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6월 코스타리카
사랑의 선교회 수녀님들 대상 피정
동정녀 마리아
성모님에 대해서는 그 어떠한 묘사나 표현도 충분하지 않습니다. 성모님은 놀라운 삶과 사명을 위해 선택되어진, 하느님께서 인류에게 주신 큰 선물일뿐 아니라, 피앗으로 응답함으로써 오늘날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하셨기 때문입니다.
성모님은 하느님의 뜻에 의해 “예”라고 응답하도록 창조되었지만, 자신의 의지로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는 선택의 자유가 있었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에게도 그러한 선택의 자유가 주어졌습니다. 또한 천사들의 3분의 1은 “아니오” 라고 하였으므로 땅으로 떨어졌음을 알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창조물은 하느님의 반대를 선택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동시에 하느님이 하시는 모든 일은 완벽하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성모님에 대해 이야기 하기 위해 먼저 원죄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새로운 창조(new creation)에 대한 신비를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마리아를 이해하기 위해, 하느님께서 맨처음 사람을 창조하실 때로 거슬러 올라가면, 우리는 죽지 않을 운명이었지만, 죄로 인해 죽음을 맞게 되는 것을 알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천사들 보다 낮은 존재로 창조하셨습니다. 그러나 인간에게는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어 회복(redeem, 구원)의 기회를 주셨습니다. 인간은 천사와 같은 위치가 아니었으므로 하느님으로부터 용서를 받은것입니다.
그 용서의 선물로서 성모님께서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하느님께서 새로운 이브를 창조하심으로써, 우리를 재창조하시고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원죄로 인해 잃어버린 낙원을 새롭게 건설하여 인간이 처음 창조될 때 있었던 그 곳으로 다시 우리를 데려가려 하시는 것입니다.
죽음이 없고, 영원한 기쁨이 있으며, 하느님의 현존이 있는 곳으로 돌아가는 것,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지는 새로운 창조안의 새 이브인, 마리아가 가져다 준것입니다.
인간이 낙원에서 쫓겨날 때, 이브는 아담의 종과 같은 위치가 되어, 남편을 섬기고, 말없이 복종하며, 산고의 고통을 겪어야 했다는것을 알고 있습니다. 불순종으로 인해 죽음과 함께 많은 것들을 겪어야했습니다. 낙원에서 쫓겨난 후, 우리가 이브의 금기라고 부르는 것들로서, 수세기에 수세기를 거쳐 여성에게는 어떠한 권리도 없었고, 자기 주장을 할 수도 없었으며, 남성의 종으로 묵묵히 복종하며 살아야 했습니다.
예수님이 육화되어 오시기 전까지, 모든 여성들은 종과 같이 살아야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오시고 나서야 자유롭게 되기 시작합니다.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인과 대화를 하는 것을 보면 그 곳에서 사슬이 풀어지기 시작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도덕개념과 방법을 가르치십니다. 그녀에게 몇명의 남자가 있었고 마지막 남자도 남편이 아니라고 말씀하시며 당신의 길을 가도록 사마리아 여인을 가르치십니다 .
예수님께서 여성들, 창녀들 조차와도 대화를 나누시는 것은 그 시절 유대사회에서 허락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여성은 항상 뒤를 따라 걸어야했고, 말도 하면 안되었으며, 성전에 들어가 앉을 수도 없는 등, 아무런 권리가 없었습니다. 가끔 성전을 청소하는 것은 허락되었지만, 다른 것은 할 수 없었습니다. 여성은 종과 같았고, 의사를 표현 할수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여성도 다시 소리를 낼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마리아가 여성으로 우리 가운데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처음 공생활을 시작하시며 성모님과 함께 가나안 결혼 잔치에 가십니다. 그 곳에서 성모님께서 예수님께 기적을 행하시도록 청하시자 아직 당신의 때가 아니라고 말씀하시지요. 우선 여기서 우리는 성모님께서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정확하게 알고 계셨다는 것을 알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돈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어떤 방법을 알고 있던것도 아닌데, 어디서 술을 가져오시겠습니까? 그럼에도 성모님께서는 떨어진 술을 어떻게 해달라고 자연적이 아닌 어떤 것을 요청하셨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여인이여, 나의 때가 오지 않았습니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럼에도 성모님께서는 요청과 동시에 종들에게 그분이 시키는대로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어머니와 아들간에 놀라운 대화이면서도,동시에 하느님의 자녀인 어머니와의 대화입니다. 성모님께서는 어머니로서 예수님께 무언가를 하시도록 청하심과 동시에, 또 한편으로는 사람들이 그분께 복종하며 행동하도록 이끄십니다. 성모님께서는 인성을 가진 아들에게 다소 명령을 하듯 함과 동시에 신성에 접근하시지요. 예수님께서는 그 자리에서 무언가 하기를 원치 않으셨지만, 아들로서 성모님께 순종하시며 신성을 가진 하느님으로서 기적을 행하십니다.
이 구절은 마리아에 대해 아주 놀라운 것들을 제시합니다. 마리마에 대한 하느님이 어떠하신지를 알고 싶다면 이 구절을 묵상해 보아야합니다.
