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이여 깨어나라!
2013년 런던
말씀: 코린도 전서 16장 1절
오늘밤 저는 “가톨릭이여 깨어나라”라는 주제로 말씀드리고자 이곳에 왔습니다. 주님께서는 ‘가톨릭으로서 깨어나라’와 같은 아주 큰 부르심으로 저를 깨우셨습니다. 저는 콜롬비아에서 모태신앙을 가지고 태어났지만, 33년 동안 가톨릭 교회를 떠나 살았었습니다. 오늘날의 가톨릭 신자중에 예전의 저와 같은 사람들이 많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주님께서 저를 부른신 것은 제가선한일을 하였기 때문이 아니라, 오직 주님만이 언제나 선한 분이시기 때문이었습니다.
저는 주님과 함께 신비체험을 하였습니다만, 오늘밤은 그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에 대해 간단히 말씀드리면, 저는 1997년 콜롬비아 정글에 있는 동굴에서 주님을 만났고, 그 체험은 저의 삶을 완전히 바꾸어놓았습니다. 저는 단지 게릴라에 의해죽임을 당할 위험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33년동안 대죄 상태에 있었으므로 영원한 심판의 위험에 놓여 있었습니다. 제가 만일 그날 밤 죽고 말았다면 어쩌면 영원히 저의 영혼을 잃었을 겁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자비 안에서 저에게 어린 시절 교회를 통해 배운 모든 진리가 실제로 존재하며 그럼에도 제가 그것을 부정하며 살아온 것을 보여 주셨습니다. 저는 교회의 모든 것을 반대하였었고 예수님이 하느님이라는 것조차 믿지 않을 만큼 완전히 길을 잃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제가 여러분 앞에서 주님께서 제게 보여주신 모든 것을 전한다는 것이 매우 큰 책임임을 아실겁니다. 저는 주님께 영광을 드리기 위해 이 곳에 선 것일 뿐 제 자신에 대해 이야기 하자면 큰 죄인이라는 것 밖에 할 말이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저와 같은 큰 죄인도 아랑곳하지 않으시고 저를 용서하시고 구해주셨을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당신께서 저를 통해 하신 일들을 여러분에게 보여 주시고자 저를 보내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저를 통해 이 모든 것을 지금도 하고 계시고 앞으로도 영원히 하실 것입니다.
하느님과의 깊은 체험을 한 후, 가톨릭 교회로 돌아왔을 때 저에게 매우 힘들었던 부분이 교회의 인간적인 부분이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저의 체험을 통해 우리 교회의 많은 놀라운 것들을 보여주셨으므로 교회로 다시 돌아온 저는 모든 것을 새롭게 발견하면서 성서와, 전례, 교회의 역사등을 통해 주님께서 보여주신 모든 것들을 확인하였읍니다. 그리고 나서 사람들을 만나 그 모든 발견에 대해 소통을 시작하였을 때, 저의 마음 안에 가지고 있는 것들을 이해시키려 하면서 많은 어려움이 있었고, 많은 은총들이 (영적이지 못하고) 물질화 되어 있다는 사실이 저를 매우 힘들게 했습니다. 오랫동안 교회를 다닌 사람들 조차 여전히 그러한 은총에 대해 자신들이 다루어야할 것들을 다루지 않는 것을 보면서 좌절감과 함께 저는 인내심을 잃었고, 동정심을 갖지 못했습니다.
사람이 믿음으로 돌아 오게 되면 우선 현미경을 들고 다른 사람들의 죄를 찾아내려 합니다. 그리고는 아무도 제대로 된 사람이 없어 보이므로 사람들에게 화가나기 시작하고, 많은 것을 보고 알고 있는 자신이 최고라고 생각하며 다른 사람을 일깨워보려고시도하게 되지요. 하느님과 허니문에 온 듯이 사람들을 일깨우고 변화를 시도하며 모든 사람들을 다시 열심해지도록 만들려 합니다. 그러다 현실을 깨닫고, 하느님께서 자신을 참고 기다려 주신 것과 같이 자신도 사람들을 참고 기다려야한다는 것을 이해하기까지 시간이 걸립니다. 저도 그러한 신앙의 신비를 이해하기 까지 쉽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신앙에 대해 우선 지성을 통해 많은 것을 이해합니다. 그러나 그것들을 마음으로 가져와 뼛속까지 느끼고 그것을 행하는 것에 어려움을 느끼지요. 처음 저를 힘들게 했던 것들을 이제는 이해합니다. 지금은 참을 뿐 아니라 동정심을 가질 수 있습니다. 제 자신이 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니라 동정심을 가지고 모든 사람을 사랑할수 있도록 해달라고 주님 앞에 무릎꿇고 간절히 청했기 때문입니다. 지금의 저로 부르시고 이런 일을 하도록 선택하신 분은 주님이시며 그렇지 않다면 제가 말씀드린대로 저는 하느님 앞에 가장 자격이 없는 사람입니다. 교회를 핍박하고 하느님을 완전히 거스르고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는 저를 교회로 보내시어 오늘밤처럼 이 일을 하도록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매일 저의 가장 큰 도전은 가톨릭신자로서 해야 하는 역활을 이해하는것입니다.
