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교실(구약) : 자료-11
이집트 탈출과 광야 유랑
* 열 번째 재앙의 의미
이집트 왕 파라오가 하느님의 맏아들인 이스라엘 백성을 죽이고 핍박했던 죄과에 대한 응분의 벌이다.
* 열 번째 재앙의 예방책
일종의 희생제사 의식으로, 문에 짐승의 피를 바르는 것은 하느님의 권능을 믿고 따랐다는 표시이다. 이로써 이스라엘 백성은 생명의 파괴자가 자신들을 거르고 지나가도록 하고 생명을 얻을 수 있었다.
* 이집트에서 탈출한 백성의 과장된 숫자
출애급 사건이, 과거 조상들의 경험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지금의 이스라엘 백성 모두가 실제로 체험한 것과 마찬가지라는 것을 강조하는 것.
* 구름 기둥과 불기둥
불과 구름은 사막의 더운 바람 때문에 자주 일어나던 자연 현상이지만 고대 사회에서 신의 현존을 묘사하는 표현이기도 하다. 이 이야기는 하느님께서 항상 백성들과 함게 계시면서 목적지까지 인도하셨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 갈대 바다를 건너는 기적
앞에는 바다가 가로막고, 뒤에서는 파라오의 군대가 추격해 오는 절대 절명의 순간, 하느님께서는 바다를 갈라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해 주셨다. 출애급은 우연의 일치나 행운이 아니라 실제로 이루어진 하느님의 행위이며, 하느님께서 모세를 통해 하신 약속이 실현된 사건이다.
* 출애굽 사건에서 나타난 하느님의 개입
하느님은, 당신 백성을 편애하고 이집트인들을 미워하신 것이 아니라, 고통받고 억압 당하며 차별 대우를 받고 있는 모든 약자들의 편을 드는 분이시다. 출애굽 사건을 통해서 만나는 하느님은 당신 백성의 고난의 역사에 함께 하시는 하느님이시다.
* 파스카 축제
‘파스나’(Pascha, 과월절, 過越節)라는 말은 ‘지나가다’‘건너가다’‘넘어가다’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파스카 축제는 출애굽 당시 죽음의 재앙을 ‘지나가게 하고’ 갈대바다를 기적적으로 ‘건넘으로써’죽음에서 생명으로 ‘넘어감’을 기념하는 축제이다. 그러나 그것은 지나간 역사적 사건에 대한 단순한 회상만은 아니다. 그들은 해마다 파스카 축제를 지냄으로써 과거의 출애굽 사건에 참여하는 것이다.
* 광야에서의 하느님 체험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기들이 억압당할 때 구출해 주시고, 배고프고 목마를 때 의․식․주를 해결해 주시고, 외적으로부터 자신들을 보호해 주시는 하느님의 존재를 광야에서의 유랑생활을 통해 절실히 체험했다.
* 만나
시나이 광야에서 많이 자라고 있는 ‘타마리스크’라는 나무의 잎에 기생하는 곤충의 분비물로서, 이것을 보고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게 무엇이냐?”하고 묻는 히브리어가 ‘만나’이다.
* 아말렉족과의 전투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어서 모든 전쟁은 성전(聖戰)이며, 이 성전은 오직 홀로 하느님께서 승리를 가져다주실 수 있다는 것이다. 이집트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구출해내신 하느님께서 궁극적으로 이 백성에게 자유를 주시려는데 외부의 위협은 이것을 방해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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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음 주 주제 : 시나이 계약과 율법 수여
* 읽어야 할 성경 : 탈출 19장 - 40장
* 성경 구절 쓰기 : 탈출 20,1-17 : 24,6-8 : 31,18 : 32,1-5 : 36,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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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양진 선생님의 강의 정리 (성경은 무척 재밌는 이야기입니다.^^*)
열 번째 재앙 예고
“왕좌에 앉은 파라오의 맏아들부터 맷돌 앞에 앉은 여종의 맏아들까지 이집트 땅의 맏아들과, 짐승의 맏배들이 모조리 죽을 것이다.”(탈출 11,5)
하느님께서 이집트인들의 맏아들과 짐승 맏배들까지 죽이는 재앙을 내리시는 것은 지나친 처사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건 아닙니다. 하느님의 맏아들은 이스라엘민족입니다. 파라오가 먼저 하느님의 맏아들인 이스라엘민족의 사내아이를 죽이고 강물에 던졌습니다. 하느님은 당신의 맏아들인 이스라엘민족을 죽이는 파라오에게 그러지 말라는 뜻으로 재앙을 내리신 것입니다. 남의 맏아들을 죽이면서 자기 맏아들이 잘되기를 바라는 것은 하느님의 뜻에 맞지 않는 일입니다. 다른 재앙은 파라오가 고개 숙이면 거두어들이곤 했는데, 열 번째 재앙은 특별한 재앙이었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에게도 예방책이 필요했습니다.
