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련중에 굳건하게 서기
우리 모두는 삶의 어려운 시기를 거치며, 시련을 통한 고통을 견딜 수 있는 정도는 개개인에 따라 다릅니다. 의사들은 고통의 단계를 숫자로 표현하지요. 고통을 인내할 수 있는 정도를 단계별로8,7,3,2,.. 뭐 이런식으로요.
영적으로 말하면, 고통과 시련이 왔을때 우리 각자가 인내할 수 있는 고통의 단계도 각기 다릅니다. 그러나 고통의 무게를 얼마나 견딜 수 있는지는 의사가 아닌 오직 하느님만이 아십니다. 하느님과 함께 하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하느님과 함께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사탄이 지우는 고통은 참을 수 없는 것입니다. 사탄은 사람을 망쳐놓기 위해 고통을 줍니다. 사탄은 우리를 파괴하기 위하여 고통을 주지만,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올바르게 만들기 위해 고통을 허락하십니다. 두 고통이 비슷하게 보입니다만 하나는 파괴를 향하고 다른 하나는 우리를 바로 잡아 원래의 모습을 되찾기 위한 것으로 완전히 상반된 것입니다.
사탄은 무엇이든 닥치는대로 흉내를 냅니다. 기막힐 노릇이지만, 실제로 주술을 하는 사람들이나 사탄 숭배자들은 돈이나, 권력등을 위해 자신의 영혼을 사탄에게 주기도합니다. 사탄은 그들이 원하는 것을 가져다 주지만 천천히 모든 것을 앗아가지요. 사탄은 조금씩 조금씩 끔찍한 결과를 맞게 하며 사람을 완전히 망가 뜨립니다. 마지막이 어떨지 여러분도 아시지요. 결국은 영원한 멸망에 이릅니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당신의 계획에 따라 삶을 체험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십니다. 당신의 계획에 따른 삶이란 정화를 거쳐야 하는 삶입니다. 우리 모두는 하느님의 사랑의 불인 용광로를 거쳐야하며 그것을 피할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이유는 우리의 모습이 아직 완성되지 않았으며, 만들어지는 과정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창조되어졌으나 죽음이라는 장벽을 넘어 영원한 삶으로 건너가야 합니다. 그렇게 하기위해 우리 모두는 고통스러운 정화의 과정을 거쳐야합니다.
우리는 모태에서 나올때 고통을 수반하게 되어있습니다. 아름다운 순간이지만 동시에 힘든 순간입니다. 드라마틱한 순간이자, 변모의 순간이기도 하지요. 삶이 주어지는 기적의 순간입니다.
죽음을 맞이할때도 그렇습니다. 엄청난 (초월적) 변모의 순간이죠.
모태에서 세상에 나오는 그 순간부터 죽음의 순간까지 우리는 진흙으로써 화덕안으로 들어가야만합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화덕에 넣어지지 않으려고 진흙인 채로 도망다니지요. (ㅎㅎㅎ) 그렇게 생 진흙인채로 나 다니던 사람들은 마지막에 아주 힘든 때를 맞게 될 겁니다. (ㅎㅎ) 그의 영혼이 매우 약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영혼을 강하게 할 수 있는 방법은 그 화덕에 들어가는 것뿐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그 화덕안으로 들어가게 하실것입니다. 어떻게? 여러분이 집착하는 삶의 모든 편안함을 내려놓게 하실겁니다. 편안함 자체가 잘못된 것이 아니라, 잘못된 것은 편안함이 우리의 삶의 모든 것이 된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편안함, 기회, 성공, 풍요로움, 부유함을 숭배하며 그것들을 가져야만 행복해 합니다. 풍족하지 못하고, 건강하지 못하고, 세상적인 것을 갖지 못한다면 비참하다고 느끼고, 완전히 망가져 희망도 없고, 퉁명스럽고, 비관하고, 분노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는 정화를 필요로 한다는 것과, 정화를 위한 시험을 거쳐야 한다는 것을 이해하기를 원하십니다.