가톨릭 신자로서 우리가 해야할 일은 서로에게 동정심을 가져야한다는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신앙의 신비를 현실에서 온몸으로 살아가는 것은 모두에게 있어서 매우 어려운 도전입니다. 신앙의 많은 것을 이해하면서도 별로 행하지는못한다는 것이 얼마나 우리를 힘들게 하는지 알지 않습니까?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선하게 창조하셨지만 우리에게는 흠이 있습니다. 그 흠이 우리를 힘들게 하는 것입니다. 사탄이 그 곳에 숨을 불어넣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죄의식과 끔찍한 어둠을 만들어냅니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우리 안에 그리스도가 있다는 기쁨의 신비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다소 선한 것을 받아들이는 데 있어서 항상 거래를 하듯 망설입니다. 그렇게 불완전한 자신이 얼마나 비참한지를 깨닫고그럼에도 하느님께서 우리의 비참함 가운데에 계신다는 것이 얼마나 크고 놀라운 일인가를 깨닫는것이 십자가의 과학의 비밀입니다. 그것을 꺠닫고 빨리 방향을 잡아야합니다. 우리에게는 낭비할 시간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용서하시며 우리가 잘못한 것을 잊으시고 몇번이라도 우리의 모든 것을 새롭게 하시며 우리를 부르고 초대하신다는 것을 이해해야합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정말 아름다운 성사의 은총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겸손하게 무릎꿇고 우리의 죄를 몇번이라도다시 고백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지고 때로는 똑같은 죄를 고백한다 하더라도 지치지 않고 계속 또다시 고백할 수 있는 것입니다. 가톨릭 신자로서 우리에게 가장 큰 도전은 서로 진심으로 사랑해야하며 자신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있어서 항상 하느님께 충실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깨닫는 것입니다. 아주 힘든 일이지요. 어떤 죄가 얼마나 심각한지를 알면서도 그 죄를 짓는 것이 얼마나 자신을 상하게 하는지 모릅니다. 하느님에 대해 더욱 많이 알수록 그 죄는 더욱 자신을 상하게 합니다. 우리가 서로에게 얼마나 중요한지를 더욱 깊이 깨닫고 있을수록 죄는 더욱 서로를 상하게 합니다.
참된 사랑과 베품은 실제로 매우 고통과 아픔을 줍니다. 어떤 사람이 저에게 와서 아주 고통스러운 삶에 대해 이야기할 때 저는 마음으로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주님께 그의 고통과 아픔을 느낄수 있게 해달라고 간청합니다. 누군가의 고통스러운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아무것도 느낄수 없다는 것이 얼마나 끔찍한 일인지 아십니까?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이지요. 그것이 죄는 아닙니다만 사랑에 무감각한 것이 인간의 본성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육체와 뼈를 부활시켜야합니다. 어떻게 그렇게 하느냐구요? 그것은신앙의 신비를 뼛속까지 깊이 가져올 때 일어나는 일입니다. 신앙의 신비라는 것은 우리의 신앙의 지성적인 개념을 마음안으로가져와 서로의 상처를 느끼고 서로의 고통을 느끼기 시작할 때 비로소 여러분의 마음 안에서 신비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렇지않다면 그저 신앙을 이해하는 정도 일 뿐입니다. “무슨 말인지 이해해. 나도 그런일을 겪었어.” 라고 무덤덤하게 말하는 것은 아무 의미도 없습니다. 그것은 그 고통을 일대일로 만나는 것이 아니며 형제와 이웃의 고통을 함께 하는 것이 아닙니다. 가톨릭 신앙은 고통을 함께 하는 것입니다. 고통을 함께 하는 것은 기쁨을 가져다줍니다. 모순처럼 들릴지도 모릅니다만 고통과 아픔을 함께 하는 것이 기쁨을 가져다주는 이유는 십자가에 내려놓는 것을 배우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삶의 시련과 고통, 수고, 고난을 십자가에 못박아 나를 내려놓고 다른 사람의 고통과 시련을 이해할 때, 비로소 그리스도와 같이 되는 것이며, 그렇게 고통을 받아들이는 것만이 우리 마음 안에 평화와 기쁨을 가져다 줍니다.
오늘날 우리는 너무도 물질화된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1500년 전에도 누군가는 똑같은 말을 했을 것입니다. 그들 역시 물질세상에 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결코 변하지 않을 것이라고 장담합니다. 이세상은 항상 영혼의 학교입니다. 물리적인 자신을 극복하고 영적인 것을 받아들이기 위한 도전의 삶입니다. 그렇다고 우리의 물리적인 자신이 사악한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것이 다 큰 은총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첫단계인 이곳의 삶부터 시작하여 그 다음 단계인 완전한영적 세상을 맞게 될 것입니다. 바로 그 때가 우리의 존재가 참으로 새로 태어나는 최종적이고도 완전한 순간입니다. 우리의 영혼이 그 운명의 때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우리의 내면은 그것이 두려우면서도 이세상의 삶이 그 다음 삶으로 변화되는 순간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모두는 그것을 겪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이주 힘든 변화의 순간이기 때문이지요.
