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지혜의 샘/김양진 선생님의 성경교실

인간,그 행복한 출발-두번째 창조이야기

김레지나 2008. 8. 28. 18:42

 

 

 

김양진 선생님의 성경특강 세 번째 시간: 두 번째 창조 이야기 (창세 2,4ㄴ-25)

(이번부터는 프린트 정리부터 먼저 적고 설명은 뒤에 적겠습니다.)

====================================================================

 

 


 인간 그 행복한 출발


* 두 가지 창조 이야기의 차이점

 

첫 번째 창조 이야기

두 번째 창조 이야기

저술 시대

  B.C 586년 유배 이후

  B.C 950년 경

성경 저자

  제관(사제)들 ,(제관계 문헌)

  이야기꾼이자 신학자들,(야휘스트 문헌)

서술 방식

  체계적, 논리적

  설화적, 감성적

지역 배경

  메소포타미아 지방

  유다 지방

물의 상징

  죽음과 파괴

  생명의 원천

인간 창조

  창조작업의 맨 마지막

  창조작업의 맨 처음


* 두 번째 창조이야기의 구조


                                인간의 범죄

                                (창세 3,6-7)

            하느님의 금지명령                 하느님의 추궁과 처벌

            (창세 2,16-17)                    (창세 3,14-19)

인간창조                                                           에덴동산 추방

(창세 2,7-9)                                                       (창세 3,20-24)


* 두 번째 창조 이야기 전반부 (창세 2, 4ㄴ-25)의 핵심

- 인간은 우주만물의 중심이다.

- 인간은 땅의 먼지로 지어진 보잘것 없는 존재이며, 다시 흙으로 돌아갈 허무한 존재이다.

- 그러나 인간은 하느님의 거룩한 숨이 들어있는 고귀한 존재이다.

- 에덴동산은 하느님께서 인간을 위해 마련하신 선물이다.

- 남자와 여자는 한 몸에서 나온 동등한 존재이며 평등한 삶의 동반자이다.

- 하느님과 창조계에 존재하는 모두가 그지없이 좋은 관계를 이루고 있다.

  ․ 하느님과 인간과의 관계가 아주 좋다

  ․ 인간과 인간과의 관계도 아주 좋다

  ․ 인간과 자연, 인간과 동물과의 관계 역시 아주 좋다.


* 신인동형동성론 (神人同形同性論 anthromorphisme)

  하느님을 의인화하여 하느님의 작업을 마치 인간의 작업인 것처럼 묘사하는 것으로, 신화나 설화에서 많이 사용하는 서술방법이다.

* ‘아담’이라는 이름

  황량한 땅(아다마 Adamah)에서 연유된 아담(Adam) 이라는 이름은, 최초의 인간을 가리   키는 것이 아니라, 인간 그 자체를 말한다.


* ‘에덴동산’의 의미

  에덴(Eden) : 오아시스, 기쁨, 환희, 낙원,

 ‘하느님이 거처하시는 동산’(창세 3,8 ; 13,10 ; 에제 31,9 참조)


* ‘선과 악을 알다’

  ‘선과 악’ : 세상의 모든 이치와 원리

  ‘알다(jada) : 체험하다, 소유하다, 장악하다

  따라서 “선과 악을 알다”라는 것은 “세상의 모든 이치와 원리를 알아 창조계에 속해 있는  모든 것을 소유하고 장악한다.”는 의미로, 이러한 지배권은 하느님 홀로 지니시는 권한이다.


* ‘남자’와 ‘여자’의 관계

  남자(지아비 ish) - 여자(지어미 ishah)

  사람은 남자와 여자로 구별되고, 남자와 여자는 서로 거들 짝으로서 서로를 보완하여 온   전한 인간상을 이루게 된다.

 

-----------------------------------

* 다음 주 주제 : 인간의 범죄와 하느님의 구원 약속

* 읽어야 할 성경 : 창세 3,1-24

* 성경 구절 쓰기 : 창세 3,6-7 ; 3,12-13 ; 3,15 ; 3,19 ; 3,23



===============================================================


하느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신 게 맞습니까? 아니면 인간의 원숭이에서 진화한 게 맞습니까?

