밭에 묻힌 보물/마리노 레스트레포 강의

[스크랩] 부활 - 마리노 레스트레포

김레지나 2017. 5. 29. 21:36



부활


우리는 자주 부활에 대해 혼동을 합니다. 현대적인 많은 크리스챤들이 크리스챤으로서의  궁극적인 은총인 부활에 대해서만 촛점을 맞추기 때문입니다.  싸움이 없는 승리에만 촛점을 맞추는 매우 편리한 크리스챤이지요.  희생이라든지, 십자가의 같은 것을 필요치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러한 편리한 크리스챤들이 요즘은 아주 많습니다.  TV등에 나오는 많은 유명한 복음주의자들이  부활한 그리스도에 대해서만 설교하며,  아주 많은 사람들이 그들을 추종을 합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셨으므로,  이미 이루어진 십자가의 길이나 십자가에 못박히는 것등은 더이상 다룰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죠.

     

그러나 우리 가톨릭의 가르침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같이 되는 삶을 삶아가며, 부활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리스도와 같이 된다는 것은, 그분이 보여주시고 가르쳐 주신 길을 따라가며, 그분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부활의 영광에 참여할 있는 유일한 길은 그분과 함께 죽는, 그것입니다.  죄의 삶을 죽이는 것이죠.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셨네, 알렐루야!”라고 말하는 것만으로 죄의 삶이 죽는 것이 아닙니다. 귀양살이로서의 우리의 삶의 길을 걸어가며,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이해하여야 하고 선과 악을 이해하여야 합니다. 단순히 예수님이 주님이라고 말하는 것만으로 모든 것이 안전한 것이 아닙니다매일 매일의 삶에서 자신을 살피고 깨달아야합니다.  우리는 귀양살이를 하고 있음으로 인해, 육체를 가지고 사는 , 유혹은 우리의 삶의 매순간, 내적으로 혹은 외적으로  찾아오기 때문입니다.    


완전한 부활은 우리의 삶의 마지막에 맞게 되는 것입니다. 삶의 모든 과정을 뚫고 지나야만, 그리스도안에서 부활의 은총을 맞을 있습니다. , 우리는 마지막에 부활을 약속 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마지막날에 우리를 살리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마지막 심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런 말씀이 아니었습니다. 복음서는 구약과 달리 매우 명백하게 말해줍니다. 마지막 날에 내가 다시 살릴것이다.” 라고 말합니다. 나와 함께 죽는다면 죽지않고 계속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부활하게될 것이라는 것이죠. 유대인들이나 많은 다른 믿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 혹은  다른 많은 크리스챤 들은  우리가 죽으면 마지막 심판날까지 잠들것이라고 가르칩니다.   어떤 종교는 , 주님은 저의 주님이십니다.”라고 주님께 직접 말만하면 모든 것을 용서받고  곧바로 천국으로 간다고 가르칩니다그러나 부활에 대한 진리는 그분께서 보여주신 삶을 따르고 순종한다면, 우리의 삶의 마지막에 주님께서 우리를 다시 살리신다는 그것입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우선 무엇을 거쳐야 하는지를 보여주셨다는 것을 먼저 이해해야 합니다. 요한을 제외한 주님의 다른 모든 제자들은 십자가위의 주님으로부터 모두 달아났습니다. 그러나  달아났던 모든 제자들은 후에  순교를 하게 됩니다주님의 공생활 3 동안 함께 했던 제자들 가운데 순교를 하지 않은 사람은 예루살렘의 거룩한 여인들로서, 그들은 주님의 십자가의 길을 끝까지 함께 하였습니다. 그리고 끝까지 주님의 곁에 남았던 제자, 요한이 있지요. 그분도 순교하지 않고 나이들어 죽었습니다. 감옥에 갇히고, 박해를 당했지만, 다른 제자들처럼 육체적으로 순교하지는 않았습니다. 이유는 십자가의 길을 통해 이미 주님과 함께 죽었던 것입니다.  성모님은 어떠했을지 상상하실 있겠습니까? 그분은 주님의 아래 완전히 죽었을겁니다. 너무도 고통스러웠지만, 모든 일을 겪어야 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예수님도 하느님이셨지만, 육체를 가지고 있었으므로  고통을 느꼈습니다. 분도 고통을 겪어야만 했던 것입니다.

