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지혜의 샘/김양진 선생님의 성경교실

6. 하느님의 곁을 떠난 인간의 처지

김레지나 2008. 8. 28. 18:45

성경교실(구약) : 자료 - 06


하느님 곁을 떠난 인간의 처지


* 창세기 4장 ~ 11장의 핵심

 하느님 곁을 떠난 인간의 마음은 더 악해지고 범죄도 더욱 잔인해짐으로써 하느님과의 관계가 점점 더 멀어지고, 따라서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도 더욱 벌어져서 한층 비참한 처지가 되어갔음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도 하느님께서는 온 인류를 향한 은총의 계약을 노아와 맺으신다.


* 카인과 아벨

- 카인의 아벨 살인은 하느님을 떠난 인간들이 저지르는 범죄의 보편적인 행태를 말한다.

- 하느님과의 좋은 관계가 깨진 인간은 인간 상호간의 관계는 물론 인간 공동체와의 관계까지 깨어지고 만다.

- 카인이 받은 표는 하느님의 자비와 가호의 표시이다.

- ‘놋’(Nod)은 ‘유랑’, ‘방랑’을 뜻하는 이름으로, 하느님을 떠난 인간이 살아가는, 한없는 고독과 소외로 가득 찬 삶의 현장을 가리킨다.


* 성경에 나오는 족보의 의미

- 창조 이래 인간의 역사가 대를 이어가며 계속 이어가고 있다는 것.

- 인류 문화와 직업의 분화에 대한 원인론적 설명.

- 하느님과 인간 사이가 점점 멀어지고 인간의 수명도 점점 짧아졌다는 것.

 ․ 아담에서 노아까지 … 1000살 ~ 700살

 ․ 노아에서 아브라함까지 … 600살 ~ 200살

 ․ 그 이후의 자손들 … 200살 ~ 100살

- 태고사, 성조사, 민족사를 잇는 고리 역할


* 거인족과 인류의 타락

 ‘거인족’에 대한 원인론적 이야기를 통해 신이 되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재확인해주고 있다.

  

* 노아의 홍수

- 노아의 홍수는 세상이 창조 이전의 혼돈 상태로 환원되었음을 의미한다.

- ‘40’이란 숫자는 하느님의 계획이 완전하게 실현되는 데 충분한 기간을 가리킨다.

- 홍수 이후 하느님께서는 새로운 창조 작업으로 인간들이 새 시대를 살아갈 삶의 터전을 제공하신다.

- ‘번제(燔祭) 는 양이나 비둘기 등을 불에 태워 바치는 제사로서 보통 공경, 봉헌, 속죄의 뜻으로 바친다.

- 하느님께서 노아와 맺으신 계약은 온 인류를 향한 은총의 계약이다.

- ‘무지개’ Rainbow = '비‘ Rain + '활’ Bow

- '인벤터 싸거‘ Inventor Saga는 세상에서 무엇을 처음 고안하거나 발명한 사람에 관해 이야기하면서 그 효과를 강조하기 위해 대개 실수를 하는 이야기를 덧붙이는 형식을 가리킨다.


* 바벨탑

- ‘지구랏트’(Zigurrat)는 바빌론에 세워졌던 신전 탑으로 하느님의 자리를 차지하고자 하는 인간의 교만한 마음에 끝이 없음을 보여주고 있다.

- 이 세상에 존재하는 다양한 백성과 각기 다른 언어들에 대한 원인론적 설명을 통해 인간의 무한한 권력욕은 비참함 파멸을 당함으로써 막을 내린다는 교훈을 주고 있다.

- ‘바벨’(Babel)의 어원은 명백하지 않지만, 발음이 비슷한 히브리어 ‘바릴’(Balil)과 연계하여 이 탑의 이름을 ‘;바벨 탑’ 즉 ‘혼돈의 탑’ 으로 부르게 된 것이다.


 바벨 탑 이후 하느님께서는 한 인간을 선택하시고 그를 통해 인류 구원의 역사를 이루어 가신다. 그 첫 번째 인물이 바로 창세기 12장부터 등장하는 아브라함이다.


* 다음 주 주제 : 아브라함의 선택과 소명

* 읽어야 할 성경 :창세 12장 - 17장

* 성경 구절 쓰기 : 창세 12,1-4 ; 13,7-9 ; 15,5-7 ; 15,17-18 ; 17,1-5 ; 17,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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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김양진 선생님의 강의 내용 정리입니다.


이 시간에는 에덴 낙원에서 살다가 황량한 땅으로 쫓겨난 인간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오늘날 우리들은 어떻게 살고 있는지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죄를 짓고 에덴에서 쫓겨난 인간들은 죄를 반성하고 하느님이 에덴으로 불러주실 때까지 하느님 뜻을 잘 받들고 살면 좋았을 텐데.. 유감스럽게도 인간은 하느님 곁을 떠날수록 하느님의 은혜를 잊어버리고 점점 더 악해져 갔습니다.