창조론입니까? 진화론입니까? (레지나 생각- 하느님께서 진화하도록 창조하셨다.)

창세기를 ‘시’를 읽는 마음가짐으로 읽어야합니다. 창세기의 저자들이 살던 시대에 인간이 원숭이에서 진화했다고 설명한다고 해도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성서는 이스라엘인들의 역사관인 ‘신앙’에 의거하여 쓰여진 책입니다. 그들은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 인간의 어떤 존재인지에만 관심이 있었습니다. 성서에서 물리학, 생물학, 지질학적인 사실을 찾아내려 하는 것은 옳지 않은 접근법입니다.


첫 번째 창조이야기가 쓰여진 시기는 바빌론 유배시절이었고, 티그리스강과 유프라테스강 사이에 위치한 바빌론에는 홍수가 잦았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인들에게 물은 죽음과 파괴의 의미였습니다. 따라서 하느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신 이야기도 물을 제압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두 번째 창조 이야기는 바빌론 유배시절보다 훨씬 전인 솔로몬 왕 시대에 쓰여졌습니다. 첫 번째 창조이야기는 BC 586년 이후에 쓰여졌고, 두 번째 창조 이야기는 BC 950년경 쓰여졌습니다. 두 번째 창조 이야기는 현자들, 신학자들이 썼고, 그들은 하느님을 야훼라고 불렀기 때문에 그들이 쓴 성서를 ‘야휘스트계 문헌’이라고 부릅니다. 첫 번째 창조 이야기보다 훨씬 전에 쓰여졌기 때문에 역사적 서술도 더 체계적이지 못합니다.


두 번째 창조 이야기의 배경은 유다지방입니다. 바빌론이 있던 메소포타미아 지방과는 달리 유다지방의 주변은 거의 모두 사막지역입니다. 유다인들에게는 물이 제일 필요했기에 생명의 원천으로 여겼습니다. 따라서 두 번째 창조 이야기는 ‘물이 솟음’으로써 창조가 시작됩니다.

주 하느님께서 땅과 하늘을 만드시던 날, 땅에는 아직 들의 덤불이 하나도 없고, 아직 들풀 한 포기도 돋아나지 않았다. 주 하느님께서 땅에 비를 내리지 않으셨고, 흙을 일굴 사람도 아직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땅에서 안개가 솟아올라 땅거죽을 모두 적셨다.” (창세 2,5)

땅에는 아직 들의 덤불이 하나도 없고, 아직 들풀 한 포기도 돋아나지 않았다. 라는 표현은 사막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생물이 자라려면 물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물이 솟아 오르는 것으로 창조이야기를 시작합니다. ‘물 → 오아시스’를 창조의 모티브로 삼습니다.


첫 번째 창조 이야기는 6일 구조를 갖고 있습니다. 6일동안의 창조이야기가 정교한 구조를 갖고 있습니다. 두 번째 창조 이야기는 그만큼 정교한 구조는 아니지만 나름대로 구조를 갖고 있습니다.

 

                                인간의 범죄

                                (창세 3,6-7)

            하느님의 금지명령                 하느님의 추궁과 처벌

            (창세 2,16-17)                    (창세 3,14-19)

인간창조                                                           에덴동산 추방

(창세 2,7-9)                                                       (창세 3,20-24)


두 번째 창조이야기에서 하느님은 인간을 맨 먼저 창조하십니다. 그 다음 하느님의 금지명령이 있고, 인간이 그 명령을 어겨서 죄를 지었기에 에덴동산에서 쫓겨납니다. 인간의 범죄를 기준으로 해서 전반부의 이야기는 화기애애한 분위기이고, 후반부의 이야기는 살벌한 이야기입니다. 오늘은 전반부의 이야기만 공부하겠습니다.


그 때에 주 하느님께서 흙의 먼지로 사람을 빚으시고 ”(창세 2,7)

첫 번째 창조 이야기에서는 창조 6일의 마지막에 인간이 창조됩니다. 그 이전의 모든 창조물들은 인간을 위해서 하느님께서 창조하셨습니다. 인간이 창조의 정점이고, 우주의 정점입니다.

