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 아침, 여느 때처럼 의식이 들자마자 습관적으로 희미한 자명종 불빛을 통해 숫자들을 가리키는 막대들이 어디만큼 와 있는지 확인한다. 어젯밤, 작은 막대가 숫자 2를 막 지났을 때 내일 아침은 침대에 누워있을 수 있을 때까지 누워있자는 생각을 하면서 잠자리에 들었었는데도 겨우 숫자 6을 조금 지났을 때 잠에서 깨어난 뒤에는 다시 잠을 청할 수가 없었다.
창문을 여니 아직 채 덥혀지지 않은 새벽 공기가 시원하게 몰려들어온다. 아니, 내가 밤새 뱉은 숨으로 탁해진 방 안의 공기가 시원하게 빠져나갔다고 하는 편이 좀 더 정확하겠다.
오늘 아침은 집 밖으로 미사를 드리러 나가지 않아도 된다. 잠깐 동안의 망설임 뒤에 오늘 미사는 오후에 혼자서 드리는 것이 좋겠다는 결정을 내리고 나니 갑자기 무슨 일을 먼저 해야 할지 혼란스러워졌다. 그래! 차를 먼저 한 잔 마시자. 찻물을 데우고 있던 중에 샤워를 먼저 한 뒤에 차를 마시면 더 상쾌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샤워를 하는 도중에는 문득 노래를 흥얼거리고 싶다는 생각이 스쳐지나갔지만 실제로 그럴 만큼 흥이 난 기분은 아니었다. 수건으로 젖은 몸을 감싸고 적당한 음악을 찾았다. 별 생각 없이 들어도 가사의 내용이 자연스럽게 전달되는 한국노래를 틀어놓고 보이차를 마셨다. 보이차 특유의 향은 아무래도 어렸을 적 흙 속에서 놀던 때 바로 그 흙의 냄새와 가장 흡사한 것 같다. ‘너의 뒤에서’라는 노래가 흘러나올 때는 내 귀를 덮고 있던 헤드폰을 벗겨내고 그냥 다른 소음들과 같이 섞여서 들려오는 노래를 듣는 객기를 부려보고 싶었다. 옆 방 에서 아직 자고 있을 수도 있는 신부를 위해 볼륨을 가장 작은 상태로 맞춰놓고......
오늘 또 어딘가에서 집회가 있는 것일까? 이른 아침부터 분주한 헬리콥터의 소음을 막 인지했을 때 갑자기 나는 이 도시를 떠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디로 가고 싶은지를 물었다. 바람소리에 어린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섞여 들려왔다. 나무의자와 아름답게 물든 저녁노을이 보였다. 그리고는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문득 며칠 전 길 위에서 주워 책상 위에 놓아두었던 유리구슬이 눈에 들어왔다. 30년 이라는 시간이 흘렀을 뿐인데 내게 다가오는 유리구슬의 느낌은 전혀 다르다는 것이 참 재밌다. 30년 전에는 저 유리구슬 하나를 더 가지기 위해 뙤약볕 밑에서 제법 긴 시간 동안 친구들과 치열한 싸움을 벌여야만 했었는데 지금은 몇 십 년이 지난 뒤 이 곳 로마의 길거리 위에서 저 놈을 발견했다는 것이 그저 신기할 뿐이었다. 우리가 만약 지금도 더 많은 유리구슬을 차지하기 위해 친구들과 싸우고 있는 중이라면 어떨까? 우습다. 하지만 유리구슬이 다른 무엇으로 바뀌었을 뿐 얼마간의 시간이 흐르고나면 아무 쓸모없기는 마찬가지인 것을 놓고 싸우는 그 우스운 꼴이 영락없는 현재의 ‘나’와 ‘너’의 모습이라면......
나는 더 이상 내 주머니에 유리구슬을 더 채우기 위해서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다. 같은 이유로 나는 친구들이 얼마나 많은 유리구슬을 가졌는지에 대해서도 관심이 없다. 나는 이제 그들이 가진 것들, 또는 가질 수 있는 것들에 대한 것 보다는 무슨 생각을 하면서 어떻게 하루를 살아가고 있는지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집중한다.
나는 바람소리에 어린 아이들의 천진난만한 웃음소리가 섞여 들려오는 곳, 낡은 나무의자에 앉아서 멋진 황혼을 바라볼 수 있는 곳으로 떠나고 싶다는 나의 마음을 내 친구들에게 들려주고 싶다. 또 내 친구들로부터는 그들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 또 어디로 흘러가기 원하는지를 듣고 싶다. 이제는 너와 내가 살아 있다는 마음의 이야기들을 나누고 싶다는 말이다.
나는 오늘 하루 이런 생각들을 하면서 보낸다. 나의 친구들이여! 당신들은 무슨 생각들을 하면서 오늘 하루를 보내고 있는가?
“무엇보다도 네 마음을 지켜라. 그것이 바로 복된 삶의 샘이다.”(잠언4,23)
한국외방선교회 최강 스테파노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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