 

나머지 제자들은 도망갔지만, 결국 순교를 맞습니다.  그를 이어 다음 사람들도 대부분 예수님을 위해 목숨을  놓았고, 순교의 피로 세워진 교회가 오늘날까지 이어 내려 오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교회에는 항상 순교자가 있습니다. 순교의 피로서 천국의 길을 닦는 것입니다.   


부활은 하느님과 함께 십자가의 길을 가려는 의지를 가질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안에서의 십자가의 길은 자신이 죽는 고통스런 과정입니다. 복음이 말하는 나는 작아져야 한다 것을 이해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나는 가장 작아지고, 다른 모든 사람들이 나보다 중요하고 첫째가 되어야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수난인것입니다.  자신이 가장 중요하고, 마지막이 있는 것이 수난입니다.  그렇게 비로소 사랑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싸우고 있다면 무엇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까?  각자 자신이 살려고 하는 것이죠.  자신의 영역을 방어하고 자신이 옳다는 것을 증명하려 하는것이지요.  , 자신에게 집착하고 자신만을 위해 자신의 영역을 확보하려고 하는 것이죠. 그것은 부활로 이어지는 길을 막는 것입니다.  오직 죽을 운명, 한계가 있는 인간적인 것만을 방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방어해야야 것은 오직 죄뿐입니다.  죄는 결코 받아들여서는 안되지요. 그러나 모든 것은 포기할 있어야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당신의 뜻에 따라 주시길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갖기를 원하고, 그것을 좋아하고, 집착해서가 아닙니다.


부활의 의미를 이해하고,  부활로 향하는 길을 가기 위해서는 주님과 함께 죽을 준비가 되어있어야합니다. 골고타를 찾고 길을 올라가  십자가 위에 죄의 삶을 내려놓고 예수님과 함께 죽어야 하는 것입니다. 요한을 제외한 주님의 모든 제자들은 죽음이 두려웠으므로, 모두 달아났습니다. 그러나 예루살렘의 거룩한 여인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그들 모두가  예수님의 일부로서, 성모님이 어머니라는 ,  막달라 마리아, 또다른 마리아등 모두  예수님과 가까운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으므로 그들도 함께 죽임을 당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역사는 그들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하지 않습니다.  성모님에 대해서 조차도 많은 이야기가 없지요.  성서도 그부분은 침묵합니다.  사람의 영광에 대한 것이 아니라 오직 하느님의 영광에 대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곳에 있던 어떤 사람도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았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자신을 가장 중요하고, 낮은자로 여기라고 말씀하십니다.  자신의 어머니 조차도 가장 낮은자, 가장 침묵하는 자가 되도록 하였습니다.  성요셉도 자신이 중요하지 않은 낮은자가 되도록 하였습니다. 그러나 교회에서 그분은 매우 중요한 분이시지요.  그러나 우리가 그것을 발견해야 하는 것입니다.  


성령의 은총으로  우리가 부활을 이해한다면, 죽어야만이 부활한다는 것을 알것입니다.  여러분이 자신이 중요하지 않고 모든 것에 낮은자가   바로 부활이 있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여러분을  발견하게 것입니다.  여러분을 발견한다는 것은  하느님을 발견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느님 안에 숨어 있을것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가장 중요하고 낮은 자가 되어, 다른 모든 사람들이 우선이 , 여러분은 하느님 안에 숨어있게 됩니다.  사람들이 와서 여러분을 찾아 , 누구를 발견할까요?  여러분 안에 계신 하느님입니다.  여러분의 겸손함과 단순함, 모든 이익과 자기중심의 집착으로 부터 벗어나,  누구에게도 무엇도 기대하지 않고 섬기는 자가 되어있음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만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하신 부활할 있는 방법입니다.  조건없이 섬기는 , 섬기는 ,  하느님의 참된 종만이 부활 있도록 것입니다.


