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젊은 사제의 인생 레슨
짐 윌리그. 테미 번디 지음, 성 바오로 수도회 옮김
책 소개 글
“고통의 학교에서의 교훈”
한 젊은 사제가 있다.
본당 신자들의 사랑을 받으며 사목에 열중하고 있는 촉망받던 이 사제는 갑작스런 신장암 진단을 받고 고통스런 치료에서 막 돌아온 길이다. 그가 본당에 돌아온 것은 성삼일이 막 시작되는 성 목요일이었다. 주님이 사제직을 세우신 성 목요일 만찬 미사도 집전할 수 없었던 그는 성 금요일의 십자가 경배에 참례하며 오래오래 눈물을 흘린다. 그가 눈물을 흘린 것은 십자가 앞에서 대답은 ‘예’나 ‘아니요’ 밖에 없으며 십자가 앞에 ‘예’라고 대답하기가 너무나 괴로웠던 탓이었다.
자원하여 고통을 겪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을까. 아니 고통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마저 피하고 싶은 것이 우리들의 솔직한 마음일 것이다. 「한 젊은 사제의 인생 레슨」은 고통이 피해야만 하는 것이 아닌, 주님의 은총일 수 있음을 말하고자 한다. 이 책은 암 선고를 받은 한 젊은 사제가 암 투병의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어 하지만 결국에는 그것을 주님의 축복으로 받아들이는 과정을 담고 있다. 이 과정을 저자는 “고통의 학교”라고 부른다.
십자가 없는 부활, 고통과 죽음 없는 생명을 꿈꾸는 세상에서 고통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바보스러운 일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주님의 십자가 사건이 있은 이래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이름이 우리 모두의 가슴에 새겨지게 된 것은 고통과 죽음이 어느 누구도 예외 없이 모든 인간들에 적용되는 보편적인 드라마임을 모두가 알고 있기 때문이다. 주님은 십자가 사건을 통해 인간을 하느님과 화해시키는 중개자가 되신다. 그분의 사제직은 고통을 통해 이루어진 것이었다.
사제의 해를 맞아 한 젊은 사제가 들려주는 이야기, 자신의 고통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사제직에 동참하는 법을 배워 가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것은 잔잔한 감동을 준다. ‘제 2의 그리스도’를 살아가는 사제들은 결국 그분의 고통의 사제직에 참여하는 것이며 어떤 모양으로든 ‘고통의 학교’에 입학하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삶을 되살도록 불림 받았음을 가르쳐주고 있기 때문이다.
‘입학식-과제와 시험들…필수 과목-시험 기간’ 등의 총 10장으로 구성되어 있는 이 책에는, 저자가 암이라는 ‘고통의 학교’의 입학하면서부터 졸업하기까지의 여정이 담겨 있다. 각 장의 끝에는 저자가 ‘고통의 학교’에서 깨달은 ‘교훈’들을 일목요연하게 설명하고, 독자들도 함께하기를 바라는 ‘과제’들을 수록하며 기도로 마무리한다. 장마다 수록된 교훈과 과제는 우리가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 저자의 진심 어린 충고를 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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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사
최근에 나는 건축가인 친구 부부와 함께 저녁 식사를 했다. 자신을 다소 냉소적인 사실주의자로 여기는 친구는, 사람들이 중년에 들어서도 변하지 않는다며 내게 문제를 제기했다. 사람들은 그저 현재를 규정하는 즉,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 성격, 양식, 신념, 성향 등에 갇혀 있다는 것이다. 나는 많은 이들이 그렇긴 하지만 모두가 다 그런 것은 아니라고 대답했다. 그는 내 대답에 반박이라도 하듯이 중년에 변한 사람들의 이름을 거론해 달라며 나를 죄여왔다. 나는 즉시 마더 데레사와 요셉 버나딘 추기경의 이름을 댔다.
