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이 어둠이 아닌지 살펴라.
눈이 밝아야 한다.
“아무도 등불을 켜서 숨겨 두거나 함지 속에 놓지 않는다. 등경 위에 놓아, 들어오는 이들이 빛을 보게 한다. 네 눈은 네 몸의 등불이다. 네 눈이 맑을 때에는 온몸도 환하고, 성하지 못할 때에는 몸도 어둡다. 그러니 네 안에 있는 빛이 어둠이 아닌지 살펴보아라. 너의 온몸이 환하여 어두운 데가 없으면, 등불이 그 밝은 빛으로 너를 비출 때처럼, 네 몸이 온통 환할 것이다.(루카 11:33-36)”
성경을 읽다가 이 구절에 이르러 적잖이 놀랐어요. ‘어랏! 빛은 빛이고, 어둠은 어둠이라고 하는 게 이치에 맞는 표현인데, 빛이 어둠이라니. 예수님께서 ‘빛이 어둠이 아닌지 살펴보라’고 하셨네. 성경에 이런 말씀이 있었구나.’ 반가웠어요. 마침 그런 주제로 사례들을 정리해볼까 하고 생각하던 참이었거든요. 우리 안에서 빛이라고 여겨지는 것들이 실은 빛인 양 하는 어둠일 수가 있거든요.
분별할 수 있는 맑은 마음과 분별하려는 노력이 없으면 우리 눈에 빛으로 보이는 것들을 빛이라고만 철썩 같이 믿게 되는 거지요. 그래서 빛의 열매가 아니라 어둠의 열매가 열리는데도 눈이 어두워져서 알아보지 못하게 되는 거예요. ‘눈이 맑아야 한다.’는 말씀은 우리의 마음이 겸손하여 맑은 지혜를 갖고 분별해야 한다는 말씀이겠지요.
이제 제가 알게 된 대로 ‘빛인 양 하는 어둠’의 사례들을 소개해볼까 해요.
영적인 체험은 일단 무시하는 것이 좋아요.
파우스티나 수녀님이 예수님과의 만남과 대화를 기록하셨어요. 각 대화나 일화 앞에 번호가 적혀 있는데, 순서가 약간 흐트러졌다고 해요. 어느 날 천사가 수녀님에게 나타나서 그간 적었던 일기를 불에 태우라고 시켰는데, 수녀님이 정말로 애써 적은 것들을 다 태워버리셨기 때문이어요. 그 다음에 예수님께서 파우스티나 수녀님에게 악마가 천사의 모습으로 나타났던 거라고 알려주셔요. 수녀님은 태워버린 부분을 다시 기록하셔야 했어요. 그래서 글의 순서가 살짝 엉망이 되었겠지요.
저는 그 부분을 읽고 굉장히 의아했어요.
‘악마가 천사 흉내를 진짜처럼 내기도 하는구나. 거의 날마다 예수님을 만나 대화하셨던 수녀님이 천사인지 악마인지 알아차리지 못하셨다니. 왜 예수님은 그 많은 분량의 일기를 불에 태울 때까지 수녀님에게 귀뜸을 해주지 않으셨을까? 다시 쓰는 수고가 굳이 필요한 것도 아니었을 텐데.’
저는 이렇게 답을 내렸어요.
‘악마는 자기들이 천사나 선한 존재처럼 우리를 속여서 괴롭힐 수 있다. 좋은 일을 하라고 그럴 듯한 말로 속삭이지만, 실은 우리의 시간과 수고를 빼앗거나, 관계를 망가뜨리거나, 영혼을 교만에 빠트리려는 속임수다. 그래서 우리는 부단히 분별을 하려고 애쓰고, 분별의 지혜를 간구해야 한다. 특히 하느님과 가까운 사람일수록 더욱 조심해야 한다. 악마는 하느님과 가까운 사람들을 더욱 기를 쓰고 방해하려 들 테니까. 하느님의 말씀을 들은 적이 있는 사람들, 예언의 은사를 받은 사람들, 성령의 위로를 체험한 사람들은 특히 조심해야 한다. 보이는 것, 떠오르는 생각, 성령께서 주신 것이라 생각되는 말씀들이 진짜 빛에서 온 것으로 여겨지더라도 그중 한 번은 어둠에서 온 것일 수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고 끊임없이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고 성찰해야 한다. 내 생각과 느낌이 틀릴 수도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고, 겸손되이 분별의 지혜를 청할 일이다.
아무리 애써도 분별할 수 없다면 일단 순명해야 한다. 파우스티나 수녀님은 ‘내가 만난 예수님의 말씀을 적은 건데, 왜 태우라고 하지?’하면서 순명 못하겠다고 고집을 피우실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파우스티나 수녀님은 악마가 아니라 천사라고 생각하셨기 때문에, 큰 수고를 들여 적은 일기를 순명하는 마음으로 태워버리셨다. 파우스티나 수녀님은 분별을 잘 못하셨을지만, 값진 순명을 하셨다. 교회의 가르침이나 장상의 명령에 대해서도 마찬가지 이치가 적용된다. 아무리 불합리하고 부당하게 여겨지더라도, 자신에게 돌아오는 손해가 크더라도, 일단 순명해야 한다. 거룩한 길로 나아가는 사람들이 걸려 넘어지는 마지막 단계가 ‘순명’이다. 그만큼 어려운 덕이다.’
예수님께서 파우스티나 수녀님에게 미리 귀뜸해주지 않으신 이유는 수녀님과 일기를 읽는 사람들에게 ‘네 안에 있는 빛이 어둠이 아닌지 살펴보아라.’하는 가르침을 주기 위해서일 거예요. 매일 예수님을 만났던 파우스티나 수녀님도 천사인 양하는 악마를 알아차리지 못하셨는데, 우리 보통 사람들이야 오죽하겠어요. 조심하고 조심하고 또 조심할 일이에요. 우리 생각에는 성령체험이라고 생각되는 것들이 실은 어둠일 수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고 일단은 의심하고, 특히 우리와 이웃에게 유익이 되지 않는 체험들은 다 무시하는 게 옳아요. 그런데 우리가 하느님께로부터 온 영적 체험의 은총에 맛들이려고 애쓰거나, 그 단맛에 머물러 있고자 하거나, 자랑하는 마음을 갖거나, 그 체험으로 자신의 신앙을 포장하고 다른 사람의 신앙을 평가하려는 마음을 가지게 되면 악마가 천사인 척 나타나 그럴듯한 말을 하고 달콤한 신비 체험을 주기도 해요. 그러면 그 영혼은 점점 더 영적인 교만에 취하게 되겠지요. 또 자신은 하느님을 위해서 최선을 다한다고 생각하지만, 그 열매에 사랑이 부족하거나 신앙의 오류가 담겨 있어서 주위 사람들이 하느님을 잘못 알아보게 만들어요.
