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지혜의 샘/김양진 선생님의 성경교실

7. 아브라함의 선택과 소명

김레지나 2008. 8. 28. 18:48

성경교실(구약) : 자료 -07


아브라함의 선택과 소명


* 성조사 (聖祖史)

 창세기 12장부터 50장까지를 성조사(聖祖史) 또는 족장사(族長史)라고 한다. 성조(聖祖)란 ‘으뜸가는 아버지’, ‘두복’, ‘조상’, ‘족장’을 가리키는 말로 성경에서는 이스라엘 민족의 으뜸 조상을 가리킨다. 보통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이스라엘) 등을 성조로 꼽지만, 때로는 요셉 등 야곱의 열두 아들들을 포함시키기도 한다.


* 아브람이 부르심을 받다.

- 하느님의 명령 : “떠나라”

  당장에 극적인 결정을 내리고 실행에 옮기라는 요구.

- 하느님의 약속 : “장차 이루어 주겠다.”

  언제 이루어질지, 반드시 이루어질지 알수 없는 불확실하기 짝이 없는 미래.


  신앙은 인간이 자발적으로 하느님께 자기를 바치는 행위이다. 그것은 하느님은 약속에 충실하신 분이라는 믿음을 바탕으로 비록 끝이 보이지 않더라도 하느님만을 의지하고 그분의 뜻을 따르는 의지적 행위인 것이다.


* 멜키체덱의 축복과 아브람의 십일조 봉헌

  아브라함의 후손인 다윗 왕조가 받을 축복을 미리 보여주고 있으며, 또한 아브라함의 후손들이 예루살렘의 사제들에게 또 다윗 왕에게 십일조를 바치는 기원을 말해주고 있다. 후대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멜키체텍을 메시아의 한 형태로 보았다 (시편 110). 또한 멜키체덱은 영원한 사제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로 간주하고 있다.(히브 7,16-17)


* 하느님께서 아브람과 계약을 맺으시다.

 - ‘믿다’(히브리어 amen) 는 원래 ‘의지하다’, 또는 ‘신뢰하다.’는 뜻. 아브람의 믿음은, 하느님의 본질에 대한 추상적인 진리를 대상으로 하는 믿음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자기에게 약속하신 것이 그대로 이루어지리라는 믿음이다.

- 하느님과 아브람과의 계약은 ‘약속’과 ‘성취’로 나타난다.

- 하느님께서 맺어주시는 계약은 조건 없는 선물이다. 그래서 하느님과의 계약을 ‘은총의 계약’(恩約) 이라고 말한다.


* 아브라함과 사라의 이름

- ‘아브람’(Abram = 고귀한 아버지)은 아브라함(Abraham= 많은 민족들의 아버지)으로, 즉 한 부족의 족장에서 많은 민족의 아버지로 그의 운명이 바뀐다.

- ‘사라이(Sarai=왕후, 귀부인)는 사라(Sarah=모든 민족들의 어머니)로, 즉 한 족장의 아내에서 모든 민족의 어머니로 그의 운명이 바뀐다.


 아브라함의 여정 (지도 그림) -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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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음 주 주게 : 믿는 모든 사람의 조상, 아브라함

* 읽어야 할 성경 : 창세 18장 - 25장

* 성경 구절 쓰기 : 창세 18,23-26 : 22,1-2 ; 22,7-8 ; 22,12 ; 22,1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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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양진 선생님의 성경 강의 요약)


(이번 주에는 생각이 많아서..제가 수업 중에 잠깐씩 헛생각을 해서 부분 부분 못 받아적었습니다. 또 받아적는데 좀 게으름을 피웠거든요..캠코더 녹음도 못했구요.. 간단히 정리힐께요. 전처럼 자세히, 꼴 갖추어 정리 못합니다. 시간 여유가 없어서요..^^ 이해해주셈. 이번에는 틀린 부분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지적해주세용.)


하느님이 한 민족을 선택하셨습니다. 그 민족의 시조 이야기를 성조사, 족장사라고 합니다.


