서 일으킨 그 모든 표징을 보고도, 이자들은 언제까지 나를 믿지 않을 것인가? 내가 이제 이들을 흑사병으로 치고 쫓아내 버린 다음, 너를 이들보다 더 크고 강한 민족으로 만들겠다.” (민수 14,11-12)

고대에는 흑사병이 제일 무서운 병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몰살시켜버리겠다는 말씀입니다.

하느님의 백성이 되는 자격은 하느님을 믿고 따르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스라엘백성들은 하느님의 백성으로서의 자격을 잃고, 엉뚱한 지도자를 찾으려고 했습니다. 하느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버리시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 스스로 죽음을 자초한 것입니다.

모세는 어떻게든 이스라엘백성들을 구해내려고 하느님께 이렇게 말합니다.

“그런데 이제 당신께서 이 백성을 사람 하나 죽이듯 죽여 버리시면, 당신에 대한 소문을 들은 민족들은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주님은 저 백성에게 맹세한 땅으로 그들을 데리고 갈 능력이 없어서, 그들을 광야에서 몰살시켜 버렸다.’ 그러니 주님, 당신께서 말씀하신 대로, 제발 당신의 힘을 크게 펼치시기 바랍니다...... 이집트에서 여기에 올 때까지 이 백성을 용서하셨듯이, 이제 당신의 그 크신 자애에 따라 이 백성의 죄악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느님을 거슬러 불평할 때마다 죽었다면 벌써 여러 번 죽었을 것입니다. 그 때마다 하느님께서 용서해 주셨습니다. 모세는 ‘못나도 하느님, 당신께서 택하신 백성’이니 끝까지 봐 달라고 하느님께 기도한 것입니다.

그러자 하느님께서 답하십니다.

“너의 말대로 내가 용서해 주마.”(민수 14,20)

하느님께서는 용서해주시지만, 그래도 이스라엘백성들은 잘못에 대한 응분의 벌은 받아야합니다. “나를 업신여긴 자들은 모두 그 땅을 보지 못할 것이다.”(민수 14,24) 하느님께서는 스무살 이상의 장정들 중에 여호수아와 칼렘을 제외하고 가나안 땅에 못 들어가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약속의 땅은 하느님의 선물이고, 믿는 이들의 목표입니다. 약속의 땅은 하느님의 선물이니 받는 사람들이 감사하며 기쁘게 받아들일 때야만 그 선물이 가치를 갖습니다. 하느님께서 약속의 땅으로 우리를 인도하려고 하시는데도 우리가 자꾸 다른 데로 가려고 하면 안됩니다. 약속의 땅은 감사하는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믿는 이들의 몫이라는 뜻입니다.


<백성이 만용을 부리다.>

죄를 용서받은 백성들은 약속의 땅으로 빨리 들어가려고 조급증이 납니다. (지도를 보시면..) 광야를 우회해서 가나안으로 가야 안전한데, 산악지방을 통해 난 지름길로 가려고 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지 않은 결과는 이렇습니다. “그 산악지방에 사는 아말렉족과 가나안족이 내려와, 그들을 무찌르고 호르마까지 쫓아버렸다.”(민수 15,45) 우리는 하느님의 인도인간의 힘과 계략 중에서 반드시 하느님의 인도를 믿고 따라야합니다. 백성들의 생각으로는 돌아서 가나안 땅으로 가느니 좀 더 가까운 길로 가는 것이 나을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계약의 궤와 모세가 진영을 떠났는데도, 만용을 부려 자기들 뜻대로 했다가 패배하게 됩니다.

결국 이스라엘백성은 우회새서 모압지방을 지나서 가나안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므리바의 물>

가나안 땅으로 진격하던 중 ‘므리바’라는 고장에서 이스라엘백성들은 목이 마릅니다.

하느님께서 그들의 불평을 들어주십니다.

“모세가 손을 들어 지팡이로 그 바위를 두 번 치자, 많은 물이 터져 나왔다. 공동체와 그들의 가축이 물을 마셨다.”(민수 20,11)

그런데 하느님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놀랄만한 말씀을 하십니다.