분별을 잘 하려면 먼저 그 체험에 하느님의 ‘사랑’이 담겨 있는가, 그 영적 체험이 하느님 사랑과 믿음의 성장에 도움이 되는가, 그 체험을 전했을 때 다른 사람들의 신앙에 도움이 되고 교회의 가르침을 제대로 알게 하는가, 그 체험이 내 삶에서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열매를 맺는데 도움이 되는가를 살펴봐야 해요.
영적인 만족을 주는 일일 경우에는 더더욱 자신의 마음속을 자세히 살펴야 해요. 그런 노력을 기울일 겸손이 부족하다면 영적인 동반자 역할을 할 사람을 찾아서 의견을 묻고 따라야 해요. 좀 큰 체험일 경우에는 반드시 그 체험을 들어주고 인정해줄 지도자가 있게 마련이어요. 예수님께서는 '둘씩 짝지어' 제자들을 파견하셨어요. 하느님께서는 사제, 영적인 조언자를 반드시 짝지어 주셔요. 때로는 불편함과 반대를 무릅쓰는 상황도 만들어 주셔요. 예를 들어, 영적인 체험을 전하면서 마음이 불안하고 주눅 들고 비난 받을까 겁나지만, 하느님을 전하고 싶은 마음 때문에 그런 저항을 눌렀다면, 그런 체험은 성령께로부터 온 것일 확률이 높아요. 영적인 체험을 전하는 것이 자신의 유익을 포기하는 경우, 건강과 시간을 잃을지도 모르는 위험을 무릅쓴다거나, 그 일의 대가가 세상 것이 아닌 경우 빛에서 온 체험일 확률이 높아요. 이도저도 아니면 아무리 좋은 영적체험이라도 무시하는 것이 좋아요. 그저 교회의 성사와 전례 안에 머물러 하느님 말씀을 듣는 것이 자신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은총임을, 더 이상은 필요 없음을 믿고 감사해야 해요.
예수님께서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고 하셨지요. 정말이에요. 영적으로 남들보다 우위에 있고 싶어 하는 마음에서 바라는 영적인 체험은 세상 것을 구하는 마음만큼 해가 될 수 있어요. 자신의 체험이 하느님께로부터 온 것이라는 증거라고 인정받고 싶어하는 마음을 이용해서 악이 주는 근사한 체험들을 계속 주기도 해요. 보통은 그 체험의 순수함을 더하기 위해 하느님께서 덧붙여 선물해주시는 십자가들이 반드시 있게 마련이어서 겁 없이 마냥 부러워할 것도 아니고요.
-사례: 제가 아는 환우는 학식이 높고 좋은 직업을 가졌는데, 어느 개신교 기도원에 머물면서 기도 받은 적이 있어요. 그 기도원에 있는 환자들은 대부분 귀신과 대화를 했다고 해요. 그 환우가 지도자 역할을 하던 어떤 집사님 집에 갔는데, 자기 눈에도 귀신이 너무 많이 보이더래요. 집사님이 "이 많은 귀신들과 나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대적해 싸워야 한다."고 하더니, 결국 암이 온 몸에 퍼져서 세상을 떠났다고 해요. 그 환우는 지금도 귀신을 본대요.
그 집사의 경우, '나는 영적인 사람이야. 내 눈에는 귀신도 보여. 나는 영적인 사람이라 (귀신을 통해) 느낄 수 있어. 내 질병은 영적인 싸움으로 이길 수 있어.'하는 생각으로 그 세계에 머물러 있고자 하는 바람을 갖고 있었을 거예요. 세상에서 상처 받고 약한 사람일수록, 자존감을 가져보려고 그런 비뚤어진 영적인 세계를 붙잡고 있을 수 있어요. 하느님이 영적 훈련을 위해 귀신을 붙여준 게 아니라, 어떤 이유로든 자기가 원해서 마귀를 붙잡고 있었던 거지요. 아니면, 큰 고통이 닥쳤을 때, 잘못된 인연을 만나서 잘못된 길로 들어서게 되었던지요.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어 하는 환자들, 절망 속에 있는 사람들을 하느님의 이름으로 불러들여 잘못된 세계에 의지하고 집착하게 하는 기도원이 꽤 있나 봐요. 어떤 영적인 유익도 주지 못하는 마귀 체험(죽은 사람의 영혼인 척 하기도 해요.), 갑작스레 보이는 다른 사람의 과거와 현재, 그딴 거 필요 없다고, 원치 않는다고 거부해야 해요.
하느님의 이름으로 모여 마귀를 쫓아내는 체험을 했다고 해서 자신이 하느님 안에 제대로 머물러 있는 것은 아니에요. 자기 마음속의 어떤 점이 그런 영적인 체험이 반복되게 만드는지 세심하게 성찰해봐야 해요. 간혹, 마귀들의 괴롭힘도 영적 만족감으로 받아들이는 경우도 있어요. 무시하고 거부하지 못하면 마귀들이 계속 천사노릇도 하고 마귀 노릇도 하며 장난을 쳐요. 자신이 영적인 사람이 아니라, 마귀 들린 사람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인정할 용기를 가져야 해요. 그리고 그런 체험을 공유하는 사람들과의 연을 끊고, 아무런 느낌이 없을지라도 교회 안에 머물러 있어야 해요. 예수님께서는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라고 하셨어요. 길을 잘못 들면, 진리를 발견할 수 없고, 생명을 얻을 수 없어요.