저는 이 구절이 모든 것을 나타낸다고 생각합니다. 첫째로, 혼인성사에 대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첫번째 기적을 결혼식에서 행하셨습니다. 매우 중요한것을 나타내지요. 우리 가운데 계시는 하느님의 첫 초자연적인 사건이 결혼식에서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교회의 모태가 되는 가정의 시작점이지요. 그곳에 육화된 하느님이신 아들과 새로운 이브인 어머니가 오신것입니다. 그분들은 죄가 없는 가정을 나타냅니다.
나자렛의 가정은 죄가 없는 가정이었습니다. 원죄를 가진 사람은 요셉성인뿐이었지요. 그러나 요셉성인은 가장 거룩한 사람이었습니다. 나자렛의 완벽한 성가정인 것이지요. 그 분들이 결혼식에 오셔서 놀라운 결혼성사를 세우시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신성의 예수님과 어머니, 마리아 사이의 소통을 보여줍니다. 또한 죄없이 창조된 인간, 마리아가 자애로움을 가지고, 사랑이 있고, 순종할 줄 알며 겸손한, 하느님이 사람이 되신,아들의 신성을 이끄는 방법을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성서는 예수님이 일시적으로 천사보다 낮은 자리에 있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성모님과 요셉에게 순종하심으로써 우리에게 그 낮은자리에 있게 된 것을 은혜롭게 보여주십니다. 외형적으로 그 순종에서 벗어난 일은, 사실은 그분의 말씀을 잘 살펴보면 그렇지 않습니다만, 성모님과 요셉성인이 잃어버린 열두살의 예수님을 성전에서 다시 찾는 부분입니다. “제가 아버지의 집에 있을 줄을 왜 모르셨습니까?” 라고 말씀하시지요. 성서는 예수님이 성모님과 요셉성인을 따라 집으로 돌아갔고 지혜가 더욱 자라났다 라고 전합니다. 신비한 대목입니다.
하느님 자체가 지혜인데 어떻게 하느님이 지혜가 더욱 자랄 수 있는가? 그것은 예수님이 인성에 순종했다는 것입니다. 인성안에서 신성이 자랐다는 것이죠. 그분은 항상 자신의 신성을 인식했지만, 동시에 인성을 인식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라며 하느님의 계획을 정해진 때에 실현하기 위해 자신에게 정해진 시간에 순종하셨습니다. 이 모든 것은 마리아의 모성과 조화를 이루며 이루어졌습니다. 예수님의 모든 사건은 마리아의 손에 이끌려 이루졌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성모님과 함께 걸어가셨고 죽는 순간까지 하나였습니다. 결코 어머니로 부터 멀어진 적이 없으셨습니다.
예수님과 함께하는 마리아의 역활은 예수님의 인성안에서 완벽한 조화를 이루며 나아갔습니다. 그분은 신성을 가지고 있었지만 또한 완벽한 인성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광야에서 사탄이 인간으로서의 그분을 공격하는 장면에서 우리는 충분히 그 면을 볼 수 있지요. 예수님은 당신의 신성을 알고 있었지만, 동시에 한계가 있는 완전한 인간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한 배경으로 마리아를 조명해 볼때, 잃어버린 이브를 다시 우리에게 가져다주려고 하신 하느님의 놀라운 계획을 볼 수 있습니다. 원래의 이브의 모습을 가진 여성, 마리아라는 순수하고 순결하며, 겸손하고 온전히 순종하는, 완벽한 여성안에서 당신의 새로운 창조를 드러내시기 시작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새로운 이브를 선물로 주셨으므로 이제 모든 여성들은 마리아와 같이 될 수 있는 기회가 있습니다. 우리가 마리아를 받아들이고, 기도안에서 마리아와 하나가 되어 새로운 이브인 그분의 잉태안에서 그분과 하나가 된다면 , 여성으로서의 여러분들은 참된 교회의 어머니가 될 수 있습니다. 마리아는 그러한 교회의 어머니의 빛이시며, 그것이 그리스도의 새로운 창조입니다.
지난번에 제가 사제가 되기를 원하는 수녀들에 대해 이야기 한적이 있지요. 저는 여러번 그런일을 보았습니다. 특히 캐나다 같은 곳은 그 문제가 일반적이고 어떤 수녀들은 그것을 위해 계속 싸우고 있습니다. 지난번 제가 마리아가 가장 완벽한 사제가 될 수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말씀 드렸듯이 그분은 모든 조건을 갖추었고 그 누구도 그보다 나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그 무엇보다 어머니가 되셨습니다. 예수님의 어머니이실 뿐 아니라 교회의 어머니가 되셨습니다. 또한 우리 모두의 어머니가 되셨고, 교회의 모태이십니다.
마리아는 당신의 모태에 신성을 가진 아기를 받아들임으로써 첫번째 감실이 되는 것을 선택하셨습니다. 첫번째 감실, 첫 성체조배가 마리아의 모태에서 일어났습니다 .
