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9년쯤 전에 아일린 조지 여사님의 책 <천국에서 나눈 대화>랑 <사랑의 횃불>을 읽었여요. 요즘 다시 읽어볼 작정으로 병원으로 책을 갖고 왔는데, 고작 한두 페이지씩밖에 못 읽고 있어요.(몸도 시간도 여의치 않아 게으름을 피우고 있네요.)
9년 전에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던 부분이 딱 한 부분 있었어요. 하느님께서 우리가 고통을 당하시는 것을 원치 않으신다는 부분이었어요. 자유의지로 인해 악이 있고 고통이 있는 건 알겠고, 그런 고통은 당연히 원하지 않으시고 아파하시겠지만, 사랑하는 이가 하느님의 뜻 안에서 겪는 고통이라면 기꺼이 허락하시고 흐뭇하게 지켜보지 않으실까 하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어제 잠들기 바로 전에이 부분을 읽었어요.
성부께서 : 내 딸 아일린아. 네가 고통을 당하면 이 아버지도 아파서 눈물을 흘린단다. 너는 사제들을 위하여 그 고통을 사랑으로 봉헌하고 있구나. 내가 성자에 대한 지극한 사랑을 네게 부어주었고 너도 모르는 사이에 너는 성자의 수난과 슬픔을 깊이 사랑하게 되었다. 그리고 성자는 너를 사랑과 기쁨과 고통을 함께하는 자신의 신부로 맞아들여 세상의 죄를 위한 고통을 너와 함께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아일린도 나도 일부러 고통을 구하는 것이 아니지만 아일린이 고통을 잘 참아 봉헌하니 내가 아일린을 더욱 사랑하게 되는구나. 세상이 올바른 길을 가기 위해서는 관대한 영혼이 많이 필요하단다. 영혼의 자유의지를 통해서만 세상의 변화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깨닫고 깊이 통회해야 하고, 그렇게 할 때 비로소 하느님의 마음이 진정될 것이다."
(천국에서 나눈 대화 p.28)
하느님께 종알거렸어요. “하느님, 정말이세요? 아일린 조지 여사도 암에 걸린 이후로 아직까지 여러 가지 질병에 시달리게 하시고, (여사님 표현에 의하면 당신은 20년째 회복 중이시라고.) 안 아프게 하셨으면 더 많은 일을 하셨을 텐데요. 그분 사랑이야 하느님이 제일 잘 아시고 믿으시잖아요. 저도 다른 사람들보다 더 심한 항암 부작용으로 고생하고 있는데... 게다가 제가 빠져들어갈수 밖에 없었던, 저와 다른 사람들의 그 많은 문제들은 또 어땠구요? 그 모든 일들을 아빠가 일부러 제게 엮어 주신 게 아니라구요? 제가 아프면 아빠 하느님도 아프세요? 저는 아빠도 저만큼 아프신 줄 몰랐어요. 그럼 아빠는 어떻게 견디세요? 낫게 해주시거나 살짝 막아주시면 될 텐데요. 아빠도 아프시다니, 아무래도 저희 고통을 해결해주지 않으신 데 대한 변명 같아요.”
오늘 아침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제가 아프고 힘들었던 일들은 사실 일어나게 되어 있는 일들이었어요. (선으로 이끄시기 위해 저와 문제들과의 인연을 만들어 끼어들게는 하셨지만, 저 아닌 다른 이들의 고통을 원치 않으셔서 끼어들게 하신 거여요.) 적어도 제 질병은 하느님께서 더 힘들게 겪도록 허락하신 게 아니었어요. 오히려 너무 힘들지 않게 살짝살짝 거들어주셨지요.
점심 전에 저는 복도에서 넘어졌어요. 오른손으로 땅을 퍽 짚었더니, 통증이 장난이 아니더라구요. 두어 달 전에도 넘어져서 어깨 근육이랑 팔목이 움직일 때마다 아픈데, 또 다친 거여요. 아빠께 그랬지요. “헐! 아빠 또 다쳤잖아요? 이런 거 안 막아주셔요? 이왕 아픈 거 00,00,00 신부님들과 아들들을 위한 기도로 봉헌할게요. 근데요. 아빠는 제가 팔까지 못 쓰게 되면 좋으세요? 능력은 두었다가 언제 쓰실라고. 원치 않으신다면서요? 저 지금 아픈 것도 함께 느끼셔요?”
하느님은 아주아주 특별한 목적이 없이는 자연의 섭리를 간섭하지 않으셔요. 제가 오늘 넘어진 것은 하느님이 그렇게 만드신 게 아니라는 거지요. 제가 어지러웠거나, 잠시 필름이 끊겼거나, 발을 헛디뎌서 넘어진 거여요. 하느님께서 제게 친구처럼 말씀을 건네신다면, “아이쿠 레지나 아프겠다. 내 맘도 아프다. 얼른 나아야지?”하셨을 거예요.
곧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성부 하느님은 성자 하느님이 십자가에 매달려 계실 때, 함께 고통을 겪으셨어요. 하느님은 사랑 그 자체이시고, 성부와 성자는 사랑으로 결합된 한 분이시니, 성부 하느님은 성자 하느님과 함께 수난 당하고 함께 죽으시고, 함께 부활하신 거여요. 그리고 우리에게도 오직 사랑이신 당신의 신성을 나누어주셨으니, 당신의 지체로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 안에서, 우리와 함께 고통을 겪으시고, 우리와 함께 사랑하시고, 우리와 함께 기뻐하셔요. 그런 의미에서 하느님께서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당신의 신부로 창조하셨다고 하는가 봐요. 성부와 성자께서 사랑으로 결합되어 하나이시듯, 삼위일체 하느님과 우리들도 사랑으로 결합되어 있어요. 하느님의 고통은 100% 사랑이고, 고통 속에 있는 우리의 "왜?"라는 항의에 대한 유일한 답일 것 같아요.
2006년 수술 전 날, 뼈전이가 된 것 같다는 말을 듣고, 엄마는 곁에서 울고 계시고, 남편은 세상 끝난 것 같은 얼굴로 머리를 싸매고 앉아 있을 때, 예수님께서 저를 내려다보고 계셨지요. 능력 있으신 분이 너무 가까이에서 보고만 계시니, 더 서럽더라구요. 저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고 계셨더라면 그렇게 섭섭하지 않았을 텐데요. 제가 예수님께 이렇게 따졌지요. “예수님, 보시니 좋으세요? 고통에 무슨 의미가 있다고 그러세요?”하구요. 10년이 훌쩍 지나 이제 알겠어요. 예수님께서 제 유익을 위해 일부러 제게 병을 주신 게 아니라는 것을요. 예수님은 저와 함께 아파하셨고, 저를 걱정하셨겠지요. 이제 예수님의 고통을 제 항의에 대한 충분한 답으로 받아들여요. 늦어서 죄송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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