- 사례: 암환자들이 찾아가는 곳 중에 기억치유를 통해 암치료를 하는 곳이 있대요. 아는 가톨릭 신자 형제님이 가본 적이 있다는데, 여러 사람들이 의자에 앉아 있는 자기 앞에 나와서 왔다 갔다 하면서 지인들, 조상들의 역할을 맡아 역할극을 한다네요. 그들이 과거를 대충 알아맞히는 것 같더래요. 환우들의 절박한 마음을 이용해서 마귀들이 자기들에게 의지하고 하느님 못 찾게 하려는 술수를 쓰는 거지요.
- 사례: 바른 영적인 상태에 있고, 환우들을 도우려는 선의가 있는 분들 중에서도 가끔 잘못하실 때가 있어요. 예를 들어, 예언의 은사가 있는 분이 '저 사람은 왜 아플까? 저 사람은 어떤 영적 상태에 있을까?' 하고 판단하고 싶은 마음을 갖고 있다면 자칫 잘못된 예언을 할 수 있어요. "병마일 겁니다. 하느님의 전능으로 마를 쫓아버려야 합니다."하는 식으로요. 어떤 사람에게는 맞는 말일 수 있지만, 일반화를 시키면 곤란한데 말이에요. 자신의 경험이나 선입견이 작용하는 경우도 있구요. 악 혼자서는 우리에게 해를 끼칠 수 없다고 해요. 우리가 동의를 하니까 해를 끼칠 수 있는 거지요. 병마라는 이름으로 마귀 존재를 인정해주고 쫓아낸답시고 말을 걸기까지 하는 것, 그거 위험하고 불필요한 일이에요. 명품의 짝퉁은 있어도 보통 물건의 짝퉁은 없지요. 신앙도 그래요. 명품 신앙으로 보이는 것들 중에는 짝퉁이 있게 마련이지요.
현재 상태에 대한 격려 예언은 미래 예언이 아니다.
몇몇 신자들이 사제로서의 정체성이 흔들려 그만두려고 하는 착하고 마음 여린 신부님을 위해 기도한 적이 있어요. 기도하는 신자들 중 한 신자가 예언의 은사가 있었는데, 하루는 울면서 성모님의 위로를 전해주었어요. 성모님께서 너무나 마음 아파하시면서 "아들아. 먹구름이 끼었다고 슬퍼하지 마라. 먹구름이 지나가면 햇살이 비친다는 것을 너도 알지 않느냐?" 라는 요지의 말씀을 하셨다고 했어요. 그 신부님을 위해 마음 아파하며 기도하던 신자들은 성모님께서 챙겨주고 계시니 걱정할 거 없다고 기뻐했어요. 그 후 '그래. 그 신부님은 성모님께서 돌봐주시니 잘 지내실 거야.'하고 낙관하다가 점점 기도를 소홀히 하게 되었어요. 꼭 그 때문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그 신부님은 결국 사제를 그만 두셨어요.
이런 경우 성모님의 말씀이 틀렸거나 잘못 전달되었을까요? 아니에요. 예언을 듣는 사람들이 맘대로 확대해석해서 마음을 느슨하게 가진 거예요.
성령께서는 한 영혼의 현재 상태에 대해 염려하고 위로하면서 희망을 가질 것을 권하셔요. 그렇다고 해서 그 영혼의 자유의지까지는 침범하지 않으시고, 같이 탄식하며 기도해주시지요. 지금 희망을 가지라고 말씀하셨다고 해도 미래에 그 희망이 노력이나 수고 없이 저절로 이루어지리라는 예언은 아닌 거예요. 우리는 그저 하느님께 희망과 신뢰를 두고 지치지 않고 최선을 다해야 해요. 장밋빛 예언을 들었다고 해서 방심하거나 부풀린 희망을 가지거나 자의적인 해석을 하면 곤란해요. 때로는 지나치게 단정적으로 낙관적인 예언을 해주면 일단 의심해 볼 필요가 있어요. '잘 풀릴 것이다.'라는 식의 예언은 무당들이 주로 하는 가짜 예언이에요.
성령께서는 구체적인 때를 알려주시지 않는다.
성령께서는 대부분의 경우에 구체적인 때를 알려주시지 않아요. 예를 들어, 어떤 환자가 치유의 은사를 받으러 갔다고 해요. 안수자가 "당신은 낫게 될 것입니다."라고 예언을 해주었어요. 그럼 그때가 언제인지 얼마나 궁금하겠어요? 그래서 예언해준 이에게 되물어서 구체적인 때에 대한 답을 들었다면 그 답이 인간적인 생각이 섞여 들어간 잘못된 예언이 아닌지 의심해볼 필요가 있어요.
예언해준 사람도 ‘이번 검사 결과 후에?’ 라고 막연히 기대했다가 좋은 결과가 나오지 않았다고 하면 자기 입에서 나가는 말을 인간적인 기대로 잘못 해석하지 않았는지 성찰해보아야 해요. ‘상대방의 믿음이 부족하지 않았나?’ 하는 식으로 예언이 자기 말 대로 성취되지 않은 것에 대한 이유를 찾아볼 필요가 없어요. 하느님이 낫게 해주시겠다는 때는 곧 이루어질 수도 있고, 그 환자의 질병을 통해서 이루고자 하는 주위 사람들의 모든 변화가 이루어진 후일 수도 있고, 그 환자로부터 이루고자 하시는 하느님의 뜻이 클 때에는 병이 더 깊어지도록 허락하시는 것이 낫는 것이 될 수도 있고, 그 환자의 영적 수준이 한 단계 훌쩍 뛰어 넘어 훌륭히 싸우고 있을 때에는 치유의 시기를 변경하실 수도 있고, 심지어 치유의 때가 이 세상에서가 아니라 영원을 말씀하신 것일 수 있어요.
하느님께서는 위로받아야 할 영혼과 그 가족들, 지인들 모두를 위해 가장 적당한 때를 기다리셔요. 환자가 하루빨리 낫는 것보다도, 환자가 육체적인 치유를 통해 얻게 될 영혼의 유익이 최고로 많아질 즈음을 선택하실 거예요. 환자와 지인들이 그 환자의 질병을 계기로 화해하고 치유 받고 사랑할 기회를 더 많이 갖는 것이 중요하겠기 때문이에요.