아브라함의 조상은 우르지방에서 하란으로 이주해서 살았습니다. 그 지역은 기름진 초생달, 비옥한 반달지역이라고 불리우는 초원지대였습니다. 유프라테스, 요르단강, 나일강을 중심으로 하는 지역입니다. 우르와 하란 지방은 경제적으로 발달되었고, 바벨탑의 모형인 지구라트가 우르지방에 많이 있습니다. 또 무역이 활발하고 풍요로운 삶을 살 수 있는 지방이었고, 그 지방 사람들은 여러 신들을 섬겼습니다.


우르와 하란의 수호신은 달신 (月神), Sin, 마르둑신, 다산의 신... 등 입니다.

당연히 아브라함의 조상들은 우상을 섬겼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집트에서 탈출할 때

“그러자 여호수아가 온 백성에게 말하였다. ”주 이스라엘의 하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옛날에 아브라함의 아버지이며 나호르의 아버지인 테라를 비롯한 너희 조상들은 강 건너편에 살면서 다른 신들을 섬겼다. 그런데 나는 너희 조상 아브라함을 강 건너편에서 데려다가, 온 가나안 땅을 돌아다니게 하고 그의 후손들을 번성하게 하였다.)..(여호수아 24,2) 

라고 했습니다.


<하느님의 부르심>

아브라함은 우상을 섬기는 환경에서 자라서 하란에 정착해서 살았습니다. 그런 아브라함에게 하느님의 부르심이 있었습니다.

네 고향과 친족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너에게 보여 줄 땅으로 가거라.”(창세 12,1-2)

하느님의 말씀은 부탁이라기 보다는 명령에 가깝습니다. “떠나라”는 말씀은 즉각적인 실행을 요구합니다. 이행하기 쉬운 명령 같지만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편안하고 안정된 터전을 두고 떠나라고 하면 모험을 해야합니다.

하느님은 약속해주십니다.

나는 너를 큰 민족이 되게 하고, 너에게 복을 내리며, 너의 이름을 떨치게 하겠다. 세상의 모든 종족들이 너를 통하여 복을 받을 것이다.” (창세 12,1-2)

하느님께서는 언제 어떻게 해주시겠다는 구체적인 약속을 하지 않으십니다.

아브라함의 미래는 여전히 불확실합니다.


<아브람의 순종>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브람은 주님께서 이르신 대로 길을 떠났다.”(창 12,4)

아브람은 모험을 한 것입니다. 요즘 같으면 다른 곳으로 이사가서 살기가 그렇게 어렵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당시는 고향, 친척, 아버지 집을 떠나,, 안정된 삶의 터전을 떠나면 천막을 치고 유랑을 해야 했습니다. 게다가 가족, 가축들도 끌고 다녀야 했습니다. 또 다른 지방에 살던 부족들의 공격을 받을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니 살던 곳을 떠나는 것은 목숨까지 걸어야 하는 위험한 모험이었습니다.

요즘 우리들은 안락하고 평안하게 사는 것을 삶의 목표로 삼습니다. 돈을 모아서, 전셋집을 늘리고, 내 집을 마련하고, 좀 더 풍족한 생활을 하고,, 호화로운 생활을 꿈꾸고..

하지만 우리 신앙인들은 하느님의 부르심이 있으면 모든 것을 훌훌 털고 떠날 수 있어야 합니다. 신앙인은 나그네입니다. ‘신앙인은 떠나는 사람’ 입니다.

그러므로 하늘에 보물을 쌓아라. 거기에서는 좀도 녹도 망가뜨리지 못하고, 도둑들이 뚫고 들어오지도 못하며 훔쳐 가지도 못한다.사실 너의 보물이 있는 곳에 너의 마음도 있다.” (마태 6, 20 - 21)

우리 신앙인들은 복을 하늘에 쌓기 위해서 세속적인 것들을 훌훌 털고 떠날 수 있어야 합니다.

아브람은 어떤 일이 닥칠지 모르지만 하느님의 말씀이니까 믿고 떠났습니다. 하느님의 막연한 약속을 믿고서..

