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만장자의 마지막 질문 24
언젠가 생명의 합성, 무병장수의 시대도 가능할 것 같다. 이처럼 과학이 발달하면 신의 존재도 부인되는 것이 아닌가?
김용규 철학자
주간조선 [2211호] 2012.06.18
2010년 5월 21일 전 세계의 시선이 한 과학자의 깜짝 선언에 모아졌다. 생명을 합성해 내겠노라 큰소리 쳐왔던 미국의 크레이그 벤터 박사가 이끄는 연구팀이 마침내 ‘생명 창조’에 성공했음을 세상에 공표했기 때문이다. 발표 직후 ‘사이언스’ ‘네이처’와 같은 과학전문지는 물론 세계 주요 언론이 경악했다. 그리고 합성생명의 등장이 과학계와 인류에 가져올 변화를 진단하기에 분주했다.
물론 벤터의 연구팀이 합성한 생명체는 장미나 토끼처럼 구체적 형상을 가진 동식물과는 거리가 아주 멀다. 현미경으로만 관찰되는 ‘미코플라스마 라보라토리움’, 즉 실험실에서 만들어진 하나의 박테리아 세포일 뿐이다. 그것도 세포 전체가 아니라 단지 세포 가운데의 게놈만을 합성했을 뿐이다. 벤터의 연구팀은 먼저 자연 상태의 박테리아 게놈을 모방한 ‘합성게놈’을 만들었다. 그리고 거부반응을 일으키지 않도록 제어하면서 그것을 박테리아의 세포에 집어넣어 ‘자연게놈’처럼 작동하는 것을 확인했다. 이게 전부다. 때문에 ‘생명 창조’로 부르기에는 적절하지 않다는 지적도 있다. 그러나 생명의 기본 단위가 세포이고 그것의 핵심이 게놈이라고 할 때 벤터 연구팀의 성공은 그 자체로 놀라운 것이며 ‘합성생명’을 향한 의미 있는 발걸음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유전자 조작기술들을 통한 지구환경 개선과 인류의 무병장수는 생명공학이 간직한 오랜 꿈이다. 벤터 연구팀의 게놈 합성이 이 꿈을 한발 더 앞당겼다고도 볼 수 있다. 이 같은 생명공학의 힘을 빌려 언젠가는 고(故) 이병철 삼성그룹 회장이 20여년 전에 이미 예견한 대로 생명의 합성과 무병장수의 시대가 올지 모른다. 물론 빛이 밝은 곳에는 어둠도 짙게 마련이다. 생명합성이 가져올 상상을 초월하는 위험들도 우려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이 회장의 질문 내용이 아니다. 그는 다만 ‘이처럼 과학이 발달하면 신의 존재도 부인되는 것이 아닌가’를 물었다. 당신의 생각은 어떤가? 그런 일이 일어날 것 같은가? 언제나 그랬듯이 결론부터 말하자. 그런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 아마 당신은 지금 내 말에 놀랐을 것이다. 그리고 도대체 무슨 근거로 그렇게 단언할 수 있느냐고 따지고 싶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것은 틀림없다. 그 이유는 과학의 속성과 신의 본질 사이에 놓여있는 질적 차이 때문이다. 이제 곧 알게 되겠지만 그것은 한마디로 유한과 무한 사이의 차이다. 그게 무슨 소리냐고? 이제부터 함께 살펴보자.