주변사람이 죽음을 맞았을 때라든지, 어떤 심각한 병을 진단받았을 때, 때로는 지금과 같이 영적인 묵상을 통해 우리가 얼마나 죽음의 운명을 가진 나약한 존재인지를, 삶은 아주 짧아서 오늘밤이 될 수 도 있다는 것을, 우리가 맞고 있는 현실이 무엇인지를 생각할 때 우리는 비로소 죽음을 생각합니다. 제가 체험한 것이 바로 죽음입니다. 저는 납치되어 죽음을 선고 받았었고, 주님께서 저에게 나타나셨고, 연옥과 지옥을 체험하였으며, 주님을 통해 제자신이 누구인지를 알았고, 저의 온 생애를 낭비한 것을 보고 너무도 두려웠으며, 세상이 내 손 안에 있다고 생각했던 그모든 것들이 날아가 버린것을 체험했습니다. 다시 되돌릴 수 없다는 그것은 너무도 두려운 것이었습니다.
제가 장례식을 갈 때마다, 사람들이 와서 돌아가신 분에 대해 이야기를 합니다. 대부분 그사람을 천사처럼 묘사하며 천국에 있을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안타까운 일입니다. 천국에 갈 수 있다는 것을 믿지 못해서가 아닙니다. 우리는 그들 모두가 천국에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동시에 죽음의 현실을 이해해야합니다. 죽음을 통해 맞는 현실은 우리의 삶의 결과입니다. 살면서 자신이 행하였던 것들과 자신이 이루었던 것으로 자신이 만든 모습으로 되는 것입니다. 삶의 마지막에 그 장례식을 다시 본다면, 그 사람이 굉장한 변화의 순간을 겪고 있었음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죽은 사람이 무엇을 맞고 있을지 그 누가 알겠습니까? 오직하느님만이 사람의 마음을 아십니다. 그러기에 누군가가 “오 우리엄마는 이런 저런 고통을 많이 당하셨으니 분명히 천국에 계실거야.” 라고 말한다면 저는 “기도해 드리세요. 계속 기도해 드리세요.” 라고 말합니다. 돌아가신 분 중에 기도해드리지 않아도되는 사람은 교회에서 천국에 있다고 확인해 준 성인들 뿐입니다. 그렇다면 그분들에게 우리를 도와달라고 기도할 수 있지요. 그러기 이전에는 우리는 돌아가신 모든 분들을 위해 기도해야합니다.
가톨릭신자에게 깨어나라고 할 때, 우리에게 주어진 교회의 현실을 이야기 하여야합니다. 우리는 사람들이 교회에 대해 너무도 많은 말들을 하고 있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교회에 대해 많은 말들을 하는 사람들은 근거없이 말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바티칸에 너무도 많은 분열이 있다는 둥, 모함이 있다는 둥, 별별 사탄이 있다는 둥… 알다시피 사람에게는 많은 영이 있습니다. 선한 영, 악한 영이 있지요. 이 곳에도 있습니다. 선한영과 악한영이 모든 곳에 있습니다. 때로 우리가 매우 약하거나 깊은 죄에 빠져 있을 때, 사탄은 우리를 통해 일합니다. 추기경, 주교, 사제, 엄마, 아버지, 자식… 누구든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자신은 선과 악을 받아들이는 위성 안테나나 같습니다. 바티칸 안에 사탄이 있다고, 그곳의 모든 사람들이 사탄에게 넘어갔다고 놀랍니다. “뭐야??~그게 정말이야? 바티칸 내에 사탄이 있다고???? 오마나…..” ㅎㅎㅎㅎ 사탄은 어디에나 있습니다. 분명히 바티칸에도 사탄이 있지요. 우리가 육체를 가지고 있는 한 사탄은 항상 우리 주위에 있고 때로는 우리를 통해 일합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 베드로 에게 “사탄아 물러가라” 라고 말씀하셨지요. 그것은 베드로에게 하는 말이 아니라 베드로를 통해 말하고 있는 사탄에게 하는 말입니다. 그렇다고 베드로가 악한사람이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꼭 대죄가 있었던 것도 아니구요. 단지 악의 영이 베드로를 통해 말한것이지요. 베드로는 두려움이나, 자만심 등과 같은 것으로 인해 자신을 인간적으로 끌어 내려 인간적으로만 말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우리 가운데 사탄이 있다는 것에 놀랄 필요가 없음을 보여주십니다. 주님이 사탄을이기시는 분이라는 것을 신뢰하지 못하는 것이 문제인것입니다. 가톨릭 신자에게 깨어나라고 하는 것은, 사탄이 ‘바티칸에 있다, 우리 본당에 있다, 우리 가정에 있다’ 라고 말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가운데 계시다’ 에 대해 말하라는 것입니다. 사탄이 무슨 일을 하든, 하느님의 능력은 모든 것을 이기십니다. 많은 사람들이 사탄의 행위를 전하는 사람이 되려고 합니다. 여기 저기서 있는 사탄의 계획을 전하려합니다. 이 런던에서 있을 어떤 도둑의 계획을 알게 된다면 무슨 짓을 하든간에 우리집 문 단속을 확실히 하여 자신을 안전하게 하지 않겠습니까? 사탄도 마찬가지입니다. 사탄이 어떤 계획을 하든 말든 내버려 두고 그것 때문에 안절부절 하지하십시오. 사탄을 주시하지 말고 사탄에게 문을 열어주지 않도록 자신의 마음을 주시하십시오. 우리는 사탄의 행위를 전하는 사람이 아니라 우리 가운데 일하시는 하느님의 일을 전하는 사람이 되어야합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 가톨릭 신자가 올바로 해야할 자세입니다. 어두움의 전달자가 아니라 빛의 전달자가 되어야합니다.
