밭에 묻힌 보물/책에서 옮긴 글

떠나는 사람이 가르쳐주는 삶의 진실 - 스즈키 히데코 - 죽음에 이르는 5단계

김레지나 2012. 10. 3. 20:56

떠나는 사람이 가르쳐 주는  삶의 진실


스즈키 히데코 지음 / 심교준 옮김

머리말


   


   죽음의 공포보다 더 우리를 불안하게 하는 것은 없습니다.  고통과 아픔에 대한 두려움,  인생의 끝에 대한 두려움과 무상함, 뒤에 는 사람들과의 끊기 어려운 미련 등 걱정거리를 꼽자면 끝이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저 세상으로 가는 사람을 보내는 쪽에도 쉽게 득되지 않는, 그저 체념으로 돌릴 수 없는 비탄이 남습니다.
   죽음은 장엄하고도 확실한 의식입니다.  그뿐 아니라 누구도 피할 수 없으며, 인생의 모든 의미가 그 안에 들어 있습니다.

   지금까지 나는 많은 사람들의 죽음의 순간을 목격했습니다.  동시에 어떻게 하면 잘 떠날 수 있을까를 줄곧 생각해 왔습니다.   그 대답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습니다.  저 세상으로  보다 잘 떠나기 위해서는 꿋꿋이 잘 살아가는 것입니다. 사는 방법을 조금씩 바꿔 나가는 것만으로  죽음이 두렵지 않게 될 것입니다. 또 매일 안식과 희망에 넘친 미래를 약속해 줄 것입니다.

   앞으로 일상생활에서 죽음을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그리고 어떻게 살면 좋은지에 대해  우리 함께 생각해봅시다.
                                                                스즈키 히데코 수녀


스즈키 히데코 지음 / 심교준 옮김

1. 죽음과 사이좋게 사는 지혜
 

풍요로운 시간


   1999년 12월 7일,  사업가 T씨는  장폐색 수술을 받기 위해 병원에 입원했습니다.
   부인과 누이동생은  병실에서 내일 있을  수술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주치의가 만나자고 했습니다.   세 사람이 의자에 앉자, 그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습니다.
   "정말 말씀드리기 송구스럽습니다만,  검사 결과 말기 암으로 확인되었습니다."
   "예?"
   세 사람은 의사의 말을 금방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말기 암이라고요?"
   T씨는 방금들은 말을 확인하듯 되물었습니다.
   "예, 상당히 진행된 상태입니다."
   세 사람은 충격을 받아 얼굴이 창백해졌습니다.  부인도, 누이동생도 다리가 덜덜 떨렸습니다.
   "치료에  최선을 다하고 있지만  마음의 준비를 해두시기 바랍니다."
   "그럼 앞으로 얼마나---."
   T씨가 의사를 바라보자 그는 더욱 심각한 표정을 지었습니다.
   "앞으로 2,3개월 정도입니다."
   세 사람은 꿈인지 생시인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눈에 보이는 사물의 색채가 모두 사라지고 마치  흑백 영화의 한 장면을 바라보는듯, 현실감 없는 시간이 흘러갔습니다.
   고개를 떨군 채 병실로 돌아오자마자 T씨가 두 사람에게 말했습니다. 전혀 예기치 않은 말이었습니다.
   "누구도 원망해서는 안 돼."
   부인도, 누이동생도 울음을 터뜨릴 듯한 얼굴이었습니다.
   '이런 때 어떻게 그런 담담한 말을 할 수 있을까?'
   두 사람의 마음속에 불가사의한 느낌이 스쳐지나갔습니다. 망연히 서 있던 두 사람은 T씨의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없었습니다. 담담하던 T씨의 눈에도 눈물이 그렁그렁했습니다. 밖에서는 른 낙엽이 휘날려병실 유리창을 격렬하게 때리고 있었습니다.
   "어쩌면 이렇게 되리라고 이미 정해져 있었는지도 몰라."
   세 사람은  맥이 빠진 듯 의자에 앉은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밖에서는 바람이 사납게 몰아쳐 실내에 있는 사람의 다리도 감아올릴 것 같았습니다.  기운을 되찾은 듯 T씨가 부인을 향해 말했습니다.
   "여보,  지금까지 일에만 매달려  좋은 가장이 되지 못한 거 용서해 줘요.  나는 젊었을 때 열심히 일해서 노후에 여유 있게 살면 좋겠다고 생각했소."
   부인의 눈에서는 막혔던 둑이 무너진 것처럼 눈물이 흘러내렸습니다.
   "그래도 나는 오직 우리 아이들과  당신만을 사랑했는데---.  일이 이렇게 되어 미안해요."
   부인도, 누이동생도 무엇을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몰랐습니다.  부인의  흐느낌이 더 커졌습니다.  이윽고 집에 두고 온  아이들 생각이나 두 사람은 일단 집으로 돌아가기로 했습니다.
   부인은 집에 돌아와서도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습니다. 그러다가새벽녘에 내게 편지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얼마 전에 내가 쓴「은총 속에서」를 읽었다고 합니다.
   다음날부터 항암제 투여가 시작되었습니다. 항암제에는 여러 가지 부작용이 있는데, 먼저 위장 장애나 구토 증세가 나타납니다. T씨는 그런 부작용을  잘 견뎌내며  평온한 표정으로 지내고 있었습니다.  말할 수 없이 고통스러웠겠지만 아마도 부인에 대한 배려에서 였을 것입니다.  가끔 농담을 하여  매일 병원을 오가는  부인과 병실을 드나드는 간호사를 웃기기도 했습니다.
   부인의 편지를 받은 나는 그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그에게서 긴 이야기를 들은 후, 나는 혼잣말처럼 말했습니다.
   "이미 일어난 일에는  모두 어떤 의미가 있어요.  좋은 결과로 연결될 것이니 믿음을 가지세요."
   이것은 내가 일상적으로 내 자신에게 하는 말입니다.
   "예, 알겠습니다. 선생님, 정말 감사합니다."
   애처로울 만큼 순박한 부인의 마음이 내게 전해져 왔습니다.
   병원을 드나들며 간병하는 부인은 남편과 많은 이야기를 했습니다.  매일 바쁘게 일만 해온  남편과 이처럼  여유롭게  대화를 나눈 것은 신혼 이후 처음이었습니다.
   어느날  해질 무렵,  문득 창 밖을 바라보던 부인은  서쪽 하늘의 저녁 노을이 너무 아름다운 것을 느꼈습니다.
   "여보, 보세요. 너무 아름다워요."
   "뭐가?"
   남편이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부인이 가리키는 쪽을  바라보았습니다.
   "정말 아름답군."
   페퍼민트 그린과 핑크빛으로 물든 구름은  정말 환상적이었습니다. 두 사람은 침대에 앉아 말없이 그 경치를 바라보았습니다.   잠자코 경치를 보고 있을 뿐인데도 두 사람의 마음은  하나가 되어 있었습니다. 너무나 고요하고 여유로운 시간이었지요.
   부인이 문득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풍요로운 시간이라는 것이 이런 때인지도 몰라.'


 

선물 받은 17년

    그해 마지막 날, T씨는 2박 3일의 외박을 허락받았습니다. 항암제의 부작용이 겹쳐서 완전히 식욕을 잃었는데, 집에 와서 수프와 계란찜을 조금 먹었습니다.
   T씨가 차분한 어조로 이야기를 시작했습니다.
   "나는 젊었을 때 가스 중독에 걸린 적이 있었어.  병원의 의사가 '얼마 있지 않아  죽든가,  뇌 장애로  큰일이 일어날 거예요' 하고 말했지."
   이것은 부인도 처음 듣는 이야기였습니다.
   "어쩌면  내 목숨은 그때 끝났는지도 몰라.  그렇다면 지금  하느님께  '왜 내가 이런 꼴이 되어야 하나요?' 하고 대드는 대신  지금까지 살게 해주신 데 대해 감사 인사를 드려야 한다고 생각해.  결혼하고 나서  17년간이 길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귀여운 세 아이를 주셨고, 일도 힘 자라는 데까지 즐겁게 할 수 있었어.  가정적으로는 그다지  시간을 많이  내지 못했지만 그 덕분에 지금은  여유도 생겨 이제  가족을 위해 시간을 쓸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는데---.
더이상은 욕심일까?"
   T씨는 이렇게 차분히 말하고 나서 두 손을 합장하며  "감사합니다" 하고 조용하게 기도를 드렸습니다.
   '아,  그렇구나.  그렇다면 내게도 이 17년간은  선물이었는지도 몰라.'
   부인은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는 온화하고 부드럽고  마음이 넓은 남편을 굳게 믿고 살아왔습니다.
   '이런 남편을 잃게 되다니, 내가 그냥 참고 견뎌야 할 이유가 없어. 내가 왜 이런 꼴을 당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거야?'
   무심코 원망스러운 생각에 빠지곤 했는데,  남편의 이야기를 듣고는 잘못 생각하고 있었음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아빠, 최고의 날을 감사드려요."