신의 모든 속성은 무한이다
당신도 이미 알다시피, 세상의 모든 존재자(또는 존재물)는 ‘그저’ 있는 것이 아니다. ‘무엇으로’ 있다. 예컨대 ‘사과’는 ‘사과로’ 있고 ‘책상’은 ‘책상으로’ 있다. 이때 사과를 사과이게 하는 어떤 성질, 책상을 책상이게 하는 그 어떤 성질을 철학에서는 그것의 ‘본질’이라 한다. 그리고 그것의 있음이 곧 ‘존재’다. 그렇다면 세상의 모든 존재자는 본질과 존재로 구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하자면 세상 만물은 모두 ‘무엇’이라는 본질을 가짐으로써 비로소 존재하며, 일반적으로 그 ‘무엇’이 우리가 부르는 그것의 ‘이름’이다. 따라서 이름이란 어떤 것을 그것이게끔 하는 본질이 이미 한정되고 규정된 ‘존재자’에만 붙일 수 있다. 우리가 어떤 것을 ‘사과’라고 인식하고 그렇게 부르는 것은 그것이 사과이게끔 하는 사과의 본질에 의해 한정되고 규정되었기에 가능하다는 말이다. 만물이 다 그렇다. 사람들이 흔히 어려워하는 존재론도 사실은 이처럼 아주 단순한 원리에서 시작한다.
그런데 우리의 정신은 한정할 수 있는 것, 규정할 수 있는 것, 다시 말해 그 어떤 ‘본질’을 가진 것만 파악할 수 있고 이름도 붙일 수 있다. 우주가 아무리 장구하고 광대하다고 해도 그것은 예컨대 시간과 공간이라는 본질에 의해 규정되고 한정되기 때문에 우리가 파악할 수도 있고 이름 붙일 수도 있다. 이 말은 무한정자, 무규정자는 우리의 정신이 파악할 수도 없고 이름 붙일 수도 없다는 것을 뜻한다. 바로 이것이 신에 대해 일찍이 아우구스티누스가 “만일 네가 그분을 파악한다면 그분은 신이 아니다”라고 교훈한 까닭이다. 또한 신이 자기 이름을 묻는 야곱에게 “어찌하여 내 이름을 묻느냐?”(창세기 32:29)라고 되묻고 대답을 하지 않은 이유다. 나아가 모세에게 부득이 자기 이름을 알릴 때조차 “에흐예 아세르 에흐예”, 곧 ‘나는 존재다’(출애굽기 3:13)라고 한 것도 바로 그래서다. 신은 자기가 한정되고 규정된 ‘존재자’가 아니고, 그 모든 존재자들이 생겼다 소멸하는 궁극적 바탕인 ‘존재’라는 것을 밝힌 것이다. 신의 모든 속성은 무한이며, 그 때문에 그는 파악할 수 없는 자이고, 이름 붙일 수 없는 자이며, 전체로서의 하나, 곧 유일자다. 바로 이것이 성서가, 그리고 지난 2000년 동안 기독교 신학이 한결같이 선포하고 규정해온 신의 속성이다.
또 하나의 허수아비 논증
그런데 잠깐! 여기에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가고 싶은 것이 있다. 상당수의 과학자가 신에 관한 이 같은 기독교의 선포와 규정을 무시한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기독교의 신을 ‘상식 수준에서’ 또는 ‘자신들의 마음대로’ 규정한 다음, 그것을 공격하고 있다. ‘허수아비 논증의 오류’다. 숱하게 많지만 그중 한 가지 예로 신의 크기에 관한 문제를 들어보자. 미국의 천문물리학자 칼 세이건(1934~1996)이 그의 저서 ‘창백한 푸른 점’에서 주장하고 리처드 도킨스가 ‘만들어진 신’에서 자랑스레 인용한 예다. “주요 종교가 과학을 보면서 ‘이쪽이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나아! 우주는 우리 예언자들이 말한 것보다 훨씬 더 크고 더 원대하고 더 미묘하고 더 우아해’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을까? 그 대신 그들은 ‘아니, 아니, 절대 아니야! 나의 신은 작은 신이며, 나는 그가 그 상태로 머물러 있길 원해’라고 말한다. 현대과학이 밝혀낸 우주의 장엄함을 강조하는, 오래되거나 새로운 종교는 기존 신앙이 거의 손대지 못했던 차원의 존경과 경이를 이끌어낼 수 있을지 모른다.”
