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동안 못 보던 젊은 수녀님이 며칠 전부터 미사에 나오고 있었다. 얼핏 생김새가 말레이인도네시안 계통으로 보였다. ‘저 양반은 무슨 팔자를 타고 태어나서 이슬람이 대부분이 국가에서 가톨릭 수도자가 됐고 게다가 이 곳 로마까지 오게 됐을까’하고 맘 속 으로만 궁금해 하다가 오늘 아침에는 미사를 마치고 가벼운 인사를 건넸다.
“Sono Padre Choi, vengo dalla Corea. e Lei?”(저는 한국에서 온 최 신부라고 합니다. 당신은요?)
“Um... Non parlo l'italiano. Je parle français.(음... 이탈리아 말 못해요. 프랑스어합니다.)
잘 모르는 내가 들어도 그 수녀님의 프랑스어는 유창하게 느껴졌다. 아시아계 수녀님이 불어를 유창하게 한다는 사실에 좀 위축이 되기도 했지만 오로지 첫 인사를 무사히 마쳐야 한다는 일념으로 고등학교 때 배웠던 모든 프랑스어에 대한 기억을 되살려 다시 물었다.
“Je suis le père Choi, Coréen, D'où êtes-vous?”(저는 한국사람이고 최 신부라고 합니다. 당신은 어디에서 오셨나요?)
“Ahhh... Je suis de Madagascar.”(아! 저는 마다가스카르에서 왔습니다.)
아프리카 대륙의 동쪽 인도양에 떠 있는 섬나라 마다가스카르라는 곳은 그 곳에서 선교사로 일 했던 체사레 신부를 통해서 말로만 들었을 뿐 내 인생에 마다가스카르 사람을 직접 만나 말 한 마디라도 나눠 본 적은 오늘이 처음이었다. 그 곳 사람들의 대부분이 말레이인도네시안 계통 사람들이라더니 그 수녀님의 생김새 역시 영락없이 그 쪽 사람이었다.
호기심이 많은 나로서는 처음 만난 마다가스카르 출신 수녀님에게 뭔가를 더 묻고 대화를 나누고 싶었지만 안타깝게도 언어의 한계로 인해 그 수녀님과의 첫 인사는 그렇게 끝나고 말았다. 도대체 서로 알아들을 수가 있어야 대화가 나누고 대화를 통해서 상대방에 대한 이해가 비롯되는 것 아니겠는가. 몹시 답답했지만 바벨탑 사건 이후 이와 같은 답답함을 경험한 사람이 어디 나 뿐이겠나 싶어서 만국 공통어인 웃음으로 모든 것을 대신하고 터벅터벅 걸어 집에 돌아왔다.
하느님은 우리가 말하지 않아도 우리들 마음 속 깊은 곳에 숨어 있는 아주 작은 뜻 하나까지도 이미 알고 계신다. 그러나 우리는 하느님의 뜻을 알지 못한다.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채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라’는 기도를 매일 입버릇처럼 되풀이하고 있다. 물론 인간이 하느님의 뜻을 완전히 헤아릴 수도 없거니와 또 그렇지 못한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는 하느님의 뜻은 우리들의 이해와 상관없이 한 점, 한 획도 다르지 않게 이 땅 위에 이룩되리라는 것을 나는 믿는다.
하지만 하느님께서 오로지 나를 통해서, 또한 오로지 당신을 통해서 이룩하시고자 하시는 뜻은 나와 당신의 철저한 동의와 의탁을 통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 그런 하느님의 뜻에 대한 철저한 동의와 의탁은 나를 통해 이루고자 하시는 하느님의 뜻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비로소 가능하다. 이러한 ‘아버지의 뜻’에 대한 이해는 대화가 필수적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미 기도가 하느님과 대화를 나누는 방법이라는 것은 알고 있다. 하지만 역시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이야기 - 이 지상여정地上旅程 동안의 청탁이 대부분인 - 만 일방적으로 건네는데 그치고 있는 듯하다. 어떤 사람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싶은데 도대체 들리지 않는다고 하소연한다.
사실 하느님의 말씀은 이 글을 읽고 있는 지금 이 순간에도 생생하고 쩌렁쩌렁하게 들려온다. 다만 그 말씀을 듣고 해석하고 이해할 수 있는 귀가 없을 뿐이다. 기도하는 사람들은 인간과의 의사소통체계와는 전혀 다른 하느님과의 의사소통체계를 먼저 익혀야 한다. 그것은 언어적일 수도 있고 비언어적일 수도 있다. 그것은 가시적可視的일 수도 있고 비가시적非可視的일 수도 있다. 하느님께서 우리들 각자에게 어떤 방식으로 말씀을 하시든지 하느님과 대화를 나누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인간의 언어를 접어야만 한다. ‘침묵’이 하느님과의 대화를 위한 가장 첫걸음이라는 말이다.
하느님과 ‘말’을 나누기 위해서는 우선 ‘말’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말이 우습게 들릴 수도 있지만 적어도 내 경험에 의하면 이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기도하는 사람들, 하느님의 말씀을 듣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지금까지의 모든 방법들을 뒤로 하고 ‘아무 말 없이’, ‘아무 생각 없이’ 우선 하느님을 향해 앉아 있으라. 그렇게 앉아만 있어도 당신은 서서히 변화되는 당신의 삶을 체험하게 될 것이다. 제발 아무 말 없이 앉아 있으라. 제발 아무 바램 없이 앉아만 있으라.
“하느님께서는 너희의 머리카락까지도 낱낱이 다 세어 두셨다.”(루카12,7)
한국외방선교회 최강 스테파노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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