   설날 외박 이후 매주 금요일 밤부터  다음 주 월요일 아침 병원으로 돌아갈 때까지  T씨 가족은  '은총' 이라고밖에 할 수 없는 시간을 보냈습니다.
   말기 암 선고를 받았지만  오진이 아닐까 하고  생각될 정도로 T씨의 상태는 좋았고 기력도 넘쳤습니다.   부인은 금요일 저녁에 둘째, 셋째 딸과 함께 병원으로 남편을 데리러 갔습니다.  토요일에는 T씨와 부인이  슈퍼에 가서  아이들이 아하는 먹을 거리를 샀습니다. T씨는 식욕을 완전히 잃어버렸지만,  그럼에도  기름을 사용한  요리를  떠올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병실에서  TV 요리 프로그램을 보는 것이  일과가 되었고,  집에 와서는 그때 보아 둔 요리를 직접 하는 것이 취미가 되었습니다.  T씨는  요리책을 보면서  이런저런  요리를 만들었습니다.  보통  병에 걸린 사람은  생각하기도  싫어하는 기름을 사용한 음식, 즉 고로케, 돈가스, 튀김, 샐러드 들을 아주 정성껏 만들었습니다.
   "내가 할 테니까 당신은 쉬어요."   T씨는 부인이 요리를 하고 싶어했지만 도움을 받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부인에 대한 위로이자 손수 만든 것을 아이들에게 이려는 최상의 애정 표현이었던 것입니다.  그는 정성껏 만든 음식을 맛있게 먹는 딸들을 바라보았습니다.
   부인에게는 지금도 잊을 수 없는 장면이 있습니다.
   식사를 끝내고 T씨는  스포츠 뉴스를 보고 있었습니다.  그 곁에서 부인은 책을 읽고 있고,  세 아이는 사이좋게  트럼프 놀이를 하고 있었습니다. 단지 그것뿐입니다.
   그런데 그때 T씨가 말했습니다.   "아, 행복해!"   '정말 행복해요!"   부인도 말했습니다.
   그리고 두 사람은 마주 바라보았습니다.  지금까지  느껴보지 못한  편온하고  고즈넉한 느낌이 두 사람의 마음을 가득 채웠습니다. 정말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귀중한 시간이 고요하게 지나갔습니다.
   그리고 월요일.  현관 앞에서 학교 가는 아이들의 모습이 보이지않을 때까지 바라보는 T씨의 모습은 조금 쓸쓸해 보였습니다.
   1월 21일은 셋째 딸의 여덟번째 생일이었습니다.  레스토랑에서 하 파티를 했습니다.  T씨는 수프를 조금 먹었을 뿐 제대로 음식을 먹을 수는 없었지만,  가족이 함께하는 외식이라 아이들도 기뻐했습니다.  무엇보다 주인공인 셋째딸은  이날 아버지가 외출 허락을 받을 수 있는지 없는지 매일 간호사에게 확인했습니다.   레스토랑에서 언니가  생일 축하곡을 피아노로 연주하자 주인공은 뺨이 발갛게 달아올랐습니다.  T씨는 그런 딸아이를  정말 행복하게 바라보았습니다.  축하 케이크의 촛불이  흔들흔들 춤을 추고 었습니다.   "네 생일을 이만큼  즐겁고  행복하게 맞을 수 있는 것은  분명히 느님의 선물이야."
   부인은 이렇게 확신했습니다.
   식사 후 그들은  드라이브를 했습니다.  운전은  T씨가 했습니다.가족이  함께 여행할 때  사용하기 위해 새로 산 차였는데,  부인이 전하기에는  좀 커서 T씨가 입원한 후에는 그냥  세워 두고 있었습니다. 이제 처음으로 그 왜건을 타고 다섯 식구가 드라이브를 하게 된 것입니다.
   밤하늘을 쳐다보니 커다란 보름달이 웃고 있었습니다.   T씨가  말기 암이라는 사실이 도저히  믿을 수 없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아빠, 최고의 날을 감사드려요."
   셋째딸이 말했습니다. T씨도 부인도 아직 어린애로만 여기고 있던 딸이  어엿하게  성장한 것을 실감하며  가슴이 뜨거워졌습니다.가족의 마음은  서로 통하여 모두 따뜻한 무엇인가에 푹 감싸인 듯한 느낌이었습니다.   '아, 우리는 얼마나 행복한 가족인가---.'
   아름다운 겨울밤의  만월을 바라보며 부인은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곧  저 세상으로 떠날 남편과 함께 이렇게 행복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이 불가사의하게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감사 리스트


   2월이 되어 T씨와 사이가 좋았던 환자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는 46세였습니다.
   조문을 가자  돌아가신 분의 부인이 마음에  사무친 듯이 말했습니다.
   "우리 부부는  사이가 그리 좋지 않았어요.  남편은  돈도 제대로 갖다 주지 않고 자기밖에 모르고 다른 일은 돌보지 않았기 때문에 언제부터인가 멀어지게 되었어요.  그러나 남편이 암에 걸려 입원하고 매일 병원을 드나들면서 두 사람이 같은 것을 바라보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T씨 부부는 이 가족과 입원 전부터 잘 아는 사이였습니다.  그래서 부인이 말하는 것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마침내 말기가 되어  제가 병원에서  같이 생활하게 된 지  얼마 후의  일입니다.  병실에서  크고  아름다운  무지개가  보였습니다. '여보, 무지개예요' 하고 말하자, '아, 아름답구나!' 하고 그이가 대답했어요.  그때  '우리는 역시 부부야' 라는 것을 절실히 깨달았습니다.  멀어져 있던 마음과  마음이 이어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던 거지요."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전에 남편과 같이 보았던  저녁 노을,  페퍼민트 그린과  핑크빛 구름을 떠올렸습니다.  흐뭇한 마음이 되어 병원으로 돌아온 부인은  남편에게 그 얘기를 했습니다.  T씨도 매우 흐뭇해했습니다.
   그러나 그 무렵부터 T씨의 암은  다리뼈로 전이되기 시작했습니다.  엄청난 통증이 찾아왔죠. 부인이 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기도 뿐이었습니다.
   '왜 하느님은 이렇게 착하고  온유한 사람에게  고통스러운 시련을 주시는 것일까?'
   T씨는 진땀을 흘리며 침대 시트를 움켜잡고 고통과 싸우고 있었습니다. 그런 가운데서도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고통이 당신이나 아이들이 아니라, 또 나이 드신 아버님이나 어머님이 아니라 내가 감당하는 것이 오히려 잘되었다고 생각해."
   T씨는 반년 전에 사랑하는 형님을 먼저 저 세상으로 떠나보냈습니다.
   "형님도 이렇게 고통스러웠을 거야.  무리를 해서라도 병 문안을 갔어야 했는데 ---. 죄송해요."
   이렇게 말하며 T씨는 눈물을 흘렸습니다.
   갖가지 약을 써보았지만  고통은 좀처럼 수그러들지 않았습니다.
   내가  그의 문병을 간 것은  그가 가장  심한 고통과  싸우고 있던 3월 2일이었습니다.  가족과  함께 있는 자리에서  내가  무슨 말을 할 수 있었을까요?  단지  기도만  계속 드렸습니다.  그리고  "지금 은총 속에 있음을  알게 하소서" 라는 말을  나도 몰래  불쑥 읊조렸습니다.
   T씨와 부인은 그날 이후 어느 때보다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고 니다.  지금 그들이 얼마나 큰 은총 속에 있는가를 서로 이야기한 이지요.
   부모,  형제,  자매,  친구들이 두 사람을 든든히 받쳐주고 있었습니다.  부인이  오랫동안 병원에  머무르게 되자,  세 친구가 교대로 이들의  식사를 챙겨주었습니다.  먼 곳에서 문병을 와준  친구나 과가  끝난 후에  매일 들르는  친구,  "소장님!" 하고  떠들썩하게 문병을 오는 회사 직원들 ---.
   그리고 무엇보다도 귀여운 세 자녀가 있었습니다.
   "나는 정말로  은총 속에 있다고  생각해.  회사에서도  모두 잘해주고 ---. 정말 행복하다고 생각해."
   T씨는 몇 번이고 그렇게 말했습니다.
   그래서 두 사람은 '감사 리스트' 를 만들었습니다. 지금까지 신세진 사람들,  한 사람 한 사람을  기억해 내어  마음으로부터  감사를 담아  기도하며  '기(氣)' 를 보내는 것입니다.  T씨가 한 사람 한 사람 이름을 말하고  부인이 노트에 기입했습니다.  리스트는  가족의이름부터 시작하여 백 명이 훨씬 넘었습니다.

 

 

"사랑하는 당신, 정말 고마워요"


