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에는 정도에 있어서 매우 많은 단계가 있습니다. 육체적, 정신적 혹은 영적인 질병이나 고통뿐만 아니라 일상에서 일어나는 일들, 또는 자신의 사고방식이나 문화, 전통, 태도 등으로 부터 오는 여러가지 고통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고통 안에는 커다란 은총이 있습니다. 고통을 그리스도에게 가져와 십자가 발 아래 내려놓을 때 고통은 우리에게 유익이 될 수 있으며, 치유를 가져다 줍니다.
우리 주변에서 많이 볼 수 있는 믿음을 갖지 않은 사람들, 저도 예전에 그랬습니다만, 하느님을 모르고, 믿음이 없는 사람들은 그 모든 고통을 스스로 겪어 나갈 수 있다고 생각하며, 그런 것처럼 행동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내면 깊은 곳에서 어떻게 고통을 겪고 있는지 자신도 알지 못하므로 자신의 힘 만으로 할 수 없습니다. 고통은 깊은 신비이며 자신이 다룰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믿음을 가진 사람에게는 모든 고통이 기회가 됩니다.
소위 현대의 크리스챤, 특히 종교개혁을 통해 나온 많은 개신교는 고통이 일종의 재앙으로 받아들여지며 우리는 고통을 받지 않도록 되어 있다고 말합니다. 고통은 삶에서 무언가 잘못을 한 결과와 같이 말합니다. 힌두교나 불교의 인과응보의 사상과 매우 비슷하지요.
그러나 우리 교회의 참된 신학이나 성서의 가르침을 통해 알고 있는 고통은 치유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오셔서 인간이 감당할 수 없는 가장 큰 고통을 맞으셨고 모든 고통을 그분에게 내려놓음으로써 어떻게 우리 모두에게 구원을 가져다 주는지를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고통의 놀라운 힘을 보여주셨습니다.
고통을 일부러 찾아다녀야 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각기 다른 고유한 삶을 살아가는 우리가 각자의 증언을 서로 나눈다면, 우리가 가지고 있는 체험을 더욱 풍부하게 할 것이고, 그 중 많은 부분은 고통의 체험일 것입니다. 그렇다고 우리 모두가 꼭 희생된 영혼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사실 우리가 맞는 많은 고통들은 우리가 행한 실수의 일부분인 경우가 많습니다. 살면서 행한 많은 잘못된 선택을 통하여 무언가 배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특히 하느님과 함께 나아가는 삶을 통해 우리가 배워야 할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가 자신이 불완전하며 많은 실수를 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겸손해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많은 실수를 하며, 많은 잘못된 선택을 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실수를 통해 배워나갑니다. 때로는 일생동안 어떤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기도 합니다. 신앙은 우리에게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보여주지만, 우리는 신앙을 가지고 그것을 믿으면서도 또다시 잘못을 반복하면서 계속 모순된 삶을 살아갑니다. 그러나 하느님에 대한 충실한 믿음과 인내로서 자신을 좀더 강하게 할 때, 시간이 흐르면서 조금씩 나아집니다.
그러나 때로는 일생동안 극복할 수 없는 부분들이 있습니다. 성서의 가르침에서와 같이 바오로 사도는 세번씩이나 육체의 가시를 가져가시도록 주님께 청하였지만, 하느님께서는 치유해 주지 않으셨고 “당신의 은총은 충분하다” 고 말씀하시며 그 약함으로 주님의 권능이 드러난다고 하셨습니다.
즉 때로는 약함의 어떤 것들은 정화와 완성을 위해 계속되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신비이며 하느님께서 우리의 삶 안에서 일하시는 방법입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에게 있어서는 이러한 것들이 큰 문제가 되어 하느님의 부재를 말합니다. 하느님의 방법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하느님이 계시다면 자신에게 좋은 것을 주는 효험의 하느님일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인간으로서 자신에게 좋은 것이란 우리가 원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좋은 것이 아닙니다. 대부분 우리가 원하는 것은 우리에게 유익한 것이 아닙니다. 실제로 우리가 원하는 것, 이루고자 하는 많은 것들은 결국 우리의 삶을 잘못된 곳으로 이끌어 많은 어려움에 빠지게 합니다. 우리가 원하고 바라는 것들이 꼭 지혜로운 것들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원하고 바라는 것들은 대부분 인간적인 욕망에 의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 이미 정화하시고 옳은 것이라고 보여주신 것이 아닌 이상, 우리가 원하는 것들을 올바로 인식하여 하느님 앞에 내어 놓고 그분의 손에 맡겨 하느님의 뜻에 따르도록 해야합니다. 그러나 대부분 우리는 욕망에 따라 행동을 해 버리므로, 그 원함이 옳은것이었는가는 뒤늦게야 깨닫게 됩니다.
