밭에 묻힌 보물/책에서 옮긴 글

한겨레 신문에 연재 중인 공지영님의 <높고 푸른 사다리> 중에서

김레지나 2013. 7. 12. 18:50

[공지영 연재소설 ㅣ 높고 푸른 사다리] 죽어가고 있었지만 우리에겐 우정·연민이 있었어요

등록 : 2013.07.09 19:53 수정 : 2013.07.09 19:53

 
그림 유근택

<88> 제2부-빈들에 나가 사랑을

그것은 이제 어떤 의미로 서로 맺어진다는 것을 뜻하지요. 인형에게 애완견에게 혹은 고양이에게 이름을 붙이는 순간 그것들이 나와 관계를 맺게 되고 모든 관계를 맺은 것들은 추억이라는 것을 공유하게 되듯이 말이지요. 저는 요한이라는 이름을 좋아했기에 아마도 수사님이 우리 수도원에 오시는 걸 본 첫날 특별한 기쁨으로 설레었던 것 같습니다.”

 

그는 힘이 드는지 잠시 눈을 감았다.

 

그가 쏟아낸 말들은 정말로 금빛 모래언덕처럼 내 앞에 쌓였고 그리고 조용히 흘러내렸다. 그가 이야기를 하는 동안 병실 수사님이 몇 번 들어와 링거의 수액을 조절했고 멀리서 높은 소리로 우는 새소리가 들렸다. 처음 수도원을 찾아오던 날 그를 만난 것이 진정 하느님의 뜻이었을까. 나는 그의 입에 따뜻한 차를 흘려 넣어주며 생각했다. 성스러운 물고기처럼 대걸레를 끌고 천천히 수도원 복도를 청소하던 그가 나를 보고 던지던 미소. 아아, 정녕 황소도 쓰러지는 노동이란 어떤 것일까. 돼지로 불리며 학대당하고 감금당하는 것은 어떤 일인가. 왜 그런 일이 이들에게 일어났을까. 젊은 수녀님의 입과 코로 쏟아져 나오는 기생충이란….

 

토마스 수사님은 눈을 뜨고 다시 빙긋 웃었다.

 

“차가 참 맛있어요. 달콤하네요. 어릴 때 어머니가 그러셨죠, 토마스는 단것을 너무 좋아해. 이가 썩을까 걱정이구나…하지만 난 단것이 좋아요, 요한 수사님. 달콤한 것을 먹고 있으면 그게 어디든 집으로 온 것 같아서.”

 

그는 다시 웃었다.

 

“아직도 거기서 맞았던 첫 번째 크리스마스를 잊지 못합니다. 우리들은 간수들에게 애원해서 겨우 캐럴을 조금 부를 허락을 받았어요. 그는 참 좋은 사람이었어요. 우리가 크리스마스 미사를 하는 동안 누가 오나 망도 봐주었지요. 그는 지금 어떻게 되었을까요. 어느 집단에나 나쁜 사람이나 좋은 사람만 있는 것은 아니겠지요. 아무도 모르게 미사가 시작되었답니다. 미사가 끝나고 주방에서 일하던 수녀님들이 누룽지를 가져왔답니다. 아아, 그토록 맛있었던 크리스마스 쿠키란! 그렇게 그해 겨울이 지나가고 있었답니다. 우리들을 살린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수녀님들은 언 무와 썩은 감자로 어떻게 하든 우리에게 조금이라도 더 입에 맞는 음식을 해주시려 피나는 노력을 하셨습니다. 매일의 식단이란 이런 것이었죠. 하루는 길쭉하게 썬 언 무국, 다음날은 네모로 썬 언 무 무침, 다음날은 채를 썬 언 무조림, 이런 식으로요, 조금이라도 우리에게 다른 음식을 먹게 해주려는 그분들의 정성 때문에 음식은 정말 맛있었어요. 우리는 정신이 나간 것처럼 말하기도 했답니다. 우리 나중에 자유의 몸이 되어서 다시 세상에 나가더라도 이 음식을 꼭 다시 먹자, 뭐 이렇게 말이지요. 서로 죽어가고 있었지만 우리에겐, 그래요, 우리는 서로에 대한 우정과 연민, 연대감이 있었습니다. 사랑 말입니다.”

 

토마스 수사는 말을 마치고 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다시 빙그레 웃었다.