   3월 중순, T씨는 한 가닥 희망을 걸고 대체의학 치료를 하는 민간 병원으로 옮겼습니다. 도청 앞 벚꽃 가로수길이 내려다보이는 병실이었습니다.  벚꽃 가로수는 3월 말이 되자 고통스럽게 참아내고 있는 그를 위로하듯 꽃이 만개했습니다.
   "이렇게 실컷 벚꽃을 본 적은 없었어."
   T씨는 벚꽃을 바라보며 말했습니다.
   1인 병실로 옮기자 친구나 회사 사람들도 마음놓고 문병 오는 회수가 늘어나서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내가 다시 T씨의 병실을 찾았을 때, 그의 모습은 눈에 띄게 나빠져 있었습니다. 기분이 나쁘거나 열이 나는 날이 많았던 것입니다. 마침 그의 누님이 와 있어서 여러 가족들과 함께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4월 22일 아침, 집에 잠시 돌아와 있던 부인은 남편이 위독하다는 전화를 받고 병원으로 급히 달려갔습니다.   부인이 병실에 들어가 보니 남편에게  산소 마스크가  씌워져 있었습니다.
   "나는 어떻게 되지?"
   T씨는 부인을 알아보고 괴로운 듯 이렇게 물었습니다.
   부인은 의사에게서 들은 대로 이야기하면서 T씨의 손을 꼭 잡았습니다.
   "미안해---."
   T씨가 말했습니다.
   "여보, 괴롭지요? 하지만 이젠 애쓰지 않아도 될 테니까---."
   부인의 가슴속에서 애절한 사랑이 솟구쳐 올랐습니다.
   "사랑하는 당신, 정말 고마워요."
   그렇게 말하는 남편에게  응답할 말을 찾지 못한 채 부인은 고개만 끄덕였습니다.
   부인은 사람들에게 남편의  위독함을 알렸습니다.  얼마 후에 친구들과 회사 사람들이 뛰어왔습니다.  세 딸도  학교에서 데려왔습니다.   "여보, 혼자가 아니에요. 언제나 저와 함께 있잖아요."
   부인은 남편의 손을 꼭 잡고 귀에 대고 말했습니다.
   T씨의 입술이  '그 렇 고 말 고' 하고 말하듯이 움직이며  희미하게 웃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아이들도 마지막 인사를 했습니다.
   "너희들 셋이서  사이좋게 엄마를 도와드려.  아빠가 하늘나라에서 늘 지켜볼 거야."
   가쁜 숨을 몰아쉬며 T씨는 정말로  힘들게 말했습니다.  세 딸은흐느껴 울면서 "아빠, 아빠" 하고 그저 부르기만 했습니다.  그러다가 중학생인  첫째딸부터  차례로 아버지에게  작별 이사를 했습니
다.  둘째딸은  말을 잇지 못하고 울면서 "아빠, 고마워요---" 하고 말할 뿐이었습니다.
   그런 딸들을 T씨는 힘들어하면서도  애정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았습니다.
   이제 T씨는 친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고맙네" 하고 말하고,  친구들도  "잘 가게" 하고  응답했습니다.  회사 상사에게는  "폐 많이 끼쳤습니다" 하고 전하고,  직원들에게는  "앞으로도  잘 부탁하네.
고맙네" 하고 전했습니다.
   "소장님!  좀더  힘을 내세요.  소장님의 책상이 있는 것만으로도 저희들은 힘이 납니다. 입원해 계셔도, 회사에 오시지 않아도 어딘가에 살아 계시기만 하면 되니까요!"
   젊은 직원 한 사람이 이렇게 소리쳤습니다.
   정말로 모든 사람에게 사랑과 존경을 받은 T씨였습니다. 부인은 참을 수 없는 슬픔을 느끼며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고 있었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이별을 고하는 가운데  많은 시간이 흐르고 다시 고요한 시간이 찾아왔습니다.  사람들은 조용히  T씨의  상태를 지켜 보았습니다.
   문득 T씨가 무슨 말을 했습니다.  부인의 귀에는  "기도해 줘" 라는 소리로 들렸습니다.
   "기도해 달라고 하신 거예요?"
   부인은 물어보자 T씨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병실에 있던 30여 명이 손을 모아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병실에는 나지막한  기도 소리가  울려퍼졌습니다.  그들은 T씨에 대한 감사의 마음으로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것은 한 사람이 죽음을 맞는 참으로 멋지고 장엄한 의식이었습니다.
   기도가 끝나자 병실에 또다시 정적이 가득차고 모두 T씨를 바라보았습니다.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시간이 흘렀습니다.
   '이제 돌아가셨는지도 몰라.'
   그렇게 생각했을 때, 여리지만 명료한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고맙습니다."
   이것이 T씨의 마지막 말이었습니다.  의사가 고개를 숙이는 것을 보고서야 모든 것이  끝났음을 알았습니다.  산소 마스크를  벗기자 T씨의 얼굴은 엷은 웃음을 머금고 있었습니다.
   '틀림없이 아주 좋은 무엇인가를 보고 계신 거야.'
   부인은 그렇게 확신했습니다.
 

아버지가 남겨준 은혜


    T씨가 세상을 떠나고 나서  일주일 동안 그의 누님이 집에 머물며 이것저것 뒤처리를 해주었습니다. 그때 누님이 봉투 하나를 발견했습니다. 그 속에는 죽음을 선고받은 12월 7일에 쓴 편지가 들어 있었습니다.
   자녀들의 일과 보험, 인감이 어디에 보관되어 있는지 등 세세한 것까지 정돈된 필체로 쓰여 있었습니다.   편지 외에도 무언인가가 들어 있었는데,  부인이 봉투를 거꾸로 흔들자 티켓이 나왔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셋째딸이 가고 싶어하던 디즈니랜드 입장권이었습니다.  그 티켓을 보고 부인과 누님은 와락 얼싸안고 소리내어 울었습니다.
   부인이 잠들지 못하고 내게 편지를 쓰던 날 밤, T씨도 병실에서 뒤에 남을 부인과  자녀들을 생각하면서 온 마음을 기울여 써내려갔던 것입니다.
   T씨가 세상을 떠나고 8개월 정도 되었을 무렵,  나는 부인의  편지를 받았습니다.  거기에는 사랑하는 남편을 잃어버린 슬픔과 괴로움도  쓰여 있었지만,  '행복한 자신' 에 대한  이야기도  담겨 있었습니다.
   '그 무렵부터 전에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다른 형태의 행복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행복이라고 해도 좋을는지요?) 물론  남편이 돌아가서  쓸쓸하고  괴롭지만  다른  차원에서는  따뜻함과  같은 것, 더욱  큰 세계에 안겨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  문득 행복하구나 하고 느끼는 경우가 자주 있습니다.'
   그리고 편지에는 또 한 가지 기쁜 소식이 쓰여 있었습니다. 셋째 딸이 어느 신문사에서 주최한 글짓기 대회에서 최우수상을 받았다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세상에서 가장 좋아하는 아버지에 대해 쓴 것입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우리 가족에게는 아버지가 계시지 않습니다. 아버지는 올해 4월에 천국으로 떠나셨습니다. 암이라는 병 때문입니다.  우리 아버지는 너무 부드럽고 언제나 함께 놀아주셨습니다.  돌아가시던 날 아침,  친척 할머니가  학교로 나를 데리러 오셨습니다.  나는 가슴이 두근두근하는 것을 느끼면서  차에 탔습니다.  그 다음에 중학교에 다니는  언니들을 데리러 갔습니다.  언니들은  울면서 달려왔습니다.  언니들이 차에  탔을 때,  내가  언니들에게  "왜  우는  거야?" 하고 물어보니,  "왜라니? 아버지가  돌아가실지도 모르잖아" 하고 말했습니다.  그렇지만  나는 돌아가실 리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병원에 도착했을 때 아버지는 매우 괴로우신 것 같았습니다.  나는 아버지의 손을 움켜잡았습니다.
   "너희들 셋이서 사이좋게  엄마를 도와드려.  아빠가 하늘나라에서  늘  지켜볼  거야" 하고  아버지가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그때,"예" 하고  고개를  끄덕거리며  "아빠,  아빠!" 하고  몇 번이고 불렀습니다. 그때 눈물이 멈추지 않았습니다.
   "미안해. 이런 병에 걸려서---. 지금까지 고마웠어."
   아버지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간신히 대답하셨습니다.  나와 언니들은  "아빠,  감사해요" 하고 아버지에게 말씀드렸습니다.  친척이나 회사 사람들도 많이 왔습니다. 아버지는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고맙다고 말하는 듯이 입술을 움직이셨습니다.  그날은 너무 긴 하루였습니다. 나는 피곤해서 옆 침대에서 잠들어 버렸습니다.
   맨 마지막에 아버지는  "리호,  리호,  리호" 하고  세 번이나 나를 불렀다고 합니다.  내가 잠자고 있었기 때문에 아버지께서는 내 얼굴이 보이지 않는 것을 알아차리셨던 것일까요? 그렇지 않으면 가장 어린 내가 걱정스러웠기 때문일까요? 내가 잠에서 깨어났을 때 아버지는 벌써  천국으로 떠나신 뒤였습니다.  산소 마스크를 벗으신 아버지의 얼굴은 온화하게 웃고 있었습니다.  '하느님이 아버지를 마중 나오셨나 보다' 하고 생각되어 안심이 되었습니다.
요즈음에는  아침 저녁으로  사진 속의 아버지에게  이야기를 해드립니다. 언제나 아버지가 지켜주시는 듯한 기분을 느낍니다.
   지난 휴일에 나가사키에 갔을 때도  그때까지 내리던 비가  우리가 차에서 내리자  갑자기 그쳤습니다.  그때 '아,  아빠다' 하고 생각했습니다.  아빠는 천사가 되어  하늘나라에서 나를 늘 지켜보고
계신다고 생각합니다.
 

죽음은 왜 두려운가?


   
'죽음' 을 생각할 때, 누구나 두려움을 느낍니다.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아픔이나 고통도 두렵지만, 죽음처럼 실체를 모르는 미지의 세계가 두려운 것입니다. 자기가 죽어 슬퍼할 사람들을 생각하면 괴로움은 점점 더 커집니다.  그러나 더욱 두려운 것은 살아 있을 때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을 잃고,  의식조차 영원히 잃어버린다고  생각하기 때문이 아닐까요?  일을  할 수 없게 되는 것은 물론 즐거움을 느끼는 것도,  사랑하는 사람과 이야기를 나눌 수도 없는 죽음은,  이 세상에서 얻은 모든 것을 잃는  인생 최대의 변화입니다.  더구나 아무도 그 체험을 밝힌 적이 없기에 두려워하는 것도 당연합니다.
   여기에 더하여 병이나 사고의 비참한 희생자라고 여기고 견디기 어려운 고통이나  고독감에 시달릴 거라는  막연한 이미지를  갖게 되면 죽음은 한층 더 두려워집니다.
  

  따라서  현대 사회에서는  죽음에 대해 말하는 것을  터부시하는 사람도 적지 않습니다.  언젠가는 죽는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죽음을 의식하려 하지 않거나 죽음을 보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자기 자신이나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가족에게  죽음이 찾아올 때까지 죽음의 문제는 마냥 덮어 두게 됩니다.