우리는 대부분 자신이 원하고 바라는 것들을 따라 삶을 살아갑니다. 그러므로 아주 오랜기간동안 잘못된 바램과 원하는 것을 쫓아 삶을 소비합니다. 오직 욕망만을 따라 살아가는 것이죠. 특히 젊은 시절에는 더욱 그렇 듯 보입니다.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서도 좀 더 미묘한 방법이긴 하나 계속 그렇게 살아가며 사실상 바뀌지가 않습니다.
사실 우리의 약함을 잘 극복했다 하더라도 또다시 삶에서 어려운 일이나 당황되는 일들을 만날 때마다, 매번 실수하고 넘어지곤 합니다. 그렇다하더라도 우리 크리스챤은 기회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살아가면서 아주 힘든 때를 맞을 때가 자신이나 삶의 의미 혹은 주변사람들에 대해 아주 깊어질 수 있는 기회라는 것을 알고 있지요. 특히 하느님에 대해 더욱 잘 알게 됩니다.
가톨릭 교리를 읽어보면, 사람은 하느님을 알고, 사랑하고, 순종하고, 영원히 하느님의 영광 안에 함께 하기 위해 창조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이 하느님이 사람을 창조하신 이유입니다. 이 가르침에 진지하게 주의를 기울인다면 , 우리의 삶의 여정이 그것을 근거로 하고 있다는 것을 이해하게 됩니다.
우리의 모든 실수는 우리를 가르치기 위한 것입니다. 결혼한 커플들은 서로에 대해 많은 실수를 합니다. 결혼에 있어서 가장 큰 가르침은 ‘용서’입니다. 용서하는 방법을 배우는 것이지요. 용서를 배우는 것이 인간을 정화하는 가장 큰 부분일 것입니다. 여러분이 용서를 배우게 되면 하느님도 여러분을 용서하시기 때문입니다. 구원이란 용서하지 못하는 것을 구원하는 것입니다. 즉 구원의 열쇠는 용서입니다. 결혼이 얼마나 큰 은총인지 모릅니다. 용서할 수 있는 기회를 받아들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용서를 배우게 되면 가르침을 배운 것입니다.
수도자나 사제 성소를 받아들일 때도 마찬가지 입니다. 수도성소는 이웃 사랑에 대한 정화를 기본으로 하는 것입니다. 이웃에 대한 섬김의 영성으로 얼마나 자신을 희생하고 다른 사람을 우선으로 놓을 수 있느냐가 수도성소를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정화의 열쇠입니다.
그러나 결혼성소나 수도성소 모두 용서를 배우는 정화로 귀결됩니다. 용서에 대한 배움이 삶의 마지막에 충만한 하느님의 사랑을 가져다 줍니다. 그것이 바로 이 삶에서 우리가 지금 배우고 있는 것입니다. 이 삶은 영혼의 학교이며 사랑의 학교입니다.
여러분이 오늘 죽는다면 여러분이 가져가게 될 것은 용서의 능력입니다. 지금 이 성당을 나가다가 죽었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죽는 즉시 영혼이 완전한 영적 세계로 들어가 예수님의 현존앞에 있게 됩니다. 또한 동시에 많은 진리를 완전히 이해하게 됩니다. 시간과 공간이 없는 그곳에서 즉시 자신에 대한 모든 것을 알게 되고 자신의 전생애가 자신앞에 펼쳐져 있으며 전생애의 결과인 자신의 영혼의 모습에 대해 정확하게 알게 됩니다. 자신의 영혼의 모습이 어떤지 예수님께서 말해줄 필요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마음 안에 있는 용서의 크기가 사랑의 크기입니다. 그것이 바로 마음 안에 있는 하느님의 크기입니다. 간단하게 그것이 자신의 모습인 것입니다.
마음안에 ‘얼마나 하느님이 계신가’는 바로 ‘얼마나 용서를 할 수 있는가’입니다. 그것이 ‘얼마나 사랑을 가지고 있는가’ 이기 때문입니다. 용서를 한다는 것은 사랑한다는 것이며 용서하지 못한다는 것은 사랑이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즉 하느님이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마음 안에 하느님이 있지 않은 그 빈 공간은 죽은 후에 채워야합니다. 그러기에 연옥영혼들이 몹씨 고통을 겪고 있는 것입니다.