섣불리 기대하고 기뻐하며 방심하다가 실망만 더 커질 수 있고, 예언이 역효과를 줄 수도 있으니, 예언하는 사람이나 받는 사람이나 자기 생각대로 해석하지 않으려고 애써야 해요. 제대로 분별하지 못하면 서로의 영혼에 대해 잘못 판단하게 될 수 있고, 상처를 입힐 수도 있어요. 성령께서는 영혼들의 유익을 위해서 구체적인 때를 알려주시지 않아요.
(영혼과 주변의 상황이 치유가 곧 즉각적으로 이루어질 만큼 충분한 상황이 마련되어 있다면, 하느님께 영혼을 확 끌어당기는 계기로 삼으라고 구체적인 때를 알려주실 수도 있겠지요. 기도 모임의 환우가 다니는 성당 신자 중에 소아마비가 나아서 제대로 걷게 된 자매님이 있다고 해요. 한쪽 다리가 짧아서 절뚝이고 다녔는데, 치유 안수를 받고 다리가 길어져 정상적으로 걷게 된 거래요. 그분은 여러 성당을 다니면서 간증을 했다고 해요.
저도 예전에 소아마비 환자의 다리가 길어지는 것을 본 적이 있어요. 그 치유봉사자는 소아마비 환자가 오면 제일 먼저 가운데로 나오게 해서 만져주었어요. 그러면 두 다리의 길이가 맞춰지곤 했어요. 거기 모인 모든 사람들의 믿음을 더하게 하기 위해서 눈으로 보게 하시는 거라고 했어요. 저도 몇 번 보기는 했지만 그렇게 치유 받은 소아마비 환자들이 나중에 어떻게 되었는지는 확인하지 못했었는데, 완치 되어서 간증하고 다니는 분들이 있군요.)
성령께서는 불필요한 판단을 하게 하지 않으신다.
자타공인 순수하고 열렬한 신심을 가진 언니가 있어요. 그 언니는 다른 사람들을 위해 열심히 기도하셔요. 언니는 누군가를 위해서 묵주 기도를 하실 때, 묵주알이 잘 안 굴러가는 느낌, 뻑뻑한 느낌이 들 때가 있다고 해요. 그런 경우에 언니는 기도해주는 상대의 영혼 상태가 안 좋을 것이라고 생각하셔요. 하지만 그런 느낌은 어둠에서 오는 느낌일 확률이 높아요. 성령께서는 불필요한 판단을 하게 하지 않으시거든요. 언니는 그저 사랑으로 기도하시면 되는 거예요.
또 한 언니는 지인들에게 묵주를 만들어 선물하는 것을 좋아해요. 언니는 누군가를 위해 묵주를 만들면서 매듭이 예쁘게 안 지어지면 그 사람의 영혼 상태가 염려스러운 것이라 짐작해버려요. 매듭이 예쁘게 잘 지어지고 시간도 짧게 걸리면 묵주를 선물 받을 사람이 잘 살고 있는 사람이라 생각하게 된다고 해요. 그런 느낌은 선입견을 갖게 하고 이간질 시키는 어둠의 장난일 거예요.
기도하는 사람, 예언하는 사람이 자기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느낌'에 자의적인 의미를 부여하여 전하면 사람을 판단하게 하고 이간질시키게 되는 경우가 있어요. 그들이 교만하기까지 하면 공동체 전체에 분열을 일으켜요. 사랑을 불러일으키지 못하는 일체의 느낌은 무시하는 게 좋아요.
어둠은 좋은 것을 주면서 더 좋은 것을 방해하기도 한다.
신앙심 깊은 한 자매님과 종교가 없는 한 형제님이 알고 지내게 되었어요. 형제님이 말기암 선고를 받고 힘들어하자, 자매님이 영적인 도움을 주고 싶어서 자연스러운 기회를 만들어 슬쩍 하느님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어요. 그런데 두어 번 이야기를 나누었을 뿐인데 갑자기 형제님이 자매님에 대한 사랑을 느낀 거예요. 형제님은 아주 어릴 적에나 가졌을 법한 순수한 사랑이 느껴져서 자매님이 불쾌해하리라는 예상을 못하고 자매님에게 자기 마음을 표현하게 되었대요. 자매님은 황당한 상황에 어이가 없어서 선교를 포기하고 만남을 끊으려 했어요. 그런 경우 형제님이 느꼈다는 사랑이 순수하니까 성령께서 주신 감정일까요? 아니에요. 그건 빛인 양 하는 어둠이어요. 형제님이 하느님을 알게 되는 것을 기를 쓰고 방해하려고 어둠이 형제님의 마음에 사랑의 감정을 불어넣은 거예요.
그렇다면 해결 방법은 쉬워요. 어둠은 좋은 것을 주면서 영혼이 더 좋은 것을 얻는 것을 방해한다는 것을 알았으니, 어둠이 목적을 달성시키도록 도우면 안 되지요. 하느님 뜻이라면 자연스러운 상황에서 다시 만나 하느님을 알려줄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해요. 적을 알면 쉽게 이길 수 있어요.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거든요. 자매님은 기도하면서 상황을 기다려서 형제님을 하느님의 자녀가 되게 했대요.
또 기도를 열심히 하는 한 자매가 있었는데, 지인이나 친구들이 선물을 들고 찾아오거나, 호의적인 만남을 청해오는 경우가 너무 많아서 힘들어했어요. 좋은 감정, 배려의 마음을 늘 받아들여야할 것 같지만, 그런 경우에도 그 자매가 기도하는 시간, 하느님과 일치하는 기쁨을 빼앗기 위해서 어둠이 선한 얼굴로 다가온 것일 수 있어요.
