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론 말씀 (가나다순)/전삼용 신부님

☆<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깨어있음과 자아

김레지나 2015. 9. 21. 20:00

2015년 2월 18일 설 미사

 

<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

 

복음: 루카 12,35-40

 

 

깨어있음과 자아

 

 

자아에 대한 강론에 이어 자아에 대해 더 알아보겠습니다.

자아는 자신을 불만족스럽게 만들어서 행복하지 못하게 만든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밭에 묻힌 보물처럼 결국 행복은 자신 안에 있습니다.

 

자아는 끊임없이 외적인 것들에 신경을 쓰게 만들어서 자신 안에 있는 보물을

발견하지 못하게 만듭니다.

 

 

페르샤 사람인 알리 하베트는 맑은 강이 흐르고 높은 산이 뒤로 있는

물 좋고 공기 좋은 아주 넓은 농토를 경영하는 대농사꾼이었고 큰 부자였습니다.

 

그런데 그에게 어느 날 수도사 한 사람이 찾아와서 이 얘기, 저 얘기를 하다가

진기한 보석이 있는데, 만일 그 보석의 광산을 찾게 되는 사람은 부자가 되는 것은 물론이지만

그 부로 인하여 왕도 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답니다.

그 보석은 햇빛에 응고된 것으로 신기하기까지 한 다이아몬드에 대한 얘기였습니다.

 

그 얘기를 들은 알리 하베트는 그날 밤 잠을 자지 못했습니다.

자기가 그 광산을 찾아내어 대부호가 되는 공상 때문이었습니다.

 

날이 밝기를 기다린 알리 하베트는 수도사에게 쫓아가서 어디를 가면 그런 광산을

찾을 수 있는가를 물었습니다.

 

그러자 수도사는 “무엇 하시게요?” 하고 물었고 알리는 “대 부호가 되고 싶다”고 했답니다.

한참 있다가 수도사는 어디인지는 모르지만, 높은 산이 있고, 맑은 물이 흐르고

하얀 모래가 있는 곳이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알리 하베트는 가산을 전부 정리하여 다이아몬드 광산을 찾아 떠났습니다.

그는 중동을 비롯해서 전 유럽, 그리고 아프리카 북부를 돌아다녔으나 광산은 찾지 못했고,

결국은 거지가 되어 스페인 어느 해변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말았다고 합니다.

 

알리 하베트의 농장을 샀던 농부는 어느 날 시냇물에서 몸을 씻다가

유난히 반짝이는 돌 하나를 주어다가 방 선반위에 올려놓았습니다.

그리고 농부는 농사일을 부지런히 하는데 정신을 쏟아서 하느라고

돌에 대한 생각은 잊어버렸는데,

또 얼마가 지난 후에 수도사 왔다가 방에 들어서자 큰 소리로

“알리가 돌아왔군요.”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농부가 오지 않았다고 하면서 왜 그렇게 말하는가 묻자

그러면 저 선반위에 있는 돌은 누가 가져왔느냐고 물었답니다.

농부가 대답하기를 얼마 전에 자기가 시냇물에서 몸을 씻다가

하도 신기해서 주어왔다고 말했답니다.

 

수도사는 빨리 그리로 가보자고 해서 뛰어가 그 시냇가에서 손으로 돌을 조금 헤집고 보니

바로 다이아몬드가 묻혀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로 세계적으로 유명한 인더스 골곤다 다이아몬드 광산이 발견된 것이며,

그 다이아몬드로 영국의 왕관과 러시아 왕관이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다이아몬드는 바로 내 안에 있습니다.

내 안을 바라보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 자아입니다.

이렇게 자아는 참 나를 세상 것들에 집착하게 만드는데

그래서 내 안에 일어나는 현상이 ‘정서불안’입니다.

 

계절이나 날씨를 타는 분들이 계시지요?

비오면 기분이 우울해지거나 가을이 오면 허전해 지는 분들도 계시지요?

외로울 때도 있고 작은 것에 짜증과 화가 날 때도 있지요?

 

그러나 가만히 보십시오.

모든 사람이 다 비 온다고 기분 나쁘거나 가을이 된다고 쓸쓸해지지 않습니다.

이런 감정들은 다 자아가 만들어내는 감정입니다.

 

어떤 사람은 아주 작은 일에도 누구를 미워하여 용서 못하게 되지만,

어떤 사람은 자신의 일가족을 모두 살해한 사람도 용서하고 자신의 자녀로 삼겠다고 합니다.

 

누구는 자아를 내려놓을 줄 알고,

누구는 자아가 일으키는 감정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뿐입니다.