그러자 그 친구는 “대중의 본보기인 그런 분들 말고 인생의 중년에 와서 정말로 변한 사람을 아는가?”하고 물었다. 나는 한순간도 지체하지 않고 대답했다. “짐 윌리그 신부님! 그분은 1년 전의 그분이 아니야. 많이 달라졌지. 암의 고통이 그분의 인격을 변화시켰고, 그분을 성자로 다시 나게 했다네.”
오늘은 ‘모든 성인 대축일’이다. 나는 하느님이 우리 모두를 성인이 되도록 부르신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다. 하느님께서 성인이 되라고, 거룩함과 사랑을 키워가라고 허락하신 이들 가운데 예외가 있는가? 일반적으로 성인이 되고 사랑하는 것은 직접적인 고통의 결과이다. 이러한 과정을 오롯이 겪은 분, 마음과 정신과 영혼 속에 일어나는 과정을 볼 수 있었던 분이 바로 짐 윌리그 신부이다. 그것은 우리 모두가 내면에서 일어나기를 원했던 바로 그 과정이다. 그러나 우리 가운데 몇몇은 그 과정의 속성반에 배정되어 있기도 하다.
오래전에 이레네오 성인은 “하느님의 영광은 충만히 사는 사람 자체이다.”고 했다. 신장암이 짐 신부의 몸을 파고들었을 때, 그가 충만히 살아 있는 한 사람으로 변화해하고 있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은 그를 알고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가장 심오한 질서의 신비였다. 거기에는 자유, 기쁨, 지혜, 거룩함이 깃들어 있었다. 태초부터 짐신부 안에 항상 있어온 것들이라고 감히 말하고 싶다. 그리고 이 거룩함은 예전에 한 번도 드러내지 않았던 엄청난 힘과 함께 마침내 드러나기 시작하였다.
나는 예수회 회원으로서 32년 동안 수많은 사람들의 영적 지도자 역할을 해왔다. 친구인 짐 신부가 하느님께서 이끄시는 오솔길을 걷고 있을 때, 나는 영적 지도자로 봉사할 수 있음을 삶의 가장 위대한 선물로 여긴다. 암과 함께 가는 그의 삶 전체에서, 나는 내가 알았던 한 사람의 마음과 영혼이 가장 놀랍게 변해감을 목격했다.
사람들은 삶 안에서 변화하는가? 어떤 사람은 그렇겠지만 다른 많은 사람들은 그렇지 않다. 사람들이 저절로 변하지 않는 것은 분명하다. 고통이 거룩함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어떤 사람들은 다른 이들이 배움을 갈망하는 동안 대충 교육을 받거나 거의 배우지 않는다. 고통 또한 마찬가지다. 어떤 이에게는 무가치한 선생님일 수 있고 다른 이에게는 자기 연민이 될 수 있다.
나는 짐 신부가 삶 안에서 배우려 하는 자세를 목격해 왔다. 또한 항상 배움에 대한 그의 진지함과 갈망을 존경해왔다. 나는 짐 윌리그 신부보다 하느님 말씀을 더 효과적으로 전하기 위하여 배움에 시간과 노력을 쏟아부었던 가톨릭 사제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는 항상 성경에 관해 더 많은 것을 배우려고 갈망해 왔다. 그것은 짐 신부가 예수님께서 그에게 마시기를 요청한 고통의 잔으로부터 배우기를 구하는 것과 똑같은 열의였다.
이 책은 하느님과 깊이 친교하려는 한 사람의 ‘예’에 근거한 기록이다. 이 책은 짐 신부가 “예”라고 말한 대가가 무엇인지 증언하고 있다. 더욱더 중요한 것은 어떻게 그가 풍요롭게 축복을 받았는가 하는 것에 대한 기록이다.
짐 신부는 우리에게 교과서를 남겨 주었다. 우리가 언제, 누구와 함께 배우게 될지는 하느님의 은총이 결정하게 될 것이다. 이것은 분명하다. 삶에서 고통은 필연적이다. 고통을 피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고통 안에서 우리는 해야 할 바를 하고, 배울 바를 배워야 한다.
