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교실(구약) : 자료 -05
인간의 범죄와 하느님의 구원 약속
* 뱀의 상징
고대사회에서 뱀은 지혜의 상징, 생명과 치유의 상징, 풍요와 다산의 상징이었으며, 가나안 사람들의 대표적인 신인 바알신도 뱀으로 상징되듯 숭배의 대상이었다.
* 두 번째 창조이야기 후반부(창세 3장)의 핵심
- 유혹의 핵심은 “인간도 하느님처럼 될 수 있다.”는 것이다.
- 하느님의 진리는 인간이 지닌 한계 안에서 생명과 자유를 보장.
- 뱀의 거짓은 인간의 무한한 욕망과 무절제한 욕구를 충동질.
- 인간은 자신의 판단에 따른 선택과 책임만 남아있을 뿐이다.
- 인간 공동체는 필연적으로 연대성을 지닌다.
- 인간의 범죄는 하느님의 창조 질서를 뒤엎은 반창조적 행위히다.
- 인간은 범죄로 인해 창조 때의 순수한 상태를 잃어버렸다.
- 인간의 범죄로 하느님과 관계는 물론 창조계와의 좋은 관계가 깨어진다.
^ 하느님과의 관계가 깨어진다.
^ 동료 인간과의 관계도 깨어진다.
^ 인간과 자연, 인간과 동물과의 관계도 깨어진다.
- 하느님의 처벌은 인간의 존재적 측면에 내려진다.
- 죽음은 인간의 범죄로 인한 처벌이 아니다.
-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범죄에도 불고하고 “자식을 낳고 번성하라‘는 축복은 거두어들이지 않으신다.
* 원인론적 설명
세상에는 여러 가지 궁금한 현상들이 많은데, 그 원인을 설명하기 위해 이런 저런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 것을 말한다.
* 원죄(原罪)
아담으로 대표되는 모든 인간들이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 살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한계를 무시한 채 헛된 욕망을 품고 유혹에 빠져 하느님을 배반함으로써 하느님의 곁을 떠나게 되는 집단적인 경향을 가리킨다.
* 원죄(原罪)와 본죄(本罪)의 차이점
^ 원죄란 인간이 지닌 나약함과 한계성 때문에 죄를 지을 수 있는 원초적인 가능성을 말한다.
^ 본죄란 자신의 의지를 가지고 실제로 저지르는 죄를 말한다.
^ 인간은 원죄 때문에 단죄되지는 않지만, 원죄를 구체화하는 개인적인 본죄로 인해 단죄 받게 된다.
* ‘하와’라는 이름
‘하와’(히브리어 Hawwa)는 ‘생명’이란 뜻의 ‘하야’(히브리어 hajja)에서 왔으며, ‘모든 생명체의 어머니’라는 뜻이다.
* 원복음(原福音)
인간의 죄에 대한 하느님의 용서와 구원이 예시되어 있는 “뱀과 여자가 원수 사이가 되고 서로 투쟁하게 되겠지만, 결국 여자의 후손이 승리하리라”는 희망의 메시지를 ‘원죄’에 대비되는 ‘원복음’이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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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음 주 주제 : 하느님 곁을 떠난 인간의 처지
* 읽어야 할 성경 : 창세 4장 -11장
* 성경 구절 쓰기 : 창세 4,10-12 ; 4,125 ; 6,5-6 ; 7,1-4 ; 7,11 -12 ; 7,22-23 ; 9,8-11 ; 1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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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김양진 선생님의 강의 내용입니다. ^^ ☺♬☆ 김양진 선생님! 홧팅~~ 만세 ㅎㅎㅎㅎ
오늘은 두 번째 창조이야기의 후반부를 공부합니다.