“너희는 나를 믿지 않아 이스라엘 자손들이 보는 앞에서 나의 거룩함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러므로 너희는 내가 이 공동체에게 주는 땅으로 그들을 데리고 가지 못할 것이다.”(민수 20,12)

여태까지 하느님의 심부름을 모세가 다 했는데, 하느님께서는 모세에게 잘못했으니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하십니다.

실제로 모세는 요르단 강 동쪽, 느보산?에서 죽었습니다. 후대의 이스라엘 사람들은 다른 것은 다 이해해도, 왜 모세가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죽었는지를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전교 1등만 하던 사람이 시험에 떨어지면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처럼... 모세가 백성들을 잘 인도하였는데, 약속의 땅을 바로 앞에 두고 죽었다는 사실에 이스라엘백성들은 충격을 받았습니다. 이스라엘백성들은 그 이유를 아무리 생각해봐도 알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 “저 바위더러 물을 내라고 명령하여라”(민수,208)라고 말씀하셨는데, 모세가 하느님의 명령대로 ‘말로’ 하지 않고“지팡이로 그 바위를 두 번 쳐서”물이 나오게 했기 때문일 거라고 추측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 추측은 사실과 다릅니다. 모세가 하느님의 명령대로 하지 않고, 하느님을 모독한 것은 아닙니다. 후대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느님의 섭리를 이해할 수 없어서 궁리 끝에 지어낸 이야기입니다. 하느님의 섭리는 인간의 이해를 넘어설 때가 많습니다. 모세가 가나안 땅을 앞두고 죽은 것은 우리로서는 이해 못하는 하느님의 섭리에 의한 것입니다.


<구리뱀>

백성들은 가나안 땅으로 올라가다가 지루하고 짜증이 나서 불평합니다.

“당신들은 어쩌자고 우리를 이집트에서 올라오게 하여, 이 광야에서 죽게 하시오? 양식도 없고 물도 없소. 이 보잘 것 없는 양식은 이제 진저리가 나오.”(민수 21,5) 참으로 감사할 줄 모르는 하느님의 백성입니다. 지금 우리들은 하느님께 감사하고 있습니까? 하느님께서 우리들에게 주시는 게 많기만 한데, 우리들의 불평도 이스라엘백성들처럼 끝이 없습니다. 성경을 읽으면서 ‘나는 지금 하느님께 어떤 불평을 하고 있나?’하고 성찰할 수 있어야겠습니다.

하느님께서 백성들은 ‘독수리 날개에 태워’ 돌봐주셨는데, 백성들은 또 짜증을 내니, 하느님께서 화가 나십니다.

“그러자 주님께서 백성에게 불뱀을 보내셨다. 그것들이 백성을 물어, 많은 이스라엘 백성이 죽었다.”(민수 21,6)

고대인들은 뱀을 위험하지만 치유능력이 있다고 믿었습니다.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뱀의 위험에서 벗어날 방법을 알려주십니다.

“그리하여 모세는 구리뱀을 만들어 그것을 기둥 위에 달아 놓았다. 뱀이 사람을 물었을 때. 그 사람이 구리 뱀을 쳐다보면 살아났다.”(민수 21,9)

백성들이 하느님을 불신하고, 대들고, 배반하니 하느님께서 징벌을 내리시고, 백성들은 회개하고 용서를 청해야 용서받을 수 있었습니다. 백성들이 구리뱀을 쳐다본다는 것은 하느님의 권능을 믿고, 앞으로 그러지 않겠다고 마음먹었다는 표입니다. 즉, 회개를 통해 얻는 하느님의 구원을 말합니다.

요한복음에서 구리뱀과 십자가를 대비시켜 말합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어올린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져야 한다. 믿는 사람은 누구나 사람의 아들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3,14) 예수님께서는 죄로 죽어 마땅한 우리를 대신해서 돌아가심으로써, 우리를 구원하시고 영원한 생명으로 이끌어주십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보면서 우리의 구원과 새 생명에 대한 희망을 느낍니다. 비신자들에게는 십자가가 조각품에 불과할 것이고, 개신교인들은 십자가 조각을 우상숭배라고 비판합니다. 하지만 신앙의 눈으로 십자가를 보면 우리 죄에 대한 회개와 정개, 구원받으리라는 희망이 일어납니다. 모세의 구리뱀을 보고 이스라엘백성이 회개함으로써 생명을 얻었듯이, 우리는 십자가를 보고 생명을 얻습니다.