십자가의 길에서 달아난 모든 제자들은 아직 죽음이 두려웠으므로 주님을 위해 목숨을 놓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엠마우스로 가던 제자들도   위대한 예언자가 죽었다라고 다소 불만스러운 표현으로 말합니다.  예수님이 하느님이라는 것을 믿지 못하는 의미의 그러한 표현을 굳이 필요는 없지 않았을까요. 예수님은 죽임을 당했으므로 슬프고 유감스러웠던 것이죠. 후에 빵을 나누는 것을 보고 나서야 예수님을 알아보고 예루살렘으로 되돌아가 사람들에게 이야기를 전했지요. 그들은 예수님이 죽임을 당하는 것을 보고 의심하였고, 예수님이 하느님이라는 것을 믿지 못했습니다. 그러기에 토마스는 내손을 예수님의 상처에 넣어보아야 믿겠다고 말한 것이죠.  어떻게 하느님이 죽임을 당하는가 하고 생각했고, 더이상 그것을 믿지 않았던 것입니다.  마리아 막달레나가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것을 보았다는 굉장한 소식을  전했을때도  제자들은 믿지 못했습니다.  베드로도, 요한조차도 믿지 못했습니다.  간단히 말해서, 기대하지 않았기 때문이죠.


하느님과 관계에 있어, 우리는 당시 제자들의 불신과 같아서는 안된다는 것을 깨달아야합니다.  이상이어야 합니다. 예수님과 매우 가까왔고, 그토록 주님을 사랑했던 요한은 주님의 죽음의 마지막까지 함께 하고서도 예수님께서 부활하시리라고 기대하지 못했습니다. 그에게 있어서도 예수님은 돌아가시고 만것이었습니다. 그러기에 여인들이 소식을 전했을때  믿지 못하고 매우 놀라지 않았습니까? 그럼에도 성령께서는 베드로와 요한으로 하여금 무덤으로 달려가도록 했습니다.  어쩌면 그말이 사실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으므로 그것을 확인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달려가던 그들이 마음속으로 어떤 생각을 했을지 없지만, 성서에 의하면 그들은 부활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주님께서는 변호자인 성령을 보내시기 전에는 그들이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우리는 이미 변호자인 성령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때의 제자들과  같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때의 제자들과 같이 행동합니다. 예수님께서 못박히셨을 때의 베드로, 야고보나, 혹은 요한과 같이 행동합니다. 하느님께서 일하시는 우리의 안에서  일이 제대로 되지 않는것 같을 우리는 얼마나 의심을 합니까?  하느님을 시험하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감히 밖으로 말하지 못해도, 우리의 마음 깊은 곳에서는 혼란을 느끼며 하느님께서 이렇게 되도록 하셨는지 모르겠어라고 하며 슬픔에 빠지지요.


가톨릭 신앙을 가진 많은 사람들이 우울해 하고 슬픈 얼굴을 하고 있다는 것은 모순입니다.  가톨릭 신앙을 가지고 성체를 모시고 성사생활을 하는데 어떻게 그럴수 있습니까?  어떻게 혼란스러운 시큼털털한 얼굴을 하고 살아갑니까?  살면서 자기가 생각한 대로 되지 않는 어려움을 만날 때마다 믿음을 잃곤 합니다. 불안해하며, 주님께서 도와 주시리라고 기대했던 것을 도와줄 다른 무언가를 찾아 뛰어다니며 더이상 주님을 신뢰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계획했던 때에 되지 않는다고 희망을 잃고 하느님께서 일하시는 것을 더이상 보지 못합니다.