신앙은 인간이 자발적으로 하느님께 자기를 바치는 행위  라는 것을 아브람의 이야기를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아브람의 가나안 도착>

하란에서 가나안까지는 800km 쯤 됩니다. 그 먼길을 간 후에야 하느님께서 ‘너에게 보여줄 땅이 여기다“라고 가르쳐주십니다. ”내가 이 땅을 너의 후손에게 주겠다.“(창 12,7)

이 때 하느님의 말씀을 보통 사람으로서는 뻥이 심하다고 생각할 만 합니다. 왜냐면.. 가나안 땅은 그 당시에 이미 여러 부족들이 영토다툼하며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 땅을 어떻게 아브람에게 주겠다는 건지 의아해 할 수 있습니다. 게다가 아브람은 자식도 없었는데, 하란을 떠날 땅시 이미 75세였는데.... 아브람에게는 땅 한 조각도 없고 아들도 없는데 ,, 하느님께서 후손들에게 그 땅을 주겠다는 말씀을 하시니 아브람은 제대로 못 알아 들었습니다. 아브람은 정착을 못하고 계속 떠돌이 생활을 합니다.

스켐 - 베델 -네겜 -이집트

이집트 -네겝 -베델 -헤브론 로....

아브람은 유랑을 통해 한가지 깨달았습니다.

하느님은 절대로 서두르지 않으시구나. 하느님 말씀을 따르려면 인내와 끈기가 필요하구나.” 하는 것을 배웠습니다.

하느님이 인간에게 뭘 주시겠다고 하면 당장 그렇게 하시겠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이집트로 간 아브람>

“그래서 아브람은 나그네 살이 하려고 이집트로 내려갔다. 그 땅에 든 기근이 심하였기 때문이다. 이집트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 , 그는 자기 아내 사라이에게 말하였다. ”여보, 나는 당신이 아름다운 여인임을 잘 알고 있고. 이집트인들이 당신을 보면, ‘이 여자는 저자의 아내다.’ 하면서, 나는 죽이고 당신은 살려 둘 것이오. 그러니 당신은 내 누이라고 하시도. 그래서 당신 덕분에 내가 잘되고, 도 당신 덕택에 내 목숨을 지킬 수 있게 해 주시오.“ (창세 12장 10)

아브람은 거짓말로 아내와 공모를 합니다.

이 부분은 아브람이 사기꾼이고 거짓말쟁이라는 말을 하려고 쓰여지지 않았습니다.

이 이야기의 주체는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께서 누구를 선택해서 당신의 계획을 이루어 가는데 그 선택된 인간의 약점에도 불구하고 당신 계획을 이루어 가신다는 말을 하고 있는 겁니다.

하느님의 선택은 오직 하느님의 은총 입니다.


<롯이 분가하다.>

땅이 아브람과 롯이 같이 살기에는 좁았습니다. 아브람이 “온 땅이 네 앞에 내 앞에 펼쳐져 있지 않느냐? 내게서 갈라져 나가라. 네가 왼쪽으로 가면 나는 오른쪽으로 가고, 네가 오른쪽으로 가면 나는 왼쪽으로 가겠다.”(창세 13,9)


<분쟁의 평화적 해결>

아브람은 롯의 손위삼촌이고 부족장이었으니 땅의 선택권이 있었을 텐데.. 아브람은 땅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 기득권을 포기합니다. 롯에게 먼저 선택권을 줍니다. 아브람은 개인적 이익을 포기하고 손아래 조카 롯에게 우선권을 줍니다.  그래서 롯은 비옥한 초원을 차지합니다. 아브람은 사막, 광야를 차지합니다.

우리나라는 남북으로 나뉘어진 비극적인 상황에 있습니다. 전쟁 위협이 끝나지 않았습니다. 2002년 미국의 북폭계획이 있었습니다..00000에서(헛생각을 잠시 했더니.못 썼네요..) . 한국에서 전쟁이 난다고 가정하고 시나리오를 발표했습니다. 그에 따르면 미군 사상자 7000명 이상, 한국군 50만명 이상, 민간인 사상자 추계 불가능... 우리나라에서 전쟁이 일어나면 북한만 폭파되고 끝나는 게 아닙니다. 남과 북이 동시에 재기불능상태로 파괴됩니다. 6.25와는 전쟁양상이 다릅니다. 아브람 할아버지한테 분쟁해결방법으로 양보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우리가 잘 살면  도와주고, 손해본다고 생각해야 하고, 인내와 끈기를 갖고 평화적으로 해결해야 합니다.

