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내리는 주 너희 하느님을 명령을 지켜야 한다.”
“너희는 하느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키는 것이다.”
프란치스코가 쓴 회칙 1장 1절은 이렇습니다.
“작은 형제들의 생활과 회칙은 순종 안에, 소유 없이, 정결하게 살면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한 복음을 실행하는 것입니다.”
저는 이 말씀의 뜻을 잘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아니 너무도 당연한 이 말을 프란치스코은 왜 했는지 이해 못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프란치스칸이 아니라도 그리스도 교인이라면 누구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실행하는 것이 당연하지요.
그런데 그 당연한 말을 프란치스코는 왜 프란치스칸 정체성을 얘기하는
회칙 제 1장의 1절에 떡하니 올려놨을까요?
당연한 말을 한 것은 당연한 그것을 실행치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 당시 우리 교회는 너무도 당연한 그것을 실행치 않았습니다.
아니 그렇다면 우리 교회가 복음이 아닌 무엇을 실행했다는 말입니까?
그러니까 이 말은 복음을 전혀 실천하지 않았다는 말이 아니라
오늘 주님께서 말씀하시듯
주님의 가르침은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키고 있었던 것입니다.
더 정확히 얘기하면 주님의 가르침을 우리 입맛대로 바꿔 산 것입니다.
아전인수(我田引水)라는 말이 있지요.
말을 그대로 풀이하면 내 논으로 물을 끌어들인다는 뜻인데,
무엇이든 자기가 유리한 쪽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이고
주님의 말씀과 계명도 내 욕망에 따라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신명기는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말에
무엇을 보태서도 안 되고, 빼서도 안 된다.”고 가르치고,
프란치스코도 해석하지 말고 그대로 실천하라고 합니다.
하느님의 계명이 인간의 욕망에 따라 춤을 춰서는 안 된다는 말씀이고,
복음을 그대로 실천치 못함을 합리화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언젠가 어떤 분이 프란치스코의 가난에 대해서 글을 썼습니다.
프란치스코의 가난은 정신적인 가난이지 물질적인 가난이 아니라고
아주 장황하게 주장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거기서 그분의 위선을 보았고
자기를 합리화하기 위해 가난에 대한
주님과 프란치스코의 가르침을 왜곡하고 있음을 봤습니다.
주님도 프란치스코도 가난을 물질적, 정신적으로 구분치 않으셨습니다.
주님도 프란치스코도 가난을 실존적이고 실제적으로 살으셨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그렇게 살고 있지 못하다면
우리가 그렇게 살고 있지 못함을 겸손하고 솔직하게 인정하면 됩니다.
우리의 실천치 못함을 합리화하기 위해
주님의 가르침을 왜곡하면 안 됩니다.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기보다는
나의 욕망을 충족시키려는 나를 겸손하게 인정하면 희망이 있습니다.
회개가 거기서부터 시작될 수 있는 것이지요.
반대로 욕망을 직시하지 않고 겉을 고상하게 포장하려 할 때
위선이 합리화를 시도하고
주님의 복음을 욕망에 따라 바꾸어버리게 됩니다.
원수를 사랑하는 복음 말씀을 듣고
원수인 그를 내가 사랑치 않음을 회개하기보다는
원수인 나를 너는 왜 사랑치 않느냐고 그에게 따지는
그런 볼썽사나운 일이 벌어질 것입니다.
밖이 아니라 안을 닦아야 함을 오늘 다시 생각해봅니다.
- 김찬선(레오나르도)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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