약삭빠른 어둠은 우리에게 나쁜 일을 하라고 시키거나 불쾌한 느낌을 주거나 하지 않아요. 정체가 금방 탄로 나잖아요. 좋은 것, 좋은 감정을 주면서 더 좋은 것, 최고의 하느님을 찾는 것을 방해하지요. 좋은 느낌, 좋은 감정, 누군가의 호의가 혹시 자신과 타인이 하느님을 만나는 것을 방해하는 결과를 가져온다면 어둠인 줄 알아차리고 기도로 도움을 청하고, 상대가 상처받지 않게 부드럽게 거절하셔야 해요. 분별해서 알아차리기만 하면 성령께서 도와주셔요. 분별을 잘 못하면 어둠을 빛이라 착각하면서 계속 손해를 입게 되지요.
성령께서는 우리를 난처하게 하지 않으신다.
어느 성령기도회에 참석한 적이 있어요. (지금은 수도회를 나가신) 한 수사님이 구마 기도를 하셨어요. 어떤 자매를 가운데 앉혀놓고 봉사자들과 함께 "사탄아, 물러가라."라고 외치는 거여요. 남아서 그 장면을 보고 싶은 사람은 그냥 뒤에서 구경을 했어요. 그 자매가 과연 이상한 행동을 하기는 했지만 딱히 구마가 된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어요. 곧 다시 일상생활로 돌아갈 자매인데, 여러 사람들 앞에서 그렇게 공개적으로 구마를 하면 안 돼요. 악령 들린 사람일지라도 프라이버시를 지켜주어야 하거든요. 만약 악령 들린 사람이 공개적인 장소에서 덤비거나 문제 행동을 한다면 하는 수없이 즉시 구마를 해야겠지만 그 밖의 경우에는 신중해야 해요. 구마를 하거나 예언을 하는 분들은 자기 마음속에 과시하고 인정받고 싶어 하는 마음이 있는지 성찰해보아야 해요.
또한 불필요한 일들까지 성령에 힘입어서 해결하거나 답을 얻으려 들지 않는지도 성찰해 보아야 해요. 성령을 마치 자기의 사명을 위해 부리는 심부름꾼처럼 쉽게 불러들이려 하지 않는지 말이에요. 사랑도 없이 간절함도 없이 쉽게 예언해주는 습관이 배면, 어둠이 장난칠 기회가 늘어나요. 잘못된 예언을 진짜 예언으로 착각하거나 자기 생각이 들어간 말이 떠오르면 그것을 진짜 예언이라 믿게 되지요. 특히 여러 사람 앞에서 그 사람이 회개할 점을 구체적으로 지적하는 예언이 있다면 필시 가짜여요. 성령께서는 우리가 난처해하고 당황해하는 것을 바라지 않으셔요.
어둠은 특정한 사람이나 장소에 매이게 해요.
어느 기도원, 어느 단체에 정기적으로 찾아다니는 신자들이 있어요. 사이비 종교나 신흥영성이나 교회 내 이단 단체 등, 어둠이 조종하고 있는 곳에 가면 가르침이 그럴듯하고, 몽환체험 비슷한 평화로움을 느낄 수 있어요. 그러면 ‘왜 미사에 자주 가도 이런 맛을 못 느꼈나? 여기가 정말 하느님 만나는 곳이구나.’하고 생각하게 되지요. 하지만 그런 황홀한 느낌이나 평안이 빛이고 진리라는 증거는 아니에요. 초기에 그런 맛을 본 사람들은 금세 약효가 떨어지면 그 단맛을 보기 위해 자꾸 찾아가고 싶어 해요. 마약과 같아요. 약효가 떨어지면 다시 약을 맞지 않으면 불안해지지요. 어디에서나 계시는 하느님인데, 꼭 그 사람을 만나고 그 장소를 가야만 하느님 은총을 받을 거라 여겨지는 거여요. 거기서 파는 것들을 사서 갖고 있거나 그 물건을 가지고 기도해야 효험이 있을 거라 여겨져서 돈을 쓰기도 하고, 그곳에서 만나는 지도자를 떠받들게 되고요.
성령께서 주시는 참평화는 그런 곳에서 느끼는 싸구려 평화, 약효가 짧은 몽환체험과는 달라요. 감정이 통째로 흔들렸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진짜라는 증거는 못 돼요. 성령께서 주시는 평화는 감정이라는 껍질을 뚫고 영혼 깊숙이 스며들어요. 영혼 깊숙이 한번 자리 잡은 평화는 아무리 현실의 문제가 미해결이더라도 사라지지 않아요. 감정이 식어서 삭막해지더라도 영혼 깊숙이에서 다시 평화를 길어낼 수 있어요. 그래서 몽환체험을 느꼈던 장소나 느끼게 해준 사람에 매이게 되지 않아요. 성령께서 주시는 평화로 이미 내면이 변화되었기 때문이에요. 성령께서는 사람이나 장소는 성령께서 오시는 통로일 뿐이라는 것도 깨닫게 해주시지요. 그래서 특정한 장소나 사람에 매이게 되지 않고 자유로이 사랑하게 되지요.
기도문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여요. 특별히 어떤 기도가 효험이 있다는 식의 생각은 잘못 되었어요. 효험 있는 기도는 오직 사랑 담긴 기도나 행위나 봉헌이여요. 기도문은 우리가 어떻게 성찰하고 어떤 것을 원해야 하는지, 어떻게 기도해야하는지 도움을 주지만, 주술은 아니거든요. 성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여요. 어느 성지에 가서 수험생을 위해 기도하면 효험이 있다는 소문이 있대요. 그럴 리가요. 다만 그렇게 믿고 그 성지에 가서 미사를 드리는 엄마들의 정성과 사랑이 효험이 있는 것이겠지요.
어둠은 겸손을 가장할 줄도 알아요.
보통 생각하기에, 악마를 보면 어쩐지 으스스한 느낌이 들고 어두운 구석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요. 그런데 그렇지 않더라고요. 악은 자기를 그럴듯하게 포장해서 사람들을 속이는 것이 목표이기 때문에, 아주 매력적으로 보이지 않으면 안 되거든요. 악은 우리들 지능보다 몇만 배 뛰어나대요. 그래서 어떻게 하면 상대에게 매력적으로 보일 수 있는지 너무나 잘 알고 있어서 연기를 기가 막히게 잘 해요.
