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만장자의 마지막 질문 24
예수는 우리의 죄를 대신해 죽었다는데, 우리의 죄란 무엇인가? 왜 우리로 하여금 죄를 짓도록 내버려두었는가? (상)
김용규 철학자
주간조선 [2217호] 2012.07.30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을 읽어보았는가? 우리말 번역본으로 800쪽이 넘는 장편소설이지만 이야기 줄거리는 아주 단순하다. 제정 러시아의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사는 법학도인 라스콜리니코프가 전당포 노파 자매를 살해하고, 우연히 알게 된 창녀 소냐의 권고를 받아 자수하게 된다는 게 전부다. 그럼에도 이 작품이 불후의 명작이 된 데에는 크게 두 가지 이유가 있다. 하나는 심리학자들마저 격찬할 만큼 뛰어나게 인간의 심리를 그려냈다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신학자들마저 경탄할 만큼 심오하게 인간의 죄와 벌을 파헤쳐 보여주었다는 것이다.
이 소설에서 라스콜리니코프는 죄인이다. 여기에는 이견이 있을 수 없다. 하지만 그가 왜 죄인인가에는 이견이 있다. 나나 당신은 그가 사람을 죽였기 때문에 죄인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도스토옙스키의 생각은 다르다. 그리고 이 다른 생각이 이 작품을 불후의 명작으로 만들었다. 도스토옙스키는 무슨 영문에선지 라스콜리니코프가 전당포 노파를 살해하기 이전부터 이미 죄인이었다고 단정했다. 무슨 뜬금없는 소리냐고? 뜬금없는 소리가 아니다. 엄연한 사실이다. 그리고 이것을 이해하지 못하면 사실상 이 작품을 이해했다고 할 수 없다. 뿐만 아니라 고 이병철 회장이 ‘우리의 죄란 무엇인가?’라고 물은 죄, 곧 예수가 우리의 죄를 대신 속죄하기 위해 죽었다고 할 때 말하는 죄가 무엇인지도 알 수 없다. 도대체 이게 무슨 소리냐고? 이제부터 살펴보자. 그럼으로써 우리는 기독교에서 말하는 죄가 무엇이며, 또 구원이 무엇인지를 알게 될 것이다.
죄란 무엇인가
구약성서 창세기에 보면, 신은 에덴동산에 만물을 창조하고 그 모든 것을 아담에게 맡긴다. 그리고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창세기 2:16~17)고 명한다. 하지만 뱀이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의 눈이 밝아 신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신이 아심이니라”(창세기 3:5)라며 그 실과를 따먹게끔 유혹했다. 그래서 먼저 하와(이브)가, 이후 아담이 그것을 따먹었다. 그 결과 그들은 신에게서 추방당했다. 이것이 성서가 기록한 인류 최초의 죄이자 모든 죄의 근원인 죄에 관한 기록이다.
그래서 우리도 이를 주목하고자 하는데, 이야기가 보여주듯이 구약성서에서 말하는 죄란 ‘신을 거역하고 떠나는 것’ ‘신으로부터 돌아서는 것’을 의미한다. 신약성서에서 사도 바울이 ‘죄’라는 뜻으로 사용한 그리스어 ‘하마르티아’도 같은 의미를 갖고 있다. 본디 ‘맞지 않다’ ‘빗맞히다’ 등의 뜻을 가진 하마르티아는 바울 이전부터 이미 비유적으로 ‘신에게 잘못하다’(호메로스) 내지 ‘원래 목표에서 빗나가다’(아리스토텔레스)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이 개념을 더 자세히 이해하고자 하면, 기독교에서 신을 무엇이라고 규정했던가를 다시 떠올려 보면 된다. 우리는 지난 호의 글들을 통해 기독교 신학은 신을 ‘존재’라고 규정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존재다’라는 뜻을 가진 신의 이름 ‘야훼’가 그 근거라고 했다. 그렇다면 기독교에서 말하는 죄란 다름아닌 ‘존재를 떠나는 것’ ‘존재로부터 돌아서는 것’, 곧 ‘존재 상실’을 말한다.