두 번째 창조 이야기에서는 인간이 맨 먼저 창조됩니다. 그 다음 인간을 위해 다른 것들이 창조됩니다. 두 번째 창조 이야기에서도 마찬가지로 인간이 우주의 중심이 됩니다.

첫 번째 창조 이야기와 두 번째 창조 이야기의 공통점은 “인간이 창조의 으뜸이다.”,“인간이 우주만물의 중심이다.”입니다.


첫 번째 창조 이야기에서는 하느님께서 인간을 말씀으로 창조하십니다. 두 번째 창조이야기에서는 하느님께서 흙의 먼지로 사람을 빚으셨다고 이야기합니다. 두 번째 창조 이야기는 신인동형성론 anthromorphisme 에 따라 전개됩니다. 하느님을 마치 인간인 것처럼 의인화한 것입니다. 그러한 방법은 신화나 설화에서 자주 사용하는 서술방법입니다.

하느님이 그릇을 굽듯이 사람을 빚으셨습니다. 그래서 가마에 넣었는데 너무 오래 구워서 흑인이 되었고, 한 번은 너무 빨리 꺼내서 백인이 되었고, 세 번째 시도에서 적당하게 노릇노릇한 황인종이 나왔다는 우스개 소리도 있습니다.

그럼 실제로는 하느님이 인간을 흙에서 빚었다는 게 무슨 뜻일까요? 그 말씀은 인간존재의 본질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황량한 땅’을 히브리어로 ‘Adamah’라고 합니다. 그래서 ‘땅에서 빚어낸 인간’이란 뜻에서 ‘아담 Adam’ 이란 이름이 나왔습니다. 하느님이 인간을 흙에서 빚었다는 표현이 의미하는 것은 ‘인간은 땅의 먼지로 지어진 보잘 것 없는 존재이며, 다시 흙으로 돌아갈 허무한 존재이다.’ 라는 것입니다. 재의 수요일에 신부님께서 우리들 이마에 재를 바르면서 “흙에서 왔으니 흙으로 돌아가라”라고 말씀하십니다. 맨 처음에 창조된 인간만 ‘아담’인 것이 아니라 우리들 모두, 모든 인간이 다 ‘아담’입니다. 따라서 앞으로 전개될 하느님과 아담과의 이야기는 하느님과 나와의 이야기입니다. 내 이야기를 창세기에 써놓은 것으로 생각하시면 됩니다. 성경을 읽으며 하느님께서 나에게 뭐라고 말씀하시는지... 알아들어야 합니다.



그 코에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명체가 되었다.” (창세 2,7)

사람은 흙으로 빚어졌으니 참으로 비천한 존재입니다. 하지만 고귀한 존재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하느님의 숨이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하느님의 숨이 들어있는 고귀한 존재입니다.” 피조물들 중에서 하느님의 숨이 들어있는 존재는 인간뿐입니다. 그래서 어떤 인간이든 무시할 수 없습니다. 왕이든 평민이든, 어떤 인종이든,, “인간 생명은 하느님께서 주신 선물”입니다.

여러분들은 숨쉬는 것이 어렵습니까? 가장 쉬운 일로 여겨지지만 코를 심하게 고는 사람들이나 환자들의 경우에는 숨을 어렵게 쉽니다. 숨이 잠시 멎으면 주위사람이 놀랍니다. “그 코에 생명의 숨을 불어 넣으시니,”라는 표현으로 우리들이 매 순간 들이쉬는 숨을 하느님께서 들이쉬도록 해주신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겁니다.

첫 번째 창조 이야기에서는 하느님이 홍수가 나지 않게 궁창을 막아주고 계시고, 항상 우리를 지켜주시는 분으로 묘사됩니다. 첫 번째 창조이야기에서 하느님께서 한순간도 돌봐 주시지 않으면 물이 쏟아져 나와서 살 수없게 됩니다. 두 번째 창조 이야기에서도 하느님께서 한 순간도 돌봐 주시시 않는다면 숨을 못 쉬고 살 수 없게 됩니다. 두 이야기에서 공히 “생명을 주시고 매 순간 지켜주시는 사랑과 자비의 하느님”을 말하고 있습니다.


