밭에 묻힌 보물/책에서 옮긴 글

<용서라는 고통> 중에서

김레지나 2013. 6. 18. 18:44

 

나의 관심사는 피해자들이 상처를 딛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또한 용기와 힘을 되찾고 영적·신학적 유대감을 가질 수 있도록 돕는 일이다. 성서든 예배든 성찬례든 윤리든, 기독교는 용서라는 말로부터 벗어날 수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말하고 행하고 제안하게 될 진지한 사고인 신학과, 용서가 중요해보이지만 도저히 불가능한 상황 간에는 괴리가 있다. 나는 이 괴리를 아들을 잃은 그 어머니를 위로하려 할 때 가슴 깊이 경험했다. 그건 너무나도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이후 수년간 그때의 경험을 돌이켜보면서 내 나름대로 하나의 결론에 이르게 되었다. 용서가 곧 고통이라는 것을! 용서는 결코 쉬운 해결책도 즉효의 처방도 아니다. 긴 시간이 걸리는 고통이다. 다만 그냥 고통이 아닌, 치유의 고통이다.--- p.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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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용서라는 고통…스티븐 체리 지음·송연수 옮김 | 황소자리 | 324쪽 | 1만5000원

저자는 가톨릭 신부다. 그동안의 저작은 신학과 심리학에 걸쳐 있다. 영국 케임브리지대에서 학생들에게 신학과 윤리학을 가르쳤고, 일간 ‘인디펜던트’와 ‘교회 타임스’(The Church Times)에 기고하는 칼럼니스트이기도 하다. 저자의 약력과 책의 제목만 일별한다면, 용서를 설파하는 특정 종교 서적으로 오해받기 십상이다. 다행히 저자는 용서를 강요하는 태도, 말하자면 ‘용서 신드롬’에 대해 고개를 내젓는다. 그는 책을 쓴 동기를 첫 번째 장에서 이렇게 밝힌다.

살인 범죄로 10대 아들을 잃은 여인이 “그들을 꼭 용서해야 하는 건가요?”라고, 교구 사제였던 이 책의 저자 스티븐 체리에게 묻는다. “내가 감당하기엔 너무 버거운 질문이었다. 나는 마음속으로, 어서 가족지원 경찰관이 당도해 이 대화를 멈춰주길 기다렸다. 나는 손을 잡고 흐느끼는 그녀에게 ‘너무 이르지요. 용서를 떠올리기엔 아직 이릅니다’라는 말밖에 할 수 없었다.” 그 곤혹스러운 장면이 지나간 뒤 “용서를 주제로 박사 논문까지 썼던” 그는 생각했다. “나는 그 논문이 혹여 소용될 순간이 찾아오면 나를 든든히 떠받쳐줄 버팀목이 되리라 믿었다. 하지만 현실의 극심한 고통 앞에서 한순간에 물거품처럼 사라졌다.”

저자는 자신이 특정한 종교적 울타리를 벗어나 ‘용서’에 대해 탐구하게 된 계기를 그렇게 밝힌다. 이후 그는 신학과 의학, 심리학과 인지학의 연구자료를 찾아 읽고 끔찍한 사고와 사건의 피해자들을 직접 만났다. 그래서 책에는 용서에 관한 갖가지 인용 문구가 등장하고 저자가 직접 만났던 사람들의 사례가 빈번하다. 말하자면 이 책은 자잘한 배신과 상처에서부터 국가가 저지른 끔찍한 범죄 피해에 이르기까지를 두루 살피면서, 용서의 의미와 맥락, 실천 가능성 등을 다각도로 탐색한다. 책은 기독교를 비롯한 여러 종교가 설파하는 용서는 다만 ‘관념’이며, 그것과 현실 사이에 막막한 괴리가 있음을 간과하지 않는다. 저자는 자신이 만난 숱한 사람들과 사례 속에서 그 사실을 실감한다. 특히 아파르트헤이트 종식 직후인 1996년의 남아공에서 그 실감은 유난히 컸다. 저자는 한 세기에 가깝도록 반인류적 범죄가 자행됐던 그곳을 찾아간다. 훗날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데스몬드 투투 대주교. 진실화해위원회 의장인 그는 “진실은 화해에 이르는 길!”이라는 슬로건을 내세우며 정력적으로 과거사 청산에 나서고 있었다. 하지만 ‘화해와 사면’을 분주하고도 일괄적으로 처리하는 과정에서 숱한 부작용이 속출하고 있었다. ‘분노는 내려놓되 가해자는 처벌하라!’는 목소리는 무시됐고 용서와 금전적 보상을 맞바꾸는 분위기마저 팽배했다.