뉴스에 보면 사기꾼한테 속아서 돈이고 시간이고 빼앗기고, 심지어는 자기 아이들까지 바치는 경우가 있잖아요. 아주 지능적인 악이 선한 탈을 쓰고 있어서 못 알아차리는 거지요. 특히 신앙인들을 상대로 하는 악은 영적으로 높은 경지에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겸손해 보이기까지 해서 그야말로 그럴듯하고 매력적이라네요.
성당 다니는 형제, 자매들을 상대로 수백 억 사기를 친 여자를 만난 적이 있었는데요. 수년 간 치밀하게 계획을 세워서 편안하고 친근하게, 영적인 이야기도 나누면서 관계를 맺어가더라구요. 그 여자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는데, 영적인 체험도 정말 그럴듯하게, 자기 자신에 대한 이야기도 겸손하게 하더라구요. 정말 상대를 위하는 것처럼 느껴지게도 하구요. 수년이 지나서 여러 신자들의 가정을 파괴한 후에야 정체가 탄로 났는데, 그 모든 것들이 다 가짜이고 사기였던 거지요.
‘상대가 믿을만한가’를 기준 삼아 분별하려고 하면 실패하기 쉬워요. 악은 겸손도 가장할 줄 알기 때문에 웬만해서는 분별하기 힘들거든요. 그 사람을 만나고 그 사람의 제안을 듣고, 내 마음 속에서 어떤 탐욕이 일어나는지 살펴야 해요. 영적인 탐욕이든, 물질적인 탐욕이든 명예욕이든 정당한 바람이 아닌 게 있는지 성찰해보아야 해요. 상대를 판단하고 믿을지 말지 결정하려 애쓰지 말고, 먼저 자신의 마음에 일어나는 유혹을 살펴야 해요. 그러지 않으면 속아요. 어떤 사람과 관련된 중요한 일을 결정할 때는 내 눈에 보이는 상대의 모습이나 느낌으로 분별하기에 앞서 자기 마음을 들여다보아야 해요. 악에 맞장구치는 우리의 욕심이 없으면 악은 우리를 망가뜨리지 못해요. 자신의 마음속을 잘 들여다볼 줄 알아야 악에 속지 않아요.
어둠은 교회에 탓을 돌리게 해요.
아는 교우 자매가 직장에서 연수 프로그램으로 추천 받은 한 캠프에 참석했어요. ‘마00련’이라는 단체에서 주관한 캠프였어요. 종교와 상관없다며 마음의 평화를 얻고자 하는 사람 누구나 초대한다고 광고하는 단체인데, 실은 신흥영성 집단이어요. 처음에는 그냥 마음을 다스리는 법을 가르치다가 한참 나중에야 창립자를 신격화하고 천도제를 권유하는 등 사이비 종교의 색깔을 드러내지요. 자주 참가하고 익숙해지면 그 단체의 문제점을 알아차리기 힘들게 되고, 이미 의존적이 되어서 빠져나오지 힘들게 되어요. 그 자매는 그 프로그램에 딱 한 번 참석하더니, 뿅! 빠져버렸어요. 그래서 거액의 수련비를 내도 아깝지 않다면서 계속 다니더라고요. 괴롭고 우울한 일이 많던 차에 마음의 평화를 얻고자 찾아갔던 터라 일종의 몽환체험을 하게 된 것이지요. 자신의 간절한 마음 때문에 무의식에서 나온 느낌이었거나 악이 주는 미끼였겠지요. 그 자매는 성당에 여러 해를 다녀도 그런 평화로운 느낌을 가져본 적이 없다면서 성당 다닐 필요 없다는 생각이 들었대요. 이천 년 내려온 교회를, 순교로 지켜온 교회를, 성령께서 이끄시는 교회를, 다른 곳에서 얻은 단 한 번의 느낌 때문에 제 기능을 못하는 불필요한 종교라는 딱지를 붙여버린 거여요. 그렇게 어둠은 교회에 탓을 돌리도록 속삭이지요.
나주 율리아도 마찬가지이지요. 교회의 정당한 요구를 묵살하면서 교회 탓을 하잖아요. 성령이 함께 하는 곳이라면, 성령께서 이끄시는 교회 탓을 하지 않아요. 정말로 부당한 요구라고 할지라도 순명하지요. 그곳에서 그럴듯한 체험을 했다는 사람들은 자기들의 ‘느낌’에 속고 있어요. 좋은 느낌이니까 어둠에서 온 것일 리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어둠에서 오는 것이라는 증거는 ‘느낌’에 있지 않아요. 교회 탓을 하게 만들면 어둠이어요.
어둠은 단맛에 집착하게 해요.
단맛을 자꾸 찾게 되고, 단맛을 위해 기도하고 봉사하고 있다는 생각이 심하게 들면 자기가 느꼈던 단맛, 계속 얻고 싶어 하는 좋은 느낌이 어둠에서 온 것이라 생각하는 것이 좋아요.
이런 말들을 들은 적이 있어요. "나는 기도할 때마다 찌리리 전류가 흘러. 여러분들도 기도를 많이 해봐. 나처럼.", "기도할 때 성령께서 같이 놀자고 침대를 흔들어줄 때도 있어.", "기도할 때 향기가 맡아지는데, 요즘에는 그런 향기를 맡을 수가 없어. 내가 뭘 잘못하고 있나 봐.", “나를 우습게 보지 마. 나는 탈혼상태에서 천사를 만난 적도 있어. 수도원장이 이렇게 성령봉사를 하고 다니는 나를 박해 해. 내가 이렇게 좋은 일을 많이 하는데.”, “나는 영서를 써. 내 은사를 천주교에서는 지도해줄 분이 없어. 개신교에까지 가서 영서를 쓰는 은사를 공부해야하다니 슬퍼.”
대대레사 성녀께서 말씀하셨어요. 하느님께서는 신앙의 단맛만을 조르는 영혼들에게 마지못해 단맛을 주시기도 하지만 몹시 언짢아하신대요. 그 영혼들이 단맛에만 머물러 있으려고만 하면 하느님 대신 악이 단맛을 주어서 영혼을 망치려 들어요. 기도의 맛은 기도의 보상이 아니에요. 악마는 천사인 것처럼 나타나 탈혼 상태의 신비한 느낌까지 줄 수 있다고 해요. 영혼들은 좋은 기분, 좋은 말씀이니 당연히 성령께서 주신 줄 알지만 실은 악이 주는 단맛이라는 거지요.
