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교실(구약) :자료 - 09
야곱과 그 후손들의 이집트 정착
* 야곱과 에사우
야곱은 약삭빠른 꾀와 속임수로 쌍둥이 형인 에사우의 장자권과 축복을 가로채지만 형의 분노를 피해 고향을 떠나야 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과 이사악에게 내리셨던 축복을 야곱에게 다시 내려 주신다. 하란에서 20년을 보낸 야곱은 에사오가 화해하기 위해 고향으로 돌아오던 중 하느님과 씨름을 한 끝에 이스라엘이라는 새 이름을 얻는데 이 이름은 선택된 백성의 이름이 되고, 야곱의 열두 아들은 이스라엘 민족의 열두 지파(부족)의 선조가 된다.
* 장자권
다른 형제들에 대한 가부장적인 권위를 주고, 또한 유산의 대부분을 차지하도록 한다.
* 축복
작별을 할 때나 임종 때 내려졌다. 이는 죽어가는 사람의 생명력이 살아있는 사람에게 옮겨지며, 그 힘은 다시 되돌리거나 변경시킬 수 없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 베텔(Bethel)
Beth-집, Elohim-하느님, 즉 ‘하느님의 집’을 뜻한다.
* 요셉과 그 형제들
요셉의 이야기는 이스라엘의 조상들이 이집트에 정착하게 된 경위를 설명해 주고 있다. 요셉은 형제들에 의해 팔려가 이집트에서 종노릇을 하게 되지만 하느님의 가호와 뛰어난 재능으로 이집트의 재상에 오른다. 그리고 기근 때문에 이집트로 식량을 구하러 온 형제들과 화해하고 자신에게 일어난 그 모든 것은 하느님의 섭리 때문이라는 믿음을 고백한다. 인간의 악은 조화와 질서를 파괴하지만 하느님의 섭리는 그것마저도 이용하여 선을 이끌어내신다. 요셉은 일가족을 이집트로 불러들여 정착하게 한다.
* 꿈의 표상
당시 꿈은 예언적 성격을 띠고 있었고, 또한 하느님의 뜻을 전달하는 방편이기도 했다.
* 야곱 일가의 이집트 정착
가나안 땅에서 이집트로 떠나기 전에 야곱에게 하신 하느님의 약속은 장차 일어날 출애굽 사건의 배경이 된다.
* 요셉의 유언
성조사의 일관된 주제였던 땅에 대한 약속을 상기시키며, 출애굽과 약속의 성취에 대한 기대를 내포하고 있다. 후에 모세와 여호수아와 후대의 이스라엘 백성은 요셉의 유언을 실행하였다. 요셉 이야기를 통하여 창세기와 탈출기, 성조사와 민족사, 하느님의 약속와 성취가 일관성 있게 연결된다.
* 요셉과 그 형제들의 여정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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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음 주 주제 : 모세와 이집트 탈출 소명
* 읽어야 할 성경 : 탈출 1장 - 11장
* 성경구절 쓰기 : 탈출 1,7-8 : 1,11-12 : 2,24-25 : 3,9-10 : 3,14 :
4,15-16 : 5,1-2 : 11,10
(강의 정리)
(저는 아홉 번째 강의는 병원에 가느라고 듣지 못했습니다. 남편이 대신 가서 음성녹음을 해 왔는데, 제대로 안 들려서 부족한 부분이 많을 것입니다.^^ 부족한 대로 옮깁니다.)
창세기 성조사 중에서 아브라함 이야기와 요셉이야기는 양대산맥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성서 읽어야할 부분이 좀 많았지요? 성서 써야할 부분의 앞 뒤를 중점적으로 읽으시면 좋습니다. 성서 첫장부터 끝까지 한 구절 한 구절 다 배우려면 10년도 부족할 겁니다.
이사악은 성서에서 두드러진 역할이 없습니다. 단지 하느님의 축복을 받은 아들이라는 것 뿐입니다. 이사악은 아내 레베카와의 사이에 아들이 없었습니다. 레베카도 사라처럼 아이를 갖지 못했습니다. 대개 성경에서 중요한 인물들이 아이를 가질 때, 꼭 하느님의 힘으로 아이를 갖게 됩니다. 신약에서 엘리사벳과 마리아가 그랬습니다. 역사는 할아버지에서 아들, 손자로 대를 이으면서 이루어집니다. 그 대를 하느님이 이어주시고, 그 생명을 하느님이 주신 것이다 라는 맥락이 성서에 배어 있습니다. 그래서 아이를 낳지 못하는 레베카도 성령의 도움으로 아이를 갖게 됩니다. 하느님께서 이사악의 기도를 들어주셔서 쌍둥이를 낳습니다. 그 아들 이름이 에사우와 야곱입니다. 에사우와 야곱이 직업을 갖게 됩니다.