아주 많은 사람들이 이 젊은 사제가 암으로 고통을 받도록 허락한 것이 하느님의 지혜인지 질문해왔다. 짐 윌리그 신부는 신시내티에서 아주 사랑받는, 은총을 많이 받은 설교자이자 훌륭한 성경 선생님, 영도력을 가진 성직자로 그와 견줄 수 있는 이가 별로 없을 만큼 매력적인 사람이었다. 그와 같은 사제들이 많이 부족한 이 세상에서, 짐 신부의 사목이 계속 필요함을 하느님께서는 모르셨다는 말인가?
내가 감히 하느님의 마음을 알 수는 없다. 그러나 짐 신부의 글들은 우리로 하여금 십자가의 고통에서 눈을 돌려 하느님의 은총을 바라보도록 도와준다. 짐 신부는 그의 영혼이 드러나고, 고통과 좌절이 거명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는 이 고통의 푹풍 속에서 하느님이 자신을 안전하게 이끌어주실 것이라는 깊은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삶의 교훈들을 얻기 위해 짐 신부는 건강을 비롯해 적잖은 등록금을 치러야 했다. 나는 주님께서 우리를 그런 수업에 참여시킬 때, 그와 똑같이 고통을 사랑하게 할 때, 짐 신부처럼 배운 것에 대하여 충분히 감사할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이미 ‘고통의 학교’에 등록한 사람들에게 이 책은 우리가 혼자가 아니라는 확신을 제공할 것이며, 그 고통은 정말로 목적과 의미를 가지고 있음을 말해줄 것이다. 또한 우리들에게 ‘고통의 학교’를 예습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줄 것이다. 여기서 얻은 교훈들은 우리가 짐 윌리그 신부처럼 더 나은 변화를 기꺼이 맞이할 수 있도록 도와줄 것이다.
2000년 11월 1일 ‘모든 성인 대축일’에
마이클 스파로우 S. 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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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52
나는 암과 여러 달을 살면서 사람들이 위로하는 재미있는 말을 들어왔다. “걱정하지 마세요, 신부님. 여기에 필요하신 분이니까 하느님께서 꼭 낫게 하실 거에요. 나는 하느님이 신부님에게 죽음을 가져다주지 않으시리라는 것을 알아요.” 그럴 때마다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최근에 십자가를 바라보셨나요?” 만일 이 세상에 누군가가 필요하다면 그분은 예수님이다. 만일 선한 사람이 있다면 그분은 예수님이다. 고통 받지 말아야 할 사람이 있다면 그분 역시 예수님이다. 그럼에도 하느님은 당신의 아들에게 고통을 주셨다. 가장 고귀한 목숨과 지위를 가지신 분임이도 불구하고, 하느님은 예수님이 가장 무서운 방법으로 죽음을 맞도록 하셨다.
나는 하느님께서 늘 나와 함께 계시고 나를 돌보신다는 내 유일한 보증을 이 선의의 사람들과 조용히 나누고 싶다. 이는 하느님께서 왜 내게 암을 주셨는가에 대한 또 다른 설명이 될 것이다. 나는 한 번도 하느님께서 이 암을 내게 주시리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음을 인정한다. 하느님께서 내게 이 암을 허락하신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나는 하느님께서 아주 커다란 선을 위하여 고통을 허락하신다는 것을 믿는다. 사실 우리가 나쁜 것이라고 느꼈던 것들이 종종 고통으로 포장된 축복과 선물이라는 사실을 나중에 깨닫게 된다.
십자가는 하느님에게 아주 위대한 선, 즉 구원을 가져다주기 위하여 나쁜 것을 허락하신 곳에서 드러나는 가장 완벽한 역설의 표지이다. 내가 더 많은 의문과 의심을 가지고 기도하면 할수록, 나는 십자가 위에 계신 예수님의 이미지를 보게 되었다. 그분은 십자가에서 한쪽 팔은 못박히신 채 다른 팔을 사랑으로 뻗으시며 나를 품어 안으시어 당신께로 가까이 이끄신다. 그리하여 당신의 생명까지도 희생하시는 그 거룩한 사랑을 경험하게 하신다.