   현대는 죽음을 대면하지 않고도 지낼 수 있는 시대입니다.  본인이 바라지 않는다면 죽음이  임박할 때까지 죽음을 보지 않고도 지낼 수 있습니다.  위중한 병에 걸린 사람은 병원에 입원하고,  고령으로 장애를 얻은 사람들은  요양시설에서 돌봐주고,  죽음의 막바지에 이른 사람은 호스피스 시설에 들어갑니다.  병든 사람이 그러곳에 들어가 있으면 가까운 친척이라도 그들과 격리되어 있으므로 죽음에 대한  번민 없이 지낼 수 있습니다.  그들이 저 세상으로 떠나도 임종은 물론 시신과 대면 없이 지내는 것도 가능합니다.
   앞서 소개한 T씨 가족처럼 죽음을 확실히 응시하고 서로 의지하는 경우는 많지 않습니다.
   최근 미국에서는 죽음을 무시하려는 경향이 강하여 병원에서 죽으면 시신을 집으로 모시지 않고  바로 장례식장으로 보내 곱게 단장하고 수의를 입혀, 죽기 직전과는 달리 마치 다른 사람처럼 깨끗한 모습으로 유족과 대면하게 합니다.  여기에서도  죽음을 숨기려는 심리가 작용하는 것입니다.  표면적인 이유는 위생 문제와 어린이들에게  충격과 공포감을 주지 않기 위해서라고 하지만,  어른들도 죽음을 직접 보지 않으려 하는 것이 아닐까요?
   죽음을  직접 바라보는 기회가 없다면  죽음을  의식하지 않고도 살 수 있습니다.  마치 죽음은 자기와는  관계가 없는 것 같은 기분으로 살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듣
지 않고 살아가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친척의 죽음,  회사 상사의죽음,  이웃 사람이나 아는 사람의 죽음등 '죽음' 이라는 말은 너무 자주 우리 귀에 들려옵니다.
   죽음의 존재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는데도 일부러  죽음을 무시하려 한다면,  결과적으로 마음의 깊은 곳에 죽음에 대한 두려움만 크게 됩니다.
   사실은 TV,  영화,  소설,  뉴스나 드라마, 갖가지 이야기에는 어둡고 비참하게 연출된 죽음이 많습니다.  죽음을 직시하지 않고 그렇게  '멀리 있는 것' 으로 만들어 두고  떨어진 곳에서 바라보기만 한다면 죽음은 오직 두려울 뿐입니다.
 


죽음은 비참한 패배나 희생이 아니다


    4,50년 전까지 죽음은 우리에게 일상적인 일이었습니다. 미숙한 의료 행위, 열악한 영양과 위생 상태 때문에 영ㆍ유아를 비롯한 어린이들의 죽음은 드문 일이 아니었고,  전염병이나  식중독 등으로 한꺼번에 많은 사람들이 생명을 잃었습니다.  태풍이나 기근 등 자연  재해에 의해 사망하는 경우도 빈번했습니다.  어린아이 때부터 할아버지,  할머니의 죽음은 물론 부모,  형제 등의 죽음을 직접 눈으로 보아왔던 것입니다.
   20세기도 그랬으므로 그 이전의 죽음은 훨씬 일상적인 일이었습니다.  죽음에서 눈을 뗄 수 없다는 것.  죽음에서 도망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인류는 죽음을 정면으로 응시하였습니다.  죽음을  직시하는 것이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배가시킬 리는 없습니다. 거꾸로 죽음의 심원한 의미를  깨닫게 해줍니다.  그리고 고대부터 죽음과 사이좋게 지내기 위해 온갖 지혜를 동원해 왔습니다.
   그러나 그런 자세는 20세기 후반이 되어 크게 변화했습니다.  의학의 급속한 진보에 따라  뛰어난 약제가 개발되고  정밀 검사법이 확립되어  장기를 이식한다든지  유전자를 가지고  병을 치료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나날이 발전하는  의학에 과도한 기대를 걸고 있습니다. 수명을 사람의 힘으로 늘일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의학의 은혜로  치료할 수 있는 병에 걸린 사람은 행운아이고,  아직 의료의 손이  미치지 않는  병에 걸린 사람은 불운한 사람으로 간주되겠지요.  그래서  고령이 되기도 전에 죽음을 맞는 사람은 불운한 패배자로 여기게 됩니다.
   병에 걸린 사람은  의사에게 맡겨지고  그 연장선상에 있는 죽음은 병원에서 의사의 손으로 처리하는 일이 되었습니다.  한편 의사로서도 죽음은 '실패' 를 의미하며,  죽음과 가장 가까운 사이인 의사가 죽음을 무시하려 하는 불가사의한 상황에 이른 것입니다.
   옛날에는  자연스럽게 맞이하고 받아들이던 죽음이 현대에는 거북한 것,  무시해야 하는 것이 되었고,  동시에 얼마든지 무시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현세에서의 기쁨이나 쾌적함만을 유일한 행복이라고 간주한다면,  당연히 죽음은 뒷맛이 개운하지 않은 비극이 되겠지요.

   죽음에 대해 번민하지 마세요


    나는 다양한 체험을 통해 죽음은  두려운 것이 아니라 멋지고 큰 의미를 갖고 있다고 확신합니다. 실제로 죽음이 임박했을 때, 나는 아등바등  저항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게  확신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나만의  확신은 아닙니다.  지금까지  죽음에 대해 연구해 온 많은 사람들이 죽음은  멋진 것이라고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말한 순간,  '죽음이 멋진 것이라니?' 라는 반론이 사방에서 날아올 것 같습니다.
   죽음을 체험한 사람은 이 세상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죽음의 실체는 아무도 모릅니다. 하지만 죽음의 한 걸음 앞까지 찬찬히 검증한다면  '죽음의 가치' 가 보입니다.  그 가치는  한 마디로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지만 윤기 있고 깊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삶' 이란  죽음을 위한  서곡에 불과한 것이 아닐까 할 만큼 죽음은  빛을 발하고 있습니다.  '죽음' 은 두려운 것이 아니라  '삶' 이상의 빛남과 은총이 넘치는 것입니다.
   나는 이 메시지를 당신에게 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당신이 사후 세계가  존재한다는 것도  알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것은 반드시 종교적 의미의 사후 세계가 아닙니다.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체험적으로 알고 확신하는  '보편적 지혜' 로서의 사후 세계입니다. 이 책을 계속 읽어 나감으로써 죽음의 의미와 가치를 알고,  죽음과 사귀는 방법을 알고,  아무도 그 실체를 모르는 사후를  담장 너머로 넘겨다 볼 수 있다면,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사라지고  죽음이  '안식' 과  '기쁨' 을 가져온다는 것을 조금씩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죽음에 이끌린 사람' 이라고 하면,  그것은  자살하려는  사람을 의미하겠지요. '죽음을 동경하는 사람' 이라는 표현도 그런 인상을 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죽음의 의미를 바르게 이해한 사람은 자살 따위는 시도하지 않습니다.  스스로 목숨을 끊을 필요를 느끼지 않기 때문입니다.  거꾸로, 주어진 삶을 충분히 즐기고 활기넘치는 인생을 살게 됩니다.
   예를 들어 당신이 직장에서 꼭 하려고  마음먹은 일을 맡게 되었을 때,  상사가  "결과는  내가 책임질 테니  과감하게 해보게" 하고 말한다면 당신은 있는 힘을 다해 뛰어들겠지요. 그러나 결과에 대한 책임을 스스로 져야 한다면  '실패하면 어떡하지?' 하는 불안감이 먼저 엄습하여 어정쩡한 상태로 일을 하게 됩니다.
   우리는 매일매일 살아가면서  온갖 것을 걱정합니다.  나에 대한 평가가 낮아지지 않을까?  직장을 잃게 되지 않을까? 건강을 해치지는 않을까?  친구 사이에서  따돌림당하지는 않을까?  가족에게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나지 않을까? 근심이나 불안에 시달리는 것은 인간의 공통된 버릇이지만,  우리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 불안과의 싸움에 상당한 에너지를 쓰고 있습니다.
   그런 불안 가운데서도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제거한다면 우리의 인생이 얼마나 더 풍부하고 활기찰지 상상해 보기 바랍니다.  그것은  존경하는 상사로부터  '결과가 어떻든 당신의 미래를 보장한다'는 약속 아래 스스로 좋아하는 일을 하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죽음에 엉겨붙어 있는 불안이나  공포로 말미암아  지금 살아 있는 소중한 시간을 오염시켜 버리기에는 너무나  귀중한 한 사람 한 사람의 인생입니다.
   그리고  질병 등 여러 가지 이유로 죽음을 앞둔 사람,  죽음에 대한  불안을 안고 있는  사람에게도  많은 메시지를  줄 수 있습니다.
  내가 전하고 싶은 것은  죽음이라는  체험은 매우 귀중하고 멋지다는 것,  그리고 죽음에 대한 불안이나 두려움으로 모처럼의 인생을 헛되게 낭비하지 않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당신은 아직 죽지 않았습니다. 틀림없이 살아 있습니다.
   인생의 가치는 길이와는 관계가 없습니다.  주어진 것을  솔직하게 받아들이고 충실하게 시간을 보내기 바랍니다.  이 책에는 죽음의 늪과 마주 섰던 사람들이 내게 가르쳐 준 갖가지 '삶의 지혜' 가 담겨 있습니다.
   모든 사람은  언젠가는 죽음을 맞이합니다.  그리고 커다란 쇼크로 패닉 상태에 빠지면 그 상황에서는 어떤 가치 있는 메시지도 들을 수 없습니다. 갑자기 '당신의 수명은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고 하면 누구라도 사고(思考)가 정지되어 버릴 것입니다. 가슴에 커다란 구멍이 뚫려 버리는 것입니다. 사람은 그런 상태에서 벗어나 보기 좋게 죽을 수도 있지만,  그런 사태에 이르기 전에  미리 죽음에 대한  확실한 각오와 이해를 가지고 있다면  인생의 마지막은 보다 안식에 넘치고 충실하게 장식될 것입니다.  즉 '보다 잘 죽기' 위해서는 일상적인 마음가짐이 도움이 됩니다.
   그리고 죽음에 대한 정보는  '보다 잘 살아가기' 위해  그 무엇과도 바꿀수 없는 양식이 될 것입니다.

 

 

 

 

떠나는 사람이 가르쳐 주는  삶의 진실


스즈키 히데코 지음 / 심교준 옮김

2. '왜 내가' 로 시작되는 죽음의 5단계


  

2. '왜 내가' 로 시작되는 죽음의 5단계

 

중요한 것은 아는 것과 사랑하는 것


   내가 죽음에 임박한 사람들과 깊은 인연을 맺게 된 것은 1977년에 일어난 어떤 불가사의한 일 때문입니다. 그 일은 이미「하느님은  인간을  어디로  이끄시는가?」라는 책에  자세히 소개했지만, 내가  '죽음과 삶' 을 생각할 때의 원체험이기도 하고 내가 살아가는 에너지의 원천이기도 하므로 다시 한 번 되돌아 보고자 합니다.