“에사우는 솜씨 좋은 사냥꾼 곧 들사람이 되고, 야곱은 온순한 사람으로 천막에서 살았다.”(창세 25,27)
카인과 아벨이야기에서도 카인은 농부였고 아벨을 목자였습니다. 고대의 직업적인 분화와 그 문화의 협력과 충돌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에사우는 수렵생활을 했고, 야곱은 온순하고 천막안에서 살았다고 하니 농사 지으면서 가축을 기르면서 살았을 것입니다.
야곱은 약삭빠른 꾀쟁이로 묘사됩니다. 장남 에사우가 장자권을 가져야 하는데, 야곱은 에사우가 사냥 갔다 와서 배가 고플 때 죽을 끓이고 있다가 이렇게 말합니다.
“먼저 형의 맏아들 권리를 내게 파시오”(창세 25,31)
예전에는 장자권을 사고 팔았습니다.
에사우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지금 죽을 지경인데, 맏아들 권리가 내게 무슨 소용이겠느냐?”(창세 25,32) 야곱이 에사우에게 맹세하라고 합니다. 그리고는 죽 한 그릇을 주고 장자권을 빼앗아옵니다. 어찌 보면 부적합한 일입니다. 성경은 이러한 야곱의 행위가 좋은 일이라거나 못된 일이라는 말을 하지 않고, 장자권을 죽 한 그릇으로 샀다는 사실만 이야기합니다. 장자권은 대단히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장자는 형제들에게 아버지의 역할을 했고, 절대적인 권위를 가졌습니다. 또 아버지가 돌아가시면 유산의 많은 부분을 장자가 많이 가졌습니다.
에사우가 이렇게 말합니다.
“에사우는 맏아들 권리를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창세 26,34)
문제는 여기에 있습니다. 야곱의 약삭빠른 면이 얄밉게 보이지만, 에사우는 더 큰 잘못을 합니다. 에사우는 배고픔을 못 견뎌서 귀중한 장자권을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합니다. 과연 장자권이 아무렇게 않아서 그랬을까요? 장자권은 아버지가 살아계실 동안에는 필요가 없습니다. 돌아가셔야 필요하게 됩니다. 에사우에게 장자권은 아직 급하지 않은 일이었고, 급한 것은 우선 자기 배가 고픈 것이었습니다.
우리도 지금 오늘만 살면 그것으로 다 되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내일을, 비젼을 생각해야 합니다. 인간 구원의 역사 안에서 하느님께서는 장자는 아니지만 그 집안의 어른 역할을 할 수 있는 사람에게 하느님의 약속을 주고 있습니다. 그렇게 중요한 장자권이 걸려있는데, 에사우는 당장 배가 고파서 죽 한 그릇에 팔아넘길 정도로 장자권을 가볍게 생각한 것입니다.
텔레비전에서 금년 12월에 대통령이 되겠다고 여러 사람들이 나와서 떠듭니다. 대의를 생각하지 않고. ,,,,,....(잘 안 들려서 못 적겠습니다.) 지지율만 생각합니다. 후보들끼리 서로 헐뜯고만 있습니다. 미래를 생각하지 못하고, 당장 지지율이 몇 프로 올라갈 수 있는가만 생각합니다.
지금 내가 내 삶을 살면서, 신앙인으로서 구원이 달려 있는데도, 지금 당장 살기 힘들어지면 유혹에 지기 쉽습니다. 천국은 죽어서야 가는 곳이니, 지금은 적당히 넘어가자라는 유혹에 넘어갑니다. 대부분의 신앙인은 안 넘어가겠지만 에사우처럼 넘어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더 큰 것, 더 원천적인 것을 생각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야곱이 형에게는 장자권을 맹세해서 받았지만, 결정적으로 아버지한테 장자권을 받아야합니다. 이사악이 늙어서 눈이 안 보였습니다. 장자에게 축복을 해주기 위해서 에사우에게 사냥해 와서 맛있게 요리해 오면 축복해주겠다고 합니다. 그 이야기를 레베카가 들었습니다. 레베카는 야곱을 더 사랑해서 야곱에게 ‘아버지가 축복을 주신다는데 기회를 놓치지 마라’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야곱을 에사우처럼 꾸밉니다.
야곱이 이렇게 말합니다.
