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만장자의 마지막 질문 24
신이 인간을 사랑했다면, 왜 고통과 불행과 죽음을 주었는가?
김용규 철학자
주간조선 [2213호] 2012.07.02
1755년 11월 1일 아침 9시40분, 포르투갈 수도 리스본에 강도 9로 추정되는 지진이 일어났다. 최고 파고 15m에 달하는 해일을 동반한 이 지진은 주택가를 뒤흔들고 항만을 덮쳤다. 마침 그날이 교회가 사람들로 붐비는 만성절(모든 성인의 영혼에 제사를 지내는 날)이었기에 죽음은 더 풍성한 수확을 거둬갔다. 최소 3만명에서 최대 10만명가량이 목숨을 잃었다. 그리고 도시의 85%가 폐허가 되었다. 고통과 불행, 공포와 비참이 도시를 점령했다.
지진이 하필 만성절에 일어났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프랑스 성직자들은 이 재난이 리스본 주민의 죄 때문이라는 막말을 했다. 이에 계몽사상가 볼테르(1694~1778)가 타는 불처럼 분개했다. 그리고 그 격노를 한편의 시에 담았다. 그 안에는 “신은 재난을 방지할 수 있는데도 방지하려고 하지 않는가, 아니면 방지하고 싶지만 방지할 능력이 없는가?”라고 신을 비난하는 구절이 들어있다. 그런데 알고 보면 이 시구는 고대 그리스 철학자 에피쿠로스(BC 342?~271)가 처음 제시한 이래 지난 2300년 동안 내려오는 딜레마의 한 변형이다. 단순하고 명료하게 요약하면 이렇다. 신은 절대적으로 선하고 강하다. 신이 절대적으로 선하고 강하다면 악은 존재할 수 없다. 그런데 악이 존재한다. 그러므로 신은 절대적으로 선하지 않거나 절대적으로 강하지 않다. 그렇다면 고 이병철 삼성그룹 회장의 이번 질문 역시 바로 이 딜레마의 변형이라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 질문은 절대적으로 선하고 강한 신이 인간을 사랑했다면 왜 고통과 불행, 죽음과 같은 악한 일이 일어나는가를 묻고 있기 때문이다.
철학에서는 에피쿠로스가 제시한 딜레마와 그 변형들에 대한 기독교 측의 다양한 답변들을 ‘신정론’이라 한다. 독일의 철학자 라이프니츠가 만든 용어로 알려진 신정론은 신을 의미하는 그리스 말 ‘테오스’와 정의를 뜻하는 ‘디케’로 이뤄졌다. 우리에게 고통과 불행과 죽음을 가져오는 악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신은 의롭고 공정하다는 뜻을 가졌다. 문제는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하는 것이다. 이에 대해 학자들은 보통 악을 ‘도덕적 악’과 ‘비도덕적 악’으로 구분하여 답한다. 도덕적 악은 탐욕·잔인함·불의·악의 등과 같이 인간과 연관된 악이다. 비도덕적 악은 세균·지진·폭풍·홍수·해일·가뭄 등과 같이 인간과는 별개로 자연과 연결된 악이다. 그래서 보통 ‘자연 악’이라 부른다. 따라서 우리도 악을 ‘자연 악’과 ‘도덕적 악’을 구분하여 답하고자 하는데, 우연히 이 회장의 다음 질문(신은 왜 악인을 만들었는가?)도 악의 문제와 연관되어 있다. 그래서 우리는 이번 회에는 자연 악을, 그리고 다음 회에는 도덕적 악을 다루는 신정론들을 중심으로 함께 이야기하고자 한다.
이번에도 결론부터 먼저 밝히고 시작한다. 우리의 결론은, 악의 존재가 신의 절대적 선함과 강함을 훼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것이 자연 악이든 도덕적 악이든 간에, 악은 신으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아우구스티누스 이래 전통적인 기독교 신학에 의하면, 자연 악은 자연에 주어진 ‘자연법칙’에서, 도덕적 악은 인간에게 주어진 ‘자유의지’에서 나온다. 다시 말해 신은 자연에 그 스스로 ‘우연적이고 자발적으로’ 운행하는 자연법칙을, 그리고 인간에게도 역시 그 스스로 ‘우연적이고 자발적으로’ 결정하여 행동하는 자유의지를 주었는데 고통·불행·죽음과 같은 모든 악이 여기에서 나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은 사도 바울이 “그러나 이 모든 일에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로마서 8:37)라고 선포한 ‘승리의 찬가’처럼 자신의 선함과 강함으로 이 모든 악들을 극복하고 인간과 세계를 구원한다. 그래서 일부 신학자들은 악의 존재가 오히려 신의 선함과 강함을 증명하는 근거가 된다고도 주장한다. 이제부터 이런 주장들이 어떻게 가능한지를 자세히 살펴볼 터인데, 우리는 이 이야기를 먼저 ‘섭리’에 관한 이야기로부터 시작하고자 한다. 왜냐하면 섭리야말로 신이 자연과 인간을 창조하고 이끌어가는 근본 원리이고 신정론은 그 원리의 결과에 관한 이론이기 때문이다.
