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4.08.18 21:31 수정 : 2014.08.19 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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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 교황이 18일 오후 4박5일간의 방한 일정을 마치고 성남 서울공항을 통해 출국하며 손을 들어 인사하고 있다. 성남/사진공동취재단 |
큰 울림 남기고 떠난 100시간…사회 각계각층 성찰
새길수록 기득권층에 뼈아픈 말씀…실천은 우리 몫
낡은 검정가방을 손에 든 프란치스코 교황이 성남 서울공항 환송식장에 들어섰다. 14일 오전 도착해 18일 낮까지 16가지가 넘는 공식·비공식 일정을 강행군하면서도 잃지 않던 그 미소를 여전히 머금은 모습이었다.
교황이 한국 땅에 머문 시간은 100시간이 채 안 됐다. 약자를 보듬고, 물질 만능을 경계하며, 평화를 기원하는 그의 화두 또한 많은 이들이 마르고 닳도록 입에 올렸던 문제일지 모른다. 하지만 그 어떤 정치인이나 그 어떤 경제학자의 날카로운 분석도 이렇게 짧은 기간에 우리 사회의 ‘결핍’을 뼈아프게 뒤돌아보게 하진 못했다. 사회적 모순에 대해 에둘러 말하지도 않았다. 기득권을 누리던 사람이라면 화들짝 놀랄 법한 말도 서슴지 않았다. 진심을 다해 공감하는 모습이 바탕이 된 발언이었기에 울림은 더 컸다.
행복한 100시간은 끝났다. 교황은 “잠들어 있는 사람은 아무도 기뻐하거나 춤추거나 환호할 수 없다”고 말했다. 각계의 사람들은 이제 교황이 한국 사회에 던져준 화두를 곱씹고 실천하는 과제가 우리 사회의 몫이라고 입을 모았다.
방한 기간 포털사이트에 20여개의 팬 사이트가 순식간에 생길 정도로 뜨거웠던 ‘교황앓이’는 우리 사회 지도층에 대한 질책을 의미했다. 소설가 조정래씨는 “정치인들이 버린 이들을 찾아가 그들을 위로한 행보는 책임을 망각한 정치인들에게 각성의 따귀를 계속 때리는 것과 같았다. 교황은 떠났지만 교황의 따귀가 주는 아픔을 통렬하게 느껴야 한다. 나를 포함해 이 나라 지식인들 모두도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안희정 충남도지사는 “현실 정치인으로서 부끄럽게 느껴졌다. 사회적 갈등을 정치와 정부가 해결하지 못하고 교황에게 기대고 있는 이 현실이 부끄럽고 죄송했다”고 했다.
어디에서부터 풀 것인가. 진영 새누리당 의원은 “우리 사회에 새로운 리더십이 필요한 때라고 본다”고 말했다. 안희정 지사는 “우리 사회가 정파·정당을 뛰어넘어 견해가 다르더라도 신뢰할 수 있는 자산을 너무 많이 잃었다. 견해가 달라도 신뢰와 존중을 쌓아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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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 교황의 방한 일정 마지막날인 18일 오전 서울 중구 명동성당 앞에서 ‘평화와 화해를 위한 미사’가 끝난 뒤 차를 타고 공항으로 향하는 교황을 보며 시민들이 박수와 환호를 보내고 있다. 뉴시스 |