많은 사람들이 다른 사람의 삶을 바라볼 때, 그들은 전혀 문제가 없는 삶을 사는 것 같아 보입니다. 굉장히 평온한 삶을 사는것 같지요. 그러나 정말 자세히 들여다 보면 그 누구도 쉬운 삶을 살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될것입니다. 그런 삶은 없습니다. 때때로 우리는 순탄하고, 순조로운 삶의 시기를 지날 때가 있지요. 그러나 그다음 큰 어려움을 맞을 때가 있습니다. 빠르던, 늦던 누구에게나 그런 시기는 옵니다. 누군가가 내가 타고 있는 배를 흔들어 대는것 같지요. 아주 어지럽습니다. 때로는 너무 어지러워서 배에서 뛰어내리고 싶지요. 많은 사람들이 그렇습니다.
고통과 시련, 시험의 가치를 이해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것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많은 은총을 낭비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큰 시련 가운데 있을 때가 영적으로 참된 성장을 할 수 있는 가장 큰 기회가 있는 때입니다. 자신이 누구인지, 하느님이 자신의 마음안에 얼마나 있는지, 자신의 믿음이 어떠한지, 얼마만큼 사랑을 가지고 있는지를 알 수 있는 때이죠.
가끔 살면서 누군가가 자신을 배신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대부분 복수를 생각합니다. 혹은 분개를 하거나, 그 사람을 무시해 버리고 잊어버립니다. 삶에서 완전히 그사람에 대한 것을 지워버리려고 하지요. 누군가가 자신을 속였거나 배신했을 때, 혹은 자신을 반대하고 잘 대하지 않을 때 일반 사람들이 하는 반응입니다. 그러나 누군가가 나를 완전히 멸시할 때, 가장 커다란 교훈이 그 이면에 있으며, 그때가 가장 큰 기회입니다. 왜냐구요. 우리는 가장 낮아져야 하고, 자신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아무 자격이 없는 사람입니다. 사람들이 자신을 사랑해야한다는 환상을 가지고 살아가지만 그것이 실수입니다. 가장 큰 실수는 모든 사람이 자신을 사랑해야한다고 착각하는 것입니다. 자신을 사랑하고 칭송해야할 의무가 있다고 여기며 그것을 원하지요.
초등학교에 들어갔을 때를 기억해보십시오. 아주 트라우마틱한 시기였죠. 현실을 깨닫고 정신이 번쩍들기 시작하지요. 나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는 때입니다.
저는 저의 초등학교 첫 해동안 눈탱이가 밤탱이가 되어 다녔습니다. (ㅎㅎㅎ) 입학한지 단 삼일만에 일이었어요. 저는 항상 저의 사촌들과 그랬던 것처럼, 장난을 쳐도 되는 줄 알았거든요. 오 노~ 성격 급한 낯선 아이들이 저를 좋아하지 않았고 제 눈에 펀치를 날렸어요. (ㅎㅎㅎ) 일주일 내내 울고 다녔지요. 저희 부모님은 화가 나셔서, 모두들 감옥에 보내고 싶어 했지요. (ㅋㅋ)
우리는 가장 큰 교훈인, 모든 사람들이 나를 사랑해주고, 좋아해주고, 나를 참아주는건 아니라는 것을 어렵게 배우지만, 그것을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만일 초등학교 어린 시절 쯤에 그러한 교훈을 배우지 못한다면 나머지 삶이 매우 힘들겁니다. 많은 사람들이, 초등학교 시절쯤, 점수를 잘받는 학생이었을지라도, 많은 인간관계나 내적인 사랑에 대해 배우는데 있어서는 그리 점수가 좋지 않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자신을 사랑해주지 않는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모습을 바로 잡기 위해 모든 것을 이용하십니다. 우리는 그것을 이해하고 그에 대해 매우 겸손해져야 합니다. 누군가가 나를 멸시하거나, 나를 반대할 때, 우리는 그것을 이용해야 합니다. 누군가가 나를 반대하고, 나를 망치려고 하여 매우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을때, 복수하고 싶은 생각, 분노, 경멸 등의 마음을 포기하고 뒤로 물러서도록 정말 노력하여야 하고, 자신이 얼마나 약하고 비참한지, 얼마나 용서를 하지 못하는지를 깨닫고, 하느님께 자신의 마음을 바꾸어 주시도록, 힘을 주시도록 간청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못한다면 이 시련과 함께 오는 삶의 모든 다른 고통을 통하여 하느님께서 바로 잡으려 하시는 그 모습대로 나의 마음을 바꿀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되면 은총을 낭비하게 될것입니다. 모든 낭비한 은총은 삶의 무게가 되어 어두운 오점이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특정한 시련에 의해 해방되어야자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 시련은 여러분을 거스르게 될 것이고 그것이 또다른 삶의 무게가 되어 돌아 올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아주 많은 짐을 등에 지고 구부러져 다닙니다. 많은 시련을 낭비하여 많은 원망, 분노, 혼란, 걱정등을 지고 가기 때문입니다. 일이 자신의 방법대로, 제대로 되지 않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입니다.