   당시 대학에서  일본문학을 가르치고 있던 나는  '일본근대문학회' 에 참석한 후,  다음날 다른 대학에서 열리는 '전구대학국어국문학회' 에 참석하기 위해 친구가 살고 있는 나라(奈良) 소재의 어느 수도원에서 묵기로 했습니다.
   수도원에 도착한 것은 밤 9시 무렵이었습니다. 다른 수녀님들은 기도  모임에  참석하고  친구  혼자 남아서  나를  맞아주었습니다. 친구는  나를 2층에 있는 방으로 안내하면서  "계단이  가파르니까 주의해요" 하고 말했습니다.  정말 경사가 급하여  제일 위가  보이지 않는 계단이었습니다.
   이 건물은 본래  왕족의 별장이었는데,  천장이  꽤 높은 데다 그위에 2층을 증축했기 때문에 높고 가파른 계단이 설치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날 밤,  나는 일찍 침대에 누웠지만  잠이 오지 않아 밤중에 일어나 아무 생각 없이  그저 앉아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문득 밖에 나가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는데,  불을 밝히면 자고 있는 수녀님들에게  폐가 될 것 같아 그냥 어두운 복도를  벽을 더듬어 가며 걸었습니다.  그리고  모퉁이 같은 곳에서  한 걸음 발을  내딛었습니다.  그런데 마침 그곳은 앞서 올라왔던 급한 계단의 윗부분이었습니다. 
그때 나는 그만 몸의 균형을 잃고  굴러떨어져 일층 바닥에 부딪치고 말았습니다.
   정신을 잃었을 텐데,  문득 정신을 차려보니  몸이 공중에  붕 떠 있었습니다.  그리고 공중에 똑바로 서 있는 나를  높은 곳에서  또 하나의 내가 응시하고 있었습니다. 물론 내 몸은 바닥에 쓰러져 있었습니다.  즉 거기에는 육체로서 바닥에 쓰러져 있는 나와 공중에 떠 있으면서 그것을 보고 있는 나, 또 더 높은 곳에서 보고 있는 나,이렇게 세 사람의 '나' 가 존재하고 있는 셈입니다.
  

 공중에  똑바로 서 있는  나의 발 밑에는  죽순 껍질 같은 것이 많이 깔려 있었는데,  그 껍질이 꽃잎처럼 발 밑에서 한 잎 한 잎 떨어져 나갔습니다.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그것은 연꽃잎이었지요.
   높은 곳에서 보고 있는 나는,  공중에 떠 있는  나의 발 밑의 꽃잎이 한 잎 한 잎  떨어질 때마다  한 가지 한 가지의  괴로움으로부터 해방되어 자유롭게 되어 가는 것을 알았습니다.
   한 잎 떨어질 때마다 "이제 다른 사람들의 말에 마음을 쓰지 않아도 된다.  나는 자유롭게 되었다."  "이제 다른 사람들에게 신경쓰고 불안해하지 않아도 된다.  나는 자유롭게 되었다" 하고  중얼거리며 끝없는 해방감과 기쁨에 젖어 있었습니다.
   꽃잎이 다 떨어지고  마지막 한 잎마저 떨어지자  공중에 떠 있던 내 몸이 쑤욱  상승하여 보고 있는 나와 보여지고 있는 내가 하나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한순간에 절정의 높이로 솟아올라 지금까지 본 적이 없는 아름답고 찬란한 빛에 둘러싸였습니다. 백금색 빛으로 가득한 빛의 세계였습니다.
   그 빛은 인격을 가진 생명이고  모든 존재와  깊이 연결되어 교류하고 있음을 실감했습니다.  나는 그 빛과 조화를 이루어 일체감 속에서 숨쉬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지복(至福)이야!"
   "완전한 자유야!"
   그것은 꿈을 꾸고 있는 것과는  분명히 다른 느낌이었습니다.  오감(五感)도  사고도 모두  생생했습니다.  몸의 모든 기능이  최상의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지금까지와는 다른 완벽한 새로운 몸이 되었습니다.
   한 점 구름 없이 활짝 갠 명징한 의식 속에서 나는 확실히 이해했습니다.
   "생명 그 자체인 빛의 주님에게  나의 모든 것이 속속들이 알려지고 이해되고 받아들여지고 용서를 받아 완전한 사랑 속에 있다."
   사랑의 궁극적인 상태가 이러한 의식으로  일관되는 것이 아닐까하고 생각했습니다.  '참(眞)' 으로 가득찬 상태.  더욱이 이 빛의 세계에는 시간 개념이 없습니다.
   '아, 이것이 영원이야' 하고 나는 깨달았습니다.
   그런 지복감에 감싸여 있는데, 어디선가 목소리가 뚜렷하게 들려왔습니다.
   "치유해 주소서. 치유해 주소서."
   그때 빛의 주님이 "현세로 돌아가거라" 하고 내게 말했습니다.
   그리고 다시 또 빛의 주님은 말했습니다.
   "현세로 돌아갔을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아는 것과 사랑하는 것이다. 이 두 가지만이 소중한 것이다."
   나는  지복의 장소에서  현세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돌아가는 순간,  이 지복감을 잃고 온갖 번민과 자기 혐오,  번거로움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므로.  그러나  나의 바람과는 달리 내 의식은 현실로 돌아왔습니다.
   내가 계단에서  굴러떨어지는 소리를 듣고  수녀님들이 뛰어나오자, 나는 비틀거리며 일어서서 "괜찮아요" 하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부축을 받아 방으로 올라와  침대에 뉘어진 다음에도  "괜찮아" 하며  다시 정신을 잃어  구급차를  불렀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내게는 그런 기억이 전혀 없습니다.
   현장을 둘러본 구급대원은  이 가파른 계단에서 아래로 떨어졌는데도 아직 살아 있는 것에 놀랐다고 합니다.
   정신이 들었을 때, 나는 병원에 있었습니다.  기절하고 나서 의식을 되찾기까지  5시간 정도 경과한 것 같습니다.  내가 그 불가사의한 체험을 한 것은  구급차가 도착하기까지  수도원 2층  침대 위에서 의식을 잃고 있던 때입니다.  지복감의 한가운데에 있을 때 들려온  '치유해 주소서' 라는 목소리는  그 자리에 있던  외국인 수녀님의 기도 소리였다고 합니다.
   다행히  갈비뼈에 금이 간 정도로 끝났지만  다음날은  온몸이 욱신욱신 쑤셨습니다.  돌아눕는 것도 힘들었지만  기분은  매우 좋았습니다.  불가사의한 빛에 감싸여 있던 기억이 선명하고  눈부신 빛의 여운이나  명징한 감각에 의해 나는 아직  지복감에 가득차 있었습니다.  대우주와의 일체감을 맛보고 있었습니다.  나는 황홀한 기분으로 침대에 누워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 지복 상태가  3일간 계속된 후,  서서히 평정을  되찾았습니다.  그러나 그 빛에 의해 나는 전혀 다른  차원의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때까지 번민하고 있던 것이  너무 작게 보이고,  마음은 상쾌하게 활짝 개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내 마음속에서는 "중요한 것은 아는 것과 사랑하는 것이다.  그것만이 소중한 것이다" 하는 말씀이 아름다운 종소리처럼 울려퍼지고 있었습니다.


 눈부신 빛과 만난 체험


   도쿄로  돌아온 나는  후유증을  알아보기 위해 당시  통원치료를 받고 있던 국립의료센터에 입원했습니다.
   실은 그 사고가 있기 5,6년 전부터  교원병(膠原病)을  앓고 있어서 추운 계절에는 극심한 고통을 겪고 있었습니다. 겨울 한파가 닥치면  몸이 경직되고 혈관의 흐름이 정체되어  손은 죽은 사람처럼 새파랗게 되었습니다.  심할 때는 온몸에 통증이 와  숨도 쉴 수 없을 정도입니다.  몸을 아무리  따뜻하게 해도,  뜨거운 것을 마셔도 전혀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교원병은 마땅한 치료법이 없고  혈관에 대체관을 넣어  피의 흐름을 원활하게 해주는 것이 전부입니다.  사고를 당한 무렵은 혈관상태를 검사하여 주치의와 치료방법을 상담하기 직전이었습니다.
   사고  후유증 검사와  교원병 검사 결과를 기다리면서  입원하고 있던 내게 영국인 수녀님이 문병을 와주었습니다.  그리고 그때 자신이  읽고 있던  책을 소개해 주었습니다.  레이먼드 A. 무디가 쓴「삶 이후의 삶」이라는 책인데,  여기에 임사체험(臨死體驗)을 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전에도 임사체험에 흥미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나와는 거리가 먼 이야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나는 그 수녀님의 말을 듣고 크게 놀랐습니다.
   "임사체험을 한 사람들 중에는  빛과  만난 사람들도 있어요.  그 빛은 살아 있는 빛으로  눈부시기는 하지만  지나치게 눈부신 것은 아니고---."
   그것은 내가 본 빛,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그럼 나의 체험이 바로 그 임사체험이었다는 말인가?'
   나는 마음속으로 자문했습니다.
   수녀님은 새로운 이야기를 계속 들려주었습니다.
   "그 빛과 만난 사람 중에는 그후 인생이 완전히 바뀌어 초능력이 생긴 사람도 있다고 해요."