재앙의 예방
“가축을 한 마리씩 마련하여라....너희는 그것을 이달 열나흗날까지 두었다가 이스라엘의 온 공동체가 모여 저녁 어스름에 잡아라. 그리고 그 피는 받아서, 짐승을 먹을 집의 두 문설주와 상인방에 발라라. 그날 밤에 그 고기를 먹어야 하는데, 불에 구워, 누룩없는 빵과 쓴나물을 곁들여 먹어야 한다.”(탈출 12,7)
이런 의식은 희생제사를 의미합니다. 하느님 앞에 내가 죽을 죄를 지어서 속죄하려면 내가 죽어야 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사람이 죽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내가 죽을 죄를 지어 죽어 마땅하지만 내가 죽어버리면 다시 하느님 앞에 갈 기회가 없어집니다. 그래서 죽는 대신 ‘내가 죽는 심정’으로 양이나 염소를 잡아서 ,“제가 죽어야 되지만 차마 제가 못 죽고 제가 죽는 것과 같은 심정으로 이 제물을 바칩니다.”하고 제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그 제물을 속죄양이라고 말합니다. 그 제물을 바치면서 핑계를 대는 게 아닙니다. 진심으로 속죄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내가 죽어 마땅하지만, 다시는 죄를 짓지 않고 새로운 삶을 살면서 하느님의 뜻을 따르겠다는 의미로 희생양을 바치는 것입니다. 요즘사람들은 속죄양, 희생양은 자기들이 지은 죄를 무고한 남에게 뒤집어 씌우는 의미로 사용하는데 그건 잘못된 것입니다. 속죄양의 의미를 잘못 생각하면 안됩니다. 속죄양이라는 좋은 말을 자기 뜻대로, 편리할 대로 사용하면 안됩니다.
“너희가 있는 집에 발린 피는 너희를 위한 표지가 될 것이다. 내가 이집트를 칠 때, 그 피를 보고 너희만은 거르고 지나가겠다. 그러면 어떤 재앙도 너희를 멸망시키지 않을 것이다”(탈출 12,13)
백성들이 피를 문설주에 발랐다는 것은 하느님의 권능을 믿었다는 증거입니다. 하느님께서 짐승을 잡아서 이렇게 해라 라고 말씀하셨는데, 그 말씀을 안 듣는 사람들은 그 일을 안 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사람들은 하느님의 권능을 믿고 ‘재앙이 내릴 것을 예방하고 속죄하라’고 하신 말씀대로 문설주에 피를 바른 것입니다.
하느님이 이스라엘 백성만을 골라서 구원하셨다는 뜻이 아닙니다. ‘당신의 권능을 믿고 진심으로 속죄하는 마음으로 제사를 지낸’ 이스라엘 사람들을 당신의 권능으로 건져주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문설주에 피를 바름으로써 죽음을 거르고 생명을 얻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열 번째 재앙
“한밤중에 주님께서는 이집트 땅의 맏아들과 맏배를, 곧 왕좌에 앉은 파라오의 맏아들부터 감옥에 있는 포로의 맏아들과 짐승의 맏배까지 모조리 치셨다. 그러자 파라오와 그의 신하들과 이집트인들이 그 밤중에 일어났다.”(탈출 12,29)
맏아들이 죽으면 후계자가 없어지는 것입니다. 이집트 왕조가 사라질 위기에 처하게 되고, 이집트 각 가문의 대를 이을 후손을 잃는 것입니다. 이런 벌을 당하고 파라오는 고집을 부릴 수 없었습니다. 파라오는 새벽까지 기다리지 못하고 한 밤 중에 모세와 아론을 불러서 말합니다.
“너희도 이스라엘 자손들도 어서 일어나 내 백성에게서 떠나라. 너희가 말하던 대로, 가서 주님께 예배드려라. 너희가 말하던 대로, 너희의 양과 소도 데리고 가거라. 그리고 나를 위해서도 복을 빌어다오.”