하지만 교황이 말한 화해가 ‘무조건적’인 것만은 아니다. 천주교인권위원회 이사장인 김형태 변호사는 “교황이 강조한 것은 정의에 기초한 화해와 용서다. 소외되고 고통받는 사회 구석구석을 정의에 기반해 바로잡은 뒤의 화해와 용서를 말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전성인 홍익대 교수(경제학)는 “교황이 평화는 정의의 결과라고도 말했듯이, 평화를 위해 ‘무조건 덮어두자’ ‘무조건 용서하자’ ‘우리가 남이가’라는 식으로 얘기하는 것은 정의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가 언젠가 ‘야당이 양보하는 것 봤냐, 원래 양보는 집권당이 하는 것’이라고 멋진 말을 한 적 있다. 양보는 힘있는 자가 하는 것이다. 정의를 세우려면 누군가 양보를 해야 하는데 그것은 힘에 밀려서가 아니라 조금이라도 더 가진 자가, 더 힘있는 자가, 부자가 공감에서 우러나오는 양보를 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교황이 15일 대전 성모승천대축일 미사에서 제기했던 ‘무한경쟁 사조에 맞서 싸우고 비인간적 경제모델을 거부하라’는 화두는 성장신화 중심의 우리 경제체제에 대한 직접적 비판이기도 했다. 정태인 ‘새로운 사회를 여는 연구원’ 원장은 “자본의 세계화를 연대의 세계화로 바꿔야 한다는 교황의 발언은, 가난한 자를 배제시키는 자의 영적인 변화와 함께 국가적·국제적 제도 변화도 촉구하는 것”이라며 “이는 우애 정신에 입각한 국제기구의 개혁과 국가 수준의 경제적 재분배 등이 이뤄져야 한다는 뜻”이라고 풀이했다. 실제 교황은 “가난한 이들을 돕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다”며 구조적 변화 노력을 촉구했다. 최근 다시 규제 완화와 투자 활성화를 주창하고 있는 현 정부에 대해 정 원장은 “교황의 말씀을 되새긴다면 국가 차원의 재분배를 어떻게 할 것인지 고민하며 소득 주도 성장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말했다.
분열과 적대의 한반도에 대한 메시지도 분명했다. 정세현(원광대 총장) 전 통일부 장관은 “상대방의 마음을 못 열면 독백이라는 말씀은 우리 정부가 새겨들어야 한다. 8·15 경축사에서도 북한의 입장은 도외시하고 받으려면 받으라는 식의 일방적 제안을 했는데 이는 독백이다”라고 꼬집었다.
교황은 “세상 밖으로 나아가 다른 이들의 마음의 문을 두드리라”며 공공선에 대한 투신을 강조했다. 이는 사회 구성원 전체를 향한 말임과 동시에, 특히 기득권화되는 종교에 대한 아픈 비판이기도 하다. 기독교도이면서 한국 개신교회의 문제점을 비판한 다큐 <쿼바디스>의 감독 김재환씨는 “한마디로 부러웠다. 교황은 교회가, 사회가 나아갈 방향이 ‘돈보다 생명’이라고 깔끔하게 행동으로 보여줬다”며 “사람들이 교회를 떠나기 전 지금 적잖은 교회는 먼저 예수님을 떠났다. 고통받는 자의 눈물을 외면하고 탐욕에 휘둘리는 몇몇 교회는 교회가 아니라고 명확히 말해야 한다”고 말했다.
18일 대한항공 보잉777기에 탑승하기에 앞서 정홍원 총리와 만난 교황은 “이 나라의 품위와 존엄성을 주님께서 계속 지켜주시길 기원한다”며 “인위적 분단상황이 일치를 향해 나아가서 남북 평화통일이 빨리 오기를 바라며, 이는 하나의 희망이자 약속”이라고 말했다. 교황과의 100시간이 우리 사회를 바꿔놓을 수 있을까? 안병욱 가톨릭대 명예교수는 “세월호 때도 한국 사회의 근본이 바뀔 것처럼 한달 넘게 떠들었지만 금방 다른 목소리들이 나온다. 이번에는 잊지 않고 구체적으로 각계각층이 행동에 나서야 한다. 그 중심과 일차적인 주체는 물론 위정자와 정당들”이라고 말했다. 이준구 서울대 교수(경제학)는 자신의 누리집(홈페이지)에 이렇게 올렸다. “그분의 방한이 우리 사회를 완전하게 뒤바꿔 놓을 것이라 기대는 않습니다. 저들이 대오각성하기는커녕 별의별 변명으로 자기정당화에 급급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무엇이 올바른 길인지를 분명하게 밝혀주셨다는 점만으로도 큰 위안을 얻었습니다. 교황님, 킹왕짱!!”
김영희 최재봉 노현웅 하어영 이정애 기자
dora@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