“저는 아버지의 맏아들 에사우입니다. 아버지께서 저에게 이르신 대로 하였습니다. 그러니 일어나 앉으셔서 제가 사냥한 고기를 잡수시고, 저에게 축복해 주십시오.”(창세 25,34) 아버지한테 거짓말을 한 것입니다. 사기친 것입니다. 이사악은 몇 번 확인한 후에, 야곱을 축복해 줍니다. 축복은 대개 먼 길을 떠날 때나 임종 때 줍니다. 이는 죽어가는 사람의 생명력이 살아있는 사람에게 옮겨지며, 그 힘은 다시 되돌리거나 변경시킬 수 없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에사우가 그 사실을 알고 가만히 있지 못합니다. 레베카가 야곱을 오빠가 살고 있는 ‘하란’으로 피신시킵니다. 하란은 아브라함이 부르심을 받은 땅입니다. 야곱은 생명이 위험하니까 하란으로 도망을 갑니다. 이때 야곱의 심정은 어땠을까요? 장자권을 받은 이유는 고향에서 떵떵거리고 살고 싶어서였을 텐데, 형이 자기를 죽이려고 하니까, 비참한 심정으로 도망을 갑니다. 야곱은 하란으로 가다가 ‘베텔’이라는 곳에서 잠을 잡니다. 베텔에서 꿈을 꾸게 됩니다.
“그가 보니 땅에 층계가 세워져 있고 그 꼭대기는 하늘에 닿아 있는데, 하느님의 천사들이 그 층계를 오르내리고 있었다. 주님께서 그 위에 서서 말씀하셨다. “(창세, 28, 13) 층계는 바벨탑을 묘사한 것입니다. 바빌론 사람들은 바벨탑의 꼭대기가 하느님 침실에 닿았다고 생각했습니다. 계단은 하느님께 가는 계단입니다. 꿈에서 그것을 봤다면 하느님을 체험했다는 말입니다.
”나는 너의 아버지 아브라함의 하느님이며 이사악의 하느님인 주님이다. 나는 네가 누워 있는 이 땅을 너와 네 후손에게 주겠다. 네 후손은 땅의 먼지처럼 많아지고, 너는 서쪽과 동쪽 또 북쪽과 남쪽으로 퍼져 나갈 것이다. 땅의 모든 종족들이 너와 네 후손을 통하여 복을 받을 것이다. 보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면서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켜 주고, 너를 다시 이 땅으로 데려오겠다. 내가 너에게 약속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않겠다.“(창세 28, 14-15)
하느님이 당신의 존재를 가르치십니다. 당신을 아브라함과 이사악의 하느님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의 이 약속은 아브라함과 이사악에게 했던 약속입니다. 이 약속들을 통해서 하느님은 아브라함, 이사악의 하느님일 뿐만 아니라, 야곱의 하느님도 되어주시겠다고 축복을 주신 것입니다. 하느님이 아브라함, 이사악, 야곱을 통해서 구원의 약속을 이행하시겠다는 뜻입니다. 야곱은 그 땅을 ‘베텔’이라고 불렀습니다. 베텔이라는 말은 ‘하느님의 집’이라는 뜻입니다. Beth-집, Elohim-하느님, 즉 ‘하느님의 집’을 뜻합니다. Beth+Elohim
야곱이 베텔에서 하느님을 대면하고 그곳이 거룩한 장소라는 것을 알았지만 그 곳을 떠납니다. 우리 같으면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를 본 베드로처럼 거기서 살고 싶어할 것입니다. 보통 사람들의 심정은 초막을 짓고 살자고 말했던 베드로와 같을 것입니다. 그런데 야곱은 하란으로 피난을 갑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시나이산에서 하느님과 계약을 맺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시나이 산에서 머물지 않습니다. 하느님이 계시는 곳이 성당이라지만, 하느님은 성당에서만 머무르는 분이 아니십니다. 내가 집에 가면 함께 가시고, 내가 사무실에 가면 나와 함께 가시고, 시장에 갈 때도 같이 가시고, 내가 살고 있는 모든 장소에서 바로 나와 함께 계시는 분이십니다. 따라서 성당에 가서만 바르게 행동하고 열심히 한다고 해서 신앙생활 잘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당에 가야만 하느님을 뵙는 것은 아닙니다. 성당에서만 하느님을 뵙는다면 하느님의 자녀로서 세상에서 살 수 없습니다.
