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론 말씀 (가나다순)/차동엽 신부님

우리 손으로 우리를 축복하시매 -“나는 착한 목자다'

김레지나 2012. 5. 7. 19:24

 

4월 29일 부활 제4주일|요한 10, 11-18


 “나는 착한 목자다. 착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는다. 
삯꾼은 목자가 아니고 양도 자기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들을 버리고 달아난다. 그러면 이리는 양들을 물어 가고 양 떼를 흩어 버린다.  그는 삯꾼이어서 양들에게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나는 착한 목자다. 나는 내 양들을 알고 내 양들은 나를 안다.  이는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과 같다. 나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다. 
그러나 나에게는 이 우리 안에 들지 않은 양들도 있다. 나는 그들도 데려와야 한다. 그들도 내 목소리를 알아듣고 마침내 한 목자 아래 한 양 떼가 될 것이다.
 아버지께서는 내가 목숨을 내놓기 때문에 나를 사랑하신다. 그렇게 하여 나는 목숨을 다시 얻는다.  아무도 나에게서 목숨을 빼앗지 못한다. 내가 스스로 그것을 내놓는 것이다. 나는 목숨을 내놓을 권한도 있고 그것을 다시 얻을 권한도 있다. 이것이 내가 내 아버지에게서 받은 명령이다.”



 

 자녀 셋을 모두 훌륭히 잘 키운 여인이 있었습니다. 한번은 어떤 사람이 그 여인에게 물었습니다.
 “세 명의 자녀 중에 누구를 가장 사랑하셨습니까?”
 여인은 웃으며 대답하였습니다.
 “셋째가 병들었을 때, 그때는 셋째를 가장 사랑했어요. 둘째가 집을 떠나 방황했을 때, 그때는 둘째를 가장 사랑했고요. 첫째가 이성 문제와 학교 성적 때문에 괴로워할 때, 그때는 첫째를 가장 사랑했지요.”
 이 엄마의 사랑이 ‘하느님 사랑’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승승장구할 때보다 고통 중에 신음할 때 우리를 더 사랑하십니다. 그런 까닭에 예수님께서는 백 마리 양을 가진 목자 이야기를 들려주셨던 것이지요. 목자는 잃은 양 한 마리를 찾기 위해 나머지 아흔아홉 마리를 광야에 남겨 두고 그 양을 찾으러 떠났습니다. 결국 한 마리 잃은 양을 되찾은 목자는 어깨에 메고 돌아와서 주변 사람들과 큰 기쁨을 나눴지요(루카 15, 3-7 참조). 이렇듯이 주님께서는 ‘그 잃어버린 하나’ 때문에 노심초사하는 분이신 것입니다.

 오늘 복음 말씀은 이처럼 기우는 자녀를 향한 주님의 편애를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나에게는 이 우리 안에 들지 않은 양들도 있다. 나는 그들도 데려와야 한다. 그들도 내 목소리를 알아듣고 마침내 한 목자 아래 한 양 떼가 될 것이다”(요한 10, 16).
 당신 우리 안에 들지 않은 양까지도 어여삐 여기시는 사랑! 그리하여 당신 안에 하나가 되길 바라시는 사랑! 이 위대한 사랑이 주님의 계획 안에 휘몰아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위로인 동시에 사명입니다. 위로가 되는 까닭은 이 말씀에서 우리가 바로 나 하나 때문에 가슴 아파하시며, 온 신경을 쓰고 계시는 주님의 사랑을 만나기 때문입니다. 완전한 사랑 자체이신 그분께는 단 한 사람도 예외가 없습니다. 이는 소외감이나 외톨이라는 느낌이 우리를 덮칠 때 잊지 말아야 할 깨달음입니다. 이 말씀이 사명이 되는 까닭은 주님께서 당신 사랑을 우리 이웃에게 전할 때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기 때문입니다.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는 노래합니다. 

“그리스도는 이제 몸이 없습니다, / 우리의 몸밖에는.
 그분에게는 손이 없습니다, / 우리의 손밖에는.
 그분에게는 발이 없습니다, / 우리의 발밖에는.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눈을 통하여 / 연민 가득한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십니다.
 그분은 우리의 발로 뛰어다니시며 / 선을 행하십니다.
 그분은 지금 우리의 손으로 / 우리를 축복하고 계십니다."


 성직자만이 사명자가 아닙니다. 수도자만이 성소자가 아닙니다. 신앙인은 모두가 예외 없이 사명자입니다. 주님께서는 “나는 그럴 능력이 없어요”라고 말하는 이를 겸손하다고 칭찬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능력도 지혜도 부족하지만 주님께서 채워 주심을 믿고 선뜻 나서는 이를 주님께서는 좋아하십니다.

 ‘살아 있는 성자’라 불리는 피에르 신부가 우리에게 힘을 줍니다. 어느 날 나이 든 사람이 피에르 신부를 찾아와 절망감을 토로하였습니다.
 “눈이 멀어 더 이상 봉사를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자 피에르 신부가 대답했습니다.
 “말도 안 됩니다. 자, 보세요. 당신은 인생의 마지막 1분까지도 식기를 들고 오는 친구에게 미소를 지을 수 있습니다. 당신의 그 미소가 그날 하루 동안 친구가 해낼 몫의 일을 할 수 있게 돕는 거라면 이미 당신은 봉사를 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우리 인생 마지막 1분까지도 주님의 수족이 되어 드릴 수 있습니다. 이제 우리 차례입니다.

 

 



 


차동엽 노르베르또_ 신부, 미래사목연구소 소장
월간「참 소중한 당신」 2012년 4월호 <송이꿀보다 단 말씀>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