파라오는 이스라엘백성들이 지긋지긋해서 떠나라고 명하지만 그래도 이스라엘민족의 하느님이 두려워서 자신을 위해서 예배드리라고 부탁합니다. 모세와 파라오가 대결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실은 하느님과 파라오가 대결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대결에서 하느님의 승리하시고, 파라오가 패배했습니다. 단순히 하느님과 파라오 간의 힘의 논리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파라오의 행동이 과연 사람다운, 한 나라의 지도자다운 행동이었느냐는 점이 문제입니다. 지도자를 잘못 만나면 나라가 망하게 됩니다. 그래서 파라오는 패배를 당하게 되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나오게 됩니다. 파라오가 한 나라의 지도자다운 일을 하지 못했기 때문에 파라오가 패배하게 된 것이다.
이스라엘인들이 이집트에서 나오다
‘마침내 이스라엘 자손들은 라메세스를 떠나 수콧으로 향하였다. 아이들을 빼고, 걸어서 행진하는 장정만도 육십만 가량이나 되었다.“(탈출 12,37)
장정만 60만명이라고 표현되어 있습니다. 장정들의 아내와 자식들까지 합치면 대략 250만명쯤 되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장정만 5000명을 먹이신 기적은 대략 2만명, 이만 오천명쯤을 먹이셨다는 것입니다. 250만명을 4열종대로 세운다면 500km가 넘는다. 서울과 여수간의 거리보다 조금 더 됩니다. 장정만 60만명이라는 숫자는 현실성이 없이 부풀려진 숫자이지만 그렇게 성경에 쓴 뜻이 있습니다. 그 뜻을 읽어야합니다. 야곱일가가 이집트로 들어갈 때 대략 70명이라고 했습니다. 야곱일가가 이집트에서 430년을 살았다고 기록되어 있으니 인구증가 추세로 보면 많아야 만 명 정도로 불어났을 것이다. 정작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집트를 탈출할 때는 몇 천명이 되었을 것이라고 추정합니다. 그럼 왜 성서는 장정만 60만이라고 표현했을까요? 이스라엘인들에게 출애굽은 엄청난 사건이었습니다. 탈출기가 쓰여졌던 북이스라엘왕국 당시의 인구가 250만 명쯤 되었습니다. 따라서 저자는 출애굽은 모세당시에 국한된 사건이 아니라 당시에 살고 있던 모든 이스라엘만족들이 출애굽을 한 것이라는 뜻에서 인구수를 당시의 인구만큼 부풀려서 기록했습니다. 즉 출애굽 사건은 조상들 뿐만 아니라 지금의 백성도 체험하는 사건이라는 뜻에서 장정 60만명이라고 기록했습니다. 출애굽사건은 늘 자기들에게 일어나는 하느님에 의한 구원의 사건이라는 뜻입니다.
이스라엘이 이집트에서 떠나다.
“파라오가 이스라엘 백성을 내보낼 때, 하느님께서는 필리스티아인들의 땅을 지나는 길이 가장 가까운데도, 그들을 그곳으로 인도하지 않으셨다.”(탈출 12,37)
필리스티아는 요즘 팔레스티나라고 부르는 지역입니다. 블레셋 이라는 말과 같은 말입니다.
지도를 보시면 이집트에서 가나안 땅으로 가는 길은 필리스티아지역을 지나는 길이 가장 가까운 길입니다. 하지만 그 길은 당시 정치적, 경제적, 군사적으로 중요한 도로였습니다. 페르시아, 바빌로니아가 침략할 때도 그 길을 사용했고, 이집트가 다른 나라를 침략할 때도 그 길을 사용했습니다. 따라서 그 길에는 이집트 군대의 요새들이 많아서 외적의 침입을 막고 있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인들이 그 길로 가면 이집트 군대의 공격을 받을 것이기에 시나이반도의 남쪽으로 멀리 돌아서 가도록 이스라엘인들을 인도하십니다.
“그들은 수콧을 떠나 광야 가장자리에 있는 에탐에 진을 쳤다. ”(탈출 13,21)
(지도보세요.)모세가 홍해를 건넜다는 것은 요즘사람들이 오해한 것이고 실은 갈대바다를 건넜습니다.