야곱의 외삼촌은 조금 욕심쟁이인 것 같습니다. 조카가 피난을 왔으면 잘 보살펴줘야 하는데, 그렇지 않고 야곱이 작은 딸을 욕심내니, 칠 년을 종노릇을 하면 주겠다고 합니다. 외삼촌은 야곱이 칠 년을 하루같이 종노릇을 했는데도, 첫째 딸을 첫날 밤에 야곱에게 보냅니다. 그 당시 여자들은 베일을 썼습니다. 예전에 우리나라도 그랬습니다. 그래서 야곱은 라헬을 얻기 위해 또 7년을 일합니다. 그 당시의 풍습이었습니다. 야곱이 열심히 일했는데, 외삼촌이 재산을 안 나누어 주니, 야곱이 제안 합니다. 점이 있는 짐승들은~~~ 생략 야곱이 꾀를 많이 내서 돈을 많이 모읍니다. 그러다가 고향으로 돌아가기를 원합니다. 야곱은 열 두 아들을 두게 됨. 열 한 명은 하란에서 낳고 막내 벤야민만 고향인 가나안 땅으로 돌아가서 낳게 됩니다. 야곱의 열 두 아들이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의 선조가 됩니다.
야곱이 집으로 돌아가려는데 걸림돌이 형입니다. 재산을 가지고 가서 형에게 바치고 용서를 빌려고 하는데, 에사우가 장정 400명을 이끌고 온다고 하니 큰 일이 났습니다. 야곱이 하느님께 간절하게 기도합니다.
“제 형의 손에서, 에사우의 손에서 부디 저를 구해 주십시오, 그가 들이닥쳐서 어미 자식 할 것 없이 저희 모두를 치지나 않을까 저는 두렵습니다. 당신께서는 ‘내가 너에게 잘해 주고, 네 후손을 너무 많아 셀 수 없는 바다의 모래처럼 만들어 주겠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창세 32,12)
정말 막막한 상황에 부딪치면 하느님을 찾을 수밖에 없습니다. 하느님은 가난한 자들, 핍박받는 자들의 울부짖는 소리를 들어주시고 구원해주시는 분이십니다. 야곱이 강가에서 혼자 잠을 잤습니다. 그런데.. “그런데 어떤 사람이 나타나 동이 틀 때까지 야곱과 씨름을 하였다.”(창세 32,25) 야곱이 어떤 존재와 씨름을 하는데, 그가 보통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씨름하면서 절대로 놓아주지 않았습니다. 상대방이 이렇게 말함. “네가 하느님과 겨루고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으니, 너의 이름은 이제 더 이상 야곱이 아니라 이스라엘이라 불릴 것이다.”(창세 32,29)
우리가 삶을 살아가면서 하느님과 대면할 기회가 있을 것입니다. 내가 어려움에 부딪쳐서 신앙에 갈등을 느낄 때, 어떤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을 때, 하느님을 믿고 의지하는 것이 옳은 것인가 하고 처절하게 느낄 때, 그럴 때 우리는 하느님과 맞붙어야 합니다. 하느님의 멱살이라도 잡아야 합니다.
우리가 어떤 것을 하느님께 끈질기게 간절히 청원하고 하느님께 매달릴 때, 우리의 이기주의와 욕심을 버려야합니다. 우리 자신만을 위해서 하느님께 매달리면 안됩니다. 우리한테 꼭 필요한 것일지라도 떼어내는 아픔도 느껴야합니다. 야곱이 하느님과 씨름하면서 온전하지 못하고, 엉덩이에 상처를 입었다는 뜻은 그런 뜻을 가집니다. 내가 하느님께 청하는 것이 간절하지만 떼어내는 아픔을 가지고, 내 뜻보다도 하느님께서 어떤 운명을 주시고, 어떤 삶을 살라고 하시는지 그 의미를 발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야곱은 그 싸움을 통해서 새이름을 받습니다. 이름이 바뀌면 운명이 바뀐다고 했습니다. 하느님과 씨름하면서 하느님께서 나에게 이런 환경을 주신 것이 나에게 어떤 의미가 될지를 생각하면서, 하느님의 뜻을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그래야 내 삶이 변화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이 야곱에게 주신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은 결국 이스라엘 백성들, 선택된 민족의 이름이 됩니다.