만약 아브람과 롯이 땅을 두고 다투었더라면 이스라엘 민족이 성립되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아브람과 멜키체덱>

부족들끼리 전쟁이 나서 롯이 포로로 잡혀갑니다. (여기서도 잠시 헛생각을 했습니다. 여러 부분 불완전합니다. 죄송^^)

“아브람이 ..... 살렘 임금 멜키체덱도 빵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왔다. 그는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의 사제였다.” 멜키체덱은 임금이면서 사제였습니다. 당시는 제정일치 시대였으니...

 이방 사제인 멜키체덱이 아브람에게 하느님의 이름으로 축복을 주니, 아브람은 재산의 십분의 일을 줍니다. 아브람은 자기 소유 땅이 없이 옮겨다녔습니다. 나중에 다윗왕이 팔레스티나... 가나안 땅?을 통합하고.. 수도를 예루살렘으로 정합니다. 아브람이 이미 예루살렘의 왕과 사제인 멜키체덱에게 축복을 받았고 십일조을 바쳤기에.. 다윗왕도 십일조를 바칩니다. 성경이 쓰여질 당시에 행해지고 있던 십일조를 과거 아브람의 이야기에서 확인하는 과정입니다.

구약에서는 멜키체덱을 메시아의 한 형태로 보았습니다. “너는 멜키체덱과 같이 영원한 사제다.” (시편 110)

신약에서는 멜키체덱을 예수그리스도의 예표로 보았습니다.

그분께서는 육적인 혈통과 관련된 율법 규정이 아니라, 불멸하는 힘에 따라 사제가 되셨습니다.“너는 멜키체덱과 같이 영원한 사제다...........”(히브리서 7,16,-17)

사제서품식 때 제대 앞에 “너희는 멜케체덱의 품위를 따라 영원한 사제이니라.” 라고 적힌 플랭카드가 걸립니다. 예수님은 이스라엘 백성 뿐만 아니라 온 인류에게 축복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이부분 좀 더 설명을 듣고 싶은데...제가 헛생각했더니...제대로 이해가 안됩니다. 예수님의 예표라는 설명이... 멜키체덱이 이방인 사제였기 때문에.. ????김양진 선생님께 여쭤봐야겠습니다.- )

“예수님께서는 멜키체덱과 같은 영원한 대사제가 되시어, 우리를 위하여 선구자로 그곳에 들어가셨습니다.” (히브 6, 20)



<아브람과 계약을 맺으시다.>

아브람이 주님을 믿으니, 주님께서 그 믿음을 의로움으로 인정해 주셨다.”

믿다 라는 말은 히브리말로 “Amen"입니다. 성경에서 ‘믿다’라는 말이 처음으로 나옵니다. 하느님을 신뢰하고 의지하지 않으면 기도할 의미가 없습니다. 하느님에 대한 믿음을 표현한 최초의 인물이 아브람입니다.

의로움으로 인정하였다.” 라는 말은 “제사가 유효하게 거행되었다” 라는 말입니다.

(유교에서는 제사 때 상차림부터 따집니다. 격식을 따지다보면 상차릴 때부터 의견충돌이 있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런 격식이 제대로 되었다고 제사가 유효한 것은 아닙니다. 제사 드리는 자식들이 올바른 마음자세를 갖추어야 제사가 유효하게 거행될 수 있습니다. 제사상을 격식에 맞추어 차렸다고 해도 형제간에 싸우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형제간의 우애, 화목이 제일가는 제사이고 효도입니다. )

우리가 미사에 참석하는 것도 하느님께 제사 바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하느님께 바치는 참된 제사는 올바른 믿음의 자세 입니다. 하느님께서 어떤 분이신지 알려고 하기보다는 출석체크만 하려고 미사에 나온다면 부족한 믿음을 갖고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출석부르시는 분으로,, 내가 만든 기준대로,, 내가 이렇게 미사참례를 하니.. 이 세상과 저 세상에서 보상해주어야한다..라고 생각하면 안됩니다., 심하면 하느님을 종부리듯이 하기도 합니다.