표현이 조금 생소한가? 달리 풀어보자. 우리는 켄터베리 대주교 안셀무스(1033~1109)가 신을 “최고 본질, 최고 생명, 최고 이성, 최고 행복, 최고 정의, 최고 지혜, 최고 진리, 최고 선성, 최고 위대, 최고 미, 최고 불사성, 최고 불변성, 최고 복락, 최고 영원성, 최고 권능, 최고 일자성”이라고 규정한 것을 지난 호를 통해 이미 알고 있다. 그렇다면 신에게서 돌아서서 떠나는 죄란 당연히 최고의 본질 상실, 생명 상실, 행복 상실, 정의 상실, 지혜 상실, 진리 상실, 선 상실, 미 상실, 불사성 상실… 등등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신에게서 돌아서서 떠나는 죄를 지으면 최고의 생명을 상실하게 된다는 말이다. 이 말을 사도 바울은 “죄의 삯은 사망이요”(로마서 6:23)라고 교훈했다. 그렇다! 안셀무스가 나열한 그 모든 것을 상실하는 것, 바로 이것이 기독교에서 말하는 죄다. 따라서 기독교에서 말하는 구원이란 당연히 ‘신에게로 다시 돌아가는 것’ ‘신에게로 다시 향하는 것’, 곧 잃어버렸던 본질, 생명, 행복, 정의, 지혜, 진리, 선, 미, 불사성… 등등을 회복하는 것을 뜻한다. 바로 이것이 기독교에서 말하는 죄와 구원에 대한 가장 단순하고 명료한 틀이자 공식이다.
도덕적 죄와 종교적 죄
기독교에서는 이 죄, 곧 ‘신을 거역하고 떠나는 죄’ ‘신으로부터 돌아서는 죄’를 최초의 인간인 아담이 지었다는 의미에서, 또한 모든 인간이 그것을 반복한다는 의미에서 ‘원죄’라고 부른다. 원죄는 자신이 짓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누구나 본래적으로 갖고 있는 죄를 말한다. 동시에 아무리 지우려고 노력해도 지울 수 없는 죄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원죄는 보편적이고 숙명적이다. 그렇지만 이 보편성과 숙명성은 아담이 지은 죄의 유전인자(DNA)가 있어 생물학적으로 전해져 왔다는 것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키르케고르가 아담을 “그 자신이자 동시에 인류이다”라고 규정했듯이, 기독교에서 아담은 최초의 인간이자 ‘인간의 원형’이다. 따라서 아담의 죄가 유전된다는 원죄유전론은 다만 상징적 표현일 뿐이다. 그것이 가진 진정한 의미는 신으로부터 돌아섬으로써 자기중심적으로 된 인간의 본성(기독교에서는 ‘죄성’이라 한다)이 아담 이후 모든 인간에게 계속된다는 것뿐이다. 사도 바울은 이 말을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다”(로마서 5:12)라고 했다.
그렇다면 기독교에서 말하는 죄는 우리가 흔히 말하는 죄, 곧 폭행, 살인, 거짓말, 도적질, 간음과 같은 ‘도덕적 죄’ 내지 ‘법률상의 죄’가 아니다. 기독교에서는 ‘도덕적 죄’ 내지 ‘법률상의 죄’는 죄라고 하기보다 ‘악’ 또는 ‘악행’이라고 한다. 바울이 로마서 1장 29~30절에서 열거한 추악, 탐욕, 악의,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 수군수군함, 비방, 하나님을 미워함, 능욕, 교만, 자랑, 악을 도모함, 부모를 거역함, 우매, 배약, 무정함, 무자비함 등이 바로 그 악행들이다. 이들과는 달리 기독교에서 말하는 죄는 인간이 신에게서 돌아서서 그를 떠났다는 뜻에서 ‘종교적 죄’이고, 존재물이 존재를 떠나 존재를 상실했다는 의미에서 ‘존재론적 죄’다.