두 번째 창조이야기는 야휘스트계 문헌이므로 솔로몬 시대의 현자들에 의해 쓰여진 이야기입니다. 솔로몬 시대에는 지혜학교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솔로몬 왕도 지혜로운 왕으로 유명했습니다. 솔로몬 시대의 현자들이 솔로몬 왕의 행태를 지켜봤습니다. 솔로몬 왕의 아버지 다윗왕이 이스라엘을 통일했고, 광대한 영토를 물려주었습니다. 광대한 영토를 물려받은 솔로몬왕은 초창기에는 하느님의 뜻을 잘 받들고, 정치를 아주 잘했습니다. 솔로몬과 시바의 여왕이라는 영화에서 나오듯이 인근 나라에서 조공도 바치러 오고, 나라가 잘 나갔습니다. 매사에 잘 나갈 때는 조심해야 될 때입니다. 우리가 일상생활 할 때도 너무 잘 나가면 한 걸음 멈춰설 줄 알아야 합니다. 솔로몬은 너무 잘나가다 보니까 지나친 일을 많이 했습니다. 성전도 지었지만 아주 화려한 궁전을 지었고, 후궁만 700명을 두었습니다. 수많은 이방인 여자들이 후궁으로 들어오면서 그들의 종교까지 가지고 들어와서 우상숭배가 성행했습니다. 솔로몬왕은 점점 나라가 잘 된 것은 하느님 덕이 아니라 자기가 잘나서 잘된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마치 자기가 하느님인 것처럼 굴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나라가 잘 될 리가 없었습니다. 솔로몬이 죽고 나자 나라는 둘로 갈라지고, 결국에는 두 나라가 다 망하게 되었습니다. 야휘스트 문헌을 쓴 현자들은 이미 솔로몬이 잘 나갈 때 그런 결과를 예견했습니다. 현자들은 인간이 교만해졌을 때, 스스로 하느님인 것처럼 굴었을 때, 인간이 어떤 처지에 빠지게 되고, 어떤 잘못을 저지르게 되고, 그 결과가 어떻게 될 것인가 하는 것을 아주 깊이 깨우쳤던 겁니다. 두 번째 창조이야기의 후반부는 솔로몬 이야기에서 모티브를 가져오지만 솔로몬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모든 인간은 다 이런 행태로 빠집니다. 현자들은 인간이 자기 분수를 모르고 하느님처럼 된다는 것이 제일 큰 죄라는 이야기를 하기 위해 두 번째 창조이야기의 후반부를 기록하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두 번째 창조 이야기도 현세의 우리와 동떨어진 옛날이야기가 아니고, 바로 내 이야기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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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뱀은 주 하느님께서 만드신 모든 들짐승 가운데에서 가장 간교하였다. 그 뱀이 여자에게 물었다.”하느님께서 ‘너희는 동산의 어떤 나무에서든지 열매를 따먹어서는 안된다’고 말씀하셨다는데 정말이냐?“(창세 3,1)
뱀이 인간이 죄를 짓도록 꼬였습니다. “생떽쥐베리의 어린왕자에서 어린 왕자와 보아뱀이 이야기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우화에서는 인간과 동물이 이야기하는 것이 한 양식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뱀이 인간을 유혹하는 동물로 나올까요? 고대에는 뱀이 ‘숭배의 대상’이었습니다. 파라오 왕관 한 가운데에 뱀이 뻣뻣하게 서 있는 모습으로 조각되어 있습니다. 고대에는 뱀을 지혜의 상징으로 봤습니다. 그래서 옛날 격언에 “뱀처럼 슬기롭게, 비둘기처럼 양순하게”란 말이 있었습니다. 고대에는 뱀이 ‘지혜의 상징’이고, 꾀가 많은 동물로 여겨졌습니다. 또 뱀은 ‘생명과 치유의 상징’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인간은 늙어서 주름이 생기고 회생을 못하고 죽습니다. 그런데 뱀은 허물을 벗은 후에는 더 생생하게 살아납니다. 그래서 고대인들은 뱀은 죽지 않는다고 생각했고 뱀에게는 영원한 생명과 치유의 능력이 있다고 믿었습니다. 오늘날에도 병원 마크, 미군 의무부대 마크에 뱀이 그려져 있습니다. 또 뱀은 ‘풍요와 다신의 상징’이었습니다. 사막에는 뱀이 우글우글 합니다. 그래서 땅신을 섬기기 위해 뱀을 섬기기도 했습니다. 오늘날에도 인도나 네팔에 가면 실제로 뱀을 숭배합니다. (코브라 뱀 앞에서 네팔의 한 남자가 절하는 사진) 고대 이스라엘인들은 유목민이었다가 농사를 짓게 됩니다. 농경사회로 들어가면서 수확을 많이 거두고 싶어서 땅신인 뱀에게 경배를 하려는 유혹이 생겼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많은 수확을 얻기 위해서 이방신 숭배에 대한 유혹을 많이 느꼈습니다. 그래서 창세기 저자는 뱀이 특별히 치유의 능력이 있거나 지혜로운 동물이 아니고, 하느님이 만들어 놓은 짐승에 불과하며, 지혜를 갖고 있는 게 아니라 간사한 꾀밖에 없는 동물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싶었습니다. 뱀을 신으로 섬긴다는 것은 우상숭배에 불과하다는 뜻으로 두 번째 창조 이야기의 저자는 뱀을 유혹자로 등장시킨 것입니다.