 

“늙은이의 말이 너무 길어지고 있군요. 죄송합니다. 이제 조금만 하면 다 끝납니다. 그렇게 첫 번째 겨울이 갔지만 우리에게는 아무런 희망이 없었어요. 영문도 모르는 폭력과 감금, 오늘과 다를 가능성이 아무것도 없이 오직 고통뿐인 내일이 우리를 점점 더 병들어가게 했어요. 영양실조로 쓰러져 죽는 사람들이 속출하기 시작했죠. 모두가 퉁퉁 부어 있었어요. 우리는 실제로 가축들이 먹는 밀기울, 탕아가 먹지 않았던 돼지죽을 후회도 분별도 없이 주워 먹었죠. 어느날 우리가 덕원수도원부터 늘 존경해오던 신부님 한 분이 사라지셨어요. 난리가 났지요. 모두가 흩어져 그분을 찾으라는 명령이 내려졌어요.

 

 

공지영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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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지영 연재소설 ㅣ 높고 푸른 사다리] 그들은 학대하는 사람들에게 하느님이 되고 싶은거야

등록 : 2013.07.10 19:38 수정 : 2013.07.10 19:38

그림 유근택

<89> 제2부-빈들에 나가 사랑을

 


온 숲과 들을 헤매며 찾아다니다가 우리는 그분을 발견했어요. 그분은 이미 죽은 사람의 무덤 앞에서 어린아이처럼 엉엉 울고 있는 채로 발견되었어요. 한눈에도 그분의 상태가 정상이 아닌 것이 느껴졌죠. 아니, 아니, 우리 모두 상태가 정상일 수는 없었겠지요. 우리는 이미 죽은 사람들, 총살당했던 사람들, 감옥에서 이미 죽은 사람들을 부러워하고 있었죠. 그때 나는 알았습니다. 침묵과 경악 속에서 깨달았죠. 아아, 모든 것은 끝났어. 신은 우리를 버렸어. 이제는 아무 희망이란 없구나. 그리고 그 신부님마저 돌아가셨습니다. 우리에게는 장례의 시간조차 허락되지 않았어요.

 

요한 신부, 그래요 더 늦기 전에 요한 루드비히 신부 이야기를 해야겠지요. 그는 키가 아주 컸어요. 팔과 다리가 길었고.-실제로 우리같이 키가 작은 사람들이 영양실조나 극한 상황에서 살아남는 것이 훨씬 유리할지도 몰라요. 실제로 그의 몸은 훨씬 더 많은 열량을 필요로 할 테니까요.-참으로 아름다운 눈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젊은 요한 신부의 상황도 심각했어요. 그는 실제로 발이 퉁퉁 부어올라 잘 걷지 못했고, 차오르는 복수 때문이었던 것 같은데 배가 늑골 아래로 심하게 부풀어 올라 숨을 제대로 쉬지 못했어요. 악독한 소장은 왜 그런지 요한 신부를 특별히 미워했지요. 해가 지고 노동이 끝나도 요한 신부는 돌아오지 못할 때가 많았어요. 온갖 트집을 잡아 소장은 그에게 일을 더 시키곤 했죠. 그의 친구라는 저는 그런 요한을 위해 고작 화살기도 한 문장 다 바치기도 전에 잠이 들어버렸답니다. 아침에 깨어보면 그는 죽은 듯 누워 있었어요. 그가 아침에 눈을 뜨기 전에 나는 실은 시체와 함께 밤새 잠을 자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가슴이 철렁했답니다. 어느 날 그와 개울가에서 잠시 쉬고 있었어요.

 

‘토마스, 요즘 깨닫게 된 것이 하나 있네. 모든 죄는 결국 에덴에서 아담과 하와가 했던 그 생각, 즉 나도 하느님처럼 되고 싶다, 의 변주(變奏)라는 걸. 여기서 우리들에게 군림하는 저 소장도 저 감시원도 독일을 초토화시켜버린 히틀러와 그 일당도, 모든 독재자와 고문하는 이들, 자기보다 약한 자들을 학대하는 모든 이들은 결국 같아. 그들은 그들이 학대하는 그 사람들에게 하느님이 되고 싶은 거야.’

 

하루종일 머릿속은 먹을 것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차 있던 제게 그것은 참으로 난데없는 이야기였습니다. 요한 신부는 이상하게도 평화로운 목소리로 다시 말을 이어갔지요.