“주님께서는 밤낮으로 행진할 수 있도록 그들 앞에 서서 가시며, 낮에는 구름 기둥 속에서 길을 인도하시고, 밤에는 불기둥 속에서 그들을 비추어 주셨다. 낮에는 구름 기둥이, 밤에는 불기둥이 백성 앞을 떠나지 않았다.”(탈출 13,20-21)
약속의 땅으로 가는 길을 진두지휘하는 사람은 모세이고, 모세를 인도하시는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고대에는 군대가 행진할 때 부대마다 부대원들을 인솔하기 위해 불화로를 앞세웠습니다. 부대원들은 낮에는 연기를 보고 따라가고 밤에는 불을 보고 따라갈 수 있었습니다. 대상들이 길을 갈 때도 불을 앞세웁니다.. 그래서 구름기둥, 불기둥이라는 의미가 불화로를 앞세우고 길을 갔다는 뜻도 될 수 있습니다. 또 한편으로는 이렇게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사막에서는 모래바람이 많이 불고 천둥 번개가 치기도 합니다. 그런 자연현상을 고대인들은 하느님께서 나타나신 것으로 여겼습니다. 성서에서 그런 말을 한 이유는 그런 자연현상들이 다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면서 행군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하기 위해서입니다. 모세가 인도하지만 하느님께서 백성들을 손수 인도하신다는 것이라는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이집트인들이 뒤쫓다.
“파라오는 자기 병거를 갖추어 군사들을 거느리고 나섰다. 그는 병거 육백 대에 이르는 정예 부대와, 군관이 이끄는 이집트의 모든 병거를 거느리고 나섰다. ‘(탈출 14,6)
흔히 어떤 일이 지난 다음 아차하고 후회합니다. 파라오는 하느님이 두려워서 이스라엘인들을 보냈지만 그들의 노동력이 아쉬웠고 괘씸한 생각이 들어서 군대를 보내 쫓아가게 합니다. 이스라엘인들의 앞에는 갈대바다가 있었고 뒤에서는 파라오 군대가 쫓아왔습니다. 가만히 있어도 죽고, 앞으로 나아가도 죽게 될 절대절명의 상황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인들은 무기도 없고 싸울 능력도 없었습니다.그러자 이스라엘인들이 이렇게 불평합니다.
“이집트에는 묏자리가 없어 광야에서 죽으라고 우리를 데려왔소? 어쩌자고 우리를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어 이렇게 만드는 것이오? ”(탈출 14,ㅡ11)
물에 빠진 사람 건져놓았더니 보따리 내놓으라는 격으로 백성들이 모세에게 따지지만 그들이 죽게 될 위기에 있으니 욕할 일만은 아닙니다. 이스라엘인들이 노예살이 할 때는 적어도 목숨을 건질 수는 있었을 테니까요. 이스라엘 백성들은 죽음이 무서웠습니다. 인간의 본능입니다. 하느님께서 위기에 처한 백성들의 불만을 들어주십니다.
“두려워하지들 마라. 똑바로 서서 오늘 주님께서 너희를 위하여 이루실 구원을 보아라. 오늘 너희가 보는 이집트인들을 다시는 영원히 보지 않게 될 것이다. 주님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워 주실 터이니, 너희는 잠자코 있기만 하여라.”(탈출 14,13-14)
모세가 부르짖었다는 말은 기도했다는 말입니다. 모세가 하는 말의 의미는 ‘너희들이 힘이나 꾀가 있어서 이 위기를 벗어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 백성을 구원하실 분은 오직 하느님 한 분 뿐이시니 지켜보아라’라는 뜻입니다. 그렇게 말하고 모세가 백성들을 위해서 하느님께 기도합니다.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지팡이를 들고 바다를 가르라고 하십니다.
이스라엘인들이 바다를 건너다
“그리하여 바닷물이 갈라지자, 이스라엘 자손들이 바다 가운데로 마른 땅을 걸어 들어갔다.”(탈출 14,22)
“뒤이어 이집트인들이 쫓아왔다. 파라오의 모든 말과 병거와 기병들이 그들을 따라 바다 한 가운데로 마른 땅을 걸어 들어갔다. 물은 그들 좌우에서 벽이 되어 주었다.‘(탈출 14,22)
“물이 되돌아 와서, 이스라엘 자손들을 따라 바다로 들어선 파라오의 모든 군대의 병거와 기병들을 덮쳐 버렸다. 그들 가운데 한 사람도 살아남지 못하였다.”(탈출 14,28)
진도에 가면 일 년에 두 차례 바다가 갈라지는 현상을 두고 모세의 기적이라고 합니다. 갈대바다도 이런 현상이 있었을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절대절명의 순간에 바다가 열렸다는 것입니다. 그 순간에 열리지 않았더라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다 죽을 목숨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자연현상을 이용하신 것입니다. 사람들은 도저히 해결 안될 문제가 해결되면 하늘이 도우셨다, 천우신조라고 합니다. 신앙이 없는 사람들도 그런 이야기 합니다. 그런 일들이 있으면 하느님을 체험하게 됩니다. 바다가 갈라진 것이 자연현상이었을 수 있겠지만, 그 자연현상이 내 앞에서 극적으로 이루어질 때는 하느님의 섭리라고 이야기할 수 밖에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다를 건너고서야 이렇게 말합니다.