고통 자체에는 절대 선이 없다. 사실 예수님은 많은 사람들을 치유하고 그 고통을 완화시키고자 봉사하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통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하느님께 좀 더 가까이 갈 수 있다면, 그 안에는 분명 선이 존재한다. 그러므로 쓰디쓴 나의 고통이 가르쳐준 가장 큰 배움은, 나와 나의 십자가를 예수님과 그분의 십자가에 합치시키는 것이다. 고통이 아주 심했을 때, 상처가 말할 수 없이 깊었을 때는 기도라는 것을 발견할 수도 없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곤 십자가를 쥐고 그리스도를 붙들며 그분에게 의지하는 것이 전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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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113
드디어 주님의 말씀을 들을 준비가 되었을 때 나는 어떤 느낌을 받았다. 성경을 집어 들라는 말씀 같았다. 그래서 신약성경을 봤더니 책갈피가 꽂혀 있었다. 언제 꽂았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 그 부분은 코린토 신자들에게 보낸 둘째 서간이었다. 그곳엔 이렇게 쓰여 있었다.
“우리는 온갖 환난을 겪어도 억눌리지 않고, 난관에 부딪쳐도 절망하지 않으며, 박해를 받아도 버림받지 않고, 맞아 쓰러져도 멸망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예수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지고 다닙니다. 우리 몸에서 예수님의 생명도 드러나게 하려는 것입니다.”(2코린 4,8-10)
다 읽고 나서 주님께서 내 모든 생각을 설명해주고 계심을 느꼈다. 주님은 내가 고통을 겪고 있는 이유 그 최고의 목적도 설명해주셨다. 그것은 그저 그런 상담자가 아니라, 현자와 같은 이들이 나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이었다. 그분의 말씀을 조금 더 정확히 들을 필요가 있었다.
그분은 반복적으로 내가 했던 말들을 되새기게 하셨다. 그것은 내가 상담할 때 사용하던 기술이었다! 그 다음, 그분은 조용히 나를 안심시키셨다. “그래, 너는 죽어가고 있구나. 하지만 그것은 네 몸이 아니라 낡은 제 자신이다. 그래서 그리 상처가 많은 것이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네가 죽어가고 있는 것은 내가 네 안에서 영원히 살기 위함이다.” 이 이야기는 성경을 포함한 다른 많은 이야기들과 함께 나의 삶을 변화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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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198
다들 살아가면서 왜 이런 일이 생겼는지 궁금했던 적이 있지 않은가? 우리는 자신과 남과 하느님까지도 성급하게 탓할 때가 아주 많다. 우리는 해답을 갈구한다. 그러나 인생은, 특히 고통은 대개 신비라는 것이 명백한 진리이다. 우리는 결코 하느님의 지혜를 속속들이 알 수 없다. 그렇지만 하느님이 욥에게 고통을 겪게 하셨어도 언제나 그를 사랑하셨듯이, 욥은 자신이 몇 배로 축복받을 것임을 영원의 시작에서 알고 있었다는 점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하느님은 항상 우리에게 무엇이 최선인가에 대한 영원의 시작을 갖고 계시다. 이런 이유로 하느님은 고통과 시련이 우리 삶을 침범해서 우리가 영원한 삶을 누리도록 준비하고 정화하게 하실 것이다. 그리고 그곳에서 하느님은 우리가 영광에 들기 위해 희생한 모든 것을 몇 배로 되갚아주실 것이다.