   임사체험의 은총


   그리고 그 말이 현실이 되어버린 것 같습니다.
   수녀님이 빌려준 책을 거의 다 읽었을 무렵, 주치의가 병실로 와서 내게 말했습니다.
   "신기하군, 병이 깨끗이 나았어요."
   검사 결과를 보니 교원병이 완전히 나았다는 것이었습니다.
   무디의 책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 있었습니다.
   '극히 소수이긴 하지만 사후 세계를 체험하고 나서  심령 능력에 가까운  직감이 생긴 것 같은 기분이 든다.  혹은 그런 직감이 생겼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보고가 있다.'
   교원병이 완치된 것은 당연히 기뻤지만,  그것은 그저 작은 사실에 불과했습니다.  내 속에 가득차 있는 지복감이나 우주와의 일체감,  그리고 모든 사물과 이어져 있고  조화를 이루고 있는  감각에 나는 압도되어 있었습니다.
   그 무렵,  나는 이 체험을 자주 입에 올렸습니다.  그러나 주위의 반응과  내가 실감하고 있는 감각의 차이가  너무 커서 이야기하는 것을 그만두었습니다.  단지 한 사람,  나와 절친했던 작가 엔도 슈사쿠(遠藤周作) 씨가 자신의 강연에서 나의 체험을 소개했습니다.
   "죽음을  굉장히 두려워하는 사람이  만일 이 이야기를 듣는다면 죽음의 머리맡에서 뜻밖의 위안을 얻을지도 모릅니다."
   그후 나는 불가사의한 체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누군가와  만나면 대우주의 힘이 나를 통해 그 사람에게 흘러들어가서 그 사람 속의 성스러운 것에 닿고,  그 순간 그 사람의 마음속 깊은 곳에 있는 참된 자기가 눈을 떠서 그 사람의 운세가 행복한 쪽으로 방향을 바꾸는 것과 같은 감각을 맛보는 것입니다.
   병에 걸린 사람에게 가면  내 손이 자연히 그 사람에게 닿습니다.호흡을 의식하고 있으면 차츰 그 사람과 일체감을 느낍니다. 그 순간, 평소와는 다른 차원으로 들어갑니다.  병이 나았으면 좋겠다든지,  기적이 일어나면 좋겠다든지 하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습니다. 대우주와의 일체감 속에서  자연체가 된다는 것이  가장 적합한 표현입니다.  나를 통해 병자에게 전해지는 치유의 힘은 자기 치유력을 움직이게 하여 병을 치유하는 것에 머무르지 않고  몸을 넘어서 그 사람의 영혼 깊은 곳에 깃들어 있는 본래적인 것,  즉 그 사람을 살게 하는 근원인 '생명 그 자체' 에 도달하여 생명의 본질인 '순수한 사랑' 을 불러일으킵니다.
   이때는  '이렇게 하지 않으면' 이라든지  '이런 사람이 되지 않으면' 등과 같은 생각은 사라지고,  그 사람이 함께 치유되는 것에 마음을 열고 신뢰하며  '치유의 빛' 에 모든 것을 맡기고 편안한 마음으로 있을 뿐입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병에 대한 적대감이나 혐오감이나 불행하다는 의식은 사라지고 마음이 따뜻해져 오는 것을 느끼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들 중에는 건강을 회복한 사람도 많지만 제 수명을 다 살고  죽음을 맞은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병이 완치되지는 않아도 차츰  고통에서 얻은  깨달음에 의해 사랑과 자비의 마음을 키우고 안식의 경지에 들어가는 사람도 많습니다.
   이런 과정을 보고 있으면 죽음과 삶은 대립하는 것이 아니고, 치유란 단지 몸의 치유만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되돌아가 모든 것을 통합하고 새로운 삶으로 이끌어 주는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때 나의 뇌리에 떠오른 비유는  확대경이었습니다.  어렸을 때 툇마루에서  확대경에  태양의 초점을 맞춘 다음  신문지에 비추고 있으면 신문지가  불타오르는 것을  즐기며 놀았습니다.  대우주에 가득한  치유의 힘은  태양광선이고 불타오르는 것은  병자의 내면 깊은 곳에 감추어져 있는 자기 치유력입니다.  확대경은 어차피 확대경(하나의 촉매제)에 지나지 않습니다.

 

 

 

 

 

사람을 행복하게 하는 힘


   놀라움에 가득찬  나날을 보내고 있던 나는  잊을 수 없는 사람을 만났습니다.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우연히 만난 그분은 투시능력이 있는 고승이었습니다. 그분은 나를 만나자마자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은 최고의 초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사람을 행복하게 하는 힘입니다. 당신을 통해 커다란 힘이 다른 사람에게 미치게 되는데,  사람들의 행복을 위해 그 힘을 사용하기 바랍니다.  그리고 콤플렉스를 버리세요."
   나는 이 말을 듣고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다음과 같이 생각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해주고 싶어한다.  그리고 그런 능력은 누구나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분의  진지한 표정을 떠올릴 때마다  내 생각은 바뀌었습니다. 나를 통해 커다란 힘이 다른 사람에게 작용하여 그가 행복하게 된다면 얼마나 멋진 일인가 하고 희망적인 생각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후 나는 사람들과 만나는 것이 기뻤습니다. 누구와 만나도 '이 사람은 행복하게 된다' 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확대경은 어차피 확대경에 지나지 않습니다. 임사체험을 했다고 해도  내가 멋진 사람으로 바뀐 것도 아니고  괴로움이 줄어들었을 리도 없습니다. 그러나 고승의 말씀은 언제나 내 마음속에 살아 있습니다.
   그리고 임사체험을 한 후 내 속에서 변화된 것은  강력한 의식을 갖게 된 것입니다. 눈에는 보이지 않아도 공기로 인하여 사람이 살아가는 것과 같이, 실감할 수는 없어도 한순간 한순간 우리를 살아가게 하고 치유를 계속하게 하는, 인지를 초월한 커다란 존재의 힘이 일상 시간 속에 작용하고 있다는 감각입니다.  임사체험을 경험한 사람에게 이 이야기를 하면  내가 하고 싶어하는 말이 무엇인지 잘 이해합니다.
   어쨌든 임사체험을 하고 나서 나는  병에 걸린 사람과 만나는 일이 많아졌습니다.  어디가 나쁜지,  어떤 상태인지  묻지도 않고 그 사람의 몸에 손을 댑니다. 그 사람과 조용하게 호흡을 맞추고 있으면 손을 통해 그 사람의 몸 상태가 느껴집니다.  깊은 명상 중에 몸속의  통증이나 불쾌감,  나쁜 곳을  병자와 함께  느끼는 것입니다.
  그런 다음 대우주의 치유의 힘에 온전히 맡길 뿐입니다.   이것을 알게 된 친구 수녀가 내게 진지하게 말했습니다.
   "세상에는  괴로워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을 조금이라도 편안하게 해줄 수 있다면 좋지 않을까요."
   그래서 나는  현대 의학으로는 치유할 수 없는  병자를 찾아가게 되었습니다.  말기 암 환자를 비롯하여 죽음에 직면해 있는 사람들 말입니다.
   그들에게 가면 나는 아무 말 없이 손을 내밉니다.  불가사의하게도 그들은 내가 손을 대기만 하면  한 번도 본 적도 없고 알지도 못하는 내게 마음을 엽니다. 그 자리에서 병이 치유되는 사람도 있습니다.  병은 치유되지 않아도 마음의 평안을 느끼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렇게 하여 나는 죽음에 임박한 많은 사람들과 교류하면서 '사람의 죽음' 에 대해 배우게 되었습니다.


 

 

 

 

 

떠나는 사람이 가르쳐 주는  삶의 진실


스즈키 히데코 지음 / 심교준 옮김 (강헌모님 인터넷 게시글)

2. '왜 내가' 로 시작되는 죽음의 5단계


   죽음에 대한 교육(Death Education)


   옛날과 비교하여 최근에는 죽음에 직면하는 경우가 거의 없습니다.  그렇지만 어떤 식으로든 죽어가는 사람들의 마지막을 다루고 있습니다. 그리고 누구나 사람이 죽어가는 과정에 대해 어느 정도 지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죽음에 대한 지식이 있다는 것과 실제로 눈앞에서 한 인간이 죽어가는 것을  체험하는 것은 하늘과
땅 만큼의 차이가 있습니다.
   특히 죽음을 앞둔 사람들이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떻게 변화되어 가는가에 대해 충분한 지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지금까지 죽음을 두려워하고 이에 대해 이야기하려 하지 않았다는 데 큰 원인이 있습니다.
   죽음을 앞둔 사람, 예를 들면 말기 암 환자에게 "당신은 이제 곧 죽을 텐데,  지금 어떤 기분인가요?"  하고 묻는 사람이 있을까요? 그런 사람에게는 죽음이라는 말을 쓰지 않는 것이 상식입니다.
   생명이 얼마 남지 않은 사람에게  "약한 마음 먹지 말고  힘내세요" 하고 격려의 말을 합니다.  더구나 직장 상사나 친척이라면 문병을 가서  "빨리 건강을 되찾아 함께 골프를 칩시다",  "얼른 회복해서  다시 함께 일합시다" 등과 같은 일시적인  위안을 줄지는 모르지만 그다지  마음에 없는 말을 던집니다.  그리고는  빨리 되돌
아 나오려고 합니다.   위중한 경우에는 중환자실 격리 창문 너머로  축 늘어진 환자를 바라보는 것밖에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이처럼 문병하는 사람들은  평소 접해 보지 않은 상황에서 환자를 어떻게 대하면 좋을지 곤혹스러워합니다.  그뿐만 아니라 만일 "당신이 죽음에 임박했을 때,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떻게 죽음을 맞을 건가요?" 하고  질문을 받는다면  바로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죽음은 누구에게라도 '한없이 먼' 일입니다.

