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론 말씀 (가나다순)/김찬선 신부님

세 성소 이야기

김레지나 2012. 10. 3. 20:06

여우들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

오늘 복음은 주님을 따르는

세 성소에 대해 얘기합니다.
제 생각에 아마 성소와 관련한

각기 다른 세 경우가 있었는데
복음서 저자가 한 데 모아놓았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주님을 따르려면

어찌 해야 되는지 가르치기 위해서
각기 다른 세 얘기를 한 데 모은 것이라고 봐야 할 것입니다.

첫 번째 성소 얘기는

주님을 따르겠다고 자청하는 사람에게
주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만만하게 생각지 말라는 가르치심입니다.
당신의 삶이 고단한 떠돌이 생활일 뿐 아니라
당신을 따르는 사람의 삶도 당연히 그러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섣불리 덤비지 말라는 말씀이고,
그렇다고 겁내고 따르지 말라는 얘기도 아닙니다.
단지 당신 따름의 엄혹함을 각오하고 따르라는 말씀입니다.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 두고,
너는 가서 하느님의 나라를 알려라.”

이 말씀은 너무 심한 말씀이고,
예수님도 이러지는 아니 하실 것입니다.
설마 하느님을 위해

인륜을 저버리고 패륜아가 되라는 얘기겠습니까?
주님을 따름, 하느님 나라 선포가
그만큼 절대적이고 급박하다는 것을

가르치기 위한 말씀이겠지요.

저도 과거 형제들 양성을 할 때 그러한 적이 있습니다.
장례는 아니고 혼례의 경우인데,
당연히 허락을 줄 것이라는 생각으로

허락을 청하는 것이었습니다.
저의 속마음은 당연히 가족 혼례식에 가게 할 계획이었지만
그 당연한 것도 하느님과 우리 생활을 위해 포기할 수 있고,
순종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기 위해 허락을 주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 형제가

실제로 포기하였을 때 허락을 주었지요.

틀림없이 그 형제에게는

중대한 도전이었을 것입니다.
이런 비인간적인 수도생활을 해야 하나

생각도 하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수도원을 떠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박해시대를 보면 가족을 버리고 하느님을 선택하는,
그런 비인간적인 선택을 요구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주님의 부르심이나 수도생활이

그런 비인간적인 것은 아니고,
다만 그런 마음과 자세로

성소를 살아가야 한다는 뜻입니다.

“쟁기에 손을 대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느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

성소의 길은 엄혹하고 절대적이고

즉각적이어야 할 뿐 아니라
미래 지향적이어야 한다고

이제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의 미래 지향적이라는 것은
단지 시간적 과거와의 단절이 아닐 것입니다.
과거 인연들과의 단절을

주님께서는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새로운 관계 형성을 가로 막는 과거 인연,
특히 주님과의 새로운 관계를

방해하는 과거 인연이 있습니다.
첫 사랑이 그것일 수도,
부모님을 부양해야 한다는 것이

그것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만,
그런 거창하고 숙성된 과거 인연이 아닐지라도
허다한 그리고 그리 대단치 않은 인연들과 만남들이
나이 먹을수록 새로운 만남과 인연을 가로 막습니다.

새로운 옷이 거북스러워질 때면

새로운 인연도 피곤할 수 있고,
하느님도 낯설고 피곤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니 더 나이 먹기 전에 얼른
하느님이 나의 숙성된 인연이 되게 해야겠습니다.


    - 김찬선(레오나르도)신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