하느님을 공경하며 감사드리는 착한 여성이 아기를 가진다는 것은 놀라운 생명의 선물로 인해 하느님의 감실과 같이 된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모태에 영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보통일이 아니라 초자연적인 사건으로서 생명의 은총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어머니의 모태를 통해 하느님께서 창조사업을 하시는것이지요.
그렇다면, 마리아의 모태에 하느님이 오셨다는 것을 상상할수나 있겠습니까? 그것은 단순한 초자연적인 현상이 아니라,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이해를 뛰어넘는 기적이지요. 신성을 가진 사람의 잉태를 위해 순결한 인간이 준비되어 도구로 사용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장 듣기 괴로운 말은 마리아에게 자녀가 더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 이상의 듣기 괴로운 말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불행히도 그렇게 말하는 사제들도 있습니다. 개신교 신자들은 거의 다 그렇게 말하며 멀어져 있지요.
어떻게 마리아가 또 다른 자녀를 수태하였다고 꿈에서라도 말할 수 있습니까? 그분은 하느님이신 아기를 잉태하도록 창조되었고, 성령에 의해 아기를 잉태하였으며 같은 방법으로 아기를 낳았습니다. 그분은 절대 동정녀였고, 언제나 동정녀이었습니다. 순결한 동정 마리아입니다.
마리아의 모태를 통해서 일어난 마리아와 예수님의 기적을 명확하게 하기 위해 마리아에게 성령께서 행하신 엄청난 기적을 이해해야합니다. 마리아는 보통의 일반적인 여성이 아니라 새로운 이브였습니다. 모든 여성은 이 세상길을 건너 영적인 세상으로 들어가게 되면 그분과 같이 될것입니다. 마리아가 있는 그곳으로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제가 주님을 만나는 체험을 할 때, 주님의 눈안에서 보았던 모든 영혼들은 투명한 듯 보였습니다. 분명히 그들 모두 개개인의 사람이었습니다. 그 끝이 없는 영혼의 바다의 영역에 있던 모든 영혼들이 투명한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성모님께서 제게 오셨을때, 성모님은 투명하지 않은 육체를 가지고 있었으며 명백하게 다른 현존이었습니다. 여러분도 그 차이를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 또한 육체를 볼 수 있었지만 신성한 빛 안에 계셨으므로 바라 볼 수조차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볼 수 있도록 인도하시지 않으셨다면 제 힘으로는 보지 못했을 것입니다. 성모님은 그와 같은 빛안에 계시지는 않았지만, 예수님안에 계셨고 빛으로부터 오셨습니다. 그러나 성모님 자신의 빛은 아니었습니다. 좀 다른 것이었습니다.
천사들은 훨씬 더 달랐습니다. 천사들은 천사들만의 모습으로 창조되었고 우리와는 다른 모습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모두 하느님 안에 함께 있었습니다.
성모님의 모습은 매우 특별했습니다. 그 모습은 우리 모두가 마지막 심판 후에 갖게 될 모습입니다. 그 때에는 우리도 육체를 갖게 될 것이고 성모님 처럼 우리가 처음 창조되었던 원래의 모습으로 되돌아 가게 될 것입니다. 성모님은 처음부터 창조된 그 모습으로 계십니다. 마리아는 처음부터 새로운 이브로서 창조되었고, 처음부터 사람이 낙원에서 처음 창조되었던 완벽한 모습을 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마리아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지식을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우리 인간은 원죄의 결과로서, 갖지 말아야 할 지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나치게 많은 것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너무 많은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성령께서는 교회를 통해 우리에게 작아지는 방법을 가르치십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지나치게 많은 지식을 죽여야하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이 세상의 아주 똑똑하고 약삭바른, 많은 아이디어를 가진 사람들이 세상에 놀라운 아이디어를 내놓고, 철학을 내놓지만, 대부분의 경우 잘못된 방향으로 갑니다. 우리가 갖지 말았어야 할 지식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 구약과 신약을 통해 여러가지 방법으로 거듭 말씀하시며 인간의 지혜와 지식은 하느님에게 있어서 아무것도 아니라고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성령을 통해 이를 바로잡으실 것입니다.
성바오로의 예를 보면 알 수 있지요. 성바오로는 아주 잘 교육된 유대교인이었습니다. 바이사리파로서 예루살렘에서 유대교의 가장 높은 직위의 사제를 양성하는 가믈리엘이라는 학교를 다녔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나고, 그가 배운 모든 것들이 무가치한 것이 되었고 오직 그리스도교의 모든 지식이 주입되었습니다. 그동안 받았던 모든 유대교육이 사라지자 그에게 남은 것은 구약의 예언뿐이었고, 모세율법도 사라져 무가치 한것이 되어버렸습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그리스도교의 은총을 불어 넣어주신것이죠.
이러한 신비를 이해한다면, 우리가 원죄로 인해 어떤 상태에 있게 되었으며 우리자신이 어떠한 모습인지, 그리고 우리와 성모님의 차이가 무엇인지를 깨달아야합니다. 아주 큰 차이입니다. 성모님은 이미 사람이 처음 창조되었을 때의 상태안에 계십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잃어버린 참된 이브를 되찾았다는것입니다. 이브를 잃어버렸기에 우리는 지금 죽음의 운명을 가지고 이곳에 있습니다.