시련을 극복하는 방법을 배우려면 소위, 십자가의 과학(science of cross)을 배워야합니다. 십자가위에 모든 것을 내려놓아야한다는 것입니다.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아야합니다. 자신을 내려 놓고, 이 삶에서 일어나고 있는 끔찍한 일들, 누군가가 자신을 미워하고, 박해하고, 모함하는 것등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때로 사람들이 자신에 대해 사실이 아닌 일에 대해 험담을 하거나 중상모략을 할 때가 있습니다. 매우 상처를 받지요. 그 이야기가 사실이더라도 마찬가지입니다. 매우 상처를 받습니다.
완전해지기 위한 법칙으로 다음과 같은 것을 배울겁니다. 우리는 그 누구에 대한 그 어떠한 소문도 퍼뜨려서는 안됩니다. 그것이 사실일지라도 그래서는 안됩니다. 그 사람의 좋은 점을 알리기 위한 것이 아니라면요. 우리는 서로의 덕이나 자질을 알리는것은 좋은것이죠. 그것으로써 교회를 이끌어 나갈 수 있으니까요.
그러나 누군가의 삶에 대한 소문을, 퍼뜨려서는 안됩니다. 그것이 사실이라 할지라도 상처를 주는 것이죠.
여러분이 완전함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면, 진심으로 시련을 이용하고 싶다면, 항상 자신의 말을 조심하십시오. 여러분의 혀를 조심하십시오. 시련을 이용하는데 있어서 혀가 우리의 적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잘못하면 여러분의 시련이 3배가 될 것입니다. 이웃에 거슬러 많은 죄를 지면 질수록 정화는 더 커지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여러분을 더 깊은 불로 데려가야만 할 것입니다. 더 깊이 모양을 잡아야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조심하지 않으면 그 불은 더욱 더 뜨거울 것입니다. 우리는 모양을 바로 잡아야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원래의 모습인 하느님의 형상을 가지고 그곳에서 나와야 합니다.
우리는 하느님과 닮은 모습으로 창조되었지만 죄로 인해 그것을 잃어버렸습니다. 우리의 모습이 죄로 인해 변형된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모습을 원래되로 돌려놓으시길 원하시고 그 이유로 예수님께서 이땅에 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구원(redemption) 의 기회를 주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구원, redemption이 무엇입니까? 원죄로 인해 잃어버린 하느님의 모습을 되찾아 주는것입니다. 우리의 영혼은 모양을 다시 잡아야합니다 그러기 위해 우리는 용광로를 거쳐야하는것이죠.
소위 성체를 모시지 않는, 어떤 크리스챤들은 고통이 필요하지 않다고 주장하는 것을 아실겁니다. 예수님이 우리을 위해 이미 고통을 겪으셨다고 말하지요. 오늘날에는 그것이 크리스챤처럼 보이지만, 크리스챤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십자가와 상관이 없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와 상관이 없는것은 그리스도와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같이 되려면 십자가를 거쳐야하기 때문입니다. 네, 그리스도는 부활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러기 전에 어떠셨습니까? 십자가를 거쳤지요? 그러므로 부활을 맞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할 것 같습니까? 마지막 만찬을 하고 나서 부활로 점프할 것 같습니까? 아니지요. 그러기에 많은 크리스챤이리고 말하는 사람들이 갈바리산을 거치지 않고, 마지막 만찬을 하고 나서 부활로 뛰어가며 알렐루야를 외치죠. 오 네, 아주 쉽고, 기분을 좋게해주는 크리스챤입니다.