정말 바티칸이 완전히 분열되었고 끔찍한 일들만 일어난다면 오늘날 교황을 선출이나 할 수 있을 것 같습니까? 그렇다면 어떻게교황을 선출하기 위해 몇 주 동안을 순종하며 모일 수가 있겠습니까? 계속 서로 싸움만 하겠지요.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명백한 이야기이지요. 어떤 사람들은 큰 마피아가 이미 누가 선출될 지를 알고 있다는 둥의 이야기를 합니다. 그렇다면 교황은 사탄의 하수인으로 두 얼굴을 가지고 있겠지요. 어떤 사람들은 그런 어이없는 이야기들을 하고 다닙니다.
가톨릭에게 깨어나라는 것은 우리의 삶이 단순헤져야함을 이해하라는 것입니다. 삶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복잡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작아진다는 것은 아주 어려운 일이지요. 그러나 우리는 작아져서 기본적인 것으로 돌아가야합니다. 그것이 우리에게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어린이와 같이 되라고 하셨습니다. 미성숙하게 되라는 것이 아니라 어린아이와 같이 되라는 것입니다.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로 하여금 많은 혼동으로 부터 벗어날 수 있게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가톨릭의 가장 큰 문제는 혼동이라고 생각합니다. 너무 많은 정보를 가지려하기 때문입니다. 정보의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너무도 많은 정보를 알려하고 그것에 중독이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가장 먼저 해야할 일은 그 모든 것들을 멀리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체를 모시는 매우 단순한 가톨릭 신자가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단순함 가운데 계십니다. 하느님은 미소함 안에 계십니다. 하느님은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이는 것에 계십니다
가끔 겸손하고 단순한 가톨릭 신자와 이야기를 나누어 보면 그들은 많은 말을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많은 것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을 위해 기도하고, 사랑하며 관심을 갖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작게 보일지라도 아주 큽니다. 하느님의 사람인것이지요. 하느님은 그런 사람의 말을 들으십니다. 그렇다고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귀 기울이시지 않는다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너무 크고, 자만심에 차 있으며, 부풀려 있을지라도 하느님은 언제나 우리에게 귀 기울이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무릎꿇고 경배하며 겸손함을 배울 때, 겸손하고 작아진 우리의 기도, 울부짖음, 청원은 하느님께 더 가까이 가고 더 커지며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더욱 많은 것을 주십니다. 우리는 겸손해져야하고 작아져야합니다. 그것이 오늘날의 가톨릭 신자에게 부족한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날 우리 교회의 많은 불순결에 대해 불평을 합니다. 성직자들의 많은 불순결한 행위에 대해 이야기 합니다. 많은 소아성애자며, 마피아, 동성애자, 레즈비언, …사제들이 결혼을 주장하고, 수녀들이 사제가 되려하고, …. 교회내에서 제안되는 많은 문제들..등등 그 모든 것들이 스캔들이 됩니다. 그렇다면 우리자신에게 자문해 보아야합니다. 그들이 다들 어디서 왔는지요.많은 사람들이 하지 말아야 할 일들을 합니다. 그러한 모든 교회의 스캔들을 보면서 우리는 한가지 사실을 알아야하고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 모든 사람들이 가정으로 부터 왔다는 것입니다. 오늘날의 가정이 어떻습니까? 대부분이 문제가 있는 가정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 가톨릭 신자들 조차도 너무도 세상적으로 되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저는 평신도 선교회를 하면서 저희 공동체의 가장 큰 문제는 성소를 가진 젊은이들에 대한 것입니다. 그들의 부모 때문입니다. 그들의 부모가 저에게 와서 자식들을 훔쳐갔다고 도둑취급을 합니다. 저를 괴물, 주술자..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오늘날의 가톨릭신자입니다.
