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 고백/투병일기-2012년

♣★ 수술 후 나흘째 일기 - 받아들임 - 2011년 9월 9일

김레지나 2012. 4. 5. 23:18

수술 받은 지 벌써 일곱 달이 지났네요.

수술 후 나흘째 일기를 이제야 싣습니다.

퇴원 후에 정리해두었던 것인데,

으짠지 말이 안 되는 소리인 것고 같고 별로 중요치도 않은 뻔한 이야기인 것도 같고 해서

블로그에 올리지 않았었지요.

오늘 줄일 건 줄이고 정리를 좀 했네요

그래도 여전히 주절주절 ~횡설수설~입니다.ㅎㅎ

수술 전 사흘과 수술 후 사흘간의 이야기는 이곳 투병일기 방에 이미 실었습니다.

쩌어~~앞 날짜 글들 뒤져보시면 '수술 후 사흘째'라는 일기에 이어지는 메모입니다.

(흐어어엉.. 일곱달, 긴 세월 동안 이렇게 흐물흐물 지낼 줄 몰랐어용....^^)

 

 

 

수술 후 나흘째 - 2011년 9월 9일

 

* 심한 통증은 좀 나아져서 병실을 옮겼다.

* 앉아있기도 힘들었지만 림프부종 예방교육에 참석했다.

* 같은 병실의 환우에게 손님들이 몇 분 와서 큰 소리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병실에 있을 수가 없어서 성당에 가서 잠깐 성체조배를 했다.

  병실에서 엘리베이터 타고 지하 3층에서 내려 대여섯 몇 발짝 걸으면 성당이다.

* 수술부위에 커다란 반찬고가 덮여있는데, 테이프 알러지가 나서 지름이 4센티쯤 되는 커다란 물집이 잡혔다.

  간호사님이 물집을 터뜨리지 않고 그대로 두어야한다고 했다. 따갑고 가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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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받아들임’에 대해 이런저런 생각을 해보았다.

  엄마가 아시는 어떤 분은 돌아가시는 순간까지 남편에게 “내가 집안 살림 다 일으켜 세웠는데, 나 죽으면 어떤 년 만나서 잘 사나 보자. 나는 억울해서 못 죽는다.”하면서 죽음을 맞으셔다고 한다. 그분에게는 주위 사람들의 선종을 위한 기도도 하느님의 위로도 전해지기 힘들었을 것이다. 영원한 안식으로 건너가기 위한 마음의 준비를 잘 하고, 주위 사람들을 용서한다고, 사랑한다고 말하고 떠날 수 있었더라면 좋았을 텐데. 안타깝게도 그분은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억울해하셨던가 보다. 

 

   우리가 고통이나 죽음을 비롯한 부정적인 일들을 겪게 될 때, 우리에게 주어진 선택지는 딱 두 가지뿐이다. ‘받아들임’을 거부하는 것과 ‘받아들임’을 선택하는 것. 받아들임을 거부하게 되면 우리 마음에는 진정한 평화가 찾아들 자리가 없게 된다. 받아들임을 선택한 후에야 우리는 평화를 누리기 위한 노력을 시작할 수 있다. 

  ‘받아들임’을 ‘선택한다’는 것은 울며 겨자먹기로 마지못해 견딘다는 뜻이 아니다. 선택은 체념과는 다르다. 선택은 적극적이고 자발적인 의지이다. 우리는 체념이 아니라 자발적인 선택을 통해서 평화를 얻을 수 있다. ‘앞으로 일어날 일들도 받아들이기로 선택하겠다.’라고 마음먹을 때에야 두려움과 걱정에서 벗어나 자유로울 수 있다. 우리에게 허락된 가능성과 한계를 살필 수도 있을 테고, '지난' 상처와 '다가올' 상처들을 용기있게 들여다볼 수도 있을 것이다. 죽음의 잔도 ‘마셔야할 것’으로 받아들일 때 우리는 죽음을 잘 준비하고 죽는 순간까지 평화를 잃지않을 수 있다 

  (하지만 그런 내적 평화에 있게 된 사람이라고 해서 고통을 덜 느끼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에게도 고통은 여전히 참기 힘든 실제적인 고통이다.) 