이렇게 하느님께 간절히 기구하고 씨름하면서 이름도 바뀐 야곱은 형 에사우를 만날 용기를 갖게 됩니다. 야곱은 하느님께서 나와 함께 계신다는 것을 알고 죽음을 무릅쓰고 에사우에게 갑니다. 하지만 뻔뻔한 얼굴로 가는 것은 아닙니다. 하느님이 자기 편이라고 해도 자기가 잘못한 것에 대해 용서를 청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래서 야곱은 형에게 이렇게 합니다. “야곱 자신은 그들보다 앞장서 가면서, 형에게 다가갈 때까지 일곱 번 땅에 엎드려 절하였다.”(창세 33, 3) 일곱 번이라는 숫자는 온전한 숫자을 의미하고, 즉 야곱이 에사우에게 충분히 빌만큼 빌었다는 뜻입니다. “그러자 에사우가 야곱에게 달려와서 그를 껴안았다.‘(창세 33,4) 진심으로 뉘우치고 사과하고 잘못을 고백할 때 화해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야곱이 진심으로 뉘우치니 비로소 고향에서 살게 되고, 하느님의 약속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야곱은 형의 장자권을 뺏고, 사기로 축복을 얻었지만, 하느님이 그런 야곱을 아브라함과 이사악처럼 축복해주고 약속해주고 지켜주시겠다고 하신 것을 우리가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에서 말하고자 하는 뜻은) 하느님께서 누구를 선택하고 축복하시든 그 권한은 오직 하느님의 자유입니다. 인간이 왈가왈부 따질 일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다윗도 모세도 베드로 사도까지도 뜯어보면 흠이 있었습니다. 흠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다윗은 성왕이라지만 부하의 아내를 탐했고, 베드로는 세 번씩이나 예수님을 부인했습니다. 그렇지만 그 사람들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모두 인간적인 약점을 지녔지만, 그 약점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하느님께 충실했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성서에 나오는 인물 같은 큰 존재들만 구원의 도구로 사용하시는 게 아닙니다. 여기 모인 00동 신자들 모두, 가톨릭 신자 모두, 아직 하느님을 모르지만 착하게 살아가는 이 세상 사람들 모두를 구원의 도구로 사용하십니다. 하느님이 나에게 어떤 일을 맡기셨는지 어떤 일을 주셨는지, 세례받고 새로운 이름을 받을 때 스스로 발견해 내야 합니다. 스스로 자격이 없고 능력이 없다고 생각하면 안됩니다. 우리가 인간적인 약점이 있고, 부족하지만.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특별한 의미가 있을 것이고, 거기에 우리가 충실할 수 있다면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축복을 주실 것이라는 믿음이 있을 때, 우리는 우리를 하느님의 도구로 쓰실 수 있도록 하느님께 자신을 내놓을 수 있습니다. 우리들, 하느님의 자녀들이 하느님께 헌신할 수 있을 때. 하느님께서는 당신 뜻대로 우리를 도구로 써 주십니다. 그 점을 야곱의 이야기를 통해 배울 수 있습니다.
이제 야곱의 역할은 끝나고 아들들 이야기입니다.
이스라엘 사람이 가나안에서 이집트로 가게 된 경위가 설명됩니다. 요셉이 이집트로 갈 때까지는 제일 막내였습니다. 늘그막에 태어난 아이는 부모가 유난히 예뻐합니다. 때로는 다른 자식들보다 더 예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다른 형제들이 그 꼴을 못 봅니다. 아버지가 예뻐하시니까. 아버지가 원망스러운 것이 아니라, 그 이쁨 받는 놈이 보기 싫습니다. 초등학교 때, 선생님한테 신용탄다고 미움 받는 애들이 있습니다. 누구로부터 이쁨을 받는 것은 비난의 구실이 됩니다. 사람들은 누가 이쁨받는 꼴을 못 봅니다. 야곱의 형제들이 이런 모의를 합니다.
“그의 형들은 멀리서 그를 알아보고, 그가 자기들에게 가까이 오기 전에 그를 죽이려는 음모를 꾸몄다.” ( 창세 37, 18)
막내가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 한다고 해서 막내를 죽이고 싶어합니다. 사촌이 논을 사면 배가 아프다고 했습니다. 서로 잘되는 꼴을 못보는 것입니다. 그것이 인간의 심정입니다. 특히 가정에서 형제간에 시기와 질투가 일어나면 살인까지 일어날 수 있습니다. 어떤 공동체 안에서 시기와 질투가 일어나면 그 공동체가 깨집니다. 지역사회 공동체도 반목하면 깨집니다. 교회공동체에서 시기와 질투가 일어나면 그 공동체가 깨집니다. 그것이 하느님의 섭리입니다. 가장 무서운 것은, 누가 자기보다 잘되는 꼴을 못 보고, 헐뜯고, 그렇게 헐뜯으면서 자기가 우위에 있으려고 하는 자세입니다. 그런 자세는 공동체를 깨고 맙니다.
맏형 르우벤이 그래도 철이 좀 더 들었는지, 야곱을 죽이려는 것을 말립니다. 그리고 지나가던 상인에고 팔아버리기로 합니다.
