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로원 아침 미사를 나가면서 신발 한 켤레를 챙겨들었다. 거의 삼년 동안 비가 오나 바람이 부나 줄기차게 신고 다녔던 신발인데 이제는 너무 낡아서 밑바닥이 세기 때문에 더 이상 신을 수가 없게 되었다. 너무 정이 든 신발을 도저히 내 손으로 버릴 수가 없어서 한참 동안 방 한 구석에 놓아두었었는데 이것도 불필요한 집착이다 싶어서 드디어 버리기로 결심을 한 것이다.
집 앞 쓰레기수거함을 지날 때 멀리서 과감하게 휙 던져버렸다. 신발들이 철제 쓰레기수거함 벽에 부딪히는 소리가 ‘쨍’하고 울려왔다. 양로원까지 걸어가는 동안 내내 후회가 밀려왔다. 삼년 동안 한 몸처럼 지냈던 놈들인데 이제는 낡아서 쓸모없게 됐다고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내팽개쳐버릴 일이 아니었다.
미사 중에 할머니들 한 분, 한 분의 손을 잡고 평화의 인사를 나누는데 오늘따라 할머니들의 신세가 더욱 처량하게 느껴졌다. 얼굴에는 주름이 쪼글쪼글, 이는 다 빠져버리고, 허리는 활처럼 굽은 데다, 보행 보조기구가 없으면 당신들 몸뚱이를 지탱할 힘도 남지 않은 두 다리로 힘겹게 서서 반갑게 인사를 주고받는 할머니들의 신세가 조금 전 버려진 낡은 신발과 별반 다를 바가 없어 보였다.
보통 때는 파견 예식 전에 간단한 우스갯소리 몇 마디로 할머니들이 활짝 웃는 모습을 보면서 미사를 마치는데 그 날은 어떻게든 의미 있는 감사와 위로의 인사를 건네 드리고 싶었다.
“한국에는 할머니들과 연세가 얼추 비슷한 제 어머니께서 혼자 살고 계시는데 저는 그 어머니를 그리워한다거나, 그 분의 건강을 염려한다거나 하는 생각은 잘 안하고 삽니다. 제게는 한 가지 굳은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 곳 로마에서 하느님께서 보내 주신 또 다른 수 십 분의 어머니들을 만났습니다. 만약 제가 정성을 다하여 그 어머니들을 잘 모시면 한국에 계신 제 어머니는 하느님께서 잘 보살펴 주실 것이라는 믿음이 바로 그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제 어머니입니다. 한 평생을 봉헌하여 저희들을 길러주신 어머니, 당신들 때문에 제가 지금 이 자리에 서 있습니다. 고맙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쑥 꺼진 두 눈에서 흘러내리는 눈물을 연신 닦아 내는 할머니들을 뒤로 하고 양로원을 빠져 나오는데 수녀님 한 분이 급하게 따라 나오셨다.
“혹시 오후에도 가끔씩 양로원에 들러줄 수 있나요? 아시다시피 여기 사는 할머니들은 너무 적적하고 외롭습니다. 하루 내내 외부에서 다녀가는 사람이라고는 신부님 외에는 거의 없어요. 빠드레 초이가 가끔씩이라도 오후에 들러서 할머니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 준다면 할머니들이 너무 좋아하실텐데......”
수녀님께 그러겠노라고 약속을 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다시 쓰레기수거함에 들렀다. 아무렇게나 버려져 있는 낡은 신발을 챙겨서 수거함 앞에 가지런히 놓아두었다. 그것이 삼년 동안 내 발을 감싼 채 한 몸처럼 세상을 돌아다녔던 신발에게 내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도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말에 ‘헌신짝 버리듯 하다’라는 말이 있다. 무엇인가를 요긴하게 쓰다가 그 쓸모가 다하면 아무렇지도 않게 버린다는 뜻으로 필요와 이익의 추구보다 사람의 기본적인 도리道理를 지키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가르침이 담겨있다. 여기서 쓸모의 유무에 따라서 ‘헌신짝’처럼 버려지는 것이 사람이라면 인간으로서의 도리 문제는 더욱 커진다.
‘사람을 버린다는 것’은 즉 그에게 향한 나의 관심을 버리는 것이다. 나의 관심 밖으로 철저히 버려진 사람은 이미 나에게는 죽은 것과 다름이 없다. 우리 중 누구도 결코 한 사람의 병약한 노인이나 배고픈 고아나 집 없이 떠도는 노숙자를 직접 내 손으로 버려본 적은 없다. 우리들은 단지 그들로 향한 우리들의 관심을 버릴 뿐이다. 그러나 우리들의 무관심으로 인해 그들은 아무 소리도 없이 조용히 죽어간다. 헌신짝처럼 버려진 채로 말이다.
“가난한 사람의 호소에 귀를 막으면 제가 울부짖을 때 들어줄 이 또한 없다.”(잠언2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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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외방선교회 최강 스테파노신부