성모님이 승천하실 때, 당신의 육체와 함께 승천하셨지요.
모세에 대한 신비한 사실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변모될 때 엘리야와 모세가 나타났지요. 여기서 생각해 볼것이 있습니다. 유다서를 보면 한 장에 불과하지만 매우 강력한 내용을 볼 수 있습니다. 성 유다는 모세의 육체를 두고 미카엘 대천사와 사탄간에 싸움이 있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미카엘 대천사가 모세의 육체를 데려갔다고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변모하실때 모세는 완전한 육체로 주님에게 나타났습니다. 엘리야는 불가마에 의해 산 채로 육체가 하늘로 들어올려졌지요.
사탄은 모세의 육체를 원했습니다. 사탄은 하느님의 사람들인 히브리인들이 이집트 문화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므로 그들에게 모세의 완전한 육체를 내어주면 그들이 모세를 하느님처럼 숭배하여 다시 우상숭배에 빠지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이 지상의 순례동안 끊임없이 일어나는 영적전쟁입니다. 사탄은 끊임없이 우리로 하여금, 피조물이나 자연을 숭배하도록 만들고 성령은 그로부터 하느님에게로 되찿아 오려하는 영적 전쟁입니다.
사탄은 모든 우상숭배를 만듭니다. 우리를 차지하는 방법이 그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자연이나 피조물을 숭배하게 되면, 절대로 이곳을 떠날 수 없습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하느님이 되기 때문입니다. 보물이 있는 곳에 우리의 마음이 있게되어 결국 마지막에 그곳으로 정해지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인간이나 피조물을 숭배하게 되면 우리가 죽었을 때 어디로 가겠습니까? 숭배했던 것에 함께 남아 있을 것이고 아무데도 갈 곳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을 숭배하고, 하느님과 함께 살며, 모든 것을 하느님을 위해 하다 죽는다면, 하느님에게로 가서 하느님과 함께 하게 될 것입니다. 사탄은 그것을 막고 싶어하지요.
그러기에 교회내에서도 사탄은 성모님을 우상숭배가 되도록 이용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성모님을 우상숭배합니다. 그것은 그분을 매우 괴롭히는 일입니다.
가끔 제가 멕시코를 여행할 때, 대다수 원주민이었던 그곳의 많은 사람들이 과달루페 성모님을 신처럼 숭배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것은 찾아 볼 수 없습니다. 그들 집을 방문해보면 아주 큰 성모님 사진에 성초에, 꽃에….등등을 놓고 울며 간청하면서도 예수님에 대한 것, 십자가 조차도 찾아볼 수 없는 경우가 있습니다. 과달루페 성모님 경당에 모두 달려 가면서도, 아무도 성체앞에는 가지 않는것을 볼 수 있습니다.
물론 모든 사람이 그런것은 아닙니다만, 제가 이야기하는 것은 성모님에 대한 것이나, 마리아론에 있어서도 우상숭배가 있다는 것입니다. 라틴 아메리카의 많은 곳에서 일어나는 일들입니다. 필리핀이나, 한국, 베트남등 세계 어느 곳에서도 성모님을 우상숭배화하는 그런것들을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이 얼마나 성모님을 고통스럽게 하는지 상상할 수 있을겁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그것도 사용하십니다. 종교개혁으로 인해 유럽에서 많은 가톨릭 신자를 잃었을 떄, 정확하지는 않지만 오백만명정도 일까요…동시에 성모님께서 멕시코에 발현하셔서 오백만명 이상의 원주민이 가톨릭신자가 되게 하셨습니다. 그렇게 하느님은 이쪽에서 잃어버린 영혼대신, 다른 쪽에서 영혼들을 들어 올리셨지요. 그것이 바로 모든 일에 있어서의 하느님의 방법입니다.
캐나다와 같은 북미에서 성당들이 문을 닫을 때마다, 라틴아메리카이든, 인도, 아프리카 등에서 새로운 교회가 생깁니다. 사탄은 결코 하느님을 이길수 없습니다. 지옥의 문은 결코 교회위에 있을 수 없습니다. 가끔 사람들이 “오~ 오늘날 교회의 상황이 너무 슬퍼요. 캐나다좀 보세요. ..여기…저기좀 보세요”라고 말할 때 저는 말합니다. “아니에요. 교회의 상황이 슬픈것이 아니라 그 사람들이 은총을 잃어버린 거에요” 교회는 항상 건재합니다. 교회는 누구도 무너뜨릴수 없어요. 은총을 저버리는 사람들이 있을 때, 성령은 다른 곳으로 움직입니다. 성령은 항상 우리 가운데 있습니다. 교회는 우리 가운데 있습니다. 하느님의 집이 우리 가운데 있습니다.
우리의 어머니로서 성모님을 잘 이해하게 되면, 그 신비는 이해를 초월합니다. 참으로 많은 것을 알게 되는 동시에 사탄이 일하고 있음을 알게 되기도 합니다.