 

이렇게 자아를 벗어나지 못한 사람들은 자신이 자신의 뜻대로 안 됩니다.

자아에게 자신을 빼앗긴 것입니다.

일찍 일어나는 것도, 소식을 하는 것도, 화를 참는 것도, 미워하지 않는 것도 안 됩니다.

매우 기뻤다가도 금방 우울해지기도 합니다.

 

감정에 사로잡혀 어떤 때는 누가 매우 사랑스러웠다가 금방 미워 죽을 지경이 됩니다.

자기를 빼앗긴 것입니다.

 

잠을 잘 때는 자기는 자기 뜻대로 안 됩니다.

몸이 어떻게 뒤척이는지, 꿈을 어떻게 만들어내는지도 모릅니다.

그렇습니다.

자신의 뜻대로 자신을 움직일 수 없는 자아에 사로잡힌 상태가 바로 잠을 자는 것입니다.

지난 주 금요일에 저의 신학교 입학 동창인 유 안드레아 신부가 서품을 받고

첫 미사를 저희 성당으로 왔었습니다.

신학교에 입학한지 17년 만인 것입니다.

 

이제 잠비아로 선교를 떠나게 되는데,

강론 때 사제가 되기까지의 과정을 감명 깊게 설명해 주었습니다.

 

안드레아 신부가 부제품 받기 전, 당시 김화태 제르바시오, 현 수원교구 평택대리구장님이

부제품 피정지도를 하고 계셨습니다.

김화태 신부님은 공교롭게도 안드레아 신부의 추천신부셨습니다.

 

당시 안드레아 신부는 심적으로 성소에 대해 갈등을 하고 있었습니다.

워낙 여러 가지 재능이 뛰어난지라 밖을 바라보고 있었고,

결국 부제품 3일 전 피중 중,

아버지 신부님께 서품을 못 받겠다고 말씀드려 신학교를 나가게 되었습니다.

 

취직준비를 하고 있을 때 아버지 신부님이 찾아오시더니

당신이 기도해 보니 안드레아는 반드시 신부님이 될 것이라고 하느님이 말씀하셨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때는 믿지 않았지만 1년 뒤에는 프란치스코 전교봉사 수도원에 입회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수도회는 자신과 같이 상처가 많은 사람들을 다 받아주고 있었고,

그러니 상처받은 사람들이 함께 모여 사는 것이 지옥과 같았다고 합니다.

 

다시 종신서원 3일 전, 피정 중에 수도원을 나오기로 마음을 먹고 짐을 다 싸놓고

성당에 가서 마지막으로 인사를 드리기 위해 밤 12시에 혼자 앉아있었습니다.

 

3시간 정도 지난 뒤에 예수님의 음성이 들리더랍니다.

 

“나는 너희와 함께 있기 위해 내 손과 발이 뚫려 나무에 박혀있는데,

너는 나를 떠나려고만 하느냐?

보아라, 나는 우도뿐만 아니라 좌도에게도 내 팔을 벌렸다.

너는 왜 쉬운 쪽만 찾느냐?”

 

그리고는 자신이 너무 교만했다는 것에 눈물을 흘리고, 다시 짐을 풀고 종신서원을 하고

곧 이어 서품까지 받게 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내가 밖에 있으면 안으로 들어가고 싶고,

안으로 들어가면 다시 밖으로 나가고 싶어 하는 것이 바로 자아의 습성입니다.

 

자아는 우리가 행복한 것을 원치 않습니다.

그러면 사람이 자신을 바라봐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내가 이런 감정에 휩쓸려 내가 하고 싶은 대로 내 자신을 조정할 수 없다는 나는

자아가 일으키는 감정의 노예가 되어있는 것입니다.

 

예전, 혼자 영화관 가서 ‘7번방의 선물’이란 영화를 보려고 앉았는데

옆에서 커다란 팝콘 바구니를 안고 계속 부스럭거리며 집중을 방해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이 자존심을 상하더라도 저는 옆의 빈자리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왜냐하면 영화에 몰입할 수 없다면 방해하는 사람을 떠나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 사람의 자존심을 지켜주기 위해서 비싼 돈 내고 영화 보러 들어온 것이 아니라,

내 행복을 위해서 들어온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자아는 우리가 몰입하여 행복하지 못하도록 끊임없이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려 합니다.

유재선 신부와 같은 경우는 사제가 되려 할 때는 밖이 좋아 보이고,

또 밖에 있을 때는 안이 좋아 보여 그리스도를 온전한 마음으로 바라보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

바로 자아였고, 본인은 교만이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오늘은 설입니다.