성바오로가 로마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에서 썼듯이, “장차 우리에게 계시될 영광에 견주면, 지금 이 시대에 우리가 겪는 고난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로마8,18) 이런 까닭에 그런 암흑의 밤낮을 겪을 때, 우리는 터널 끝 낯익은 빛에서 눈을 떼면 안 된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그 빛은 언제나 우리와 함께 있겠다고 약속하시는 예수님이시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를 따르는 이는 어둠 속을 걷지 않고 생명의 빛을 얻을 것이다.”(요한8,12)
현세의 삶의 목적은 오로지 다음 생을 위해 준비하는 것이다. 이 땅에 사는 동안 우리의 사명은 우리의 영혼을 하늘나라를 위해 준비시키는 것이어야 한다. 우리 영혼의 사명이 우리의 유일무이한 사명이어야 하는 것이다. 어떻게 이 일을 할까?
해답은 사랑이다. 하지만 우리가 이 사랑의 사명을 완수하려면 도움이 필요하다. 우리가 사랑을 하고 있더라도, 조건에 맞추어 사랑하는 것이지 예수님께서 시키신 만큼 사랑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대개 사랑하기 힘든 사람을 금방 떠올릴 수 있다. 그렇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바로 그 사람 또한 무조건적으로 사랑하기를 바라신다. 이것이 우리가 하느님에게 속하지 않은 것을 모조리 씻어내야 하는 이유이다. 우리는 주님의 완전하고 무조건적인 사랑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 정화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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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208
나는 끔찍한 화학치료가 다시 시작되리라는 것을 알았다. 힘들었다. 사람들은 “그런 식으로 생각하지 마세요.”라고 말하며 나를 위로하려 하곤 했다. 그러나 나는 감정을 표현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덜 표현하는 것은 거짓이고 불건전한 것이다. 우리는 고통을 겪는 이들이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게 해야 한다. 이런 이유로 나는 솔직하게 말한다. “주님, 저는 화학 치료를 다시는 받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자 주님은 나에게 응답하시어 이런 생각이 들게 하신다. “이것이 네 십자가이다. 네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라.” 주님은 내 감정을 부정하지 않으시고 그 감정을 인정하신다. 변명도 않으시고 격려 말씀도 않으신다. 그저 말씀하신다. “이해한다. 이제 네 십자가를 들고 나를 따라라.”
십자가를 머릿속에 떠올리며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 십자가는 너무 무겁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도와주시면, 당신을 위해 이 십자가를 지고 가겠습니다.” 내가 이 십자가를 더 꽉 붙잡자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이 과정을 따라가면서 어느새 나는 내 십자가를 받아들이는 단계를 넘어서 십자가를 껴안게 되었다.
최근 뼈촬영을 해보았더니 내 오른쪽 대퇴부에 또 다른 커다란 종양이 발견되었다. 이 때문에 불가피하게 대퇴부를 3인치 정도 제거하고, 그 자리에 인공보철물을 넣을 뿐만 아니라 엉덩이 쪽도 일부 교체하는 큰 수술을 받아야 했다. 게다가 이번 것은 수술과 회복 과정에서 통증이 몹시 심했다. 차라리 의족을 달고 걷는 법을 배워야할 것 같았다.
내 십자가는 조금도 가벼워지지 않고 내 고통도 조금도 경감되지 않는다. 그러나 내 십자가를 껴안는 법을 배우고 그것이 내가 예수님과 하나가 될 수 있는 길이라고 믿자 예수님과 하나가 되어 느끼는 기쁨과 평화는 내가 느끼는 어떤 육체적 통증보다 실제로 더 크다.
이 ‘고통의 학교’에서 내가 줄곧 교육받으며 배운 으뜸가는 교훈은, 제아무리 힘들고 환영받지 못하는 고통일지라도 고통은 모두 축복일 수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더 큰 선을 일으키기 위해 우리에게 이런 불운이 닥치게 하신다는 점에서 역시 하느님이 가장 잘 아신다.