에덴에서 쫓겨난 아담과 하와는 “자식을 낳고 번성해서 땅에 가득차라.”라는 하느님의 축복의 말씀대로 카인과 아벨을 낳았습니다.


카인과 아벨은 직업을 갖게 됩니다. “아벨은 양치기가 되고 카인은 땅을 부치는 농부가 되었다.”(창세 4,2)

유목문화와 농경문화는 고대의 모든 문명을 대표했습니다. 성서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직업이 다양해졌다는 것을 말한다기 보다는 농사를 짓든 양치기를 하든 두 사람은 다 형제관계라는 것입이다. 그러니 인간은 형제적 관계로 존재하며, 평화롭게 공존하면 함께 번영할 수 있습니다. 농사짓는 사람들과 양치는 사람들이 서로 다툴 필요가 없습니다. 인간은 하느님께로부터 지음 받은 형제들이기 때문입니다.


인간들의 경쟁적, 적대적 관계

 그런데 인류의 역사는 그렇지 않습니다. 평화적으로 공존하기보다는 자기들 이익을 위해서두 문화가 충돌하는 역사가 많습니다. 우리가 즐겨 봤던 서부활극의 가장 중요한 테마가 바로 이익의 충돌입니다. 농부들은 물 가까운 곳에서 울타리 치고 농사를 짓습니다. 목동들은 물 좋은 곳으로 찾아다니다가 물이 있는 곳에 철조망이 쳐져 있으면 풀을 얻고 물을 먹이려고 철조망을 걷어치우고 지나갑니다. 농부들은 땅을 훼손한다고 목동들을 막습니다. 농부와 목동이 서로 자기 이익을 지키기 위해서 싸웁니다. 그런 식의 충돌이 서부활극의 90% 이상의 모티브입니다. 오늘 이시대도 인간 모두는 형제간 임에도 불구하고, 이익집단끼리 늘 다툽니다. 예를 들어 의료업계와 약업계가 서로의 이익을 위해 데모하고, 병원이나 약국 문을 닫으면서까지 싸웁니다. 그런 충돌은 카인과 아벨부터 이어져 내려온 인류문화의 한 단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카인과 아벨이 수확을 하고 제사를 지냈습니다. 둘은 하느님을 섬기는 종교인이었습니다. 하느님이 조금 편파적이신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아벨과 그의 제물은 기꺼이 굽어보셨으나, 카인과 그의 제물은 굽어보지 않으셨다.”(창세 4, 4-5) 성경에 하느님께서 왜 카인의 제물을 굽어보지 않으셨는지에 대한 설명도 단서도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카인과 아벨의 제물을 둘 다 잘 받아들이셨으면 나중에 문제가 생기지 않았을 텐데, 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혹은 이 글을 쓴 사람이 이스라엘 사람이니. 원래 유목민족이던 그들이 농경생활을 하던 가나안사람들보다 우위에 있고 하느님께 더 잘하는 것처럼 보이려고 카인의 제물을 받아들이시지 않는 것으로 썼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이야기가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어떤 일을 하시건, 어떤 것을 선택하시든 인간의 기준으로 판단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오직 하느님 마음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을 선택하신 것도 하느님의 마음입니다. 우리들은 “왜 저사람 것은 받아주고, 내 것은 안 받아주느냐? 라고 하느님이 잘못하신다고 따지기 일쑤입니다. 사람들끼리야 따질 수 있겠지만 하느님은 우리에게 모든 것을 다 주시는 분이신데. 하느님의 뜻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 뿐이지, 하느님께 따질 일은 아닙니다. 우리가 이해하지 못한다고 해서 인간의 기준으로 하느님을 재면 안됩니다. 어떤 일을 하거나 생활하면서 ‘저 사람은 별 것도 아닌데 축복을 너무 많이 받은 것 같고, 나는 성당 열심히 다녀도 어려운 일만 생긴다.’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늘 하느님이 우리에게 뭘 원하시는가를 생각하는 것 보다는 하느님께서 우리들이 원하는 것을 들어주시기만을 바랍니다. 그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온전히 자유로우신 분이십니다. 인간이 한계를 지녔기 때문에 다 이해를 못하는 것을 뿐입니다. 그러니 카인은 당연히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고, 더 좋은 제사를 드리려고 애써야했습니다. 카인은 제물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하느님께 앙심을 품었습니다. 카인은 하느님께는 차마 불평을 못하고, 동생 때문에 자기 제물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고 생각하고, 아벨에게 악한 마음을 품게 됩니다.