연옥의 심한 고통에 대해 많이 들어보셨을 겁니다. 교회의 신비가들이 본 연옥의 묘사를 읽으면서, 영혼이 동굴안에 있다거나, 아주 추운 곳이나 뜨거운 곳에 있는 둥, 온갖 다른 상태에 있는 영혼에 대한 것들을 읽고 몹씨 놀랐을겁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이해해야 할 점은 영적인 것을 묘사할 때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이해할 수 있도록 비교예를 들어 묘사한 것이므로 그 상황이 글자 그대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영혼의 상태입니다.
예를 들어 여러분이 살면서 가장 추웠던 눈오는 날, 밤새도록 피할 곳도 없는 바깥에서 얼어 죽을 지경까지 갔던 경험이 있다면 그 순간과 오감의 기억이 재현되어 자신의 내면 안에 자리잡습니다. 여러분이 죽게 되면 여러분이 살면서 겪었던 많은 것들과 맞닥드려야하는데, 살면서 그것을 어떻게 다루었는가에 따라 많은 것들을 풀어야합니다. 예를 들어 매우 어려운 상황의 어린시절을 보냈다고 합시다. 문제있는 가정에서 학대를 받았거나, 좋지 못한 환경으로 인해 내면의 밑바닥에 상처를 가지고 있을 때, 만일 그 상처가 치유되지 않은 채로 죽는다면, 영적세계에서 한동안 그 상처를 풀어야합니다. 여러분이 자신의 영혼을 보고 그것을 묘사하려 한다면, 그 어린 시절에 일어났던 많은 일들을 보면서 외로움, 버림받음, 상처받음 등의 상태등으로 묘사할 것입니다. 영혼이 매우 고통스러워하는 장면을 보며, 그것을 가시적인 표현으로 묘사하려면 삶에서 겪었던 일들과 관련하여 동굴안에 꾸부리고 있는 모습, 절망으로 고통받고 있는 모습등으로 보여질 것이며 그 모든 것들을 풀어내야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살아가며 고통스러웠던 지난 일들을 가능한 묻어버리고 더이상 다루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현대심리학은 그것을 되돌리는 흉내를 냅니다. 그러나 가장 좋은 방법은 아닙니다. 믿음을 가진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하느님을 통해 그 기억을 치유하는 것입니다. 믿음을 가진 사람이라면 하느님이 바로 치유자이십니다. 하느님께서 내면을 치유하십니다. 자신의 내면으로 들어가 모태에서 부터 현재까지 자신의 삶에서 일어난 모든 상처와 기억을 치유해주시길 주님께 기도할 수 있습니다. 내면의 치유를 청하는 기도는 매우 힘이 있습니다. 아마도 여러분은 기억하고 싶지 않은 오래전의 고통과 시련, 고뇌, 스트레스 받았던 상황등을 다시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기도를 시작하게 되면 치유가 시작됨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주님께서 치유하시도록 그 상황들을 은혜롭게 표면으로 가져와, 자신의 과거와 상처를 부정하지 않고 받아들이기 시작하는 것이죠. 그러기에 고통은 하느님에게로 가져올 때 치유라고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고통을 자신 안에 가두어두고 기억하고 싶지 않은 끔찍한 과거로 감추어 둘 때, 그것은 자신에게 상처로 남아 비탄을 하거나, 부정적으로 되며 외롭다고 느끼고 그 누구도 믿지 못하며, 특히 자신의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 대해 누군가를 탓하는 성향으로 남습니다. 그것은 가장 나쁜 상황이며, 올바르게 대처하지 못할 때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상황입니다. 그렇게 되면, 무슨일이나 탓할 다른 사람을 찾게 되지요.
자신에게 중요한 사람이 죽음을 맞을 때 우리는 많은 것을 겪게 됩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은 그로 인한 충격을 받지만, 장례가 끝나고 시간이 지나면 곧 잊어버립니다. 마음안에 깊은 사랑이 많지 않기 때문에 쉽게 그것을 묻어버리고 자신의 길을 가지요. 그러나 믿음을 가진 사람으로 마음이 하느님께로 열려 있어 부드러운 마음, 사랑의 마음, 느낄수 있는 마음, 이웃이 들어 있는 마음일 때, 친지나 친구의 죽음은 은총을 가져다 줍니다. 자신의 죽음을 묵상할 수 있는 은총입니다. 그 다음 차례가 자신이라는 것을 생각하지요. 그것은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친한 친구나 가까운 사람이 죽었을 때 주는 메세지는 다음차례인 자신의 죽음을 준비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잊지 말라고 하는 것이죠. 사실 우리는 그것을 잊고 있을 뿐 아니라 부정합니다.