현재의 삶은 아주 짧지만 영원한 삶은 아주 길다. 우리는 욥의 인내를 주십사 청하는 기도를 드려야 한다. 욥은 온갖 엄청난 고통을 겪으면서도 하느님을 원망하지 않았고, 언제나 하느님께 충실했다. 우리가 지금 희생하는 것이 무엇이든 욥처럼 이 세상에서든 이 다음 세상에서든 - 축복이 몇 배가 되어 우리에게 되돌아올 것이다.
내가 의사의 진료실을 걸어나와 ‘고통의 학교’에 입학한 바로 그 첫날부터, 나는 인생의 교훈을 배우는 학생이 되었다. 이 학교에서는 나로서는 힘에 부치는 과제와 시험이 잇따른다. 내가 익힌 교훈 중 가장 나를 겸손하게 하는 교훈은 정말로 내가 배워야 할 것이 너무 많다는 점이다. 누군가 나에게 이렇게 말한 적도 있다. “짐 신부님, 신부님은 지금쯤 이 ‘고통의 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하시겠네요.”
그러나 사실 나는 그보다는 가장 단순하지만 가장 중요한 인생의 교훈을 배우고 있는 유치원생 수준으로 되돌아간 것처럼 느껴진다. 나는 성장하는 게 아니라 ‘거꾸로 성장하여 더욱더 하느님의 어린 자녀가 되어가는 듯하다. 이렇듯 어린 학생이기에 주님은 이 단순하지만 실천하기에는 그리 쉽지 않은 교훈들을 거듭 반복해서 나에게 가르쳐주고 계신다.
* 겸손하여라
* 하느님을 온전히 신뢰하여라.
* 무엇이든지 하느님께 내어드려라.
‘고통의 학교’에서 가르치는 교훈들은 배우기 어렵다. 우리에게는 훌륭한 스승이 계시니 얼마나 복된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집은 가볍다.”(마태 11,28-30)
나는 내 미래가 무엇을 쥐고 있는지 알지 못하지만, 누가 내 미래를 쥐고 계신지는 안다.
* 고통은 신비이다.
* 고통은 축복일 수 있다.
* 우리가 현세의 삶에서 잃는 것을, 하느님께서는 하늘나라에서 몇 갑절로 되돌려주신다.
* 우리는 육체적으로 낫지 않더라도 영적으로 치유될 수 있으며, 그것이 궁극적으로는 더 중요하다.
* 거꾸로 성장‘하면서 우리는 더욱더 하느님의 자녀다워진다.
* 하느님을 신뢰하고 그분께 무엇이든지 내어드리노라면, 하느님께서는 평화라는 선물을 우리에게 주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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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학식에서 교훈
* 고통은 인생에서 가장 좋은 스승일 수 있다. 모든 힘겨운 상황은 '고통의 학교'에서 여는 수업에 참여하도록
우리를 초대한다.
* 우리가 기꺼이 받아들인다면, 고통은 숨겨진 축복일 수 있다.
* 삶을 전적으로 주님께 봉헌한다는 것은 훌륭하고 좋은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앞으로 일어날 어떤 것에 대해
준비할 필요가 있다.
전교생
* 겸손은 학습과 성숙을 위해 필수적이다.
* 겸손은 삶에서 문제와 어려운 상황을 풀기 위해서는 우리 모두가 도움을 필요로 함을 인정하게 해 준다.
* 겸손은 하느님께서 가족이나 친구들, 전문가들을 통해 우리에게 주시는 도움을 받아들이게 해 주고 그 도움을 받아 일하게끔 해준다.
* 우리는 문제의 증상뿐 아니라 그 근원까지 표현할 필요가 있다.
* 하느님의 천사들(도움을 주는 사람, 전달자들)이 늘 우리 곁에 있다. 우리는 그들에게 마음을 열어야 한다.
과제와 시험
* 하느님과 다른 사람들 그리고 우리 자신에 대하여 "왜?"라고 묻는 것은 좋다.
* 우리는 고통이 삶의 일부임을 받아들이고 그것으로부터 배움을 얻어야 한다.