때로 우리는 문제가 있는 사제, 수도자, 교회에서 봉사하는 평신도들을 보면서 “오 어떻게 저런 사람이 교회에 있는 거야..” 하면서 불평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잊고 있는 것은 그들이 바로 오늘날의 우리가 만들어낸 결과물이라는 것입니다. 오늘날의 가정으로 부터 나온 결과이지요. 오늘날의 문제있는 가정에서 문제있는 사제가 나온겁니다. 그러니 불평할수 없습니다. 우리가 해야할 일은 우리 모두가 변화되어, 가정이 거룩해져야한다는 겁니다. 우리의 가정을 살려내야하는 것이죠. 결혼을 살려내야 하고 우리가 잃어버린 많은 것들을 살려내야합니다.
교회가 도덕적으로 그토록 모양새가 좋지 않음을 스캔들화 할것이 없습니다. 그것은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의 모습이 그렇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바로 세상의 문젯점이고 가정의 문젯점입니다. 그것이 교회에 반영된것이지요.
가톨릭 교회는 하느님을 반영하게 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이 교회를 바라볼 때 하느님을 볼 수 있는 거울이어야 합니다. 교회 안의 사제들 안에서, 수도자 안에서, 평신도 안에서, 결혼성소 안에서 하느님을 보아야 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오늘날은 교회는 세상처럼 되어버린 것입니다. 교회가 사교를 위한 교회가 되었고 성령의 교회가 되지 못한 것입니다.
물론 모든 교회가 그런것은 아닙니다. 이곳의 여러분과 같이, 아마도 여러분은 일요일에 단순히 성당만 나가는 신자는 아닐거라고 생각합니다. 그것보다는 좀 더 나아지려고 하는 사람들일겁니다. 그렇다고 다른 사람들보다 더 나은 사람이라는 것은 아닙니다만, 좀 더 믿음이 깊어지길 원할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제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되려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불평하고, 사람들에게 손가락질하거나, 교회에 대해 온갖 험담과 불평을 하며 교회 안에 사탄이 있다고 가르치는 것을 멈추어야 합니다. 그것은 시간낭비라고 확실히 말해드릴수 있습니다. 예수님이나 어떤 주님의 제자도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성 바오로는 땅이 흔들릴 만큼 아주 강한 어조로 설교하지요. 그러나 그의 서간을 읽어보면서 한가지 알 수 있는 것은항상 아주 많은 놀라운 동정심을 가지고 가르쳤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나쁜지를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좋아질 수 있는지를 말하고자 한 것이었습니다. 바로 그것입니다. 얼마나 사악해졌는지가 아니라 어떻게 나아질 수 있는가인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증언이어야합니다.
제가 이곳에서 강연하는 것에 대해 진심으로 기쁘고 영광스럽게 생각합니다. 이곳에 오기전 저의 가장 큰 기도는 “주님, 제가 당신의 사람들에게 강연을 합니다. 오직 그 사람들의 구원만을 염려하는 마음으로 그 곳에 설 수 있는 은총을 주십시오. 그들 한 사람 한 사람이 저에게 매우 중요합니다. 그들 각자의 구원이 저의 구원이며 우리 모두가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였습니다. 그것만이 제가 여러분 앞에 선 이유입니다. 그렇지 않고, 제 자신을 의식하며 제가 한 말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신경 쓴다면, 이 순간에 임하는 성령을 빼앗기고 말것입니다. 우리는 성령께서 우리를 이끄시고, 우리를 채우시고, 치유해 주시고 구원해 주시며, 또한 우리가 얼마나 단순해져야 하고 순수한 가톨릭 신자가 되어야 하는지를 깨닫게 해 주시도록 이곳에 있습니다. 저는 우리들의 마음이 얼마나 놀랍도록 힘이 있는 것인가를 이해하고 있습니다. 우리들의 마음 안에서 아주 많은 것들이 이루어집니다.우리는 아주 풍요롭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당신의 사랑으로 창조하셨습니다. 우리 마음 안에 하느님의 사랑이 있기에 우리의 마음은 그토록 풍요로운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탄은 우리의 마음을 그토록 빼앗기 원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각을 왜곡되도록 하려하고, 혼동을 주어 우리의 마음을 온갖 쓰레기같은 것으로 채우려합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모든 은총을 주셨습니다. 일부분만 주신것이 아니라 모든 은총을 주셨습니다. 거룩한 당신 자신을 우리에게 내어 주셨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으로 창조하셨으므로, 그 사랑으로 우리 각자가 구원의 경제를 완성하는 사명을 완수할 수 있도록 할 것입니다. 그것이 신비의 한부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안에서 많은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누구도 우리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오직 하느님만이 아십니다. 남편조차도 아내를 알 수 없고, 그 누구도 우리를 안다고 말할 수 없지요. 우리 각자는 모두 큰 신비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조차도 자신이 누구인지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서로에 대한 동정심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가톨릭 신자로서 우리의 가장 큰 목표는 교회를 있는 그대로 사랑하고 용서하는 것을 배우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가족간에 온갖 안좋은 문제가 있는 가정에서 태어났다고 한다면 여러분이 해야 할 일은 있는 그대로 그들을 사랑하는 일입니다. 우리는 문제가 있는 세상에 살고 있지요. 세상에는 온갖 잘못된 일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 일들에 촛점을 맞추고 싶습니까?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사랑이 흐르도록 하고 싶을 겁니다. 사랑이 있다면 무엇을 하든, 어디를 가든 치유의 길을 열어줄 것입니다. 여러분이 아무리 문제가 많은 가정에 태어났더라도 사랑으로 일관한다면, 그 가정에 무슨일이 일어나든 여러분이 가정의 빛이되고 희망의 기둥이 될 것입니다. 그것이 또한 우리의 문제가 있는 교회에 대해 우리가 해야할 일입니다. 오늘날의 교회는 인간적인 면으로 말하자면 가장 문제가 많습니다. 그러나 교회의 가장 높은 중심에 하느님이 계시므로 여전히 거룩하고 완전합니다. 사람이 되신 예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가 넘어져 흩어진다 하더라도 높으신 분은 건재할 것입니다. 그분은 예수님이시며 교회는 항상 우뚝 서 있을 것입니다.
