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 고백/투병일기-2012년

★♠ 부활절 아침의 단상 - '죄'를 이기시고

김레지나 2012. 4. 12. 21:00

 

부활절 아침의 단상 - (‘죄’를 이기시고)

 

 

  아직 일어나기에는 이른 새벽에 잠에서 깼는데, 어젯밤 부활전야 미사의 감동과 기쁨 대신, 인터넷 기사로 읽은 살인 사건이 떠올라서 몹시 괴로웠다. 한 여성이 성폭행을 당하고 있다고 112에 신고를 했는데, 경찰이 잘못 대처하는 바람에 너무도 처참하게 살해당했다는 것이다. 그 여성이 겪었을 공포와 가족들이 겪고 있을 슬픔과 분노를 누가 짐작이나 할 수 있으랴. 나는 피해자의 영혼을 위해서, 피해자 가족들의 고통이 실오라기만큼이라도 덜어지기를 바라면서 오래 자비의 기도를 바쳤다.

  기도 중에 문득 한 생각이 스쳤다. ‘하느님은 그 끔찍한 순간에 범인의 팔을 못 움직이게라도 하실 일이지.’ 나는 너무 속상해서 하느님께 ‘이 세상의 악을 지나치게 많이 허용하신 거 아니에요? 그러니 다들 하느님을 오해하는 거예요.’라고 불평을 막 시작하려던 참이었다. 갑자기 내가 암이 재발했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사람이 툭 던진 한 마디 때문에 언짢았던 기억이 났다. 그는 ‘하느님이 이제 안 도와주시는 건가?(셀제로는 이보다 더 노골적인 표현이었다.)라고 했다. 그는 내가 힘에 부치게 무리할 수밖에 없도록 상당한 몫을 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의 말은 평소 그의 무책임한 태도를 돋보이게 할 뿐이었다. ‘내가 하느님 안에서 기쁘게 사는 것은 기쁘게 사는 것이고, 자기 할 일은 자기 할 일이지. 자기 탓이 크지, 왜 하느님 탓을 해? 나라면 그런 질문을 하느님께 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그는 그런 말할 자격이 없지. 미안하다는 말은 못할망정 자기 책임을 왜 하느님께 떠넘겨?’

  그때의 작은 기억이 끔찍한 살인 사건 때문에 하느님을 향하려던 원망의 화살을 여지없이 돌려세웠다. 만약 그 살인 사건에 책임 있는 경찰이나 목격 증인들, 심지어 살인자가 ‘하느님이 계신다면 하느님은 그때 뭐하셨어요?’하고 묻는다면, 그것처럼 괘씸한 죄도 없을 것 같다.

  아담과 하와 이야기나 카인의 이야기에서 보듯이 인간이라면 누구나 자기 잘못에 대한 책임을 남에게 곧잘 돌린다. 카인이 아벨을 죽인 후에 하느님께서 “네 아우 아벨은 어디에 있느냐?”하고 물으시자, “모릅니다. 내가 아우를 지키는 사람입니까?”라고 했다. 만약 카인이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그렇게 마음 쓰이시면 그때 하느님이 막아주시지 뭐하셨어요?”하고 물었다면 어땠을까? 그런 우리의 태도를 보시는 하느님의 마음을 짐작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하느님의 사랑은 너무도 커서 인간의 배반과 거역을 예상하실 수 있으셨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셨다. 사랑은 강요할 수 없는 것이고, 자유와 자유의지는 사랑의 본질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기까지 인간의 자유의지를 허락하시고, 인간이 자신의 자유의지를 사용해서 ‘책임지는 행위를 하도록’ 간섭하지 않으신다.(김찬선 신부님 강론 말씀) 우리로서는 도저히 온전히 납득할 수 없는 무한한 사랑이다.

  어쩌면 하느님의 사랑이 한계가 없기 크기 때문에 우리의 자유의지에 따라 생기는 악도 그토록 큰 것일지도 모른다. 악은 하느님이 어찌어찌하시기에 생기고 말고 한 게 아니라 인간이 사랑하지 못해서 생기는 일종의 ‘결핍의 이치’일 수도 있다는 추측을 해보았다.

  그러니 우리가 저지른 악의 최대 피해자는 우리들 사람 한 사람을 지극히 사랑하시는 하느님이시다. 우리가 아무리 상상력을 동원해도 하느님의 짓밟혀진 사랑의 고통을 알 수는 없을 것이다.

  창조주 하느님을 죽일 수도 있을 만큼의 무한 자유의지에는 무한 책임이 따르는 법이다. 그래서 인간이 저지른 악의 탓은 온전히 인간에게 돌려야하는 것이지, 하느님께 책임을 물어서는 안 될 일이다.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며 기도를 한 후에 깜박 다시 잠이 들었다가, 전화벨 소리에 잠이 깼다. I 신부님의 전화였다. 신부님께서는 내 건강을 물으시고 부활축하 인사를 해주셨다

  “레지나야. 자전거 타고 산에 왔다. 여기는 지금 개나리랑 벚꽃이 한창이다. 오늘 부활절 미사 중에 너를 위해서 기도하마.”

  반가움과 고마움을 어떻게든 잘 표현하고 싶었지만 딱히 떠오르는 말이 없었다. 나는 그냥 “여기는 아직 안 피었어요. 곧 피겠지요. 고맙습니다.”라고만 인사를 드렸다.

 이미 부활의 삶을 살고 계시는 신부님께로부터 사랑의 응원을 받으니 잔뜩 흐렸던 마음이 활짝 개었다.

 

 

  오늘은 부활절이다.

  신부님이 계신 저 남쪽에 꽃이 피었으니, 곧 내가 사는 곳에도 꽃이 피리라는 것은 확실하다.

  우리를 구원하러 오신 주님께서 부활하셨으니, 나도, 살인사건의 피해자들도 부활할 것은 확실하다.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우리의 죄에도 불구하고 절망하시는 분이 아니시다. 주님께서는 죄에 물들어 평화를 잃어버린 우리에게 참된 평화를 주시러 부활하셨다. 주님의 부활은 하느님의 정의가 실현되리라는 약속이며, 하느님의 정의는 하느님 사랑의 다른 이름일 것이다. 주님님께서 영원 속에서 정의와 공정으로써 한 사람 한 사람의 행실대로 갚아주실 것이다.

 

  주님께서 ‘죄를 이기시고’ 부활하셨다는 고백이 올해 부활절에는 새롭게 반갑고 기쁘다.

  주님께서 당신 삶으로써 보여주신 약속에 힘입어 나도 매 순간 사랑으로 거듭 거듭 부활하도록 애써야겠다. 기어이 세상을 아름답게 만드는 봄꽃 한 송이 되어야겠다.

 

주님께서 죄와 '죽음의 권세를 이기시고' 참으로 부활하셨네. 알렐루야, 알렐루야.”

“주님께서는 당신의 모든 길에서 의로우시고 모든 행동에서 성실하시다.(시편 145:17)”

 

                                                 2012년 4월 8일 부활절에, 엉터리 레지나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