정리하자면, 도덕적 죄 내지 법률상의 죄는 인간에게 짓는 죄이고, 종교적 죄 또는 존재론적 죄는 신에게 짓는 죄다. 전자는 ‘선’과 ‘악’의 문제와 연관되어 있고, 후자는 ‘의’와 ‘죄’의 문제와 연관되어 있다. 따라서 그 둘을 분명하게 구분하는 것은 기독교에서 말하는 죄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하다. 그런데 일단 두 죄를 확연히 구분하고 나면 이 둘 사이에 존재하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가 선명히 드러난다. 누구든 신에게서 돌아서서 ‘죄인’이 되면 점차 악을 행할 수밖에 없고, 반대로 신에게로 향하여 ‘의인’이 되면 점차 선을 행하게 된다는 것이 그것이다. 지난 호에서 이미 언급했듯이, 태양으로부터 돌아서서 멀어지면 어둠을 볼 수밖에 없고, 태양을 향하고 가까워지면 빛을 보게 되는 원리와 같다. 이것이 죄가 악과, 그리고 의가 선과 맺고 있는 관계다. 도식을 보면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도식을 보자. 신은 태양으로 표시되어 신으로부터 멀어질수록 어둡다. 선 자체인 신으로부터 멀어질수록 악해진다는 것을 뜻한다. 인간은 화살표로 표시되어 의지와 방향을 나타낸다. 그 방향이 신으로부터 돌아선 화살표가 죄인이고, 신에게로 향한 화살표가 의인이다. 화살표 ①은 화살표 ②보다 신에 가깝기에 더 선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방향이 신으로부터 돌아섰기에 죄인이며 점차 악해질 수밖에 없다. 이에 반해 화살표 ②는 비록 신으로부터 멀어져 있어 악한 상태에 있지만, 그 방향이 신을 향하여 있기 때문에 그는 의인이며 점차 선해질 수밖에 없다.
죄의 기원
그런데 잠깐! 여기에서 짚고 가야 할 것이 하나 있다. 성서에 의하면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는 필요한 모든 것을 갖고 있었고 괴로워해야 할 어떤 것도 갖고 있지 않았다. 그런데 왜 그들은 신을 거역하고 떠나는 죄를 지었을까? 우리가 이 의문을 풀고 가야 하는 까닭은 위에서 언급한 대로 이 죄가 아담과 하와에 한하지 않고 우리에게도 그대로 내려오기 때문이다. 아담 이후에 모든 인간은 그 본성에 있어서 아담과 똑같다는 의미에서 그렇다.
이에 대해 아우구스티누스는 “아담과 하와는 ‘신같이’ 스스로를 높이고 싶은 마음 때문에 신을 거역하고 떠나는 죄를 지었다”고 했다. 그들은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신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신이 아심이라”라는 뱀의 말을 듣고 스스로를 높여 ‘신처럼’ 되려고 금령을 어겼다는 말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렇듯 인간이 스스로를 신처럼 높이려는 마음을 라틴어로 ‘슈페르비아’, 곧 ‘자만’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그의 ‘자연과 은총에 관하여’에서 “모든 죄의 시작은 자만이다. 그리고 자만의 시작은 사람이 신에게서 돌아서는 것이다”라고 자만이 모든 죄의 기원이라는 것을 밝혔다. 과연 그런가? 글을 시작했던 라스콜리니코프의 이야기로 돌아가 살펴보자.
라스콜리니코프는 왜 전당포 노파를 살해했던가? 동기는 두 가지다. 하나는 심리적 억압 때문이었다. 탁월한 도스토옙스키 연구가인 모출스키의 주장처럼, 페테르부르크의 무더운 날씨, 그리고 어머니와 여동생을 돌보지 못하고 학업마저 계속할 수 없이 비루한 처지가 그를 심리적으로 억압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니다. 보다 더 심각하고 직접적인 동기가 따로 있다. 라스콜리니코프는 전당포 노파가 나쁜 방법으로 모은 재산을 자신이 인류를 위해 봉사하게끔 학비로 사용하거나 가난한 사람들에게 분배하는 것이 사회정의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자기와 같이 ‘비범한 사람’은 ‘평범한 사람’들이 지켜야 하는 법률을 위반할 수 있는 권리를 지니고 있다고도 생각했다. 그는 솔로몬과 리쿠르고스, 무함마드, 나폴레옹 등을 예로 들어 자신의 생각을 정당화했다. 이런 위대한 사람들이 그랬듯이 새로운 사회와 법률을 위해서는 낡은 것들을 파괴해야만 하는데, 희생이 불가피하다면 그것이 당연히 허용된다는 말이다.