가톨릭은 2000년 동안 신자들이 자신의 교회를 무너뜨릴 만한 많은 것들을 해왔습니다. 그러나 무너지지 않았습니다. 교회 밖에서는 감히 건들지도 못합니다. 그럴수 없다는 것을 압니다. 그들이 우리보다 그것을 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교회를 상하게 하는 것은 우리자신입니다. 어떤 본당에 가보면 모든 신자들이 사제를 끌어내리려 합니다. 서로를 물어뜯으며 여기저기서 교회를 무너뜨리려 합니다. 조화를 이루는 곳은 아주 적습니다. 함께 기뻐하며, 찬미하고, 서로 사랑하며, 사제를 도와주고, 함께 일하며 교회의 선을 위해 일하고 영혼의 구원을 위해 일하는 그런 본당은 아주 적습니다.
우리는 사탄의 일을 주시하는 것을 멈추고 그것을 무시하도록 자신을 바꿀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사탄이 하고 있는 일에 너무 많은 촛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우리를 항상 분열하도록 만듭니다. 사탄이 하고 있는 일이 무엇입니까? 분열시키고, 분열시키고, 분열시키는 일입니다. 우리가 분열하면 서로 함께 일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탄이 있는 곳에는 분명히 분열이 있습니다. 사탄은 분열입니다. 일치가 있는 곳에는 하느님이 계십니다. 하느님만이 우리를 일치시키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가톨릭의 은총이 무엇인지 이해해야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교회를 주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우리 교회가 유일한 하느님의 교회라는 것을 말하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그 말을 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유대교적 그리스도 교회입니다. (유대교의 연장, 지속인 그리스도 교회) 유대인과 같이 되도록 주류에 접목되어졌지요. 예수님께서 부활에 대해 설명하실 때, 우리는 천사와 같이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사두가이파가 예수님을 테스트하면서, 부활에 대해 논쟁이 벌어질 때, 일곱형제와 결혼했던 여자가 아이가 없이 죽는다면 죽어서 누구의 아내이냐고 묻자 “아니다. 천사와 같이 될것이다.” 라고 하셨습니다. 그 대답은 우리가 어떤 존재인지, 우리의 운명이 무엇인지 이해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은 예수님의 부르심에 기초를 두고 세례와 성사를 통해 주어진 성령의 은총에 의해 우리의 창조목적인 초자연적인 사람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것이우리의 가장 큰 은총임을 이해해야합니다.
오늘날의 가톨릭 신자로서의 삶은 여러가지로 혼동이 있을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베네딕토 16세로부터 이제 새로운 교황으로 이임되는 것을 이야기 하지요., 새로운 교황을 보면 겸손하고 가난한 사람들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하는 걸 볼 수 있습니다. 베네딕토 교황은 매우 지혜를 가진 교황으로서 많은 것에 대해 지적으로, 지혜롭고 거룩하게 말해 줍니다. 새로운 교황이 가난한 사람들을 염려하는 것등을 보며, 아마도 많은 질문을 가질 것입니다. 저는 우리의 교황이 매우 거룩한 교황이기를 기도하고 있으며 우리 모두가 그것을 원하고 있지요. 프란치스코 교황의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영성이 겸손의 영성, 새롭게 되어지는 영성,새로운 복음전파의 영성, 선과 영적인 삶에로 변화될 수 있는 영성으로 이어져 새로운 교회, 새로운 복음전파를 이끌어 내어 우리 모두가 영적인 하느님의 자녀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날의 우리는 너무도 물질화 되어있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모든 것에로 우리의 교황을 도와야합니다. 이제 새로운 교황이 선출된 지 얼마 되지 않았으므로 성령께서 어떻게 이끌어 가실지 우리는 모릅니다만, 우리는 기도와 여러가지 방법으로서 우리의 교황을 도와야합니다.