섭리란 무엇인가
‘섭리’는 ‘삼위일체’처럼 성경에는 나오지 않는 말이다. 하지만 둘 모두 기독교 교리들을 떠받치는 튼튼한 기둥이다. 섭리를 나타내는 라틴어 ‘프로비덴티아’의 어원적 의미는 ‘미리 보는 것’인데, 기독교에서는 이 말을 신이 인간과 세계를 미리 정한 목적에 따라 이끄는 의지로 해석한다. 따라서 모든 섭리는 예정적이고 모든 예정은 섭리적이다. 즉 “모든 일을 그의 뜻의 결정대로 일하시는 이의 계획에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에베소서 1:11)라는 바울의 가르침에 나타나 있듯이, 신은 오직 예정한 섭리를 통해 우주만물을 창조하고 돌본다. 하지만 신의 눈앞에서는 “만물이 벌거벗은 것같이”(히브리서 4:13) 드러나므로, 섭리에 의한 그의 사역은 맹목적인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로마서 8:28)는 것이 기독교 교리다. 악의 근원을 밝히려는 우리의 이야기와 연관해 여기에서 묻고 싶은 것은 이처럼 선하고 의도적인 신의 섭리가 창조하고 돌보는 인간과 세계에 어떻게 악이 생겨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우리는 기독교 신학에 나타난 창조에 관한 이론에서 그 해답을 얻을 수 있다.
이전 호의 글들에서 이미 여러 번 언급했듯이, 초기 기독교 신학은 주로 기독교로 개종한 플라톤주의자들에 의해 정립되었다. 그 결과 최초의 조직신학자라고 할 수 있는 오리게네스(185~254?)의 ‘원리론’에 나타난 창조론에서 보듯이, 기독교 삼위일체 신 가운데 ‘성부’는 창조에 직접 개입하지 않는다. 창조를 주도하는 이는 ‘성자’인데, 그는 자신 안에 있는 성부의 영원한 형상들을 현실화 원리인 ‘성령’을 통해 차례로 구현한다. 그럼으로써 시간과 공간, 천사와 정령은 물론이고 무생물로부터 인간에 이르기까지 우주만물을 차례로 창조해 낸다. 요컨대 성부는 세계를 ‘직접’ 그리고 ‘일시에’ 창조한 것이 아니라 ‘말씀’인 성자와 그것의 ‘현실화 원리’인 성령을 통해 ‘순차적으로’ 창조해낸다는 말이다.
이제 우리가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고대의 탁월한 신학자 아우구스티누스(354~430)가 그의 ‘문자를 반대하는 창조에 관하여’에서 주로 펼친 창조론 해석이다. 아우구스티누스에 의하면 태초에 창조가 이뤄질 때 만물이 모두 ‘가시적으로’ 그리고 ‘현실적으로’ 창조된 것은 아니다. 특히 땅에 거주하는 생명체들은 ‘감추어진 씨앗’의 형태, 곧 “나무의 씨앗 속에 시간에 따라 점차 나무로 자라날 모든 것이 비가시적으로 함께 존재하는 것처럼” 잠재적으로 창조되었다. 예컨대 인류는 세계가 처음 시작할 때에는 가시적 형태로 존재하지 않았고 “비가시적으로, 잠재적으로, 인과적으로, 곧 장차 인류가 만들어질 방식으로” 창조되었다. 이후 “정해진 자신의 시간에” 오늘날 우리가 보는 실제 형태로 현실화되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같이 ‘감추어진 씨앗’을 실제 형태로 현실화하는 것은 신이 아니라 신이 자연에 부여한 ‘자연법’이라고 했다.