그러나 그건 아닙니다. 우리의 삶에서의 시련과 역경은 아주 중요합니다. 그것이 중요하지 않았다면 우리의 주님께서 그걸 왜 겪으셨겠습니까? 그분은 우리가 어떻게 완전해지고 거룩해질 수 있는지를 가르쳐 주기 위해 이땅에 오셔서 나는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를 닮으라고 하시며 그분이 하신 모든 것을 우리도 하길 원하셨습니다. 당신 자신이 우리 모양을 잡는 모형틀이 되시어, 우리가 그분을 따라 할 수 있도록 사부님이 되시고자 이 땅에 오신겁니다.
우리에게 ‘내가 너희를 대신해서 이 시련을 거치고 있으니 너희는 시련을 거칠 필요가 없다’ 라고 말하시기 위해 고통을 겪으신 것이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이 성서를 그렇게 해석합니다만, 얼마나 잘못된 크리스챤인지 모릅니다. 분명히 사탄의 일이지요.
많은 현대심리학자들은 문제가 있는 결혼생활을 하는 사람들에게 “그를 떠나시오. 하느님은 당신을 행복하라고 만드셨으니, 고통받을 필요가 없습니다. 안 그러면 당신의 삶이 망가질거에요. ”라고 말합니다. 그것이 세상이 여러분에게 해주는 말입니다. 세상은 여러분에게 고통받지 말라고 말하죠. 자신만을 생각하고, 자신에게 편안한 영역만을 권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무어라고 말씀하십니까? 당신과 함께 걸어가라고 말씀하십니다. 어떻게? 인내하여라. 삶의 무게를 견디어라. 십자가를 지어라. 십자가위에 내려 놓아라. 내가 너와 함께 갈수 있도록 하여라. 그렇게 하느님과 함께 가야합니다. 그것만이 우리가 엄청난 고통을 거칠때, 그것을 이해할 수 있는 방법입니다.
저는 이런 사람들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때로 삶의 굴곡이 없는, 아주 평범한, 순탄한 삶을 살아갑니다. 특별한 병도 없고, 파산한 적도 없고, 이혼한적도 없고, 100세가 넘도록 가족들은 죽지도 않고..(ㅎㅎ) 모든 일이 순탄해 보입니다. 그런던 사람이 갑자기, 삶의 마지막에 모든 것이 무너지고 경험하지 못했던 엄청난 어려움에 빠집니다. 그러한 어려움이 몇주, 몇달, 혹은 몇년이 지속됩니다. 하느님께서 그 영혼을 뼛속 깊이까지 정화시키는데 충분한 만큼이지요. 그 누구도 그것을 설명할 수 없습니다. 성서에 나오는 포도원 주인이 일꾼을 불러오는 부분 기억하시죠? 어떤 사람은 아침에, 어떤 사람은 정오에, 어떤사람은 오후에 불러오지요. 그러나 그들 모두 같은 품삯을 줍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각자에 대해 하고 계신 일에 대해 그 누구도 설명할 수 없습니다. 우리 중 어떤 사람은 일생 내내 끊임없이 많은 고통을 받으며 살아가고 어떤 사람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생이 끝나고 우리 모두가 만났을 때, 우리 모두가, 천국에 오기전에, 충분히 엄청난 무게의 힘든, 신비로운 삶을 다 지나왔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단지 살아있다는 것, 그것은 은총일 뿐 아니라 아주 큰 신비입니다. 삶의 무거운 짐을 지는 신비입니다. 왜 삶의 무거운 짐을 집니까? 신비라는 말이 주는 의미가 무엇입니까? 그것이 무엇인지 발견하고 싶다는 것 아닙니까? 우리는 우리의 삶이 무엇인지 발견하려고 노력하지요. 무신론자들이나 이방인들은 철학이라는 이름으로 돌들을 쫓아다니지요. 때로 바윗덩이를 발견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결코 아무것도 찾지 못합니다. 그 돌은 하느님이기 때문이지요. 하느님을 알지 못하는데, 무엇을 찾겠습니까?