많은 부정적인 사람들이나 이상한 사람들이 멸망의 메세지를 퍼뜨리고 교황에 대해 끔찍한 이야기를 전하기도 하며 온갖 종류의 예언을 들어가며 이상한 이야기를 퍼뜨립니다. 한가지 말씀드리죠. 그러한 것에 주위를 기울여서는 안될 것입니다. 우리는 교회를 이끌도록 뽑힌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며 사랑으로 도와야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에 주위를 기울여야 합니다. 본당신부를 돕고 우리 이웃사람들을 도우며, 오늘 이곳에 있는 각자를 도우며, 일반적인 교회의 모든 것을 항상 도와야한다는 것입니다. 누구나가 실수할 수 있습니다. 교황, 추기경, 주교, 사제, 그리고 저나 여러분 모두 실수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실수한다고 서로 등져야합니까? 아닙니다. 우리는 서로 이해하고 용서하며 서로 함께 일을 해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미래에 무슨 일이 일어난다는 등의 이런저런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과거에 어떤 일이 있었다는등의 쓸떼없는 말과 행동들을 멈추고 바로 현재 아주 신실한 가톨릭 신자가 되어 마음을 변화시키기 시작해야합니다. 교황님이 어떨 것이다 라는 것이 아니라 나의 마음을 변화시켜 내가 할 일을 생각하고 그 변화된 마음으로 그를 도와야할 것을 생각해야하는 것이죠. 비판하고, 예언을 거론하고, 교회나 교황에 대한 자신의 생각이 아니라 나의 변화, 나의 회개를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때로 “언제 회개했느냐”고 묻곤 합니다. 그러나 바로 알아야 할 것은 우리는 회개한 것이 아니라 회개하고 있는 중입니다. 매일 회개에로 깨어나야 하는 것이죠. 우리가 아무리 노력했어도, 아직 우리는 회개되지 않았습니다. 결국 우리는 회개하고 모든 것을 해낼것입니다. 그러기에 성바오로는 경주를 이기기위해 준비를 잘해야한다고 말한 것입니다. 올림픽에서 선수를 훈련시키는 것은 이기기 위해서이지요. 일시적인 삶의 왕관을 얻기 위해서도 아주 강한 훈련을 하는데 우리의 영원한 왕관을 얻기 위해 어떻게 해야할지 상상이 가십니까? 정신으로 받아들인 것을 마음으로 가져와 목표를 향해 달려가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집으로 갈 수 있기 위해서는 매일 매우 열심히 노력해야합니다. 삶 안에 있는 어두움을 빛 안으로 가져올 수 있도록 계속 끊임없이 회개해야하는 것입니다.
성인들은 항상 말하지요. 기도의 삶을 살며 끊임없이 기도하라고 합니다. 사람들은 찬미와 암송하는 것이 기도라고 생각합니다. 하루종일 기도문을 외는데 지친다고 하지요. 그러나 기도는 하느님을 의식하며 하느님 안에서 사는 것을 말합니다. 예를 들어 결혼한 커플이 남편은 파티에 가고 아내는 집에 남아 있습니다. 그들이 진정한 사랑을 가진 결혼생활을 하고 있다면 남편이 파티에 가 있는 그 모든 순간에도 항상 마음 안에는 아내가 있습니다. 우리 안에 있는 하느님이 그래야 하고 그것이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기도한다는 것은 결혼과 같이 하느님이 항상 내안에 있는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끊임없이 기도하고 있어야합니다. 항상 하느님을 느끼고 있는 것이지요. 그것이 가장 중요한 기도입니다. 물고기는 자신이 물 안에 있다는 것을 모르지요. 우리는 하느님의 물 안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나요? 노! 때로는 하느님은 저 먼 곳에 있고 나는 여기 있지요. 그리고 하느님바깥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닙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떠나서 살 수 없습니다. 우리는 물에 있는 물고기와 같이 하느님의 바다에서 수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하느님 안에 있고, 내 안에 하느님이 있는 것입니다. 절대로 그 바깥에 있을 수 없습니다.
오늘날 가톨릭이 깨어난다는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이해한다는 것은, 매우 작은 사람이 되는 것을 이해해야합니다. 그럼으로써 하느님께서 일하시도록 하는 겁니다. 그것만이 방법입니다. 작아져서 주님을 조배하고, 고백성사를 보고 나와 작은자로서 미사에 참례하면서 자신이 느끼지 못하더라도 작은자로서 그토록 큰 은총인 성체를 영하고 나와 기쁨과 단순함을 누리는 것, 큰일을 할 필요 없이 하느님의 작은자로서 만족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단순한 삶 안에서의 하느님의 축복이며 교회의 은총이고 성령의 은총이며 작아짐으로서의 참된 평화와 기쁨을 느끼게 하는 것입니다. 더 이상 삶에서 큰 것을 기대하지 않고 삶에서 일어나는 너무도 많은 일들로 인해 바쁘게 살 필요도 없는 것입니다. 더 이상 우울해지지 않고 걱정하지 않으며, 더 이상 혼동하지도않고 공허함을 느끼지 않고 많은 것을 필요로 하지 않고 작아짐으로 인해 행복해지는 것이지요. 그것이 참된 가톨릭 신자로서의 출발점입니다.