이처럼 창조가 신이 위임한 어떤 원리나 법칙을 통해 순차적으로 이뤄졌다는 이론은 중세를 대표하는 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1225~1274)에 의해 더욱 분명하고 확고하게 정립되었다. 그는 ‘신학대전’에서 신이 세계를 창조할 때 숱한 인과관계 속에서 순차적으로 ‘가능태’를 ‘현실태’로 변화시키는 원리들과 함께 창조했다고 했다. 그리고 이 원리들을 ‘본래적 원인’과 ‘우연적 원인’, 다른 말로 ‘제1원인’과 ‘제2원인’으로 나누었다. 또 신은 모든 변화와 운동의 ‘제1원인’으로서 복잡한 인과관계 속에서 다양한 방법을 통해 창조하는데, 어떤 것은 직접 창조하기도 하고 어떤 것은 자신이 창조한 원리, 곧 제2원인에 위임해서 작용하게 한다고 설명했다. 때문에 “모든 것이 필연적으로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라고도 주장했다. 이 말은 만약 신이 직접 창조했다면 모든 것이 필연적이겠지만 신은 제2원인에 위임해서 창조하기도 했기 때문에 “신의 섭리가 효력을 지속시키더라도 많은 것이 우연적이다”라는 의미다.
종교개혁자 장 칼뱅(1509~1564)도 같은 주장을 펼쳤다. 1545년에 발표한 ‘자유사상가들에 대한 논박’이라는 논문에서 칼뱅은 신의 섭리를 일반섭리, 특별섭리, 성령의 내적작용 세 가지로 분류했다. ‘일반섭리’는 자연법칙이다. 즉 신이 창조할 때 자연의 운행을 맡기려고 만들어 부과한 법칙들이다. ‘특별섭리’는 신이 자신의 궁극적 목적을 위해 자연이나 인간사에 직접 개입하는 원리다. 이를 통해 신은 자신의 백성을 돕고 악인을 응징하며 신실한 성도의 인내를 시험하거나 벌을 내려 공의를 실현한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바다를 가르고 태양을 멈추며 처녀를 잉태하게 하고 죽은 자를 살리는 일을 한다. ‘성령의 내적작용’은 신이 성령을 통해 그가 선택한 자들을 감화시키고 다스려서 거듭나게 하는 원리다. 이것들이 신이 자연과 인간을 창조하고 다스리며 보살펴 나가는 원리, 곧 섭리다.
악은 어디에서 오는가
악의 근원을 밝히려는 우리가 지금 주목해야 할 것은 ‘일반섭리’다. 왜냐하면 오리게네스, 아우구스티누스, 토마스 아퀴나스, 칼뱅같이 전통적으로 위대한 신학자들은 모두 입을 모아 하나 같은 주장을 반복했기 때문이다. 요컨대 창조가 일시적이 아닌 지금도 역시 진행 중인 사건이고, 전체적 혹은 부분적으로는 신이 직접 개입하지도 않았으며, ‘우연적이고 자발적으로’ 운행하는 어떤 원리(그것을 ‘현실화 원리’라고 하든, ‘자연법’이라고 부르든, ‘제2원인’이라고 하든, 아니면 ‘일반섭리’라고 이름 짓든)에 위임해서 순차적으로 일어나게 했다. 그래서 자연은 신의 직접적 통치가 아니라 신이 창조할 때 함께 부여한 통치의 법칙인 일반섭리, 곧 오늘날 우리가 자연법칙이라고 부르는 법칙들에 의해 ‘우연적이고 자발적으로’ 운행되어 나간다.
바로 이것이 6월 4일에 발간된 지난호에서 언급했듯이 기독교의 창조론이 진화론을 수용할 수 있는 근거이기도 한데, 오늘 우리의 이야기와 연관해 중요한 사실은 바로 여기에서 모든 ‘자연 악’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신은 세균·지진·폭풍·홍수·해일·가뭄 등과 같은 모든 ‘자연 악’에 직접 개입하지 않는다. 그것들은 오직 자연에 부과된 자연법칙들의 부조화 때문에 일어난다. 어디 그뿐인가! 똑같은 논리가 인간사에도 적용된다. 신은 인간을 창조할 때 ‘우연적이고 자발적으로’ 행동할 수 있는 자유의지를 주었다. 그리고 그 자유의지로부터 모든 도덕적 악이 나온다. 다시 말해 신은 탐욕·잔인함·불의·악의 등과 같은 일체의 ‘도덕적 악’과도 무관하다. 이처럼 모든 악이 신과 무관하며 그 원인과 책임은 전적으로 자연과 인간에게 있다는 주장이 아우구스티누스 이래로 내려오는 기독교의 주장이다. 이로써 에피쿠로스의 딜레마는 풀리고 볼테르의 비방은 무의미해진다.
그러나 여기에서 당신은 내게 이렇게 묻고 싶을 것이다. 좋다! 기독교 교리대로 악은 신이 직접 만든 것이 아니고 ‘우연적이고 자발적으로’ 운행되는 자연법칙과 인간의 자유의지의 소산이라 하자. 그렇다고 해도 왜 신은 악이 생겨날 가능성이 있는 자연법칙과 자유의지를 자연과 인간에게 주었는가? 그것은 사실상 이 회장의 물음대로 고통과 불행과 죽음을 준 것과 다름이 없지 않은가? 바꿔 말해 신은 악의 가능성을 처음부터 아예 배제한 자연법칙과 인간 의지를 창조할 수는 없었는가? 아마 이런 것들일 것이다. 이에 대한 답변을 들어보자.