* 삶이 우리를 시험할 때, 우리는 이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실패란 실패를 통하여 무언가를 배움으로써 성숙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 우리는 무엇을 느끼든지 스스로 그 느낌을 갖도록 해야 한다.
* 하느님은 우리에게 더 큰 선물을 주시기 위해 고통을 허락하신다.
학교에서의 기도
* 기도는 우리가 무언가를 절실히 원할 때 가장 큰 도움이 된다.
* 하느님께서는 비록 우리가 원하는 대답은 아닐지라도 항상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신다.
* 기도는 우리의 입맛대로 하느님의 손이 움직여지도록 하는 것이 아니다.
* 기도는 우리에게 하느님의 뜻을 보여준다.
* 우리는 하느님께 우리의 요구를 청할 것이 아니라, 그분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청해야 한다.
* 예수님은 사도들에게 아버지 하느님께 어린아이처럼 기도하라고 가르치셨다. 우리 역시 그렇게 해야 한다.
* 이끌어 주심과 값진 조언
* 심각한 질병이나 문제에 부딪쳤을 때, 우리는 자제력을 잃거나 혼란스러워 할 수 있다.
*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들이고 완전히 그분께 의탁한다.
* 하느님은 완전한 부모로서 우리를 도와주시고 이끌어 주시기를 무척 원하신다.
* 우리는 자신의 감정과 관심을 다른 사람과 나눌 필요가 있다. 그 안에서 우리는 서로를 신뢰하게 된다.
*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치유를 도울 때, 둘 다 치유를 얻을 수 있다.
필수과목
* 성경은 우리를 깨우쳐 주고 격려하기 위하여 하느님에 의해 주어졌다.
* 주님은 성경 구절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를 안내해 주신다.
* 하느님 말씀에는 우리를 변화시키고 충만하게 하는 힘이 있다.
* 성령께서는 우리가 필요로 하는 도움과 대답이 될 특별한 성경 구절로 우리를 인도하실 것이다.
시험 기간
* 성금요일이 지나면 반드시 부활 주일이 온다.
* 최악의 고통은 헛되어 보내 버린 고통이다.
* 주님은 우리가 십자가 지는 일을 돕고자 하신다.
* 주님은 우리가 그분의 십자가와 부활의 '신비'에 동참하기를 바라신다.
* 주님과 마음을 터놓고 대화하는 것이 중요하다.
* 생각과 느낌을 남김없이 일기에 적어라.
유급
* 우리는 모두 자신에게나 남에게 상처를 주는 마귀를 지니고 있다.
* 우리의 약점은 우리를 지배할 힘을 갖고 있다.
* 고통을 겪을 때 우리의 약점이나 마귀는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 꿈은 지시하거나 도와주고 확인해 주거나 인도한다는 면에서 우리에게 유용하다.
* 기도와 믿음은 우리를 보호해 주는 가장 강력한 방패가 된다.
급우들
* 고통은 당신을 사람들이나 자기 자신과 단절시킬 수 있다.
* 고통은 당신을 고통을 겪는 다른 이들에게 이어줄 수 있다.
* 주님이 우리에게 고통을 겪게 하시는 것은 우리의 영혼을 성장하게 하려는 것이다.
* 죽음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는 길이며,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인생의 목표로 삼아야 한다.
* 하늘나라와 지상의 성인들은 우리의 가장 훌륭한 역할 모델로, 고통을 다루는 면에서는 더욱 그렇다.
경과 보고서
* 고통은 신비이다.
* 고통은 축복일 수 있다.
* 우리가 현세의 삶에서 잃는 것을, 하느님께서는 하늘나라에서 몇 갑절로 되돌려 주신다.
* 현세의 삶에서 우리의 목적은 영원한 삶을 준비하는 것이다.
* 우리는 육체적으로 낫지 않더라도 영적으로 치유될 수 있으며, 그것이 궁극적으로는 더 중요하다.
* 하느님을 신뢰하고 그분께 무엇이든지 내어 드리노라면, 하느님께서는 평화라는 선물을 우리에게 주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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