가톨릭교회의 마리아론을 통해 마리아가 모든 은총을 다 가졌다고 하는 말을 듣습니다. 무슨 의미 입니까?
성령의 일곱가지 은사에 대한 말을 들을때 우리는 가끔 어떻게 무한하신 하느님에게 일곱가지 은사밖에 없을까 하며 의문을 갖습니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은사는 무한하며 제한이 없습니다. 유대 문화에서 7이라는 숫자는 무한한 숫자를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유대이즘의 지속입니다. 우리는 모든 성서적인 숫자에 대한 신비를 유대교로부터 받았고, 7이라는 숫자는 완벽한 숫자이며 무한한 숫자입니다. 즉 성령의 일곱가지 은사는 모든 은사를 말하는 것입니다.
마리아는 모든 거룩함과 하느님으로부터의 모든 은사(은총) 를 가지고 있다고 하는 이유는 태중에 예수님을 모시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마리아와 함께 하나가 된다는 것은 하느님께서 우리가 이루기를 바라시는 것과 하나가 됨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아래 있던 성 요한에게 마리아를 주셨습니다. “어머니, 이는 당신의 아들입니다, 이분은 너의 어머니시다.”라고 말씀하신 것에 대해 우리는 교회의 가르침에 의해 우리 모두에게 어머니를 주신것이라고 이해하고 있습니다. 요한은 어머니를 보살피는 아들로서, 우리모두를 나타내며 성모님은 우리를 돌보시는 어머니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것을 이해하기가 그리 어렵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요한에게 국한하여 말씀하셨다고 말하며 이성적으로만 이해하려 합니다. “당신은 모든 인류의 어머니이십니다, 요한, 너는 아들로서의 모든 인류를 나타낸다.” 라고 말하지 않으셨기 때문이라고 주장하지요. 이성적으로 보면 그렇지만, 신비학적으로는 그렇게 말할 수 없습니다.
신비학적으로, 예수님께서 “아버지, 저들은 자신이 하는 일이 무엇인지 모르니, 그들을 용서해주십시오.” 라고 말씀하시며, 모르고 한 모든 사람들에 대해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왜 예수님을 몰라 봤을까요? 아무도 아직 성령을 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많은 기적과 예수님의 행적을 보았던, 예수님과 가장 가까웠던 제자들마저도 모두 달아났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 누구도 나무라지 않으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용서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깨달아야 하는 부분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성서의 역사를 바라보는 관점이 선택적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 십자가 아래에 있던 모든 사람을 정죄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돌아가시며 그 누구도 정죄하지 않으셨습니다. 책임에 대해서만 말씀하셨습니다. 본시오 빌라도에게 그보다 예수님을 넘겨준 사람들이 더 책임이 있다고 하셨지요. 이 부분에서 어떻게 하느님의 정의가 내려지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죽이려하는 행동에 있어 각 사람들의 죄의식과 책임의 정도에 차이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십니다. 그리고 돌아가시기 전에 예외없이 모든 사람들을 용서하셨습니다. 모든 사람이 그분의 십자가에 대한 죄로부터 자유로워진 것입니다. 모든 사람을 용서하셨는데, 어떻게 예외된 사람이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모든 사람입니다.
지금 우리는 성령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가지고 있는 책임은 어마어마한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하고 있는 일에 대해 모르고 한다고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성령으로 인해 훨씬 더 많이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십자가 못 박았던 그 때의 사람들과 같지 않습니다. 그들은 우리처럼 성령의 은사를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사람들이었던 히브리인들이 이집트를 떠나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들어 가려 할떄, 그들 역시 성령을 받지 못했으므로 많은 사람들이 간통을 하고 하느님을 테스트 하는 등 많은 죄를 지으며 죽어갔습니다. 아직 성령을 받지 못했으므로 사탄이 그들을 지배하게 된 것이었습니다. 사탄은 그들을 이리저리 휘저었고, 사람들은 사탄을 휘어잡을 수 없었습니다. 여호수아와 함께 강을 건너지 않았더라면 해낼수 없었을 것입니다. 성령의 힘이 그들에겐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의 삶안에서의 마리아의 역활을 이해하고 우리가 하는 모든일과 교회내에서 예수님과 성모님을 바라볼 때, 우리는 마리아와의 관계를 명확하게 해야합니다.
마리아의 학교는 예수님의 자비를 가르치는 것입니다. 제가 신비체험을 통해 성모님을 만났을 때, 성모님께서 제가 있던 호수에 나타나셨고 저는 그분의 눈을 바라볼 수 없어 물만 바라 보았습니다. 그리고 물위에 비치는 성모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성모님께서는 저에게 어떻게 예수님께 의탁하는지를 가르쳐주셨습니다. 저에게 “예수님, 당신께 의탁합니다”를 매우 여러번 말하게 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성모님의 가장 중요한 가르침이었습니다. “예수님, 당신께 의탁합니다.”