아주 바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수도원이나 하느님께 봉헌하는 삶을 사는 공동체를 방문할 때 항상 그 곳에 있는 사람들을 보며 묻습니다. “어떻게 이런 삶을 살 수 있나요? 하루종일 여기에 계세요? ..네… 가끔 밖으로 나가시나요? …아니요..가끔 영화관람은 하시나요?...아니요..우리는 영화관람은 안하는데요…가끔 어머니는 방문하세요?...아니요…삶을 뭐하면서 지내세요?...(ㅋㅋㅋㅋ)..어떻게 그렇게 사세요?....(ㅋㅋㅋㅋ) 거의 이해가 되지 않지요..종교적인 삶의 은총을 이해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사제직은 놀라운 은총입니다. 물론 결혼성소도 놀라운 은총입니다만. 배우자를 사랑하고 자녀를 사랑하고, 혹은 자신의본당을 사랑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단순하게 함께 하며 작아져서 세상으로 인해 산만해지지 않고 걱정하지 않고 기도하며 베풂으로서 모든 사람을 마음안에 느끼는, 돌아가신 분들을 위해 기도를 쌓는 것, 조용히 무엇을 바라지 않는 삶, 그것이 참된 가톨릭 신자의 삶입니다. 바로 그것에로 하느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것입니다. 그것만이 우리의 사명입니다. 아주 커져서 큰 일을 해야할 필요가 없이 작아지는 것. 그것에로 우리는 깨어나야합니다. 그렇게 할 때 우리의 교회를 변화시킬수 있습니다. 그렇게 우리의 삶을 변화시킬때, 가정을 변화시키며 주변을 변화시키고 세상을 변화시킬수 있습니다.
우리는 온 세상을 변화시키려 할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우리에게 맡겨 주신대로 자신의 작은 삶을 변화시켜야합니다. 우리의 작은 삶을 변화시킬때 주변의 모든 사람들을 변화시킬 기회가 있습니다. 많은 부모들이 자녀들에게 하느님께 가까이 가지 않는다고 화가 나 있지요. “어떤 구일 기도를 하세요? 아무리 기도해도 바뀌지가 않아요. 혹시 새로운 묵주기도 방법을 알고 있는게 있나요?” ㅋㅋㅋ “아무리 생각해도 어떻게 해야 할지..주변 사람들이 바뀌지가 않네요.” ㅋㅋㅋ 저는 항상 말합니다. 무언가 잘못된 것이지요. 뭐가 잘못됬냐구요? 이런 저런 기도를 하고 구일기도를 하고 단식을 하고 희생을 바친다고만 되는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한부분일뿐입니다. 가장 큰 부분의 증언은 자신이 바뀌는 것입니다. 부모가 변화되는 것을 볼 때 자녀들이 놀랍니다. “우리 엄마가 저렇게 된게 맞아? 정말로 친절해지고 마음이 넓어진거야? 용서하고 소리를 질러대지 않는 우리엄마가 맞아? 저렇게 나에 대해 평화로워 진거야? 와~ 저건 기적이야..” 그럴때 그들이 엄마의 종교를 사랑하기 시작합니다. 엄마의 종교가 뭔가 있다고 느끼는 것이죠. 그러나 열매가 없는 종교는 주변의 모든 사람들을 하느님으로 부터 밀어냅니다. 참된 회개가 결여된 것이죠. 가톨릭이 깨어난다는 것은 작아짐을 이해하고 자신이 먼저 변화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변화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때로 이와같은 이야기를 들으면서 이렇게 생각하지요. “우리 엄마가 왔어야 하는데…” ㅋㅋㅋ “누구..누구가 왔어야 하는데..” ㅋㅋㅋ 오~ 아닙니다. 이 말은 자신에게 주는 말입니다. 엄마나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자신에게 하는 말입니다. 그러기에 여기에 엄마가 안 온겁니다. ㅎㅎㅎㅎ 이것이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주님께서 오셔서 우리가 들어야 할 말씀을 하신다는 것을 이해해야합니다. 그러기에 주님께서는 “오늘 주님이 말씀하실 때 마음을 굳어지게 하지 말라” 라고 하시는 겁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말씀하실 때, 그것이 자신에게 하시는 말씀이라는 것을 느낄수 있습니다. 성령이 현존하시며 하느님의 말씀이 아주 단순하게 우리 마음 안에 창과 같이 곧바로 들어와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듣고 있느냐? 내가 너에게 무엇을 원하는지 너는 알고 있다. 네가 작은자가 되기를 원한다는 것을 느끼고 있느냐? 네가 너무 커졌기 때문이다.너무 켜져서 너의 삶에 네가 맞지 않는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역: wisdom 주님과 함께 기뻐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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