뱀이 하와를 꼬임 - 진리와 거짓의 대립
“하느님께서 ‘너희는 동산의 어떤 나무에서든지 열매를 따먹어서는 안된다’고 말씀하셨다는데 정말이냐?” 하느님이 아담을 데려다 놓고 모든 나무열매를 다 먹어도 좋다, 그런데 딱 하나,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만은 먹지마라고 하셨는데, 그 말을 교묘하게 짜 맞추어 유혹합니다. ‘모든 나무 열매’라는 말을 따오고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는 말 중에서 ‘먹지 말라’는 말을 붙여놓았습니다. 교묘하게 진실과 거짓을 붙여서 부분을 전체인 양 확대한 것입니다. 뱀은 하느님 말을 인용하면서도 부분을 전체로 확대과장한 교묘한 왜곡을 해서 하와를 유혹합니다.
두 사람이 모여서 그 중 한사람이 도둑질을 하자고 나머지 한사람을 꼬일 때 처음부터 같이 도둑질 하자라고 하면 응할 사람 없습니다. 그럴 때는 이렇게 꼬입니다. “너 참 살기 힘들지? 근데 열심히 하려고 해도 안되지? 그런데 잘사는 사람들을 봐라. 법 제대로 지키고 돈 버는 사람 봤냐? 재벌들, 정치가들 법 지켜서 돈 버는 사람 하나도 없다. 근데 우리는 빽도 없고 뭣도 없으니 우리가 할 짓이 뭐있겠느냐? 훔쳐서라도 마누라도 맛있는 거 사주고 아이들 학비도 대줘야할 것 아니냐?” 이런 식으로 “세상에 법을 제대로 지키고 살면서 잘 사는 사람 봤어?” 라며 꼬입니다. 그 말은 절반은 맞는 이야기이지만 , 절반은 유혹입니다. 또 어떤 사람이 이야기 할 때 어떤 사람이 한 사람에 대해서 불평을 합니다. 그걸 들은 사람은 세상 사람들이 다 불평하더라, 라고 봅니다. 그렇게 한 두사람 이야기를 가지고 침소봉대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또 어떤 사람에 대해 안 좋은 평이 돌 때, 그 사람과 가까운 친구가 “세상 사람들이 다 그 아이를 험담해도 나는 그 애가 좋다.”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 말을 듣고 다른 사람에게 다시 전하는 사람이 ‘좋게 생각한다’는 뒷말은 빼버리고,“ 세상에 믿을 사람 하나도 없더라. 걔가 너보고 ‘나쁜 사람’이라고 하더라”라고 말합니다. 그런 경험들이 있으실 것입니다. 이렇게 진실과 거짓이 뒤섞인 교묘한 유혹을 받으면 처음에는 긴가민가 하다가 솔깃해져서 속게 됩니다. 뱀이 여자를 꼬일 때 이런 수법을 쓴 것입니다. “우리는 동산에 있는 나무열매를 먹어도 된다.”(창세 3,2) 라는 말까지는 사실입니다. 하느님이 다 먹지 말라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다 먹으라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여자는 한 마디로 대답하기가 좀 난처했습니다. 뱀에게 “그러나 동산 한가운데에 있는 나무 열매만은, ‘너희가 죽지 않으려거든 먹지도 만지지도 마라.”라고 대답합니다. 한 마디를 덧붙인 게 문제가 됩니다. 사실은 하느님이 먹지 말라고는 하셨지만 만지지도 말라고는 하시지 않았습니다. 그런 성향이 인간 모두에게 있습니다. 하느님은 참 좋은 분이고, 에덴에 우리를 데려다 놓고 잘 먹게 해 줬는데. 어쩐지 하느님이 나를 간섭하는 것 같고, 내가 자주적으로 살려고 하는데. 엄격하고 규율이 심한 것 같다며 뭔가 모르게 하느님께 불만을 갖습니다. 뱀은 사람들의 ’진실을 과장하는 마음의 허점‘을 파고듭니다. 부모가 아이에게 “네 선생님 어떠시냐?”하고 물으면 “우리 선생님 좋기는 좋아요. 좋은데요.··...”하고 뒤에 한 마디 꼭 붙입니다. 여기에서 유혹이 들어갈 여지가 생깁니다. 진실은 진실에서 끝나야 하는데,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고 했다고 하니 뱀이 유혹할 여지를 얻은 것입니다. “너희는 결코 죽지 않는다.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 너희는 눈이 열려 하느님처럼 되어서 선과 악을 알게 될 줄을 하느님께서 아시고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다.”(창세 3,4-5) 뱀이 기가 막히게 잘 꼬입니다. 뱀은 인간이 하느님에 대해 완전한 신뢰를 하지 못하고 뭔가 께름직하게 여기고 불만을 가질 때 그 허점을 파고듭니다. 