  

  우리가 고통을 안고 간다면 고통은 신앙의 모퉁잇돌이 될 것이고, 고통을 피하려고만 한다면 고통은 신앙의 걸림돌이 될 것이다.  나는 신앙을 갖고 있다가도 큰 고통이 닥치면 하느님을 원망하면서 교회를 떠나는 사람들을 몇몇 만났다. 하느님은 언제나 늦지 않게 위로해주시는 분이시지만, 우리가 그분을 향하고 있을 때만 위로가 가능할 것이다. 아무리 힘든 일을 겪어도 하느님을 원망하고 욕하면서라도 하느님을 향해 있어야 한다. 하느님께서 아무리 귀와 눈과 마음에 대고 소리를 지르셔도  하느님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들리지 않을 테니까.

 

 

<젊은 사제의 인생 레슨> p.130에 있는 글이다.

“우리가 무엇이든 주님께 내어 드리면 주님은 돌려주신다. 우리가 무엇이든 주님께 바치면 주님은 백 배로 우리를 축복해 주신다. 고통을 겪고 있는 이에게 내가 해 주고 싶은 말은 고통을 헛되이 보내 버리지 말아야 한다는 말이다. 결코 그래서는 안 된다. 우리에게 일어날지 모르는 최악의 일은 우리가 고통을 겪는 일이 아니라, 고통을 헛되이 보내버리거나 고통을 그냥 견디는 것이다. 그러지 말고 우리는 고통으로부터 성장하고 배워야 하며, 고통을 통해 주님과 하나가 되어야 한다.”

 

 

  대학 동창 T가 불쑥 찾아왔다. 내가 못 오게 할까봐 연락하지 않고 왔다고 했다. 나는 어떤 미사에서 말씀사탕을 뽑았던 이야기를 해주었다.

  “내가 6개월쯤 전에 후원회 미사에 처음 갔을 때야. 열심히 선교 강의를 하고 계시는 분들이 자기소개를 하시면서 후배들이 어서 빨리 나오면 좋겠다고 하시더라고. 그런 일들이 나한테 주어지면 어떡하나 겁이 덜컥 났어.  미사 내내 열심히 기도했어. '제가 저 일을 할 수 있으려면 일을 그만두어야하고, 일을 그만두려면 제가 다시 아파야 하는데, 저는 그러고 싶지 않습니다. 애들도 키워야 하고요. 최소한 5년은 건강하게 다닐 수 있게 해주세요. 행여 저한테 엉뚱한 계획 세우지 마십시오. 저는 절대 못합니다. 대중 공포증 때문에 더더욱이요. 지금처럼 조용히 지내는 게 좋습니다.” 근데, 그 미사에서는 영성체 후에 말씀사탕을 뽑더라고. 내가 뽑은 말씀사탕에 "거역하는 것은 점치는 죄와 같고 고집을 부리는 것은 우상을 섬기는 것과 같습니다."(사무엘상 15,23)라고 적혀있는 거야. 꼭 내가 "싫습니다."하고 기도했던 것에 대한 응답인 것 같아서 어이가 없더라. 이렇게 다시 아프게 될 것을 미리 알려주신 거 아닐까?“

  “그런 것도 같다. 보통은 말씀사탕에 그런 무시무시한 말씀은 안 넣을 텐데.....”

 

  나는 바로 전에 생각했던 받아들임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ㅋㅋ)

  T가 내 묵상에 대한 답으로 수녀님께 들은 이야기를 해주었다.

  “레지오 훈화 시간에 수녀님께서 해주신 이야기야. 수녀님이 전에 조그마한 성당에 계셨는데, 그 성당에 봉사를 아주 열심히 하는 모녀가 있었대. 손쓰는 일이건 머리를 쓰는 일이건 열심이어서 그분들이 없으면 성당이 안 돌아갈 정도였대. 그런데 어느 날 딸이 성당에 다녀와서 샤워하고 나오다가 넘어져서 허망하게 죽어버렸대. 그 어머님은 그 후로 10년이 지났는데도 냉담 중이시래. 수녀님이 여러 말로 설득하셔도 냉담을 풀지 않는다고 해.”

  내가 대답했다.

  “아는 사람 하나도 성당에 잘 다니다가 자기가 암에 걸리니까 ‘하느님이 계시면 나한테 이런 일이 생길 리가 없다.’면서 냉담해버리더라고. 은근히 설득해보려고 내 체험을 이야기해주어도 마음이 전혀 움직이질 않더라. 무언가를 얻기 위한 목적으로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원치 않은 일을 겪을 때 하느님의 존재 자체에 회의가 들기 쉽겠지. 그래서 어릴 적부터 자연스럽고 당연하게 신앙이 배어들게 하는 것이 중요한 것 같아. 하느님께 대한 믿음이 당연한 것으로 마음속에 자리잡게 되면 부당한 일을 겪게 될 때라도 하느님께 욕을 해댈지언정 하느님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게 되지는 않거든. 힘들 때 욕을 하면서라도 주님을 향해 있어야 주님의 위로의 손길을 놓치지 않고 볼 수 있잖아.”