모든 사람들이 우리의 삶의 신비를 발견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누구도 정확하게 그것이 무엇인지 답을 주지 못합니다. 예수님에게만 답이 있을 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얼마나 예수님을 믿기위해 그분께 가까이 갔습니까? 답은 이미 성서에 모두 나와 있습니다. 그 답은 단순한데, 우리는 그것을 이해하는데 있어 어려움을 겪습니다. 좀 더 복잡한 답을 원하기 때문입니다. 성서에 나와 있는 단순한 답보다, 만들어진 답을 원하지요.
여러분의 삶에서 여러분의 모든 것이 잘되어 가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자신이 순종하고 있는지 살펴보십시오. 하느님께 순종하지 않는다면, 현재의 삶은 잘 되어가고 있다 하더라도, 이미 많은 어려움안에 있는 것입니다.
제 이야기를 예를 들겠습니다. 제가 납치라는 어려운 상황에 있기 전에, 저는 상류 삶을 살았습니다. 원하는 무엇이든 하였고, 원하는 무엇이든 가졌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이 필요치 않았으므로, 하느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누군가 제게 와서, 하느님께 순종하라는 것이나, 겸손, 동정심, 나눔.. 이런 이야기들을 하면, 장난처럼 들렸습니다.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고, 저에게는 아무런 의미도 없었으며 말도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에 저의 시련과 환란을 통해 하느님이 제게 오셔서 저를 흔들어 놓았고, 제가 하고 있는 모든 일이 괜잖지 않다는 것을 알도록 하셨습니다. 하고 있는 일이 좋은 것이 아니며, 방향을 바꾸고, 자세를 바꾸어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이었습니다.
때로 사람들은 가족의 죽음을 잘 이해하지 못합니다. 저의 가족이 어두운 시절에, 가족이 죽음을 당했을 때, 저의 누이들이 몹씨 분노했던 것을 기억합니다. 묘지에서 소리를 지르고 우는 것을 보았지요. 누구에게 소리지르는 겁니까? 하느님이지요. 그들의 울음에서 화가 나서 하는 말들을 들을수 있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인간적인 것을 내려 놓으라고 가르치고 계십니다. 우리는 움켜쥐려고만 하기 때문에 이해하기 어려운 가르침입니다만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내려 놓기를 원하십니다. 그렇지 못하면, 결코 우리는 내려 놓는것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또한 많은 시련을 겪어야한다는 것을 이해하는것은 아주 중요합니다.
우리는 얼마나 더 살게 될 지 모르지요. 얼마나 더 살 수 있는지는 큰 신비로서 오직 하느님만이 아십니다. 그것만으로도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하기를 원하시는지 생각할 수 있어야합니다. 기회가 있을 때마다 고통이나 자신을 비참하게 하는 것, 자신의 편안함을 방해하는 것등을 받아들이고 자신을 내려놓은 법을 배워야합니다. 그런것들이 큰 기회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자신의 모양을 바로잡으시도록 해 드리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은 아주 작은 것도 아주 좋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조각가가 돌을 쪼갤때, 처음에는 아주 세게 칩니다. 그리고 조각품이 거의 모양을 잡아갈 때는 아주 세밀하게 이곳 저곳을 작게 부수며 작업 하지요. 눈이며 입술이며 아주 세밀하게 마지막 작업을 하여 완벽하게 만듭니다. 우리의 삶 안에서도 때로는 주님께서 우리의 영혼에 대해 아주 부드럽게 작업하실 때가 있습니다. 눈의 모양을 만든다든지 하는…이때 주위를 기울이지 않으면 눈이 한짝이 될겁니다. (ㅎㅎㅎ)