인간은 하느님이 절대적인 존재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나도 하느님처럼 되었으면’하고 바라지만, 하느님이 그렇게 못되도록 막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인간의 허점을 파고 든 겁니다. 즉, 유혹의 핵심은 : ‘인간도 하느님처럼 될 수 있다는 것’ 입니다. “너희는 절대 그것 먹는다고 안 죽어. 니들도 하느님처럼 될 수 있어. 그 하느님이 니들을 위해서 하신 것 같지만. 하느님은 굉장히 질투심이 심한 분이야. 이거 먹으면 너희들도 하느님처럼 될 수 있는데, 그렇게 되면 하느님이 설자리가 없으니까. 니들 못 먹게 하는 거야. 니들 계속 종노릇 시키려고 그러시는 거야.”라고 유혹합니다. 하느님을 인간에게 좋지 않은 일을 해주시는 분처럼 뒤바꿔 놓은 것입니다. 인간이 하느님처럼 되고 싶어하는 것은 인간의 기본적인 욕망인데. 뱀은 그 욕망을 집요하게 파고 들었습니다. 뱀은 하와를 꼬여놓고 사라집니다. 억지로 선악과를 따 먹이지는 않았습니다.
인간의 범죄 - 인간의 선택
뱀이 사라지고 나서 인간이 선과 악 나무 앞에 앉아서 생각했습니다. “너희는 피조물이니 인간의 한계를 인정하라”는 하느님의 사랑어린 충고를 생각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한계를 지키면 생명과 자유를 누릴 수 있도록 보장해주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뱀은 ”너희도 하느님이 될 수 있다“고 유혹했습니다. 인간으로서의 한계를 무시하고픈 인간의 무한한 욕망, 무절제한 욕구를 계속 충동질 했던 것입니다. 사람은 하느님의 말과 뱀의 말 둘 중에서 하나를 선택해야합니다. 하느님이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셨기 때문에 선택의 자유는 있습니다. 하지만 선택을 하되 거기에 대한 책임은 인간이 져야 합니다. 인간은 자신의 판단에 따른 선택을 하고 그에 따른 책임을 져야 합니다. 뱀의 말을 듣고 보니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가 평소보다 더 좋게 보이기 시작합니다. ”여자가 쳐다보니 그 나무 열매는 먹음직하고 소담스러워 보였다. 그 뿐만 아니라 그것은 슬기롭게 해 줄 것처럼 탐스러웠다.“(창세3,6) 우리에게도 그런 경우가 많습니다. 명품 옷, 명품 시계에 평소에는 별로 관심이 없다가도 동창회를 나가서 친구들이 명품을 갖고 있는 것을 보면 나도 가져야겠다는 생각이 들고, 명품이 없으면 내가 빠진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명품을 갖고 있으면 레벨이 올라가는 것처럼 느껴져서 사고 싶어집니다. 하와는 따먹지 말라는 나무열매를 먹지 않더라도 다른 열매들을 먹고 배가 부르니 평소에는 선악과을 무심히 지나쳤었는데, 뱀의 유혹을 받고 나니 그걸 따먹고 싶어진 것입니다. 인간이 무엇을 먹고 싶어 하거나 갖고 싶어 하는 욕망은 자연스러운 현상입니다. 잘 먹고, 좋은 집에서 살고 싶은 욕망 등은 자연스러운 현상입니다. 문제는 자기 욕구나 취미를 만족하고 싶어서 욕심내는 것이 아니라, 슬기롭게 해 줄 것처럼 기대했다는 데 있습니다. 스테이크와 포도주를 근사하게 먹고 싶은 욕망을 가졌다면 그저 입맛 돋구기 위해 먹고 싶어 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먹음으로써 슬기로워지려고 한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세상 모든 이치를 다 아는 지혜를 가져서 하느님처럼 되고 싶어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더 좋은 것을 갖고 맛있는 것을 먹고 싶어 하는 것 자체는 죄가 아닙니다. 그것을 통해서 인간이 하느님처럼 되고 싶어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하느님과 같은 존재가 되어 하느님의 자리를 차지하려는 인간의 욕망이 문제입니다. 인간이 하느님 자리를 차지하면 하느님은 쫓겨나야 됩니다. 하느님 없이도 우리가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내가 이 세상 모든 이치를 다 알고 세상을 지배하면서 살겠다. 하느님이란 존재는 필요하지 않다.” 라고 생각하는 것이 죄입니다.