예수님 안에서의 참된 부활을 받아들이고, 삶의 마지막에 참된 부활을 성취하기 위해서 우리는 그러한 삶의 모든 사건 안에서 죽어야합니다.  매일의 삶에서 어떻게 그것들을 주님에게 드리고 봉헌할 있는지를 배워야 합니다.  아침에 일어 났을때 여러분이 첫번째로 해야 일은 삶을 주신 주님께 영광을 드리는 것이어야 합니다.  절대로 잊어서는 안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어떻게 주님께서 주관하신다는 것을 받아 들일 있겠습니까? 분이 모든 일을 만드시는 분이십니다. 그분께서 여러분이 아침에 눈을 뜨도록 하셨으므로 눈을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 오늘 아침에 눈을  있고 생명의 은총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 라고 주님을 찬미하십시오.  그리고 다음에 일어나는 모든 일에 대해 주님께 영광드리는 그것이 부활로 향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한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 안에서 , 발을 옮길때마다 하느님을  인식할 비로소 부활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전에는 아직은 죽어 있는 것입니다.  단지 세상에 집착한 삶을 삶으로써 그리스도 안에서의 삶을 살지 못한다면 하느님으로 부터 멀리 있는 것이며, 그것은 살아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부활로 향하지 못한 것이죠. 완전한 부활은 세상 삶의 마지막에 비로소 성취됩니다.


우리가 (새로운 도시) 예루살렘을 말할 ,  전례를 통한 지상의 예루살렘에 참여하듯이 부활도 그와 마찬가지입니다. 순종과 진리를 나타내는 예수님의 신비체에 참여하며여 결국 마지막에 천국에 이르는 것이지요. , 자신이 죽지 않는다는 진정한 믿음을 가져야합니다.   자신이 죽지 않는다는 진정한 믿음을 가질 부활을 이해하게 것입니다. 진정으로 부활을 이해한다면 자신이 죄가 없는 죽음이 두렵지 않을 것입니다.  죄가 있다면 두렵죠.  하느님이 두려울테니까요.  그러니 여러분은  대죄를 가진 채로 죽고 싶지 않습니다. 대죄를 가지고 하느님에 대전에 나가고 싶지 않습니다. 자비로서 저를 준비시켜 주십시오.  자비를 베푸소서.  혼자서는 지옥에 밖에 없습니다.   혼자서는 천국에 없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것을 깨닫고 인정하며, 마음깊이 그러한 생각을 느끼게 된다면, 모든 것을 하느님만이 하실 있다는 것을 알게 것입니다.  하느님만이 여러분의 존재적인 상태를 주관하시고 마지막에 완전한 상태가 되어 부활하게 하시리란 것을 알게 것입니다.


지금 우리 모두는 부활로 향하는 길을 향해 가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닮아 가며 부활로 향하는 길을 걸어가고 있으며 영원한 삶을 약속 받았다는 것을 알고  희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육체를 가진 삶은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삶의 여정을 계속하게 것입니다.  그것만으로도 우리는 지상의 삶으로 인한 많은 두려움과 걱정 근심으로부터 벗어날 있습니다. 자신이 죽고 말것이라는 생각을 멈추게 되기 때문입니다.  죽지 않는 사람이 되기 때문입니다.  죽지 않는 사람은 부활안에 있는 사람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부활할것임을 믿는 사람입니다.  그러면 많은 두려움과 불안이 사라질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마음을 쓰게 될거입니다.


우리 인간이 가지고 있는 어려움중에 하나가 삶이 사라질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의 일부를 이루는 사람들중,  우리와 가깝거나, 우리에게 도움을 주는 사람들, 우리를 사랑하고 도와주고, 친구가 되는 사람에게만 관심을 가질 뿐아니라,  자기 파괴적이며 나쁜 본성으로 인해 우리가 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우리는 미움의 대상으로 이용하곤 합니다.  하느님이 없는 삶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느님안에서  살아간다면,  우리가 사랑할 없는 사람도 용서하고 사랑하게 달라고 기도하게 될것입니다.  나에게 상처를 주거나, 혹은 내가 상처를 주며, 사랑하지 못함으로 인해 평화가 없을 , 주님께 주님, 제가 사랑할 없는 사람을 사랑할 있는 은총을 주십시오.” 라고 기도할 것입니다.   혼자서는 없기 때문입니다.  주님만이 그것을 있다는 것을 알고 그것을 원합니다.” 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것이 주님과 함께 부활로 이어지는 정신입니다.  주님이 부활하셨다, 알렐루야. 나는 구원 받았다.” 라고 그것이 부활의 모든 것으로 생각하는 것과 다른 것입니다.  우리는 죽지 않는다는 믿음을 가지고 부활의 길로 향하여 걸어가야합니다.