죽음은 이 세상의 삶에서 그 다음 삶으로 넘어가는 이동의 순간입니다. 우리의 삶의 목표는 오직 그 다음 삶입니다. 삶에서 가장 중요한 유일한 목표는 죽음 이후를 잘 준비하는 것이 되어야합니다.
가톨릭 신자중 몇명이나 죽음을 잘 준비하기위해 기도합니까? 우리는 그것을 전혀 다루고 싶어하지 않지요. 가톨릭 교회에는 성 요셉이나 미카엘 대천사와 함께 하는 좋은 죽음을 맞기 위한 강력한 기도들이 있습니다. 성인들의 삶을 보면 많은 성인들이 좋은 죽음을 맞기 위해 매일 기도 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특히 죽는 순간에 유혹에 대항하기 위해 힘을 갖도록 해야합니다. 그럴수 있도록 하느님께서 우리를 돕고 계십니다. (고백성사 보실분 ..)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그러한 문제들을 피하지 않고 하나 하나 다룰수 있는 기회를 주신다는 것을 이해해야합니다.
원죄에 대한 것을 읽어보면 아주 신비롭고 불가사의하지요. 솔직히 현대신학의 관점은 원죄에 관한 것들을 복잡하게 엉망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원죄에 관한 것은 씌어진 그대로 단순한 이야기 입니다. 한사람이 세상에 죄를 가져왔고, 또 한사람은 세상에 빛을 가져 왔습니다. 천국에서 온 아담, 예수 그리스도가 세상에 빛을 가져왔고, 지상의 아담은 죄를 가져 왔습니다. 그것은 사실이고 우리는 그로부터 피할 수 없습니다. 그것이 우리의 운명임을 알아야 하고 믿어야합니다. 우리가 믿는 것은 행동을 이끌어 주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그에 따라 살아야합니다. 즉, 네,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죄에 죽었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살아 있더라도 희망이 없습니다. 우리에게 믿음이 없다면 완전히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죄에 죽는다는 것은 죄를 끊어버린다는 것입니다. 비록 나는 죄인이고 불완전하고 한계가 있으므로 언제라도 죄를 지으려는 성향을 가지고 있지만, 나의 삶에 죄를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나는 실수를 다시 할 것이고 다시 넘어지겠지만, 넘어지려는 것을 피하고, 유혹과 싸우며, 거룩함과 완전함을 향해 최선의 노력을 하는 것이 유일한 삶의 목표가 되어야합니다. 그러한 지향을 가질 때 거룩함의 길로 향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의 가톨릭 교회내에 문제가 있음을 봅니다. 교회는 세상에 하느님을 반영시켜야 합니다. 그러나 오늘날 교회는 세상을 반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교회가 매우 세상적인 것을 발견하곤 합니다. 물론 모든 교회나 신자들이 다 그렇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교회 안에 미지근한 신자들이 너무 많이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너무도 세상적인 사람들이 교회에 와서 모든 교리를 자신의 삶에 맞추려하는 것입니다. 자기 나름대로 가톨릭교리를 디자인 해 버리죠. 사실 그들은 교리도 잘 모릅니다. 예전에 저희가 특별한 사명의 하나로 성당에서 미사를 보고 나오는 사람들에게 질문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우선 그 날의 복음말씀에 대해 물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이 금방 들은 복음말씀을 알지 못했습니다. 머리 위로 지나가 버린거죠. 그 다음 십계명 중 한 두개에 대해 물었습니다. 역시 알지 못했습니다. 그 다음 성사가 몇가지가 있는지 아느냐 고 물었습니다. 역시 알지 못했습니다. 매 일요일마다 미사에 나오는 그 사람들이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었습니다. 참 슬픈 현실입니다. 처음에 신앙을 가질 때, 교리교육을 통해 모든 것을 배웠음에도 일단 믿음안에 들어와서는 다시는 그것을 찾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놀라운 것은 저희가 어떤 본당에서 신자들에게 교리를 가르치려고 하면 매우 자존심 상해합니다. 이미 가톨릭신자인데 감히 교리를 가르치느냐는 것이죠. 그러나 문제는 가톨릭 신자가 교리도 모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십계명이나 성령의 은사와 같은 간단한 것을 물어봐도 전혀 알지 못합니다.