인간 공동체의 연대성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자” (창세 3,6) 여자들이 유혹에 약해서 먼저 열매를 따먹었을까요? 아니면 모든 범죄의 뒤에는 영화 타짜에서처럼 여자가 있다는 말일까요? 그래서 여자가 먼저 따먹었다고 했을까요? 아닙니다. 성서는 그런 호기심을 만족시키려고 쓴 게 아닙니다. 단지 여자가 먼저 따먹고 남편에게도 권했다는 이야기를 통해 인간 공동체의 연대성 (連帶性)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 공동체가 하느님 뜻에 따를 때는 훌륭한 일을 할 수 있지만 하느님의 뜻을 어기면 나쁜 짓을 하게 됩니다. 창조 이야기에서 아담이 먼저 선과악을 알게하는 나무열매를 따먹었다고 해도 같은 이야기입니다. 아담이 먼저 따먹었다고 읽으셔도 됩니다.
인간이 저지른 죄의 의미
하느님이 이 세상을 아름답게 창조하셨고 인간이 살 수 있는 좋은 환경을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인간에게 그 모든 것을 다스리라고 하셨습니다. 위계질서가 하느님 → 인간 → 뱀(자연) 순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하느님 → 인간 → 뱀(자연) 순의 위계질서는 ‘창조의 질서가 유지되는 조화로운 상태’입니다. 이 질서가 지켜지면 인간은 아름답고 조화로운 세상에서 살아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인간은 하느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인간이 저지른 범죄의 의미는 ‘창조질서를 깨뜨리는 반창조적인 행위’를 했다는 것입니다. 제일 밑에서 부림을 당해야 될 뱀이 하느님의 자리에 올라간 것, 즉 인간이 부려야 될 짐승의 말을 듣고 인간이 하느님을 짓밟으려 한 것입니다. 위계질서가 뱀(자연) → 인간 →하느님 순으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인간의 범죄는 하느님께서 인간을 위해서 아름답게 창조하신 세상의 질서를 깨뜨린 엄청난 사건입니다. 단순히 열매 하나 따먹은 것이 죄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창조 때의 순수함을 잃어버린 인간
당연히 하느님의 처벌이 있게 됩니다. 처벌을 받기 전에 인간이 스스로 죄를 깨닫게 됩니다. ”그러자 그들은 눈이 열려 자기들이 알몸인 것을 알고, 무화과 나무 잎을 엮어서 두렁이를 입었다.“(창세 3,7) 두렁이는 아기들이 치마같이 두르는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아프리카나 중남미 인디언들은 두렁이를 두르고 삽니다. 인간이 예전에는 발가벗고 살아도 부끄럼 없이 순수했습니다. 그런데 인간이 창조 때의 순수함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그 순수함이 깨져버린 것입니다. 뱀의 말이 일부는 맞았습니다. 선과 악을 따먹으면 눈이 밝아진다고 유혹했는데, 과연 눈이 밝아졌습니다. 그런데 눈이 밝아지고 나니 자기가 하느님이 된 것이 아니라 벌거벗었다는 사실만 깨닫게 됩니다. 하느님은 인간이 벌거벗건 말건 상관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인간 스스로가 자신이 못난 존재라는 것을 알았을 뿐입니다. 뱀의 말은 일부는 사실이 아니었습니다. 인간은 그래서 부끄러움을 느끼고 숨었습니다. 따라서 하느님과 인간의 좋은 관계가 깨진 것입니다. 하느님이 인간을 찾으십니다. ” 너 어디 있느냐? “하고 물으셨습니다. ”동산에서 당신의 소리를 듣고 제가 알몸이기 때문에 두려워서 숨었습니다.“(창세 3,10) 에덴은 하느님의 거처입니다. 인간이 두려웠다는 말은 죄를 지어서 하느님 앞에 떳떳하게 나설 수 없다는 말입니다. 인간의 범죄 이전에는 인간과 하느님과의 사이가 정말 좋았습니다. 하느님 앞에서 스스럼이 없었는데, 죄를 짓고 난 후로는 하느님 앞에서 숨어야 하게 되었습니다. 하느님과 인간사이의 좋은 관계가 깨져버린 것입니다. 인간이 하느님 앞에 거리낌 없이 나설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범죄한 인간의 변명
자식은 나이를 먹어도 부모에게 혼날 일을 저지르기도 합니다. 잘못했을 때 잘못을 인정하고 용서를 빌면 좋을 텐데, 야단 맞을 것을 알고 숨어버리게 됩니다. 또 다른 사람 때문에 그랬다고 변명만 하기도 합니다. 안타까운 일입니다.
