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9일 연중 10주간 화요일
소금과 등불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자기를 내어 줌으로서 자신의 역할을 다하는 것입니다. 소금이 물에 자기를 녹이기를 거부한다면 짠 맛을 낼 수 없고 등불이 자신을 태우지 않는다면 빛을 비출 수 없습니다.
교회가 존재하는 이유는 세상에 빛과 소금이 되라는 소명에 의해서입니다. 그래서 교회가 자신의 안위와 스스로 만들어 놓은 자신의 것들을 지키는데만 관심과 노력을 기울인다면 짠맛을 잃은 소금이요 빛을 가리는 등불이 되어버립니다.
교회의 빛은 우리 스스로의 영광을 위해 주어진 것이 아님을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등불을 함지 속에 넣어 두어서는 안되며 등경 위에 놓아 모든 사람을 비추어야 합니다.
나에게 맡겨 주신 모든 권한과 소유물들의 목적을 잊어버리고 스스로의 만족과 안위에만 머물러 있음이 등불을 덮어두는 함지와 같습니다. 자기 자신의 욕심과 집착, 이기심, 다른 사람에게 다가가지 못하게 하는 모든 거짓된 자아가 함지가 되어 우리에게 주신 빛을 우리끼리만 즐기고 간직하는 행위로 덮어버리는 것입니다.
교회 스스로 만들어 놓은 외형과 갖가지 틀에 묶일 때 그것을 지키고 유지하기 위해 힘을 허비하고 신앙인들에게 무거운 짐을 맡기게 됩니다. 소금이 존재하는 이유는 소금의 모습을 유지하고 간지하기 위함이 아니라 자신을 녹이는데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 앞을 비추는 우리의 빛이 "너희의 착한 행실"이라고 하십니다. 착한 행실이란 생활 속에 파고들어 현실화된 신앙입니다. 잘 조직화된 제도나 세련되게 운영되는 본당 단체 활동을 유지하는데 이미 지치고 허덕이는 신앙을 하고 있지는 않은가 돌아봅니다.
교회가 교회 답게 존재하는 것은 우리의 착한 행실을 통해서입니다. 착한 행실은 뜬 구름과 같은 이론이나 지식이 아니라 감각으로 느낄 수 있는 진리이며 생활화된 신앙입니다. "교회는 야전 병원이다"는 교황의 말씀처럼 이 땅에 발을 딛고 살아가는 이웃들의 피고름을 감싸 주는 것이며 눈물을 닦아 주는 것입니다.
교회와 신앙인들의 착한 행실이 사람들을 비추는 빛으로 비추게 됩니다. 우리의 빛을 세상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기 위해서 비추어서는 안됩니다. 착한 행실의 목적이 자신의 관심과 영광이어서는 안됩니다. 우리의 착한 행실은 오직 하느님께서 찬양받으시도록 드려져야 합니다.
소금이 자신을 녹이는 죽음으로 짠맛을 냅니다. 등불이 자신을 태우는 죽음으로 빛을 비춥니다. 나를 내어주는 나눔이 욕망의 죽음이요, 너를 위하는 사랑이 자아의 죽음이지만 그 죽음은 너와 나를 함께 살리는 생명이 되어 우리에게 돌아오는 것입니다.
우리가 간직하고 있는 모든 빛은 빛의 원천이신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것입니다. 그래서 스스로 빛나는 존재가 되기 위해 '자기 것'으로 소유하며 지키고 있던 것들을 내려 놓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그것이 자신을 녹이는 삶이며 우리가 짠맛을 간직하는 소금이 되는 순간입니다.
그래서 교회와 우리의 신앙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짠맛이 필요한 죽음과 부패가 있는 곳에 자신을 녹일 수 있는 믿음의 용기가 필요합니다. 우리에게 주신 하느님의 빛이 세상을 비출 수 있도록 교회가 자신의 욕망의 불길이 아닌 하느님 사랑의 불길에 자신을 태울 수 있기를 기도하며 오늘을 살아갑시다.
강요셉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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