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론 말씀 (가나다순)/송봉모 신부님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신 이유 / 송봉모 신부님

김레지나 2016. 5. 16. 19:09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신 이유 / 송봉모

 

  성 목요일 저녁, 예수님은 죽음이 임박했음을 아시고 사랑하는 제자들을 “끝까지 사랑하셨다.”(13,1) 예수님의 이 극진한 사랑은 두 가지로 표현되었다. 하나는 요한복음에 나오듯이 제자들의 발을 씻어준 것이요, 다른 하나는 공관복음에 나오듯이 성체성사를 제정하시면서 당신의 살과 피를 제자들에게 주신 것이다.

  성경학자 카르손(D.A.Carson)은 「예수 그리스도의 고별설교와 마지막 기도」에서 예수님과 제자들이 함께 있었던 다락방 분위기를 극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우리도 다락방에 주님과 제자들과 함께 있다고 상상해 보자. 다락방에는 긴장이 흐르고 있었고 어둡고 불확실한 조짐이 감돌고 있었다. 그날 저녁은 처음부터 좋지가 않았다. 중동에서는 손님 접대를 중시한다. 손님이 오면 종들은 손님의 발을 씻겨드린다. 먼지 나는 길을 걸어오면서 발이 더러워졌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날 저녁 예수님과 제자들의 발을 씻어줄 종은 보이지 않았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스승 예수님이 다락방 주인에게 종을 부르지 말라고 했던 것이다.

  모두가 낮은 식탁 주위를 둘러싸고 바닥에 비스듬히 기대앉았다. 그런데 스승 예수님이 식사 도중에 갑자기 일어나시는 것이었다. 주님은 아무 말 없이 겉옷을 벗으셨다. 제자들이 숨을 죽이고 쳐다보는 가운데 예수님은 수건을 허리춤에 두르셨다. 그러고는 물항아리에서 물을 퍼 대야에 담으신 다음 대야를 들고 가장 가까이 있는 제자에게 가셨다. 그리고 무릎을 꿇으신 다음 샌들에 손을 뻗치셨다. 제자는 너무도 놀라 움직일 수도, 무슨 말을 할 수도 없었다. 어느새 샌들을 벗기시고 발을 씻어 수건으로 닦는 것을 망연자실하여 바라볼 뿐이었다. 주님은 계속해서 두 번째, 세 번째 제자에게 가 발을 씻어주셨다. 내내 당혹감으로 가득 찬 침묵만이 흘렀다. 이 침묵을 깬 사람은 시몬 베드로였다. 예수께서 그의 발을 씻기려 하자 베드로는 버티면서 스승이 자기 발을 씻게 할 수 없다고 고집을 부렸다. 베드로는 예수께서 발을 씻어주는 이유를 몰랐기에 인간적 차원에서 반응한 것이다. 우리 역시 그 자리에 있었다면 베드로처럼 하지 않았을까? 우리 중 누가 존경하는 분이 내 발을 씻으려 한다면 아무렇지도 않게 내놓을 수 있겠는가?

  예수께서는 베드로의 말을 듣고 굽혔던 허리를 펴시며 조용히 말씀하셨다. “내가 하는 일을 네가 지금은 알지 못하지만 나중에는 깨닫게 될 것이다.”(13,7) 하지만 예수님의 이 말씀은 효과가 없었다. 베드로가 더 완강하게 반응했기 때문이다. 베드로는 ‘아니다’란 말을 두 개나 쓰면서(Ouj mh;) “제 발은 절대로 씻지 못하십니다.”(13,8) 하고 완강하게 말하였다. 당연한 말이다. 동등한 위치에 있는 사람들끼리도 서로의 발을 씻겨주지 않는데 어떻게 윗사람이 아랫사람의 발을 씻어준단 말인가? 그러한 일은 하인들이나 하는 일이며, 하인 중에서도 가장 낮은 하인들의 일이기 때문이다.

  베드로의 사양은 겸손처럼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의 태도를 겸손하게 보지 않으셨다. 그랬다면 그를 꾸짖었을 리 없다. 겸손은 인위적 행동으로 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겸손의 덕은 인간이 의지적으로 겸손해지려고 노력해서 되는 일이 아니다. 인간이 주님께 시선을 두고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려고 애를 쓰면 쓰는 만큼 겸손해진다. 진정 겸손한 사람은 주님께서 무엇을 맡기시든 두말없이 주님께 자기를 맡겨드리는 사람이다.

  사랑을 받는 사람이 할 수 있는 응답은 다음 세 가지 중 하나다. 하나는 주는 사랑을 감사하게 받고 사랑으로 응답하는 것이요, 다른 하나는 사랑을 받고 나중에 그 사랑을 배신하는 것이다. 마지막은 아예 사랑을 받지 않는 것이다. 유다는 두 번째 응답을 하였고, 베드로는 세 번째 응답을 하였다.