아담이 먼저 변명을 합니다. ”당신께서 저와 함께 살라고 주신 여자가 그 나무 열매를 저에게 주기에 제가 먹었습니다.“ (창세3,12) “ 제가 먹긴 먹었어요. 하느님이 주신 여자 때문이다.”라는 변명은 무서운 말입니다. 원어에는 ‘저 년’ 때문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아담은 하느님이 그 여자를 주셨으니, 결정적인 책임은 하느님과 여자한테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이 여자에게 묻습니다.”너는 어찌하여 이런 일을 저질렀느냐? “ 인간은 동물(뱀)하고 이름지어주는 사이, 아주 친한 사이였습니다. 남자는 하느님과 짝 (동료인간) 탓을 하고, 여자는 뱀을 탓합니다. 그러니까 관계가 깨지게 됩니다. 하느님과 관계가 깨지고 동료인간간의 관계도 깨지고, 짐승과의 사이도 깨집니다. 동료 인간, 동물과의 좋은 관계도 깨어집니다. 좋은 관계를 회복하는 일은 다시 하느님과 관계를 올바른 관계로 되살리는 방법밖에 없습니다. 우리 모두 그렇습니다. 세상 일이 다 잘 되면 다 내가 잘해서라고 생각하고, 일이 잘 안 풀리면 조상 탓, 친구 탓, 하느님 탓을 합니다. 그러면 안됩니다.
뱀에 대한 처벌
하느님이 뱀에게 벌을 내립니다. ” 네가 사는 동안 줄곧 배로 기어 다니며 먼지를 먹으리라.“(창세 3,14) 이 말씀은 원인론적 설명입니다. 원인론적인 설명이란 ”세상에는 여러 가지 궁금한 현상들이 많은데, 그 원인을 설명하기 위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 것을 말합니다. 옛날에 전쟁을 하면 진 쪽의 포로들을 수치스럽게 하기 위해 땅에 기도록 만들었습니다. 뱀도 하느님께 대들었다가 포로처럼 기어다니는 신세가 된 것입니다. 고대에는 뱀이 숭배의 대상이었기에 파라오 관의 뱀도 빳빳하게 서 있는 것으로 조각했습니다. 그런데 그게 아니라 뱀은 인간을 꼬드긴 죄로 벌을 받았다고 이야기 했습니다. 그 이야기는 원인론적인 이야기입니다. 세상사에 궁금한 것이 많습니다. 성경에 “하늘을 보니 독수리가 난다. 길도 모르는데. 배가 지나간다. 길도 없는데, 뱀은 발도 없는데 잘 다닌다.” 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그런 궁금한 일들을 설명하기 위해 뱀은 하느님 벌 받아서 기어 다니게 되었다고 한 것입니다. 그런 것을 원인론이라고 합니다. 앞으로 원인론 이야기가 많이 나올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뱀이 옛날에는 서 있다가 기어 다니게 되었다는 뜻은 아닙니다. 단군신화에 호랑이와 곰이 동굴에서 마늘하고 쑥을 먹고 살았다고 합니다. 웅녀 이야기는 우리 한민족의 성격이 은근과 끈기를 지녔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한 원인론적 이야기입니다. 한국인의 심성을 설명하려는 이야기입니다.
여자에 대한 처벌
여자에 대한 처벌 “나는 네가 임신하여 커다란 고통을 겪게 하리라. 너는 괴로움 속에서 자식들을 낳으리라. 너는 네 남편을 갈망하고 그는 너의 주인이 되리라.”(창세 3, 16) 이것도 원인론적인 이야기입니다. 여자의 주된 역할은 아내가 되는 것과 어머니가 되는 것입니다. 아이를 낳는 것은 기쁘고 복된 일인데, 왜 산고를 겪어야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또. 여자도 남자하고 똑같은 인간인데 왜 사람 대접을 못 받고 사는가? 하는 것들이 궁금했습니다. 그래서 그건 하느님이 여자를 애기 낳고, 비천하게 살라고 만드셨기 때문이 아니라 인간이 죄로 그렇게 되었다고 창세기 저자가 설명한 것입니다.