<요르단강 동쪽을 점령하다.>

천신만고 끝에 백성들은 아모르족이 다스리는 지역으로 와서 임금 시혼에게 길을 내달라고 합니다. 시혼이 거절하자 큰 전쟁이 일어납니다.

“이스라엘이 도리어 그를 칼로 쳐 죽이고, 아르논에서 야뽁까지, 곧 암몬 자손들의 영토에 이르기까지 그의 땅을 차지하였다.”(민수21,24)

요르단강 동쪽 땅을 점령하자 백성들은 약속의 땅 정복에 대한 희망과 용기를 갖게 됩니다.


<이스라엘이 우상을 섬기다.>

하지만 약간의 땅을 갖게 되니 백성들은 벌써 딴 생각을 합니다. 자신들의 삶보다 그곳 정착민들의 삶이 더 좋아보입니다. 그래서 그곳에 정착하도 살던 민족들의 신이 자신들의 하느님보다 힘이 셀 거라 생각하게 됩니다. 사막에서 방황하던 이스라엘백성들이 요르단강 동쪽을 점령하고 그곳에 살던 민족들의 생활을 보니, 그들의 생활이 부러웠고, 그들 민족의 신을 섬기면 그들도 요르단강 동쪽 민족들처럼 풍요롭게 살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우상숭배를 하게 됩니다.

하느님께서 제일 싫어하는 것이 우상숭배입니다. 하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저마다 자기 사람들 가운데에서 스스로 프오르의 신 바알의 멍에를 멘 자를 죽여라.”(민수 25,5)

바알신은 바빌론인, 중동인들이 많이 섬기던 신입니다. 이스라엘백성들이 바알신을 섬기는 것은 하느님의 백성으로서의 본분을 망각하는 행위입니다. 

지금 우리들도 일이 잘 안 풀리면 신앙생활을 잘 하다가도 점쟁이나 사주쟁이를 찾아갑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이 바로 우리의 모습입니다.


<여호수아가 후계자로 임명됨>

이스라엘인들이 하느님께 다시 용서를 청하고, 진군합니다.

가나안 땅을 바로 눈 앞에 두고, 새로운 생활에 대한 준비를 하려고 여러 가지 규정들을 정합니다.

“ 그는 엘 아자르 사제 앞에 서야 한다. 그러면 엘아자르가 주님 앞에서, 그에게 어떤 결정이 내려질지 우림으로 물어볼 것이다.”(민수 27,21)

이제는 백성의 지도자가 뽑혀야 할 때가 되었고, 백성의 지도자는 하느님의 뜻에 복종해야합니다. 그래서 새로 뽑힌 지도자는 백성들 앞에서 지도자로서 적합한 사람이라는 것을 증명해야 했습니다. 증명하기 위해 우림으로 물어보라고 하십니다. 우림은 하느님의 뜻을 물어보기 위한 일종의 주사위와 같은 것이었습니다. 우림을 제관들의 법복에 매달아 놓았습니다. 우림(Urim '빛‘)과 둠밈(Thummim '완전함’)은 하나 또는 둘을 같이 사용하는데, 고대 이스라엘에서 하느님의 뜻을 묻기 위해 쓴 제비의 도구입니다. 다윗왕 시대에는 우림과 둠밈을 쓰지 않게 됩니다. 예언자들이 직접 하느님의 뜻을 전하기 때문에 필요가 없는 데도 사용한다면 점을 치는 것과 같이 우상숭배하는 것과 같을 것이므로 사용하지 않습니다.

 

<요르단강 동쪽을 나누다>

르우벤 지파와 가드지파는 가나안 땅으로 가기 전에 차지한 요르단강 동쪽 땅이 욕심나서 그곳에 머물겠다고 합니다. 열 두 지파 중에서 두 지파가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지 않겠다고 한 것입니다. 열 두 지파가 모두 힘을 합쳐야 될 텐데, 분열될 위기에 처했습니다.