“그때에 미디안 상인들이 지나가다 요셉을 구덩이에서 끌어내었다. 그들은 요셉을 이스마엘인들에게 은전 스무 닢에 팔아넘겼다.”(창세 37,28)
예수님은 은전 서른 냥에 팔렸습니다. 은전 스무 냥은 성장기에 있는 노예 몸값이었습니다. 형들은 동생을 노예로 팔았지만 하느님께서 요셉을 지키고 있습니다. 요셉이 노예시장에서 파라오의 경비를 서는 종으로 팔립니다. 일을 잘하니까 이런 자리에까지 올라갑니다. “주인은 요셉을 자기 집 관리인으로 세워, 자기의 모든 재산을 그의 손에 맡겼다. 주인이 요셉을 자기 집과 모든 재산의 관리인으로 세운 뒤부터, 주님께서는 요셉 때문에 그 이집트 사람의 집에 복을 내리셨다.”(창세 39, 5)
종으로 팔려갔는데, 재능이 있으니까 집사장이 된 것입니다. 주인은 요셉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신임을 합니다. 호사다마라고, 그대로만 나갔으면 잘 되었을 텐데. 주인 포티파르의 아내가 자꾸 요셉을 꼬드깁니다. 어느 날 노골적으로 자기 침실로 끌어들입니다. 요셉이 거부하자 크게 악을 씁니다. “당신이 데려다 놓으신 저 히브리 종이 나를 희롱하려고 나에게 다가오지 않겠어요? 그래서 내가 목청을 높여 소리 질렀더니, 자기 옷을 내 곁에 버려두고 밖으로 도망쳤답니다.”(창세 39,17-18)
기가 막힌 거짓말입니다. 요셉의 주인이 요셉을 아무리 신임한다지만 요셉은 종입니다. 요셉이 감옥에 갇히게 됩니다. 요셉의 죄는 사형 받아 마땅한 죄였습니다. 보통은 내가 하느님 섬기고 있는데, 바른 일을 했는데도 어처구니없는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혔구나. 하고 흔들일 수 있습니다. 그래도 요셉은 흔들리지 않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 하면서 억울하게 당하고 그 이유를 이해할 수 없을 때에도, 그 부당한 일 안에 하느님의 섭리가 있고, 그 섭리가 나에게 작용하리라는 것을 믿고 견뎌내야 합니다. 요셉이 바로 그렇게 살았습니다.
요셉은 꿈을 해몽하는 재주가 있었습니다. 꿈을 해몽하다가 형제간에 미움 받았습니다. 파라오가 꿈을 꾸었는데, ~~~~(생략) 요셉이 꿈의 내용을 해몽해 줍니다. 7년간 풍년 들고, 그 후로 7년간 기근이 들 것이니 풍년 들 때 식량을 잘 저장해서 기근을 이겨내야 한다고 해몽합니다. 파라오가 전권을 요셉에게 줍니다. “이제 내가 이집트 온 땅을 그대 손 아래 두오.”(창세 41, 41) 요셉은 종으로 팔려가서 이집트의 재상이 된 것입니다. 요셉은 풍년이 들 때마다 식량창고에 식량을 비축합니다. 경제운용에 훌륭한 재능이 있었습니다. 이집트는 요셉 덕에 부자가 됩니다. 기근이 들었습니다. “모든 나라에 기근이 들었지만, 이집트 온 땅에는 빵이 있었다. 이집트 온 땅에 기근이 들자, 백성이 파라오에게 빵을 달라고 부르짖었다. ..온 세상은 요셉에게 곡식을 사려고 이집트로 몰려들었다.” (창세 41, 54- 57) 이제 사람들이 굶어죽느냐 마느냐는 요셉 손에 달려있습니다. 기근이 가나안 땅에도 밀려옵니다. 야곱이 자식들을 이집트로 보냅니다. “그래서 요셉의 형 열 명이 이집트에서 곡식을 사려고 내려갔다. ”(창세 42, 3) 막내 벤야민만 두고 형 열명이 이집트로 갑니다.