이웃간에 부족하면 채워 주고, 힘들면 어깨동무 해주는 것이 진짜 하느님께 제사지내는 것입니다. 진정한 제사의 의미를 성경에서 깨달아야 합니다.



<하느님의 약속과 성취>

네가 셀 수 있거든 저 별들을 세어 보아라. 너의 후손이 저렇게 많아질 것이다.” (창 15,5)

그러나 이스라엘 자손들은 자식을 많이 낳고 늘어만 갔다. 그들은 번성하고 더욱 더 강해졌다. 그리하여 그 땅이 이스라엘 자손들로 가득 찼다.” (탈출 1,7)

나는 이집트 강에서 큰 강 곧 유프라테스 강까지 이르는 이 땅을 너의 후손에게 준다. ‘ (창세 15, 18)

하느님과 아브람이 그 계약을 맺을 당시에 아브람에게는 땅도 없었고, 자식도 없어Ttqmsl다. 하지만 다윗왕 시대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그 약속이 이루어집니다. 다윗왕 시대의 이스라엘 영토가 나일강에서 유프라테스 강까지입니다.



<계약의 조인>

해가 지고 어둠이 깔리자, 연기 뿜은 화덕과 타오르는 횃불이 그 쪼개 놓은 짐승들 사이로 지나갔다. ” (창세 15,17)

하느님을 인간이 볼 수 없도록,, 밤에 ..

지금도 사막에 사는 베드윈 족은 이런 식으로 계약을 맺습니다. 한 쪽이 계약을 어기면 쪼개 놓은 짐승신세가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느님은 인감도장을 횃불로 찍으신 겁니다.

그런데 아브람이 도장 찍었다는 말이 나오지 않습니다. 원래 쌍방 도장이 없으면 계약은 무효입니다.

하지만 하느님과 인간은 동등한 자격이 없습니다. 그렇기에 아브람의 도장 없음.

모든 것은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거저 베푸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이 계약을 안 지키면 그만이지만 하느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시겠다는 뜻으로 계약을 조인하십니다. 인간이 그 계약을 안 지키고 은총을 못 받을 수는 있지만 하느님은 그 계약을 깨뜨릴 수 없다는 뜻으로 ..... 조인하신 것비낟.

하느님께서는 이 조약을 깨드리면 내가 쪼개진 짐승처럼 되겠다.. 당신 약속에 어떤 일이 있어도 충실하겠다는 말씀을 하신 겁니다. 그래서 은총의 계약, 은약 이라고 합니다.



<계약에 따른 의무>

나는 전능한 하느님이다. 너는 내 앞에서 살아가며 흠 없는 이가 되어라. 나는 나와 너 사이에 계약을 세우고, 너를 크게 번성하게 하겠다.”(창 17,1)

흠없는 삶이란.. 하느님 곁에서 하느님의 뜻을 받들려는 삶 입니다.

“너희는  포피를 베어 할례를 받아야 한다. 이것이 나와 너희 사이에 세운 계약의 표징이다. 대대로 너희 가운데 모든 남자는 난 지 여드레 만에 할례를 받아야 한다.” ( 창 17,11)

할례를 그 시대, 고대 중동 지방의 성인식이었습니다. 그런데 태어난 지 여드레만에 할례를 받게 합니다. 할례는 이스라엘 민족의 구성원이 되는 것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신앙의 일원이 되는 것을 의미하게 되었습니다. 하느님께 충실하라는, 하느님 앞에서 흠없이 살라는 것을 언제나 상기하라고 할례를 명령하십니다.