상상해 보십시오. 믿음의 아주 기본적인것도 모른다면 많은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를 연결시켜주는 근본이 갖추어지지 못한것이죠. 살면서 어떤 결정을 해야할 때나, 사람들과의 관계를 다룰때, 교회의 교리도, 윤리도 이해하지 못한다면 삶안에서의 어떤 특정 영역에 있어서 얼마나 더 가야하는지, 어디에 근본을 두어야하는지 모르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세상사람들이 프란치스코 교황님을 어떻게 다루는지 알고 있지요. 세상의 상업 미디어는 교황님에게 상당한 압력을 주어 무언가를 이끌어 내려고 시도 합니다. 뉴스는 사기꾼처럼 한쪽에서는 이말을 하고 막상 세상에는 다른 말로 내 보냅니다. 교황님에게 매우 호의적인 척하면서 사실은 사람들을 자기편으로 끌어갑니다. 지난 주에 제가 스페인에서 유명한 일간지를 읽게 되었는데요. 교황이 여성 추기경을 임명할 것이라는 뉴스가 나왔더군요. 방금 한 인터뷰와는 전혀 상관없는 이야기였고 모두 왜곡된 내용이었습니다. 우리가 자신의 신앙에 대해 알지 못할 때, 자신이 어디에 서 있는지 알지 못할 때,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로 인해 매우 혼동을 하게 될 것입니다. 식별하지 못하고 자신이 읽고 보는 모든 것을 믿어버리게 되기 때문이지요. 아주 위험한 일입니다. 그것이 무지(무관심) 로 인한 고통을 겪게 하는 것입니다. 무지는 큰 재앙입니다. 무지의 많은 부분은 모르기 때문이 아니라 그 자체를 무시했기 때문입니다. 무시에서 무지가 나옵니다. 어떤 것은 모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것은 작은 부분일 뿐입니다. 대부분은 우리가 알고 있는 것들을 무시했기 때문이지요. 그것이 가장 나쁜 상황입니다. 진리를 거스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거짓된 자신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하느님께서 우리를 부르셨고, 성령께서 우리를 이곳으로 데려오셨습니다. 우리는 신앙에 대해 묵상하도록 이곳에 선택되어져 온 것입니다. 저는 신학자도 아니고 종교과학을 공부한 적도 없으며 여러분께 강연 할 만큼 학위를 받은 사람이 아닙니다. 저는 단지 여러분에게 성령의 전달자로 여기 있는 것이며, 여러분 또한 저에게 있어 성령의 전달자이며, 우리 서로 마음안에 가지고 있는 것들을 상호 교류하며 함께 성령께서 우리들의 마음을 이끄시도록 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께서 저로 하여금 이 곳에서 이야기를 나누도록 마음을 열었기에 하느님께서 여러분의 마음을 성령으로 채워지도록 일하시는 것이죠. 여러분이 사랑을 가지고, 하느님께 마음을 열고 기회를 드릴 때마다,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을 위해 간직하신 은총을 부어주십니다.
미사중에도 여러분의 마음을 열고 강론을 들을 때, 그 강론이 어떻든, 짧든, 길든, 그것은 여러분의 마음으로 곧장 들어갑니다. 성령께서 말씀하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겸손하게, 교회를 통해 받은 믿음을 사랑하고, 강론을 하는 사제에 대한 사랑을 가질 때, 그 강론이 아무리 짧고 단순한 것이라도 그것은 여러분을 위한 것이고, 여러분의 삶의 그 순간에, 마음 안에 특별한 메세지를 전달합니다. 그 강론이 모든 사람에게 일반적으로 적용되는 이야기이더라도 각 개인의 마음으로 갑니다. 어쩌면 강론의 한단어가 여러분의 마음 안에 들어와 치유를 가져다 주기도 할 것입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저의 이야기는 미리 준비해 온 것이 아니며, 성령께 완전히 열어 놓고 여러분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습니다. 필요한 이야기를 저에게 불어 넣어 주고 있는 사람은 여러분입니다. 제가 이야기하는 것들 중 어떤 이야기가 여러분의 마음 안으로 곧바로 들어갈 것이며, 우리 각자가 성령을 함께 나누고 있다고 확신합니다. 여러분이 저에게 사랑을 가지고 마음을 엶으로써 우리가 서로 사랑하고 있는 것이며 그 가운데 성령이 움직이고 있는 것입니다.