“ 이렇게 이스라엘은 주님께서 이집트인들에게 행사하신 큰 권능을 보았다. 그리하여 백성은 주님을 경외하고, 주님과 그분의 종 모세를 믿게 되었다.”(탈출 14,31)
역사적인 특별한 사건이 있으려면 우리에게 일어나는 어떤 일이 계기가 됩니다. 예컨대
3.15 부정선거 때 마산 앞바다에서 김주열 군의 시신이 떠올랐습니다. 그 일로 인해 4.19혁명이 일어났습니다. 김주열군이 최루탄 맞은 사건은 우연히 일어난 일이 아닙니다. 그럴 수 밖에 없는 필연적인,정치적인 상황이 있었던 것입니다. 당시 상황이 그 사건을 만들었고 그것이 4.19를 촉발하는 계기가 된 것입니다.
이스라엘인들은 하느님이 어떤 존재인지 출애굽을 통해 깊이 깨닫게 되었습니다. 출애굽은 우연히 일어난 사건이 아니고, 자기들의 능력으로 얻은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 베푸신 구원행위임을 깨달았습니다. 출애굽은 ‘모세를 통해 너희 백성을 이끌어 내겠다’라고 하신 구원약속이 이루어진 사건입니다. 거슬러 올라가면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의 하느님께서 약속하셨던 것,“자손들을 하늘의 별만큼 바다의 모래만큼 늘려서 큰 민족을 이루어주시리라‘는 약속을 이루어주신 사건이었습니다.
출애굽 사건은 하느님 약속의 성취입니다.
출애굽은 하느님의 행위이며 이스라엘인들에게 했던 약속의 실현입니다.
하느님은 당신이 선택한 이스라엘만 예뻐하고 이집트는 미워서 그런 일을 하신 것은 아닙니다. 하느님은 모든 약자들의 편을 드시는 분입니다. 어떤 민족도 다른 민족을 노예로 삼을 수 없다는 것이 하느님의 정의입니다. 어떤 민족도 다른 민족을 수탈, 억압, 침략, 학살할 수 없습니다. 그런 행위에는 하느님의 징벌이 따릅니다. 인종차별, 신분차별, 성별차별, 빈부차별, 이 모든 것은 다 하느님의 뜻에 어긋나고 하느님의 징벌이 따릅니다. 오늘날 20세기에 와서도 일본이나 독일이 다른 나라를 침공해서 망했습니다. 그런 역사는 오늘날까지 계속되고 있습니다. 21세기에 미국은 온갖 구실로 이라크, 아프가티스탄을 침공했습니다. 그런 침략행위에는 하느님의 징벌이 따르게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이스라엘 백성만 편애하는 분이 아니십니다. 하느님은 정의로 공의로운 심판을 하시는 분이십니다. 내가 못된 짓을 해도 매일 미사하고 성체 모시고 성당활동 열심히 하니까 하느님께서 나를 용서해주시겠지?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남을 이용하고 미워하고, 모함하고 억압한다면 하느님의 징벌을 면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 사실을 출애굽에서 나타난 하느님의 모습을 보고 깨달아야 합니다.
이스라엘민족들은 출애굽 사건을 통해서 민족을 형성시켜주고 민족을 이끌어주신 분이 하느님이시라는 것을 확실히 체험하게 됩니다.
파스카 축제
이스라엘인들은 출애굽 사건을 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 사건을 해마다 기념하기 위해 파스카 축제를 지냈습니다.