내가 느낀 단맛이 내 영적인 욕심을 만족시켜주는 데서 그치는지, 내가 느낀 단맛이 다른 사람 앞에서 뻐기는 데에 쓰였는지, 내가 느낀 단맛으로 다른 사람들의 영적 수준을 얕잡아 보게 되고 교만해지지는 않았는지 잘 성찰해보아야 해요.
(영서의 경우, 영서를 배워서 자신 말고 어느 누구에게 유익한 은사일 수 있는지, 자기만족이나 영적인 탐욕에서 그걸 배우고 싶어 하지는 않았는지 살펴보아야 해요. 영서를 쓰고 해석하는 일이 달다고, 그럴듯하다고, 좋은 말씀을 얻을 수 있다고 해서 빛에서 온 거라는 증거는 아니에요.)
영적인 단맛을 주위 사람들에게 이야기한다면 반드시 마음이 불편해질 때가 많아요. 하느님께서 주시는 불편함이지요.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오직 하느님과 이웃을 위하는 순수한 마음으로만 이야기하라는 도우심이어요. 심한 경우에는 예수님께 퍼부어진 것과 같은 무관심이나 조롱을 감수하게 하시지요. 함께 기뻐하고 함께 찬양하고 신앙심을 북돋워줄 수 있을 경우에는 말해도 좋아요. 하지만 듣는 사람들에게 그같은 유익을 주었다고 해서, 체험자가 말하는 행위가 순수하다는 증거는 아니어요. 하느님은 부족한 대로 쓰시거든요. 체험자는 자기 이야기를 듣는 이들이 얻는 유익과 상관없이 자기 자신을 성찰해야 해요. 많이 받은 사람은 더 엄격한 심사를 받는 게 당연하거든요.
0 언니는 가끔 환시를 보셨는데, 하루는 "다 잘 될 것이다."라는 위로를 받으셨대요. 그런데, 그런 전적인 위로가 오히려 의심스러워서 신부님과 상담을 해보시고는 악에서 오는 달콤함이라는 확신이 들었대요. 그래서 주님께 분별을 잘못할까 두려우니 환시 보는 은사를 거두어 주십사 청하셨대요. 지혜로운 분이셔요.
마음이 얄팍하고 요란하면 조용히 말씀하시는 진짜 하느님을 알아차리지 못해요. (단 맛을)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이 더 행복하답니다.
어둠은 간혹 쓴맛에도 집착하게 해요.
아는 언니가 자기를 괴롭히는 사람이 너무 미워서 기도를 했는데 가시관을 쓰시고 피를 흘리고 계신 예수님이 바로 눈앞에 보였대요. 그 순간부터 미움이 싹 가셨대요. 그건 정말 주님이 주시는 위로일 거예요.
또 아는 언니는 성체를 모시러 나갔는데 성합 안에 피가 고여 있는 게 보였대요. 겁이 나고 두려웠대요. 그 의미가 무얼까 아직도 잘 모르겠대요. 그것도 주님이 보여주시는 것일 거여요. 언젠가는 그 의미를 사무치게 느낄 수 있게 될 거예요.
그런데, 이건 가정이어요. 그 언니들이 그랬다는 게 아니고요. 만약 그 언니들이 자기들이 본 것이 특별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고 자기들의 영적 수준에 대해 자만하게 되어서 자꾸 그런 섬찟한 환시를 보고 싶어 한다면 그때부터는 어둠이 작용하는 거예요. 혹은 그런 끔찍한 장면이 자꾸 떠올라 평화로운 묵상을 방해한다면 어둠이 주는 거여요.
극단적인 예로 나주의 경우가 있지요. 그 자매는 예수님이 맞으신 채찍을 자기도 맞는다면서 상처투성이의 다리를 보여준대요. 악이 피를 내게 했을 수도 있고, 자기가 자기 다리에 상처를 내었을 수도 있겠지요. 얼마나 끔찍한 일이에요.
그런 고통을 거룩하고 특별한 표지인 양 여기는 마음이 있으면 악이 그런 쓴맛이 나는 이적을 계속 주어요. 그런 이적을 자주 겪는 사람은 고통스러우니까 자기는 원치 않는 것 같지만 사실은 마음속에 영적인 우쭐함이 반드시 있어요.
어떤 자매는 누군가를 위해서 기도하면서 마음이 너무 아프고 숨을 못 쉴 정도로 힘들면 '하느님이 나를 도구로 쓰시고 있나?'하는 생각이 든대요. 이런 경우에는 글쎄요. 그런 쓴맛이 지나친 것 같고, 계속 자기를 괴롭힌다면 무시하고 몰아내는 것이 좋아요. 하느님은 누구 대신 다른 누구를 괴롭혀서 선을 이끌어내시지 않아요. 괴롭고 싫은 느낌이지만 뭔가 특별하고 거룩한 의미가 있지 않을까 하는 느낌들은 무시하셔요. 그렇지 않으면 점점 더 자기가 대단한 사람인 양 교만해져요. 단맛이 아니라 쓴맛이기 때문에 하느님이 뭔가 뜻이 있어서 선물한 십자가라이려니 생각하기 쉽지만 실은 그런 쓴맛도 어둠에서 온 맛인 거지요.
하느님께서는 자발적인 사랑에서 오는 희생을 기꺼워하시지 충분한 사랑도 없는 사람을 고문하면서 희생을 받아내는 분이 아니어요. 하느님은 당신을 '바르게' 전할 때 겪는 십자가는 허락하시지만 영적 만족을 위한 특별한 쓴맛은 주지 않으셔요. 어둠이 주는 거예요.
빛을 행하는 사람도 어둠을 행할 수 있어요.