성서를 엮은 편집자는 왜 창조이야기를 두 가지 다 실었을까요? 서로 다르니 적절한 이야기를 하나만 골라서 실었으면 좋았을 텐데요. 그렇지만 편집자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두가지 창조이야기가 다 전하고자 하는 바가 같고, 하느님에 대해서 잘 알려주고 있으니, 두 가지 이야기를 다 실은 것입니다. (성경에서 놀라운 것이 편집자의 양심입니다. 서로 다른 이야기들을 수정 없이 그대로 실었습니다. -차동엽 신부님 복음묵상 테이프에서.)


부모가 가장 속상할 때는 자식들이 무엇을 해 달라고 하는데 그것을 못 해줄 때입니다. 그럼 못된 자식들은 “엄마, 아빠가 나한테 해준 게 뭐있어?”라고 대듭니다. 자식의 그러한 말들은 부모가슴에 대못을 박는 소리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매 순간 숨쉬도록 돌봐주시고, 먹여주시고, 돌봐주시는데도 우리들은 기도하면서 하느님께 늘 뭐해달라고만 청합니다. 그러다가 뜻대로 안되면 “하느님이 나한테 해 준 게 뭐있어?”라고 불평합니다. 오늘 저녁부터는, 매 순간 순간을 돌봐주시는 하느님께 감사기도를 드립시다.



“주 하느님께서는 동쪽에 있는 에덴에 동산 하나를 꾸미시어, 당신께서 빚으신 사람을 거기에 두셨다.”(창세 2,8)

하느님이 매 순간 인간을 지켜주시면서 인간에게 선물을 주십니다. 에덴’은 오아시스를 가리키고, 기쁨, 환희, 낙원, 하느님의 거처를 가리킵니다. 구약성서에서 에덴은 하느님의 거처를 의미합니다.  하느님께서 에덴을 잘 가꾸고 살라고 하십니다. (우리들이 자식 결혼 시킬 때 아파트 사주고, 가구 사주고 하는 것처럼..) 하느님께서는 인간이 너무나 소중하셨기에 인간을 에덴에 데려다 놓으셨습니다. 에덴에서 기쁘게 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에덴에서 산다면 그것은 하느님과 함께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느님과 함께 사니 늘 기쁘고 행복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과 함께 사는 것이 낙원입니다.



“ 동산 한 가운데에는 생명 나무와,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자라게 하셨다.”(창세 2,9)

다른 나무들의 이름은 말하지 않고, 생명나무와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 두 나무의 이름만 언급되어 있습니다. 그 두 나무는 분명 의미하는 바가 있기 때문입니다. 옛날부터 사람들은 인간과 신의 가장 중요한 차이점을 신은 안 죽고, 인간은 죽는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신은 불사불멸의 존재, 전지전능한 존재’를 말합니다. 인간은 불로장생을 해서 신, 하느님이 되려고 합니다. ‘불로장생은 인간의 염원’ 입니다. 중국인들은 옥황상제가 하늘에 있는 천도(天桃)를 마음대로 따먹을 수 있어서 불로장생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서유기에서 손오공이 천도를 따먹고 그 벌로 화염산?에 갇히게 됩니다. 화염산은 지표면의 온도가 70도까지 올라가는 곳입니다. 진시황은 중국 역사상 최초의 통일 국가를 세워서 춘주전국 시대를 끝낸 위대한 왕이었습니다. 진시황은 자기 스스로를 신이라고 불렀습니다. 진시황은 불로장생하기 위해 신하들에게 불로초(不老草)를 구해오라고 명령했습니다.

창세기 저자들은 (천도나 불로초같은) 생명나무가 생명을 좌우하는 게 아니라는 말을 하고 있는 겁니다. 생명나무는 하느님이 에덴에 만들어놓으신 것일 뿐이다. 즉 인간의 생명을 좌우하는 분은 오직 하느님 뿐이다.라는 뜻입니다.