이제 우리는 단순히 라스콜리니코프가 죄 없는 사람들을 죽였기 때문에 죄인이라고는 할 수 없게 되었다. 설령 당신과 내가 그렇게 주장한다 해도 라스콜리니코프는 인정하지 않고 다음과 같이 반문할 것이다. “만일 내가 죄인이라면 솔로몬도, 리쿠르고스도, 무함마드도, 나폴레옹도 죄인이어야 한다. 그들이 죄인인가?” 대답이 간단치 않다. 그런데 바로 여기에서 도스토옙스키가 매우 독특한 대답을 했다. 라스콜리니코프가 죄인인 것은 그가 사람을 죽여서가 아니라, 인간으로서 넘지 말아야 할 경계를 뛰어넘었기 때문이라 했다. 무슨 말인가? 이에 대한 대답은 라스콜리니코프가 소냐에게 왜 전당포 노파를 죽였는지를 설명하는 부분에 드러나 있다.
“난 말이야, 소냐, 궤변 없이 그냥, 자신을 위해서, 오로지 나 자신만을 위해서 죽이고 싶었어! 이 점에 대해서 나는 나 자신에게 거짓말하고 싶지 않았어! 어머니를 돕기 위해서 죽인 게 아냐. 그건 헛소리지! 재산과 권력을 얻어서 인류의 은인이 되고 싶어서 죽인 것도 아냐. 그건 거짓말이야! 나는 그냥 죽였어. 나 자신, 나 한 사람을 위해서 죽인 거야. … 중요한 것은, 죽였을 때 내게 필요한 건 돈도 아니었다는 거야. 소냐, 돈이 아니라 전혀 다른 것이 필요했어. … 나는 그때 알고 싶었던 거야. … 내가 선을 뛰어넘을 수 있는가, 아니면 넘지 못하는가!”
‘자만’이 원인이면 ‘겸손’이 해법이다
라스콜리니코프는 이처럼 그가 인간을 죽일 권리를 가진 ‘초인’인지, 아닌지를 알아보기 위해 살인을 했다. 즉 그는 자기를 스스로 높여 인간을 뛰어넘으려고 시도했다. 이것이 죄이고, 노파를 죽인 행위는 죄 다음에 따라오기 마련인 악에 불과하다는 것이 도스토옙스키의 생각이다. 이 작품에 죄라는 의미로 사용된 러시아어 ‘prestuplenie’는 본디 ‘어떤 경계를 뛰어넘다’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도스토옙스키는 이 단어를 인간이 스스로를 높여 ‘인간의 경계를 뛰어넘다’라는 뜻으로 사용한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아우구스티누스가 말하는 자기 스스로를 신같이 높이려는 자만과 결코 다르지 않다. 도스토옙스키도 모든 죄의 기원이 자만이라고 보았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이 죄에서 빠져나갈 방법은 없는가? 있다. 의외로 간단하다. ‘자만’이 원인이면 ‘겸손’이 해법이다. 자기를 믿는 ‘이성’이 원인이면 신을 믿는 ‘신앙’이 해법이다. ‘타인희생’이 원인이면 ‘자기희생’이 해법이다. 성서에서는 예수가 그 일을 완수했고, ‘죄와 벌’에서는 창녀 소냐가 그 일을 맡았다. 그녀는 비참하게 살아가지만 묵묵히 자신의 길을 가며 자기희생을 통해 다른 사람들을 돕는 인간이다. 기독교에서는 라스콜리니코프처럼 자만에 의해 ‘자기중심적으로 사는 사람’을 죄인이라 하고, 소냐처럼 순종에 의해 ‘신 중심적으로 사는 사람’을 의인이라 한다. 라스콜리니코프는 소냐를 ‘유로지비’라고 불렀다. 러시아정교에서 ‘성스러운 바보’라는 뜻으로 사용하는 말이다. 죽은 나무에 수년 동안 물을 길어다 부어 마침내 어느 날 푸른 잎을 피워낸 어떤 사람을 일컬은 말이다. 겸손과 신앙과 자기희생으로 죽은 나무에서 푸른 잎을 피워내는 것! 이것이 성서가, 그리고 ‘죄와 벌’이 제시한 죄에 대한 해법이다.
어떤가? 이제 당신은 이병철 회장이 ‘우리의 죄란 무엇인가?’라고 물은 죄가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에서 벗어나는 방법이 무엇인지 거칠지만 대충 알았을 것이다. 그런데 남은 문제가 하나 더 있다. 이 회장의 질문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고 신은 “왜 우리로 하여금 죄를 짓도록 내버려두었는가?”를 뒤이어 물었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 회에 살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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