 

가톨릭 신자가 한편으로는 예수님을 믿는다면, 죽지 않을 것이며, 예수님께서 기다리고 계신다는 것을 믿습니다.” 라고 말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죽을 운명의 삶을 살아가는 것을 보는것은 슬픈 현실입니다.  쉽게 믿음을 잃고, 불안해하며, 자기와 맞지 않는다고 해서, 사람들에게 동정심도 없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은 부활로 향하는 삶안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을 속이며 지상의 삶만을 살아가는 것일 뿐입니다.  오직 자신에게 가까운 사람들, 함께 사는 사람들, 자신에게 유익이 되는 사람들에게만  은총과 좋은 것들을 나누는 것은 한계적인 사랑입니다.  그러한 한계가 있는 사랑은 부활로 향하는 것이 아닙니다.   부활은 완전한 사랑이어야합니다. 부활의 유일한 방법은 예수님처럼 하느님의 뜻을 행하는 것뿐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뜻만을 행하셨습니다. 그러기에 마지막에 하느님께서 그분을 들어 올리신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라 걸어간다면 죽지 않으리란 것이 가르침입니다.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라 가지 않는다면, 그분의 아들을 따르지 않았으므로 죽음에 이른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사람이 되신것은 하느님이 크시다거나, 기적을 행하는 것을 보이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가 사람이 되신 이유는 우리에게 어떻게 완벽한 사람이 있는지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당신을 따라 하라고 그렇게 하신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창조주이신 그분이 한계가 있는 육체를 가진 피조물이 필요가 없었지요.  그분의 육체도 목말랐고,  피곤했고, 슬퍼하셨으며 때로는, 좌절하기 했습니다.  어떤때에는 화가 나기도 하셨죠.   신성을 가진 그분이  한계가 있는 육체 안에서 사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집으로 가는 방법, 그분이 하신 그대로 하는 , 그것을 보여주시기 위해 사람이 되셨습니다.  그것만이  이유입니다.  그분께서는 당신이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모든 것을 배울 없다는 것을 아셨습니다.  모든 사람이 시험을 통과하는 것이 아닙니다.  약속의 가나안에 적은 사람만이 들어갈 있었습니다.  그것이 교훈이었죠.  그것은 앞으로 올것에 대한 훈련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영원한 삶이라는 선물을 땅에서 약속 받았고, 그것을 준비하기 위해 살아갑니다.   마치 파일럿이  시뮬레이션 (가상 실험) 하듯이 사람들은 우선 잠시동안 지상의 삶을 살아갑니다.  진짜 비행기도 아니고, 진짜 이륙하지도 않지만,  실제처럼 시뮬레이션을 합니다. 그것이 바로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하시고 있는 일입니다.  바오로 사도가 말한 것처럼,  거울처럼 혹은 베일에 가려진 영원한 영광을 보면서 시뮬레이션 합니다.  마치 비행기를 시뮬레이션 하듯이 삶을 살아갑니다. 그러나 삶의 마지막에 우리는 진짜로 비행해야 합니다.   땅을 떠나야 합니다.  우리는 모든 레슨을 받았지요.  그러나 많이들 추락합니다.  (사람들 ㅎㅎㅎㅎ)  많은 비행기 추락 사고가 있습니다.  주님께서 저에게 많은 추락 사고를 보여주셨지요.     