우리 나라 사람들은 보신관광을 즐깁니다. 곰쓸개, 뱀 등등 몸에 좋은 것을 찾아다닙니다. 그렇게 잘 먹고 하느님처럼 되려는 인간의 욕망, 오래 살고 힘 있고 누구든지 부리고 싶어 하는 욕망을 채우려고 합니다. 하지만 인간의 생명을 좌우하는 분은 오직 하느님 한 분 뿐이십니다.




“강 하나가 에덴에서 흘러나와 동산을 적시고 그 곳에서 갈라져 네 줄기를 이루었다.”(창세 2,10)

성경은 지리책이 아닙니다. 네 개의 강이 무슨 무슨 강인가?하고 따지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고대인들은 강도 신으로 숭배했습니다. 중국인들도 황하를 신으로 섬겼습니다. 그럼 왜 네 줄기일까요? 성서에서 4라는 숫자는 동서남북, 즉 세상전체를 의미합니다.

이 구절은 온 세상을 풍요롭게 하는 강물도 하느님의 능력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강을 섬기지 말고 하느님을 섬겨야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주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데려다 에덴 동산에 두시어, 그곳을 일구고 돌보게 하셨다.”(창세 2,15)

우리는 낙원이라면 일을 안하고 노는 곳을 생각합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에덴에 내려 놓으시고 일하라고 하셨습니다. “노동은 인간 삶을 이루는 본질적인 요소입니다. 일하지 않는 사람은 먹지도 말라는 말이 있습니다. 할 일이 전혀 없는 것처럼 괴로운 것도 없습니다. (여자들의 가사노동도 가치 있고 중요합니다. 직업란에 ‘무’라고 적지 마셈^^) 오늘날 ‘노동’이라고 하면 힘든 일을 생각합니다. 왜냐면 일한 만큼 댓가가 없기 때문입니다. 에덴에서의 노동은 수고한 만큼 수확하는 노동입니다. 그래서 기쁨과 감사를 느낄 수 있는 노동이었습니다.


“그러나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에서는 따 먹으면 안된다.”(창세 2,17)

에덴의 나무는 몇 종류나 있었을까요? 셀 수 없이 많았을 것입니다. 그 나무들을 가꾸어 먹기만 하면 되었습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딱 한 나무에서는 따먹지 말라고 하십니다. 흔히 선악과라고 부릅니다. ‘선과 악’은 ‘세상의 모든 이치와 원리’를 뜻합니다.  ‘알다(jada)는 ’체험하다, 소유하다, 장악하다‘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선과 악을 알다”라는 것은 “세상의 모든 이치와 원리를 알아 창조계에 속해 있는  모든 것을 소유하고 장악한다.”는 의미로, 이러한 지배권은 하느님 홀로 지니시는 권한입니다. 인간이 선악과를 따먹는다는 것은 인간 스스로가 창조주인 것처럼, 하느님 노릇을 하려고 한다는 뜻입니다. 인간이 하느님 노릇을 하려면 하느님을 배제시켜야 합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라고 하십니다. “하느님의 금지명령은 인간이 안전한 삶을 누릴 수 있는 자유영역을 보장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교통질서를 잘 지켜야 충돌사고가 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지켜야할 질서가 있습니다. 그 질서를 지키지 않으면 죽게 됩니다. 80살 먹은 아버지한테는 60살 먹은 아들일지라도 여전히 아기로 보입니다. 그래서 80살 먹은 아버지가 아들한테 술 많이 먹지 마라, 차조심해라, 등등을 이야기합니다. 그 말씀은 간섭이 아니라 사랑입니다. 하느님의 금지명령은 우리를 구속시키려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이 분수를 알고 하느님의 보살핌 안에서 자유를 실컷 누리라는 말씀입니다. 하느님의 그 말씀만 지키면 아무런 문제가 없었습니다. 부모가 자식들한테 ’이러이러한 것이 좋다.‘라고 말할 때 자식들이 그대로 알아듣고 따르면 좋겠는데 꼭 엇나가니까 문제가 생깁니다. 하느님께서 보시기에도 우리들은 지금 그렇게 살고 있습니다.



