밭에 묻힌 보물/책에서 옮긴 글

[스크랩] [백만장자의 마지막 질문 24] 예수는 우리의 죄를 대신해 죽었다는데, 우리의 죄란 무엇인가? 왜 우리로 하여금 죄를 짓도록 내버려두었는가? (하)

김레지나 2013. 7. 17. 18:20

백만장자의 마지막 질문 24
예수는 우리의 죄를 대신해 죽었다는데, 우리의 죄란 무엇인가? 왜 우리로 하여금 죄를 짓도록 내버려두었는가? (하)

 

김용규 철학자
주간조선 [2219호] 2012.08.13

 


‘제노사이드(genocide)’라는 용어가 있다. 근래에는 ‘인종 청소’라는 말로도 자주 표현되는 제노사이드는 상대가 잘못을 했든 안 했든 간에 단지 어떤 집단에 속해 있다는 이유만으로 무조건 살해하는 집단학살을 뜻한다. 혁명기 스탈린의 러시아에서는 2000만명, 2차 대전 중 히틀러의 나치 점령지에서는 1000만명에 달하는 사람들을 제노사이드했다. 어디 그뿐인가? 제레드 다이아몬드의 ‘제3의 침팬지’에 의하면, 20세기 안에 행해진 집단학살 가운데 100만명이 넘는 규모만도 10건에 가깝다. 1915년 아르메니아에서, 1941년부터 발칸반도에서, 1950년대에서 1970년대까지 북 수단에서, 1971에서 1979년까지 우간다에서, 1960년대부터 부룬디·르완다 등에서, 1960년대 인도네시아에서, 그리고 문화대혁명 시기에 중국에서, 1971년 방글라데시에서, 1975년부터 1979까지 캄보디아에서, 1990년대에 발칸반도에서 수십만 또는 수백만씩 양민들이 집단학살되었다.

 

구약성서 창세기에서 신은 죄를 짓고 두려워 숨은 아담을 “네가 어디 있느냐”라고 찾아 부른다. 그런데 참혹한 제노사이드 현장에서, 또는 그에 관한 처연한 소식을 접하며 사람들은 오히려 “신은 어디에 있느냐”라고 외쳐 부르게 된다. 그 끔찍한 광란과 살육의 시간에 신은 도대체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었냐고 따지게 된다. 바다를 가르고 해를 멎게 하며 처녀를 잉태하게 하고 죽은 자를 다시 살리는 신이 왜 이 같은 집단살육을 막지 못하는가, 사람의 가죽을 벗겨 구두를, 체지방으로 비누를, 머리털로 담요를 만드는 광기를 왜 차단하지 못하는가 하고 탓하게 된다. 내 생각에 신은 ‘왜 우리로 하여금 죄짓도록 내버려 두었는가’라는 고 이병철 삼성그룹 회장의 질문에도 사실인즉 이 같은 억하심정이 들어있다. 자, 그럼 알아보자. 도대체 신은 왜 우리로 하여금 죄짓도록 내버려 두었는가?

 

신이 존재하지 않으면 모든 것이 허락된다

 

혼란을 피하기 위해 잠시 정리하고 가자. 지난호에서 우리는 “예수는 우리의 죄를 대신 속죄하기 위해 죽었다는데, 우리의 죄란 무엇인가”라는 이 회장의 질문에 대한 기독교의 답변을 살펴보았다. 그것은 거짓말, 도적질, 강간, 살인과 같은 도덕적 또는 법률상의 죄가 아니라고 했다. 그것은 우리가 ‘신을 거역하고 떠나는 것’ ‘신으로부터 돌아서는 것’, 그럼으로써 일찍이 캔터베리 대주교 안셀무스가 열거한 모든 가치들(본질·생명·행복·정의·지혜·진리·선·미·불사성 등)을 상실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그 결과가 도덕적 또는 법률상의 죄를 짓는 악행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이어지는 이 회장의 질문인 신은 왜 우리로 하여금 죄짓도록 내버려 두었는가는 당연히 신은 왜 우리로 하여금 신으로부터 돌아서 떠나게 내버려 두었는가, 그럼으로써 인간이 인간이기 위해 요구되는 모든 소중한 가치들을 상실하게 하였는가, 그 결과 거짓말, 도적질, 강간, 살인, 심지어 제노사이드와 같은 악행을 저지르게 하였는가라는 의미가 된다. 그렇지 않은가?

