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론 말씀 (가나다순)/송봉모 신부님

평화, 주님의 특별한 유산

김레지나 2014. 12. 8. 22:48

  모든 축복 가운데 가장 중요한 축복은 평화의 축복이다. 레위기 26장 3­-6절에 보면 축복의 종류가 나열되어 있다. 비의 축복, 땅의 축복, 소출의 축복, 포도 수확의 축복 등. 그러다가 평화의 축복에서 그 절정을 이룬다. 왜 그럴까? 만일 평화의 축복이 없다면 앞의 축복들이 무의미해지기 때문이다. 만일 평화의 축복이 없다면 우리는 하느님께 이렇게 말씀드릴 것이다. “여기 곡식이 있습니다. 여기 포도주가 있습니다. 그런데 평화가 없습니다. 결국 아무것도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늘로 가시면서 우리에게 보내주기로 약속하신 것이 파라클레토스 성령이라면, 유산으로 주신 것은 평화다.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 평화는 예수께서 우리에게 남겨주신 특별한 유산이다.

  예수님의 평화는 신분이나 지위, 지식이나 부유함의 정도와 관계없이 모든 믿는 이에게 주어졌다. 그리고 이 평화는 인생의 모든 자리에 있다. 햇살 찬란한 밝은 곳은 물론이요, 폭풍우가 몰아치는 어두운 곳에도 있다. 근심·좌절·실패·격정이 소용돌이치는 곳에도 있다. 우리가 즐겨 부르는 성가 중에 이런 성가가 있다. ‘우리의 삶에 평화를/이 시대에 평화를/주께서 주시는 평화/아무도 못 뺏으리/무서운 전쟁이 휘몰아쳐도….’ 이 성가처럼 주님이 주시는 평화는 전쟁조차도 앗아갈 수 없다.

 

  미국인 스패포드(Horatio G. Spafford) 씨의 아내와 네 딸이 프랑스로 여행을 떠났다. 그런데 여객선이 침몰하면서 네 딸은 모두 익사하고 아내만 간신히 생명을 구했다. 그는 이 같은 엄청한 비극을 겪고 이런 시를 지었다. ‘내 평생 가는 길 순탄하여/늘 잔잔한 강 같든지/큰 풍파로 무섭고 어렵든지/나의 영혼은 늘 편하다/내 영혼 평안해/내 영혼 내 영혼 평안해.’

  극심한 고통 중에 어떻게 평화를 누릴 수 있을까 반문할 것이다. 성조 요셉을 보자. 형들에게 미움을 받아 이집트에 노예로 팔렸던 요셉은 그 와중에도 늘 평화를 누리고 살았다. 무엇이 그를 평화롭게 만들었는가? 믿음이다.

 

  우리를 둘러싼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지속적으로 평화를 누릴 수 있는 길은 하나밖에 없다. 그것은 바로 주님이 언제 어디서나 나와 함께 계시고 힘을 주신다는 진리를 믿는 것이다. 만사를 주님께서 주관하신다는 것을 믿는 정도에 따라 우리가 누리는 평화의 깊이도 결정된다. 만사를 주님이 돌보신다는 믿음이 깊으면 깊을수록 불안이 사라진다. 바오로 사도는 감옥에 갇혀 있을 때 필리피 공동체에 다음과 같은 편지를 썼다. “나는 어떠한 처지에서도 만족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나는 비천하게 살 줄도 알고 풍족하게 살 줄도 압니다. 배부르거나 배고프거나 넉넉하거나 모자라거나 그 어떠한 경우에도 잘 지내는 비결을 알고 있습니다. 나에게 힘을 주시는 분 안에서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필리 4,11ㄴ-13) 바오로 사도가 힘겨운 상황 속에서도 평화롭게 살 수 있었던 비결은 그에게 힘을 주시는 주님을 통해서였다.

 

  누가 우리 인생의 주관자인가? 누가 우리 인생을 다스리고 있는가? 이 질문은 중요하다. 만일 나 자신이 인생의 주관자라면 우리는 평안할 수 없다. 한순간에 모든 것이 무너질 수 있기 때문이다. 만일 다른 사람이 인생의 주관자라면 우리는 그에게 종속되어 살아갈 것이다. 설령 그 사람이 순수한 마음으로 우리 인생에 개입한다 하여도 인간이란 너무나 약하고 무상한 존재이기에 어느 날 하루아침에 모든 관계가 무너질 것이다. 하지만 하느님께서 우리 삶을 주관하시면 우리는 평안할 수 있다.