오래 전에 어느 성령 기도회에 갔어요. 지도하시는 분이 뻐기면서 말씀하셨어요. "내가 안수하면 사람들이 다 뒤로 나가 떨어져. 70%는 쓰러져. 근데 다른 지도자들은 내가 심령기도 할 때 아무도 못했어. 다른 지도자들이 안수하면 안 쓰러져도 내가 하면 다 쓰러져. 다들 놀래."
과연 그분의 안수를 받으니 다들 뒤로 넘어졌어요. 예언의 은사가 있으신 00 언니가 그래요. "나는 안 쓰러지려고 버티려고 했는데 안 되네. 저 분 영이 정말 세구나." 자기 영도 만만치 않게 센데 그 지도자 영은 더 세다는 거여요. 저도 쓰러지기는 했는데, 별 느낌은 없었어요. 그분 말고 다른 분이 안수해주실 때는 아주 따뜻한 느낌이 들어 눈물이 났지요.
치유의 은사나 예언의 은사, 기적의 은사 등을 행하는 사람은 성령께서 흐르는 파이프 역할을 할 뿐이어요. 어떤 때는 성령의 물살이 셀 수도 있고 잔잔할 수도 있지요. 눈에 띄는 반응을 일으켰다고 해서 그 사람 영이 센 것은 아니어요. 사람을 쓰러뜨리는 능력이 안수자의 영이 세서 생긴 건 아니에요. 기적을 행했다고 해서 그 사람이 훌륭한 사랑을 했다는 건 더더욱 아니고요. 그분은 교만하셨어요. 성령의 힘이 녹슬고 망가진 파이프를 타고 오신 셈이지요.
어떤 분이 정말 좋은 영성을 실천하고 있고 가르치고 있어요. 성령 운동도 하시고 구마도 하시고, 훌륭한 강의도 하셔요. 그럼 흔히들 그분 말씀은 다 옳을 것이라고, 그분 말씀대로 하기만 하면 다 거룩해질 거라고 생각하지요. 근데, 명심해야 할 것은 그분의 언행이 99% 옳아도, 1% 틀릴 수 있다는 거예요. 사람이 100% 빛에서 오는 행동만 하기란 정말 쉽지 않은 일이거든요. 그분이 오랫동안 병중에 있는 아이를 둔, 마찬가지로 병을 앓고 있는 엄마에게 그랬어요. 사람이 아픈 것은 100% 자기의 죄 때문이라고요. 대부분도 아니고 100%래요. 자기는 자기 죄를 회개하고 병이 나았대요. 자기는 죽어가는 사람들을 많이 봐와서 안대요. 중병으로 누워있는 사람들 곁에는 그 사람의 죄 때문에 아파하는 예수님이 계신대요. 그래서 죄를 회개해야 낫고, 회개하지 않으면 낫지 않는 거래요. 그게 아픈 사람한테 할 소리인지, 아픈 아이를 둔 엄마에게 할 소리인지, 특히 영적 지도자로서 할 소리인지요. 그분은 아주 고집스럽게 이의 제기하는 사람들을 교만하다고 몰아세우기까지 하셨어요. 예수님께서 분명히 아니라고 하셨는데 말이에요. 그분은 자기가 행한 일들이 대부분 빛에서 온 것이라는 확신이 있기 때문에 (사실 그렇겠구요.) 자기가 생각하는 모든 것들이 예외 없이 빛에서 왔으리라고, 자기 지위로 보나 능력으로 보나 분별을 잘하고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 거지요. 자기가 행한 것들로 인해 빛을 얻은 사람들이 많다고 해서 자기가 행한 모든 것들이 다 빛에서 온 거라는 보증은 아닌데 말이에요.
또 어떤 분은 영적인 상담을 해주면서 심리학적 지식을 이용해서 심리 분석이나 꾸지람을 주로 해요. 자기의 지식이나 자기의 상담으로 도움 받은 사람들의 일례를 모든 사람, 모든 경우에 일반화시키기도 하구요. 제가 느끼기에는 상담 받는 사람을 사랑으로 도와주려는 마음보다는 어이없다는 듯 바라보는 시선이 더 느껴져서 오히려 힘들어질 것 같았어요. 좋은 실적이 많고 노련하다고 해서 그 사람 말이 언제나 다 옳은 건 아니에요. 빛을 행하는 사람일수록 어둠의 방해가 거세잖아요. 똑똑한 사람일수록 자기 합리화에 능해서 어둠을 행하면서도 자기 능력에서 나온 좋은 것이라 믿기 쉬워요. 사랑과 겸손으로 자신을 성찰하지 않으면 안 돼요. 매너리즘에 빠지거나 성찰에 게을러지는 것, 지식을 자랑하고 싶어 하는 마음. 심리학 같은 세상의 학문 등으로 하느님의 사랑을 설명하고 전하려는 시도는 잘못되기 쉬워요. 하느님의 지혜는 우리의 지식이나 판단을 넘어서 계시거든요.
평소에 빛을 행하는 사람도 가끔 어둠을 행할 수 있어요. 지도자들은 겸손해야 하고, 분별을 위해 끊임없이 성찰해야 해요. 99번 잘했더라도 단 한 번이라도 실수하지 않을까 두려워해야 해요. 지식이나 은사는 기술이 아니라 사랑이어야 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해요. 지도자들에게는 여러 명 중 한 명에게 실수이겠지만, 지도를 받는 사람에게는 인생이 걸린 문제일 수 있거든요.
영적 지도를 받는 사람들은 알고 계셔요. 혹 빛을 행하는 분들이 어쩐지 이치에 맞지 않는 것 같은 행동으로 상처를 주거든 그분들을 믿으려다가 더 상처 받지 마시고, ‘그분들도 틀릴 수 있다더라’하고 털어버리셔요. 그리고 그분을 위해 진심으로 기도해주세요. 우리는 예외 없이 다 부족한 사람들이니.
아주 가끔은 성령께서 일부러 지도자들에게 틀린 생각을 불어넣으실 수도 있어요. 분별을 할 만한 사람에게 틀린 예언이나 행동을 겪게 해주실 수도 있고요. 지도자들의 겸손을 위해서 그들을 살짝 부끄럽게 하셔서 더 단단하게 하시려고요.^^ 우리 모두 늘 깨어 있어야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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