카인의 범죄 - 인간의 보편적인 행태

”카인이 아우 아벨에게 “들에 나가자.”하고 말하셨다. 그들이 들에 있을 때, 카인이 자기 아우 아벨에게 덤벼들어 그를 죽였다.“(창세 4,8)  제사 안 받아주었다고 동생을 때려죽이는 일은 지금까지도 계속되는 일입니다. 상속 때문에 형제간에 죽이고 싸우는 것은 흔한 일입니다. 재산 적게 물려준다고 부모까지 해를 입히기도 합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자기가 인정받기 위해서, 자기가 남보다 더 차지하기 위해서 살인할 수 있다는 이야기를 카인과 아벨의 이야기를 통해서 성경저자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카인은 타고난 악인이고, 아벨은 타고난 선인이라고 해석하면 안됩니다. 인간이 하느님 곁을 떠나면 자기 이익을 위해서 형제를 죽일 수 있다는 인간의 보편적인 행태를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실제로 누구를 죽이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아프리카에서는 지금도 일 년에 수십만 명이 기아로 죽어갑니다. 한편 잘사는 나라에서는 비만인구가 많아져서 다이어트 한다고 야단들입니다. 선진국이 한 때 아프리카를 식민지로 삼았다가 착취했습니다. 착취당한 아프리카 사람들은 지금까지 굶어죽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아프리카 사람들이 기아로 죽게 된 원인을 제공한 사람들은 자기 손으로 아프리카 사람들을 죽이지 않았지만 결국 살인을 하는 셈입니다. 이 세상의 빈부격차는 타고난 것이 아닙니다. 우리 지구상에서 생산되는 식량을 총계를 내면 지구 인구가 골고루 나누어 먹고도 남습니다. 하지만 가진 사람은 더 가지려고 끌어 모으는 것이 문제입니다. 창고에서 밀, 고기가 썩어 나가도 굶는 사람들에게 거저 주려는 생각을 안 합니다. 값이 떨어지면 식량을 판매하는 대기업들이 이익이 안 남으니, 남은 식량을 바다에 빠뜨리면 빠뜨렸지 굶어 죽어가는 사람들에게 나누어 줄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굶어죽은 사람이 생기면 나누어주지 않은 그 사람은 형제를 죽이는 살인자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배고프고 헐벗은 사람들을 위해서 무슨 일을 했느냐를 심판의 기준으로 삼겠다는 말씀은 참으로 옳습니다. 왜냐면 우리들은 모두 가진 것을 남에게 나누어 줄 수 있으니까요. 다른 사람이 굶어죽지 않도록, 인간답게 살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으니까요.


하느님 앞에서 더 뻔뻔해진 인간의 모습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 따먹고 숨어있을 때 하느님이 “아담아, 너 어디있느냐”라고 물으시니 “하느님이 두려워서 숨었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아담은 그래도 겸손이 남아있었고, 부끄러움을 느꼈습니다.

그런데 형제를 죽인 인간, 카인은 하느님 앞에서 더 뻔뻔해집니다. 겸손한 모습은 하나도 없습니다. “주님께서 카인에게 물으셨다. ”네 아우 아벨은 어디 있느냐?“ 그가 대답하였다. ”모릅니다. 제가 아우를 지키는 사람입니까?“(창세 4,9)

 죄 지은 사람이 붙잡히면 카메라 앞에서 고개를 숙이고 얼굴을 가립니다. 일말의 양심이 남아 있기에 그럴 것입니다. 하지만 전두환 대통령의 경우에는 국민의 피로 정권을 잡고, 비자금을 몇 천억씩 숨겨 놓고도 통장에 잔고가 없다고 거짓말을 합니다. 그런데도 골프장에 다닙니다. 카인처럼 철면피입니다. 사람이 잘못했을 때는 반성이 필요합니다. 하느님 앞에서 부끄러움을 느껴야 하느님으로부터 용서받을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처벌

“네가 땅을 부쳐도, 그것이 너에게 더 이상 수확을 내주지 않을 것이다. 너는 세상을 떠돌며 헤매는 신세가 될 것이다.”(창세 4,12) 하느님께서는 땅이 아예 수확을 거부하도록 해 버리십니다. (아담 때문에 땅이 하느님께 저주를 받았을 때는 그 정도는 아니었는데,이번에는 땅이 아예 소출을 내지 않게 하십니다.) 인간과 자연이 좋은 관계가 깨지게 됩니다. 인간과 자연의 관계가 계속 깨지니까 ‘지구의 날’이라도 만들어서 경각심을 불러 일으키지 않으면 공해로 멸망하게 생겼습니다. 인간은 땅에서 나온 존재인데, 땅이 소출을 거부하니 땅에서 살아갈 수가 없어서 땅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너는 세상을 떠돌며 헤매는 신세가 될 것이다.“(창세 4,12) 고대사회에서는 형제나 부모를 죽인 사람을 그 공동체에서 추방해버렸습니다. 요즘이야 동네에서 쫓겨나면 다른 동네로 가서 살면 되지만, 고대인들은 공동체를 떠나면 광야에서 홀로 살아야 했습니다. 광야에 홀로 떨어진 양처럼 사람도 짐승에게 해를 당할 수도 있고. 다른 부족에게 죽임을 당할 수가 있었습니다. 물과 음식을 찾기도 어려웠지만 특히 소외당하는 벌이었기에 사형보다 더 무서운 벌이었습니다. 하느님의 처벌은 엄청난 것이었습니다. 자연과의 관계가 깨진 인간은 인간 공동체에서도 쫓겨나게 된 것입니다. 인간과 공동체와의 관계도 깨진 것입니다.