 

‘그리하여 학대를 받는 모든 사람은 하와가 뱀에게 질문을 받을 때 느꼈던 그 혼돈 , 그 딜레마에 빠지게 되지. 즉 하느님이 우리를 속였을지도 모른다, 라는 혼돈일세. 신이 우리를 사랑하지 않고 돌보아주지 않고 소풍을 가버렸을지도 모른다는 의심 말일세. 토마스, 그렇지 않나? 생각해봐. 그러므로 저들이 혹은 악이 우리에게 원하는 것은 뱀이 하와에게 원했던 그것, 즉 하느님이 우리에게 이미 에덴을 주었고 우리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기억하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야. 사랑을 의심하여 배신하게 만들려는 수작이란 말이지. 그 수작이란 어렵지 않아. 바로 우리가 우리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네. 우리가 스스로를 존엄하게 생각하지 못하게 말이야. 하느님이 손수 주신 우리들의 세례명을 박탈하고 우리를 돼지로 부르는 것이나 숫자로 부르는 일 모두가 같네. 우리가 우리를 사랑하지 못하게 하려던 거야 그건. 나도 처음엔 의아했지. 그들은 왜 우리에게 이런 노동을 시킬까, 그들은 왜 우리를 밤에 불러내어서 손을 들고 벌을 세울까, 이 우스꽝스럽기까지 한 고통은 정말 신이 우리에게 원하는 것일까. 그들은 우리를 죽도록 일 시키고 있네. 정말 노동력이 필요해서? 아니지. 나는 저들의 행위를 이해하려 애썼네. 우리는 죄인도 아니고 우리는 저들에게 기실 아무 짓도 하지 않지 않았나 말일세.

 

공지영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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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지영 연재소설 ㅣ 높고 푸른 사다리] 예수의 명령은 사랑 안에서 패배하라는 것이었네

등록 : 2013.07.11 19:28 수정 : 2013.07.11 19:28

 
 
그림 유근택

<90> 제2부-빈들에 나가 사랑을

그러나 이곳 소장의 눈빛은 실제로 우리에 대한 증오로 빛나고 있어. 왜일까? 저들은 왜 우리를 미워하고 괴롭힐까?

 

요한 신부가 가진 의문은 실제로 제가 가진 의문이었기에 저도 대답할 수 없었습니다.

 

‘토마스, 저들과 우리가 왜 여기서 만나 이러고 있는 것일까. 저들의 짧은 인생과 우리의 짧은 인생을 더듬어 아무리 그 이유를 찾아내려 한들 우리는 아무 답도 찾을 수가 없다는 것을 나는 이제 알게 된 것일세. 이것은 신비야. 악의 신비라구! 우리는 그저 하느님과 예수라는 사랑의 편에 서려고 했기 때문에 그것을 반대하는 저들의 먹이가 되었네. 우리는 우주의 커다란 두 세력이 충돌할 때 하필이면 그 변방에서 그 충격을 몸소 맞으며 서 있게 된 걸세. 저들도 자기들이 왜 여기에서 우리를 미워하고 있는지 모르겠지. 우리와 저들의 대치(對峙)는 어쩌면 처음부터 말도 안 되는 싸움이고 일방적인 저들의 승리인 싸움인 듯도 보이네. 그러나 예수가 처음부터 우리에게 요구한 것은 기실 이제까지 인류 역사와 전혀 다른 방식으로 싸우라는, 즉 사랑 안에서 패배하라는 명령이었네. 우리가 한국에 파견될 때 받았던 선교의 사명은 이곳에서도 계속되고 있는 것이네. 아니 어쩌면 이곳에서 가장 크게 요구되는 것인지 모르지. 우리는 기필코 패배해야 하네.

 

내가 그 말뜻을 생각하기 위해 입을 다물고 있는 동안 요한 신부는 잠시 후 노래를 흥얼거리기 시작했습니다. 사랑의 송가(頌歌), 고린토 전서 13장에 곡을 붙인 그 노래 말이지요.