주님께서 우리를 훈련하고 계십니다.  매일 우리에게 시뮬레이션 비행기를 보여주시며, 정말 비행해야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가르치고 계십니다.  우리는 매우 주의 깊게  모든 레슨에 기울여 배워야합니다. 가르침 모두가 필요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일단 우리가 진짜 비행을 시작할 때가 되면 그곳엔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누구도, 이렇게 , 저렇게 , 그걸 눌러, 저걸 실행해아무도 이렇게 말해주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곳엔 아무도 없으므로 우리가 배운 모든 정보를 동원해야 것입니다.  좋은 학생이 아니었다면 많은 어려움을 겪을 것입니다.  비행기가 추락하면, 그곳에  꼼짝 못하고 멈춰 있어야 것입니다.  무엇을 해야할 전혀 모르는 말입니다.  그것이 바로 연옥입니다.  추락했다는 것은 자신이 그동안 파일롯인 했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지상의 훈련을 자기 혼자 배울 있다고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죽음을 맞았을때, 자신이 나를수 있는 알고 나르는 시늉을 것이죠.  이륙했지만, ~ 땅으로 떨어져 버린것이죠. 자신에게 속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생애동안 아무것도 하지 못한 것입니다.  자만심이나 죄로 인해 아무것도 안한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영적으로 과체중이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절름발이이기도 합니다.  또한 귀먹은 사람, 장님, 벙어리 등등,… 영적에는 자신의 행위에 따라 수많은 단계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영적으로 건강합니다.  그러면 준비가 되어 많은 빛을 받아들이수 있지요.  많은 영적 단계가 있습니다만, 모든 단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마음 깊은 곳으로 부터 삶의 마지막에  영적으로 완성됬을때 부활할 것이라는 믿음을 갖는 것입니다.   믿음이 가톨릭 신앙의 필수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것을 믿는 것은 기본이므로 그것 뿐아니라, 마지막에 그분 안에서 자신이 부활할 것이라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우리는 죽지 않고 계속 살것이라는 것입니다.   또한 인간으로서 우리가 의존하여야 것은 하느님께 대한 믿음이라는 것과 나의 삶안에서 그분이 주신 모든 것과,  생명을 주신 하느님께 영광을 드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가 알아야할 것은 우리 모두가 죽어서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히 함께 것이라는 것입니다.   삶은 여정의 시작일 뿐이며 하느님 안에서 우리의 관계는 영원히 계속됩니다.  정말 은총이 아닙니까?  하느님 안에서 만난 모든 사람은 결코 못보게 되는 일이 없습니다. 우리의 사랑의 단계는 자라나 완벽하게 것입니다.  우리를 떼어놓을 아무것도 없을 것입니다.  더이상 밤이 없으며 하느님의 영원한 아침만이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더이상 죽음은 없으며 모든 것이 부활 영광안에 있게 것입니다.


주님과 함께 하는 기쁨을 상상할 있겠습니까?  여러분의 오직 바램은 여러분을 통해 모든 사람들이 하느님을  모시고 여러분과 영원히 함께 하는것일 겁니다.  더욱 많은 사람들, 인류가 행복하여지고, 모두가 영원히 살기를, 모두가 빛에 영역에 머물기를  바라며, 사람들에게 은총을 주고 싶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그것을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믿음의 가장 기본적이고 중요한 것입니다.


삶을 살아가면서 우리가 부활할 것이란 확실한 믿음이 없다면 오직 죽음의 운명만을 생각하게 되어,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이나 우리가 의존하는 사람들, 일상을 나누고 익숙해진 사람들에 대해,  사람들을  (죽음으로) 잃는것을 두려워 하게 되므로, 현재의 성령의 선물을  누리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을 잃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이해해야 합니다.   사람들이 먼저 죽음을 맞던지, 혹은 여러분이 먼저 죽음으로써 잠시동안 서로 수는 없겠지만,  그들도 여러분과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부활할 것이라는 것을 이해한다면,  영원한 안에서 그들과 영원히 함께 할것 임을 알게 되므로 여러분의 삶이 바뀔 것입니다.  오직 걱정할 일은 그들이 대죄상태에 있을 경우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의 회개를 위해 기도하여서 서로 보지 못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지요. 두려워 할것은 사탄이 그들을 데려가는 일입니다. 우리는 모두가 하느님에게 속해야하며 하느님안에서 모두 함께 일만 걱정해야 합니다.  예수님안에서 죽는 것은 죽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모두 함께 것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는 내가 먼저 가서 너희가 있을 곳을 마련하겠다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것이 약속이고 사실입니다. 그것이 부활입니다.   


출처 : 주님과 함께 기뻐하며
글쓴이 : Wisdom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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