저자는 그곳에서 많은 사람들, 주로 피해자였던 사람들을 만나면서 “100만개쯤 되는 사실들을 새로 알게 되었다”고 말한다. 그중 확연히 드러나는 것 몇 가지를 이렇게 거론한다. “첫째 용서는 생각만큼 간단하지 않다. 다시 말해 모든 용서 이야기는 헤아리지 못할 만큼 숨겨진 깊이를 가지고 있다. 둘째 용서에는 역사적 맥락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과거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뿐만 아니라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도 같이 살펴야 한다.”

피해를 입은 사람들의 주관적 상태를 지칭하는 가장 일반적인 단어는 ‘상처’다. 그러나 그 한마디로 황무지 같은 마음을 온전히 형언할 순 없다. 상처받았다는 것은 고통이 가해졌다는 사실을 뛰어넘어, 고통이 현실 속으로 침투해 들어오는 것까지를 포함하기 때문이다.

저자는 “누군가 길거리에서 당신에게 실수로 부딪힌 경우”에서부터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이 살해당한 경우” “당신이 고문당한 경우” 등과 같이 상처에는 다양한 단계가 있음을 지적한다. 그래서 용서는 수수께끼처럼 애매한 관념이 되고 만다. 모양과 깊이가 가지각색인 상처 앞에서 ‘용서’라는 만병특효약을 선전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얘기다.

저자가 더듬고 있는 상처와 용서의 사례는 다양하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군에 포로로 잡혔던 고문 피해자, 홀로코스트 생존자, IRA 폭탄 테러로 눈앞에서 딸을 잃은 아빠, ‘묻지마 범죄’로 아들을 잃은 엄마, 성폭행 살인 사건으로 동생을 잃은 언니, 강도 살인 사건으로 하루아침에 가족을 모두 잃은 가장의 사례 등이 등장한다. 저자는 모든 상처가 그렇듯이, 용서 역시 하나의 과정이나 전형으로 일반화할 수 없는 복잡하고 미묘한 문제임을 상기시킨다.

책은 용서에 대한 일반적 관념을 거부하면서 용서를 강요하지 말라고 주문한다.

 

용서가 그만큼 어렵고 고통스럽기 때문이다. 하지만 저자의 궁극적 결론은 역시 ‘용서’로 모아진다. 저자는 책의 말미에 이르러 “용서는 곧 고통이다. 그것도 긴 시간이 걸리는 고통이다. 하지만 반드시 필요하다”고 말한다.

“용서라는 말이 가장 불가능한 단어가 돼버린 사람들에게 반드시 필요한 것은 역설적이게도, 용서”라는 것이다. 어렵고 지난한 용서의 행위야말로 “상처에 대한 분노, 복수, 비통, 원한을 넘어서서 앞으로 나아가는 더 나은 방법”이기 때문이다. 저자는 이 지점에서 페테 쉐퍼의 연극 <고곤의 선물>에 등장하는 주인공 헬렌의 대사를 끌어온다. “옆구리를 파고드는 이 뾰족한 창을 스스로 뽑아버리지 않으면 안 돼요. 그것도 아주 조심스럽게 빼내야죠. 그 속의 창자까지 같이 딸려나오게 해서는 안 되니까요.” 저자의 비유에 따르자면, 용서란 바로 옆구리에 박힌 창을 뽑는 일이다. 그래서 저자는 “(용서란) 새로운 나로 나아가는 것. 상처를 잊는 것이 아니라 상처의 기억이 남은 삶을 지배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라는 말로 자신의 논지를 마무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