카인의 호소와 하느님의 가호

무서운 처벌을 당하니까 뻔뻔했던 카인이 하소연을 합니다. 그러니 하느님이 ”카인을 죽이는 자는 누구나 일곱 갑절로 앙갚음을 받을 것이다.“(창세 4,15) 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시대에는 법이 ‘동태복수법’(同態復讐法)이 있었습니다. 눈에는 눈으로, 이에는 이로, 누가 훔치면 다시 갚아줘야 했습니다. 그 시대에는 자기 부족의 누가 살해당하면 그 부족의 구성원은 동태복수법에 따라 살인한 사람을 끝까지 쫓아가서 죽였습니다. 카인이 형제를 죽였으니 카인도 죽임을 당해야했습니다. 그런데 하느님이 그렇게 복수하시지 않으셨습니다. 하느님께서 카인을 죽인 자는 누구나 일곱 갑절로 갚아주겠다고 하신 것은 동태복수법이 아니라 복수 금지법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무도 복수하지 말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복수는 복수를 낳을 뿐이고, 동태복수법으로 인간 공동체가 좋아질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일곱 갑절이라고 하셨는데, 7 은 ‘온전한 수’를 의미합니다. 일곱갑절로 갚겠다는 말씀은 카인이 비록 살인을 저질렀지만 카인의 생명을 지켜주겠다는 뜻입니다. 그 말씀으로도 모자라서 하느님께서 카인에게 표를 해주십니다. ”주님께서는 카인에게 표를 찍어 주셔서, 어느 누가 그를 만나더라도 그를 죽이지 못하게 하셨다.“(창세 4,15) 예전에는 죄인들에게 낙인을 찍었습니다. 주인을 표시하게 위해 가축들에게도 낙인을 찍었습니다. 인간이 죄를 지으면 얼굴에다 낙인을 찍거나 글자를 새기기도 했습니다. 죄인에게 찍는 낙인은 ‘기피와 배척의 대상’이었지만. 하느님이 카인에게 찍어준 표는 배척이나 기피대상이 아니라 보호의 표시를 사람들에게 알리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카인의 표는 하느님의 용서와 자비의 표시입니다. 그 표를 다른 사람들이 보고 하느님이 보호하고 있으며, 생명의 주인은 하느님이심을 알아보게 하시려고 표시하신 것입니다. 하느님이 주신 생명을 인간은 어떤 명목으로도 해쳐서는 안됩니다. 오늘날에도 사형제도가 있습니다. 나쁜 짓을 저지를 사람들을 보고 ”저런 놈은 사형시켜야 한다“고 쉽게 말하지만. 인간이 인간을 죽일 권리는 없습니다.


에덴의 동쪽

카인은 주님 앞에서 물러 나와 에덴의 동쪽 놋 땅에 살았다.“(창세 4,16)

아담도 에덴에서 쫓겨나 동쪽으로 갔습니다. ‘동쪽’이라는 방향이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놋(Nod)’ 이라는 말은 ‘유랑, 방랑’을 의미합니다.  하느님께 죄를 짓고 인간공동체에서 홀로 떠나서 유랑하게 된 인간들의 ‘고독과 소외로 가득찬 삶의 현장’을 ‘에덴의 동쪽’이라고 합니다. 영화화 되었던 존 스타인 백의 소설 <에덴의 동쪽>에서도 에덴의 동쪽이 그런 의미로 쓰여져 있습니다.