신은 왜 악을 허용하는가
가톨릭 신학자 카를 라너(1904~1984)가 주장했듯이 신이 자연과 인간을 자신의 자동기계로 창조하지 않고, 우연적이고 자발적으로 운행되는 원리들에 맡겨 미결정적으로 창조한 것은 오직 사랑 때문이라는 것이 기독교 교리다. 즉 자연과 인간에게 일정한 자유와 우연성을 허락하는 것이 강제하는 것보다는 신의 사랑에 합당하다는 말이다. 이제 당신은 나에게 더 강하게 항변하고 싶을 것이다. 뭐라고? 지진, 해일, 홍수, 가뭄, 기근 등 자연재해로 죽어가는 사람들이 한 해에 얼마인가? 또 전쟁과 테러 그리고 흉악 범죄로 죽어가는 사람들은 또 얼마인가? 그런데도 악의 가능성을 허용하는 것이 신의 사랑이라고 할 수 있는가? 그렇다. 당신의 말이 옳다. 그래서 당신에게 소개하고자 하는 것이 영국 출신 종교철학자 존 힉이 그의 ‘종교철학’에서 전개한 ‘반사실적 가정법’에 의한 답변이다. 힉은 지금의 사실적 세계(자연과 인간)와 반대로 악(고통·불행·죽음 등)의 가능성이 모두 제거된 다음과 같은 낙원을 가정하고 과연 그것이 바람직한지를 생각해 보라 한다.
“예를 들면 어느 누구도 다른 사람을 해칠 수 없을 것이다. 살인자의 칼은 종이로 변하고 총알은 얇은 공기덩이로 변할 것이며, 100만달러를 도난당한 은행의 금고는 기적적으로 또 다른 100만달러로 채워져 있을 것이며, 사기·기만·음모·반역도 사회구조에 손상을 끼치지 못할 것이다. 어느 누구도 사고로 다치는 일이 없을 것이다. 높은 곳에서 떨어지는 등산가나 첨탑의 수리공 또는 어린이 모두가 다 땅에 부딪혀도 다치지 않고 둥둥 뜨게 될 것이며 난폭한 운전자도 아무런 사고를 당하지 않을 것이다. 노동을 피한다고 해도 아무런 어려움을 겪지 않을 것이므로 일할 필요가 없을 것이며, 이러한 세계에는 정말 무엇인가 부족하거나 위험한 경우가 없을 것이므로 물질적 도움 때문이나 위험 때문에 걸려오게 될 전화에 신경 쓸 필요도 없을 것이다.”
어떤가? 바람직하게 생각되는가? 힉에 의하면, 자연법칙이라는 일반섭리에 의해서가 아니라 모든 것이 특별섭리에 의해서 좌우되는 이런 세계에서 우리의 삶은 “유쾌하지만 목표 없이 쉽게 흘러가 버릴 수 있는 하나의 꿈처럼” 된다. 또한 “우리가 가지고 있는 현재의 윤리개념이 분명히 무의미하게” 된다. 예를 들어 누군가를 해치는 것이 옳지 못하다는 개념이 없기 때문에, 옳지 못한 행동이란 아예 없을 것이며 당연히 옳은 행동 역시 없다. 마찬가지로 어떤 위험이나 어려움이 존재하지 않는 그곳에서는 그것을 이겨내는 용기와 꿋꿋함도 의미가 없다. 또 관대함·친절함·사랑·신중함·비이기적임 등과 같은 윤리개념은 생겨나지도 않는다. 결과적으로 이러한 세계는 인간의 삶을 무의미하고 무가치하게 하며, 그들을 창조하고 사랑하여 선으로 인도하고 구원하려는 신의 의도에서 벗어난다. 그래서 힉은 실제적인 위험·어려움·고통·실패·슬픔·불행·좌절·죽음의 가능성 등을 가진 세계가 오히려 인간의 삶에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며, 신이 도덕적·종교적으로 고양된 ‘인간 만들기’에 오히려 적합하다고 주장했다.
그렇다! 바로 이것이 신이 자연에 자연법칙을, 그리고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부여한 이유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나타나는 악이 허용되는 까닭이다. 물론 이 같은 힉의 답변이 꼬리를 물고 일어날 당신의 많은 의문과 궁금증들을 모두 해소시켜 주지는 못할 것이다. 하지만 지면이 끝났다. 나머지는 다음 회에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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