사람이 혼자 있는 것이 좋지 않으니, 그에게 알맞은 협력자를 만들어 주겠다.”(창세2,18)

대단히 중요한 말씀입니다. “인간은 서로 기대어 의지하고 좋은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야 하는 존재”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인간답지 못한 것입니다. 그리스도교 교리의 핵심은 사랑입니다. 사랑은 상대가 있어야 가능합니다.

논어에 ‘덕불고 필유린 (德不孤 必有隣)’이란 말이 있습니다. 덕은 의롭지 않고 반드시 사람이 있게 마련이다, 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흔히 ‘덕이 있다’라고 말할 때는 그 사람의 인간관계를 보고 말합니다. 덕은 반드시 이웃과 관계를 맺어야 생깁니다. 덕성은 인간성을 말합니다. 인간성은 이웃사람과의 관계를 보고 판단합니다. 인간은 혼자서는 살 수 없고 덕을 쌓고 살아야합니다.



이렇게 사람은 모든 집짐승과 하늘의 새와 모든 들짐승에게 이름을 붙여 주었다.”(창세 2,20)

아기에게 이름을 지어주는 사람은 대개는 그 아기와 아주 친밀한 관계에 있습니다. 그렇듯이 사람이 생물에게 이름을 붙여주었다는 말은 “사람과 모든 생물은 친밀한 관계이며, 소유와 지배의 관계“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그는 사람인 자기에게 알맞은 협력자를 찾지 못하였다. 그래서 주 하느님께서는 사람 위로 깊은 잠이 쏟아지게 하시어 그를 잠들게 하신 다음, 그의 갈빗대를 빼내시고 그 자리를 살로 메우셨다. 주 하느님께서 사람에게서 빼내신 갈빗대로 여자를 지으시고, 그를 사람에게 데려오시자, 사람이 이렇게 부르짖었다. ”이야말로 내 뼈에서 나온  뼈요, 내 살에서 나온 살이로구나!“ (창세2,22-23)

인간과 동물이 아무리 친해도 짝, 협조자는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 여자를 만드십니다. 남자의 갈비뼈로 여자를 만드십니다. 그럼 남자를 잠들게 하신 이유는 뼈를 빼내니 아플까봐 마취하셨다는 뜻일까요? 아닙니다. 아담을 잠들게 하셨다고 쓴 이유는 그 당시 고대 이스라엘인들은 하느님을 두려워하여, 사람이 하느님을 직접 보게 되면 죽는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인간이 하느님의 일을 알 수 없도록 인간을 잠들게 하셨다,라고 썼습니다.

왜 하필이면 갈빗대일까요? 탈무드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하느님이 남자의 머리뻐로 여자를 만드려고 했더니 여자를 남자가 지배할까봐 걱정이 되었고, 발에서 만들어내자니 남자가 여자를 노예로 만들 것 같았고, 그래서 같이 끼고 지내라고 갈빗대로 만들었다구요.

갈빗대는 생명을 나타냅니다. 창세기 이야기는 ‘시’처럼 받아들여야합니다. 갈빗대는 남자 여자 똑같이 24개입니다. 여자를 만드신 재료는 결국 갈빗대가 아닙니다. 여자도 남자와 마찬가지로 흙에서 나온 존재입니다. 갈빗대로 만드셨다는 말씀은 “너희 둘은 동등한 존재다. 짝이다.”라는 뜻입니다. 남자가 여자를 보고 좋아서 “이야말로 내 뼈에서 나온 뼈요, 내 살에서 나온 살이로구나!”하고 외칩니다. “남자와 여자는 같은 기원을 가졌고, 같은 본성, 같은 품위를 가진 존재입니다.” 옛날 여자들은 남자들에 비해 지위가 형편 없었습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여자들은 남자와 같은 밥상에서 밥을 못 먹고 부엌에서 먹었습니다. 예전에는 여자를 독립된 인격으로 생각하지도 않았습니다. 남자의 종속적인 존재, 남자의 재산으로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 옛날에 창세기의 저자는 그렇지 않다고 이야기하고 있는 겁니다. 창세기는 약 3000년 전에 쓰여진 책입니다. 그 당시에 남녀평등을 이만큼 주장한 책은 없습니다.