여러분은 하느님의 큰 가르침이 천둥과 같이 오리라고 생각하지요. 그러나 어쩌면 여러분에 대한 하느님의 가장 큰 가르침은 여러분의 눈의 모양을 잡는것과 같이 부드럽게 올지도 모릅니다. 함께 하는데 익숙해지고, 편안한 관계인, 매우 가깝고 중요한 누군가에 대해 동정심을 가지고 아주 상냥하게, 사랑하고, 나누어야 하는 그 순간에 어쩌면 하느님께서 눈의 모양을 만들고 계신 것일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이 해야 할일은 그자리에서 하느님께서 여러분 옆에 있도록 해주신 그 아름다운 사람을, 어쩌면 그를 사랑하지 못하고 미워하거나 잘 대해주지 않았던 그 사람에게 동정심을 가지고 사랑하고, 부드럽게 감싸면서 그 순간 하느님께서 눈을 만드시도록 해 드려야 합니다. 그 순간은 아주 중요하고도 정교한 순간으로 하느님께서 조각의 매우 중요한 부분을 만드실것입니다. 조각가가 작품을 완성하는 아주 아름다운 순간이 되도록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조각품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의 모양을 만드십니다. 그렇게 하시도록 하기위해 서 우리는 많이 겸손해져야합니다. 원죄로 인해 사탄은 우리에게 반항의 영을 주었습니다. 우리는 진흙이면서도 조각품 행세를 합니다. 자신의 모양을 스스로 만들려고 하지요. 그러면 우리는 괴물이 되고 맙니다. 우리는 자신의 모양이 어떤지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하고 계신 일을 깨닫는 것은 아주 중요합니다. 때로는 가장 작은 일이 가장 정교한 조각을 하는데 있어 가장 중요한 일이 됩니다. 우리가 전혀 신경을 쓰지 않는 그런 부분이지만, 사람들에게 친절한 것, 참아주는 것등의 작은 행동이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바로 그때 주님께서 가장 중요한 부분에 정교한 조각을 할 수 있기 때문이지요. 여러분이 동정심과 나눔을 가진 부드럽고, 사랑하는 마음의 상태로 가야 하는 그 순간에 주님께서 오셔서 매우 중요한 부분의 모양을 만드실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주 주의를 기울여야합니다. 자주 우리는 서로에게 아주 무례하고, 무신경하고 느슨해지기 때문입니다. 그런것이 은총을 낭비하는 것이고 우리의 시련을 낭비하고 있는 것입니다. 특히 우리가 모르는 사람들이나, 우리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사랑하는데 있어서 많은 노력이 필요합니다. 우리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보물과 같은 일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 오셔서 “원수를 사랑하라” 고 말씀하신겁니다. 사람들은 그 말에 대해 묵상만 하고 그칩니다. 그에 대해 많은 신학을 알고 온세상을 덮을 만한 많은 설교를 들어도 여전히 사람들은 그 말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말이 얼마나 단순한 말인지 알지 못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삶을 단순해지도록 주의를 기울여야하고 인내하고 참아야합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을 밟지 않도록 한발 한발 주의하여야하고, 항상 사랑하여야합니다. 아주 어려운 일이기에 십가자의 과학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사랑하고 용서하는 사람이 되기위해 여러분은 하루 24시간 자신을 못박아야합니다.
오늘 우리가 이 자리에 온 것은 오직 한가지 이유일것입니다. 진심으로 완전해지기 위해 노력하고 싶기 때문일것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좀 더 잘 알고 싶고 사랑하고 싶어,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저 일요일에 교회나 가는 사람정도로 남아 있고 이자리에 오지 않았겠지요. 일요일에 성당에 가고 계명을 지키는 것, 그것으로도 마음의 평화를 가질 수는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마음을 변화시키지는 못합니다. 종교활동을 하는 것 뿐이죠. 우리는 그것보다 나아지기 위해 이곳에 있습니다.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 깊이 오셔서 놀라운 방법으로 우리의 모양을 만드시길 원합니다. 성령께서 어떻게 우리의 모양을 만듭니까? 시련을 통하여 배우라고 가르치시며 그 가운데 우리의 모양을 만드십니다. 시련과 어려움을 통해 배우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삶의 작은 것도 주의하라고 하십니다. 자신을 살펴서 전혀 신경 쓰지 않거나, 가볍게 보는 것들에 주의하십시오.
