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 짐이 아닌 세상을 위한 은총
성체성사 때마다 우리는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기념합니다. 이는 좀 추상적으로 들리지요. 제게 성체성사는 우리에게 닥친 일 (죽음)을 부활로 변화시키는 연습입니다. 예수님은 죽음을 자신의 자유의지로 선택하지 않았습니다. 십자가의 폭력적인 죽음이 그분에게 닥친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에게 닥친 고난을 헌신의 행위와 사랑으로 변화시키셨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나는 착한 목자다. 착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는다. 아무도 나에게서 목숨을 빼앗지 못한다. .... 내가 스스로 그것을 내놓는 것이다." (요한 10,11.18) 이 모습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보여 드릴 수 있을까요? 저의 어머니를 예로 들어 볼까 합니다. 제 어머니는 91세에 돌아가셨습니다. 어머니는 60대 중반부터 시력이 3퍼센트 정도만 남았고 노년기 장애를 앓으셨습니다. 그렇지만 어머니는 늘 기뻐하셨습닏. 제가 한번은 이렇게 물어보았지요. "그렇게 아픈 와중에도 어떻게 늘 기쁨을 유지하세요?" 어머니는 아주 즐겁게 대답하셨습니다. '아! 고통은 그렇게 나쁘지 않아. 나는 이 고통을 내 아이들과 손자 손녀들을 위해 바쳤기 때문이지." 어머니는 스스로 고통을 선택하지 않았습니다. 그 고통은 그냥 어머니께 닥친 것이지요. 그러나 어머니는 당신에게 닥친 일들을 사랑으로 변화시켰습니다. 제 조카들은 이것을 느꼈기에 할머니 곁에 있는 것을 무척 좋아했습니다.
병을 비관하여 자신의 처지를 불평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제가 어떤 이를 방문 했을 떄 그는 저에게 불만을 토로했습니다. 건강한 저로서는 그분의 입장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자신에게 닥칠 일을 선택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를 좌절하게 하는 것에 어떻게 반응할지는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비통함으로 여길 수 있지만, 반대로 사랑으로 변화시킬 수도 있습니다. 성체성사는 오늘 우리를 좌절하게 하는 것들을, 오늘 우리를 가로막는 것들을 사랑의 행위로 변하게 하는 매일의 연습입니다.
유대인 강제 수용소 여섯 곳에서 살아남은 정신과 의사 빅터 프랭클은 로고테라피를 창안했습니다. 로고테라피는 의미에 대한 가르침 혹은 의미 부여를 통한 치유라고 할 수 있지요. 그는 말합니다. "운명은 우리의 모든 것을 앗아갈 수 있다. 건강, 사랑하는 사람 아니 삶 자체를 앗아갈 수 있다. 그러나 한 가지는 앗아 갈 수 없다. 바로 운명에 대한 자유로운 나의 응다비다." 우리는 우리가 건강할지 아닐지, 모든 일에 성공할지 아닐지 선택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에 대해 내가 어떻게 응답할지는 우리가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성체성사에서 깨우쳐야 할 점은 예수께서 자유의지로 자신에게 요구 된 것을 바쳤다는 것입니다. 그분은 십자가의 죽음을 친구를 위한 사랑으로 이해했습니다.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 (요한 15.13)
우리가 사순절을 보내고 부활을 기념하는 일은 개인의 구원에 가장 중요한 측면을 차지합니다. 우릭 고통을 사랑으로 변화시킬 수 있을 때, 우리는 고통으로 부서지지 않습니다. 고통은 예수 그리스도의 더 큰 사랑으로 깨어집니다. 그러면 우리의 고통은 다른 사람을 위한 은총이 됩니다. 우리의 고통에는 우리가 모르는 새로운 가치가 있습니다. 아픈 사람들은 대개 자신이 다른 사람들에게 짐이 되는 불필요한 존재라고 느끼곤 합니다. 이러한 감정은 자기 고유의 자긍심을 앗아가기도 하지요. 그렇지만 '자신이 바꿀 수 없는 이 병을 사랑의 행위로 변화시킬 수 있다'는 사실, 곧 고통의 새로운 가치를 알게 된다면 아픈 이들은 다시 자신의 존엄성을 가질 수 있습니다. 병상에 누웠어도 그들은 아주 귀중한 존재입니다. 병을 앓는 이들은 빛과 사랑을 발산합니다. 그들도 주위 사람들, 그들이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 해줄 수 있는 일이 있습니다. 한편으로 그들은 자신을 돌봐 주는 사람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그들은 우리 사회를 인간답게 만드는 데 중요한 기여를 합니다. 그들은 병마와 싸우면서 이 세상이 어두워지는 것을 막고 있습니다. 그들은 세상을 밝히고 치유합니다.
위대한 신학자이자 자연과학자로 중국에서 인류의 기원을 연구한 피에르 테야르 드 샤르댕은 이를 잘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그의 여동생 마르게르트 마리는 몸이 마비된 채 수십년 동안 침상에 누워 지내야 했습니다. 그녀의 오빠가 세상을 연구하고 신비에 싸인 인간 삶의 근원을 파헤치기 위해 왕성하게 활동하는 동안 그녀는 침대에서 꼼짝도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의 병을 하느님에 대한 헌신으로 , 교회를 위한 봉사로 받아들였습니다. 유명한 오빠는 1950년에 자서전을 쓰면서 서문에 1936년에 죽은 여동생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우주의 긍정적인 에너지에 몰두해 땅과 바다 이곳저곳을 다니며 지구의 모든 공명을 관찰하는 데 열정을 쏟는 동안, 움직이지도 못하고 침대에 누워 있는 너는 너의 존재 가장 깊은 곳에서 세상 최악의 어둠을 및으로 바꾸어 놓았구나. 나에게 말해 줘, 마르게리트! 창조주 눈에는 우리 둘 중에 누가 더 나은 일을 한 걸까?"
자신의 고통을 통해 어두운 세상을 밝히고 따뜻하게 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아픔이나 고통을 대한다면 자신이 병을 좀 더 쉽게 견뎌 낼 수 있을 겁니다. 그리고 그 병을 다른 사람을 위한 은총으로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이러한 변화를 통해 고통이 사라집니다. 그것은 더 이상 짐이 아니라 세상을 위한 은총입니다.
글/ 안셀름 그륀 신부 (성 베네딕도회 뮌스터슈바르작 수도원)
번역/ 김혜진 글라라 (분도출판사)
출처 /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 계간지 2016 Spring Vol.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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