“이 날이야말로 너희의 기념일이니, 이날 주님을 위하여 축제를 지내라. 이를 영원한 규칙으로 삼아 대대로 축제일로 지내야 한다.”(탈출 12,14)
파스카 축제를 통해 매년 출애굽 사건을 기념합니다. 이스라엘 민족들은 하느님께서 자기들을 사랑하시고 구원하셨는다는 것을 뼈 속 깊이 느꼈기 때문에, 그 후의 어떤 고난에도, 나라가 두 개로 나뉘고 바빌론 유배생활을 할 때도 희망을 잃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파스카 축제를 통해 이집트 노예살이에서 구해주신 하느님을 기억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출애굽은 모든 시대를 사는 이스라엘 민족 모두가 기념해야할 사건’이라고 생각하고 파스카 축제를 지냈습니다.
‘파스카 Pascha’ 란 ‘과월절(過月節)’또는 ‘유월절’이라고도 하고, ‘지나가다’ 건너가다‘넘어가다’라는 뜻입니다. 열 번째 재앙이 내리기 전에 이스라엘인들이 짐승의 피를 문설주에 발라 죽음의 세력이 넘어갔고, 홍해바다에서 죽을 운명에 있었는데 바다를 갈라서 건너갈 수 있었습니다. 죽음에서 생명으로 넘어간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사를 대표하는 것은 출애굽 사건입니다.
신약의 파스카
구약의 파스카를 예수 그리스도께서 완성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신‘ 최후의 만찬’은 ‘파스카 축제의 만찬’이었습니다.
구약의 파스카 축제를 예수님께서 완성하신 것입니다.
파스카축제에서는 속죄를 위해서 속죄양을 잡았습니다.
예수그리스도는 희생제물로 바쳐진 하느님의 어린 양입니다.
인류가 죄를 지었으니 하느님 앞에 죽어 마땅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당신 목숨을 바치심으로서 우리를 죽을 운명에서 구하시고 영원한 생명으로 ‘넘어가게’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성체성사를 제정하시고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루까 22,19)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인들은 파스카 만찬을 하면서, 출애굽사건을 과거 조상들의 사건이 아니라 계속 자기 민족들 안에 이루어질 사건이라고 기억하고자 합니다. 그렇듯이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성체성사를 통해서 예수님을 받아들이고 경험하는 것입니다. 최후의 만찬은 예수님과 제자들의 일회적인 사건이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매일, 매 순간 맞아들이고 경험하는 파스카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예를 행하여라” 라고 말씀하셨고, 그런 의미로 미사를 드립니다.
즉 미사는 신약의 파스카 잔치입니다.
우리 신자들은 세례성사를 통해서 파스카를 경험했습니다. 세례받기 전, 죄와 죽음의 상태에서 세례를 통해 삶으로 생명으로 다시 태어났습니다. ‘건너온’ 것입니다.
세례성사는 죽음에서 생명으로 넘어가는 파스카를 경험하고, 영원한 해방인 부활을 약속받는 성사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파스카의 삶’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지난날의 죄와 세속에서 있었던 좋지 않은 일들을 다 던지고 새로운 삶으로 태어나는 삶을 매일 매일 살아가는 것이 ‘파스카의 삶’입니다. 매일의 삶을 되돌아보고, 죽음으로 이끄는 잘못된 일들을 버리고 다시 새로운 나로 변화해서 생명의 길로 갈 수 있도록 성찰하는 삶을 살아야합니다. ‘묵은 나’에서 새로운 ‘나’로 ‘넘어가는’ 삶을 살아야합니다.
광야에서의 유랑
이스라엘인들이 이집트의 종살이에서 벗어난 것은 참으로 기쁜 일이었지만 그들이 막상 사막으로 나오니 현실은 너무 힘들었습니다. 물과 양식이 부족했고 외적들의 약탈위협이 있었습니다.
“모세가 이스라엘을 갈대 바다에서 떠나게 하니 그들이 수르 광야로 나아갔다. 광야에서 사흘 동안을 걸었는데도, 그들은 물을 찾지 못하였다. 마침내 마라에 다다랐지만, 그곳 마라의 물이 써서 마실 수가 없었다. ”(탈출 15,22-23)
‘마라’라는 지역은 홍해바다 바로 곁에 있는 지역입니다. 물을 파면 바닷물이 올라왔고 바닷물이라 쓰고 먹을 수 없었습니다. 물은 생명수입니다. 이스라엘인들은 목마름의 고통을 호소합니다. “백성은 모세에게 ”우리가 무엇을 마셔야 한단 말이오?“하고 불평하였다.”(탈출 15,24)
지도자 노릇하기가 참 힘이 듭니다.