 

 

참된 평화는 주님한테서

 

  많은 사람이 시편 23편을 좋아할 것이다. “주님은 나의 목자, 나는 아쉬울 것 없어라.” 이 말씀을 뒤집어 생각해 보면 주님이 아닌 다른 어떤 것을 우리의 목자로 삼는다면 우리는 아쉬움과 불안 속에 살 것이라는 말이 아닐까? 나를 둘러싼 환경이 아무리 좋다 해도, 내가 원하는 대로 환경이 형성된다 해도 내가 주님을 의지하지 않는다면 참된 평화는 없다. 한편 주님을 목자로 모시는 사람은 ‘어둠의 골짜기’를 간다 해도 주님이 계시기에 평화를 누린다.

 

  요즘 절에 가면 제법 많은 가톨릭 신자를 만난다. 단순히 관광이 아니라 절에서 마련한 수련회에 참석하기 위해 온 것이다. 적막한 산사에 들어서면 마음이 차분해지고, 청아하게 울리는 풍경소리를 듣노라면 모든 근심거리가 사라진다. 게다가 맑은 산의 정기를 받으며 참선을 하다 보면 마음이 평화로 가득 찬다. 왜 안 그렇겠는가? 일터에서, 집에서, 인간관계에서 해결되지 않은 온갖 고민거리를 안고 살다가 산속에 들어와 있으니 잠깐이나마 해방감과 평화로움을 맛보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나 그 평화가 과연 며칠이나 지속될 수 있을까? 얼마 지나지 않아 산중의 적막함 속에서 해결되지 않은 문제와 걱정거리가 꿈틀거리며 올라와 마음을 점령할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주님이 아닌 다른 어떤 것에 의지해서 참된 평화를 얻을 수 없다는 것이다. 주님이 우리에게 특별한 유산으로 평화를 주었음을 믿고 그 평화를 지금 이 순간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평화에 대한 오해 두 가지

 

  첫 번째 오해. 평화와 안전은 다르다. 평화는 주님의 입장을 추구할 때 주어지는 것이라면 안전은 우리의 입장만을 추구할 때 주어지는 것이다. 우리가 주님의 뜻을 찾는다면 안전하지 않더라도 평화로울 수 있다. 예수회 선교사 취제크(Wlalter. J. Ciszk) 신부는 러시아 강제수용소에 23년간 수용되어 있었다. 내일의 운명을 알 수 없는 안전하지 못한 삶의 자리에 있었지만 마음만은 주님 뜻 안에서 평화로울 수 있었다.

 

  두 번째 오해. 우리는 흔히 누구 때문에, 무엇 때문에 평화를 잃었다고 불평한다.

  ‘만일 그가 그렇게 했더라면…’, ‘만일 그 일이 그렇게 되었더라면….’ 하면서 평화를 잃게 된 책임을 밖으로 돌린다. 하지만 평화를 잃어버리게 한 것은 나 자신이지 다른 어떤 무엇도 아니다. 그 누구도 그 무엇도 우리에게 주어진 주님의 유산인 평화를 앗아갈 수 없다. 만일 우리가 평화를 잃어버렸다면 단 한 가지, 우리 스스로 평화를 포기했기 때문이다.

 

  「끝나지 않은 길」이란 책으로 널리 알려진 스콧 펙 박사는 이렇게 말한다. “삶이란 어려운 것이다. 이것이 위대한 까닭은 우리가 이 진리를 이해하면 삶을 넘어설 수 있기 때문이다. 삶이 어려운 것임을 깨닫고, 삶의 어려움을 이해하면서 받아들인다면 그 순간에 삶이란 더 이상 어려운 것이 아니다. 삶이 어렵다는 것이 인정되었기에, 삶이 어렵다는 사실은 더 이상 중요한 문제가 되지 않는다. 사람들은 삶이 어려운 것이라는 이 진리를 이해하지 못한다. 대신 끊임없이 삶에 대하여 신음한다. 자신의 문제와 짐과 삶의 어려움을 고통스러워한다. 마치 삶이란 쉬워야만 하는데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며 발버둥치며 신음하는 것이다. 그들의 신음소리 뒤에는 비현실적인 믿음, 곧 자신에게 어려움이 있어서는 안 되는데 부당하게 주어졌다는 믿음이 있다. 삶이란 문제의 연속이다. 우리는 삶의 문제 앞에서 신음하기를 원하는가, 아니면 해결되기를 원하는가?”

 

  만일 삶의 문제 앞에서 신음하기를 그치고 그 문제를 해결하고 싶다면 주님께서 우리에게 특별한 유산, 평화를 주셨음을 믿고 그 평화를 순간순간 살아가야 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