밭에 묻힌 보물/책에서 옮긴 글

나의 기도는 이러하게 하소서. / 한비야

김레지나 2015. 5. 5. 20:35

나의 기도는 이러하게 하소서

 

 '정말 너무해. 이제는 내 기도를 들어주실 때가 되지 않았어?'

 지난 늦가을 어느 저녁, 갑자기 추워진 날씨에 잔뜩 움츠리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뜬금없이 하느님께 서운한 마음이 들었다.

 '이럴 때 남자 친구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따뜻한 문자라도 주고받으면 이렇게까지 심신이 춥지는 않을 텐데.... 다른 기도는 잘만 들어주시면서 남자 친구 보내달라는 기도는 왜 이렇게 아무 말씀 없으신 거야?'

 그날 밤, 저녁기도를 하면서 본격적으로 불평을 늘어놓았다.

 "하느님, 남자 친구를 보내달라는 제 기도는 듣고는 계신 거죠? 제가 너무 무리한 기도를 하고 있나요? 아니라면 지난 10년간 이제나 저제나 기다리는 제게 이렇게 묵묵부답일 수가 있으세요? 설마 제가 평생 독신으로 살기를 원하시는 건 아니겠죠? 혹시 그런 거면 절 아예 수도 공동체로 보내주시던가요."

  한참 동안 속마음을 마구 쏟아내고 있는데 갑자기 마음 깊은 곳에서 이런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것도 영어로)

 "Do you still love me?"(너는 여전히 나를 사랑하느냐?)

 아, 하느님은 내가 간절히 원하는 것을 주지 않아도 여전히 당신을 사랑하느냐고 물으신 거였다. 난 한순간 태도를 확 바꿔 단호하고도 큰 소리를 대답했다.

  "Of course, I do, Lord."(물론이죠, 하느님)

  진심이었다. 내가 외로움에 몸부림치는 걸 보고 싶어 일부러 그러시는 건 절대로 아닐 텐데, 하느님의 계획이 뭔지도 모르면서 이렇게 생떼를 쓰는 내가 머쓱해졌다. 그래서 불평 기도를 이렇게 마무리했다.

  "당신 계획은 당신의 때에 당신 방법으로 보여주신다는 것, 잘 알고 있습니다. 앞으로 다시는 남자 친구 타령을 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제게 주님의 때를 기다릴 수 있는 인내와 주님의 방법을 알아볼 수 있는 지혜를 주시옵소서."

 

  그날 잠자리에 들면서 곰곰이 생각해보니 그동안 내 기도가 한심하기 짝이 없었다. 갓난아이 보채듯 이걸 달라, 저걸 달라고만 하는 데 어찌 온전한 기도라고 할 수 있을까? 기도는 한 마디로 하느님과 나누는 대화 아닌가? 이 단순 명료한 사실을 자주 잊어버리고 내 말만 퍼붓거나 부탁만 열심히 하기 일쑤다. 주님이 내게 하시려는 말씀에 귀 기울이는 시간도 여유도 그럴 의사도 없으니 무슨 대화가 되겠는가. 잘 따져보면 하느님은 기도한 것은 물론, 기도하지 않은 것까지 덤으로 주시는 경우가 많다. 내 책 <지도 밖으로 행군하라>가 그랬다. 나는 책을 쓸 때마다 많이 팔리게 해달라는 기도는 한 적이 없다. 대신 지금 쓰는 책이 세상에 나가 선한 영향력을 끼치게 해달라는 기도는 열심히 한다.

  이 책 역시 이를 통해 독자들이 세상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에 좀 더 관심을 가지고 그들의 사랑이 지도 밖 사람들에게까지 퍼져 나갈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했는데, 하느님은 내 기도를 고스란히 들어주셨을 뿐 아니라 덤으로 100만 부 판매라는 보너스까지 주셨다.

  이런 걸 보면 우리의 때와는 전혀 다르게 하느님은 당신의 때와 방법으로 우리 기도를 들어주시는 게 확실하다. 아니, 우리 기도를 하나도 안 들어주시는 것같지만 나중에 돌아보면 결국은 원하는 것을 다 주시는 경우도 허다하다. <어느 패전 병사의 기도>란 시가 떠오른다. 전문은 이렇다.

 

어느 패전 병사의 기도 (작자 미상)

 

무엇이나 얻을 수 있는 강한 체력을 달라고

하느님께 간구했으니

나는 약한 몸으로 태어나

겸손히 복종하는 것을 배웠습니다.

 

큰 일을 하기 위하여

건강을 구했더니

도리어 몸에 병을 얻어

좋은 일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큰 부자가 되어

행복하기를 간구했으니

나는 가난한 자가 됨으로

오히려 지혜를 배웠습니다.

 

한번 세도를 부려

만인의 찬사를 받기 원했으나

나는 세력 없는 자가 되어

하느님을 의지하게 되었습니다.

 

내가 바라고 원하는 것은

하나도 이루어지지 않았으나

은연중에 나는 모든 것을 얻었나니

내가 구하지 않은 기도까지 이루어졌습니다.

 

나는 부족하되

만인 중에서

가장 풍족한 은혜를 입었습니다.

 

  하느님의 방법으로 기도에 응답해주셨음을 고백하고 깊이 감사하는 이 기도가 참으로 아름답다. 간절한 부탁도 솔직한 고백도 중요하지만 기도의 핵심은 뭐니뭐니 해도 주님께 감사한 마음을 고하는 일인 것 같다.

  비록 '남친 타령'으로 스타일을 구겼지만 내 기도 역시 사랑과 감사가 주인공이다. 쑥쓰럽긴 하지만 "기도는 어떻게 하는 거예요?"라고 묻는 새 신자들에게 도움이 될까 해서 지난 수십 년간 해온 내 기도 방법을 살짝 공개해볼까 한다.

  내 기도는 짧든 길든 네 단계로 나뉜다. 첫 단계는 사랑 고백, 내 기도는 언제나 이렇게 시작한다. "하느님, 당신을 사랑합니다. 내 마음을 모두 드리니 받아주세요."

  이 짦지만 강렬한 사랑 고백을 할 때마다 가슴이 벅차다. 그다음은 이래서 저래서 고맙습니다라는 감사 기도 단계, 그 다음은 매우 자세하고도 구체적인 부탁 기도의 단계다. 마지막은 하느님의 때와 방법을 기다리는 단계로 내 기도 마무리는 늘 이렇다.

 '주님께 온전히 의탁하오니 계획하신 대로 하시옵소서. 순종하겠나이다.' 

 

                         한비야님의 <1그램의 용기>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