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장. 그리스도의 고통에 참여하는 사람들 (P. 34)
(전략)
구원자께서는 인간을 대신하여 그리고 인간을 위하여 고통을 받으셨습니다. 인간 누구나가 구원 사업에서 자신의 몫을 가지고 있습니다. 또한각자 모두 구원 사엄이 이루어지게 한 그 고통에 참여하도록 부르심을 받고 있습니다. 모든 인간 고통마저 구원되게 한 그 고통에 참여하도록 부르심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고통을 통하여 구원 사업을 완수하신 그리스도께서는 또한 인간 고통을 구원의 차원에까지 들어 높이셨습니다. 이리하여 인간이 저마다 자기 자신의 고통을 겪으면서 또한 그리스도의 구속적 고통에 참여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20.
(전략)
바오로 성인은 갖가기 고통, 그리고 특히 초대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를 위하여" 함께 나누게 된 고통들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고통들로 말미암아 그 편지의 수신인들은 구원자의 고통과 죽음으로 이루어진 구원 사업에 참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십자가와 죽음의 웅변은 부활의 웅변으로 완성됩니다. 부활에서 인간은 완전히 새로운 빛을 발견하게 되며, 이 빛의 도움으로 인간은 천대와 의심과 절망과 박해의 캄캄한 어둠 속을 뚫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또한 사도는 고린투 신자들에게 보낸 둘째 서간에서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치듯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내리는 위로도 우리에게 넘칩니다."라고 쓴 것입니다.
(중략)
인간은 신앙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고통을 발견할 때, 그 속에서 자신의 고통도 발견하게 됩니다. 곧 신앙을 통하여 고통을 재발견하게 되어, 그 고통이 새로운 내용과 새로운 의미를 띠고 풍부해지는 것입니다.
바로 이 점을 발견했기에 바오로 성인은 갈라티아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에서 특히 힘차게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라고 썼습니다. 이 말씀의 저자는 신앙을 통하여 그리스도를 십자가에까지 이끌어간 저 사랑을 알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고통 받고 죽으시면서까지 이토록 우리를 사랑하셨기에, 그분은 이 고통과 죽음과 더불어 당신이 이토록 사랑하신 그 사람 안에 살아 계십니다. 또 그리스도께서 그 사람 안에 - 바오로가 신앙을 통하여 이것을 의식하면서 그분의 사랑에 사랑으로 응답하고 있는 만큼 - 살아계시기에, 그분은 또한 십자가를 통하여 그 사람에게(바오로에게) 특별한 방식으로 일치되십니다. 이 일치로 말미암아 바오로는 같은 갈라티아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에서 또 다른, 이에 못지 않은 힘찬 말씀을 써보냈습니다. "그러나 나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어떠한 것도 자랑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내 쪽에서 보면 세상이 십자가에 못 박혔고, 세상 쪽에서 보면 내가 십자가에 못박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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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그뿐 아니라, 그리스도의 고통에 참여하는 사람으로서 사도의 체험은 훨씬 더 멀리까지 나아가고 있습니다. 콜로새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에서 우리는 고통과 관련된 영적 여정의 마지막 단계를 이루느 말씀을 읽게 됩니다. "이제 나는 여러분을 위하여 고난을 겪으며 기뻐합니다. 그리스도의 환난에서 모자라 부분을 내가 이렇게 그분의 몸인 교회를 위하여 내 육신으로 채우고 있습니다." 그리고 또 다른 서간에서 바오로 사도는 수신인들에게 "여러분의 몸이 그리스도의 지체라는 것을 모릅니까?"라고 묻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파스카 신비에서 교회의 공동체 안에서 인간과 결합하기 시작하셨습니다. 바로 이 파스카의 신비에서 교회의 신비가 표현됩니다. 곧, 그리스도와 같은 모습을 이루어 주는 세례성사의 행위에서 이미, 또 그리스도의 희생 제사를 통하여 - 성사적으로는 성체성사를 통하여 - 교회는 끊임없이 영적으로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건설되고 있습니다. 이 몸(교회) 안에서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사람과 결합되기를 바라시며, 특별히 고통 받는 사람들과 결합되십니다. 위에서 인용한 콜로새서 말씀은 이 결합의 예외적인 성격을 증언해주고 있습니다. 무릇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결합하여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은 - 바오로 사도가 그리스도와 결합하여 자기 "고난"을 짊어지고 있는 것과 똑같이 - 그리스도께서 이미 지적하신 그런 힘을 받고 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고통으로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채우고" 있기도 한 것입니다. 이렇게 복음적으로 내다보고 있는 눈이 특히 고통의 창조적 성격에 관한 진리의 절정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고통은 세상을 구원하는 선을 창조하였습니다. 이 선은 그 자체로는 무량하며 무한합니다. 아무도 거기에 무엇을 더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신비 안에서 당신 자신의 구원의 고통을 어떤 의미에서 모든 인간의 고통에 열어 놓으셨습니다. 인간이 그리스도의 고통에 참여하는 사람이 되고 있는 한 - 세상의 어디에서든 또 역사의 어느 때든- 그만큼 그는 그리스도께서 세상 구원을 이루신 그 고통을 자기 나름으로 완성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구원 사업이 완전하기 못하다는 뜻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은 다만, 더할 나위 없는 사랑으로 이루어진 구원 사업이 인간의 고통 안에서 표현되고 있는 모든 사랑에 언제나 개방된 상태로 있다는 그런 뜻일 따름입니다. 이미 완전히 이루어진 구원사업이 이 사랑의 차원에서는 어떤 의미로 계속해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구원 사업을 바로 최대한에 이르기까지 완전히 이루셨지만, 그것이 종결되도록 하시지는 않았습니다. 이 구원의 고통으로 세상의 구원 사업이 이루어진 것이며, 이 구원의 고통 속에서 그리스도께서는 처음부터 모든 인간 고통 하나하나에 당신 자신을 열어 놓으셨고 끊임없이 그렇게 하고 계십니다. 그렇습니다. 그래서 이 고통이 끊임없이 완성될 필요가 있다는 것이 그리스도의 구원의 고통의 본질에 속하는 것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중략)
이 차원에서 모든 인간 고통이 그리스도와의 사랑에 결합에 근거하여 그리스도의 고통을 완성하고 있습니다. 마치 교회가 그리스도의 구원 사업을 완성하고 있는 것과 똑같이 그 고통을 완성하고 있습니다.
(중략)
교회야말로 구원 사업의 무한한 원천에 끊임없이 의존하면서 그것을 인류의 삶 속에 끌어들이고 있으며, 바로 이 차원에서 그리스도의 고통이 끊임없이 인간의 고통으로 완성될 수 있습니다. 이것이 교회의 신적이며 인간적인 본성의 절정을 이루고 있습니다. 고통은 교회의 이러한 본성이 지니고 있는 특징에 어느 정도 참여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 때문에 고통이 교회의 눈에 특별한 가치를 지니고 있기도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고통은 어떤 좋은 것이며, 그래서 교회는 구원 사업에 대한 깊은 신앙을 다하여 고통 앞에 허리 굽혀 경의를 표하는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형언할 수 없는 신비를 자기 품안에 안고 있는 그런 깊은 신앙을 다하여 그 앞에 허리 굽혀 경의를 표하는 것입니다.
교홍 요한 바오로 2세의 교서 <구원에 이르는 고통>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출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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