조상님들을 생각하고 우리의 죽음에 대해서도 생각하는 날입니다.

 

우리가 죽었을 때, 오늘 복음에서처럼 살아있었을 때 항상 깨어 있어서

예수님이 허리에 띠를 매고 우리를 식탁에 앉힌 다음 우리에게 시중을 들어줄 수도 있고,

혹은 깨어있지 못해서 그 반대가 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주인으로 항상 우리 마음 안에 계셨습니다.

풍랑 속에서 베드로와 제자들은 깨어있지 못해서 배 안에서 주무시는 예수님을

기억해내지 못했습니다.

교만한 자아는 그런 것입니다.

 

깨어있다는 말은 내 안의 주인을 깨우는 일입니다.

스스로의 힘으로는 자아를 이길 수 없고,

그래서 절대 행복할 수 없음을 깨닫고 우리의 참 주인이신 그리스도께 몰입하는 것입니다.

 

한 사람이 참 행복의 길을 찾고 싶어서 세상에서 제일 현명하기도하고

그만큼 재산도 많은 현자를 찾아갔습니다.

오랜 여행 끝에 그 집에 당도하였습니다.

 

산 정상에 있는 그 집은 지금까지 한 번도 보지 못한 화려한 모습의 궁궐이었습니다.

그 안으로 들어가니 현자를 만나 가르침을 받고자 온 수 많은 사람들이 대기하고 있었습니다.

오랜 시간을 기다린 끝에 현자를 만날 수 있었습니다.

 

“어떻게 저를 찾아오셨습니까?”

“예, 저는 행복해지는 방법을 알고 싶습니다.”

 

“그러나 우선 저의 집을 좀 구경해 보십시오.

집 안에는 세계의 귀한 예술품들이 모아져 있고 정원은

세상 어디서도 보지 못한 식물들과 꽃들을 보실 수 있으실 것입니다.

 

그러나 제가 기름이 담긴 숟가락을 드릴 테니 제 집을 구경하시면서

이 기름이 든 숟가락을 들고 다니십시오.

 

만약 집을 다 구경한 뒤에도 숟가락에 기름이 그대로 남아있다면

그 때서야 행복의 비밀을 알려드리겠습니다.

 

어쨌거나 저는 다른 손님들을 만나야 하니

그 동안 집을 다 돌아보며 구경하도록 하십시오.”

 

그 사람은 기름이 담긴 숟가락을 조심스럽게 들고 집을 돌아다니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주위에 있는 예술품들과 볼거리들에 너무 정신이 팔려

어느 순간에 숟가락에 있던 기름이 바닥으로 흘러내리고 말았습니다.

 

그 이후로는 걱정에 싸여 예술품이 예술품으로 보이지 않고 궁궐의 화려함도 정원의 아름다움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몇 시간 후에 집을 다 둘러본 후 현자를 다시 만났습니다.

 

“집 구경을 즐겁게 하셨습니까?”

“아니요, 기름이 흘러내려, 그 걱정에 아름다운 것들을 보면서도 즐겁지 못했습니다.”

 

“그러면 다시 한 번 기회를 드릴 테니 이번엔 잘 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 사람은 기뻐서 이번엔 숟가락에서 정신을 떼지 않으면서도

주위의 것들을 잘 감상할 수 있었습니다.

끝까지 집을 다 돈 후에도 숟가락에는 기름이 그대로 들어 있었습니다.

현자는 손님을 보며 말했습니다.

 

“이제, 행복의 길을 말씀드리지요.

행복의 방법은, 손님께서 하신 것처럼, 숟가락의 기름을 떨어뜨리지 않고

주위의 것들을 즐길 수 있는 기술입니다.”

 

그렇습니다. 행복이란 주위의 것들에 휘둘려

내 안에 계신 그 분께 대한 몰입을 잃게 될 때 깨지게 됩니다.

행복의 기술이란 세상 것들에 휘둘리지 않고 내 안의 그분께 집중할 수 있는 능력입니다.

 

누군가 나를 기억해주고 있었다면 얼마나 기분이 좋습니까?

마찬가지로 당신을 기억해주었기 때문에 당신께서 나중에 우리에게

식탁에 앉는 영광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분께 집중할 때야만 마음의 평정을 찾게 됩니다.

내 배의 참 주인이신 그분께서 내 안에 계심을 항상 잊지 말고 살아갑시다.

이것이 깨어있음입니다.

 

새 해 복 많이 받으세요~ ^ ^

전삼용 요셉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