 

이에 대한 아주 간명하지만 매우 자극적인 답을 일찍이 프랑스의 문호 앙리 스탕달이 이미 해놓았다. “신의 유일한 변명은 자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뿐이다”라고! 같은 말을 독일의 철학자 니체가 1882년 출간한 그의 ‘즐거운 학문’에서 더 강하고 보다 열정적으로 했다. “신은 죽었다! 신은 죽어 버렸다! 우리가 신을 죽인 것이다”가 그것이다. 근대 이후 인간의 입에서 나온 선언들 가운데 가장 충격적인 것임에 틀림없는 이 말이 뜻하는 바는 신은 죽었기 때문에 우리가 그에게서 돌아서서 떠나는 죄를 짓도록 내버려둘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신은 죽었기 때문에 우리가 그의 이름으로 대변되었던 기존의 기치들을 상실하고 제노사이드와 같은 끔찍한 악행들을 하도록 놓아둘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신의 죽음! 당연히 이것은 기독교의 답변은 아니다. 그러나 이것은 이 회장이 물음을 던질 때 깔아두었던 은밀한 의심이고, 나와 당신이 신에 대해 생각할 때 자주 떠올리는 공공연한 비밀이다. 뿐만 아니라 니체를 계승한 20세기 실존주의자들이 딛고 서있던 굳건한 디딤돌이기도 하다. 예컨대 독일의 철학자 하이데거가 인간을 “내던져진 존재”라고 규정할 때나 프랑스의 철학자이자 작가인 사르트르가 카뮈의 소설 ‘이방인’의 주인공 뫼르소에 대해 언급하며 “신은 존재하지 않으며 인간은 반드시 죽는 것이므로 모든 것이 허락되어 있다”라고 설파할 때에도, 신의 죽음에 의한 ‘죄짓도록 내버려둠’과 ‘악행을 저지르도록 내버려둠’이 이미 전제되어 있었다.

 

그런데 과연 그런가?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이 기독교의 교리다. 기독교는 신은 영원히 살아 있어 인간을 비롯한 피조물들을 창조할 뿐 아니라 보전하고 인도하여 구원에 이르게 한다는 것을 시종 변함없이 주장해 왔다. 비록 인간이 그를 거역하고 떠나는 죄를 아담 이후 부단히 반복함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만물은 신의 선성과 닮기 위해서라는 이유로 창조되었다”라는 중세 가톨릭 성인 토마스 아퀴나스의 선언이 그것을 대변한다. “창조는 구원의 시작이요, 구원은 창조의 목적”이라는 20세기 프로테스탄트 신학자 칼 바르트의 주장도 그것을 확인한다. 요컨대 신은 결코 우리로 하여금 죄짓도록 또는 악행을 저지르도록 수수방관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오히려 신은 창세로부터 종말에 이르기까지 인간을 죄와 악행들로부터 구원하려고 “피곤한 줄도 지칠 줄도 모르고”(이사야 40:28) 애쓰며, 신구약성서는 오직 그 같은 신의 구원 사역에 대한 기록이라는 것이 기독교 교리다. 물론 이 같은 주장을 믿거나 말거나 하는 것은 당신의 자유다. 하지만 그에 앞서 어쨌든 그들이 무엇을 근거로 그런 주장을 하는지를 알아야 하지 않겠는가! 먼저 알아보자. 선택은 그 다음에 해도 늦지 않다.

 

기독교는 구원의 종교다

 

기독교가 내세우는 진리를 단 한 마디로 요약한다면 “신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한복음 3:16)가 되어야 한다. 기독교는 구원의 종교다. 따라서 이 종교의 모든 교리는 구원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신이 구약시대에 선지자들과 율법을 통해 시종일관 죄를 들춰낸 이유도 신약시대에 예수와 복음을 통해 구원을 이루려고 했다는 것이 기독교 교리다. ‘첫 번째 인간’인 아담이 지은 죄를 ‘마지막 인간’인 예수가 사해준다(고린도전서 15:45)는 것이 기독교의 가르침이다. ‘땅에서 난 인간’이 가져온 사망을 ‘하늘에서 난 인간’이 다시 살린다는 것(고린도전서 15:47~48)이 기독교가 주장하는 구원의 드라마다. 사도 바울은 이 말을 한마디로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고린도전서 15:21~22)라고 선포했다. 이같은 이원적 대조가 바울과 아우구스티누스 전통을 따르는 서방 기독교에서 말하는 구원의 가장 단순하고 근본적인 구조다.