남자에 대한 처벌
하느님께서 남자를 처벌하십니다. “땅은 너 때문에 저주를 받으리라. 너는 사는 동안 줄곧 고통 속에서 땅을 부쳐 먹으리라. 땅은 네 앞에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돋게 하고 너는 들의 풀을 먹으리라. 너는 흙에서 나왔으니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양식을 먹을 수 있으리라. 너는 먼지이니 먼지로 돌아가리라.”(창세 3,17-19) 죄는 땅이 짓지 않고 사람이 지었습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벌을 땅에 내리십니다. 하느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실 때 땅에게 사람이 먹을 것을 돋아나게 해라. 온갖 식물을 내어라.라고 하셨습니다. 인간은 그것들을 거두어 먹기만 하면 되었었습니다. 인간은 흙에서 나온 존재이니, 하느님의 처벌은 인간의 존재적 측면에 내려진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고통스런 노동, 힘겨운 생계를 꾸려야하게 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그 대신에 인간에게는 저주를 내리시지 않으십니다. 전에는 땅에 무엇을 심기만 하면 잘 났겠지만 이제는 땅에서 가시덤불과 엉겅퀴가 자라게 됩니다. 에덴에서의 인간의 노동은 수고한 만큼의 댓가를 얻을 수 있는 기쁨의 노동이었고, 인간 생존에 필요한 작업이었지만. 에덴에서 쫓겨난 후로는 세 끼 걱정해야 되고, 땀을 흘려 일을 해도 댓가가 충분치 않고, 고통스럽게 노동하고, 하루의 생계를 걱정해야 됩니다. 사람이 다시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벌을 받는 것입니다.
사람이 죄를 안 지었으면 안 죽었을 것인데 죄를 지어서 죽게 된 것은 아닙니다. 인간은 원래 흙에서 나서 흙으로 돌아가는 존재입니다. 하느님 말씀에 충실하면 낙원에서 죽을 때까지 살 수 있었는데, 이제는 죽을 때까지 고생하면서 살아야 하게 되었습니다. 죽음은 죄를 지어서 온 벌이 아닙니다. 사람이 나서 죽을 때까지 삶의 조건이 고통스러워졌다는 것이 인간이 받은 벌이다.
원죄 (原罪) - 인간이 하느님의 뜻을 배반함으로써 하느님 곁을 떠나려는 집단적 경향.
‘원죄’라는 개념이 창세기에는 나오지 않습니다. 신학적인 개념입니다. 아담을 비롯한 인간이 하느님 없이도 살면서 하느님처럼 될 수 있다며 마음으로 죄를 짓고 하느님을 떠나고자 하는 집단적인 성향이 원죄입니다. 원죄와 본죄의 차이를 이해해야 합니다. 원죄란 인간이 지닌 나약함과 한계성 때문에 죄를 지을 수 있는 원초적인 가능성을 말합니다. 유혹을 받을 수 있는 여지를 갖고 태어났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10억짜리 다이아몬드를 누가 준다면 모두 좋아할 것입니다. 갖고 싶다는 마음 자체는 정상적인 것입니다. 그런데 너무 갖고 싶어서 훔쳐서라도 가져야지 하는 마음이 드는 것이 유혹입니다. 마음이 드는 것, 유혹 자체는 죄가 아닙니다. 인간은 나약하니까 유혹 받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도 광야에서 유혹 받으셨습니다. 그 유혹을 이기지 못해서 훔칠 때 죄가 되는 것입니다. 인간은 항상 유혹받을 수 있는 여지가 있습니다. 그 때 그 유혹을 이겨내야 되는 것입니다. “나 하나도 유혹 안 받게 해주세요.”라고 말할 것이 아닙니다. 그 유혹을 이기지 못해 범죄를 저지르면 벌을 받게 됩니다. 원죄(原罪)와 본죄(本罪) -인간은 원죄 때문에 단죄되지는 않지만, 원죄를 구체화하는 개인적인 본죄로 인해 단죄 받게 됩니다.
하느님은 축복을 거두어들이지 않고 보호해 주심.
아담이 아내에게 이름 붙여줍니다. “사람은 자기 아내의 이름을 하와라고 했다.”(창세 3,20) 하와(Hawwa)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Hajja, '모든 생명체의 어머니'란 뜻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이 반 창조적인 범죄를 저질렀지만 인간에게 내렸던 축복을 거두어들이지 않으십니다. 뱀은 땅신으로 숭배되었지만 세상의 생명을 내는 것은 땅 자신이 아니라 하느님이 내라고 해서 낸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는 모든 생명이 사람에게서 나오게 됩니다. 인간은 하늘의 창조사업을 이어받을 수 있는 유일한 존재입니다. 아이를 낳는 것은 창조사업에 보탬이 되는 것입니다.