우정관계는 여러분이 생각했던 것보다 매우 중요합니다. 살아가며 여러분 주위에 애정을 보이고, 도와주고, 용기를 북돋아 주는 사람들이 항상 있다는것이 얼마나 크고 놀라운 보배인지 모릅니다. 그것이 얼마나 크고 상상을 초월하는 것인지 죽고나서 알게 될 것입니다. 우정관계는 여러분의 삶을 통해 하느님께서 주시는 특별한 선물입니다. 그러므로 성서에도 나오는 것처럼, 진정한 친구는 보물을 갖고 있는것과 같습니다.
좋은 친구는 어떤것도 감추지 않고 진실을 말해줍니다. 좋은 엄마는 자식들에게 있는 그대로 이야기해 줍니다.
저의 친구중 한명은 아들로 인해 매우 고통을 받고 있는데 그 아들이 자신이 동성애자라고 말한겁니다. 그것이 그녀에게 있어서 감당하기가 아주 힘든일이었습니다. 오늘날에는 그러한 것이 어떤 사람에게는 자연스럽게 여겨지기도 하지만, 많은 사람들에게는 아주 힘든 일이죠. 특별히 엄마에게는 그렇죠. 저는 요즘 세상이 떠들썩한 게이에 대해 어떤 특별한 이야기를 하고자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예를 들어 보이는 것입니다. 이 엄마는 아들이 와서 자신에게 보이프랜드가 있다고 말할 때마다 고통을 겪었고 엄마는 완전히 황폐해졌습니다. 그 엄마는 사람들에게 자신이 어떻게 하여야하는가 물었습니다. 우리는 항상 진실을 말해야한다고 말해주어야합니다. 말을 듣지 않는다 해도 할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의 진리만이 있다는 것을 이해하도록 말해주어야합니다. 하느님에게는 한가지의 진리만이 있을 뿐이고 그 누구도 바꿀 수 없습니다. 사람들이 그것을 바꿔도, 인간의 과학이 100가지 이유를 들어 정당화 시켜도, 하느님의 계명을 바꿀수는 없습니다. 하느님은 모든 것을 완전하게 창조하셨습니다. 좋은 엄마, 좋은 친구라면 항상 진실을 말해야 합니다. 그러나 어떻게? 부드럽게, 사랑을 가지고, 용서하는 마음으로, 동정심을 가지고 말해야합니다. 우리는 살면서 실수하는 그 어떤 것을 가지고도 서로 판단하고, 핍박하여서는 안됩니다. 그렇다고 잘못된 길을 가는 사람을 매일 쫓아다니며 하느님의 계명을 가지고 사람의 머리를 치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렇게 할 때 관계를 잃어버리는것이 아니라 관계를 진실되게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친구나 가까운 사람과의 관계가 정말 진실되고 사랑이 있다면, 하느님이 원하시는 어느날 그것이 마음에 전달될것입니다. 그 때가 삶의 마지막 순간이 된다 하더라도 그러한 참된 사랑과 동정심은 상황을 바꿀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해야할 일을 해야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우정관계는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가 고통과 시련을 맞았을때 누가 우리와 함께 할 것 같습니까? 혼자서 그 모든 것을 감당할 수 있을까요? 혼자서는 아무도 할 수 없습니다. 그 누구도 혼자 살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창조하시고, 혼자 있는 것이 좋지 않았으므로 짝을 찾아주시지 않았습니까? 하느님은 우리가 혼자 있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물론 분명히 하느님과의 관계는 우리 개개인이 갖는 것입니다만 제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아시지요. 우리는 이곳에 하느님의 가족들과 함께 있는 것입니다. 우리모두가 하나인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그토록 중요한것입니다. 교회는 공동체이기 때문입니다. 그 안에서 하느님과 함께 하는 것을 가르치고 가족안에 있는 것을 가르칩니다.