저에게 있었던 그 모든 체험과 납치사건이 끝나고 가톨릭 교회로 돌아왔을 때, 하루는 캘리포니아에 있는 한 성당에서 미사를 보고 성당 바깥으로 나오던 중이었는데 어떤 할머니가 저에게 오더니 아주 아름다운 자비의 예수님 상본을 건네 주었습니다. 처음 보는 상본이었습니다. 그 상본을 보며 제가 체험에서 보았던 예수님과 흡사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웅장한 빛줄기가 흘러나오는 것이며…물론 상본의 예수님은 엄청난 예수님의 현존의 모습에 비할 수 없었고, 평면적으로서 예수님을 나타내는 것이었지만, 그래도 예수님이 나타나신 거룩한 모습을 그림으로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여러분이 이 세상의 자연적인 삶를 지나 초자연적인 삶의 문턱을 넘을 때 직접 뵙게 될 신성의 예수님입니다.
상본 아래에는 “예수님 당신께 의탁합니다.” 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그 순간 저는 성모님께서 다시 저에게 말씀하시고 있다고 생각하였고 그 할머니가 천사인가보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그것이 자비의 예수님 신심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성녀 파우스티나를 통한 가르침의 모든 것이라는것을 알았습니다. 저는 성모님의 가르침이 정확하게 그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으므로 그 신심에 몹씨 이끌리었습니다.
마리아의 학교가 바로 거룩한 자비의 메세지입니다. 마리아론에서 가르치는 것이 바로 파우스티나 성녀를 통해 받은 메세지입니다. 성녀 파우스티나는 성모님께서 저에게 여러번 말하라고 하셨던 “예수님 당신께 의탁합니다.”라는 놀라운 메세지를 우리에게 가져다 주었습니다. 성모님께서는 저에게 그 호수에 있던 영들로 부터 오던 압박을 극복하기 위해 그 말을 많이 해야한다고 계속 강하게 말씀하셨습니다. 그 압박은 저에게 희망이 없다고 느끼게 하는것이었습니다. 그영 하나 하나를 볼 때마다 제 자신이 완전히 하느님으로 부터 멀어졌다고 느끼게 했고, 연옥의 상태에 있었는데도 영혼은 결코 하느님쪽으로 갈 수 없을 것이라고 느끼게 했습니다. 영혼은 하느님을 목말라 하고, 나를 부르시고 계시는, 빛이신 하느님의 사랑과 완벽하게 하나가 되기를 원하면서도 갈 수 없는 그것은 매우 고통스러운 것이었습니다. 빛이 없었고, 순결함이 없었으며 하느님과의 완전한 교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마리아는 사랑을 가진 어머니로써, 우리가 자신을 용서할 수 있도록, 하느님의 용서를 받아들일 수 있도록, 그리고 주님께 의탁할 수 있도록 돕기위해 오셔서, 자신이 아무 자격이 없고,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이해할 수 있도록,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미미한 창조물이며 온통 불완전 투성이라는 것을 아시지만 그에 상관하지 않으시고 바로 그것 때문에 우리를 구원하러 오셨음을 가르치십니다. 성모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자신의 작음과 미소함을 하느님께서 사랑하신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도록 가르치십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작음과 불완전함을 사랑하시며, 바로 그것 때문에 우리를 구원하시길 원하십니다. 우리가 당신을 원하도록 초대하십니다.
성모님의 가르침은 오직 예수님입니다. 우리 마음 깊은 곳으로 부터 오직 예수님만을 원할 수 있는 방법을 가르치시길 원하십니다. 아직 죽음의 운명을 가진 불완전한 상태의 영혼이 하느님을 목말라 할 때, 하느님께서 그 영혼을 들어올리신다는 것을 가르치십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의 일시적인 삶의 테스트이기 떄문입니다. “나를 원하느냐? 나를 사랑하느냐? 지금의 불완전함을 멈추고 나의 사랑이 완벽한 곳에서 영원히 나와 함께 하고 싶으냐? 그것만이 너의 오직 유일한 바램이냐? “
그것이 바로 천사들을 거쳤던 테스트이고 우리가 거쳐야하는 테스트입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그 테스트를 통과하고 승리하도록 마리아가 우리의 교사로써 우리를 돕고 있는 것입니다. “네, 주님, 그것을 원합니다. 당신만을 원합니다. 그것만이 제 삶에서 제가 원하는 것입니다.” 라고 말하도록 성모님께서 우리를 돕고 계십니다. 우리가 성모님과 함께 기도할 때마다, 성모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에 불을 붙이도록 도우십니다. 그 놀라운 예수님을 향한 바램으로써 불타도록 하십니다.
그러므로 우상숭배와 맞서 싸우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기적을 행하는 마리아가 아니라, 겸손한 마리아와의 관계가 될 수 있도록 싸워야합니다. 성모님은 사랑에 있어서 완벽하며, 완벽한 겸손과, 완벽한 순결, 완벽한 모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성모님을 제자리에 모셔 놓아야합니다.