라멕의 복수

 카인의 자손이 번성해서 카인의 족보가 나옵니다. 하느님께서는 자식을 낳고 번성해라는 축복을 카인에게서 거두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카인의 후손 중에 아주 고약한 ‘라멕’이라는 자가 나옵니다. 라멕은 복수심에 불타는 사람이었습니다. 라멕이 자기 아내들에게 말하였습니다. ”... 카인을 해친 자가  일곱 갑절로 앙갚음을 받는다면 라멕을 해친 자는 일흔 일곱 갑절로 앙갚음을 받는다.“(창세 4,24)  라멕의 말은 하느님 말씀과 비슷한데 정도만 다르다고 생각하면 안됩니다. 하느님이 카인을 죽이는 자에게 일곱 갑절로 앙갚음을 하시겠다는 말은 복수룰 하지 말라는 말이었는데. 라멕의 말은 저를 해치면 일흔 일곱 갑절로 복수하겠다고 한 겁니다. 하느님은 복수를 하지 말라고 하셨는데, 라멕은 ‘복수의 화신’이 된 것입니다. 우리는 라멕이 아닐까요? 라멕은 하느님보다 일흔 배나 더 권력이 강한 존재가 되려고 한 것입니다. 그러면 하느님 따위는 안중에도 없게 됩니다. 성경저자는 라멕의 이야기를 통해 ‘하느님을 떠난 인간의 행태’를 말하고 있습니다. 요즘에 <복수하는 방법 333> 이라는 제목의 책도 나옵니다. 우리가 흔히 쓰는 말이 있습니다. ”너 두고 보자“라는 말입니다. 그런 말을 자주하는 우리는 복수심에 절어 있는 것입니다. 복수를 하고 싶어 하는 마음에서 나오는 말입니다. 마음으로 칼을 가는 것입니다. 라멕의 이야기는 단순한 옛날 이야기가 아닙니다. 오늘날에도 복수의 화신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미국이 911테러를 당했습니다. 있어서는 안되는 엄청난 재앙이 일어났습니다. 그러면 그 일을 저지른 사람을 잡아서 처벌해야 될 텐데, 미국이 힘이 있는 나라라서 엄청난 복수를 합니다. 빈라덴이 있을 거라고 추정된다고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했고, 이라크를 침공했습니다. 군대를 보내서 범인을 잡은 것이 아니라 애꿎은 민간인들. 심지어 어린아이들까지 많이 죽게 했습니다. 정밀 유도탄으로 결혼식장을 공격하기도 했습니다. 힘이 있는 사람일수록 복수가 더 커지고 더 잔인해집니다. 현대판 ‘라멕’의 전형은 바로 ’부시 대통령‘입니다. (부시가 독수리 오형제? 의상을 입고 폼 잡고 있는 사진 재미있었습니당.) 라멕의 잘못은 무엇일까요? 하느님은 악인이 복수하면 또 복수를 당하니까 하지 말라고 하셨고, 생명의 주인은 하느님이시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라멕은 복수의 화신이 되어서 하느님보다 일흔 배나 더 권력이 강한 존재로 군림하려고 한 것입니다. 라멕에게 하느님 따위는 안중에도 없고. 그의 교만함이 하늘을 찌를 정도입니다. 라멕을 통해서 ’하느님을 떠난 인간의 행태‘를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들도 라멕이 되지 않으려면 ’두고보자‘ 라고 생각하지도 말아야 합니다.


성경에 나오는 족보의 의미

 성경에서 보면 제일 재미없는 것이 족보 이야기입니다. 누가 누구를 낳고 몇 살 까지 살다고 죽었다는 이야기에는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족보이야기는 인간이 하느님의 축복에 의해 인간의 역사가 대를 이어가며 번성해갔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족보는 태고사, 성조사, 민족사를 연결하는 고리 역할을 합니다. 족보가 나오면 ‘아, 이제는 이야기가 한 단계 뛰는구나. 세월이 많이 흘렀겠구나. 다른 에피소드로 넘어가는구나,’ 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또 한가지 족보가 말해주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족보에 조상들의 수명이 나옵니다. 아담에서 노아까지가 10대쯤 되고, 1000살 ~ 700살 살았습니다. ․ 노아에서 아브라함까지도 10대 쯤 되고, 600살 ~ 200살 정도 살았습니다. ․ 그 이후의 자손들은 200살 ~ 100살 정도 살았다고 나옵니다. 그것이 의미하는 것은 하느님과 인간 사이가 점점 멀어지고 인간의 수명도 점점 짧아졌다는 것입니다. 즉, 하느님과 멀어질수록 하느님의 은총이 점점 줄어들었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이 하느님 마음에 들지 않은 짓만 계속 하니 인간의 수명이 점점 줄어든 것입니다. 지금은 인생은 80살 까지라고 합니다. 시편에 보면 “근력이 좋아야 80년” 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이 세상 아웅다웅 다투고 살 필요 없습니다. 의학이 발달되서 오래 사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 뜻을 잘 받들어서 인간답게 사는 것이 중요합니다. 살아있는 동안에 하느님 뜻에 맞게, 형제간에 다투지 않고, “두고보자”라는 소리 안하고, 서로 돕고 살면, 인류가 서로 공존하고 함께 번영할 수 있음을 명심해야 합니다.