“요셉은 형들을 알아보았지만, 형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였던 것이다.”(창세 42,8) 물론 형들은 노예로 팔아먹은 요셉이 이집트의 재상이 되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남한테 해코지 한 사람은 자기가 해코지한 것을 잊어버립니다. 하지만 당한 사람은 못 잊습니다. 남의 가슴에 못을 박아놓고, 나중에 “그 때 미안했다. 모르고 했다”라는 한마디로 끝내버릴 수 있지만.. 정작 해코지를 당한 사람은 가슴에 피멍이 든다. 형들은 요셉을 노예로 팔아먹고도, 그저 죽었겠지 생각하고 죄책감도 없는 겁니다. 그렇지만 요셉은 그 형들을 기억합니다. 형님들을 만나서 반가웠지만 먼저 해결해야할 문제가 있습니다. 형들이 자기들의 과오를 인정하고 반성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셉은 형들에게 억지소리를 함. “너희는 이 땅의 약한 곳을 살피러 온 자들이다.” (창세 42, 9) 이집트는 강한 나라이지만 외부침략. 간첩에 대해 신경 많이 써야했습니다. “ 그리고 나서 그들을 사흘 동안 감옥에 가두었다.”(창세 42,17) 예수님이 돌아가신지 사흘만에 부활하셨습니다. 사흘이 의미하는 것은 새로운 상태로 바뀌어지는 시점입니다. 사흘은 어떤 일의 충분한 기간을 의미합니다. 아브라함이 이사악을 제물로 바치러 가는 길이 사흘 길이었습니다. 요셉의 형들을 사흘간 가두었다는 뜻은 충분한 시간동안 반성하라는 뜻입니다.
요셉으로부터 핍박을 받으면서 르우벤이 반성합니다.
“그러자 르우벤이 그들에게 말하였다. ”그러기에 내가 ‘그 아이에게 잘못을 저지르지 말라.’라고 너희에게 말하지 않았더냐? 그런데도 너희는 말을 듣지 않더니, 이제 우리가 그 아이의 피에 대한 책임을 지게 되었다.“(창세 42,22)
자기들이 절대적인 위기에 처하니까, 잘못했던 것을 뉘우치게 됩니다. 진실한 회개와 고백을 통해 진정한 화해를 할 수 있는 준비가 됩니다. 세상 사람들은 세월이 흐르면 자신들의 죄가 잊혀질 줄 압니다. 그런데 잊혀지지 않고 묘하게 불거집니다. 그것이 하느님의 뜻입니다. 잘못된 죄의 상태가 그 공동체 안에 유지되는 한, 갈등이 계속되고, 분열, 미움 증오 시기 질투가 계속될 것이므로, 그것이 치유되고 화해되기 위해서 그 죄가 드러나게 됩니다. 그 죄에 대한 회개와 반성이 있을 때 참다운 화해, 용서가 이루어집니다. 5.18이 지나고 그 때의 학살자들을 죽여라 하지 않고, 그 죄만 인정하고 반성하고 진실만 밝혀라고 요구했습니다. 이제 그 당시 잘못을 저지를 사람들은 입도 벙긋하지 않지만 밝힐 것은 다 밝혀졌습니다. 그것이 하느님의 뜻입니다. 우리들 공동체 안에서 , 우리 삶 안에서, 내가 죄를 짓고 나만 입 다물면 될 것 같지만, 하늘이 알고 땅이 알고, 어차피 밝혀지게 되어 있습니다.
요셉은 식량을 내주면서 막둥이를 데려오라고 이야기합니다. 형들은 아버지 야곱을설득해서 어렵게 데려옵니다. 예전에는 요셉이 막내였습니다. 그러다 시기를 사서 노예로 팔렸습니다. 요셉이 야곱의 사랑을 받는 막내, 벤야민으로 형들을 시험하는 것입니다. 형제들을 도둑으로 몰아서, 사형을 시켜야 하겠지만 대신 벤야민을 종으로 두고가라고 명령합니다. 유다가 나서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니 이제 이 종이 저 아이 대신 나리의 종으로 여기에 머무르고, 저 아이는 형들과 함께 올라가게 해 주십시오.”(창세 44,33)
예전 같으면 자기 살려고 벤야민을 두고 가나안으로 돌아가서, 아버지 야곱한테 벤야민의 손버릇이 나빠서 재상의 재산을 훔치다가 잡혔고, 우리만 간신히 살아왔다고 거짓말을 했을 텐데, 그렇지 않고 대신 남겠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진심으로 회개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유다가 자기희생을 하는 것입니다. 자기희생이 있을 때 용서와 화해의 길이 열리는 것입니다. 이 말을 듣고서야 요셉도 형들이 온전히 새사람이 되었구나 하는 것을 알고 형들을 끌어안습니다.
“저를 이곳으로 팔아넘겼다고 해서 괴로워하지도, 자신에게 화를 내지도 마십시오, 우리 목숨을 살리시려고 하느님께서는 나를 여러분보다 앞서 보내신 것입니다.”(창세 45,5)
형들이 잘못 안했다는 말은 아닙니다. 그 안에 하느님의 뜻이 들어있다고 말한 것입니다.