 

‘내가 인간의 여러 언어와 천사의 언어로 말한다 해도 나에게 사랑이 없다면 나는 요란한 꽹과리나 징에 지나지 않네. 내게 예언하는 능력이 있고 모든 신비와 모든 지식을 깨닫고 산을 옮길 만한 믿음이 있다 해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네. 내가 모든 재산을 나누어 주고 내 몸까지 자랑스레 넘겨준다 하여도 사랑 없으면 그 무슨 소용 없네. 사랑 없으면 소용이 없네. 아무것도 아니라네.’ 노래를 마친 그가 저를 바라보았어요.

 

‘토마스, 바오로 사도의 이 말씀이 사실이라면 말이야, 우리가 천사의 말을 하지 않아도, 우리가 예언하지도 못하고 지식도 없고 심오한 진리를 깨닫지 못해도, 심지어 하느님 말씀을 전하지 못한다 해도, 우리가 우리의 몸을 다 바치고 있지 못한다 해도 사랑만 있다면 우리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아니라는 거겠지.’

 

한번도 그 구절을 거꾸로 해석해 본 적이 없기에 저는 조금 놀랐습니다. 요한 신부는 누더기를 입은 두 팔을 올려 하늘을 향했어요. 아직도 그 장면을 기억하는데 나는 그에게서 어떤 빛 같은 것이 쏟아져 나오는 것을 보았어요. 그가 다시 말했죠.

 

‘우리가 이 시련을 다 이긴다 해도, 우리가 심지어 여기서 하느님을 위해 순교한다 해도, 아니 자네와 내가 여기서 이 모든 사람들을 무찌르고 탈출한다 해도 우리가 이 시련을 사랑이 아니라 악으로 참아내는 거라면 우린 아무것도 아닌 게 되는 거라네. 어제 저녁 경당에서 졸며 경배드릴 때 나는 하느님에 대한 사랑, 예수에 대한 사랑, 진리에 대한 사랑으로 이 시련을 수락했네. 하느님께 예, 하고 말씀드렸어. 그리고 나는 알았네, 저들이 우리에게 빼앗을 수 없는 단 한 가지는 그들이 억지로 우리에게 준 이 고통을 우리가 기꺼이 받아 사랑에게 봉헌한다는 것이네. 그건 저들이 우리를 죽인다 해도 어쩔 수 없겠지. 우리는 참으로 존귀하며 우리는 이 모든 우주의 주인이신 분이 특별히 지어내신 귀염둥이들이 아닌가 말일세. 이 짧은 세상이 끝나고 설사 죽어보니 모든 게 무(無)로 돌아간다 해도, 나는 저들과 나 둘 중 어떤 역을 맡겠느냐는 신에게 저들처럼 학대하는 역을 맡지는 않겠다고 분명히 말씀드릴 걸세. 그러자 모든 고통의 의미가 내게로 다가왔네. 나는 적어도 무의미의 고통에서는 벗어났네….

 

 

공지영 소설가

 

 공지영 연재소설 ㅣ 높고 푸른 사다리] 거름 더미에 엎어져 숨진 그의 얼굴은 평화로웠습니다

등록 : 2013.07.14 19:36 수정 : 2013.07.14 19:36

그림 유근택

그는 웃었습니다. 아주 활짝 웃었어요. 그리고 다시 두 팔을 하늘을 향해 들었지요. ‘모든 것을 가르쳐주신 하느님, 감사합니다. 넘치는 햇살, 맑은 개울물, 신선한 공기를 주신 하느님, 찬미 받으소서.’

 

나는 그가 미쳐가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니 실제로 그랬을지도 모릅니다. 찬미라니요? 찬미라니요? 우리는 겨우 존재하고 있을 뿐인데. 설사 그의 말대로 이 의미 없는 죽음의 행진에 그런 의미가 있다 해도 나는 묻고 싶었거든요.

 

‘하느님, 꼭 이 방법을 쓰셔야 했습니까?’

 

그날 석양이 질 무렵 뜨거운 땅의 열기가 복사열을 다시 쏟아낼 때 나무를 하던 제가 숲에서 나와 보니 그가 거름 더미에 앉아 있었습니다. 무얼 하고 있느냐고 물으니 거름 더미를 두드리라는 명령을 받았다고 하더군요. 아마 발과 배가 부어오를 대로 오른 그가 움직이지 못하니 그런 일이라도 시킨 것 같았습니다.