하느님의 아들들과 거인족 -인류의 타락

성경에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 나옵니다. “하느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과 한자리에 들어 그들에게서 자식이 태어났다.”(창세 6,4)  하느님의 아들들 이야기가 나오니 하느님이 장가가셨나 생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성경을 보면 이런 구절을 읽으면서 영문을 몰라서 답답할 때가 있습니다. 헤라클레스는 신과 인간 사이에서 났습니다. 옛날 사람들이 보통 사람들보다 월등하게 힘이 세거나, 지혜가 있거나. 위대한 일을 하면 ‘저 사람은 사람이 아니다’라고 생각했습니다.  이창호 바둑을 ‘신기’ ,‘신의 기술’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인간은 자기보다 월등한 존재가 있으면 우리와 다른 족속, 신의 아들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다윗과 골리앗 이야기에서 골리앗은 기골이 장대한 거인이었습니다. 그런 기억들이 있는 이스라엘 사람들은 거인들을 신적인 존재라고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거인족에 대한 이야기에는 자기들도 힘있는 존재인 거인이 되고 싶어 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이 부분에서는 인간이 신이 되고자 하는 욕망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거인족’에 대한 원인론적 이야기를 통해 신이 되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과 교만이 얼나마 큰 것인지를 재확인해주고 있습니다. 인간이 타락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유목생활 하다가 가나안 땅에서 살았습니다. 가나안은 농경사회였으니 가나안 사람들에게는 농사를 잘 짓게 해주는 신이 최고였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믿는 하느님은 유목민의 신이라고 여겼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가나안에 정착해서 농사를 짓게 되었는데, 농사지으면서 제를 지내게 됩니다. 요즘도 무당을 불러다 푸닥거리를 하거나 풍어제를 지내고 바다에 나갑니다. (가나안의 바알신, 천신상(天神像)의 모습) 가나안에는 신전창녀가 있었습니다. 가나안 사람들은 신전창녀를 땅신을 표상하는 거룩한 존재로 보았습니다. 제관들을 바알신,= 천신,= 하늘신을 표상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풍년을 기원하려면 하늘신을 상징하는 제관들과, 땅신을 상징하는 신전창녀들이 관계를 가져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또 신전창녀들과의 관계를 갖도록 다른 사람들에게 권장하기도 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가나안인들의 그런 풍습을 보고, 풍년이 들게 하려고 그들을 따라하고 싶은 유혹을 느끼게 됩니다. 열왕기에 보면 실제로 이스라엘인들이 가나안인들의 풍속을 따라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런 짓은 하느님을 깔아 뭉게는 일입니다. 인간들끼리 하늘신도 되고 땅신도 되어서 풍년을 비는 것은 하느님을 완전히 제외시키는 상태입니다.

“주님께서는 사람들의 악이 세상에 많아지고, 그들 마음의 모든 생각과 뜻이 언제나 악하기만 한 것을 보시고, 세상에 사람을 만드신 것을 후회하시며 마음 아파하셨다.”(창세 6,5-6)  야휘스트가 하느님이 인간을 창조하신 것을 묘사할 때 하느님을 도공처럼 묘사했습니다. 전 시간에 ‘신인동형동성론’에 대해서 배웠습니다. 이 구절도 하느님을 의인화해서 하느님의 심정을 인간의 심정처럼 묘사한 것입니다. 열심히 요리한 국을 남편이 먹어보고 맛없다고 투덜대면 국을 쏟아버리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처럼, 하느님도 세상이 추해지니 쓸어버리고 싶어하셨다는 겁니다. 하느님은 노아 때문에 싹쓸이를 못하십니다.


노아의 홍수

“노아는 당대에 의롭고 흠 없는 사람이었다. 노아는 하느님과 함께 살아갔다."(창세 6,9)

 노아가 흠없다는 말은 완벽한 존재라는 말은 아니고 하느님을 섬기고 살았다는 말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노아 때문에 세상을 멸망시키지 못하시고 노아와 그 가족들과 짐승들 한 쌍씩은 살려주시기로 하셨습니다. 그래서 노아에게 방주를 지으라고 하십니다. ”너는 네 가족들과 함께 방주로 들어가거라. 내가 보니 이 세대에 내 앞에서 의로운 사람은 너밖에 없구나. .....“ 보통 배는 돛대가 있으나 방주에는 배 안에 상자곽 같은 집이 있습니다. 오늘날 크루즈 유람선 같은 배입니다. 하느님이 홍수를 내리십니다. ” 그 날에 큰 심연의 모든 샘구멍이 터지고 하늘의 창문들이 열렸다.“(창세 7,11) 고대인들의 우주관에 따른 천지창조의 이야기가 연상됩니다. 심연에서 물구멍이 터지고. 하늘기둥, 물기둥 이 무너지고. 궁창에서 윗물이 쏟아져 내리니 세상이 물바다가 됩니다. 노아의 홍수로 완전히 창조 이전의 혼돈의 상태로 되어 버린 것입니다. ”그리하여 40일 동안 밤낮으로 땅에 비가 내렸다.“(창세 7,12)  야휘스트 문헌과 제관계 문헌이 뒤섞여 있어서 어떤 부분에서는 40일이라고 하고, 어떤 부분에서는 1년이라고 했는데, 그것을 문제삼을 일은 아닙니다.. 40일은 충분한 기간을 의미합니다. 출애급 사건에도 40년이 나오고, 예수님도 광야에서 40일 간 유혹을 받으셨습니다. 40일간이라는 의미는 하느님께서 비를 당신이 원하는 대로 충분히 내렸다는 뜻입니다.