모든 인관 관계에 필요한 것은 사랑입니다. 서로 판단하지 않고 거부하지 않으며, 서로 사랑할 때, 성령은 우리 안에 흐르며 움직입니다. 놀라운 은총이지요. 길에서 마주치는 사람들도 차별없이 그들의 삶 역시 자신과 같은 고통, 아픔이 있고, 존재의 어려움이 있다는 것을 느끼며 동정심을 가질 때, 그러한 이해와 인식만으로도 여러분은 인류를 축복하는 것입니다. 어디를 가더라도 그렇게 하는 것이 바로 우리가 해야할 일입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성령강림후의 놀라운 귀절을 볼 수 있습니다. 제자들이 성전으로 가는 내용입니다. 참으로 놀라운 내용이지요. 상상해 보십시오. 제자들은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에도 40일동안 숨어 지냈습니다. 주님의 부활 후에도 그들은 마음대로 나가지 못했습니다. 조심스럽게 밖을 다녔을 겁니다. 성서 어느 곳에도 예수님이 부활하시자마자 제자들이 예루살렘으로 뛰어나가 “주님이 부활하셨다! 부활하셨다! “고 외쳤다는 귀절이 없지 않습니까? 여전히 숨어 지냈습니다.
그러나 성령강림후에는 놀라운 힘을 가지고 예루살렘을 돌아다니며 모든 사람들에게 주님이 부활하셨고, 승천하셨다고 증언하며 외쳤습니다. 예수님을 죽인 적들이 있는 성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들어갔으며, 만진 것도 아니고 단지 걸어가기만 했는데도 악령들린 사람을 구하고, 아픈이들이 치유되었다고 성서에 나오지 않습니까?
그 힘이 우리안에 있습니다. 그 이야기가 제자들에게 국한된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의 삶의 이야기입니다. 제자들 안에 움직이고 흐르던 그 같은 성령이 우리 안에서 움직이고 흐르고 있습니다. 그 보물을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성 바오로가 말씀하신대로 우리는 질그릇에 보물을 담고 있습니다. 그 보물이 우리 개개인 안에 살아있다는 것을 이해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참된 믿음과 사랑을 가지고 있다면, 주님께서 여러분을 길에서도 크게 사용하신다는 제 말을 믿으십시오. 여러분은 길에서 만난 모르는 사람의 미소로 인해 치유를 느꼈던 경험이 있지 않습니까? 삶이 힘들고 마음이 아팠던 어느날, 길에서 만난 모르는 사람이 여러분에 대한 사랑을 가지고 미소를 지어주던 그것이 치유를 가져다 주고 도움을 주었을겁니다. 아주 중요한 일입니다. 고통의 치유는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사랑에 의한 것입니다. 마음 안에 하느님에 대한 사랑이 있다면 여러분의 고통은 은총으로 바뀝니다.
비오신부님의 삶을 보면 50년동안 오상을 가지고 계셨죠. 50년동안 주님의 수난을 살았다는 것입니다. 믿기 어려운 일이죠. 그 누가 그런 고통을 참을 수 있겠습니까? 그분은 은총으로 인해 그렇게 하셨습니다. 손바닥, 발..늑방에.. 그런 상처의 고통을 상상할 수 있겠습니까? 앉으나, 서나, 걸으나, 하루종일 계속 피를 흘리고, 고통을 주는 그것을 끝까지 했다는 것을… 비오신부님과 같은 고통은 모든 사람에 대한 치유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분도 분명히 인간이었으므로, 불완전한 인간으로서의 힘들고, 고통스러운 순간이 있었을 것입니다.
우리의 삶 안에서 우리도 존재의 오상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삶, 아주 어려운 삶에 의한 오상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삶은 쉽지 않습니다. 왜냐구요? 모든 답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그것이 두 방향으로 갈 수 있습니다. 첫째는, 하느님께서 밝혀주신 것들을 받아들이고 믿음으로써 평화를 갖는 것입니다. 한가지 우리가 알고 있는 것 ‘하느님은 알고 계시다’는 것 때문이지요. 그분께 힘을 드리는 겁니다. 그것이 첫번째 계명이지요. 하느님은 오직 있는 나이시며 그분이 알고 계시므로 나는 평화를 갖는 것입니다. 그것이면 족한 것입니다.