“그러니 나를 이곳으로 보낸 것은 여러분이 아니라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께서 나를 파라오의 아버지로, 그의 온 집안의 주인으로, 그리고 이집트 온 땅의 통치자로 세우셨습니다.”(창세 45,8)
형들은 인간적으로 이런 짓을 해서 나를 노예로 팔아먹었지만 나를 통해 모두가 다 살아나고, 생명을 이어가라고 하신 것입니다. 하느님은 인간이 저지른 악에서조차 선한 일을 이끌어내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어떨 때 정말 억울한 일을 당할지라도, 그 일이 이해가 되지 않을 때에도 인간적인 대응을 하기 보다는 하느님의 섭리가 무엇인가를 생각해봐야 합니다. 이렇게 억울한데, 그렇지만 내가 떳떳하다면, 그 안에 하느님의 섭리가 드러날 것이라는 것을 믿고, 확신할 때, 내 신앙이 참된 신앙으로 승화될 수 있습니다. 그 점을 요셉을 통해 배울 수 있습니다. 살면서 많은 경우에 하느님을 원망할 수 있지만. 괴롭힌 사람을 원망할 수 있지만, 더 큰 것은 어떤 처지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이 나한테 이렇게 하시는 것은 나를 통해 더 큰 선한 일을 이끌어내시리라는 것을 믿어야합니다. 그러면 어떤 처지에서도 우리는 하느님께 감사드릴 수 있습니다. 이것을 요셉의 이야기를 통해 알 수 있어야 합니다.
요셉이 형제들과 화해하고, 아버지 모시고 와서 잘 살자고 이집트로 이주하라고 합니다. 야곱이 그 제안을 받고 고향땅을 떠나려니 마음이 아팠습니다. 아무리 자식이 잘되었다고.. 미국에 사는 잘된 자식이 오라고 하면 갑갑합니다. 야곱이 떠나기 전에 하느님께 제사를 드리니. 하느님께서 말씀하셨다. ”나는 하느님, 네 아버지의 하느님이다. 이집트로 내려가는 것을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그곳에서 너를 큰 민족으로 만들어 주겠다. “(창세 46,3) 하느님이 당신 자존심을 걸고 약속을 하십니다.
“나도 너와 함께 이집트로 내려가겠다. 그리고 내가 그곳에서 너를 다시 데리고 올라오겠다. 요셉의 손이 네 눈을 감겨 줄 것이다.” 그리하여 야곱은 브에르 세바를 떠났다.“(창세 45,4)
하느님께서는 세상에 우리들만 보내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우리가 베텔에서만 머무를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삶의 장소에 하느님이 계십니다.
야곱은 고향으로 돌아갈 때(출애굽)가 되면 하느님이 인도해주실 것이라는 것을 약속을 받습니다.
요셉이 110살까지 살았습니다. 그 당시 인간이 충분히 장수를 누리는 것이 110살이었습니다. 요셉이 유언을 합니다.
“요셉이 자기 형제들에게 말하였다. ”나는 이제 죽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반드시 여러분을 다시 찾아오셔서, 여러분을 이 땅에서 이끌어 내시어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에게 맹세하신 땅으로 데리고 올라가실 것입니다.“(창세 50, 24)
야곱이 하느님께 받은 약속을 요셉이 유언으로 자손들에게 남깁니다.
이것을 통해 하느님의 땅에 대한 약속을 상기시킵니다. 출애굽 후에, 모세와 여호수아에 의해 가나안 땅을 정복하고, 다윗왕 시대에 이르러서야. 나일강에서 유프라테스강까지의 땅을 주겠다는 하느님의 약속이 실현됩니다.
이것으로 족장사가 끝납니다. 요셉의 이야기로 창세기와 탈출기가 연결이 됩니다. 요셉 일가는 이제 이집트에 와 있습니다. 출애굽이 필요한 이유가 설명되었습니다. 부족들의 조상들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 요셉. 그 분들이 한 민족의 조상이 됩니다. 성조사와 민족사가 연결이 되는 부분입니다.
다음 시간에는 민족사가 시작되는 탈출기를 배웁니다. 하느님의 약속이 점점 성취됩니다. 그러한 하느님의 구원의 역사는, 신약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오심으로서 완성이 됩니다.
시몬 신부님 말씀:
배운 후에 성경을 다시 한 번 읽어야 축복이 될 것입니다. 성경만큼 큰 영성의 샘은 없습니다...... 어떻게 하느님과 싸울 수 있나? 하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 싸움은 선의의 싸움이었습니다...... (자료는 아쉽지만 여기서 끊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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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곱과 요셉의 이야기를 정리하면서 찾아 본 성경구절입니다.
제가 지켜본 어떤 가슴 아픈 일을 요셉의 이야기와 연관지어 생각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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