하느님의 재창조로 새 시대 개막

하느님은 홍수가 그치자 노아에게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도록 준비시키십니다.  “그 때에 하느님께서 노아와, 그와 함께 방주에 있는 모든 들짐승과 집짐승을 기억하셨다. 그리하여 하느님께서 땅 위에 바람을 일으키시니 물이 내려갔다.” (창세 8,1-2)혼돈상태에서 다시 하느님께서 하늘기둥 땅기둥을 세우시고 궁창을 만드시고, 다시 창조를 하십니다. 새 시대가 열린 것입니다. 노아의 홍수 이후에 살아남은 사람들은 새로운 시조가 된 것입니다. 그러니 사람들은 정말 착하게 살아야 했을 텐데.....

노아가 가족들과 나와서 맨 먼저 한 일은 ”노아는 주님을 위하셔 제단을 쌓고, 모든 정결한 짐승과 정결한 새들 가운데에서 번제물을 골라 그 제단 위에서 바쳤다.“(창세 8,20) ‘번제’(燔祭‘라는 뜻은 제물로 바친 양이나 비둘기를 불에 태워서 바치는 것입니다. 번제물을 바치는 것은 공경, 봉헌 속죄의 의미로 제사 드리는 것입니다.


노아와 계약을 맺으시다

노아의 제를 보시고 하느님께서 다시 축복을 해주십니다. ”자식을 많이 낳고 번성하여 땅을 가득 채워라.” (창세 9,1) 창조 때 내리신 축복과 같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인류를 다시는 멸망시키지 않겠다고 하시면서 한가지 조건을 내세우십니다. “남의 피를 흘린 사람에게 나는 사람의 생명에 대한 책임을 물을 것이다.”(창세 9,5)  하느님께서는 ’생명‘을 제일 강조하십니다. 살인하지 말고 복수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피를 흘리게 하면 피값을 값아주겠다고 하십니다. 생명은 오로지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그러니 인간의 생명을 해치는 것은 하느님을 해치는 것입니다. 생명을 존중해야 합니다. 남의 것을 빼앗거나 독점하는 것은 다 생명을 해치는 행위입니다.

“내가 너희와  내 계약을 세우니, 다시는 홍수로 모든 살덩어리들이 멸망하지 않고, 다시는 땅을 파멸시키는 홍수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창세 9,11) 하느님이 계약의 표시로 무지개를 걸어 놓으십니다.“내가 무지개를 구름 사이에 둘 것이니, 이것이 나와 땅 사이에 세우는 계약의 표징이 될 것이다.”(창세 9,·13) 무지개를 영어로 'Rainbow' 라고 합니다. Rain은 비를 의미하고 bow는 활을 의미합니다. 성서적인 언어입니다. 고대에는 전쟁할 때 주무기가 활이었습니다. 하느님이 인간들에게 비를 활처럼 쏘셨는데, 그 비를 내리는 활을 쓰지 않으시기로 결심하시고, 장식물처럼 하늘에 걸어 놓으셨다는 것입니다. 다시는 물로 멸망시키지 않겠다는 표시로 걸어 놓으셨다는 뜻입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비 온 뒤에 무지개가 뜨면 좋아합니다. 인간의 마음 속에는 하느님께서 심어주신 본성이 있기 때문에, 제대로 깨닫지는 못해도 인간 안에 하느님의 숨이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포도밭 가꾸는 노아 - Inventor Saga

“노아는 포도밭을 가꾸는 첫 사람이 되었다. 그가 포도주를 마시고 취하여 벌거벗은 채 자기 천막 안에 누워 있었다.”(창세 10,21) 이런 이야기를 ‘인벤터 싸거’ 라고 합니다..'인벤터 싸거‘ Inventor Saga는 세상에서 무엇을 처음 고안하거나 발명한 사람에 관해 이야기하면서 그 효과를 강조하기 위해 대개 실수를 하는 이야기를 덧붙이는 형식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예를 들어 “에디슨이 전화기를 발명했는데, 첫 실험으로 조수랑 통화를 시도할 때, 전화기에서 조수 목소리가 들리니 자기가 발명해놓고도 깜짝 놀래서 전화기를 떨어뜨렸다’ 라는 이야기가 인벤터 사거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포도, 포도 나무, 포도밭을 하느님의 최고의 선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배부르게 먹고, 포도 따먹고 포도밭 그늘에서 포도주를 마시는 것을 최고의 행복으로 생각했습니다. 노아가 맨 먼저 포도농사꾼이 되었으니, 포도주 마시는 것도 노아가 처음이었겠지요. 포도주가 좋지만 과음하면 그렇게 된다는 것을 노아가 시범을 보인 것입니다. 노아를 통해 배웠으니 술을 과음하면 안됩니다. 재미있는 이야기입니다.


바벨 탑

인간이 새 시대에 살게 되었어도 인간은 좋아지지 않았습니다.

