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 앞에 서서
<엘리야와 함께 한 40일>중에서 p.34-40
......
뭔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돌이켜보는 게 가끔 도움이 됩니다. 그러나 '어쩌다 그렇게 되었지?', '왜 그럴까?', 또는 '정확히 무슨 일이 벌어진 거지?' 이런 물음에 깊이 빠지다보면 그 자체를 들여다보는 것을 잊게 됩니다. 그러다보면 원인 규명과 과거 극복이 현재보다 더 중요해집니다. 요란하게 돌이켜보다 보면 중요한 건 '오늘'을 살아가는 문제임을 잊습니다. 과거를 돌아보는 건, 나와 '나의 오늘'을 이해하고 이에 합당하게 꾸려나가는 데 도움이 될 때만 가치가 있습니다.
(중략)
"내가 섬기는, 살아계신 주 이스라엘의 하느님" 이는 아합에게 던지는 엘리야의 선전포고입니다. 이제벨과 함께 바알 등 다른 신들을 '끌어들인' 아합에 맞서 엘리야가 내세운 신은 살아계신 하느님, 가늠할 수 없는 하느님, 이해를 뛰어넘는 하느님입니다. 엘리야의 하느님은 살아계십니다. 아합의 신은 인간의 기대와 소원에 갇힌 우상일 뿐인 게 아닐까요?
"내가 섬기는..." 이 멀마나 아름다우면서 자의식이 있고 겸손한 표현인지요! 나는 살아계신 하느님을 섬깁니다. 다음 계획이 무엇인지, 다음 지시는 무엇인지 우리로서는 결코 알 수 없는 그런 하느님을, 나는 살아계신 하느님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A' 다음에는 'B'가 자동적으로 따라 나오는 그런 우상들과 연결된 게 아닙니다. 나의 하느님의 경우, 'A' 다음에 'M'이 올 수도 있는데, 이는 '살아계신 신'에게서 나타나는 특징이기도 합니다.
나는 얼마 전에 가르멜수도원에서 피정을 했습니다. 가르멜수도회는 특별한 방식으로 엘리야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엘리야 신부님이 엘리야 예언자를 주제로 피정을 열었습니다. 가르멜수도회는 "살아계신 주 이스라엘의 하느님을 두고 맹세합니다."(1열왕 17,1)라는 말씀을 이렇게 해석합니다. 엘리야 신부님이 설명하기를, 당시에는 왕의 시종들, 곧 왕을 섬기는 사람들만 왕 앞에 나서서 왕의 얼굴을 대면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 외의 사람들은 왕을 직접 쳐다볼 수 없었습니다. 유다인 종교철학자인 마르틴 부버는 이렇게 해석합니다. "살아계신 주 이스라엘의하느님 앞에 대령하여 맹세합니다." 루터의 번역은 이렇습니다. "살아계신 주 이스라엘의 하느님 앞에 서서."
나는 이 표현에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느님 앞에 서서'
이 표현은 에제키엘 예언자의 소명 이야기를 떠올리게 합니다. 하느님이 나타나시자 에제키엘은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렸습니다. 그때 하느님이 에제키엘에게 말씀하십니다. "일어서라. 내가 너에게 할 말이 있다."(에제 2,1) 이것이 미사에서 우리가 기도할 때, 곧 '하느님과 대화할' 때 주로 서있는 이유입니다. 사제가 "기도합시다."라고 하면 신자들은 자리에서 일어섭니다.
외적 행동은 내적 생각을 드러냅니다. 우리는 믿음 때문에 서있을 수 있고, 하느님 편에 설 수 있습니다. 하느님이 우리 편에 서 계시기 때문입니다. 서있는 행위는 우리 그리스도인의 권한인 자유를 나타내며, 하느님이 우리를 일으켜 세우심을 표현합니다. 우리는 하느님 앞에서 작아질 필요가 없고, 먼지 속에 누워있을 필요도 없으며, 줏대 있게 우리 편에 서있어도 됩니다.이로써 서있는 행위는 부활의 표징이 되기도 합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바닥에 눕고 숨어드는 걸 바라지 않으십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서서 얼굴을 마주 보기를 바라십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상대자로 인정하길 원하십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서있고, 스스로를 내어놓고, 뭔가를 위해 나서는 사람이길 원하십니다. 달리 말하면, 하느님은 우리가 몸가짐이 올바른 사람이길 원하십니다. 하느님은 줏대 있는 인간을 원하십니다.
하느님에게는 아첨꾼, 위선자, 맹목적인 법 이행자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하느님은 하느님의 사랑을 받고 있다는 확신으로 인해 자의식이 강한 사람을 원하십니다. 이런 사람은 실제 자신보다 더 크게 보일 필요도 없지만 더 작게 보일 필요도 없습니다! 하느님이 바라는 사람은 두 발로 땅을 딛고 서있지만 하늘을 향해 있는 사람입니다. 하느님 앞에 서서.
이런 사람들만이 진정으로 '헌신'할 수 있습니다. 헌신은 아무 것도 아닌 게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아주 의식적으로 뭔가가 되고 또 주는 행위입니다. 내게 전혀 없거나 내가 아닌 뭔가를 주는 '희생'이 아닙니다.
엘리야가 우리에게 본을 보여줍니다. 엘리야는 자의식이 있기 때문에 하느님을 섬길 수 있습니다. 자기 그릇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그 안에서 하느님을 인식할 수 있습니다. 자신을 작게 만들 필요도 없이 말입니다. 이런 자의식 때문에 엘리야는 하느님을 섬길 수 있고, 하느님 앞에 설 수 있습니다. 그래서 엘리야는 강렬한 예언으로 아합 왕과 대결할 수 있습니다. 엘리야가 나섭니다.
우리의 가장 큰 두려움은
우리가 부족하다는 데 있지 않다.
우리의 가장 큰 두려움은
우리에게 엄청난 힘이 있다는 데 있다.
우리가 두려워하는 건 우리 안의 어둠이 아니라
우리 안의 빛이다.
우리는 스스로 묻는다.
내가 도대체 누구이기에
이렇게 빛나고, 매혹적이고, 재능있고, 멋진가?
너는 도대체 누구이기에
이런 존재가 '아니어도' 되는가?
너는 하느님의 자녀다.
네가 스스로 작아지면
세상에 아무 도움이 되지 못한다.
주변 사람들에게 불안감을 주지 않으려
움츠리기만 한다면
빛을 낼 수 없다.
너는 우리 안에 있는
하느님의 영광을 실현하기 위해
태어났다.
하느님의 영광은 몇몇 사람들에게만 있는 게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있다.
우리가 스스로 빛을 밝힌다면
우리도 모르는 사이
다른 사람도 빛을 밝히게 한다.
우리가 스스로 두려움에서 벗어나면
굳이 뭔가 하지 않아도
우리의 존재는 저절로
다른 사람을 두려움에서 벗어나게 한다.
매리언 윌리엄슨, <사랑의 기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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