 

 T가 말을 이었다.

  “우리 레지오 단장님은 마흔에 남편이 돌아가시고 한동안 당장 먹을 것도 없이 힘들게 지내셨는데, 자주 감사기도를 드리셨대. 조금이라도 먹을 게 생기면 ‘음식을 주셔서 감사합니다.’하고, 차를 타면 ‘차를 타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하는 식으로. 하느님이 해주신 것 같지 않은 일에도 무조건 감사기도를 하셨대. 자식들이 그런 단장님을 보고 흉을 보았대. ‘하느님이 원망스럽기만 한데 엄마는 왜 맘에도 없이 ’감사, 감사‘하는 거야? 거짓말이잖아.’하고. 단장님은 이렇게 설명해주었대. ”음식 먹을 때 맛있다고 먹는 사람한테 더 좋은 것을 만들어주고 싶겠니, 아니면 맛없다고 불평하는 사람한테 더 좋은 걸 주겠니? 하느님도 마찬가지야. 원망스러운 일에도 그저 고맙다고 고맙다고 하면 더 잘 챙겨주시고 싶으실 거 아니야?“.... 단장님은 이젠 어려움을 극복하고 잘 살고 계셔. 손자들이 무슨 일이 생기면 ”할머니, 할머니 기도를 잘 들어주시니까 기도해주세요.“하고 부탁한다더라..... 단장님은 고통 중에 있는 사람들을 잘 상담해주셔. ‘내 고통이 훨씬 더 컸는데, 뭐, 그정도 고통 가지고 엄살이냐?’하고 위로해주시는 게 아니라, 정말 상대방의 입장에서 ‘얼마나 아플까?’하고 따뜻하게 품어주셔.”

  내가 말했다.

  “정말 맞다. 고통이 걸림돌이 되기도 하지만, 고통이 나를 성숙시키고 다른 사람을 위로할 수 있는 힘이 되기도 해........ 신달자님의 책 <나는 마흔에 생의 걸음마를 배웠다>을 읽었는데, 꿈에 성모님께서 신달자님을 안고 하늘로 날아 오르셨대. 그 후로는 아무리 힘들어도 “내가 누구인가? 성모님과 함께 하늘을 날아오른 사람이 아닌가?”하는 생각으로 이겨내셨대. 그런 절정체험으로 고통을 이겨낼 힘을 얻게 되는 건가봐..... 사람들은 고통이 끝난 후에 영광이 있을 것이라고들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고통 한 복판에서도 영광을 보기도 해. 나도 그랬고. 그 영광스런 기억에 힘입어 고통을 견딜 수 있는 거지. 예수님도 두 번의 큰 절정체험을 하셨다고 해. 한 번은 세례 받으실 때, 한 번은 거룩한 변모 때. 그 절정 체험으로 나머지 여정에서 용기와 힘을 얻을 수 있으셨겠지. 우리가 우리의 고통을 받아들이기로 적극적인 선택을 하게 되는 힘도 그런 절정체험에서 얻어지는 걸거야.......... 병이 나았다는 신앙간증은 참 많지만, 이왕 겪는 고통을 주님 수난에 합쳐서 봉헌하면서 고통의 의미를 만들어다는 간증은 별로 없잖아. 받아들임으로써 얻어지는 평화를 세상에 이야기하는 것이 내 몫이라면 어쩌지? 하하.”

 

 침대에 기대고 앉아서 T 와 꽤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누었다. 목소리를 내기 힘들어서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소곤거렸다. 즐거운 시간이었다. 

  T가 돌아가면서 컴퓨터 앞에 앉아있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했다.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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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멸망할 자들에게는 십자가에 관한 말씀이 어리석은 것이지만, 구원을 받을 우리에게는 하느님의 힘입니다. (1고린 1:18)”

 

                - 이상 엉터리 레지나의 횡설수설 투병일기였습니다.

                  그 때는 꽤나 진지하게 메모해두었던 것 같은데..지금 읽으니까~  뭐.. 그저 그런...~~ㅋㅋ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