에덴에서 추방된 인간 - 낙원에서 살아갈 수 있는 복을 스스로 차 버린 인간
하느님께서 인간을 에덴에서 추방하십니다. “주 하느님께서는 그를 에덴 동산에서 내치시어, 그가 생겨 나온 흙을 일구게 하셨다.”(창세 3, 23) 우리가 흔히 죄를 지으면 지옥에 간다고 말합니다. 하느님이 나를 지옥으로 떨어뜨린다고 생각합니다. 그게 아닙니다. 내가 하느님 말씀을 잘 들으며 이 세상을 산다면 천국을 살 수 있는데, 내가 스스로 그 길을 버리고 지옥으로 가는 것입니다. 에덴(천국)에서 죽을 때까지 살 수 있는 복을 인간 스스로 차 버린 것입니다. 인간 스스로 지옥을 선택해서 살고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구원 약속
“나는 너와 그 여자 사이에, 네 후손과 그 여자의 후손 사이에 적개심을 일으키리니 여자의 후손은 너의 머리에 상처를 입히고 너는 그의 발꿈치에 상처를 입히리라.” (창세 3,15)
발꿈치에 상처를 입히는 것은 경상이지만, 머리에 상처를 입히는 것은 중상입니다. 결국 여자의 후손이 이긴다는 말씀입니다. 하느님은 뱀에게 내린 저주 안에 인간의 범죄에도 불구하고 인간을 구원해내시겠다는 메시지를 넣어주셨습니다. 창세기 3장에서 인간은 하느님께 엄청난 죄를 짓지만 하느님이 우리를 구원하시리라는 희망의 메시지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인간의 죄에 대한 하느님의 용서와 구원이 예시되어 있는 이 희망의 메시지를 ‘원죄’에 대비되는 ‘원복음’(기쁜 소식)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하느님께 아무리 잘못했어도 구원받을 수 있는 희망이 있습니다. 우리에게 제일 나쁜 것이 포기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 다시 매달리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다투고 주일미사 몇 번 빠졌다고 해서 하느님과의 관계를 포기해버린다면 그 포기가 가장 큰 죄입니다.
하와의 손은 바로 나의 손
우리들은 하와가 선악과만 따먹지 않았어도 우리가 이렇게 고생하지 않아도 되고 복잡하게 살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선악과를 따먹은 하와의 손은 하와 한 사람만의 손이 아니라 바로 우리들의 손입니다. 우리는 돈만 있으면 세상에 못할 것이 없고 세상을 지배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 마음이 온갖 술수를 써서 하느님처럼 되고자 하는 마음입니다. 그런 것들이 오늘날의 선악과입니다. 지금 여수에서 보궐 선거운동이 한창입니다. 출마할 때는 봉사하고 종이 되겠다고 말하지만 당선되고 나면 군림하려고 듭니다. 돈, 권력, 명예를 따기 위해 내미는 우리의 손이 바로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으려고 내미는 손입니다. 창세기를 공부하면서 하와만 아니었으면,, 이라고 생각할 것이 아닙니다. 내가 하와라도 백번 따먹었으리라는 것을 알고 ‘나는 제발 안 따먹어할 텐데.’ 하는 마음을 가져야합니다. 그런 마음으로 성서를 읽어야 하느님께서 “너에게 복을 주겠다.”라는 약속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당장 눈앞의 것을 위해 내 맘대로 하려고 한다면 벌써 스스로 지옥으로 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의 기도를 할 때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소서’라고 기도합니다. 유혹 자체는 죄가 아닙니다. 성인도 하루에 일곱 번씩 유혹에 빠진다고 했습니다. 인간은 나약하고 부족한 존재라는 것을 스스로 인정해야 합니다. 피조물인 인간이 자기 한계를 모르고 하느님처럼 되려고 하면 안됩니다. 이 세상을 자기 맘대로 주물럭거리려고 하느님 없이 살려고 하면 안됩니다. 내가 내 가정에서 하느님 노릇을 하려고 하는 건 아닌가? 자식들과 남편을 내 맘대로 부리려고 하는 것은 아닌가? 반성해 봐야합니다. 우리 남편, 직원들은 내 말이면 꼼짝 못한다든가, 돈이 많으니 세상에 무서울 것이 없다고 자랑할 것이 아닙니다. 그런 마음이 우리를 타락하게 만들고 우리를 나쁜 길로 빠지게 하고, 하느님을 무시하게 하고, 하느님 없이도 세상을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게 만듭니다. 우리는 매순간 유혹으로 다가오는 ‘선과 악을 알게 하는 열매’를 따먹고 싶은 마음을 추스르면서 주님의 기도를 바쳐야겠습니다.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소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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