  예수께서는 절대로 안 된다며 거부하는 베드로를 응시하면서 다음처럼 엄하게 말씀하셨다. “내가 너를 씻어주지 않으면 너는 나와 함께 아무런 몫도 나누어 받지 못한다.”(13,8) 두 사람 사이에 긴장감이 흘렀다. 공개적인 대결이었다. 예수님 말씀에서 강조되는 것은 단순히 발을 씻어주는 것이 아니다. 누가 베드로의 발을 씻어주는가이다. 바로 예수님이다. ‘내가 너를 씻어주지 않으면’에서 ‘내가’라는 말이 중요하다. 예수님이 베드로의 발을 씻어주는 것이다. 베드로는 예수님이 발을 씻도록 내어 드려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베드로는 예수님과 같은 몫, 곧 예수님이 주시고자 하는 구원의 몫을 얻지 못하게 된다.

  흔히들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신 이유는 봉사의 모범을 보여주기 위해서라고 한다. 제자들도 예수님처럼 자신을 낮추어 봉사하도록 본을 보여주신 것이라고.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첫째 이유는 다른 데 있다. 이 점은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내가 너를 씻어주지 않으면 너는 나와 함께 아무런 몫도 나누어 받지 못한다.’ 하신 말씀에서 알 수 있다. 유다인들 사이에서 ‘몫’이란 말은 유산, 특별히 약속의 땅을 소유하는 일과 관련해서 사용된다.(민수 18,20; 신명 12,12; 14,27)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언급한 ‘몫’은 구원의 몫을 가리킨다. 그리고 그 몫은 예수님의 속죄적 죽음, 곧 십자가 죽음을 통해서 주어질 것이다.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는 것은 사실 그들의 죄를 씻어줌을 상징한다.

  참고로 신약성경은 어떤 경우든 윤리 없는 신학이나 신학 없는 윤리를 가르치지 않는다. 예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준 행위를 그분의 속죄 죽음의 행위로 보는 것은 신학적 측면이다. 한편 제자들이 예수님을 본받아 서로의 발을 씻어주어야 한다는 행위로 보는 것은 윤리적 측면이다. 그런데 예수님의 발 씻김 행위는 신학적 측면과 윤리적 측면 모두를 담고 있다. 신약성경에서 신학적 측면과 윤리적 측면은 늘 함께한다. 또 한 가지 주목할 것은 예수께서는 ‘네가 너의 발을 씻지 않는다면’이라고 말씀하지 않는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지은 죄를 스스로 제거할 수 없다. 우리의 죄스러움은 예수님이 없애주셔야 한다.

  그런데 예수님이 씻어주시는 부분은 우리 몸에서 가장 더러운 발이다. 예수님이 우리의 발을 씻어주신다는 것은 우리의 가장 더러운 부분, 가장 죄스런 부분을 씻어주신다는 말이다. 예수님이 베드로의 발을 씻을 수 없다면, 베드로의 가장 더러운 죄는 씻김을 받지 못하고, 결과적으로 그는 구원받을 수 없다. 예수님이 무상으로 주시는 구원의 선물을 베드로 스스로 거부하는 것이 된다.

 

초대 교황 베드로의 인품

 

  그러자 시몬 베드로가 예수께 말하였다. “주님, 제 발만 아니라 손과 머리도 씻어주십시오.”(13,9) 베드로는 즉시 후회하면서 발은 물론 온몸을 씻어 달라고 청한다. 절대로 자기 발을 씻을 수 없다는 말이나 온몸을 씻어 달라는 말이나 모두 예수님의 뜻보다는 자신의 뜻을 앞세운 소치이다. 베드로의 자아가 얼마나 강한지를 보게 된다.

  이런 베드로가 초대 교황이었다는 점은 위로가 된다. 만약 베드로가 실수도 않는 완벽한 제자였다면? 그가 완전무결하며 인격적으로 성숙한 사람이었다면? 그가 스승을 한번도 배반하지 않았다면? 아마도 그러한 베드로 위에 세워진 교회는 답답하고 숨이 막히는 교회였을지 모른다. 죄인들의 교회가 아니라 의인들의 교회,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의 교회일지 모른다. 잘못한 이들을 단죄하고 못난 이들을 배척하는 교회였을지 모른다. 다행히도 교회가 베드로라는 반석 위에 세워졌기에 진정 참된 교회이고 싶다면 실패하고 좌절한 이들을 안아주고, 가난하고 상처 받은 이들을 위로해 주어야 하는 숙제를 안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