   죽음에 대한 교육이라는 단어를 최근에 알게 되었습니다.  여기에서는  '죽음이란  무엇이고 사람은  어떻게 죽어가는가' 에 대해 배웁니다.
   인류는 처음부터 죽음을  두려워해 왔습니다.  우리가 체험하는 일상적인 두려움의 근원은  '죽음' 에 있습니다.  누구나 죽어버리면 더이상 살아 있지 않다는 것은 자명한 이치입니다.  즉 살아 있는 사람들 중에는 죽음을 체험한 사람이 없을 뿐더러 죽음을 해명할 수 있는 확실한 지식을 가진 사람도 없습니다.  어느 시대 누구
에게나  '죽음은 미지의 것' 이고 모든 사람의  불안의 근원입니다. 왜냐하면 불안이란  '미지에 대한 두려움' 이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지식을 구사해도,  체험해도, 확실한 것이 보이지 않을 때 우리는 불안에 휩싸입니다. 원인이나 경과, 결과, 대처 방법 등을 모르고 '실체를 알지 못하는' 상태가 불안을 일으킵니다.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죽음에 대한 불안에서 조금이라도  해방되려면  '죽음을 미지의 영역에 가두어 두고 터부시하는 것' 으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합니다. 인간이 살아 있는 한 반드시 겪게 되는 죽음에 대해 확실히 눈을 뜨고, 마음을 열고, 생각을 유연하게 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죽음에 대해 있는 그대로 배우는 것입니다.
   최근 죽음에 대해 배운 사람들은 그것이 죽음에  직면한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었고,  자신의 죽음에 대해서도 마음가짐을 달리할 수 있었고,  보다 결실이 많은 마지막을  맞이할 수 있었다고 증명했습니다.  또 주목할 것은  죽음에 대한  교육이야말로  현실적인 삶의 문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명제에 대해 깊은 지혜
를 익히는 지름길이라는 사실입니다.
   자신의  죽음을  생각한다든지  '당신은  이렇게 죽습니다' 라는 설명을 듣는 것은  유쾌한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죽음에 대해 건전한 지식을 갖는다면 틀림없이 인생이 풍요로워지고 만족스러운 일생을 보낼 수 있게 됩니다.
   이런 교육을 포함하여 죽음과 삶에 관한 지식과 지혜를 '사생학(死生學,  Thanatology)' 이라고 합니다.  사생학의 선구자로 높이 평가받고 있는 사람은  스위스의  정신의학자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입니다.
   퀴블러 로스는 의학적으로 버려진 환자들과 접하면서 죽어가는 사람들의 의지(依支)가 되어주는 것도  의사가 해야 할 중요한 일이며, 죽음을 직시하지 않고서는 참된 의료가 이루어질 수 없음을 거듭 주장했습니다.
  

  현대 의학에서는 죽음을  '패배' 로 간주하여  의사를 비롯한 의료 관계자들이 기피하는 상황에  위기감을 느낀 퀴블러 로스는 죽어가는 사람들의 마음의  의지가 되는 것을  사명으로 삼았습니다.
그리고 그들로부터 귀중한 것을 많이 배웠습니다.

 

 

 

떠나는 사람이 가르쳐 주는  삶의 진실


스즈키 히데코 지음 / 심교준 옮김

2. '왜 내가' 로 시작되는 죽음의 5단계


   죽음에 이르는 5단계


   1969년 퀴블러 로스는 출판사의 의뢰를 받아 죽음에 대한 책을 쓸 결심을 했습니다.
   '그런데 무엇을 쓰면 좋을까?'
   죽어가는 사람들과  계속 교류해 온 그녀에게  문득 아이디어가 떠올랐습니다.  죽음을 눈앞에 둔 환자들은 비슷한 심리적 과정을 거친다는 사실을 분명히 보았던 것입니다. 사인(死因)이나 죽음에 이르는 경과나 처한 상황이 각각 다르지만, 죽음을 맞닥뜨렸을 때 누구나 비슷한 마음의 변화를 밟아 죽음에 임한다는 것입니다.  그녀는 이것을  '죽음에 이르는 과정' 이라 하고 5단계로 구분했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말기 암으로 '앞으로 3개월' 이라는 선고를 받았다고 합시다.

   제1단계 부인
   가장 먼저 일어나는 반응은  '부인' 입니다.  강렬한 충격을 받아 "이건 뭔가 잘못된 거야.  내가 죽는다니,  그런 일은 있을 수 없어!" 하며 사실을 부정하려 합니다.
   퀴블러 로스는 이렇게 정의를 내리고 있습니다.
   '부정하는 것은  자기를 지키려는  방어기제에서  나오는 것이고 예기치 못한 갑작스러운 비운에 대처하는 정상적이고 건전한 반응이다.  부정함으로써 자기 인생이 끝난다는 생각을 지워 버리고 그전과 변함없는 인생으로 돌아가려고 한다.'

    제2단계 분노
   필사적으로  부인해도 결코  돌이킬 수 없는 사실이라는 것을 알면 이번에는 '분노' 를 느끼기 시작합니다. '왜 나만이 이런 가혹한 운명을 뒤집어쓰지 않으면 안 되는가?' 하는 분노입니다.
   그리고  분노는  '왜 하필이면 내가?' 에서  '왜   그 사람이  아닐까?' 로 변화해 갑니다.
   '나는  완벽하다고 할 수 없지만 그래도  성실하게 살아왔어.  그렇게 교활하고 못된 짓만 골라 하는 그 녀석은 잘 살고 있는데,  왜 그 녀석이 아니고 내가 이런 병에 걸려서 고통받지 않으면 안 되는가?'  해답을 얻을 수 없는 이런 생각은 점점 깊어져 갑니다.
   가족, 의사, 간호사,  친구 등 누구든 간에  '왜 그 녀석이 아니고 나인가?' 하는 생각에  괴로워하고  이 사람 저 사람  가릴 것 없이 닥치는 대로 역정을 내고 싶은 충동에 휩싸이게 됩니다.
   퀴블러 로스는 "그것은 '나는 살아 있어.  모두들 그 사실을 잊지 말라고!' 하는 외침이다" 하고 말합니다.
   이 단계에서  중요한 것은  분노를 터뜨려도 좋다는  자각입니다. 누구나 이런 병에 걸리면  분노를 터뜨리고 싶어집니다.  그렇지만 환자가 주위 사람들에게 병이 확인되기 전의 상태로는 받아들여질 수 없다는 근원적인 두려움을 확실히 수용하도록 해야 합니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일입니다.  이 두려움을 수용한다면 분노를 크게 표출하지 않고도 지낼 수 있습니다.
   자기 속에 이렇게 큰 두려움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분노해도 당연하다고  자신을  용서하고 분노를  수용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분노를 수용하지 않으면 점점 커다란 분노로 바뀌게 됩니다.
   그런데 '화내면 안 된다, 화내면 안 되지.  내가 불안하다고 해서 아무 죄도  책임도 없는 사람에게  덮어씌우는 것은 가당치도 않은 일이다.  더욱 늠름하고 의연하게 살지 않으면---' 하고 남을 배려하느라 억누르기만 하면 분노가 마침내 슬픔으로 바뀝니다.
   주위에  이런 마음의 움직임을  이해해 주는 사람이 있는 경우에는  상황이 크게 바뀝니다.  풀 수 없는 분노를  신뢰하는 사람에게 퍼붓고  그 마음이 받아들여지면  다음에 이어지는 것이  '거래' 단계입니다.

   제3단계 거래
   많은 경우, 인간을 초월한 신과의 '거래'입니다.   "제 버릇없는  성격을 고칠 테니 아이가 유치원 들어갈 때까지만 살아 있게 해주세요."   "시어머니를 잘 섬길 테니 이 아이가 고교를 졸업할 때까지만 기다려 주세요."   매우 고통스러운  조건을  제시하면서  그 노력의 대가로 완전히 회복하게 해 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 거래는 성립되지 않습니다.  만일 아이가 졸업할 때까지 목숨을  부지할 수 있게 된다면 그 사람은  '이 아이가 결혼할 때까지---'  '내가  환갑을 맞을 때까지---' 하고  새로운 거래를  제안하게 되겠지요.

   제4단계 수용
   이런 제안이 무리한 주문이라는 것을 깨달으면 '억울함' 의 시기로 들어갑니다. 슬픔에 잠기고 깊게 낙심합니다.   시간이 경과하면 증상은 더욱 악화되고  경제적으로도 고통스러운 상황이므로 더욱 낙심하게 됩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은 물론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잃게 된다고 느낀 나머지  어떤 위안의  말도 귀에 들어오지 않게 됩니다.

   제5단계 수용
   그러나  '억울함' 의 단계를  잘 넘기면  다소  시간이 걸리더라도 마지막에는  '수용' 단계에  이르게  됩니다.  행복감까지는 아니지만 억울함이나  분노가 사라지고  온화한 체념과 함께 죽음에 대해  안식을 느끼게 됩니다.   이 수용 단계에서는 그 사람이 본래 가지고 있는 멋진 성품이 표면에 나타나 본인도 주위  사람들도 감동하게 된다고 합니다.

떠나는 사람이 가르쳐 주는  삶의 진실


스즈키 히데코 지음 / 심교준 옮김

2. '왜 내가' 로 시작되는 죽음의 5단계


   긴 여행을 앞둔 최후의 휴식


   퀴블러 로스는 이 마지막 단계를 「죽음의 순간」에서 '긴 여행을 둔 최후의 휴식' 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이 책이 베스트 셀러가 되어 '사생학(死生學)' 의 문을 열게 된 것입니다.
   죽어가는 사람들과  교류해 온  나도,  죽음을  많이 보아 온 다른 람들도 이 과정에  대부분 동의합니다.  모든 사람에게 다 적용할 는 없겠지만 많은 사람들이 이 과정을 체험한다고 봅니다.
   죽음을  각오하는 과정은 사람에 따라  천차만별입니다.  길고 긴 병 끝에  '이제 여기까지' 하고 죽음을 맞는 경우도 있고,  건강하던 사람이 어느날 갑자기  '앞으로 반년' 하고  죽음을  선고받는 경우도 있습니다.  어느날 갑자기 내려지는 죽음의 선고는 긴 투병 생활을 거친 죽음보다도 충격이 큽니다.
   또 사람에 따라 순서가 다르게 나타나거나,  두 단계가 동시에 진행되거나,  어느 단계가 극히 짧거나,  어느 단계는  확인할 수 없는 개인차는 있지만 대체로 이 5단계를 거칩니다.
   그런데 퀴블러 로스도 말했지만,  이 5단계를 통과하여 자연스럽게  '수용' 에 도달하려면 주위 사람들의  지지가 필요합니다.  자기가  느끼고 있는 것,  생각하고 있는 것을  솔직히 이야기할 수 있는 대가 있으면 자연스럽게 이루어집니다.
 