어떤가? 자신들이 공격하기 좋은 허수아비를 만들어 세워 놓고 공격하는 전형적인 ‘허수아비 논증의 오류’를 범하고 있지 않은가? 우주가 아무리 광대해도 그것에는 한계가 있다. 무한하지 않다. 그런데 신의 속성은 무한이기 때문에 신의 크기가 우주의 크기를 언제나 초월한다. 지금으로서는 어림없어 보이는 일이지만, 설령 언젠가 ‘다중우주론’을 주장하는 스탠퍼드대학의 안드레이 린데의 주장처럼 약 10500개라는 셀 수 없이 많은 우주가 존재한다는 것이 증명된다고 하자. 그래도 결과는 마찬가지다. 10500개의 우주란 우리로선 상상조차 할 수 없는 크기지만 무한대보다는 작기 때문이다. 그러니 우주가 광대하다는 것을 아무리 증명해낸다 해도 신학자들의 답은 변함없이 ‘신은 그 크기마저도 내포한다’이다. 바로 이 말을 4세기에는 카파도키아의 위대한 교부인 나지안제누스의 그레고리우스가, 8세기에는 다마스쿠스의 요하네스가, 그리고 13세기에는 토마스 아퀴나스가 다음과 같이 했다. “신을 가리키는 어떤 명칭보다 더 근원적 명칭은 ‘존재’다. 이 명칭, 즉 ‘존재’는 그 자체 안에 전체를 내포하며 무한하고 무규정적인 실체의 거대한 바다와도 같이 존재 자체를 갖고 있다.”
내 생각엔 여기에서 당신이 내게 ‘볼멘소리로’ 다음과 같이 묻고 싶을 것이다. “좋다! 과학자들이 하는 ‘허수아비 논증의 오류’를 인정한다. 그렇지만 그것이 우리가 다루려는 문제와 무슨 상관이 있는가? 다시 말해 신의 모든 속성은 무한이라는 것이 ‘과학이 발달하면 신의 존재도 부인되는 것이 아닌가’라는 이 회장의 물음과 무슨 관계가 있는가?” 그렇다. 얼핏 보기엔 관계가 없는 것 같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자연과학이란 모든 존재자, 다시 말해 한정할 수 있는 것, 규정할 수 있는 것에 관한 학문이기 때문이다. 자연과학은 무한을 다루는 학문이 아니다. 이 말은 자연과학으로는 신의 존재를 확인할 수도 없지만 부인할 수도 없다는 것을 뜻한다.
무한에서 보면 모든 유한은 동등하다
만일 당신이 상상력이 아주 풍부한 사람이라면, 언젠가는 생명공학도 역시 무로부터 유를 이끌어내 생명체를 만들어낼 수 있을지 모른다는 극단적 주장을 할 수도 있다. 상상조차 하기 어려운 일이지만, 설령 그런 날이 온다고 하자. 그래도 결과는 마찬가지다. 왜냐고? 물리학자들이 말하는 무는 바울이 말하는 ‘없는 것’, 곧 우리가 생각하는 ‘절대 무’가 아니기 때문이다. 현대 물리학자들은 ‘양자요동이 일어나는 에너지로 충만한 진공’ 또는 ‘양자 비약을 통해 최초의 물질 형식들이 생성되는 양자 영역’을 무로 설정한다. 즉 양자물리학자들이 말하는 무는 ‘퍼텐셜’이라고 부르는 소립자의 장(場)의 한 상태다. 그렇다면 그 퍼텐셜은 또 어디서 어떻게 생겨난 것인가 하는 의문이 여전히 남는다. 이에 대해 과학자들은 특이점의 대폭발에서라고 대답하겠지만, 그때는 그 특이점은 또 어디서 어떻게 생겨난 것인가 하는 물음을 피할 수 없다. 이에 과학자들은 “그것은 아직 모른다”라고만 대답하고, 신학자들은 “당신들이 모르는 그 원인이 바로 신이다”라고 말할 것이다.