우정관계는 여러면에 있어서 우리의 힘의 근원이 되는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하느님이 그 가운데 계시기 때문입니다. 나에게 사랑을 주는 우정관계는 그 친구를 통해 하느님께서 주는 사랑입니다. 사랑은 오직 하느님으로부터 오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하느님으로부터만 오는 것이라면, 우정관계를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삶에서 얼마나 많은 진실한 친구를 가졌는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리 많지 않은 것에 놀랄것입니다. 손가락이 너무 많다고 생각될걸요. (ㅎㅎ) 삶을 살아가며 우리는 우정을 쌓는 것에 대해 배웁니다. 사랑을 쌓는 것이죠. 많은 우정관계가 결혼으로 귀결되고, 사도직으로 귀결되고, 교회를 지지하고 삶을 지지하는 등 많은 아름다운 일로 귀결되지요. 성령께서는 우정관계에서 많은 일을 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공동체 안에 있기를 원하십니다. 그 곳에서 우리 자신을 만들어나가기를 원하십니다. 그곳에서 사랑하기를 힘쓰기를 원하십니다.
시련과 고통이 왔을때 우정관계는 아주 중요합니다. 이기적이어서 참된 우정관계를 쌓지못하고, 주변사람들을 사랑하지 못하고, 이용만 하였는지 자신을 깨닫는 것을 매우 중요합니다. 자신의 삶에서 우정관계에 대한 정의가 바로 하느님에 대한 정의가 되기 때문입니다. 좋은 친구는 여러분이 삶안에서 하느님의 사람입니다. 우정관계는 두사람이 함께 일하는 것이고 우리 가운데 사랑의 하느님의왕국을 짓는것입니다. 우리가 어려운 시기를 만났을 때 우정관계는 시련을 통해 우리에게 힘을 줍니다. 결혼관계도 우정관계입니다. 부모자식간도 그렇습니다. 공동체도 마찬가지이지요. 우정관계가 단단하지 않은 공동체는 소용이 없지요. 그런 공동체는 시련이 왔을떄, 하느님의 시험이 왔을때, 아무도 남아 있지 못합니다.
시험을 겪는 본당이 어떤지 아세요?
어떤 본당에 아주 좋은 사제가 계십니다. 이 사제는 너무도 거룩해서 많은 것을 변화시키고 거의 땀방울이 성수 에요. (ㅎㅎㅎ) 세상에서 최고의 사제죠. 몸에서 성유가 나올것 같아요. 사람들이 먼곳에서도 고백성사를 보기위해 이 본당에 옵니다. 모든 사람이 그 사제를 사랑하지요. 그러나 10년 후 사제가 바뀌게 됩니다. 그리고 이번엔 가장 끔찍한 사제가 왔어요. ‘오 저기있는 감실은 옆으로 치우고 내 자리를 그곳에 놓으세요!.’ 모든 사람들은 악마같은 사제가 왔다고 떱니다. 사람들이 돌아버릴 지경이에요. 그 영적이지 않은 사제는 모든 것을 바꾸어 버립니다. 고백성사 중에도 “그건 죄가 아니에요. 다시는 그 죄를 말하지 마세요.” 모든 사람들이 겁을 먹지요.
그러나 사람들이 잊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10년동안 거룩하게 지냈지? 자 이제 얼마나 거룩해졌는지 확실하게 하기 위해 테스트를 해 보겠다.” ㅎㅎㅎ 사람들은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본당을 옮기고 떠나 버립니다.
은총을 잃어버리는 것이죠.
시험에 통과하지 못합니다.
시험에 통과하지 못하니 천사들이 슬퍼합니다. “오~ 제네들이 또 통과하지 못하는구나.” ㅎㅎㅎ 어리석은 일이죠.
테스트인것이 너무도 분명한데 말입니다. 하느님께서 하고 계신 일이 분명합니다.
10년동안의 거룩한 사제,
그리고 갑자기 그 다음의 끔찍한 사제…절대 그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그 사제는 도움이 필요한것입니다. 거룩한 사람이 주변에 필요한 것이에요.
거기에 우정관계가 필요한 것이에요. 어떻게 해야할까요? 그 사제의 좋은 친구가 되야하는 것이죠.
처음엔 말도 안되는 것들에 그 사제와 함께 하다가 .... 머지않아 그 사제도 거룩한 사람들에 끼게 됩니다. 모든 사람들이 있는 곳에 뛰어들게 되어 있지요. 제가 본 이야기 입니다. 그렇게 시험을 통과해야합니다.
가정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의 주변사람들을 보물로 만드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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