  환자는 우선 병에 대한 두려움을 안고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큰 려움은 병에 대한 두려움이 아닙니다.  병은 견딜 수 있지만 자신이 병에  걸렸다는 사실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전과 같이 받아들여지지 않게 될까 봐 고통스러워하는 것입니다.  그런 근원적인  두려움을 확실하게  똑바로 응시하지 않으면  두려움은  분노로  바뀌게
됩니다.
   또 만일 이 분노로 생긴 슬픔을  차분하게 가라앉히지 않으면  더 게 낙심하고 마침내는  무기력하게 됩니다.  그리고 자기는 안 된다고 생각하여 스스로 소중하게 여기지 않고  자포자기하게 됩니다.
   중요한 것은  본인 스스로 그리고  주위 사람들이  환자의 감정을 대로  파악하여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나는 지금 두려움을 느끼고 있다' 는 것을  자각한다면 분노는 그다지 크지 않습니다.
  금 나는 괜히 화가 난다' 는 것을  인정한다면  슬픔은 그렇게 심하게  증폭되지 않고  깊은 무기력이나  자포자기에 빠지지 않고 지낼 수 있습니다.
   근원적인  두려움은  '주위 사람들에게  버림받는' 것이므로,  '나는  당신을 절대로 버리지 않는다' 고 생각하는 사람이 주위에 있으면 두려움이 어느 정도 해소되고 안정을 느끼게 됩니다.  그런데 자기 믿음을  시험하는 행위로  분노를 표현하기도 합니다.  분노함으로써 상대가 도망치면  '봐,  역시 나를 버리는구나' 하고  독단적으로 생각하고 더 깊은 슬픔을 느낍니다.
   만일  '절대로 당신을 버리지 않아요'.  "분노를 터뜨려도  괜찮아요' 라고 말하고 또 그런 자세로 자신을 받아주는 사람이 있다면 환자는 그리 혼란스러워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다른 사람의  따뜻한 도움은  강력한 힘이 됩니다.동시에 환자가  '이제 나는  버림받을 거야' 하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잘못된  믿음이므로 이런 생각에  휘둘리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자기가 분노하고 있는 것을 알아차리고 그 분노와 공존하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분노에 직면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 되면 평소 떻게 분노에  대처했는가를 묻습니다.  또 분노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인간으로서  커다란  성장을 이루는 모습도  많은 사람들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2. '왜 내가' 로 시작되는 죽음의 5단계


   괴로움의 의미


   결국 죽음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사람들이 묻습니다.
   '나쁜 짓이라고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왜 나만 이렇게 빨리 게 되는 걸까?'
   '이렇게 고통스러운 처지가 된 것은 도대체 어떤 의미가 있는 걸까?'
   '하느님은  사랑이시라는데 나는 하느님에게  벌을 받고 있는 것일까?'
   '어떤 행동에 대한 벌인가, 전생의 업보인가?'
   이와 같은 질문은 '왜 내가?' 라는 질문으로 집약됩니다.   그리고 그 질문은 인류의 탄생에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견디기 어려운 고통을 맛본 모든 사람들이 던진 질문이기도 합니다. 바꾸어 말하면 납득하기 어려운 죽음을 앞두고,  혹은 거기에 필적하는 고통을 느끼면서 '왜 내가?' 하고 질문을 반복하는 것입니다. 질문은  '왜 지금 이런 고통을 받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일까?' 에 한 답을 알려고 하는 것입니다.
   고통은 가능하면 피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러나 살아 있는 사람은 누구도 예외 없이 고통을 체험합니다. 대표적인 것이 죽음입니다. 병에 걸린다는 것은 고통 외에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리고 죽음에 의해  사랑하는 사람들과  이별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 역시 고통스런 일입니다.
   내가 일찍 저 세상으로 떠나면 이 세상의 많은 사람들과 헤어지게 됩니다.  또 내가 오래 살면 그 사이에 아는사람을 저 세상으로 떠나보내게 됩니다.
   '모든 고통에는 의미가 있다' 고 하지만,  특히 죽음이라는 고통의 의미는 정말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힘든 병을 극복한 후  '그 병에 걸리고서야 비로소  인생의 가치를 알게 되었다' 라든지.  '죽을병에 걸림으로써  제각각이던 가족들이 하나가 되었다' 는 식으로 나중에 고통의 의미를 알아차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고통의 의미는 고통을 견뎌내고 마음의 안정을 되찾은 다음 그 시기를 되돌아볼 때 일어나는 생각입니다. 극심한 고통의 의미를 알아차리는 경우는 많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 고통을 아무리 파헤쳐 보아도  의미라고는 도저히  찾을 수 없어'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즉 죽음을 눈앞에 둔 고통의 의미는  이성이나 지성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럼 어떻게 이해할 수 있는 것일까요?
   고통의 의미를 이해하는 과정은 부인, 분노, 거래,  억울함의 쓰라리고  괴로운  과정을 거쳐  수용에 이르는 것입니다.  자기에게 주어진 운명을  수용함으로써  이성이나 지성으로는 파악할 수 없는 고통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는 상태가 되는 셈입니다.
   그리고 고통을 경험할 때, 자신을 얼마나 소중한 존재로 생각하는지 스스로에게 묻게 됩니다. 주위에서 아무리 잘 돌봐주어도 자신이 소중한 존재라는 것을  스스로 인정하지 않으면 고통의 의미를 알지 못합니다. 거꾸로 만일 주위 사람들이 소중하게 여겨주지 아도  자신을 소중히 다룰 줄 안다면  차분하게 성장해 갈 수 있습니다.  죽음을 편안히 받아들인다는 것은  자기를 비하한다든지 무시하는 것과는 상반된 것입니다.
   만일 죽음에 임하여 자신을  '나는 지금  이 세상에서  사라지기 직전에 있는 보잘것없는 존재' 라고 생각한다면 고통 또한 보잘것없는 체험에 지나지 않겠지요.  그러나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존재인 나' 로  인식한다면 고통을  체험하는 것도 가치 있는 것이며 그 의미를 아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2. '왜 내가' 로 시작되는 죽음의 5단계


   괴로워도 편안한 마음


   죽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알았을 때,  왜 우리는  괴로워할까요?  그것은 불쾌한 생각을 지닌 채 살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두려움, 즉 죽음에 대한 불안과 '삶에 대한 애처로운 집착' 에 시달릴 이라는 공포입니다.
   두려움을 피하고, 저항하고,  부정하려 하는 것이 정상적인 반응입니다.  그러나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눈을 돌림으로써 려움은 실제 이상이 되어 버립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두려움은 크게 부풀려지고 마침내 견디기 어렵게 됩니다.
   두려움을 무시하지 않고  마주 대하면  두려움의 정체를 알게 됩니다.  그러면 자신을 얽어매고 있는 두려움의 실체를 조금 떨어진 곳에서 관찰할 수 있게 됩니다.  고통이나 아픔은 사라지지 않지만 그것들과  공존하는 힘이 솟아올라,  고통이나 아픔 가운데서도 두려움이나  불안을 느끼지 않고 지낼 수 있게 됩니다.  그것이 '수용'단계입니다.
   죽음을 눈앞에 둔 사람에게 손을 내밀면 그 사람이  죽음을 받아들이고 있는지 어떤지 알 수 있습니다.
   '아,  이 사람은 죽음을 완전히 받아들여 저 세상으로  떠날 준비가 되어 있구나' 하고 느껴집니다.  '앞으로 며칠 후에 저 세상으로 떠난다' 는 것까지도 알 수 있어  떠나기 이틀 전 정도가 되면 손을 대고 있는 사람의 몸이  하얗게 들여다보이고 흰 빛에 둘러싸여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것은 '완성' 의 표시입니다.  그 모습에는 깊은 고요함과  사랑에 가득찬 싱그러움이 어려 있습니다.  그리고 죽음을 받아들인 사람은 사랑에 가득찬 싱그러움을 주위 사람들도 느끼게 해줍니다.
  

   내가 좋아하는 인도의 성자 이야기입니다.
   그는 산 위에 앉아  명상을 하면서 사람들에게 지혜를 전해 주는데,  찾아오는 이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며  "자신을 사랑하라"고 말합니다.
   "자신을  사랑한다는 것은 어떤 것입니까?" 하고  물으면,  "지금 하고 있는 일을 성실하게 하는 것이다" 하고 대답합니다.
   "좀 더  행복하게 되고 싶은데요" 하고 말하면,  "자기  주변을 둘러보라" 고만 대답했습니다. 행복은 평범한 일상생활 중에 준비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는 세속에  구애받지 않는 표표한 모습으로  깊은 지혜에 가득차 있어 많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성자가 하필이면 암에 걸려 죽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성자니까  아무 병 없이 오래 살아  부처와 같이  웃으며 편안히 임종을 맞이하리라고 기대하고 있었으므로, 암에 걸렸다는 사실을 의외로 받아들였습니다.    더욱이 그 괴로워하는 모습이 심상치 않았습니다.  산 위에서 성자가 내는 신음소리가 산 아래 마을에까지 울려퍼졌습니다.   사람들은  실망했습니다.  성자라면  중병에 걸렸다고 해도 다른 사람들의 행복을 빌면서  평온과 안식 속에서  돌아가실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보통 사람보다 더 괴로워하는 모습, 그야말로 추태를 드러내었으므로 사람들은 환멸을 느꼈습니다.
   참을 수 없게 된 제자가 성자에게 진언했습니다.
   "모두들 실망하고 있습니다.  임종할 때는 위안의 말씀을 내려주시지 않겠습니까?"
   그러자 성자는  "으악!" 하고 비명을 지르며  "아파 죽겠네!" 하고 외쳤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 몸은 참을 수 없을 만큼 지독하게 괴롭고 아프다.  그러나 내 마음은 한없이 편안하다."
   이것은 죽음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는  경지를 나타낸 것입니다.
암이므로 아픔을 느끼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요.  아픔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통증으로 괴로워하면서도 마음은 안식 속에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