(시몬신부님 저번주 평일미사 강론 때 하셨던 말씀 - 당시에 더운 사막지방에서 물도 부족한데 할례를 받지 않아서 건강에 많은 문제가 생겼다. 그래서 할례를 받도록 아예 법으로 정해놓은 것이다. 그런데 그런 의미는 잊어버리고, 초대교회에서 이방인들에게도 할례를 받게 해야한다고 논쟁이 일어났다. 마치 그런 형식이 신앙의 중요한 행위인 것 것처럼... 하지만 이방인들에게는 그런 의무를 지우지 않기로 사도들끼리 결정했다......... 형식을 따지면서 사랑이 부족하게 되기 쉽다는 요지의 말씀이셨는데,,, 기억도 가물가물하고, 신부님의 훌륭한 강론말씀 그대로 옮길 자신이 없어서 여기서 왕창 줄입니다.


<하느님께 영구히 충실하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느님께 충실하라는 할례의 의미를 잊어버리고 ,, 세월이 지나면서 일종의 구원의 부적처럼 할례를 생각하게 됩니다. 할례만 받으면 하느님의 자녀로 충실한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날에 내가 몸의 할례만 받은 자들을 모두 징벌하겠다. 그들은 곧 이집트와 유다와 에돔과 암몬 자손들과 모압과, 관자놀이의 머리를 민, 광야에 사는 자들 모두이다. 이 모든 민족들은 할례를 받지 않았고, 이스라엘 온 집안도 마음으로 할례를 받지 않았기 때문이다.‘ (예레 9,24 -25)

<마음의 할례>--우리가 성당에 잘 다닌다고 해서 바로 흠없는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기심, 시기심, 질투를 잘라내버리지 않으면 벌 받습니다.


<아브라함과 사라- 새이름>

“너는 더 이상 아브람이라 불리지 않을 것이다. 이제 너의 이름은 아브라함이다. 내가 너를많은 민족들의 아버지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창세 17,5)

이름이 바뀌면 운명이 바뀝니다. 이름이 바뀜으로서 한 부족에게만 복을 빌어주는 것이 아니라 온 인류를 위해서 복을 빌어주는 존재로 바뀝니다.

<세례성사와 세례명>

신약에서의 할례는 세례성사입니다. 우리는 세례 때 세례명을 받고, 새 이름을 갖습니다. 우리가 세례를 받았다고 해서 천국행 티켓을 거머쥐었다고 안심할 일은 아닙니다.

세례를 통해서 마음은 씻지 않고 이마에 땀만 씻어버린 건 아닌지, 세례를 부적처럼 생각하지는 않는지 생각해봐야 합니다. 세례만 받았다고 해서 그리스도 신자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구원을 의지할 수 있는 하느님, 예수님이 하느님을 우리의 아버지라고 하셨습니다. 하느님은 무서운 분이 아니십니다.... (여기 부분도 잠시 못들었습니다...)

형제 자매들 중 누군가가 울면 나도 함께 슬퍼해줄 줄 알아야하고, 누군가가 기뻐하면 나도 함께 기뻐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럴 수 있어야 진정한 세례를 받은 자가 됩니다.

삶의 자세를 바꾸어야 참신앙인이 되는 것입니다.

내 고집대로 살려고 하면, 나를 꺾으려는 사람을 주먹으로 제압해야 합니다. 그러나 세례를 받고 새 이름을 갖게 되면 그렇게 살면 안됩니다. 하느님께서 그 사람을 어떻게 대하라고 하는지 한 번 더 들어보고 생각해 보아야합니다. 세례를 받더니 예전과 달라졌다는 말을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도 부족합니다. 매일 매일 그렇게 살아가도록 노력해야합니다. 그런 실천적인 노력이 없으면 성경공부를 아무리 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아브람이 선택을 받은 이유>

아브람의 조상은 다른 이방신을 섬겼습니다. 그런 환경에서 자란 아브람이 훌륭한 이유는 하느님의 부르심이 있자 바로 순종했기 때문입니다. 순종하는 것을 보시고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을 훌륭한 사람이 되도록 이끌어주셨습니다.