“모세가 주님께 부르짖으니, 주님께서 나무 하나를 보여 주셨다. 모세가 그것을 물에 던지자 그 물이 단 물이 되었다.”(탈출 15,25)
사소한 것을 불평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괘씸하게 여겨질 수 있겠지만 하느님께서는 생존에 필요한 절대적인 욕구는 들어주시는 분이십니다. 특히 지도자들은 생존에 필요한 요구를 해결해주시도록 하느님께 기도해야합니다.
“그들은 엘림에 다다랐다. 그곳에는 샘이 열두 개, 야자나무가 일흔 그루 있었다.”(탈출 15, 27)
사막을 여행할 때 물과 그늘이 있으면 행복합니다. 열 두 개, 일흔 그루, 라는 숫자는 딱 그만큼 있었다는 말이 아니라, 풍부하게 있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편한 하느님만 찾습니다. ‘마라’의 하느님은 목마르게 하고 고통속에 함께 계시면서 우리를 돌봐주시는 하느님입니다. ‘엘림’의 하느님은 풍부한 은총을 주고 우리에게 행복을 주는 하느님입니다. 인생을 살다보면 ‘마라’에 있을 수도 있고 ‘엘림’에 있을 수도 있습니다. ‘마라’에서의 하느님을 만날 수도 있고,‘엘림’에서의 하느님을 만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흔히 ‘엘림’의 하느님만을 찾습니다. 하지만 시련과 고통 중에 있을 때라도 그 시련과 고통에 하느님의 뜻이 있고, 하느님이 함께 하심을 믿을 수 있을 때, 믿음의 균형이 생기고 믿음이 깊어질 수 있다. 마라의 하느님을 만나더라도 하느님께 절대적인 신뢰를 드릴 때,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쓴 물을 단물로 바꿔주시는 은총을 주십니다.
배고픈 자유? 배부른 노예?
물은 해결했는데 배고픔이 문제가 되었습니다.
“아, 우리가 고기 냄비 곁에 앉아 빵을 배불리 먹던 그 때, 이집트 땅에서 주님의 손에 죽었더라면! 그런데 당신들은 이 무리를 모조리 굶겨 죽이려고, 우리는 이 광야로 끌고 왔고?”(탈출 16,3)
이스라엘백성들은 배가 고파서 그렇게 지긋지긋한 종살이가 더 나았겠다고 불평합니다. 죽 한 그릇 얻어먹었던 것을 고기 얻어먹은 것처럼 기억하는 것입니다.
(요즘 ‘일제 때가 좋았어!’ ‘박정희 때가 좋았어’라고 말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말도 안되는 이야기입니다. 물론 그 당시 떵떵거리고 잘 살던 사람들은 그 때가 좋았겠지만 사실이 아니지요. 그 때가 좋았던 게 아니라, 별 것도 아닌 사람들이 행세하고 사는 모습이 보기 싫어지면 그런 불평을 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지도자는 백성들을 마시게 하고, 먹이고, 안전하게 돌봐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진짜 인도자는 하느님이십니다. 왕이 왕다우려면 백성들을 잘 마시게 하고 먹여야합니다. 백성들은 어린아이와 같습니다. 아이들은 엄마가 아무리 급한 일이 있어도 울기만 하면 됩니다. 엄마는 배고프면 먹이고 아프면 치료해 주어야합니다.
이 모든 것을 하느님께서 들어주십니다. 하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저녁 어스름에는 고기를 먹고, 아침에는 양식을 배불리 먹을 것이다.”(탈출 16,12)
만나와 메추라기
“그날 저녁에 메추라기 떼가 잘아와 진영을 덮었다. ”(탈출 16,13-14)
메추라기는 이동하는 철새입니다. 시나이반도로 다가와서 너무 더우니 내려와서 쉬고 있으면 기운이 없이 지쳐있기 때문에 손으로도 잡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메추라기 떼로 고기를 먹었으니 빵을 먹어야 합니다.
“ 그리고 아침에는 진영 둘레에 이슬이 내렸다. 이슬이 걷힌 뒤에 보니, 잘기가 땅에 내린 서리처럼 잔 알갱이들이 광야 위에 깔려 있는 것이었다.”(탈출 16,13-14)
사막지방에는 ‘타마리스크’라는 나무의 잎에 기생하는 곤충이 있습니다. 그 곤충은 그 나뭇잎을 먹고 배설물을 내놓는데, 그 배설물이 건조한 지역이라서 가루처럼 마르면서 떨어집니다. 그 배설물의 80%가 전분입니다. 그것을 모아서 빵을 만들어 먹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이스라엘인들은 시나이에서 처음 살아보니 그런 배설물도 처음 봤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게 무엇이냐?”라고 물었겠지요. 우리가 알고 있는‘만나’라는 단어의 뜻은 “이게 무엇이냐?”라는 뜻의 히브리어입니다. 그 ‘만나’가 이름이 된 것입니다.