 

건초와 인분이 한국의 여름 열기에 발효되어 독한 메탄가스가 올라오고 있었습니다. 근처에 있는 저도 똑바로 서서 숨쉬기 힘들었습니다. 가까이 가보니 거름 더미 위는 허연 구더기의 덩어리들 위였고 파리들이 그의 온몸을 잡아먹을 듯이 맹렬하게 그의 얼굴과 머리 심지어 귀까지 뒤덮고 있었습니다. 구더기는 그의 종아리까지 꼬물거리고 있었고 파리들이 미친 듯이 윙윙거리는 소리가 들렸지요. 그의 모습은 지옥의 한가운데에 서 있는 가련한 먹이 같았습니다. 그런데 나와 문득 눈이 마주쳤을 때 그는 어쩌면 웃는 것 같았습니다. 조금이라도 입을 벌리면 파리가 그 입속으로 들어갈지 모르기에 그는 입을 다물고 있었지만 저는 그의 눈이 하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토마스, 아까 말했지 않나? 나는 예, 하고 대답했네. 이제 저들이 나에게 강제로 시키는 모든 고통은 내가 기꺼이 내 것으로 받아 하느님께 바치는 봉헌물이 되었네. 이로써 무의미는 의미로 변하고 악의는 사랑의 열매로 변할 수 있다네.’

 

끔찍했습니다. 그는 드디어 미친 것 같았습니다. 나는 그를 지나쳐 일단 숙소 옆으로 갔습니다. 무감각할 수 있었던 또 하나의 이유는 그런 노동도 기실 그 당시 우리에게는 그리 낯선 풍경은 아니었기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저녁 식사 시간에 그가 들어오지 않아 내가 그에게로 갔습니다. 발이 불편해 거름 더미 위에서 내려올 수 없을 것 같아서 도와주려고 말이지요. 그는 거름 더미에 엎어져 있었습니다. 내가 달려가 그를 안았을 때 그는 이미 숨을 거둔 지 좀 된 것 같았습니다. 파리가 뒤덮은 그의 얼굴에서 내가 미친 듯이 파리떼들을 몰아내고 그의 얼굴을 보았습니다. 그의 얼굴은 미소 띤 채였습니다. 내가 이제껏 보아왔던 어떤 모습보다 그의 얼굴은 평화로웠고 아름다웠습니다. 믿을 수 있으신지요? 믿을 수 없으시겠죠? 저도 제 눈으로 보아놓고 오래도록 믿을 수 없었으니까요. 소장이 말했죠.

 

‘잘됐군, 어차피 일도 못하고 밥만 축내는 돼지 한 마리.’

 

그의 죽음은 우리들 중 가장 젊은 죽음이었습니다. 수녀님들은 소장과 싸워 그의 장례식 미사를 허락받아냈지요. 조팝나무 하얀 꽃으로 화관도 만들었습니다. 하얀 꽃으로 장식된 그의 아름다운 얼굴 앞에서 수녀님들은 눈물도 흘리지 못하고 노래를 불렀습니다. 장례미사가 시작되었지만 나는 기도할 수 없었습니다. 나는 미사를 드리고 싶지 않았습니다. 나는 기도하고 싶지도 않았고 신이 더 이상 우리를 사랑한다는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아니, 나는 오히려 그를 증오하고 싶은 마음이었습니다. 미사가 끝나고 그의 몸이 흙 속으로 들어가려 할 때 나는 모두를 제치고 다가가 그를 안았습니다. 그리고 소리쳤습니다.

 

왜!!!! 대체 왜!!!!

 

공지영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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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지영 연재소설 ㅣ 높고 푸른 사다리] 네 번의 겨울, 38명을 잃은 뒤에 독일로 송환됐습니다