 

동방정교에서는 이보다 조금 더 복잡한 이레내우스 전통의 구속사적 구원론을 따른다. 2세기 루그두눔(지금의 프랑스 리옹) 감독이던 이레내우스(140?~200)는 구원을 신의 섭리에 의해 성서에 나타난 순서대로 차례로 전개되는 역사적 사건으로 파악했다. 여기에는 네 번의 커다란 계기가 있다. 첫째는 아담과의 계약으로 노아의 홍수까지 계속되고, 둘째는 노아와의 계약으로 출애굽까지 연장되며, 셋째는 모세와의 계약으로 예수에서 끝나고, 넷째는 예수와의 계약으로 종말까지 계속되어 결국 구원을 완성한다. 이처럼 인류의 역사는 순차적으로 구원을 향해 나아가고, 신은 종말에 이르기까지 인간을 죄와 악에서 구원하기 위해 사역한다는 것이 요점이다. 이레내우스는 이것을 ‘오이코노미아’, 곧 신적 경륜이라고 불렀다. 세부적으로 보면 동방정교의 구원론은 서방 기독교의 그것과 차이가 있다. 하지만 그것은 지금 우리의 관심사가 아니다. 우리가 지금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신이 인간과 세계를 부단히 보살피며 궁극적으로는 구원으로 이끈다는 것과 율법이 아니라 예수에 의해서 구원이 성취된다는 것을 강조한다는 점에는 동서방 기독교가 다름이 없다는 사실이다.

 

도덕주의가 실패할 수밖에 없는 이유

 

먼저 율법이 주어졌다. 율법이란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네 이웃을 탐하지 말라 등, 도덕적 또는 법률상의 죄를 금하는 윤리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한 윤리가 아니다. 율법은 하나의 ‘계약’이다. 계약이란 설사 그것이 신과 인간 사이에 성사된 경우라고 할지라도 두 당사자 사이에 져야 하는 부담이 쌍방적이어야 한다. 율법에도 당연히 인간이 부담해야 할 몫과 신이 부담해야 할 몫이 존재한다. 십계명을 내리기 직전에 신이 확인한 약속, 곧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열국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출애굽기 19:5~6)가 그것을 잘 보여준다. ‘율법을 지키는 것’은 인간의 몫이고, ‘인간을 거룩하게 하는 것’, 다시 말해 인간을 구원하는 것이 신의 몫이다. 바로 이런 계약 아래서 율법은 구원의 수단이었다. 신으로부터 돌아섬으로써 죄의 노예가 된 인간과, 빛으로부터 돌아섬으로써 어둠 속에서 눈먼 자가 의지할 지팡이였다.

 

그런데 문제는 인간이 제 몫을 다하지 못하는 데에서 생겼다. 구약성서는 사울, 다윗, 아합, 예후, 여로보함 등등 숱한 사람들을 통해 이에 대한 충분한 예를 제시하고 있다. 아니 구약성서 전체가 율법 앞에서 드러난 인간의 죄성과 무능함을 드러내는 거대한 서사시라는 것이 기독교의 입장이다. 그렇게 보면 율법은 구원이 아니라 오히려 죄의 현상을 인식시켜 더 큰 절망에 빠지게 하는 일을 할 뿐이다. 바울이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로마서 3:20), “죄가 율법이 있기 전에도 세상에 있었으나 율법이 없을 때에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아니하였느니라”(로마서 5:13)라고 교훈한 것이 그래서다. 요컨대 교통법규가 생기기 전에는 교통위반을 위법으로 여기지 않았다는 얘기다. 결국 율법(또는 윤리)에 의한 인간구원은 철저히 실패했다.

 

그러자 보다 더 근본적 치료법이 요구되었다. ‘죄 사함’이 바로 그것이다. 죄 사함이 율법보다 더 근본적이라 함은 죄가 악보다 더 근본적이기 때문이다. 만일 인간이 악에만 빠져 있다면 구원은 도덕적 치료법인 율법으로 가능했을 것이다. 그러나 지난호에서 이미 밝혔듯이 악이란 단지 죄의 결과로 나타나는 현상일 뿐이다. 따라서 모든 악의 근본인 죄, 곧 신으로부터 돌아선 죄를 먼저 치료해야 한다. 그럼으로써 신의 이름으로 열거된 모든 가치들을 회복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서는 그 어떤 방법으로도 악에서 빠져 나올 수가 없다. 빛에 등을 돌리고서야 어찌 어둠에서 빠져 나올 수 있겠는가!