그와 반대 방향은 내가 모르므로 행동하지 않겠다는 것이지요. 삶의 많은 부분은 이해할 수 없으므로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이성적 사고는 하느님 없는 삶을 살아가도록 하는 가장 큰 적입니다. 무신론이 이성적 사고로 부터 오지요. 사람은 모든 답을 가지고 있지 않은데, 해답을 찾으려고 하는 그 사람들이 어디서 해답을 찾겠습니까? 우리의 사고는 모든 해답을 찾을 수 없고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이해가 가지 않음으로서, 고집불통이 되고 이기적이 됩니다. 다른 사람들에게도 같은 것을 강요합니다. 이해하려고 강요하면 용서하지 못합니다. 이해하지 못하는데 어떻게 용서하겠습니까?
인간관계가 무너질 때, 사람들은 서로에게 손가락질을 합니다. 상대방의 부정적인 부분을 들추지요. 사람이 부정적인 부분을 들추자면 한이 없습니다. 우리는 한없이 불완전한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사랑을 가지고 고통을 통해 배우는 것은 아주 아름답습니다. 인간관계는 많은 고통을 수반합니다. 우정이나 결혼, 교회안의 관계에서도 좌절감을 느끼게 하지요. 교회의 인간적인 면은 매우 불완전합니다. 교회내에 인간적인 것들 위에 믿음을 둔다면 아마도 모두 믿음을 잃고 말겁니다. 신자들이나 믿는 사람을 바라보면 많은 좌절감을 가져올테니까요. 많은 사람들이 충실한 믿음을 갖고 선해지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이죠. 그들을 바라보면 넘어집니다. 붙잡을 수가 없기 때문이죠. 우리가 붙잡을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느님입니다. 오직 예수님에게로만 간다면 결코 넘어지지 않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힘을 주셔서 공동체가 하나가 되도록 희망과 용서를 가능하게 할 것입니다.
제가 여기 온 이유는 우리의 믿음을 나누어 마음을 풍요롭게 하여, 우리가 좀 더 나아지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오셔서 우리를 더 강하게 하시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누구도 예외없이 희망과 지혜, 용서 그리고 놀라운 하느님의 사랑을 필요로 하며, 미래에 대해 지나치게 걱정하지 않고, 과거에 대한 죄의식을 갖지 않으며, 오늘을 두려워하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도록 힘과 도움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과 함께 걸어 나아간다면 무엇도 두려워하거나 걱정할 필요가 없으며 이순간을 기뻐할 수 있습니다. 가장 좋은 삶의 방법은 자신이 지금 이순간에 있는 것입니다. 이순간 이곳에 있음에 하느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리고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은총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곳에 있고 싶어도 많은 이유로 인해 있을 수없습니다. 또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가고 싶은 곳에 갈 수 없는지 모릅니다. 어느 장소에 갈 수 있고, 있을 수 있는 것은 은총입니다. 그러나 죄 중에 있다면 그렇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하느님과 함께 한다면, 어느 곳에 있는 것, 하느님께서 주신 것을 기뻐하는 것, 그것은 이미 큰 은총입니다. 감사는 삶에서 아주 중요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많은 도움을 받은 친구나 주변사람들이 여러분을 무시하고 감사하지 않는 경험을 해 보신 적이 있지 않습니까? 물론 무엇을 바라고 한 것이 아니었더라도 아주 마음 아픈 기억이지 않습니까? 사랑이 부족하고 하느님의 현존이 부족하고, 동정심과 용서가 부족한 그러한 것들은 마음을 아주 씁쓸하게 하지요.
감사는 놀라운 은총입니다. 아주 중요합니다. 이 곳에 오게 해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립시다. 성령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의 마음을 움직이심에 감사합시다. 우리의 마음과 영혼을 어루만져서,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고, 쉼을 주시며, 희망을 주시고, 용서와 참된 사랑을 할 수 있는 감각을 주심에 감사드립시다. 이것은 아주 중요합니다. 우리가 하느님께 감사하는 것을 배울 때 우리는 많이 받고 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대부분 우리는 우리가 필요한 것만 생각하고 그것에만 집중되어 있으므로 받을 때에는 그것을 깨닫지도 못합니다. 받으면서도 자신이 원하는 것이 아니면 느끼지 못합니다. 우리가 삶에서 우선으로 했던 것이나, 갖기위해 노력하던 것이 아니라면 받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모든 은총이 그렇습니다. 아주 작고 단순한 것들은 받는 것을 알아채지도 못하고 간과하지요.