다른 모든 이론들이 그렇듯이 자연과학 이론도 궁극적 물음에는 대답을 할 수가 없다. 설사 언젠가 특이점의 근원을 설명할 증거가 발견된다고 하더라도, 그 새로운 증거의 근원에 대한 물음이 계속해서 되풀이될 것이다. 그리고 그때마다 신학자들은 “그 대답할 수 없는 궁극적 원인이 바로 신이다”라고 답할 것이다. 이런 이유로 모든 궁극적 물음의 해답은 언제나 자연과학의 영역 너머에 놓이게 마련이다. 내 생각에 이런 정황은 수학에서 다루는 무한 개념이 몰고 가는 상황과 흡사하다. 무한대는 아무리 큰 수보다 크고, 무한소는 아무리 작은 수보다 작다. 무한은 무한히 물러난다. 때문에 우리의 이성으로는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다.
일찍이 독일의 철학자 칸트가 ‘순수이성비판’에서 설파했듯이 이성은 유한한 것만을 올바로 사유할 수 있다. 그래서 17세기의 탁월한 수학자이자 과학자이기도 했던 블레즈 파스칼은 도저히 넘어설 수 없는 신과 인간의 차이를 무한과 유한에 비유해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누군가가 사물에 대해 더 많은 지식을 가졌다고 해서 그게 무슨 대수겠는가. 그가 그런 지식을 가졌다면 좀 더 높은 곳에서 내려다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무한에서는 여전히 멀지 않은가. 그리고 우리의 수명이 10년 연장된다 해도 영원 안에서는 똑같이 미미한 게 아닌가. 무한에서 보면 모든 유한은 동등하다.” 이 말을 우리는 ‘과학이 발달하면 신의 존재도 부인되는 것이 아닌가’라는 이 회장의 물음에 대한 답으로 받아들여도 좋다. 한마디로,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는 말이다!
같은 대상을 서로 다른 관점에서 조명하여
왜 종교는 과학이 되려 하는가? 이것은 과학자의 볼멘소리다. 하지만 똑같은 형식의 질문을 과학자에게도 던질 수 있다. 왜 과학은 종교가 되려고 하는가? 이것은 종교인의 억하심정이다. 여기에서 당신에게 한 가지 묻자. 종교가 과학이 되고, 과학이 종교가 될 필요가 있을까? 우선 내 생각부터 말하자면, 그럴 필요가 없다! 프랑스대혁명을 승리로 이끈 후 스트라스부르 대성당 건물에서 기적과 연관된 조각 235개를 파괴하고 그곳 첨탑에 자코뱅당의 상징인 금속모자를 씌운 로베스피에르와 자코뱅 당원들처럼, 성당을 ‘이성의 전당’으로 개조하겠다는 망상을 과학자들이 포기한다면 말이다. 또한 언젠가 가장 높은 봉우리에 오른 과학자가 그 꼭대기 바위에 앉아서 이미 수백 년을 기다린 여러 신학자의 환영을 받게 될 것이라는 환상을 종교인들이 버린다면 말이다.
물론 과학과 종교가 대화와 소통을 통해 어떤 합의나 일치를 얻어낸다면, 그것은 바람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당연히 환영해야 한다. 하지만 그것은 쉽지 않거니와 급하게 서둘러야 할 목표도 아니다. 나는 우리의 삶과 세계의 진리를 드러내는 일은 마치 오늘날 영상 기술자가 3차원 영상을 만드는 방법과 같아야 한다고 믿는다. 영상 기술자는 서로 다른 각도에서 촬영한 2개의 2차원 영상을 나란히 겹쳐 놓음으로써 보다 실사에 가까운 입체적이고 생생한 3차원 영상을 얻어 낸다. 그렇게 해서 우리에게 전혀 새로운 차원의 경험을 선사한다. 진리를 드러내는 우리의 작업도 마찬가지 아닐까? 같은 대상을 서로 다른 관점에서 조명하여, 하나로 통합하는 게 아니라 나란히 겹쳐 놓음으로써 진리에 보다 더 가까운 입체적이고 생생한 지식이 제 스스로 드러나게 해야 한다는 말이다. 그래야 우리의 삶과 세계가 더 풍요로워질 것이다. 내 생각은 그런데, 혹시 아닌가? 당신의 생각은 어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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