“남자에게서 나왔으니 여자라 불리리라”(창세2,23)

남자는 ‘지아비 ish’, 여자는 ‘지어미 ishah’ 입니다. ish 와 ishah 는 비슷하면서도 서로 구별되는 다른 존재입니다. 남자아이들이 목욕갈 때 처음에는 엄마와 함께 여탕으로 가지만 서로 상대를 알아보고 남자인지 여자인지 구별하게 되면 더 이상 엄마랑 목욕가지 않습니다. 여자와 남자는 서로 비슷하면서도 다르니까요.  “사람은 남자와 여자로 구별되고, 남자와 여자는 서로 거들 짝으로서 서로를 보완하여 온전한 인간상을 이루게 됩니다.



그러므로 남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아내와 결합하여, 둘이 한 몸이 된다.”(창세2,24)

사람들이 짝을 만나는 것을 보면 대개 만날 사람들이 만나게 됩니다. 인간의 짝도 스스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짝지어주는 것입니다. 부부싸움을 하는 이유는 서로 제 짝인지 못 알아봐서입니다. 또 사람을 보고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가문, 집, 돈을 보고 선택을 하니 그렇습니다. 자기가 선택한 책임을 져야하는데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습니다. 사람의 인연은 참 묘합니다. 이 세상에서 제일 가까운 사람은 부모자식간입니다. 그 다음이 형제간입니다. 하지만 커서 짝을 만나게 되면 부모형제보다도 부부사이가 제일 가깝게 됩니다. 그것이 섭리입니다. ‘한 몸이 된다“라는 뜻은 ”한 인격이 된다“라는 뜻입니다. 남자와 여자의 결합은 하느님의 뜻이며 축복“입니다.



“사람과 그 아내는 둘 다 알몸이면서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창세2,25)

하느님이 옷을 아직 안 만들어주어서 옷을 벗고 있었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사람이 벌거벗었다는 말은 자기를 다 내보여준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둘 다 알몸이면서 부끄러워하지 않는 상태”는 “인간이 서로 있는 그대로는 개방하고도 마음의 평화와 균형이 깨어지지 않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것이 에덴의 상태입니다. 인간이나 동물에게 자기를 개방하는 상태입니다. 마음의 평화가 깨지는 것은 부끄러울 때입니다. 우리들에게 가장 편한 곳은 집입니다. 제일 흉허물 없는 사람들과 사는 곳도 집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사는 집도 에덴과는 거리가 있습니다. 에덴의 순수함에는 못 미칩니다. 상대에게 나의 모든 것을 다 보여줘도 평화가 깨지지 않으려면 우리들 자신이 정화된 상태, 편견이 없는 상태,,,(못 받아썼습니다.)가 되어야합니다.


두 번째 창조이야기에서는 하느님과 창조계에 존재하는 모두가 그지없이 좋은 관계를 이루고 있습니다.

  ․ 하느님과 인간과의 관계가 아주 좋다

  ․ 인간과 인간과의 관계도 아주 좋다

  ․ 인간과 자연, 인간과 동물과의 관계 역시 아주 좋다.

인간이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만 따먹지 않았으면 우리는 아름다운 곳, 에덴에서 살았을 것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는 전쟁, 무고한 죽음, 사고, 살인, 도둑질 등이 끊이지 않습니다. 세상이 왜 이렇게 되었을까요? 3000년 전에 창세기를 쓴 저자들도 그런 의문을 가졌습니다. 무엇 때문인가에 대해서는 다음 시간에 계속하겠습니다.


=================================================


*김양진 선생님의 훌륭한 강의, 완벽한 파워포인트 자료에 매 시간 놀랍니다.

김양진 선생님,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