“이것을 보고 이스라엘 자손들은 그것이 무엇인지 몰라 ”이게 무엇이냐?“하고 물었다.”(탈출 16,15)
“이것은 주님께서 너희에게 먹으라고 주신 양식이다.”(탈출 16,16)
하느님께서 물을 해결해주시고, 메추라기와 만나도 주셨습니다. 하느님도 자상한 엄마와 똑같습니다. 끼니 끼니 먹이고 돌보시는 하느님을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생활하면서 체험합니다. 노예에서 자유인으로, 죽음에서 생명으로, 목마름과 배고픔에서 물과 양식으로, 이 모든 것을 하느님께서 해주십니다. 그래서 광야체험이 중요합니다. 도저히 살아갈 수 없는 광야에서는 오직 하느님의 덕으로만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인들은 광야체험을 통해서 백성을 하루 하루 보살피시는 하느님의 손길을 알 수 있었습니다. 우리에게도 광야체험은 중요합니다.
만나와 생명의 빵 - 생명의 양식인 그리스도의 몸
“나는 생명의 빵이다.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고도 죽었다. 그러나 이 빵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으로,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죽지 않는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있는 빵이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요한 6,48-51)
만나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이스라엘사람들에게 필요한 양식을 하느님이 주신 것입니다. 그렇지만 만나를 먹고는 영원히 살 수 없습니다. 영원한 삶은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세상에 오셔서 당신 몸을 우리에게 영원한 양식으로 주셨고, 그 몸을 먹음으로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됩니다. 신약에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몸을 영원한 생명의 양식으로 내어주셨습니다. 예수님은 구약의 파스카를 완성하신 것입니다.
아말렉족과 싸워 이기다.
사막에서의 첫 번째 전쟁이 일어납니다.“
그때 아말렉족이 몰려와 르피딤에서 이스라엘과 싸움을 벌였다.”(탈출 17,8)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물을 주셨고, 양식을 주셨고, 이번에는 그들의 안전을 지켜주십니다. 적과의 전쟁, 침략에 대한 대비, 이 과정에서 하느님의 역할이 중요합니다. 모세는 언덕에서 손을 올리고 있고, 여호수아가 언덕을 내려가서 전쟁을 합니다. 모세가 손을 들고 있었다는 말은 하느님의 권능으로 전쟁한다는 뜻입니다. 전쟁의 사령관은 하느님이십니다.
“모세가 손을 들면 이스라엘이 우세하고, 손을 내리면 아말렉이 우세하였다.”(탈출 17,11) 표현이 재미있습니다. 손을 올리면 하느님이 지휘를 하시는 것이니 이스라엘이 이기고, 손을 내리면 하느님이 쉬시니 이스라엘이 진다고 묘사했습니다. 하느님의 권능을 그런 식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그리하여 여호수아는 아말렉과 그의 백성을 칼로 무찔렀다.”(탈출 17,13)
하느님이 끝까지 지휘하셔서 전쟁에서 이겼습니다. 이스라엘인들뿐만 아니라 당시 고대인들에게는 모든 전쟁이 성전(聖戰)이었습니다. 전쟁에서 이기면 이긴 쪽 신이 진 쪽 신보다 우세하여 이긴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바빌론에서 이스라엘인들이 바빌론 신이 하느님보다 힘이 세다고 생각했듯이..
아말렉족과의 싸움은 해방과 구원의 하느님을 알게하는 성전(聖戰)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성전을 통해 하느님이 해방시켜주신 분, 모든 민족과 싸워서 구원해주시는 하느님임을 체험합니다.
이 모든 것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의 왕이시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하느님은 백성이 원하니 물을 주시고, 양식을 주시고, 외침으로부터 막아주셨습니다. 이 모든 것은 지도자이신 하느님이 다 해야 할 일입니다.
탈출기 1장부터 18장까지를 종합해서 이야기하자면 하느님이 이스라엘의 참된 왕으로 등극하는 이야기입니다. 다음에는 이스라엘 백성들과 왕이신 하느님이 계약을 맺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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