살면서 매우 어려움을 겪는 사람과 이야기를 나눌 때 가장 좋은 방법은 삶에서 받은 좋은 것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겪고 있는 어려움에만 촛점을 맞춘다면 결코 그 곳에서 나올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보지 못하고 있는 이러 저러한 것들에 감사합시다. 당신의 삶의 모든 것이 나쁜 것이 아닙니다. 당신에게 있는 좋은 것들을 보세요.” 라며 감사할 것을 꼽아보는 것이죠. 비록 현재 한면은 잘 되어지지 않는다 해도 가지고 있는 좋은 것에 감사하고 기뻐하는 것입니다.
매일의 삶이 언제나 완벽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아주 힘든 때를 지나가야 합니다. 때로는 끝이 보이지가 않지요. 떄로는 막다른 골목에 다다른것 같이 희망이 보이지 않고 끝이 날것 같지 않습니다. 그러나 아십니까? 하느님은 그 모든 것 위에 계십니다.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것이 없습니다. 한가지 좋은 방법은 우리가 원하는 것을 바꾸어 주실 수 있는 하느님께 의탁하는 것입니다. 결과에 상관없이 하느님께 의탁하며 희망을 갖는 것으로 족합니다. 상상을 하거나 자신에게 속임수를 쓰라는 것이 절대 아닙니다.
믿음은 조건이 없다는 것을 아셔야합니다. 말하자면 주님께 이렇게 말할 수 있지요. “주님 제 삶에서 가장 좋은 것은 용서를 배우는 것임을 알고 있습니다. 저는 지금 용서하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마음이 너무 상해서 용서를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오직 용서할 수 있기를 원합니다. 저는 당신이 전지전능하신 하느님이심을 알고 있습니다. 당신만이 제가 용서할 수 있도록 하실 수 있는 분임을 알고 있습니다. 제 힘으로는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라고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자신은 그렇게 할 수 없음을 느끼고, 어떻게 하는지도 모르고, 그렇게 하고 싶지 않더라도 그것을 할 수 있는 하느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삶의 어떤 상황에서도 이 예를 적용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 나아가 청하는 것입니다. “하느님, 당신은 할 수 있으십니다. 당신께서 하실지는 모르겠지만, 할 수 있으시다는 것을 저는 압니다. 당신이 할 수 있으시다는 것이 저에게 많은 희망을 줍니다.” 아주 부유한 아버지를 가졌다면 자신의 삶에서 좋은 것을 아버지에게 청하지 않겠습니까? “아버지, 당신께서 이것을 주실 수 있다는 것을 압니다. 당신이 원하신다면 주실 것을 알고 있습니다. 당신이 원치 않으셔서 주지 않으신다해도 괜잖습니다. 제가 청하는 것을 당신이 원하신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줄 사람을 제대로 찾아간 것이죠. 풍부한 샘이 있는 곳입니다. 그 곳에서 얻을 수가 있지요.
좋은 기도는 조건없이 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 찾아가서 “하느님, 당신은 모든 것을 아시며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이것좀 해 주시겠어요?” 라고 말씀드리며 상황을 알려드리고 그분의 손에 맡겨드리고 나서는 그 결과에 의존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이 믿음입니다. 그렇게 할 때 여러분의 믿음은 더욱 커지고 풍부하게 될 것입니다.
기도를 드리고 자신의 기도대로 응답을 원한다는 것은 조건적인 기도이며 그로인해 더욱 고통을 가져올 수 있으며, 치유로 이어지지 않습니다. 치유로 이어지는 고통은 무조건적인 고통이며, 고통을 통해 삶을 치유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 감사합니다. 제 삶에서 이 고통을 겪을 수 있도록 허락하신 것에 감사드립니다. 때로는 참기조차 힘들고, 제 기대나 제가 원하는 것과는 정반대여서 이해할 수 없을 지라도 당신께서 이것을 허락하신 이유는 그것이 제게 유익한 것이기 때문임을 알고 있습니다.” 라고 말씀드린다면 그 고통은 치유를 가져다 줄 것입니다. 매우 높은 수준의 힘을 가져다 줄 것입니다. 인내와 이웃에 대한 사랑등 많은 은총을 가져다 줄것입니다.
많은 고통을 겪을 때 이웃을 바라보며 그들도 역시 고통이 있다는 것을 깨닫고 이해하게 되며, 서로 연관됨을 느낍니다.
그러한 나눔은 아주 중요합니다. 서로에 대해 알고 이해한다는 것은 좋은 동반자가 될 수 있으며 힘을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고통 가운데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함께 고통을 나눔으로서 견디기가 쉬워지는 것이죠.
그럴때 우리 가운데 사랑이 흐르도록 하는 것이며 하느님께서 그 가운데 함께 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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