모세가 그 두 지파를 질책합니다.

“너희 형제들은 싸우러 가는데, 너희만 여기에 머물러 살겠다는 말이냐?”(민수 32,6) 두 지파는 하느님의 뜻을 어기겠다는 겁니다. 하느님 백성의 대립과 분열이 일어나면 하느님의 징벌이 있습니다.

그래서 두 지파는 약속의 땅을 차지하러 함께 가서 싸우겠다고 약속합니다.

“ 당신의 이 종들은 나리께서 이르신 대로, 주님 앞에서 싸우려고 모두 전쟁 무기를 갖추고 건너가겠습니다.”(민수 32,27)

하느님 백성의 일치와 단결이 있으면 하느님의 축복이 있습니다. 본당에서도 서로 일치하여 형제애를 나누고, 친교가 이루어져야 합니다. 약속의 땅은 하느님이 주시는 선물입니다. 세상의 우상에 발 붙이고 있으면 받을 수 없습니다.


<우상숭배 정화 지시>

“너희가 요르단을 건너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면, 그 땅의 주민들을 너희 앞에서 모조리 쫓아내고, 돌에 새긴 그들의 우상들과 주조 신상들을 없애고, 그들의 산당들도 모조리 헐어 버려야 한다.”(민수 33,53-52) 하느님의 백성들이 끊임없이 이어지는 우상숭배의 유혹에 약한 모습을 보였기 때문에 하느님께서 이렇게까지 말씀하신 것입니다.


<가나안 땅의 경계>

각 지파별로 땅을 분배합니다.

“이것이 너희가 제비를 뽑아 상속재산으로 받을 땅, 곧 주님께서 아홉 지파와 반쪽 지파에게 주라고 명령하신 땅이다.”(민수 34,13)

땅을 제비 뽑아서 나눕니다. 땅은 상속재산이고 하느님의 것입니다. (지금 우리들이 돈을 벌어서 집을 산다고 해서, 그 집은 우리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주신 것입니다. )


이렇게 해서 약속의 땅으로 가기 위한 모든 준비가 마무리 됩니다. 광야 유랑생활이 마무리됩니다.

하느님의 선택과 축복이 있으면 .... 감사와 서약....(노트정리 글씨를 제가 알아볼 수가 없네요.. ^^) 인간의 분열과 배반이 있으면 하느님의 진노와 징벌이 있고, 인간의 참회와 속죄가 있으면 하느님의 용서와 가호가 있습니다. 인류의 역사는 이 과정이 반복됩니다.

오늘 우리들은 잘 먹어도 배가 고프고, 마셔도 목이 마르고, 통장이 채워져도 부족함을 느낍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겪었던 광야는 그 당시에 한정된 공간이 아닙니다. 오늘 우리가 겪고 있는 삶이 바로 광야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스라엘백성들처럼 불평을 하고 살아갑니다. 우리의 모든 욕심을 채우려고 하는 데서 괴로움이 따르고, 하느님을 배반하게 됩니다.


이스라엘백성들의 광야 40년은 하느님의 백성으로서의 자질을 갖추는 교육기간이었습니다. 백성들을 하느님께서 시련을 통해 정화시키시는 과정이었습니다. 광야 40년은 시련을 통한 정화의 시기입니다. 시련을 통해 정화된 사람만이 하느님의 백성으로서 자격을 갖추게 된다는 말입니다.

이스라엘백성들은 하느님과 백성들의 약혼기간이라고 표현할 수 있는 40년의 광야생활을 거칩니다.

우리에게는 이 세상이 광야이며, 우리는 나그네입니다. 우리는 나그네 길을 걸어서 하느님께로 갑니다. 백성다운 자질을 갖춘 신앙인이 될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은 인생을 살아가는 동안에 나타나게 됩니다. 이스라엘인들의 불평을 내가 갖고 있는지, 내가 회개하고 구원받는 생활을 하고 있는지, 생각해봐야겠습니다.

우리가 영원한 삶을 맞이할 자격이 있는지, 민수기를 통해 반성해 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