등록 : 2013.07.15 21:38 수정 : 2013.07.15 22:17

그림 유근택

<92> 제2부-빈들에 나가 사랑을

“모든 것이 무의미했습니다. 무의미… 그것은 참으로 무서운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나를 부정했고 나의 생명을 부정했고 내 곁에서 오로지 생존을 위해 애쓰는 모든 사람을 부정했습니다. 나 또한 죽음을 향해 한 발걸음씩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아아, 죽음이 그토록 아름답게 내게 다가오다니요. 그것은 달콤한 휴식 같았고 그것은 이 모든 것의 영웅적 귀결처럼도 보였습니다. 삶은 구차했고 내 주변의 모든 이들이 갑자기 그저 생존을 위해 하루하루 살아가는 짐승 혹은 벌레들 같았습니다. 그리하여 모든 것이 혼돈으로 소용돌이쳤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얼마간의 시간이 지났을까요. 아마도 어느 날 우리는 잠깐 쉬고 있었습니다. 독일에서와 같이 한잔의 커피도 한 조각의 달콤한 과자도 없이 맥주나 소시지는 더더욱 없이, 우리는 그저 앉아 지친 몸을 쉬고 있었죠. 그때 우리를 조롱하는 그들의 말이 제 귀에 들려왔습니다. 그들은 우리를 돼지라고 부르며 시시덕거리면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습니다. 순간 제 가슴속에서 주먹만한 불덩이 같은 것이 솟구치는 것 같았습니다. 저도 모르게 저는 중얼거렸습니다.

 

‘미안하지만 너희들을 조금도 부러워하지 않아. 너희는 모르지. 정신의 기쁨을 위해 희생되는 육체의 어떤 뿌듯함을. 힘듦을 참으며 양보하는 손길의 따스함을. 죽음 너머의 삶을 생각하는 우리의 존엄을. 죽음 후에도 계속되는 우정과 그리움을. 그래 설사 죽고 난 후에 이 모든 것이 무(無)임을 발견하고 내가 내 삶을 돌아본다 해도 나는 너와 나 중에서 학대하는 자의 역할은 맡지 않을 것이야. 그러니 나는 너희를 조금도 부러워할 생각이 없어. 또한 너희가 우리를 두고 하는 이 조롱에 조금도 동의할 생각이 없어.’

 

그랬죠. 설사 모든 것이 혼돈이고 무의미라 해도 그들의 역할을 거부할 것은 확실했습니다. 그러자 모든 것들이 다 제자리를 찾아갔습니다. 그때 나는 알았습니다. 내가 요한 신부의 말을 누구보다 가슴 깊이 간직하고 있었고 그리고 그의 말에 깊이 영향 받고 있었다는 것을 말이지요. 나는 그렇게 네 번의 겨울을 버텼고 우리들은 드디어 독일 정부의 손길에 의해 독일로 송환될 수 있었습니다. 우리 수도원에서는 그 겨울 동안 한국인을 포함해 그렇게 38명을 잃었습니다.”

 

나는 나도 모르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까 토마스 수사님이 거름 더미에서 죽은 요한 신부의 시신을 안고 왜 하느님, 대체 왜? 하고 물었을 때부터 그러고 싶었다. 창가에서 잠시 마음을 추스르고 돌아보니 토마스 수사님은 오랜 이야기가 힘에 겨운 듯 잠시 눈을 감고 있다가 나와 눈이 마주치자 조그맣고 파란 눈을 아이처럼 찡그리며 또 웃었다.

 

“그 후로도 나는 가끔 옥사덕을 만났어요. 박정희가 해방신학에 대한 책을 인쇄한다고 우리 인쇄소를 압수했을 때, 그때 우리 독일 사람들은 차마 못 건드리고 한국 수사님들 직원들 데려갔을때, 가난한 사람들의 사진을 자주 찍는다는 이유로 최민식 작가의 사진집을 압수했을 때, 나는 옥사덕을 보았지요. 남미의 로메로 주교의 학살에서 80년 5월 도륙당하던 광주…에서요. 요한 수사님, 악은 수많은 얼굴로 다가옵니다. 사실 사람인 우리가 그것을 식별하는 것은 은총에 의지할 뿐입니다. 그러나 한가지 확실한 것도 있어요. 우리가 사랑하려고 할 때 그 모든 사랑을 무의미하게 느껴지게 만드는 모든 폭력, 모든 설득, 모든 수사는 악입니다. 너 한 사람이 무슨 소용이야, 네가 좀 애쓴다고 누가 바뀌겠어, 네가 사랑한들 아는 사람 하나도 없어… 속삭이는 모든 것들을 경계해야 합니다. 어쩌면 옥사덕이나 남미 로메로의 피살이나 유신 혹은 광주 학살 같은 것은 아직 난이도가 높은 것은 아닐지도 모르죠. 이제 악은 다른 얼굴로 우리에게 달려듭니다. 소리없는 풀모기처럼 우리를 각개격파하러 옵니다. 그들이 우리에게 원하는 것은 단 한가지입니다, 그것은 무의미입니다.”

 

 

공지영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