천사들이 다니엘이나 성요한과 같은 예언자들에게 나타났을 때 어떠했는지 알고 계십니까? 성요한에게 천사가 나타났을대, 땅에 머리를 조아리자 천사는 “일어나라. 나는 너와 같은 피조물이다.” 라며 예언자를 가르쳤습니다. 성모님도 마찬가지로 “나는 하느님이 아니다. 너희와 같은 피조물이다. 우리는 함께 그분을 흠승하게 될 것이다. 우리 함께 그분께 찬미드리게 될 것이다. 너와 나는 함께 그분께 감사드리게 될 것이고 오직 그분만을 목말라 하게 될 것이다” 라고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그것이 그분의 가르침이십니다.
우리가 성모님께 기도할 때 우리가 하는 것은 성모님과 하나가 되어 우리안에서 하느님에 대한 목마름이 자라나게 하는 것입니다. 오직 예수님만을 목마름이 자라나게 하는 것입니다. 성모님은 그것을 몹씨 바라고 계십니다.
우리에게 하느님에 대한 목마름을 가져다 주는 완벽한 교사, 신뢰하는 교사가 있습니다. 바로 마리아입니다. 그 누구도 더 잘할 수 없습니다. 무엇보다도 마리아는 죄없이 창조되었으므로 인간으로써 결코 세상적인 것을 목말라 한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또한 결코 자신에 대해 목말라 한 적도 없습니다. 우리가 성모님과 함께 할 때 우리에게는 어떻한 장애도 없게 됩니다. 하느님만을 원하기 위해 우리 뜻대로 가려던 발길을 멈추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과 함께 할 때 우리에게는 많은 장애가 있습니다. 성령의 은총에 의해 우리가 함께 기도할 때 힘을 갖는것은 사실이지만 불완전한 우리는 여전히 자신에 대해 목말라하고, 세상적인 것을 목말라 하며 죽음에 대한 두려움등 많은 것에 관련된 목마름을 갖고 있으므로 불완전함은 계속됩니다. 그러나 성모님과 함께 하게 될 때, 성모님은 원죄로부터 자유롭기 때문에 결코 자신에 대해 목말라하지 않으며 세상적인 어떤것도 목말라 하지 않습니다. 성모님에게는 불완전함이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조건부 보장이 되는 것이죠. 성모님과 완전히 함께 하는 기도는 완벽하게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성모님께서 그것을 완전하게 만드시기 때문이지요.
성모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완전하게 만드시는 이유는 우선, 우리가 마리아를 중재자로 삼음으로써 주님앞에서 겸손함을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하느님께 직접 갈 수 있습니다. 그 누구도 하느님과 직접 교류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은 절대로 그것을 거절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마리아를 통해 하느님께로 간다는 것은 겸손의 행위입니다. 자신의 자격없음을 이해하는 것이며, 순결하고 완전한 누군가와 하나가 되어 함께 가기를 원하며 자신과 같은 사람이면서도 하느님의 왕국에 있는 영적인 어머니와 함께 가려한다는 것은 겸손의 행위입니다. 그렇게 할 때, 우리의 기도는 두배로 강해집니다. 죽음의 운명으로 인해 일시적인 불완전함을 가진 우리의 마음으로부터 나오는 기도가 불완전할 지라도 완벽한 사랑을 가진 상태에 있는 성모님은 그 기도를 완전하게 할 수 있으므로 성모님과 함께 기도하게 되면 우리의 기도생활을 들어올려 기도가 더욱 강하게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어떤 성인에게 전구를 청할때, 그 성인자체가 기적을 행할 능력이 있는것이 아니라 중재의 힘이 있다는 것을 분명히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 분들은 하느님의 영광안에 있기 때문에 하느님께서는 어떤 성인의 전구도 돌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어떤 성인과 하나가 되어 하느님의 대전으로부터 무엇인가를 청할때, 그 기도는 겸손한 기도가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내가 열명의 형제를 가진 장남인데, 아버지로 부터 별로 총애를 받지 못합니다. 그때 아빠의 총애를 가장 많이 받는 막내 동생에게 가서 “아빠한테 자동차 키좀 받아와” 그러면 어린 동생이 아빠한테 가서 “형한테 키좀 줘요.. 아빠” 어린동생은 아빠로부터 무엇이든지 받는 아이이기 때문에 아빠는 키를 내어줍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때로 성인에게 전구를 청할 때 있는 일이기도 합니다. 주님의 작은 꽃 성녀 데레사에게 “주님에게 이것 좀 청해 주시겠어요?” 하고 청한다면, 성녀는 주님의 작은 꽃으로서 주님을 녹일수 있지요. 이런 것이 우리가 성인들과 함께 할 때 있는 일입니다.
그렇다면, 성모님께 청할때는 어떠할지 상상이 가세요? 주님은 절대 성모님의 요청을 거절하지 않으십니다. 그 예를 가나안 결혼식에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마리아론에 대해 알고 싶다면 기도를 하고 가나안의 기적을 깊이 읽어보라고 저는 항상 사람들에게 말하곤 합니다. 아주 짧은 내용이지만 엄청난 신학과 마리아론을 포함하는 것입니다. 마리아의 역활과 마리아가 누구인지, 그리고 마리아에 대한 예수님의 관계가 나타난 것이 바로 가나안의 기적입니다. 완벽한 신학과 마리아론이 바로 그곳에 있습니다. 사람이 되신 하느님을 보여주며, 천상의 어머니를 보여줍니다
저에게는 단순한 이 모든 것들이 한가지로 귀결됩니다. 마리아는 하느님께 피앗으로 응답함으로써 모든 인류의 사슬을 끊어주러 온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특히 이브의 금기를 완전하게 깼다는 것입니다.