성경강의를 하는 저나, 본당 신부님, 수녀님,,, 모두 다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으셨기에 사목을 하고 계십니다. 우리 신앙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들이 남들보다 잘나고 똑똑해서 하느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게 아닙니다. 흠없는 삶을 살도록,, ,,, 하느님의 도구로 쓰려고 나를 부르셨구나. 하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시몬신부님 말씀>

흔히 사람들은 인격을 갖추었다는 표현을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인격 말고도 영성이 있다고 말합니다. 인격은 있으면서 영성이 없다면 하느님의 사람은 아닙니다.

참된 영성은 성경으로부터 나옵니다. 성경공부가 사실 영성수련입니다.

어떤 사람은 성경박사이면서도 영성이 없기도 합니다. 성경을 내 지식을 쌓기 위해서, 자기의 교만함을 드러내기 위해서 공부하면 그렇게 됩니다.

영성을 키우려고 성경을 배우는 모습이라야 아름답습니다.

영성이 있는 사람들은 그 영성이 얼굴에 드러나게 마련입니다. ...........


<레지나 생각>

******* 김양진 선생님 강의를 들으면 정말 좋습니다. 훌륭한 강의 준비하시고, 열정을 다하시면서도 당신을 과시하지 않으시고, 드러내시지 않으시니 존경스러울 따름입니당. 시몬 신부님 말씀에 의하면 영성이 있는 사람들은 그 영성이 얼굴에 드러난다지요? 김양진 선생님의 표정과 말씀에서 ‘참신앙인’의 영성을 읽을 수 있습니다.^^*  고맙습니다. *******


( 전국적으로 유명한 강의하시는 분들, 특히 영적인 능력이 뛰어나다는 분들 강의를 들어보면 하느님보다는 자신을 드러내는 분들이 간혹 계십니다. 걱정되고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리고 영적인 교만을 갖고, 그 교만을 여과 없이 드러내고, 과장된 거짓말을 하기도 하고, 다른 사람의 추앙을 받는 것을 즐기는 것 같은 분들도 있습니다. 어떤 강의든 듣는 것은 좋으나 분별있게 듣는 지혜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표징이나 감각적인 체험만을 쫓아서 신앙생활을 하면 그런 체험을 갖도록 마귀가 돕는다고 합니다. 하느님을 만나는 길은 그런 별난 체험이 아니라 ‘말씀’과 ‘이웃사랑’ 안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말씀 안에 계시된 하느님의 사랑을 마음으로 깨닫고, 그 사랑으로 이웃을 그리스도의 지체로 볼 수 있어야 하겠지요. 마더 데레사 수녀님이 시궁창에서 구더기가 끓고 있는 사람을 건져내서 그 몸을 닦으면서 말씀하셨다지요. “나는 지금 그리스도의 몸을 닦고 있습니다.” 라구요.. 부족하기만한 저도 성경공부를 열심히 해서 영성을 갖추고, 이웃에게 그 영성을 드러낼 수 있는 참 신앙인이 되기를 간절히 바라고 기도합니다.)

(성경공부를 하는 것은 교만에 빠질 위험이 적어서 좋습니다. 김양진 선생님의 성경강의를 들으면서 말씀의 의미를 새기고, 맛들일 수 있어서 너무 좋습니다. 구절 구절에서 늘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깨우쳐주시니 더더욱 좋습니다. 사실 영적인 체험이나, 신앙생활을 얼마나 오래 했는지.. . 얼마나 많이 아는지.. 하는 것들은 하느님 앞에서 중요하지 않는 일이지요. 하느님께서는 당신 이름으로 마귀를 쫓고, 기적을 행했다고 하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모른다 하리라 고 하셨습니다. 이번 강의도 그런 맥락에서 다시금 제 삶을 성찰하게 합니다. 진정한 세례를 받은 참 신앙인으로서 살고 있는지. 사랑을 실천하고 있는지... 부끄러워집니다.)

성경에 우리들이 신앙인으로서 배워야 할 내용들이 구절구절 들어있다는 사실이 놀랍습니다. 매 번 성령의 감도에 의해서 쓰여진 말씀이라는 것을 확실히 알게 됩니다.  매일 매일 성경말씀을 가까이 하고, 성경공부를 하고, 기도하고, 묵상하면서 제 영성을 키우도록 노력해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