 

이 말은 율법을 지키려고 애쓰거나 또는 도덕적으로 살려고 노력한다고 해서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뜻한다. 먼저 구원받아야 율법을 지킬 수도 있고, 도덕적으로 살 수도 있다는 의미다. 너무 기독교적 냄새가 나는가? 아니다. 17세기 네덜란드가 낳은 철학자 스피노자도 그의 ‘윤리학’의 마지막 정리에서 똑같은 말을 “우리는 쾌락을 억제해야 행복한 것이 아니고 행복해야 쾌락을 억제할 수 있다”라고 표현했다. 그렇다! 바로 이것이 인류 역사에서 모든 위대한 도덕주의들이 실패할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또한 바로 이것이 인간을 구원하는 자가 율법사나 도덕가가 아니고 ‘죄를 사하는 자’, 곧 그리스도이어야만 하는 까닭이라는 것이 기독교의 교리다.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죽으시고

 

성서에서 ‘메시아’ 또는 ‘그리스도’는 ‘구원자’이자 ‘해방자’를 뜻한다. 구원이란 모세가 행한 ‘애굽에서의 해방’이든, 예수가 이룬 ‘죄로부터의 해방’이든 모두 해방사건과 연관되어 있다. 그러나 예수는 모세와는 달리 단순한 구원자, 해방자가 아니다. ‘구속자’ 또는 ‘대속자’다. 구속이라는 말에는 구원의 방법, 즉 ‘대신 형벌을 짊’이라는 개념이 이미 내포되어 있다. 구속은 ‘무조건적 해방’은 아니고 ‘대가를 치르고 얻는 해방’을 의미한다. 프랑스의 철학자이자 성서해석학자인 폴 리쾨르는 그의 ‘악의 상징’에서 ‘구속’은 어원적으로도 교환, 되돌려 삼, 속죄, 즉 ‘값을 치르고 되돌려 받음’과 연결되어 있음을 제시했다. 뿐만 아니다. 구약성서에 나타난 제사 형식도 이와 연관되어 있다. 즉 번제(동물을 태움), 수은제(동물 기름의 번제와 성찬), 소제, 속죄제, 건제 등 모든 제사에는 제물이 바쳐져야 한다. 제물은 언제나 죄 없는 자이자 죄 있는 자를 위해 바쳐지는 희생물이다. 죄 없는 제물을 통해 깨끗함을 얻게 되는 제사의식은 언제나 죄 있는 자의 죄책을 더해준다. 그래서 기독교 신자들이 자기는 보지도 못한 예수의 죽음이 ‘내 탓’이라고 고백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울이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죽으시고”(고린도전서 15:3)라고 교훈한 예수의 ‘피 흘림’이 갖는 의미이다.

 

구속의 교리가 가진 이 같은 의미는 희생의 제물인 예수가 평범한 인간이 아니라는 데에서 더욱 극대화된다. 기독교 신학에서 예수는 신이 인간이 되어 내려온 존재다. 성육신이라 한다. 성서에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신의 독생자의 영광이요”(요한복음 1:14)라고 적혀 있다. 그런데 도대체 이게 무슨 말인가! 신이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율법을 내려준 것으로 부족해서 스스로 인간이 되어 세상에 내려와 자기를 희생의 제물로 바쳤다는 말이 아닌가! 그렇다! 바로 이 말을 바울은 “이 예수를 신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로마서 4:25)라고 표현했다.

 

바울이 묘사한 구속의 교리에는 죄의 힘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위험이 은폐되어 있다. 인간을 사로잡고 있는 죄의 마성이 마치 실제로 존재하며 구원을 위해서는 신마저도 그 대가를 치러야 할 정도라고 오해할 소지가 있다는 말이다. 만약 그렇다면 기독교의 기반인 신의 전능성이 예수의 신성과 함께 손상된다. 오해를 피하기 위해 바울은 바로 이어 “이는 신이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라는 가르침을 덧붙였다. 구원을 단순한 선물로 주지 않고 마땅한 대가를 치르고 얻어내는 방식으로 이루는 것은 신이 자신의 의로움을 나타내려고 한다는 뜻이다.

 

자기를 희생의 제물로 삼으면서까지

 

정리하자. “신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라는 구속의 교리가 우리의 이야기와 연관해 중요한 것은 신은 결코 우리가 죄짓도록 내버려두지 않는다는 것이다. 신은 우리를 사랑하여 자유의지를 주고, 우리가 죄와 악을 저지르는 가운데서도 참고 기다리며, 자기를 희생의 제물로 삼으면서까지 구원하려 애쓰고 있다는 말이다. 매우 독특한 방식이긴 하다. 석가모니, 공자, 소크라테스, 무함마드와 같은 다른 성현들은 이런 방법으로 인간을 구원하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떤가? 믿을 만한가? 만일 당신이 이 말을 믿는다면 이 회장의 질문에 대한 답이 되었을 것이다. 아니면 아니다.

출처 : 박인식
글쓴이 : 박인식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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