마리아는 천사에게 피앗으로 응답함으로써 여성에게 목소리를 되찾아 주었습니다. 모든 여성과 동시에 모든 인류를 대신해 말한것이죠. 특별히 침묵의 사슬, 종의삶, 금기를 깬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이해를 뛰어넘는 매우 귀중한 것이며, 마음깊이 새겨야 하는 것입니다. 마리아의 겸손안에서 우리는 큰 희망을 발견합니다.
지난번에 말씀 드린대로, 저는 체험에서 성모님을 바라보는데 매우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그리고 후에 묵주기도나 성모님과 함께 하는 다른 신심 기도를 하는데 있어 매우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성모님이 가르쳐 주신대로 이해하고 참사랑으로 묵주기도를 하는 것들이 어려웠던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저의 피와 뼛속까지 이해하고 있습니다. 머리로 혹은 신비적으로 이해하는 것을 뼛속까지 가져오는 것입니다. 뼛속까지 그것을 가져오도록, 묵주기도등을 할 때 우리 인성의 모든 것을 다해야 하는 것임을 알고 있지요. 단순히 기계적으로 하거나, 그것이 좋다고 해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을 사랑하기 때문에 해야합니다. 내몸의 모든 세포와 모든 뼛속까지 그것을 하기를 원해야 합니다. 그것이 가장 어려운 부분입니다. 그래서 저는, 지금도 가끔 그렇게 합니다만, 나의 전 인성이 그렇게 하려고 하지 않을 때, 온몸에 그 기도가 스며들도록, 좀 더 깊이 기도하려 노력하며 성모님과 일치하여 기도 할 수 있도록 합니다.
그것은 전쟁과도 같지요. 우리의 육체는 항상 잘못된 방향에 있으려 하기 때문입니다. 무미건조해지기도 하고, 영적으로 해야 하는 것과는 다르게 하거나, 완전히 따로 놀지요.
깊이 기도를 하기 위한 이 노력은 영과 육이 하나가 되어 기도할 수 있기 위해 하는 것입니다. 성모님은 우리가 그렇게 할 수 있도록 가장 잘 돕는 분입니다. 저는 기도할 때마다 “성모님 저를 도와주세요. 저의 온 육신이 게을러져있습니다. 제 몸이 사랑하지 않으려합니다. 당신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힘을 주세요. 저를 위해 전구해 주세요.” 라고 기도합니다. 그러면 정말로 놀랍게도 아주 빠르게 응답이 옵니다. 성모님은 그것을 사랑하십니다. 우리의고백을 좋아하십니다.
성모님은 우리가 우리의 육신을 깨닫기 원하십니다. 무거운 육신이죠. 우리의 육신은 아주 무겁습니다. 지니기가 아주 힘들지요. 나이가 들수록 우리의 육체는 더욱 고질이 되어 아주 속임수를 잘씁니다. 우리의 육체는 마치 철학가처럼 기도를 안하기 위한 어렵고 복잡한 이유를 잘 댑니다.
우리가 성모님과 하나가 되어 기도할 때 성모님은 우리의 게으른 육신을 가라앉히는데 정말 큰 도움을 주십니다. 이 무거운 육신이 영에 순종하게 합니다.
우리가 기도가 하기 싫을 때, 우리는 기도가 둘로 갈라지길 원치 않으므로 피곤한 육체가 기도와 하나가 되기를 원하지요. 우리는 자신의 존재의 모든 것이 기도하도록 해야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기도가 육신에 스며들지 않아 갈수록 육신은 더욱 무거워집니다. 나이가 들수록 육신은 더욱 무거워 져서 영적으로 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깨어 움직여서 육신이 이기지 않도록 해야합니다. 육신이 이기기가 아주 쉽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눈으로 볼 수 있고 만질수 있는것에 너무 많은 힘을 주어 보이지 않는 것에는 힘이 없습니다. 보이지 않는 것은 육신보다 요구하는것이 많지 않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우리는 반대로 해야합니다. 우리는 보이지 않는 것에 많은 힘을 주어서 보이는 것을 약하게 해야합니다. 아주 어려운 일이죠. 오직 영적인 도움을 받아, 영적으로, 신비적으로 해야하는 일입니다. 우리 혼자는 할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성모님의 역활이 그것에 절대적으로 완벽한 것입니다. 가장 큰 선물이며 그것을 도와주고 계십니다. 그분도 사람이시기 때문입니다. 완벽한 사람. 성모님은 우리 육신의 무거움으로부터 들어올리도록 돕는 방법을 알고 계십니다. 성모님과 기도로 하나될 때, 순종하도록 하고, 깨어나도록 하며 앞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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