“자, 성읍을 세우고 꼭대기가 하늘까지 닿는 탑을 세워 이름을 날리자. 그렇게 해서 우리가 온 땅으로 흩어지지 않게 하자.”(창세 11,4) 인간들이 모여서 도시를 건설하면서 먹고 살만해지졌고 (벽돌 굽는 등)기술이 발전하게 됩니다. 인간들이 힘을 합해서 하느님처럼 세상에 이름을 날리자고 합니다. 바빌론의 신전탑을 ‘지구라트’(Zigurrat)라고 합니다. 바그다드에 가면 지구라트 유적들이 많이 있습니다. 많은 고고학자들이 지구라의 초석에 새겨진 글씨 발견했다고 합니다. 실제로 지구라트 초석에는 “우리가 이 탑을 세워서 이 탑 꼭대기가 하느님의 침대에 다다랐다. 우리는 하느님의 침소를 우리 마음대로 드나들 수 있다.”라고 적혀져 있답니다. 당시에 이 정도로 하느님 자리를 차지하려는 욕망이 컸다는 말입니다. 하느님의 침실에 구멍을 뚫었다고 교만해 있는 인간들을 보시고 하느님께서 어이가 없어서 탑을 보시려고 한참을 내려오십니다.“자, 우리가 내려가서 그들의 말을 뒤섞어 놓아, 서로 남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게 만들어 버리자.”(창세 11,7) 인간들은 탑이 하느님 침실까지 올라갔다고 생각했는데. 하느님은 탑을 보시려고 한참을 내려 오셔야 했습니다. 바벨탑 이야기는 많은 언어들이 존재하는데 대한 원인론적인 이야기입니다. ‘바벨’이라는 말이 ‘바빌론’이라는 말에서 비롯된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성서연구자는 히브리어에 비슷한 발음의 ‘바릴’(Balil), ‘혼란시키다’ 라는 단어와 연결하여, 그 탑의 이름을 ‘바벨탑’, 즉 ‘혼돈의 탑’ 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설명합니다.

인간의 언어가 똑같다면 인간사회의 다양성, 다양한 문화는 없어지고 획일화 될 것입니다. 인간이 합심하면 대개 안 좋은 일부터 하게 됩니다. 인간의 힘이 모아지면 꼭 하느님을 제끼려고 합니다. 이 세상에서 국민들이 제일 단결 잘하는 나라를 꼽으라면 독일과 일본을 꼽을 수 있습니다. 이 두 나라가 경제를 발전시키는 등 좋은 쪽으로도 발전했지만 결정적인 나쁜 짓을 했습니다. 히틀러가 세계 2차 대전 일으켰고, 일본도 대동아전쟁 일으켰습니다. 인간들이 마음을 합쳐 좋은 쪽으로 가면 좋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인간의 언어가 흐트러지게 됩니다. 바벨탑의 이야기도 다양한 언어가 존재하는 사실에 대한 원인론적인 이야기입니다. 동시에 신학적으로는 인간들끼리 마음을 모아서 좋은 쪽으로 살아야 하고, 좋은 쪽으로 살도록 해주시는 분은 오직 하느님 뿐이시라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지금 말하고 있는 저들은 모두 갈릴래아 사람들이 아닌가? 그런데 우리가 저마다 자기가 태어난 자기 지방 말로 듣고 있으니 어찌 된 일인가?”(사도행전 2,7-8)

 각기 다른 언어로 서로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던 사람들이 성령으로 인해서 모두가 알아듣는 언어를 갖게 된 것입니다. 그 언어가 바로 복음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다시 교만한 마음, 하느님을 배신해서 하느님의 자리를 차지하려고 하는 인간들의 헛된 욕망을 끊어버리고, 모두가 다 서로를 위해서 돕고 하느님의 뜻을 받드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이면 다시 모든 언어가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뜻을 받들어 서로를 위해주는 사랑의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창세기 태고사는 바벨탑의 이야기로 어둡게 끝납니다.

그러나 그 다음 이야기부터는 하느님이 아주 새로운 방법으로 우리를 구원하심을 보여줍니다. 하느님께서 한 인간을 선택하셔서 그 인간과 정분을 나누는 이야기로 인간의 구원을 말씀하십니다. 다음 시간에는 하느님께서 선택하신 인간,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공부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김양진 선생님!

매 시간 100장에 가까운 사진들을 담은 파워포인트 자료를 준비하시는 정성이 놀라울 따름입니다. 저 같으면 그런 강의자료만 준비하려고 해도 최소한 한 달을 낑낑대고 준비해야 할 텐데요. 이번 강의 정리하면서 선생님께 어찌나 고마운 마음이 드는지 눈물이 났습니다. 열심히 강의 준비하시고, 열강해 주셔서 죄송하기까지 합니다. 김양진 선생님께서 그토록 사랑하시는 하느님께 감사와 찬미를 드립니다. 김양진 선생님, 늘 건강하시라고 기도하겠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